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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4:27~42 제자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을 먹고 사신 예수님

LNCK 2023. 2. 8. 13:57

◈제자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을 먹고 사신 예수님    요4:27~42   설교녹취, 정리

코로나가 우리에게 확인시켜 준 것이 있죠. 정말 빨리 감염된다는 것입니다. 
지구의 어느 한 곳에서 바이러스균이 검출 되거나 발견되면 
순식간에 전 지구적으로 온 인류에게 전파되는 거예요. 

어쩌면 이 바이러스의 전파력, 감염력이 이럴진데 
우리의 신앙도 그래야 하는 게 아닌가? .. 이런 생각을 하게 돼요.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이라' 행24:5

내가 분명한 신앙인이라면, 그런 전파력이 있고 
반드시 누군가에게 복음을 감염시키는 감염력, 전파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을 단 한차례 만났지만 
예수님을 제대로 만난 한 여인의 그 전파력, 
본인의 인생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인생의 답을 얻었을 때 
어떻게 받은 복음을 남들에게 전파했느냐? .. 그걸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27절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가 끝날 무렵에 제자들이 온 것이죠. 
어쩌면 여인은, 제자들과 눈 한번 마주치지 않고 바로 떠난 거 같습니다. 
부담스러웠겠죠.

부담스럽기는 제자들도 마찬가지예요. 
어떻게 랍비이신 우리 선생님, 예수님께서 저렇게 천한 여인, 
결코 상종하거나 대화해서 안 되는 여인과, 
단 둘이서 저렇게 얘기를 나눌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입으로 발설하지는 못하고, 꺼내지는 못하고.. 속으로 생각을 하는 것이죠. 

'무슨 대화를 하셨습니까?' 
궁금하지만 입에 올리기 거북스러운 질문이었죠.

근데 여자는 지금 어떻게 되었습니까? 
제자들이 오자마자 거기를 떠나버린 이 여인은.. 본문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28~30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를 만나서 대화가 끝나자 
바로 자기 동네로 돌아갔는데, 
'물동이를 버려두고 돌아갔다'는 거예요. :28
얼마나 급했던지 그 물동이를 팽개쳐 버렸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대부분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사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죠. 그들도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뭔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이에요. 

마4:22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그들의 전 재산 과도 같은 그 배를 버려두고, 
아버지가 물려주신 그 어업을 지켜야 할 터인데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갔다는 거예요. 

베드로와 안드레도 마찬가지였죠.
그물을 손질하다가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 라고 했을 때 
그들은 그물을 버려두고 따랐었죠.

△본문의 여인도 마찬가지죠. 
물동이를 버려두고 갔다는 거예요.
그만큼 더 중요하고, 긴급한 일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제대로 만났을 때 일어나는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죠.
우리는 각자 뭔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게 마련이라는 것이죠. 

문제는 뭡니까?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걸 다 움켜쥐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게 문제고, 
심지어는 '내가 예수님을 따라가면 뭘 더 얻을 것이 있나?' 해서 따라가는 게 
문제라는 거죠

예수님은 '내가 세상 것들을 줄 테니까.. 네가 원하는 걸 다 이루어 줄 테니까 
나를 따르라...'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잖아요. 

우리는 그걸 분명하게 하지 않기 때문에, 늘 헷갈려 하는 거죠. 

막10: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그 부자 관원을 사랑하기 때문에 정직하게 얘기 해 주셨어요. 

'네가 가진 모든 소유(애착, 우상)를 버려두고 나를 따르라!' 

그랬더니 이 관원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자기가 가진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르기에는 너무 고통스러운 거예요. 

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우리가 뭔가를 버려 두고 가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그 점에 있어서 얼버무리거나, 뭔가 모호하게 얘기하지 않으셨어요.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했다면 
'내가 뭔가 버려 두고 가야 할 것이 무엇인가?' 
이게 정리가 안 되면, 따라 갈수록 괴로워요. 따라갈수록 갈등이 증폭됩니다. 

그 욕심은 하나도 해결되지 않고, 
예수 안 믿는 사람보다 얼굴에 근심이 더 많고.. 
양다리 걸치다 보니, 자기 삶이 더 힘들어요.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까. 
눅14:28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연이어 주님께서는 '또 왕이 전쟁을 치를 때도 
전세를 계산해보고, 승리의 확신이 서지 않고 누가 전쟁을 치르느냐? 
아니면 미리 화친을 취해야 하는 게지!'   14:31~32

이 말씀은 무슨 말씀 뒤끝에 하신 말씀이에요? ↙
눅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주님께서는 이 점에 있어서 조금도 양보가 없으십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네가 뭔가 포기하지 않고는, 나를 따르지 못한다는 거죠.

