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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내래 죽어도 가겠습네다> P4

LNCK 2023. 2. 2. 11:45

[오디오북] 최광 선교사의 탈북자 선교 실화 | - YouTube

 

◈도서 <내래 죽어도 가겠습네다> P4                      <지난 회 보기

◑9장. 자매 사역장을 시작하다. 

우리가 가는 길은 참 좋고 험하다. 
그러나 이 길을 걸어본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평안한 길임을 발견한다. 

중국에서 사역을 (7년 만에) 다시 일으키는 일은 쉽지 않았다. 
겨울이 오면, 여름에 그 많았던 동물들이 땅 속으로 숨어버린 것처럼 
어디에 가도 탈북자들을 만날 수 없었다. 

그래도 일단 사역장부터 만들기로 했다. 
그 사이에 폭발적으로 경제가 성장한 중국은, 물가가 많이 올라 있었다. 

집세도 많이 비싸졌다. 적당한 집을 찾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주님의 도우심으로 흑룡강성 하얼빈 시에서 
방 3개에, 화장실 2개가 달린 넓고 좋은 집을 구했다. 

이어 이육선생과 함께 중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탈북자들을 찾아다녔다. 
북한 형제들이 있을 만한 곳이면, 샅샅이 뒤지며 다니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북한 형제들과 인연이 있을 만한 사람이 있으면 
어디건 찾아가서 그들의 행방을 물었다. 

그러나 아무도 몰랐다. 분명 어디엔가 있지만, 도저히 만날 수가 없었다. 
모두 다 철저히 숨어서, 얼굴을 밖으로 내밀지 않았다. 

어떤 때는 분명히 북한 형제를 만났지만 
절대로 자기는 북한 사람이 아니라고 우기면서, 꼭꼭 숨어버렸다. 

우리는 은밀한 그림자들을 찾아다니는 것 같았다. 
그림자들은 말 없이 우리를 지켜보다가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면, 조용히 물러나 사라져버렸다. 

6개월을 찾아다녔지만, 우리는 한 명의 탈북자도 만날 수 없었다. 
함께 북한선교를 하기로 하고, 한국에서부터 따라왔던 6명의 동역자들 중에 
3명은 지쳐서 포기하고 되돌아갔다. 

사역장에는 3명의 한국 선교사와 이육선생만 남았다. 
'안 되는가? 정말 북한 선교는 다시 시작할 수 없는가?' 

힘들어 포기하고 싶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지워지지 않는 끈질긴 믿음이 나를 붙잡고 있었다. 

그것은 나에게 인내할 수 있게 하고, 버틸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어 주었다. 
나는 이 힘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역경 속에서 인내하고 견딜 수 있는 힘이 있다. 
이 보물 때문에, 시험을 넘고 약속의 삶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스스로 뜻을 세우고 길을 나선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이런 힘이 없기에 역경이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진다. 

주님의 뜻을 좇아가는 길에서, 
역경은, 믿음이 있는 자와 없는 자를 걸러내는 일종의 여과장치 이기도 했다. 
이 길에서 믿음은, 보이지 않는 힘이었다. 
그것은 언제나 오뚜기 속에 담겨 있는 무거운 추처럼 
넘어진 나를 일으켜 세워, 또다시 그 길을 계속 걸어가게 하는 힘이 되었다. 

▲동역자 중에 3~4명은 포기하고 떠나갔지만 
나는 혼자서라도 이 길을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백혜령 선생과 최영희 목사님은 끝까지 함께해 주었다. 
신실한 동역자들의 도움으로 나는 다시 힘을 얻었다. 

백선생은 7일 금식을 시작했다. 
북한 사람들 얼굴이라도 보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금식이 끝나고 나서는, 다시 5일간 아침 금식을 시작했다. 
연약한 여인의 몸으로, 그 어려운 금식을 견뎌내면서 기도하는 모습은 
정말 대단했다. 

평소에 알고 지내던 흑룡강성 가목사(자무쓰) 市의 목사의 전화가 왔다. 
'산동성 청도에서 두 자매님이 하얼빈으로 출발했어요. 
내일 저녁에 도착할 거예요.' 

6개월만에 찾고 찾던 북한 탈북자를 드디어 만날 수 있었다. 

사막을 헤매다가 목말라 죽기 직전에, 물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최목사와 백선생은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면서, 기쁨과 걱정이 마구 뒤섞이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또 파란만장한 사연들과 사건들이 시작 되겠구나.. 
과연 내가 그 힘든 길을 끝까지 견뎌낼 수 있을까?' 

그래도 기쁨이 더 컸다. 
우리는 임산부가 막 태어날 아기를 만날 준비를 하듯이 
두 자매들이 도착해서 살 수 있는 방이며, 침대며, 생활 도구들을 준비했다. 

그리고 하얼빈 역으로 마중 나갔다. 
서로 얼굴을 모르기에, 우리는 커다란 종이에 
'자실씨' 라는 이름을 크게 써서, 한 장씩 높이 들고 역에서 그들을 기다렸다. 

석자실 자매와 수영 자매, 또 수영 자매의 6살 난 딸 영미가 도착했다. 
석자실 자매는 54세의 아주머니였다. 

북한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함경북도 도청에서 회계사로 일을 했다. 
배급이 끊기자 양식을 해결하기 위해, 도청 창고에 있던 철근을 몰래 팔다가 
3년이라는 실형을 받자 중국으로 탈북했다. 

1남 2녀의 자식을 두었지만 
큰딸은 그보다 조금 앞서 중국으로 간 후 소식이 끊겼다. 

아들도 탈북하여 중국 청도에서 살고 있었다. 
탈북 여인들 대부분이 그렇듯, 자실 자매도 중국으로 탈북한 후
한족 남자에게 팔려갔다. 

6년 후 아들이 찾아왔다. 한족 남편은 6년간 함께 살아주고 일해 준 대가로 
자실 자매의 아들에게 차비를 하라고 고작 300 위안을 주었다. 

자실 자매는 격분했다. 한족 남편의 돈 욕심에 질려, 그곳을 도망쳐 나왔다. 
이번에는 산동성 청도에서 조선족 남자와 동거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생활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거기서 자실 자매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얼굴뼈가 함몰되고 
뼈가 보일만큼 살이 이마부터 턱까지 찢겨 벌어졌고, 다리도 부러졌다고 했다. 
병원에 입원했지만, 치료 도중에 보상금으로 나온 돈을 
조선족 남편이 가지고 도망갔다. 

