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삼하13장 다윗이 만난 '공의의 하나님'

LNCK 2023. 2. 10. 11:59


◈다윗이 만난 '공의의 하나님'           삼하13장         2016.06.02.듣고 정리

▲서론 /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다

다윗의 장자 암논이 자기 이복동생 다말을 강제추행 하고 버립니다.
다말의 오빠 압살롬은, 2년을 벼른 후에 암논을 죽입니다.

그리고 자기 외조부 그술 나라로 도피하는데, 갈릴리 북부 골란고원 지역이죠.
그 후 세월이 3년이 흘러가는 동안에 

삼하13:39 '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을 향하여 간절하니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

'다윗이 위로를 받았더라' 라는 말씀은
세월이 오래 지나다 보니까 
암논이 죽은 것에 대한 슬픔으로부터 회복되어 갔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고 나니까 아들 압살롬이 그리운 거예요. 
그때 눈치를 보면서 다윗의 의중을 알아 차린 요압이 지략을 펼칩니다. 

드고아 출신의 한 지혜로운 여인을 택해서 
이 여인에게 '두 아들을 가진 어머니의 이야기'를 왕에게 말하게 합니다. 

그 내용은 '두 아들이 들판에서 싸우다가, 한 아들이 다른 아들을 죽입니다.
그러니까 동네 사람들이 '형제를 죽인 자라고, 
저런 사람은 이스라엘 가운데 있어서는 안 된다' 고 해서 
그 살아있는 아들을 끌어내 죽이려고 합니다. 

이 여자가 다윗 왕을 찾아와서, 
'나머지 내 아들이 맞아 죽어서, 우리 집에 대가 끊어지면 어떻하냐고..'
그 남은 아들을 살려 주기를 간절히 간청합니다.

다윗이 '내가 살려주마!' 합니다.

드고아 여인이 말한 얘기는 소설처럼 만들어낸 이야기입니다. 
그 예를 들어서, '압살롬이 암논을 죽였지만 
이제 압살롬을 용서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세요.' 
라는 얘기를 함으로써, 

실상은 아들 압살롬을 그리워하는 다윗에게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는, 명분을 제공하는 겁니다. 
요압의 지략이었죠.

그래서 못 이기는 척 하고, 다윗은 요압에게 
압살롬을 귀환 시켜라고 명합니다.
'그러나 내 얼굴은 대면하지 못할 것이다.'  삼하14:24

▲문제 제기

이 본문에서 성경 주석 학자들이 주목하고 있고 
우리도 고개를 갸우뚱 하게 되는 것은 뭐냐면 

압살롬이 형을 죽였는데 
이 악행에 대해서, 다윗으로부터 어떤 처벌도 없다..는 겁니다. 

그 죄를 묻지를 않는다는 거예요. 
도망 간 것도, 압살롬이 그냥 도망 간 거예요. 
다윗이 추방을 시킨 게 아닙니다. 
자기가 스스로 살자고 도망간 거예요. 

그래서 이게 문제인게, 
만약 다윗 왕이, 암논에게 다말을 강제추행한 패륜적 범죄행위에 대해서 
그에 상응하는 충분한 벌을 내렸더라면,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는 일이 아마 발생하지 않았을 겁니다.

또 압살롬에게 충분히 벌을 내렸더라면 
이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압살롬이 
6년 뒤에는 모반을 일으키고, 국가 전체가 위기에 빠지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러니까 압살롬에 대해서 벌을 가해서 
충분히 자기 잘못을 깨달을 수 있게끔 만들었다면 
이렇게 아버지에 대해서 모반을 일으키는 일도 
미연에 방지를 할 수 있지 않았겠느냐? .. 라는 아쉬움이 있지요.

다윗은 이 일을 듣고 '심히 노했지만' 암논을 징계하지는 않았습니다. :21

동시에 그 이면에는 어떤 우리의 염려가 또 있냐면,
다윗이, 옛날에 엘리 제사장이 그랬던 것처럼 

엘리가 자기 아들들의 잘못을 방치했던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 보다 자기 아들들을 더 사랑하고 있는 거 아니야?' 
하는 염려가 생긴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우리의 염려가
사실은 핵심을 빗나간 염려 라는 겁니다. 