금년에 저희 교회는 전교인 성경통독을 하고 있습니다. 
아침이나 저녁에, 매일 약 15분의 시간을 내서 성경을 통독한다는 것이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 통독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일들을 버려야 돼요. 
성경통독을 다른 어떤 일보다 우선순위를 정해 두지 않으면.. 못 읽습니다.

저희 교회는 아무 사역이 없습니다. 
No Ministry Church 입니다.
'그 외 모든 것들을 뒤로 하고, 예배와 말씀에 집중하자!'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우선순위를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근데 이 여인은, 물동이를 버릴 만큼, 
분명한 자기 삶의 우선순위가 정해졌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사도요한이, 요4장에 들어와서
3장의 니고데모와 비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니고데모는 '거듭나야 한다'는 그 말의 의미도 
그 당시에는 다 알아듣지도 못하고, 예수님을 떠났어요.

그러나 본문의 사마리아 여인은, 유대인도 아니고 
무슨 제사장의 부인도 아니고, 여섯 번째 남자하고 같이 살고 있는 이 여인은 
단번에 어쩌면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 들었어요. 
그리곤 물동이를 버려두고 시내로 가서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증거했죠,

△물론 전도하는 게 조금은 어슬프게 했겠죠. 그가 얼마나 예수님을 알겠어요?
그래서 여인은 좀 미진한(불충분한) 표현을 쓰고 있어요.
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이는 그리스도 일지 모르지 않느냐?' 이런 뉘앙스에요. 
확정적으로 단언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분이 분명히 그리스도다!' 이렇게 표현하진 않았지만 
여인은 자기가 아는 한, 자기가 만난 예수임을 알게 된 그 한도까지만 
분명히 증거하고 있어요. 

우리가 예수님을 전할 때, 다 알아야 전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에요.
신학교 졸업하고 목회자가 되어야, 전도할 자격을 갖추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누구든지 예수를 만난 사람은 
자기가 아는 정도, 만난 정도, 내가 경험한 예수를 전하면 돼요. 

여인은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 내가 만난 분은 
내 과거를 다 아시는 분인데,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겠느냐?' 
그러니까 '와서 그 분을 한번 만나보라!'

다만 분명한 건 뭐에요? 이 여인은 그동안 자기가 피해 왔던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한 번도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 섞이고 싶지 않는.. 
자기를 적대했던 사람들 가운데로 뛰어드는 사람이 되었어요.

자기가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 여인이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났더니
사람들한테 나아가는 게, 하나도 두렵거나 번거로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진정 복음을 만난 사람들은 
이런 담대한, 위험을 무릅쓰는 곳으로 당장 뛰어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달려가는 것은, 또다시 어떤 상처를 입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거란 말이죠. 

우린 다 계산적이어서, 다 따져보지 않습니까. 
'이런 말을 하면, 저 사람은 어떻게 반응을 할까?' 
'이런 말을 하면, 저 사람과 어떤 관계가 앞으로 펼쳐질까?' 
이게 너무 복잡해서.. 다 체면으로 사는 거 아니에요?

여인은 예수님을 확실히 만나고 나니까 
더 이상 자기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게  되었단 말이에요. 

근데 우리가 정말 예수를 만나면 
물동이 만 버려두는 게 아니라, 
자기 자존심도 몽땅 다 버리고.. 달려간다는 거예요.

우리는 뭐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누구한테도 얘기를 쉽게 못 붙입니다.
교회를 몇 십 년을 다녀도, 한번 제대로 떳떳하고 당당하게 
복음 한 번 제대로 못 전하지 않습니까? 

그게 안 되는 이유는 뭡니까? 이유는 단 하나에요. 
(예수님을) 못 만난 거에요. 아직 안 만난 거에요. 
솔직히 말하면, 아직 그 Jesus 가 누군지 모르는 거예요. 
그 때문에 다 우리가 (니고데모처럼) 이러고 있는 거죠.

