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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4:44~53 말씀을 믿고 돌아가다

LNCK 2023. 2. 3. 15:24


◈말씀을 믿고 돌아가다            요4:44~53           2023.01.29. 요약, 정리


◑도입 / 오히려 사마리아에서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기적 7가지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기적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에요. 
기적을 보여주심을 통해, 자기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기적으로 사람을 불러 모으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사도요한은 예수님 기적을 '표적'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Sign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니 정확히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고자 하는 애틋한 마음이에요. 

또한 하나님께는 기적이 상식입니다. 
우리한테는 이게 뭐 색다른 일로 보이지만 
하나님께 이게 무슨 어려운 일이고, 특별한 일이겠어요? 

본문 요한복음에 두 번째 소개되는 표적을 통해서 
"진정한 믿음이란 뭐냐?" 
그걸 한번 살펴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요4:43~45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이틀이 지났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땅에서 이틀을 보내셨다는 얘기죠. 

사마리아 땅에서 이틀간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거기서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나가지고 
그 여인이 '내가 메시야이신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증언하는 바람에  :29 
그 땅에서 이틀 동안 부흥회를 하신 것이죠. 말씀 집회를 하신 것이에요. 

그들은 기적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 땅 사람들은 오히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궁금해했고 
예수님께 '당신이 누구인지를 증거할 표적을 보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통해서 
그 말씀으로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야인 줄 알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따라서 예수님을 '메시야-그리스도'로 최초로 고백한 사람들은  *요한복음에서
유대인이 아니에요.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제자들도 아닙니다. 

뜻밖에도 우리가 상상도 못했던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입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4:28~29

'저런 사람들이 믿을 수 있겠나?' 하는 사람들이죠.
그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습니다.

41~42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 Saviour신 줄 앎이니라'

얼마나 흥분되는 얘기입니까. 예수님을 처음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말씀을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어요. 표적이 아니라요.

저는 왜 사도요한이 이걸 (사마리아 성에서의 역사) 이렇게 간단히 기술하고 
넘어갔는지 궁금해요. 혼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좀 셈이 났나, 사마리아인들이 너무 잘 믿어서..' 
아니 거기서 이틀 동안 있었던 일을, 좀 소상히 기록할 수 있지 않습니까? 

아니면 조금 예수님께서 전하셨던 말씀이라도 
압축 요약해서 몇 줄이라도 성경에 적어놨으면 속이 좀 풀리겠는데...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을 하셨는지.. (유대인들은 거의 안 믿는데) 
그 사마리아 성 사람들이 다 믿게 되었느냐는 거에요. 

물론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복음을 선포하셨을 것입니다. 
어쨌건 그들은 믿었어요. 

거기서 이틀간 말씀을 전하고 나서, 
믿음이 그들 마음 속에 자리잡는 것을 보시고 흐뭇한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발걸음을 돌릴 때.. 오히려 발걸음이 무거웠을거에요. 

'내가 가는 곳(유대, 갈릴리)은 나를 온전히 믿지 않는 땅이라서..' 
그래서 예수님의 가시는 발걸음이 오히려 무거웠을 거라는 거에요. 


▲지금 예수님은 사마리아에서 갈릴리 가나로 가시는 중인데,
고향을 잠시 지나서 가게 되셨습니다.
그때 이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높임을 받지 못한다' 4:44

여기서 '고향'에 대한 해석은  주1)을 참조하세요.

우리는 한국인을 대접안 하는 사람들입니다. 
한국인이 한국인을 제일 대접 안 한답니다. 

이것도 '고향에서는 제대로 못 받는다'는 이 말씀 때문일까요? 
한국이 선진국인 줄 모르는 사람은 한국인들뿐 이래요. 

그래서 한국인들만 자기들끼리 욕한데요. 
그것도 유대 민족을 닮아서 그런가요? 

그러나 어쨌건 너무 익숙하다는 이유로,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무슨 변화가 그에게서 일어났는지를 우리는 놓치고 많은 것이죠. 

여러분 그런 말이 있습니다. 
'사흘만에 그 사람을 보면, 한번 자세히 찬찬히 보라'는 거에요. 

인생은 사흘 안에 무슨 일어났을지 모릅니다. 
너무 사람을 뻔하게만 보지 말라는 거에요. 

사람들의 선입견이나 편견때문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인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죠. 정말 이방인 취급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지난 '이틀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말이에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죠. 

우리는 누구나 다 그런 고정관념이나 편견이나 이런 것들에 사로잡혀서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는 눈도 약하고, 
우리는 너무나 업신여기고, 그냥 쉽게 지나쳐버리거나 무시하고 마는 것이죠. 


