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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13:1~7 그리스도인과 국가

LNCK 2023. 2. 6. 11:23

그리스도인과 국가 (로마서 13:1~7 2023.01.22 - YouTube

◈그리스도인과 국가         롬13:1~7         2023.01.22.녹취

◑서론

롬13:1~7절 본문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에 대하여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보며, 또 어떤 관계 속에서 
국민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우리에게 설명해 주는, 성경 전체에서 
"그리스도인의 국가관"의 기초를 잘 설명해 주는 중요한 본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주어지는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본문 직전 단락 12:8~21절까지 내용을 보면, 사랑의 관한 말씀, 
특별히 개인 간의 관계 속에서 이웃 사랑에 대한 말씀이었죠. 

'원수를 스스로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악을 선으로 갚으라' 

이렇게 '원수에 대한 태도'에서 
악으로 악을 갚지 않는.. 
선으로 악을 이기는.. 그런 사랑의 승리의 삶을 설명했습니다. 

본문 직후인 13:8~14절 내용을 보아도 
또 이웃사랑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니라'는 말씀이 
본문 직후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그 가운데 샌드위치의 패티처럼, 
전후 문맥의 이웃 사랑에 관한 말씀사이에, 
본문 '그리스도의 국가관'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13:1~7절 말씀이, 잘못 편집된 게 아닌가? 오해하는 분도 있고 
본문이, 로마서의 흐름을 흐트러뜨리는 그런 내용이라고 불편해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웃 사랑'이라는 큰 주제 아래서 
-개인 간의 갈등과 문제속에서 이웃 사랑, 
-또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과 같은 맥락에서 
-나라와 민족의 대한 사랑은, 이웃사랑에 한 중요한 영역이라는 것이죠. 

우리가 살고 있는 국가, 법적인 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애국이고 
그것이 곧 올바른 국민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체 맥락에서 합당한 위치에 오늘 본문이 놓여져 있는 것이고 
또 그리스도인은 그 나라와 민족이 처한 상황 속에서, 국가에 대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른 신앙의 태도를 가져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믿음의 사람들은 언제나 애국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롬 9장 10장 11장에서 자신의 동족이 구원받기 위해 기도했고, 
또 자신이 저주를 받을지라도, 간절히 소원하였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나라의 믿음의 선배들은, 항일운동, 독립운동을 하였고 
또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을 하였고 
또 전쟁에 가장 앞서서 싸우며 그렇게 헌신하며 
6.25 전쟁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순교하는 각오로 싸웠던 선배들이었죠.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믿음의 나라가 되기 위하여 기도 했고 
대한민국 건국의 민족 대표들의 많은 부분에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애국운동이, 자칫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절대화 하거나 
또 어떤 정파의 이익을 대변하거나 

그리고 다른 나라의 아픔과 그들의 어려움을 외면하는 
집단 이기주의의 형태로 흘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올바른 국가관은 무엇인가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가장 기본적인 그리스도인의 국가간에 관한 교훈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이 로마서가 저작되었던 시점에, 이런 교훈이 필요했던 것은 
로마서가 기록된 주후 50년대 중후반에 

로마가 혼란한 가운데 처해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그당시에 어떤 지도자들의 부정 문제로 인한 사회 혼란이 있었고 
거기에 대하여 제국내에서 어떤 저항운동이 일어났고 
그 중요한 이슈가 바로 '세금 문제'였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13:7절에 '조세를 바치라'고 권면하는 것은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세금을 내지 않았고, 그래서 세금을 내라..는 말이 아니라

그 나라의 체제를 전복하는 어떤 혁명적인 운동을 일으키는 사람 가운데 
세금을 거부하는 이들이 있었고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문제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취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라는 관점에서, 사도 바울이 구체적으로 이 모든 상황으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하다.. 라고 가르친 거죠.

정권에 일부 문제가 있다 할지라도, 세금을 내지 않음으로써 
나라를 붕괴 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라고 구체적인 지침을 줍니다. 

이렇게 로마서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 얻는 이 '구원의 복음'을 설명함과 동시에  *1~8장
-'그 시대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길인가?'에
대해서 아주 세부적인 지침까지 나오는, 실제적인 말씀입니다. *12장~  


◑교회 역사적으로 "교회와 국가간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 에 대해서 
세 가지 관점으로 정리됩니다. 