 

본문 삼하13장의 초점이 어디에 맞추어지고 있는가 라는 것을 
정확하게 우리가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지금 이 본문의 초점은 
다윗이 행해야 되는, 
아들 들을 향한 하나님의 공의를 행하는 게 문제가 되는 게 아닙니다.
이게 초점이 아니라는 거예요. 

본문이 우리들에게 보여주려는 초점은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공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암논이, 이복동생인 다말을 추행하고 패륜적 범죄를 저지릅니다. 

다윗의 자기 예쁜 딸의 인생을 파탄지경으로 빠뜨립니다. 
그래서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암논과 압살롬에 대해서 
'내가 공의를 행해서 심판해야 된다'는 생각을 할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겁니다. 

 

왜냐면 다윗의 생각에는 
암논의 패륜적 행위와, 압살롬이 형을 죽인 사건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공의가, 자신에게 실행되고 있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밧세바 사건으로 하나님께 벌을 받고 있기에,
이런 사건들이 생긴 게 아니냐...' 하고 인식했기 때문에, 
다윗은 지금 자숙하고 있지, 아들들을 징계할 입장이 아니었던 것이죠.

'암논 네 이놈!, 여동생 다말을 강제추행한 너 이놈, 
왜 네가 그런 못된 짓을 했냐? 
이제부터 내가 너에게 하나님의 공의를 행해야 되겠다. 
이러 이러한 벌을 받아라!' 이렇게 할 수 없었다는 겁니다.

압살롬에게도 마찬가지였죠.

다윗이, 자기 자식들에 대해서 
하나님보다 더 많이 사랑해서가 아니라 

다윗은 평소에 하나님을 매우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암논과 압살롬에 대해서 아무런 징계를 행할 수 없었던 거죠.

다윗은 자기가 지금 누구를 징계할 입장이 아니라,
자기가 지금 하나님의 징계를 기꺼이 받는 입장에 서 있었던 겁니다.

▲다윗이 만난 세 모습의 하나님 

1) 만군의 여호와
골리앗 앞에서 다윗이 하나님을 만납니다. 
모든 사람이 골리앗 앞에서 벌벌 떠는 이유은,
그들 마음에는 하나님보다 골리앗을 더 현실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소년 다윗은, 그 전장터에서
골리앗보다 하나님을 더 현실로 여겼기 때문에 
골리앗 앞에서도 벌벌 떨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때 다윗이 이런 말을 합니다.
삼상17:45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만군의 여호와는 The Lord of hosts            *야웨 체바오트
45절에 설명하는 대로 '군대의 하나님'이란 뜻이죠. '전쟁의 하나님'도 됩니다.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를 어려서부터 현실로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삼상17:34~35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그러니 골리앗을 만나서 이긴 것이,

어쩌다 우연으로 마른 하늘에 번개 맞듯이 생긴 일이 아니고, 

'만군의 하나님'은 어려서부터 다윗이 체험해서 만난 평소 신앙이었죠.

그 후로도 다윗은 수많은 전쟁에서 연전연승 합니다.

2) 사랑과 은총의 하나님, 헤세드의 하나님
하나님은 나단을 통해서, 다윗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대상17:7~18 '또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 떼를 따라다니던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들의 이름 같은 이름을 네게 만들어 주리라'

다윗은 정말 세상 모든 성도들의 '엄친아' 같습니다.
이런 복을 내려준다면, 세상에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지 않을 성도가
누가 있겠습니까?
'목동을 왕으로 삼아주시고, 모든 대적을 다 멸해주시고, 
세상에서 존귀한 자로 삼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계속 이어서 하나님은 이렇게 다윗을 축복하십니다.

17:12~13 '그(네 아들)는 나를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니 
나의 <인자>를 그에게서 빼앗지 아니하리라...'