◑본문 해석 및 적용 / 사마리아에서 갈릴리 가나로 가셨습니다

▲45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그런데 갈릴리에 들어갔더니 갈릴리의 몇 사람들이 
명절 때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일을 보고 
예수님을 이제 알아본 사람들이 있는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영접은 어떤 마음일까요? 
어쩌면 예루살렘 성전을 발칵뒤집어 놓는 소동 장면을 보았을지도 모르죠. 

또 아니면 요한이 여기에 기록하지 않은 
어떤 다른 표적이나 무슨 기사를 보았을 수도 있겠죠. 

그런 일들 때문에 '아~ 어쩌면 이 분이 갈릴리에 와서 
예루살렘에서 행했던 그런 일을 또 행하실 수도 있겠거니...' 
하는 기대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아마 영접했을 거에요. 

어쨌든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정확히 알고 
영접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46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예수님 일행이 갈릴리 지역으로 들어가면서 
나사렛을 통과해서 가나로 들어갔더니 
가나에서 지금 여떤 사람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가나에서 가버나움 까지는 32킬로 떨어진 길입니다. *위 지도 참조
옛날에는 걸어다녔죠. 하루길을 꼬박걸어야 가는 길입니다. 

근데 '왕의 신하' .. 헤롯 왕의 신하니까, 권력이 있고, 정보력이 있었겠죠. 
그래서인지 두 가지를 적어도 소문으로 들어서 알았어요. 

-예수님이 갈릴리로 들어오신다더라 
-또 하나는 예수님을 만나면 죽어가는 자기 아들의 병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런 그런 정보력이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지금 자기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기 때문에 
아들을 두고 32킬로 되는 거리를, 걸어서 왔든지, 말을 타고 왔는지 
이제 한 걸음에 달려오듯 온 거에요. 

와서 예수님을 뵙고 '내 아이가 지금 죽게 되었습니다. 
백방으로 손을 써도 살릴 길이 없는데 
나하고 같이 좀 가서, 내 아이한테 가서, 아이를 낫게 해주십시오!' 
이게 부탁의 요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즉답을 하지 않으세요. 
가겠다/ 안 가겠다.. 말씀하지 않습니다. 
고쳐주겠다/ 안 고쳐주겠다.. 는 즉답도 하지 않으세요. 

그리고는 이렇게 지금 애를 태우고 있는 왕의 신하한테 
직접 얘기하는 게 아니라, 둘러선 사람들에게, 같이 있는 사람들 전체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게 48절이에요.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아니 지금 애가 죽어간다고... 그것도 뭐 어디 하찮은 신분도 아니고 
나름대로 가버나움에서는 꽤 권세있는 유지가 와서 
'예수님, 내 아들 좀 살려주세요!' 그랬으면 

'예, 증세가 어떤데요? 어디가 아픕니까?' 뭐 이렇게 묻는 게 
보통 사람의 관심사죠. 

근데 예수님은 지금 왕의 신하에게 직접 얘기하지도 않고, 
둘러선 여러 사람들에게 에둘러 말하기를 
'너희들은 도대체 기적이 없으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다!'

어떻게 보면 '네 아들을 안 고쳐 주겠다'는 말 같기도 하고, 
핀잔하는 말 같기도 하고, 
쌀쌀맞게 '네 집으로 돌아가라' 라는 얘기 같기도 합니다.

도대체 지금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의도가 무엇인지요? 궁금합니다.

지나가던 행인이 지금 예수님한테 자기 병을 고쳐달라는 얘기가 아니잖아요. 
가버나움에서 나름대로 알려진 관리일텐데 
그가 와서 지금 다급한 마음으로, 오죽하면 지금 여기까지 달려왔겠습니까?

와서 지금 예수를 모셔가겠다고 하는데 
예수님의 반응은 의외로 냉정하게 들리는 것이죠. 
'너희들은 도대체 기적이 아니면 믿지 않는 자들이다!' :48

사도요한은 지금 일어난 곳은 '가나' 라고 적고 있습니다. :46
얼마 전에 예수님께서,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심으로 
잔치가 파장으로 끝날 뻔한 위험스러운 상황에서 
그 잔치가 끝까지 잘 마무리 될 수 있도록 도와주셨던 곳이에요.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을 베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요청 때문에,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면서도 
그런 기적을 베푸는 것을 기꺼이 허락하셨던 곳이에요. 