▲1. 첫 번째 관점은 중세적인 관점입니다. 
중세시대를 사로잡았던 사람들의 인식, 
그때는 하나님의 통치가 모든 영역에서 이루어지지만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라고 생각했던 그런 시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모든 영역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바른 인식이지만 
교회가 그 매개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런 시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중세의 역사를 통해 이미 나타나 있습니다. 
로마교황이 모든 왕들의 왕관을 씌워줘야만 왕은 정당성을 가진다.. 라고 
생각했던 그런 시대에, 교회가 과연 세상의 소금과 빛 역할을 감당했는가? 
역사를 살펴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도리어 교회가 무수히 많은 잘못된 일을 행하는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어버렸죠. 
교회가 세속권력 위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대리하는 매개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고, 성경에도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시각이 계속 연장되면서, 역사속에 십자군 전쟁 이라든지 
많은 전쟁을, 교회가 나서서 행하며, 또 뒷받침하는 그런 잘못된 역사가 
지난 역사 속에 있었습니다. 이는 틀림없이 잘못된 인식입니다. 

▲2. 그렇다면 또 하나의 관점은, 정반대로 세속적 관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곧 교회 안에만 국한되어야 한다.. 라는 무신론자, 불신자들의 관점이죠. 


교회 밖의 모든 영역에는, 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며 
또 믿지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가 있을 수 없다.. 라고 
생각하는 그런 세속적 관점입니다. 

이것도 또한 잘못된 인식이죠.  
천지를 창조하시고, 역사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통치가 
세상 모든 영역에 이루어져야 함에도 
'교회 안에 갇힌 하나님'으로서 인식하는 것은.. 잘못된 인식입니다. 

우리가 가정과, 일터와,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분명함에도 
그 부분을 다 제거해 버리려는 인식, 
교회 안에 갇힌 하나님의 통치는 있을 수 없습니다. 

▲3. 그렇다면 올바른 관점은 무엇입니까?
세 번째 "영역 주권의 관점"입니다.


이것은 화란의 칼빈주의 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가 
"영역주권론"이라는 관점에서, 이 시각을 잘 정리해 발표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권세를 모든 영역에 나누어서 위임하셨다'는 겁니다.
모든 영역을 어느 한 영역에,
즉 교회라든지, 국가라든지.. 어느 한 영역에 다 몰아 주지 아니하시고 
부분적으로 다 그 권세를 나누어 위임하셨고 
그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나야 한다..는 겁니다. 

교회는 교회 안에 맡겨진 권세를 가지고 또 
국가는 국가에게 맡겨진 권세를 가지고 
각 영역에는 고유한 주권이 있어서 
이것이 마치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려 가듯이 서로 함께 작동하도록 
하나님은 계획하셨다.. 하는 겁니다. 

그럼 국가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각 영역의 톱니바퀴가 정확하게 잘 들어맞아 움직여지도록 하는데 
악을 행하여 이것이 망가지게 하거나 
혹은 한 영역이 다른 영역을 침범을 때, 그것을 제어할 수 있는 역할이 
바로 국가의 역할 이라는 거죠.

이런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 하나님의 통치가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야 하며 
그리고 각 영역마다 주어진 고유한 작동의 권리가 있고, 
그 작동 원리가 잘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국가의 책임이고 
'국가가 모든 영역에 다 관여를 함으로써 통치하는 국가지상주의가 잘못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전체주의, 공산주의 제외

중세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통해 모든 영역을 통치함이 잘못 된 것처럼 
국가가 모든 영역에 통치자가 되어서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런 '국가주의'는 잘못된 관점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국가가 부여받은, 악을 심판하고 
각 영역이 자기 고유한 영역 역할이 잘 작동되도록 
보호하는 그런 역할로서, 국가의 역할이 제한되는 것, 
이것이 성경적인 관점이요, 이것이 칼빈주의 신학의 관점입니다. 


◑이런 관점을 우리가 성경적인 관점으로 받아들일 때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국가를 어떤 태도로 대해야 되는가? 
3가지 교훈으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1. 첫째는 국가의 권세를 세우신 하나님의 권세를 더 의식하라 

1절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이 말씀의 뜻은, 모든 국가의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니 
무조건 복종하라는 말씀으로 인용 돼서는 안 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주로 남미에서 이 구절을 
어떤 권력이든지 다 하나님이 주신 권력이라고 정당화 하는 말씀으로 
인용된 사례들이 있었습니다. 잘못된 인용입니다. 

이 말씀의 이면에는, 국가에 통치 권세를 부여하신 
'권세의 근원이시며 주인이신 하나님의 권세를 더 높이 인정해야 된다'는 것을 
먼저 말씀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권세를 인정하지 않은 어떤 지도자가 
이 1절 말씀을 인용하여 
'모든 국가의 권세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권세이니 무조건 복종하라'고 
인용할 수 없는 것이죠. 