*58세에 거듭난 여의사 이야기 http://blog.daum.net/rfcdrfcd/15972456

 

△참 저는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가 어떻게 보면 너무 새신자 과정, 무슨 과정, 무슨 사역자 훈련.. 
이런 걸 시키다가.. 진짜 교회가 오히려 무기력한 성도를 만드는 건 아닌가?' 

어쩌면 우리는 교회에 다니는 게 너무 중요해서 
교회 오는 길에 우리가 돌봐야 될 '강도만난 자들'을 다 지나쳐서 
저와 여러분이 여기에 모여 있는 건 아닌가? 저는 그런 생각을 해요. 

과연 제가 주일 아침에 설교하러 가는 길에 
강도 만만 자가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을 보고서, 
또는 그런 문제 가운데 힘들어 사는 사람들을 보고서, 
그분을 병원에 입원시켜 놓고 오느라, 그분을 만나 상담해 주느라

오늘 교회에서 설교를 못 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 이게 맞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죠. 

어쩌면 오늘날 교회다니는 게 중요하고, 예배 참석과 교회 섬기는게 중요해서
그렇게 해서 우리는 
정작 예수님이 돌보라고 우리한테 기회를 주신 수많은 사람들,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 곁에 두신 사람들... 
이 사람들을 그냥 눈길 한번 안 주고 지나치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해봐야 되는 것이죠. (그래서 No ministry를 생각하는 거죠)

우리가 깨어 있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말씀을 읽고,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어떻게 하면 적용해 볼까? 날마다 그렇게 고민하는 게 아니라 

단 한마디 말씀이라도 들었으면 
그 말씀대로 살아보는 경험이 있어야 
그 다음 말씀을, 어떻게 보면 갈망하는.. 그런 신앙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다 순수한 마음이 되죠. 
예수 따라 가는데 처음부터 뭐 복잡한 생각을 가지고 따르지는 않아요.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다가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예수님을 위해서 하는 일(교회 봉사 같은 일)이 더 중요해지는 것이죠. 

예수님보다도, 예수님을 위해서 한다고 하는 일이 더 중요해지고, 
내가 맡은 사역이 점점 더 중요해지다가... 

시간이 흐르면, 그 사역 보다도, 
그 사역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실이 더 중요해져서 
내가 가장 중요한 사람이 어느덧 되어있는 거예요. 

수많은 사역자들이 그래서 넘어지는 거예요. 
예수님보다도, 예수님의 사역이 더 중요하고 

(눈에 안 보이는) 예수님의 사역보다도 
(보이는) 사역자인 내가 더 중요해져서 
우리는 정작 이 사마리아 여인이 보여주었던 
이런 결단, 이런 믿음이 담대한, 이런 믿음의 모험, 이런 복음의 즉각성, 
복음의 폭발력... 이런 걸 다 잃어버린 게 아닌가요? 오늘날 교회가! 

우리 교회가 회복해야 될 것은, 
다시 정말 복음의 권능이 아닌가? 이런 것이죠. 

예수님께서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는다' 하셨는데,
권능(두나미스, power)은 다이너마이트나 마찬가지여서
그 권능이 너에게 임하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다이나믹 하게 살아야 그게 정상인데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시스템 속에 안주하다가 
시스템이 요구하는 것들에 길들여지다가 
그런 야성이나, 그런 정말 원시적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리는 건 아닌가요? 

이런 걸, 이 여인을 보면서, 우리 각자가 한번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제자들은 지금 뭐라 그럽니까? 31~34절입니다.

▲31~34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예수님은 지금 12 제자를 지금 가르치고 계십니다.
제자들이 지금 '선생님, 식사를 좀 하시죠?' 그랬더니 

예수님은, 여인에게 우물가에서 물을 소재로, 그 여인을 깨우쳤듯이 
제자들에게는 지금은 양식을 소재로, 동일한 패턴의 대화를 시작하십니다. 

그리고는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  :32

'아니 지금 배고프실텐데 식사하십시오!' 했더니
'나는 지금 이거 말고,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 
그 양식을 나는 지금 먹은 것이다' 이런 뜻으로 말씀하시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이 뭘 드시고 지금 저러시나?
그 여인이 혹시 먹을 걸 갖다드렸나? 아니면 다른 사람이 음식을 갖다 드렸나?'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 거에요.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4

제자들은 육신의 양식만을 양식으로 알았죠. 
그러나 예수님은 영적 양식을 참된 양식이라고 생각하셨어요. 
그 영적 양식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구속사업을 완성하심' 입니다. 