두 번째 가나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럼 사도요한은 계속해서 이 일을 '표적'이라고 기록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반복해서 
앞으로 되풀이 되는 이런 표적들을 (요한복음에) 기록할까요? 

그의 포인트는 어디에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요한은 계속해서 이런 표적을 기록하고 있을까요? 

"그 표적과 우리의 믿음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 
"표적 때문에 믿는 건 아니지만, 표적으로 믿음을 이끌어내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기록"하고자 하는 것이죠. 

예수님은, 표적을 보고 믿게 되는 것,
또한 표적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걸 너무나 안타까워 하신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너희들은 도대체 표적을 안 보면, 기적을 보지 않으면 
도대체 믿을 줄 모르느냐?' 그런 심경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왜 너희들은 꼭 그걸 (표적을) 봐야 믿겠다고 하는 거냐?' 
'너희 눈으로 확인해 봐야 믿겠다고 하는 것이냐? 
그럼 그렇게 보아야 믿겠다는 게, 진정한 믿음이냐?' 
이런 주제가, 지금 본문의 밑바탕에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표적을 보는 것은, 믿음의 단초가 될 수는 있겠죠. 
그러나 '보아야 믿겠다'는 것은 사실은 믿음에 속하지 않는 일이에요. 

△우리는 '보여 주세요. 그러면 제가 믿겠습니다' 그럽니다. 
그러나 여러분, 보는 순간 정말 믿음이 생깁니까? 

예를 들어, 제가 지금 제 호주머니에서 
100원짜리 동전의 하나 꺼내서 손에 쥐고 있습니다. 쥐고 있어서 안 보입니다.
여러분, 제 손에 동전이 있음을 믿습니까? 

대부분은 믿고,  몇 사람은 마술쑈 인줄 알고 안 믿을 거예요.

그럼 제가 이제 손을 펴서 보여 드리겠습니다.
여기 100원짜리 동전이 있네요... 그럼 이제 여러분은 
제 손에 동전이 있음을 믿습니까? 

엄밀한 의미에서, 이건 "믿음"이 아니에요. "확인"만 하는 거예요. 
우리가 눈으로 보면 믿겠다고 하는데, 그건 믿음이 아니라 "확인"하려는 거죠.

믿음은 확인해서 생기는 게 아니에요. 
"확인"은 내 경험이 하나 추가되는 것에 불과합니다

"믿음"은, 보지 않고 믿는 게, 믿음의 속성이에요. 
믿음은, 믿음의 대상으로부터 비롯되는 거예요. 

그 분이 믿을만해서 믿는 거예요. 
그 분이 믿을만해서,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믿는 거란 말이에요.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런 하나님을 여러분이 알고 본 적이 있습니까? No

태초가 언제인지를 아십니까? 천지를 어디까지 천지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근데 이걸 믿는 게 '믿음'이라는 거예요. 

우리는 '믿음으로 이 세계가 말씀으로 지어진 것을 믿습니다' 라고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죠.  히11:3

따라서 여러분 '내가 보고 믿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여전히 '내가 주체적으로, 주관적으로 믿음을 결정하겠다'는 거예요. 

'내가 믿든지/ 안 믿든지.. 네가 보여 주면 내가 결정하겠다'는 거예요. 
여러분, 믿음은 내가 주인이 되어서 생기는 게 아닙니다. 

내가 믿는 대상을 신뢰함으로써 비롯되는 거란 말입니다. 
믿음은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에요. 
내 믿음으로 내가 믿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하신 말씀도 바로 그 말씀이죠. 
요2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도마가 '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안 믿는다. 
내가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고, 손바닥을 봐야 믿겠다'

예수님은 8일 뒤에 오셔서 다 보여 주셨습니다. '네 손을 한번 넣어 봐라!' 

그러자 도마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내가 믿겠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죠.
요2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신학생이던 시절에 이 길이 내가 계속 가야 할 길인가를 고민하면서
하나님께 분명하게 알게 해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펀 글)

‘성직자의 길이 제가 가야 할 길이라면
알기 쉽게 표적을 보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어떤 표적을 주신다면 내년에 신학교에 남고, 
그렇지 않으면 신학교를 자퇴하고 짐을 싸겠습니다!’
라고 기도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요청한 표징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결국 저는, ‘하나님께서는 제가 주의 종의 길을 걷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나보다...’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내 마음대로 요구한 우연한 표적 하나에
제 인생을 건다는 것이 참으로 미련스럽게 여겨져
죄송한 마음에 다시 한 번 기도하고 마음을 다잡은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확실한 표적을 보고 싶어 하지만,
표적을 보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기 때문에 표적을 볼 수 있습니다.  