그러므로 이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께서 모든 영역에 그 권세를 나눠주셨다.
국가와 교회와 여러 기관들에 나눠 주셨는데 

그 중에 일부 권세를 국가에게 주셨는데 
그 권세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국가의 권세 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의 권세가 있다'..는 것을 
먼저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러한 전제하에서 2절의 말씀에 주어지는 겁니다. 

2절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바로 이 국가의 권세에 대항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 되려면 
'국가의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권세' 라는 인식이 있어야 하고 

그리고 정당성을 가지려면 
'하나님이 국가에 나누어 주신 권세의 고유한 기능을 
철저히 지키는' 권세이어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이 위 두 번째 '악을 심판하고 선을 이루게 하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의 국가의 권세'인 것입니다. 

▲2. 그래서 두 번째로 국가의 권세는 악을 심판하고 선을 이루게 하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4절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여기에 보면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집행하는 사람'이라고 
할 때, 한 구절에 '선'은 한번 나오고 '악'은 두 번 언급함으로써 

국가의 기능이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자의 기능 임을 더 강조했습니다. 

위 도표에서 각 영역에 고유한 주권을 하나님이 나누어 위임 하셨는데 
그것이 잘 작동하도록 하는 역할을 국가가 하며,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 '악'인데, 그 '악'을 찾아내어 심판하는 기능으로서의 
국가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가가 모든 영역에 나서서 다 책임질 수 없기 때문에.. 
만약 (종교를 포함해서) 모든 영역을 국가가 다 책임지려 한다면, 

그런 '국가주의'는, 불합리하고 비현실적인 것이고, 
그리고 잘못된 독재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국가의 기능을 '악을 심판하는 기능'을 가장 중요하게 설명하고, 
그다음에 '선을 이루기 위해 장려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죠.

만일 국가가 이렇게 악을 심판하는 공의로운 하나님의 (대리)집행자의 역할을 
포기하고, 부정하거나 부패한 권력이 된다든지

또 하나님이 명하시는 것을 행하지 않고 
금하신 것을 명하는 국가가 만약 된다면.. 
국민들이 순종할 의무가 없어지는 겁니다. 


△구약 역사에도 나오죠. 바로가 애굽의 권력을 가지고, 
히브리인들의 사내아이는 무조건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당시에 바로의 명령은, 곧 애굽 국가의 권력의 명령이었죠.
그것을 불순종하면 죽임을 당하는 엄청난 위험을 가진 명령이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신파들이, 사내아이들을 살렸습니다.
발각되면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도, 아기들의 생명을 살린 모십니다. 

그럼, 국가의 권세에 대항한 것이죠. 
그러면 그 산파들의 행동은, 국가에 대하여 올바른 태도를 가진 것입니까?
네, 올바른 태도를 가진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살려야 하는 책임이 있는 국가가 
도리어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권력에 대해서 저항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명령을 무시하고 하나님께 순종해서 3만명의 유대인을 살린 
일본 크리스천 스기하라 영사 https://brunch.co.kr/@kimyuree/27

△사도들도 당시에, 그 산헤드린 공회로부터  *로마 정권 산하의 유대 자치기구
예수님의 이름으로 전도하는 것을 금지 당했죠.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그 유대사회에 무슨 혼란을 야기했으며 
무슨 정치적 위협을 가했으며, 무슨 반란을 일으켰습니까? 

그런데 유대의 공회원들은 자신들의 거짓이 드러날까봐 
부활 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의 죽음에 살아나셨다.. 라고 전파하는 것을 
반란을 일으키는 자들이고, 사회를 혼란케하는 이들이라고 
거짓 누명을 씌우면서 그들을 핍박 했습니다. 

그때 사도들이 그 유대 공회의 방침에 대해 순응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그 핍박을 무릅쓰고, 계속해서 예수님의 이름을 전했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시대에 포로로 잡혀 간 사람으로서 왕의 명령을 법을 했죠. 

기도하면 사자굴에 던져지는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신앙적 가치를 지켰던 사례도 있습니다. 

이렇게 국가가 악을 정당하게 심판하고 
또 선을 장려하는 일에 올바른 기능을 한다면 
당연히 순응하고 따라야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정반대의 길을 간다고 할 때는 
이를 거부하고 저항하는 것이, 올바른 성도의 태도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나치 정권의 잘못된 흐름에 저항했던 본 회퍼는 
올바른 국가관을 가졌던 것입니다. 