 

세상에서는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만큼 '먹는 일'을 중요합니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 본능이라죠.

근데 예수님은, 그 공식을 깨는 것입니다.
나의 양식이 있는데, 내게 가장 중요하고 중대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밥을 먹음으로써 힘을 내듯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삶에 활력과 에너지를 얻었다는 겁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음식을 먹음으로도 육신이 생명력을 얻음과 같이, 
성도는 하나님의 일을 참되이 할 때에.. 영적 생명력을 받습니다. 

예를 들면, 과거에 못 살던 시절에
엄마는 배가 고프지만, 자기 밥을 숟가락으로 들어서 자녀 그릇에 보태줍니다.
그래서 자녀가 밥을 먹는 것을 보면, 엄마는 '배고픈 줄 모른다'고 하잖아요.
아이가 밥을 배부르게 먹는 모습을 보면서.. 삶의 활력과 에너지가 생긴 겁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다는 거죠.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누가 식사를 갖다드리지도 않았는데.. 나는 배부르다..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 바로 그게 내 삶의 에너지의 원천이다..
이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뚯을 행하는 자에게는, 이런 귀한 은혜를 주십니다. 
이게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라는 거죠.  :32

△사람이 어떤 일을 정말 좋아하면, 밥 먹는 것을 그리 신경 안 씁니다.
게임하는 아이들을 보십시오. 밥도 안 먹고 게임에 열중합니다. 
밥 먹는 시간이 아깝다며, 컵라면이나 치킨 조각을 먹으면서.. 동시에 게임하죠.

어른들도 일에 열중하면, 정말 식사 시간도 그른채, 그 일에 몰두합니다.
배고픈 것도, 잠시 잊어버리나 봅니다. 
그게 너무 과열되어서.. 결국 나중엔 건강을 잃어버리기까지 하지요.

예수님도, 이렇게 전도하시는 일에 너무 열중하신 나머지
지금 '식사하실 겨를'도 없으십니다. *막3:20참조
밥 먹는게 중요하지 않은 겁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32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 :34
하셨는데, 지금 당장 그 일은, 여인을 전도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이 변화되고, 물동이를 버려두고 시내에 나가서
전도하는 모습을 보시고, 너무 감동되신 것입니다. 너무 좋으신 것입니다.

본문에 예수님의 표정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 표정관리를 하셔여 될 정도로,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셨을거예요. 
그러니 지금 '밥 먹는 게 중요치 않은' 거죠.

오늘 우리에게도, 그런 일이 있습니까?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밥 먹는 것도 게의치 않고, 잠 자는 것도 게의치 않는...

매일 같이 그렇게 살지는 못 한다 할지라도, 
적어도 1~2달에 한 번은, 그런 날이 있어야죠!

△이런 양식을 가지면, 그게 너무 좋아서, 남을 먹이기를 애쓰게 됩니다.
여인이 사마리아 성에 들어가서, 전도한 것과 마찬가지죠.

오래 전에 조카아이들은 밥투정을 하고
엄마는 먹이려고 하여 실랑이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보다 못해 제가
“먹기 싫다고 하면 굶기라!”고 한 마디 하면

아이는 아이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분위기가 묘해집니다.

아이는 자기를 위해 먹는 것이고,
안 먹으면 자기 손해인데
마치 엄마를 위해 먹는 것인 양.. 떼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속을 들여다보면
그 어린 아이가
이렇게 애를 먹여도 자기를 사랑하는지..
엄마의 사랑을 테스트하는지, 그 사랑을 즐기는 것인지
그러면서 자기의 주가를 올리려는 것입니다.

밥투정을 할 때 “먹기 싫으면 그만 둬!”하고
밥상을 치우면 엄마는, 그 아이에게 계모가 되고
엄마의 사랑에 대한 아이의 믿음은, 심하게 상처받게 됩니다.

그러니 엄마는, 아이의 버릇이 나빠져도
그 놈의 사랑 때문에,
계모가 아니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달래서라도 먹여야 합니다.

△이런 성도는 '피곤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아무 조건이 없는데도 항상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피곤하지 않습니다.

밥을 안 먹어도.. 배고프지 않습니다.
밤에 잠을 많이 못 자도.. 낮에 피곤하지 않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 때문이죠.