왜 제자들에게 이렇게 믿음 얘기를 강조해서 할까요?
여러분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것도 본 적이 없고 
부활한 것도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이유가 뭐예요? 
기록된 말씀을 믿는 거 아닙니까? 

사도들이 전해준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고 올 세대가,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 믿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고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이고)
또한 주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자들을 세워주셨단 말이에요. 

그 말씀을 믿는 거란 말이에요. 그게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요한복음을 통해서 계속 반복되는 '믿음'이라는 주제는 
'어떤 것이 믿음인가?'를 우리에게 아주 리얼하고 적나라하고 정확하게 
짚어 주기 위한 것입니다. 

요20:3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여러분, 실험실에서 영생이 관찰, 증명됩니까?
실험실에서 관찰되어야 믿겠다는 게.. 그게 믿음입니까?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죠. 믿음확인을 구분해야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진화론도 믿음이에요.
그게 과학적으로 증명된 게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그걸 믿는 것은... 거기에 자기 믿음을 두었기 때문이죠.
'과학'이라는 미명 하에, 그 (틀린) 이론을 믿는 거죠.

그러나 창세기 1장에서는 10번 동안 계속해서 
'종류대로 종류대로 종류대로 창조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믿는" 자들입니다.

본문을 위시해서, 오늘 예수님께 하시는 말씀은 
'너희들이 꼭 눈으로 봐야 믿겠다고 하는 건 믿음이 아니라'고 하는 얘기입니다.
그걸 요한복음에서 계속 뒤로 갈수록 반복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밑바닥을 흐르는 '큰 주제' 중 하나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인격 때문에, 그분이 진리이기 때문에 
믿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49절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요한복음에 이 '왕의 신하'가 소개된 이유는 뭘까요? 

왕의 신하가 예수님께 '같이 가버나움으로 가 달라'고 간청을 했는데  :47
예수님은 '안 가겠다!' 그러신단 말이에요. 

그러면서 '너희들은 꼭 눈으로 봐야 믿겠다는 거냐?'는 식으로 말씀하시죠. :48

그러자 왕의 신하가 다시 한 번 더 재촉하고, 간청합니다. 
49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이 말씀은 한글성경으로 보면, 
마치 신하가 가버나움에서, 사람을 보내서, 예수님을 초청하는 것처럼 보이죠.

그러나 왕의 신하가 직접 가나로 찾아와, 예수님을 뵌 것이 문맥에 맞습니다.
그러므로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갑시다' 라고 번역해야 더 부드럽죠.
공동번역이 그렇게 번역했죠. '제 자식이 죽기 전에 같이 좀 가주십시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그냥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네 아들이 지금 살아났다. 그러니 집으로 돌아가라!' :50

이 말을 듣고 어떻게 결정해야 됩니까? 
이때부터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집으로 돌아가게 됐단 말입니다. 

이 이유로, 왕의 신하가, 요한복음에 소개된 이유예요. 

△저는 본문의 왕의 신하도, 군인 쪽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봐요. 

왜냐면 눅7장에, 가버나움의 백부장도
자기 집에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지요. 

예수님이 그 백부장 집에 심방을 가기로 결정을 했어요. 
그래서 지금 백부장 집에 가는 길입니다. 

가는 길에 백부장이 마중을 나왔어요. 
그리고 예수님을 가로 막습니다. 

'우리 집에 들어오실 필요 없습니다. 
(가버나움의 백부장이 이방인일 가능성이 있어요. 
어쩌면 유대인 랍비가 이방인 집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걸 
배려했을 수도 있는 분이죠.) 

근데 이 백부장이 뭐라고 합니까?
눅7:7~8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백부장의 말에 예수님이 너무 깜짝 놀랐어요. 
예수님이 누구의 믿음을 보고 놀라기는, 처음이자 마지막 입니다. 

그래서 따라오는 제자들과 따라오는 장로들과 따라오는 사람들보고 
뒤돌아서면서 깜짝 놀라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이스라엘 땅에서 아직 이만한 믿음을 본 적이 없다!' 

당시 예수님 주변에 서 있던 제자들, 사람들은 
'자기가 이스라엘 땅에서 이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따로 없다'고 
자신하던 사람들이었어요. 

아니 집 다 버리고, 처자식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게 보통 믿음입니까? 

그리고 가버나움 회당의 지도자들, 장로들 
그 사람들은 보통 믿음입니까? 
다 믿음이 좋다고, 나름대로 자신만만한 사람들이고 
누구 믿음과 견주어도 '내가 믿음이 뒤지지 않는다'고 자신하던 사람들이었죠.