당시에 많은 독일교회 주류 교단들이 타협하며 나치 정권에 힘을 실어주고 
그렇게 순응했지만, 이에 저항했던 본 회퍼와 같은 젊은 신학자들이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올바른 국가관을 가졌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교단적으로 신사참배를 그냥 문화행사로 여기고 
참여해라 라고 말했던 지도자도 있었지만 

이에 저항해서 '이것은 우상숭배'라고 규정하고 거부해서 핍박을 받았던 
믿음의 사람들이 있죠. 

다 국가관에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당시에 로마 사회 있었던 세금을 거부함으로써 
체제를 전복시키는 일들을 하던 이들에 있었는데,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흐름에 휩쓸려가는 그러한 상황을 염려하여 
사도 바울은, 현 상황에서 세금 거부(조세 저항)를 함으로써 
나라를 붕괴시키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라고 결론을 내려 준 것입니다.

'조세를 납부 해라!' 
이것은 바울이 로마 제국으로부터, 그가 친 로마세력이고 
정치적으로 정권을 지지하기 때문이 아니라 

큰 흐름 속에서 보면, 당시 로마사회는 그래도 법치가 이루어지는 사회였고 
사도들을 유대의 공회는 핍박을 했지만, 로마제국은 보호해 준 측면도 있어요. 
그리고 사도바울이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지만 
그는 로마시민권 으로 호소했을 때 
그는 로마의 가이사 황제 앞으로 가서
자신의 변증, 변호를 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부여받지 않았습니까.

만약 로마제국이 정말 악을 심판하고 선을 장려하는 그런 법치가 무너졌다면 
사도바울은 벌써 유대 공회에 의에서 사라졌을 겁니다. 

그렇지만 가가 유대 공회에 의해 사라지지 않고 
로마까지 가서 재판을 받는 그 여정을 보면, *행21~27장 
그가 법의 보호를 받으면서 자신이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습니까? 
  
이게 바로 억울한 희생자가 없도록 하는 
법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거죠. 
지금 그 틀에서 보는 겁니다. 

△그러나 그 몇 년 이후부터 로마제국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죠. 
로마 시에 대화재가 일어났을 때, 그 누명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씌웠죠.

정치가들의 잘못을, 엄청난 대 사고의 책임을 
그리스도 인들이 방화한 것으로 거짓으로 누명을 씌워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했고,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기 시작했고 
그로 인하여 조직적이고 국가적인 핍박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마 그 당시에 로마서를 다시 써서 보냈더라면 
어떤 기록을 남겼을까? .. 한번 상상해 봅니다. 

그는 이렇게 거짓과 음모, 그리고 국가적으로 선한 시민들을 무고히 죽이고 
신앙의 자유를 핍박하는 그러한 국가에 대하여
그는 순교를 각오하라고 권면했을 것입니다. 

본회퍼 처럼 (순교로) '저항하라'고 그렇게 권면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3. 세 번째는, 국가의 권세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이 선하게 살라!
 
5~6절,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
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진노(법적 처벌) 때문이 아니라, 양심을 위해서 복종하라' 
이 말씀은 법에 문제가 생겨서 처벌 받을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선한 양심으로 사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양심을 따라 행하라'는 말씀이 
올바른 국가관과 어떻게 연결 됩니까? 

여러분 한 나라의 수준, 그 나라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것이 
법체계가 아닙니다. 

로마는 정말 법 체계가 잘 되어 있던 나라지만.. 망했습니다. 
부강한 나라가 왜 망합니까? 그 위기는 어디에서 일어납니까? 
엄격한 법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양심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양심은 국가의 법으로 체크가 안 됩니다. 
무너진 양심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은, 국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 영역은 정말 가정과 교회에서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미국 얘기를 자꾸 해서 죄송합니다만, 뉴스를 보니까 
최근 몇 년간 마약으로 인하여 사망한 숫자가, 코로나 팬데믹으로 죽은 
사망자 보다 훨씬 많다는 거죠. 

왜 이렇게 마약이 일상화되고, 수많은 사람이 마약에 중독 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어린 자녀들에게 마약을 파는 이유가 뭘까요?
법이 없어서 그럴까요?

그건 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양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에요. 
어른들이 경제적 이익을 취하기만 하면 
청년들에게까지 마약이 유통되도록 그렇게 만드는.. 
(핼러윈) 사탕에까지 마약을 발라서 그런 사회가 되는 이유는 뭘까요? 
양심이 무너진 겁니다. 