사람들은 늘상 '너무 피곤하다'고 말합니다.
애들 때문에 피곤하고, 남편 때문에 피곤하다고 합니다.

남편보고 밖에서 밥 먹고 들어오라고 그러고, 
밥해 주는 게 피곤하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일 나쁜 남편이 '삼식이'라고 합니다.
세끼 다 먹는 남편이 제일 나쁘다는 겁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제일 좋은 남편은 '무식이'입니다.
집에서 안 먹는 남편이 좋다는 말입니다.

남편 때문에, 아이 교육 때문에 피곤하고, 전부 피곤하다고 합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겁니다. 왜 이렇게 피곤합니까?
이렇게 살기 좋은 세상이 왜 피곤합니까?

우리는 항상 예수님과 함께 하면 늘 소망을 가지고 살고, 기쁨을 가지고 살고,
메마른 땅이지만 광야지만 주님이 주신 기쁨으로 살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나라가 지금 세계에서 최고로 잘 사는 데도
모두들 너무 짜증내고 불편해 하고 괴로워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오는 영적인 궁핍 때문입니다.

영적인 핍절로 오는 병인데, 이것을 육적으로 자꾸 해결하려고 하니까
더 피곤해지고, 더 갈급해지고, 더 목말라지는 겁니다.

오늘 대학이 다 피곤해하고, 정치가 다 피곤해하고, 기업이 다 피곤해합니다.
이 피곤이 어디서 왔냐, 무엇 때문에 피곤하냐 말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피곤합니다. 영적인 힘이 없으면 피곤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우리의 심령은 목마릅니다. 배고픕니다.
정에 목말라서 정욕을 쫓아 헤매나, 정을 채워줄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삶을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막3:3절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나옵니다.     주1) 

 


▲35절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본 절에서 예수님은, 전도 사역을 
농작물을 추수하는 일에 비유하십니다.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이 말은 팔레스틴의 속담으로 추정합니다. 
그러니 밭을 살펴보되, 서두르지는 말라는 의미였습니다.

경험 많은 농부들은 계절을 보고, 들판을 보며 
수확기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늘 밭을, 관심 갖고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러나"라는 접속사로 연결되어 있죠.
예수님은 그 유대 속담을 완벽히 지지하신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 반대적 의미로 말씀하시겠다는 거죠. "그러나"로 시작하니까요!

예수님 말씀은, 제자들도 영적 추수를 위한 적절한 때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하며, 늘 추수할 밭field을 관심갖고 보고 있어야 하되, 
"그러나" 그 추수 시기는.. 부지불식 간에, 급작스럽게 닥칠 수도 있다는 거죠.

지금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전도해서, 많은 사람들을 마을에서
예수님께로 데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30

밀밭을 추수할 때가 되면, 그 밭의 색깔이 흰색으로 보입니다. 
유대인은 백의민족입니다. 그리고 흰색 터번을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 마을에서 나아와 예수님을 만나러 오는 군중들은 이와 같이
마치 추수 때가 되어 희게 된 밭의 이미지와 같았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제자들이 늘 추수할 밭을 
부지런히, 열심히 관찰하고 있어야 하며, 
전도는 단순히 편리하다고 생각할 때 하는 것이 아니고, 
완벽한 순간까지 기다린다는 것도 아니며, 
'희어져 추수할 날'은 언제든지 닥칠 수 있으므로, 늘 깨어 준비하라는 뜻이죠.

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삯도 받고"란 말씀은, 이어지는 구절이 해설하죠. 
곧, "삯"은 다른 것이 아니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받음입니다. :36

그것은,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여 영생에 들어가도록 
열매를 모으는 일입니다. 

믿음에 순종하여 돌아오는 자들은, 그 전도자에게는 영원한 상급이 됩니다. 
천국에서 '전도의 상'이 제일 크다고 말들 하잖아요.

그러므로 바울도 복음으로 돌아온자들을 가리켜 말하기를,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
이라고 하였고(빌 4:1),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라고 하였죠. (살전 2:19).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이 구절은, 전도의 기쁨, 영혼 추수의 기쁨을 설명한 구절입니다.

보통 복음이 전해져서 영혼의 추수로 결말짓기까지는
씨를 뿌리는 자, 자라게 가꾸는 자, 추수하는 자가 
똑같지 않고,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본문에도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나오는데, '자라게 하는자'도 있죠.고전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본문의 여인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이미 세례요한의 메시지를 들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다 함께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꼭 예수님이 혼자, 사마리아 여인과 그 동네 사람들의 전도의 열매를, 
그 결과를 혼자 독식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이 그 말씀이죠.