그런 사람들을 보고 '내가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적이 없다,
말씀만으로 믿는 이런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이 말이에요. 

△저와 여러분들이 어떤 믿음인지를 
성경을 통해, 한번 체크해 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나는 무엇을 믿고 있는가? 나는 어떤 믿음으로 지금 살고 있는가?'
본문은 그 메시지를 지금 우리에게 던지고 있죠.

왕의 신하는, 자기가 집에서 떠날 때는 분명히 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도저히 살 가망이 없다고 봤기 때문에 지금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나았으니, 집으로 가라!'
-그럼 정말 그 말씀을 믿고, 집으로 순순히 돌아가야 됩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바지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지고, 
 확실하고도 분명하게, 예수님을 대동해서 자기 집까지 모셔가야 됩니까?

그런데 신하는, 예수님의 그 명령에 순종에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50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물론 왕의 신하의 믿음도 크죠. 그것을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말씀에는, 어떤 신적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똑같은 말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했으면, 신하는 그걸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 표정과, 음성의 톤과, 표정과, 성령의 기운으로
듣는 사람으로하여금 "묘하게 믿게 되는, 거부할 수 없게 되는"
그런 신령함이 철철 배여 넘치도록 있었던 거죠.

오늘날에도 우리 전도자, 복음 전하는자, 설교자들에게
이런 '말씀의 영적 권위'가 더욱 더 있어야 됩니다.

마치 창1장에 '말씀하셨더니... 그대로 되었다'는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에는.. 그대로 되는.. 그것이 확실히 믿어지는.. 권위가 있었죠.

같은 성경말씀, 같은 복음의 말씀을 전해도,
전하는 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그 말이 청중에게 확신으로 믿어지는 사람이 있고,
-그 말이 청중에게 불신으로 들려지는 사람이 있죠.

그게 무슨 커뮤니케이션 스킬의 차이가 아니라, 
경건의 차이, 영력의 차이, 기도의 차이, 삶의 차이인 것입니다.

평소에 하나님의 종으로 성실히, 진실히 사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좁은 길로 가라' 하고 아주 단순한 말씀을 선포해도
듣는 사람에게 '그렇지, 내가 좁은 길로 가야지, 그렇게 못 간 것을 회개해야지' 

하고 확신있게 들리는 것입니다.

▲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왕의 신하가 가버나움으로 내려가다가, 아마 발걸음이 가벼웠겠죠.
자기 종들이 가나로 올라오는 중에 서로 만납니다. 소식을 들으니,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시각에 (어제 일곱시에)
32킬로 떨어진 가버나움의 아이가 나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그 말씀은 곧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믿을 때, 그 말씀은 사건이 되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매일, 깊이 묵상하며 읽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이, 내 귀에 들려올 때
(보통 '레마의 말씀'이란 표현을 쓰기도 하죠)
그 말씀은 현실이 되고, 사건이 되고, 기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목격하는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을 때
내 버켓 리스트를 이루기 위해서 읽거나, 그걸 소원하지 마십시오.

만약 그게 이루어지면, 주위 사람들에게 더 불편할 수도 있는 일이에요. 
여러분, 내 소망이 이루어져서, 남들을 불행하게 하는 게 한 두 개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이루어지면.. 나도 살지만
주위 사람들도 다같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렇게 이루어집니다.

내가 기도 응답 받아서, 내가 말씀의 약속을 받아서
내 주위 사람들이 고통스러워 질 수도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건 하나님의 응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면 
그 말씀은 나를 살리고, 이웃을 살릴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이 얘기를 들은 왕의 신하는 믿음이 생겼고 
그 믿음의 사건을 간증하자 
그의 가족들이 모두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마리아 처럼 온 도시가 변화된 것은 아니지만, 
그의 가정 전체가 부흥을 경험한 것이고 
새로운 신앙에 눈 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53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정리하면, 이 설교의 메시지는 크게 세 가지 입니다.

▲1 참된 믿음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그 분을 신뢰하고,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표적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표적을 보고 믿겠다는 것은, 정말 믿는 게 아니고, '사실을 확인'하겠다는 거죠.
확인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게 진정한 믿음은 아닌 것입니다.