중국 생활 10년에, 몸은 다 망가지고, 돈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었다. 
한국으로 보내 준다고 하는 사람을, 청도에서 만났지만 
그 사람이 조직해서 보내는 사람들이, 연속 두 번이나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북한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 불안해서 우리가 있는 곳으로 왔다. 

수영 자매는 42세의 아주머니 였다. 
수영 자매는 조선족 남편을 만나 살면서, 6살된 영미를 낳았다. 

남편과 상의하고 한국으로 오기 위해 
영미를 데리고 우리 사역장으로 왔다. 

우리는 기분이 들떠 있었다. 
그러나 만나자마자 두 자매들의 요구는 오로지 한 가지 뿐이었다. 

'한국 선생님, 우리는 한국에 가야 합니다. 3개월 후엔 꼭 한국에 가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여기 중국에서 살고 싶지도 않고, 살 수도 없습니다.' 

▲모든 탈북자에게 유일하고도 강력한 희망은, 한국으로 가는 것이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중국보다 임금도 더 주고 
탈북자들에게 합법적인 신분도 보장하고 
정착금과 임대아파트 까지 공급한다. 

그곳에 가면 풍족하고, 평안한, 아름다운 천국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많은 탈북자가 한국으로 왔다. 
이제는 2만명이 넘는다고 했다. (2023년은 3만5천명 가량)

그러나 정작 한국에서 한 두 해를 살아본 탈북자들은 
곧 한국에서의 삶이, 중국에서의 삶보다 더 어렵고 힘들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다. 

발전된 선진국들이 대개 다 그러하듯, 한국은 치열한 경쟁 사회이다.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들도 이 생존경쟁을 힘겨워 한다. 

경쟁에서 이긴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는 풍요로운 나라이지만 
그 외 나머지 사람들은 힘겨운 삶을 견뎌내야 한다. 

이런 한국 사회에서, 아무런 경쟁력도, 경험도, 인맥도, 돈도 없는 탈북자들이 
잘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결국 몇 년 살다가.. 자기들이 살 수 없는 땅이라는 것을 깨달은 탈북자들은 
한국을 떠나 또 다른 외국으로 간다. 한국보다 더 잘 사는 나라들로 간다.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독일과 같은 나라에 가서 
다시 탈북자의 신분으로 망명 신청을 해서 살아간다. 

'과연 그곳에서는 탈북자들이 편안이 살 수 있을까?' 없다!
더 선진화된 사회일수록 경쟁은 더욱 더 치열하다. 

거기에다 외국으로 가게 되면, 언어와 문화의 장벽까지 생겨나고 
그 나라 정부에서도 이들의 정착에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결국 자기들이 살 수 있는 땅은, 지구상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탈북자들은 절망한다. 자살하는 경우도 많았다. 

탈북자들에게는 북한이나, 중국이나, 한국이나... 
고통의 형태만 바뀔뿐, 여전히 고통스럽고 생존이 불가능한 나라들이다. 

그러면 이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탈북자들이 살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하나뿐이다. 

자기들은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라는 것과 
그들을 진정으로 도울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국가를 초월하고, 생존 문제를 초월해서 
전혀 다른 존재, 하나님의 자녀들로 살아가는 것을.. 나는 여태껏 지켜봐 왔다. 

많은 탈북자가, 한국 사회에 일반 시민으로 정착하는 일조차 실패했지만 
중국에서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 북한 형제들에게 
한국에서의 정착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생존 하기도 벅찬 한국에서, 대학 공부를 했고 
지금은 다들 자기 영역에서 영적 리더들로 활동하고 있다. 

그 외 다른 사람들도, 자기들이 맡은 영역에서 
어렵지 않게 모범시민으로 정착하고 있다. 

탈북자들이, 처음에는 정말 믿기 힘들어 하지만 
분명히 그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다. 

그것은 한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영접하고 따르는 길이다. 
이것은 말로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다. 
중국에서 성경을 배우면서 터득하는 삶의 진리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탈북자들이 
사는 방법을 터득하고 배우기 가장 좋은 곳은 
생존이 가장 불가능한 중국 땅이다. 

노예의 삶에서 탈출해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은, 같은 방법으로 광야로 데리고 나갔고 
그곳에서 그들이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많은 북한선생들이 이것을 배웠다. 
중국 공안들과 북한 보위부에 쫓겨 다니면서 
먹을 것이 없어서 금식하면서 배운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탈북자들은 이것을 배워야 산다. 
이것은 성경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삶의 진리이며 하나님의 비밀이다. 

▲나는 두 자매와 새벽 2시 까지 대화를 하면서 
한국에서 탈북자들의 삶을 이야기 해 주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답답하기만 했다. 
두 자매는 그냥 막무가내로 한국으로 가고 싶어 했다. 

'한국 선생이 뭐라고 해도, 우리는 한국으로 가야 합니다. 
한국으로 보내주십시오! 우리는 한국으로 가려고 여기로 왔습니다.' 

제가 말했다.
'1년만 공부해 보세요. 제가 꼭 책임지고 한국에 보내 드릴게요.' 

자매들은 '안 됩니다. 내일 잡혀가서 죽을지, 모레 잡혀가서 죽을지 모르는 게 
우리인데, 무슨 1년 같은 소리를 합니까? 우리는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합니다. 

어서 우리를 한국으로 보내 주십시오!' 

교통 사고로 다친 얼굴 때문에 인상이 험상궂은 자실 자매가 
막 흥분하고 화를 내면서까지 말을 하니, 분위기가 살벌했다.

말로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랜 대화를 통해서 결국 나는, 
이들과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것만 확인했다. 

이들과 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큰 벽이 있었다.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자매들도 그것을 느꼈는지, 서로 말 없이 침묵하기만 했다. 

'주여, 어떻게 해야 합니까? 좀 도와주세요! 제가 어찌 해야 합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 뿐이었다. 

한참 후에야 자실 자매가 침묵을 깨면서 물었다. 
'여기서 살면 식비는 하루에 얼마씩 줍니까?' 