37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38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그래서 오늘 우리가 뭔가 추수를 하고 있다면,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다면

우리는 다 '복음에 빚진 자'에요. 
믿음의 선조들에게 '기도에 빚진 자'들입니다. 

복음은 혼자서 전해지지 않습니다. 
복음의 수확은 혼자 거두는 게 아니에요. 

이미 뿌린 씨앗이 열매 맺는 것은
우리가 주님께서 불러주셨기 때문에 
추수할 이 놀라운 영광에 참여하라고 우리를 허락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런 추수가 주어지는 거란 말이에요. 

△제가 (50세 경에) 신학교에 가겠다고 기도하는 중에, 세미나리 투어를 했죠. 
풀러, 바이올라, 벤쿠버 리전트 신학교 등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리전트 신학교 근처의 게스트 하우스에 하루는 지내게 되었는데,
그 밤에 누가 찾아와서 똑똑똑 노크를 했습니다. 

야~ 몇 십 년 만에 친구가 저를 찾아 거기로 온 거예요. 
고등학교 때 친구인데, 그는 제가 신학교 간다는 얘기를 듣고 
너무 기뻐서 그냥 온 사방에 수소문을 해가지고 
거기까지 저를 밤에 찾아온 거예요.

그 친구는 고등학교 때, 당시 불신자였던 저를 위해서 기도했대요.
그때 한 번도 저한테 예수 얘기를 한 적은 없어요.
그러다가 캐나다로 이민을 와서 살다가, 제 얘기를 또 들었던 모양이에요.
 
근데 제가 그 친구의 얘기를 듣는데, 소름이 쫘악 끼치는 거 있죠. 
'아~ 이렇게 내가 기도에 빚을 지고 살고 있구나!' 

그 친구도 놀라 거죠. 자기가 고등학생 때 급우를 위해 기도했는데, 
그 기도가 응답될 줄이야.. 자기도 그때는 몰랐을 수도 있었겠죠.

그런데 우리는 그런 기도에 다 빚진 자입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들에 빚졌고, 
이 땅에 백 년~ 120년 전에 온 선교사들에게 
다 빚진 자란 말이에요. 

우리가 잘나서 한국교회가 지금 여기까지 와 있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도 분명해지는 것이죠. 

우리가 어떻게 해야, 다음 세대가, 그 다음 세대가 
주님 오실 때까지 복음이 계속 이어질지를 
우리가 같이 고민하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노력한 것을 그냥 참여할 뿐이라는 거예요. :38
얼마나 많은 믿음의 조상들이 기도했고, 얼마나 많은 순교자의 피가 
이 땅에도 흘렀습니까 
단 하나도.. 자랑거리나, 교만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39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여러분, 요한이 이 복음서를 쓰던 그 당시의 분위기는 
이런 내용을 써 놓으면, 요한복음 책을 읽다가 
그 책을 다 찢어버릴 듯한 분위기였을 거예요.

'뭐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를 믿는다고요?' 하면서요.

그리고 이 여인이 지금 전도했기 때문에, 
그의 말을 듣고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 여인이 믿을만한 여인입니까? 존경받는 여인입니까? 덕 스럽습니까?  No!

여러분 이것은 진리의 힘 때문이란 말이에요. 여인의 힘이 아니에요. 

마찬가지로 오늘날에 나 때문에, 우리 때문에 복음이 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의 힘 때문에! 
그분의 능력 때문에! 
복음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선교지에 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에게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 짧은 말 한마디 듣고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습니다. 

평생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소리를 처음 듣는 사람에게는,
감동으로 들릴 수가 있는 거죠.

그러므로 '내가 전도할 자격이 되면, 복음을 전하겠다'
그러면 평생 복음을 전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누구도, 복음을 전할 만한 완벽한 자격을 갖추고 있지 못하지요...
그냥 입을 열어 담대히 말할 뿐이지요!

더 놀라운 일이 벌어닙니다.

▲40절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사마리아인들이, 이내 성내로 예수님을 초청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틀을 거기서 머무셨어요.
거기서 부흥회 하셨습니다.  ↙
 
▲41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지금 공교롭게도, 요한복음의 기록으로 볼 때
예수님의 첫 부흥회는, 사마리아 성에서 일어났습니다.