말씀보다 더 큰 표적은 없습니다.
말씀으로.. 진정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그 말씀 때문에, 우리는 수술 받을 것입니다.  히4:12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회개하고, 다시 소생하게 될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세가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믿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졌을 때, 
그 말씀을 믿고, 자기 믿음의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자기 아이의 치료를 아직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아이가 나았다는 것을 믿고서, 고향 가버나움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때 아이가 낫고, 또 그 집안이 모두 예수님을 믿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내게 주어졌을 때, 과감하게 믿음의 발을 내딛는 것입니다.
마음에 믿음이 생기면.. 몸으로 액션하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의 말씀은, 말씀 차원에서 머물지 않고, 
믿음이.. 사건을, 믿음의 역사 ministry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을 믿게 된다는 거죠.

△앞서 사마리아의 우물가 여인도 마찬가지였고요.
여인은 햇볕이 뜨거운 낮에 물을 길러 나올 정도로, 사람들을 피하고 싫어했죠.

그러나 그가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후에는, 구세주를 만나뵌 후로는
그 만나기도 싫던 사람, 그 피하고 싶었던 사람들에게
오히려 담대히 나아가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을 통해서
이런 '믿음의 사건'이, 내 삶 가운데도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믿음으로 내가 그 말씀에 반응하고, 액션을 취하는 것입니다.

*일화 / 행5:29절 말씀을 듣고서, 믿음의 액션으로
유대인 3만명 이상의 목숨을 구한 스기하라 영사     주2)


▲3 예수님 말씀 듣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말씀을 못 들어서 그렇지, 
예수님 말씀을 듣기만 하면... 그 말씀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마치 백지 수표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명하셨습니다.
내게 이 말씀이 둥둥 북소리처럼 고동칠 때, (반드시 이런 감동이 있어야죠)
이 단순한 말씀에 감동되어, 순종해서 떠나면 (환경은 전혀 따라주지 않더라도) 
'믿음의 사건, 믿음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의 믿음의 간증을 통해서 
우리가 가는 곳 마다 사람들이 믿음을 갖게 되는.. 
믿음의 공동체가 생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너희들이 눈을들어 밭을 바라보아라, 지금은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다!' 
이 단순한 말씀이, 성령의 감동으로 내게 들려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안 보이는 게 보이게 됩니다. 
온통 들판이, 희어져 추수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눈에는 그게 안 보이는데, 그냥 초록색 들판 밖에 안 보이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 눈에는, 온통 희어져 추수하게 된 들판만 보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도 열심히 읽고, 기도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날, 왕의 신하가 예수님을 만난 것처럼, 
우리도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주님의 말씀을, 그 명령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창1장처럼,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 우리의 순종의 발걸음이 있죠!


.................................................

주1)
요4:44 '친히 증거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갈릴리에 이르시매..'

여기서 '고향'은 어디를 가리킬까요?

1) 고향이란 말은 유대 혹은,예루살렘을 가리켰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귀절의 의미는, 예수께서 유대나 예루살렘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할 줄 아시고 갈릴리로 가신다는 뜻입니다. 

2) 고향을 나사렛으로 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심은 고향 나사렛에 가심과 다르죠. 
그가 고향 나사렛에서는 환영 받지 못할 줄 아시고, 
나사렛 이외의 다른 갈릴리 지방에 가신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사렛에서는 사실 어릴 적에 잠깐 사시고,
가버나움으로 이사해서, 거기서 주로 사신 것으로 봅니다.

3) 고향을 광범위한 갈릴리로 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실 때는 갈릴리를 목적지로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 사마리아 전도에 성공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또는 고향 갈릴리에서는 환영 받지 못할 줄 아시면서도 
초지(初志)대로 관철하시기 위하여 그리로 가신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주2)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3만 명 이상으 목숨을 구한
일본 기독교인 스기하라 영사

2차대전 당시 주 리투아니아 일본 영사 스키하라의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유대인 3만명 이상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1939년 세계 제2차 대전이 한창 무르익을 때, 나고야 태생의 스키하라 치우네씨는
일본 의전통적인사무라이가문에서태어났지만, 예수를 믿게된 그는
기도중에 외국대사가 되어 복음을 열방에 전하라는 소명을 받습니다.

1939년 그는 일본 정부로부터 러시아 근처 리투아니아(폴란드, 소련 간의 작은 나라)의
영사로 임명되었습니다.

하루는 대사관 앞에 50여명의 사람들이 몰려 오더니,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 종일 떠나지 않고 무어라고 소리 쳐 아우성 대고 있었습니다.
스키하라 영사는 그들 중 몇 사람을 대표로 대사관 안에 불러들여 사연을 물었습니다.