내 마음속에서 뭔가 번쩍하고 스쳐 지나갔다. 
'이것이구나! 이들은 지금 한국 선교사를 믿지 못하고 있구나!' 

내가 다시 물었다. 
'거기서 살 때는 하루에 얼마나 받았어요?' 

나는 두 자매가 여기 오기 전에, 어떤 선교사와 함께 살았는지 전혀 모른다. 
그저 이미 또 다른 선교사를 거쳐서, 여기로 왔다는 것만 짐작하고 있었다.

두 자매가 눈을 반짝이며 같이 대답했다. 
'하루에 5 위안 받았습니다.' 

5위안이면 하루 살기에는 힘겨운 돈이었다.  *1위안 : 당시 180원 가량
이것보다는 더 받고 싶어 하는 간절한 마음들이 엿보였다. 

내가 다시 물었다. '하루에 20 위안 드리면 되나요?' 
두 자매의 눈이 커지더니, 자기들끼리 말했다. 
'이렇게 많이 주면, 우린 그 돈으로 시내 구경도 나가고, 옷도 사 입으면 좋겠다'

나는 두 자매와 함께 살면서, 그들에게 그 외 돈을 주지 않았다. 
그저 최영희 목사님과 백혜령 선생과 함께 매일매일 식사 준비를 하고 
필요한 것들을 가져다가 정성을 다해서 섬기기 시작했다. 

저들에게, 자신들이 돈으로 계산 될 수 없는 고귀한 존재들이라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우리에게는 이것 말고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도 그렇게 두자매 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10장, 탈북자 그들의 심정으로 

우리는 다시 다른 탈북자들을 찾아나섰다. 
여태까지는 조선족 전도사님 들이나, 목사님이나, 집사님들을 찾아서 
북한사람들의 행방을 물으면서 다녔지만, 이번에는 방법을 바꿨다. 

옛날에 서안에서 사역할 때, 우리를 추적해 왔던 북한 보위부 사람들의 방법을 
사용해 보기로 했다. 

우선 조선족 마을이나 가장 깊은 곳 외진 곳에 있는 마을로 
무작정 찾아갔다. 
기차를 타고 흑룡강성 계서鷄西 라는 작은 도시를 목표로 정하고 찾아갔다. 

일행이 있으면 숨어있는 탈북자들이 불안해 할 것 같아, 나 혼자서 떠났다. 
기차는 12시간을 달려 새벽 5시에 도착했다. 

봄이 문턱까지 찾아온 4월 이었지만, 북쪽지방 이어서 한 겨울처럼 추웠다. 
이른 아침이라 식당들도 문을 열지 않아서, 
목욕탕에 들어가 목욕을 하면서 기다렸다. 

'주님, 그저 정처 없이 발이 가는 대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 인간이 대책 없고 부족한 건, 주님이 더 잘 아시죠? 
그러니 주님이 이 발걸음을 인도해 주십시오 저는 그저 걸어 다녀 보겠습니다.' 

 

목욕을 하고 나오니, 버스가 다니기 시작했다. 
아무 버스나 무작정 타고, 버스가 가는 마지막 종착역까지 갔다. 

탈북자들도 나처럼, 이 나라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연고 없기는 마찬가지이니, 어디론가 도망을 갔다면 
이런 식으로 도망을 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종점에 내렸다. 작은 시내를 정처 없이 이리저리 걸어다녔다. 
문득 길가에 한글로 "대동강 랭면집"이라고 쓴 간판이 보였다. 

'그래 이곳에서도 조선족이 사는구나!' 
냉면집으로 들어가서, 이 지역에 조선족들이 사는 곳이 어딘지 물었다. 
두 곳 정도 알려주었다. 

세상에 제일 끝이라고 생각했던 그곳은, 끝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영평 이라는 곳을 찾아갔다. 

조금만 더 가면, 세상의 끝이 나와서 절벽 아래로 뚝 떨어질 것 같은 
외지고 외진 곳이었다. 거기 있는 조선족 교회를 찾아 갔다. 

막 수요예배를 마치고 사모님이, 몇몇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남편 전도사는 목단 강에 있는 한족 지도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러 가고 없었다. 

사모님은 이 교회에, 북한 사람 한 명이 출석하고 있다고 했다. 
'찾았다. 드디어 찾았다!' 

오랫동안 캄캄한 숲속을 길을 잃고 헤매다가, 작은 불빛을 만난 것 같았다. 
드디어 찾아냈다는 기쁨과 동시에 
희미한 안개 속을 향해 던진 돌이, 정통으로 과녁을 맞췄다는 기쁨으로 
나는 심장이 마구 뛰었다. 

'그래, 맞구나! 탈북자들도 역시 이런 방법으로 도망을 다니고 있었구나..' 
'내가 탈북자의 심정이 되어 보니, 그들이 가는 길이 보이기 시작하는구나' 

그 사모님으로 부터 밀산 이라고 하는 곳에 
탈북자들을 많이 돌보는 집사님에 대해서 소개 받았다. 

나는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고, 
2시간을 버스를 타고 더 멀리 밀산으로 달려갔다. 

도대체 이 중국이라는 나라는, 어디가 끝인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나무와 짐승들만 사는, 깊고 깊은 산 속에 
조선족들이 사는 동네가 몇 개 있었고, 조선족 교회들도 있었다. 

목사님을 만나 북한사람들을 찾았으나, 다 떠나고 한 명도 없다고 했다. 
나는 다른 동네로 갔다. 
이미 저녁이라 교회는 문을 닫고, 사람이 없었다. 

교회 옆에 사시는 할머니 집사님께 
'북한 사람들이 이곳에 얼마나 있느냐?'고 물었다. 

할머니 말씀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많이 돌보고 도와주었는데 
도와준 사람이 공안에 잡혀가고, 
어느 교회에서 누가 어떻게 도와주었는지를 다 이야기해서 
이곳 교회에서도 벌금을 많이 냈다'고 했다. 

그 후에도 탈북자들이 간간이 오기는 해도 
밥이나 먹이고 돌려 보낸다고 했다.

여기에 있으라고 해도, 공안들이 수시로 신분증 검사를 하고 다니니 
불안해서 다들 떠나가 버린다고 했다. 