그러면 그 양심은 누가 만들어 주고, 양심을 누가 일깨워 줍니까? 
국가의 법입니까? 
법을 엄격하게, 무섭게 형량을 매기면 양심이 살아납니까? 
아닙니다. 두려움 때문에 또 다른 범죄를 범할 뿐입니다. 

여러분 이슬람 라마단이란 엄격한 기간이 있죠. 
이 라마단 기간이 지나면, 이슬람 사람들 중에 위장병 환자가 급증한대요.

참았다가 폭발적으로 과식을 하고 과음을 하다 보니까 
위장병 환자가 많이 늘어난다는 거죠.

어떠한 법과 제도도, 두려움을 조성해서 사회가 변화되는 게 아닙니다.
양심이 살아있는 국민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거죠. 
그 양심은 오직 신앙 안에서만 회복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울이 호소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법에 의한 처벌을 받을까봐 두려워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으로서 
그 신앙 양심에 따라 행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금을 내지 말자'고 그렇게 선동하는 이들에 휩쓸리면 
당신들은 세금을 안 내는 것을 원해서, 마지 못해 따라가려는 것은 아닌지
양심적으로 판단해 보라는 거예요. 

진짜 나라를 위해서 참여하려는 건지, 
자기 이익을 위해서 참여하려는 건지 
이렇게 '양심'을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국가에 대한 사랑에서, 양심의 중요성을 바울은 일깨우고 있습니다.

△오늘날 미국이 사회적으로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은 
공적영역 사적영영 운운하며 나누며 
공립학교에서 기도로 시작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양심을 일깨웠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하면서부터 
미국 국민들의 양심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거기에 사회불안의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 청교도 시대에는
청교도들은 오늘을 가르치면서도 
A 라는 알파벳을 가르칠 때 아담 Adam 을 가르쳤고 
S를 가르칠 때 쓰인 죄 Sin 를 가르쳤고 
그렇게 성경을 가르침으로써, 국민의 양심을 일깨웠던 그 시대가 
미국이, 여러 민종들이 이민으로 쏟아져 들어와도 다 소화해내고 
하모니를 이루는 그런 부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신앙교육을 내버림으로써 
점점 국민들의 양심이 무너지고 있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잖아요. 
그 결과가 마약이 판을 치고, 사회적으로 성문제가 혼란하게 일어나는 
그런 사회가 돼어 있지 않습니까. 

미국 의회에서 의회가 열릴 때마다 기도로 시작하는데 
그런 기도 시간을 가지는 형식은 지금까지 남아있는데, 

기도를 마칠 때 보면, 대표기도자가 (주로 목사님이 초청되어 기도를 인도하죠)
'여러 종교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렇게 기도를 마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라는 말은, 가급적 빼라고 주문 받습니다. 

하여튼 여러 혼합종교의 이름을 다 동원해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포용력이 있는 멋진 사회입니까? 참으로 통탄할 일이죠. 

어떤 의원이 대표기도 하는 거 보니까, 
아멘 Amen 이 '남자'를 의미하는 말이 아닌데, 
(아멘은 아람어로, '동의한다', '진실로 그렇게 될지어다' 라는 뜻인데) 

남녀평등을 지지한다고, 'Amen Awomen' 이렇게 마친다고 합니다.
정말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와요. 

올바른 국가관, 그것은 국민의 신앙 양심을 일깨워서 
나라를 올바른 길로 이끄는 거죠. 

18세기에 영국이 노예교역을 통해 엄청난 국부를 축적할 당시에
이건 잘못된 것이다 라고 주장하며 노예제도 폐지를 주장했던 
윌리엄 윌버포스와 같이 

이 나라 이 민족이 타협하지 않는 공의로운 질서를 주장하면서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정치지도자들이 나와야 됩니다. 

그것을 신앙 양심으로 뒷받침해주는 국민들의 지지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아니라, 양심을 따라 행동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나라를 지켜 가야 하는 것입니다. 

국가의 권세 위에 하나님의 권세가 있고,
그리고 국가는 악을 행하는 자들을 심판하며, 
선을 보호해 주어야 하며 
그리고 국민들의 양심을 일깨울 수 있는.. 그런 정치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 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양심을 일깨우는 것은, 기독교 신앙 밖에 없어요. 
예수 믿는 신앙 밖에 없어요. 

여러분, 이 땅에 이 나라와 민족가운데, 예수님을 있는 이들이 많아져야 하는 
것은 양심이 살아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 믿는 사람 가운데도 양심이 무너지는 경우가 있죠.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그래도 양심이 살아 있는 사람은 기독교인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진정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 시민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신앙 양심을 따라 행동함으로, 이 나라 이 민족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나라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