사연인즉 자기들은 폴란드에 살던 유대인들인데 독일군이 폴란드를 점령하여
거기서 야간에 탈출 하여 리투아니아로 피난왔는데,
독일군 탱크가 지금 리투아니아로도 들어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독일인은 유대인은 다 잡아 죽이니, 자기들도 여기 있다가는 필경 죽을 터이니.
자기들을 살려 달라고 절박하고, 간절한 어투로 탄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스키하라 영사는 “날보고 어찌 해달라는 것이냐?” 물으니
그들은 우리가 여기서 빨리 탈출하도록 일본행 비자를 발급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을 불쌍하게 여긴 스키하라씨는 하 루만 기다려 달라고 하고 본국에 전보를 쳤습니다
“여기 유대인들에게 비자를 발급해 주어도 되겠느냐?” 고 문의하니
답신은 NO!였습니다.

일본이 동일과 이태리와 삼국 동맹을 맺고 있는 중인데,
독일이 원치 않는 일을 일본이 허락할 리가 없었습니다.

스키하라 영사는, 대사관 앞에서 노숙하며 애타게 기대를 걸고 있는 유대인들을 실망시킬 수가 없어서
조금 더 기다리라고 하고, 두번째 전문을 보내어도 역시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 날 또 세번째로 급히 보낸 전문은
비자 발급 여부에 대한 질문이 아닌 강한 어투로
“이들을 여기서 내보내지 않으면 그들은 다 죽으니 허락해 달라.”고 하였으나
역시 대답은 노! 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불쌍하게 여긴 기독교인 스키하라는 생각하기를
“사람의 생명이 더 귀하지 아니한가? 어찌 이들이 죽는 것을 뻔히 보면서,
그들을 사지로 내몰 수가 있단 말인가?” 하고

주님께 기도로 주님의 인도를 구하며 성경을 펴니, 
행5:29 절이 눈에 띄었습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는 이제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이 유대인들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했습니다.

사무라이 전통의 정신을 그리스도인정신으로 승화시킨 스키하라는
그가 비겁하지 않고 주께 순종할 수있는 용기를 달라고 다시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결심하기를  
“국가의 명을 어겨 나는 처벌을 받는 한이 있어도 
내 직권으로 그들에게 비자를 내주리라”

그는 의로운 결단을 내리고, 그들을 불러들여 비자를 작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때가 18 July ~ 28 August 1940 였죠.      

그는 10일간 일본 경유 비자 transit visa를 주었고,
유대인들은 탈출해서, 일본을 2~3일 경유해서, 
홍콩이나 안전한 다른 유럽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그들은 리투아니아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기차로 도착했고, 
거기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비자는 이름을 쓰고 싸인만 하는 것 뿐만 아니고 
서류를 다 작성하는 것이므로
1인당 서류 작성에 20분~ 30분만 가지고는 되지 아니하므로 
서류 작성은 너무 바빴습니다.

보통 한 달에 발급하던 숫자만큼, 매일 비자를 쓴 것입니다. 
(당시는 다 손으로 썼죠) 

드디어 그들 50여명에게 비자를 다 내주고 나니,
그 소문을 들은 유대인들이 점점 몰려 와 수백명이 되고
드디어 며칠 동안에 1천명이 넘게 되고, 
나중에는 2천~ 3천 명 가량도 넘었습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싸인 하는데, 하루에 2백명씩 밖에 싸인을 못하므로
자기 부인 가족과 직원들까지 총동원 되어 서류를 작성하고
자기는 싸인만 하여도 시간이 부족하였습니다.

너무 바빠서 야간에 잠도 누워 못자고, 의자에 앉은 채 잠깐씩 졸며 싸인하였고,
싸인하는 손은 마비되어 감각도 없이, 잘 움직여지지도 아니하였으나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일이라 만가지 어려움을 무릅쓰고 싸인하였습니다

하루 200명씩 다 싸인했으나 더 많이 몰려와 지쳐 쓰러지도록 싸인하였습니다.
그 때 본국에서 전문이 날아와, 주 리투아니아 일본 영사관을 폐쇄하니,
영사관 문을 닫고, 독일로 이동하라는 지시가 왔습니다,

그래서 모든 행정 조치가 단절되니 더 이상 영사관 업무를 볼 수가 없어서
영사관 문을 닫고 이동할 수 밖에 없었는데
드디어 이사하는 그 날에 그와 가족이 떠나가는데도 유대인들이 따라왔습니다.

기차가 정거장에 서 있는 동안에도, 
기차 안에서 계속해서 싸인해서 창 밖으로 내어주었습니다.