할머니 집사님은, 다른 지역으로 떠나려고하는 나를 만류했다. 
'가지 마~ 가봐야 쓸데 없어. 어디 가나 마찬가지야!' 

▲나는 허전한 마음으로 돌아서다가 눈물이 나왔다. 
이 외진 세상의 끝자락도, 탈북자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여기에서까지 쫓겨 가야 한다면, 그들은 과연 어디로 갔을까?' 
아무리 상상해도 더 이상 그들이 갈 만한 곳이 짐작되지 않았다. 

나는 밤 차를 타고 다시 영평으로 돌아가서, 전도사님을 만났다. 
영평 조선족 교회에서 하룻밤을 쉬면서 
전도사님에게, 나의 절절한 마음을 설명했다. 

오랫동안 내 이야기를 묵묵히 듣기만 하던 전도사님은 
깊은 곳에 숨겨 두었던 보물을 꺼내 듯이 말했다. 

'내일 아침 여덟시에, 북한 자매 4명을 소개해 드릴게요.'
 
'형제 분들은 없나요?' 

'형제들이 여기서 어떻게 삽니까?' 
그나마 자매들은, 공안들이 어느 정도 눈을 감아 주니까 사는 거지 
형제들은 못 삽니다.' 

중국 공안들은, 북한 자매들을 잡아가기 싫어했다. 
중국인 남편들이 있는데다, 자매들이 낳은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자매 한 사람을 잡아가면, 한 가정이 몰락한다. 
그리고 잡아가는 순간도 몹시 처절했다. 

아이들이 실성을 하고, 남편들이 통곡 하다가 쓰러진다. 
공간들도 인간인지라, 북한 자매들은.. 알면서도 모른 척 해 버린다. 

자매들이라도 만날 수 있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는 다음 날, 4명의 북한 자매들을 만났다. 
최경욱 이영옥 박순실 조순덕 씨였다.  *가명

모두가 다 장애인 남편, 가난한 한족 남편들과 살고 있었고 아이들이 있었다. 
자매들은 가정과 아이들이 있기에, 사역장에서 성경공부를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사는 현장을 보니, 너무나도 가난했다. 
보지 않았다면 몰라도, 한번 본 이상 
어떤 방식으로든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마음과 의무가 동시에 생겨났다. 

나는 자매들에게 성경말씀을 암송하게 했다. 
성경암송을 한 것만큼,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돈으로 해 주었다. 

하나님을 모르는 그들에게, 말씀도 읽게 하고, 물질의 도움도 줄 수 있는 
괜찮은 방법이라는 생각이었다. 

북한 자매들도,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생겨서 좋아했다. 
자매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고, 예배를 드렸다. 

말씀의 은혜를 받아서 좋아하는 것인지, 
돈을 벌 수 있어서 좋아하는 것인지 딱히 알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다들 좋아했다. 

▲나는 또다시 정처없이 떠났다. 
탈북자들을 찾기 위해서, 나의 몸도 마음도 철저히 탈북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심정으로, 나도 찾음의 길이 아닌, 도망의 길을 떠났다. 
그렇게 어딘가에 있을 탈북자들을 찾아 떠났다. 

여태까지 나는 탈북자들을 도와주는 사람의 신분으로 
탈북자들을 찾아 다녔기에, 
내 눈에는 탈북자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어쩌다가 탈북자들을 만났다고 해도, 내가 만난 것은, 
탈북자들의 외면적인 가난함과 무지함과 절박함 밖에 보이지 않았다. 

'탈북자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탈북자와 같은 마음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탈북자들이 가는 도망의 길을 걸으면서야 깨달았다. 

그 어디에 갈 곳도, 있을 것도 없는 사람들... 
말도 통하지 않고 모든 것이 낯선 남의 나라... 
아무런 보호도, 인연도 없지만 

계속해서 어디론가 살 수 있는 곳을 찾아가야만 하는 사람들, 
공안들과 북한 보위부가 올 수 없는 곳, 안전한 곳을 찾아야 하는 사람들, 

거기에다가 어떤 식으로라도 돈을 벌어서 
북한에서 굶주리고 있는 가족들에게 돈을 보내야만 하는 절박한 마음, 

이 모든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탈북자들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불가능한 일들 뿐이었다. 

첩첩산중 가로막힌 깊은 산속을 헤치고 또 헤치면서 
길이 없는 곳에서 살 길을 찾아야만 하는 탈북자들의 마음을 
나는 이 길을 걸으면서 느낄 수가 있었다. 

주님이 왜 이 길을 가게 하시는지, 이 길을 걸으면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이 길에서 탈북자를 만난 것이다. 

눈 앞에 탈북자들이 그렇게 많을 때는 정작 만나지 못했던 
탈북자들의 진실한 마음을 
이 길을 걸으면서야, 비로소 내 마음이 맛난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그 곳에서, 탈북자들 보다는 나은 처지였다. 
돈도 얼마 있고, 공안을 만나도 북한으로 끌려 가지도 않는다. 

그러나 마음은 고통스러웠고 슬펐다. 
내 속에 '탈북자의 마음'이 들어오자, 하염없이 눈물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 눈물 속에서 비로소 나는, 탈북자들의 마음 속에서 
그들과 함께 울고 계시는 주님의 마음을 만졌다. 

'주님, 오랫동안 찾던 것을 만났는데, 왜 이렇게 슬픕니까? 
왜 이렇게 고통스럽나요?' 

서안에서 사역할 때, 
사역장에 적응하지 못해서, 연변으로 다시 떠나보내는 탈북자들 때문에 
권능선생이 왜 그렇게 마음 아파 했는지... 
나는 이 길에서 느끼고 이해하게 되었다. 

이 길은 나에게 '탈북자'라는.. 
늘 내 옆에 있었던 전혀 다른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여정이었다. 

이 길은 나에게, '탈북자들의 마음' 뿐만 아니라 
탈북자들이 있는 비밀의 장소들을 열어주었다. 

▲드디어 위로의 문이 열렸다. 
이때부터 나는 탈북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내가 탈북자의 심정으로 도망가는 곳곳에는, 탈북자들이 있었다. 
하얼빈 시내의 조선족 마을에서, 순실자매와 영숙자매를 만났다. 

영숙자매는 널판으로 대충 지어놓은 창고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 창고도 한 달에 120 위안을 주어야하는 셋집이었다. 