지금 사도요한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일까요?
이 말입니다. ↙

누가 진정한 그리스도 인입니까? 
예수님을 제대로 만난 사람들이라는 거죠. 

누가 전도자입니까?
열두 제자입니까, 지금 이 여인입니까?

우리는 선입견이 너무 많아요. 우리는 너무나 편견에 젖어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더 많은 편견을 가지고, 더 많은 오해를 하고 있어요. 

누가 진정한 복음을 깨달은 사람입니까? 
누가 진정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입니까? 

지금 계속해서 요한은 그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죠. 
진정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그 어떤 차별이나, 편견도 배제되어야 한다는 거죠.

무시당하던 사마리아 사람들에게서, 놀라운 말씀의 부흥이 있어났습니다.
그들은 표적을 보고서가 아니라, 여자의 전도와
예수님의 말씀(설교)을 듣고서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은 것입니다.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 여자에게 감사를 표해요. 
'처음엔 네가 전해줘서 우리가 그분을 초청했지만 
이제는 네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믿게 되었다.' 

이 여자에게 아마 누구로부터 진정 감사하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거에요.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이 전하면 
언젠가는 '고맙다. 내가 네 때문에 예수를 만났다'
그런 얘기를 듣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것보다 더 귀한 상급이 없습니다. 그것보다 더 큰 영광이 없어요... 

.....................................................


주1)

막3:3절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나옵니다.   

손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 가슴에 자기 뜻을 꼭 움켜잡고 있듯이,
손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는 사람입니다.

움켜쥐고 있는 바람에 형제들과 주고받고를 못하고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곧 자신의 고집 때문에 완고해져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과 또한 형제자매들과 단절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혹 나도 지금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어서
형제자매들과 소통하지 못하며, 주님을 뜻으 벗어나 있지는 않을까요?

나는 그것을 언제부터, 대체 왜 손에 움켜쥐게 되었을까요?

그런데 묘한 것은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손을 꼭 쥐고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분명, 에덴에서부터 쥐었습니다.
‘선악과’를 손에 움켜쥐었고, 교만과 불순명과 탐욕을 움켜쥐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왜 쥐었을까요?
사실, 그것을 따먹고 높아지려 했지만, 오히려 추락이었습니다.

금단을 어기고 자유를 행사했지만,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속박이었습니다.

욕심 부려 자신을 채웠지만, 오히려 단절과 죽음이었습니다.

이처럼, 무엇인가를 움켜쥔다는 것은 
곧 추락이요 속박이요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곧 원죄를 뒤집어 쓴 그리스도인을 표상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꼭 움켜쥐고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운데 서라. 네 손을 뻗어라” 막3:5

오그라든 손을 편다는 것은, 단지 움켜 쥔 것을 내려놓는 것만이 아니라,
손에 못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단지 움켜 쥔 것을 내려놓는 것을 넘어서
자기 자신을 건네주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께서는 손을 펴시어 십자가에서 못을 받아들이시고,
구원의 피, 화해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리하여 첫 아담이 움켜쥔 손을 펴시고, 새 아담이 되셨습니다.
죽음과 어둠을 몰아내시고 생명과 빛이 되셨습니다.

그렇게 마른 손이 펴지는 영혼의 치료를 받아야,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으로, 배부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선배 목사님과 택시를 함께 탄 적이 있습니다.
택시 기사님께서는 우리를 보고는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목사님이시네요. 사실 저도 신자인데, 신앙이 식은 지가 꽤 되네요.
저 같은 사람은 이제 신자라도 할 수 없겠죠?
저도 목사님들처럼 거룩히 살아야 하는데....”

그러자 선배목사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기사님은 수많은 사람을 원하는 장소에 편하게 태워다 줍니다.
이렇게 자신의 일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기에서 손님을 반갑게 맞이하고 친절하게 모신다면
이것이 주님이 주신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겠죠!”

기사님의 표정이 금세 밝아지더군요.
그리고 곧바로 “이번 주부터 다시 교회 나갈게요.”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그때 목사님께서 “교회 안 나가면 벌 받아요.”
라는 식으로 말씀하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이렇게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평화를 빌어주는 것이
전도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70 제자들을 파견하신 것처럼
오늘날 우리들 역시 세상에 파견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