드디어 기차가 움직이자, 유대인들은 일제히 눈물을 흘리면서 
양팔을 들어 큰 소리로  
“스키하라 만세”
를 외쳤습니다.

그 때 스키하라는 다 싸인 못해 준 사람들을 위하여 마지막 결단을 내려 
리투아니아 일본 영사의 직인(印)을 창 밖으로 던져주며
“당신들 마음대로 하십시오!”
라고 외치자 유대인들이 그 도장을 주워서 사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도장으로 만든 것까지 합하면
스키하라가 구한 유대인은 세대주인 남자들만 약 6천명이라 하며,
그 딸린 가족들까지 합하면 약 3만명 이상이라 합니다.

그들은 일본까지 와서 2~3일 정도 있다가 
다시 홍콩을 통해서 독일군이 없는 유럽으로 갔습니다.

스키라하씨는 영사직에서 쫓겨나고 그 후 독일은 패망하고 2차대전이 끝나자
서독에 진주한 미군에 의하여 스키하라 가족은 수용소에서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만약 미군이 진주 안했으면, 그는 유대인 방면 죄로 곧 사형 당했을 것인데
사형 직전 풀려 났던 것입니다.

일본에 돌아 왔으나 직장도 없이 불쌍한 처지가 되며, 세상은 그를 다 잊었습니다.

그 후 이스라엘이 독립하고 6일 전쟁을 승리하며 안정을 되찾은 후
이스라엘 정부는 주 일본 이스라엘 대사에게 “ 스키하라를 찾아내라 ”는 특명을 내렸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독특한 첩보 능력은 드디어 시골에 쓸쓸히 묻혀 있던 스키 하라를 찾아내었는데,
그를 만난 주일 이스라엘 대사 자신이
바로 스키하라의 싸인으로 리투아니아를 탈출한 유대인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대사는 스키하라를 만나자 말하기를
“ 당신은 저를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저는 당신을 하루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자 여기 당신이 발행한 비자를 보십시오”

하면서 오랜 세월 지나는 동안 다 낡은
주 리투아니아 일본 대사 스키하라 발행의 일본행 비자를 꺼내 보여주며

“ 당신이 발행한 이 비자로 수천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이 비자를 귀중한 보물로 간직하며 당신께 감사하며
“홀로코스트”의 쓰라린 경험을 잊지 않고 이스라엘 나라 건설에 힘쓰고 있습니다

앞으로 얼마 안 있어 열리는 이스라엘 건국 기념일에
당신과 당신의 가족을 이스라엘 나라를 대표하여 초대합니다.”
하면서 미리 작성한 이스라엘 수상의 초대장을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스키하라는 그 건국 기념일에 초대 받아
대대적인전 이스라엘 국가적 환영을 받으며,
건국 기념일에 이스라엘 대통령으로부터 이스라엘 건국 제1공로 훈장을 받았습니다.
(그 훈장에는 많은 상금과 그의 한 평생 생활비가 따라 다닙니다.)

그 자녀들은 이스라엘 정부에서 공부 시켜주고
장남은 나중에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을 졸업하고 보석 회사 사장이 되었습니다

스키하라씨는 일본 정부로 부터도 명예 회복이 되었고
더구나 그를 2차대전의 영웅으로 추서하였고 그의 기념관도 있습니다.

그와 그의 아내, 그의 아들 그리고 그의 몇 동료들은 해직 당하여 끌려가기까지
약 28일간 무려 6천명의 유대인들에게 비자를 발급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그와 그의 가족은 많은 어려움을 당했지만
후일 이스라엘 국가가 예루살렘 근교에 유대인 학살기념관 야드받셈을 건립하였을 때
이스라엘의 은인으로 그와 그의 가족이 초청받아 오게 됩니다.

그리고 '이 결정에 대하여 후회가 없었느냐?'라는 
한 유대인 기자의 질문이 있었을 때
가족을 대신하여 스키하라의 아들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저희 아버지께 말씀하셨고,
저의 아버지와 저희들은 기꺼이 순종했을 따름입니다. 아무런 후회가 없습니다.
우리를 통해 당신들(유대인들)을 인도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이
또한 우리의 남은 날도 인도하실 것을 믿고 있으니까요”

그는 일본으로 돌아온 몇년 후 이스라엘 정부에서는
그에게 또 다시 다른 훈장을 추가로 재차 수여하려 하였으나
그가 몸이 약하여져서 이스라엘로 가지 못하고
주일 이스라엘 대사가 그에게 와서 훈장을 전달하였고, 
그로부터 얼마 후 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