귀한 손님이 온다고 불을 많이 때서 온돌은 뜨거웠다. 
그러나 조금 앉아 있으니 들어오는 바람 때문에 코가 시렸다. 

높은 천장에 희미한 형광등은, 글을 읽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어두웠다. 
여섯 살 난 딸은 공부를 잘 한다고 자랑했다. 

딸은 책상 대신에, 나무판을 무릎 위에 놓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영숙자매는 35세 였고, 고향이 평양 주변이라고 말했다. 
영숙자매는 탈북한 후 공안에 체포되어 북송되었다가 다시 중국으로 넘었다. 

그리고 다시 팔려서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중국인 남편은 얼핏 보기에는 건강한 사람 같았으나 
가슴뼈가 튀어나와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마음은 착한 사람이라고 했다.

영숙자매는 동네에 80세가 넘는 노부부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을 해서 
새 가족의 생계와, 딸의 공부를 시키고 있었다. 

영숙 자매는 동네 사람 누구와도 교제를 하지 않았다. 
일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집에서 책을 보면서 지냈다. 

괜히 다른 사람을 만나면, 금방 중국어를 모르는 여자라는 것이 들키게 되고 
또 심통 사나운 누군가가 고발하면 
남편과 아이를 두고 다시 북송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10년째 영숙자매는, 이곳에 숨어서 움츠리고 살고 있었다. 
눈물이 나와서 도저히 그의 말을 계속 들어 줄 수가 없었다. 

다시 흑룡강성 치타이 市 벌리 라는 곳으로 가서 
이미자 김정화 오정화 자매를 만나, 그들도 함께 성경암송을 하기로 했다. 

김정화 자매는 사역장으로 가서 성경통독을 하기로 했다. 

이어 오상市, 하얼빈市, 번리, 가목사市, 목단강市, 계서, 영평, 밀산 
쌍악산, 심양 市 등 각 지역마다 돌아다니면서 계속해서 북한 자매들을 만났다. 

 

30명의 북한 자매들을 만나 성경 암송 반을 만들었다. 
그 후부터는 한 달에 한 번씩 그들이 사는 곳을 순회하면서 
성경을 암송하는 것만큼 돈을 주고, 말씀을 전했다. 

혼자서 사는 북한 자매들도 있었다. 
정옥자매는 고향이 회령이었다. 

남편과 10살 아들을 두고 탈북했다. 중국에 와서는 친척집에서 살았다. 
하지만 다른 탈북자들보다 별로 나은 것이 없었다. 

아무리 친척이라고 해도, 중국인이 탈북자들을 도와주다가 들키게 되면 
벌금으로 큰 돈을 내야 하고, 잘못하면 감옥까지 가야한다. 

친척들도 탈북자들을 꺼리고, 
탈북자들도 친척들의 도움을 별로 받고 싶어 하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친척이 없기 때문이다. 

정옥 자매도 친척 집을 떠나, 사역장으로 가서 공부하고 싶어 했다. 
나는 같이 식사를 하면서 물었다. 
'교회 가 본 일이 있나요?' '없습니다'
'성경을 읽은 적은 있나요?' '없습니다' 

'사역장에 가게 되면, 하루종일 성경을 읽고 기도해야 하는데 할 수 있나요?' 
'자신있습니다. 선교사 선생님!'

친척 집에서 눈치밥 먹으면서 살아가는 정옥자매는 
이것저것 가릴 형편이 되지 못했다. 

우리 사역장이 어떤 곳인지 중요하지도 않았다. 
그저 친척집만 떠나고 싶어 했다. 

그러면 먼저 저하고 1년 정도 성경공부를 같이 해요. 
그다음 한국으로 가고 싶다면, 한국으로 데려다 줄게요. 

자실자매와 수영자매처럼, 정옥자매도 
성경공부하고 1년 후 한국으로 데려다준다는 나의 약속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별로 좋아하는 기색도 없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나는 결혼하지 않고, 가족이 없는 자매들은 사역장으로 데리고 왔다. 
자실자매와 수영자매가 있는 하얼빈市 사역장에 
정옥, 드보라, 찬양, 사랑 자매가 들어왔고 
그 후부터 주님은 사역장에 북한자매들을 계속해서 보내주시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혜, 은혜, 기쁨 등등 많은 자매들이 사역장으로 들어왔다. 
사역자에 새로운 자매들이 들어 오고 나서부터,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정옥자매는 사역장이 어떤 곳인지 아무것도 모르고 무턱대고 왔지만 
며칠을 지내 보더니 좋아했다. 

특히 '너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 라는 축복송을 부르면서 
서로 축복해 줄 때면, 너무 좋아 울고 웃으면서 행복한 시간들을 보냈다. 

북한 자매들은, 처음으로 인간의 삶을 만나 느끼고 있었다. 


◑11장, 어둠속 눈 먼 이들

'이 길을 가면 뭘 만나니?' 
'말해 봐 야 넌 믿지 못해, 그냥 너도 와서 한번 봐! 
그러면 너도 이 길을 가게 될 거야!' 

수영자매가 떠났다. 6살된 딸 영미 때문이었다. 
통독시간에, 아이가 떠들고 장난치면 방해된다고 
어른들이 몇 번 참지 못하고 꾸중을 한 것이다. 

중국에서 누군가로부터 동정도, 따뜻한 손길도 받아 보지 못했던 수영자매와 
그의 딸은, 사람들의 눈총이라도 한번 받으면 
뼛속부터 북받쳐 오르는 설움 때문인지.. 과잉반응을 했다. 

나도 아이들 때문에 자주 울어 보았기에 
꾸중한 사람들의 입장도 이해가 되었고 
수영자매 마음도 이해되어.. 딱히 할 말도 없었다. 

우리가 너무 섭섭해하자, 수영자매도 미안한지 변명을 했다. 
'가서 아이를 할머니에게 맡기고 돌아올게요.' 

우리는 함께 울면서 찬송을 부르고 헤어졌다. 
역에서 그를 배웅해 주면서 말했다. 

'할머니에게 가서, 유치원 가게 되면, 그 경비는 우리가 부담할게요.' 

수영 자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머리를 숙이고 떠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설움이 복받쳐 올랐다. 
누구를 향해서, 어디서 인지도 모르는 설움이 말이다. 

▲우리는 매끼 풍성하게 먹었다. 
돈이 없어도 먹는 것만큼 풍성하게 먹었다. 

배고픔 때문에 설움이 많은 이들인 데다가 
몸들도 많이 약하기에 잘 먹어야 했다. 

이것저것 평소에 먹고 싶은 것들을 실컷 먹어 보던 북한 자매들이 말했다. 
'선생님, 개고기 먹고 싶습니다. 개 한 마리 잡아 먹읍시다.' 

나는 흔쾌히 동의했다. 
늘 경계하고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이 
먹고 싶은 것을 마음 놓고 주문까지 하는 것을 보니 
이제 그들이 사역장에 마음을 붙이는 것 같았다. 

나는 즐겁게 대답했다. '먹읍시다. 이왕이면 큰 놈 한 마리 사서 먹읍시다.' 
그러나 개고기 때문에 자실자매와 정옥자매가 한바탕 싸웠다. 

두 사람이 알고 있는 조리법이 서로 달랐다. 
서로 자기가 알고 있는 요리법이 옳은 것이라고 우기고 싸우더니 
끝내는 심술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 개고기가 사람 먹는 고기 맞나? 이거 맛 없어서 못 먹겠습니다. 
다 내다 버리시오. 우리는 안 먹습니다!'

마음이 상한 백해령 선생이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 
'아니, 두 분이 먹고 싶다고 해서 사 왔잖아요?'
두 사람의 전쟁이, 세 사람의 전쟁이 되었다. 

내가 볼 때는 이렇게 해도 좋고, 저렇게 해도 다 좋은데 
서로 고집을 부렸다.

북한사람들은, 자매들이나 형제들이나, 다 전투적이고 공격적이었다. 
북한에서 서로 비판하고 의심하고, 
남을 세워 주기보다는 끌어내리는 생활 습관이 되어서 그런 것 같았다. 

자실자매는 늘 비꼬고, 심술을 부렸다. 
'선생님, 내 나이가 이제 60인데, 무슨 공부를 하라는 겁니까? 
우리가 애입니까? 맨날 칭찬만 하고, 어루기만 하고 왜 그럽니까? 
교통사고로 부러진 내 다리는 한국에 가야만 고칠 수 있습니다. 
이 쓸데없는 공부 다 집어치우고, 한국에나 빨리 보내 주십시오!' 

자실자매가 험한 얼굴로 화를 내고 비꼬면 
정말 무섭기도 하고, 사람 속을 뒤집어 놓았다. 

아직 북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 본 경험이 없었던 백혜령 선생은 
늘 상처받고 엉엉 울면서 기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통통하던 정옥자매가가 갑자기 배를 끌어안고 쓰러졌다. 
식은땀을 비오듯 틀리며 고통스러워했다. 

급히 하얼빈 대학병원에 가 보니, 요도결석 이라고 했다. 
하지만 정옥 자매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사역자의 가지고 있는 돈을 몽땅 털어도, 수술비가 부족했다. 
고통스러워하는 정옥 자매를 가만히 앉아서 보기만 해야 하니, 무척 힘들었다. 

우리는 함께 기도했다. 모두가 정옥자매의 몸에 손을 얹고 절절하게 기도했다. 
백선생이 정옥자매의 요도결석을 없애 달라고, 7일 금식을 작성하고 시작했다. 
'아니, 네가 밥을 안 먹으면 내 병이 낫는다고?' 
정옥자매는 얼굴을 찌푸리고 신경질을 불었다. 

'아파 죽겠는데 너까지 왜 사람 신경 쓰게 만드니? 그만둬!' 
정옥 자매는 '기도하면 병이 낫는다'는 생소한 주장에 
믿음을 전혀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병을 위한 기도를 시작하고 나서부터, 정옥자매는 자주 울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울었고, 기도하면서도 울었다. 

그러다가 자신도 7일 금식을 시작했다. 
정옥자매의 수술비를 마련 하기 위해, 나는 서둘러 한국으로 왔다. 

자매들의 기도로, 정옥자매의 수술비는 쉽게 마련되었다. 
대구성덕교회에서, 정옥자매 소식을 듣고 선뜻 큰 돈을 헌금 해 주셨다. 

사역비는 전혀 모금 하지 못했지만, 정옥자매의 수술비가 마련되자 
나는 서둘러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 

사역장에 도착하니 백혜령 선생이 기쁨과 확신에 넘쳐 말했다. 
'선생님, 정옥자매님의 요도결석을 주님께서 치료해 주셨어요.'
 
주님이 수술비를 주셨으니, 수술을 통해서 치료하신다고 믿고 있었던 나는 
반신반의했다. 

정옥자매도 완전히 확신하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통증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일단 수술비가 마련되었으니, 정옥자매를 데리고 
다시 하얼빈 대학병원으로 갔다. 

 

수술하기 위해 초음파 검사를 해보니 
요도에 있던 2센티미터의 결석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신장의 0.5밀리 크기의 결석들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0.3 밀리의 결석 하나만 남아 있었다. 

의사가 믿기 힘든지 말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습니까? 
어떻게 수술도 하지 않고 돌이 없어질 수 있습니까? 
믿지 못 하겠습니다. 다시 엑스레이를 촬영해 봅시다.' 

엑스레이로 찍어도 보았지만, 여러 개의 결석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계란에서 뼈를 찾고 싶은 마음으로, 사진을 오래도록 들여다보던 의사가 말했다. 

'0.3 MM 짜리 결석은, 물만 많이 마시면 저절로 빠져나갈 겁니다. 
수술할 필요는 없습니다'

정옥자매는 기적의 치유를 경험하고, 기뻐뛰며 찬송하고 춤추었다. 
사역장 식구들 모두 다 즐거워하고, 춤추며, 찬송하며, 감사하기 시작했다. 

사역장은 천국이었다. 그러나 그 기쁨은 며칠 가지 못했다. 
대부분 초신자들이 그러하듯, 정옥자매는 이 치유가 
정말 하나님의 기적인지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운동을 열심히 해서, 혹은 환경이 좋아져서 없어지지 않았는가? 
하는 의혹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랬다. 기적 만으로는 믿음을 만들지 못 했다. 

▲우리가 사는 하얼빈에서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가 열렸다. 
국제 대회 때문에, 중국 공안들이 하얼빈 시내를 이 잡듯이 뒤지면서 
위법자들을 단속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둘러 가목사 시로 피신을 갔다. 
그곳에서 한국에서 온 선교사님의 집회에 1주일간 참석했다. 

그 선교사는 정옥자매에게 돈을 주면서 
자매들을 당장 한국으로 데려다 줄 테니, 자기에게로 오라고 했다. 

한국으로 당장 데려다준다는 말에, 정옥자매와 자실자매는 마음이 흔들렸다. 
두 자매는 말도 없이 우리를 떠나, 그 선교사를 따라갔다. 

같은 사역자로서 이해하기 힘든 행동으로.. 나도 힘들었지만 
나보다는 최목사와 백선생이 많이 힘들어 했다. 

충격을 감당하기 힘들었는지, 백선생은 한국에 잠시 회복하러 떠났다. 
며칠 후 자실자매는 엉엉 울면서 다시 돌아왔다. 

그 선교사가 정옥자매만 받고, 자실자매는 너무 못생겼는지 쫓아버렸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더 마음이 아팠다. 
자실자매는 큰 죄인처럼 울면서 용서를 빌었다. 

나는 그가 조금도 밉지 않고 오히려 사랑스러웠다. 
보통은 배신감에 분노 하겠지만 
그들의 마음을 아는 나로서는, 모든 것이 당연한 일로 여겨지고 
미워할 이유가 없었다. 

그저 저들이 언젠가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되면 
나의 진심도 알게 된다.. 는 것을 믿고 바랄 뿐이었다. 

정옥자매는 한국으로 떠나지도 못하고, 중국공안에 체포되어 북송되었다. 

오랫동안 사람을 믿을 수 없는 사회에서 살아온 북한 사람들은 
누군가를 믿는 일을 많이 힘들어 했다. 

결국 정옥자매는, 1년 후 한국으로 데려다준다는 나의 약속을 믿지 못해 
생명의 길을 잃었다. 

저들은, 더 이상 아무것도 믿지 못하는 무서운 병에 걸린 것만 같았다. 
오로지 자기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싶어 했다. 

그렇게 북한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더욱 더 눈 먼 사람이 되어 있었다. 


◑12장. 믿음의 사람은 거듭난 석자실 선생  (*최자실 이름에서 따온 별명)

'우리가 좀 이상해진 것 같아..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데 왜 이렇게 만족하지?' 
'하나님의 아들을 가졌는데, 더 이상 가질 것이 뭐가 있겠니?' 

기적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만들지 못한다. 
성경에서도 그랬고, 오늘날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도 그렇다. 

하나님도 우리가 믿기를 바라셔서, 기적의 힘으로 병을 고쳐 주기보다는 
우리의 간구와, 그분의 긍휼 함으로 고쳐 주시는 것 같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나타나는 신령한 능력이다. 

정옥자매의 요도결석 치유는, 분명한 하나님의 기적이었지만 
정옥자매는 믿지 못 했다. 

그러나 옆에서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자실자매는 
이 기적이 분명한 하나님의 치유라는 것을 확신했다. 

역시 말씀을 많이 읽은 사람의 눈은, 다른 것을 보기 시작했다. 
하나님으로부터 정말 큰 사랑,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은 
기적 보다는, 먼저 말씀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 먼저 생긴다. 

그리고 그 믿음에 의해, 기적은 뒤따라온다. 
믿음의 열매가 기적이지, 기적의 열매가 믿음이 아니었다. 

자실자매는, 자신의 다리도, 기도를 통해서 고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처음 사역장에 올 때부터, 다리 뼈가 부러져 뼈에 철심을 박았던 자실자매는 
다리를 구부리지도 못 했고, 평소에도 많이 고통스러워했다. 

다리에 박은 철심은 피부밖으로 약 1센티 가량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놀랍게도 자실자매는, 이 튀어나온 철심이 없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자실자매는 기도하면서, 말씀도 열심히 배워 나가기 시작했다. 
사람은 말씀을 이해하고 배운 것만큼 변화되고 성장한다. 
이것이 말씀이 가지고 있는 신비한 능력이고 힘이다.   

자실자매는 기도하면서, 환상과 꿈과 음성을 자주 경험하기 시작했다. 
자실자매의 기적 같은 믿음은, 현실이 되기 시작했다. 

얼마 후 수술도 하지 않았는데 1센티 정도 튀어나온 철심이 사라지고 
무릎 관절이 정상인처럼 되었다. 
구부리지도 못했던 다리로, 양반다리를 하고 앉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힘 있게 뛰어다니고, 농구 시합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은 다리만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얼굴까지 치료해 주셨다. 
교통사고로 눈썹 위에서부터 입 옆에까지 길게 찢어져 보기 흉했던 상처도 
마치 성형수술을 몇 번 한 사람처럼 깨끗해졌다. 

정옥자매의 요도결석이 사라졌을 때는, 반신반의하던 다른 자매들도 
이것을 본 후부터는 '하나님의 기적 같은 은혜로 치유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이후부터 우리 사역장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병이 낫는 기적들이 
자주 일어나기 시작했다. 

자실 자매는 변화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하나님 이야기를 하면 비웃기만 
하던 그가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 갔다. 

내가 사역장이 없는 동안, 사랑자매가 배가 아파서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땀으로 목욕을 하기 시작했다. 모든 자매가 더이상 의심 하지 않고 
사랑자매 몸에 손을 얹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저녁부터 시작해서 새벽 4시 까지 기도하고 찬송했지만 
사랑자매는 계속 고통스러워했다. 

나는 전화를 받고 아침에 사역장에 달려와 보니 
모든 자매가 다.사랑 자매처럼 지쳐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자매들과 함께, 사랑자매의 배에 손을 얹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확신을 주셨다. 

우리는 함께 예수의 이름으로 선포하고, 고통과 병에게 떠날것을 명령하면서 
계속 기도 모임을 가졌다. 

치유는 본인의 믿음이 절대적이다. 
나는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랑자매를 일으켰다. 

'아프다는 생각을 버리세요. 그 생각에 사로잡히지 마세요. 
속지 마세요. 건강하다고 생각하세요.' 

이틀 동안 아파서 땀으로 목욕을 하던 사람 자매는, 거짓말처럼 나아버렸다. 
다른 자매들은 좋아서 난리를 쳤지만 
정작 본인인 사랑자매는, 자기가 정말 아팠던 적이 있냐고 물을 정도였다. 
꼭 마치 꿈을 꾼 것 같다고 했다.

처음으로 '믿음'이라는 이 생소한 영역에 손을 내민 북한 자매들의 기도에 
하나님은 정말 아름답게 응답해 주셨다. 

이때부터 자매들은, 예수님의 이름에는 병을 고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완전히 확신했다. 

하나님은 자실자매에게 은혜를 주시기 시작 했다. 
성경을 수십 번을 읽으면서, 성경이 어떤 책이라는 것을 이해한 자실자매는 
말씀을 깊이 있게 깨닫고 체험해 갔다. 

자실자매는 성경 읽기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밤이나 낮이나 눈만 뜨면 성경을 읽었다. 

그러다 갑자기 눈이 전혀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눈을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 그의 눈은 닫혀 버렸다. 

괴로워하던 자실 자매는, 하나님께 울면서 기도드렸다. 
'하나님, 나를 북한 선교사로 쓰시려면, 말씀도 많이 읽어야 하고 
신앙 서적들도 많이 읽어야 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나는 이제 어떻게 합니까? 
좀 도와주세요!' 

새벽까지 기도하다 잠든 자실 자매에게, 하나님은 음성으로 말씀하여 주셨다. 
'회개하라! 회개하면 네 소원을 들어 주리라!' 

자실자매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었다. 
무엇을 회개하라고 하시는지 짐작이 갔다. 

자실자매는 모든 것을 회개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사역장에 있으면서 선생들을 공격하고 
자매들끼리 미워하고 싸우던 것들.. 

한 때 사역장을 버리고 도망갔던 일들, 
공부하면서도 돈 벌러 갈 생각만 했던 것들, 
교통사고 보상금을 가지고 도망간 남편을 저주했던 일들을 회개하기 시작했다. 
분노와 미움으로 가득 찬 자기의 지난날을 뒤돌아보며 잘못을 고백했다. 
절절하게 울면서, 회개하기 시작했다. 

정말 병을 고쳐 주시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참된 회개의 은혜였다. 

참 은혜 뒤에는 치유의 기적도 함께 따라온다. 
다음 날 아침 기도 모임 중에, 자실 자매의 눈이 열렸다. 

바로 눈앞에 책도 일지 못하는 사람이, 
저만치 떨어져 있는 다른 사람의 책 속, 깨알같은 글자들까지 
안경도 없이 환하게 보였다. 

자실자매는 눈만 고쳐진 것이 아니었다. 
갑자기 마음과 온 몸이 너무 가벼워, 깃털처럼 둥둥 떠 올라갈 것만 같다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죄사함의 은혜, 용서받은 자의 느낌이었다. 
갑자기 밀려온, 여태껏 살면서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이 큰 행복과 환희와 
기쁨에.. 자실자매는 발뒤꿈치를 들고 춤을 추고, 노래하기 시작했다. 

다리에 철심을 박아 잘 걷지도 못 하던 사람이 
무용수처럼 발레를 추었다. 

'선생님, 천국이 하늘에 있는 줄 알았더니, 여기가 천국입니다. 
나는 지금 천국에 왔습니다. 
이제 보니까 나를 여기로 데리고 오려고,
하나님은 그 먼 길을 걷게 하고, 그 많은 고통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고맙습니다. 정말 하나님 고맙습니다!' 

그 후부터 자실자매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처음 사역장이 들어올 때는, 무턱대고 두 달 안에 한국으로 가야 한다고 
떼를 쓰던 사람이 
앞으로 5년 동안 한국으로 가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바로 북한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방언으로 기도하고, 꿈과 환상도 자주 보았다. 

오전 기도모임이 끝나고, 덤덤하게 앉아 있던 자실자매가 불쑥 말했다. 
'선생님, 지금까지는 내가 선생님께 관심과 사랑을 받으려고 했지만 
이제는 제가 선생님을 섬기고, 사랑하고 축복해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순간 나는 바보처럼 눈물이 왈칵 올라왔다. 
자실자매도 울었고 나도 울었다. 
두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서로 만나는 순간이었다. 

나는 자실자매를 사역장의 팀장으로 세웠다. 
자매는 설교를 힘들어 하기에, Q&A 주석을 가져다 주었더니 
그 후부터는 서툴지만 설교도 담대하게 했다. 안정감이 생겼고 배짱이 좋았다. 
내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북한자매들을 사역장에 받겠다고 하니 
100명도 좋으니 데리고 오라고 호쾌하게 말했다. 

자실자매가 팀장으로 세워진 후
하나님은 약속대로 그의 소원을 들어 주셨다. 
아들 성철이를 한국어로 보내 주신 것이다. 

▲어머님과 아내가 나의 사역을 도우려고 중국 하얼빈으로 들어왔다. 
어머님은 7년 전 서안에서 북한 사람들에게 김치 담가 주고, 된장 담가 주고 
사역장마다 반찬 만들어 주면서, 그들의 할머니가 되어 
이야기 나누고, 은혜 나누던 때가, 평생에서 가장 행복했다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내가 다시 중국 하얼빈에 들어와 북한사역을 재개하자 
어머니는 그동안 어렵게 정착한 경산의 살림을 정리하고 중국으로 들어오셨다. 

어머니는 중국으로 들어오면 
그동안 정부에서 나오던 기초 생계비가 끊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들어가서 아예 순교하면 된다고 하시면서 따라 오셨다. 

아내는 한국에서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막내 명현이 일로 
차일피일 미루다가.. 어머님과 함께 들어왔다. 

사역장에 어머님과 아내가 들어와, 북한 자매들과 함께 생활하자 
자매들의 생활이 많이 달라졌다. 

서로 시기하고 다투고 싸우던 자매들이, 권사님과 함께 살기 시작하자 
서로 화해하고 안정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권사님(어머니)이 갖고 있는 인자함과 부드러움의 영적 능력은 
자매들의 마음에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따뜻한 세계를 느끼게 해주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