여기 나오는 '인자'가 헤세드입니다.
한국말로 '인자한 할머니' 할때의 인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결단코 변함없는 언약적 사랑'을 뜻하는 인자(헤세드)'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인자(헤세드)하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헤세드의 하나님'은 다윗이 어려서부터 평생에 만나던 하나님이셨습니다.

시23: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위에서 '인자하심' 역시 헤세드입니다.  *선하심은 '토브'
다윗은 들판에서 양을 칠 때부터 '헤세드의 하나님'을 만나고 있었던 겁니다.

3) 공의의 하나님

다윗은 이렇게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헤세드의 하나님'을
자기 인생에 차례로 체험해 갑니다.

그런데 밧세바 사건 이전에, 다윗이 하나님께 징계를 달게 받았던 사건이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사건을 통해서, 다윗은 이제 
'공의의 하나님'을 아주 피부에 실감나게, 체험해서 알고 만나게 됩니다. 

물론 그 전에도 '공의의 하나님'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체험적으로, 두렵게는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나님을 공포스럽게 알고 있었다면
밧세바와의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겠죠.

다윗이 밧세바와의 죄를 회개하며 지은 시51편을 보면
14절에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밧세바와의 범죄는 나쁜 일이었지만,
다윗은 그 일을 통해, '주의 의'를 절실하게 배우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가 범죄했을 때, 그는 구원의 즐거움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쉽게 말해서, 밥을 씹어도 모래를 씹는 것 같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목전에서 쫓겨나는 듯한 기분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간절히 노래했던 것이지요.

시51: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잠언에 아들을 징계하라는 말씀이 종종 나옵니다.

잠3:12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잠13:24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그러니 다윗이 하나님께 징계를 받으면서도 '내가 주의 의를 노래하리이다' :14
라고 찬양하는 것은, 

그 징계를 통해 '의로우신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가 결국은 더 온전한 신앙인이 될 것을 내다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게 진정한 복이요,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으로 인해, 자기 죄값을 고스란히 받게 된 다윗
정말 꽃길만 걷던 것 같던 다윗의 가정에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일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장남 암논이.. 자기 이복동생 다말을 강제로 범합니다.
이때 다윗은 무슨 생각이 머리속에 떠올랐을까요?

아마 자기가 한솥밥을 먹는다고도 말할 수 있는 충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것이 머리에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하나님 앞에 자책하며 회개했을 것입니다.

또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이, 형 암논을 죽였습니다.
이때 다윗은 무슨 생각이 떠올랐을까요?
자신이 충신 우리아를 죽인 사실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지금 다윗이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의로우신 하나님"을
배워가고, 경험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성추행한 암논을 징계하지 않아서
압살롬의 살인 사건이 일어났고,

다윗이 압살롬을 성실히 징계하지 않아서
압살롬의 반역 사건이 일어났다'고 보는 것은,

그 말은 맞을지 모르나
지금 본문 삼하13장의 초점은 거기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본문 삼하13장의 초점은, 다윗이
암논의 범죄를 바라보면서,
압살롬의 범죄를 바라보면서

'나는 하나님께 징계를 받고 있구나' 하면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면서
"다윗이 공의의 하나님을 배워가고 있다"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거죠.

지금 다윗에겐 암논의 죄악이 눈에 들어올 수가 없어요. 
압살롬의 죄악이 눈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자기 죄값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는 과정이니까요. 

내가 이런 죄값을 받고 있는데 
어떻게 암논을 다윗이 벌할 수 있고,
압살롬을 엄히 징계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다윗이 암논, 압살롬을 그 당시에 처벌한다면,
지금 하나님이 공의롭게 나를 처벌하고 계시는데, 

다윗이 그 하나님의 처벌을 묵살해버리고

그 하나님의 처벌을, 다윗 자신이 뭉게버리는 꼴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지금 다윗은 신분이 왕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왕은 절대권력자입니다. 거의 신격화 된 존재입니다.

그런 왕이, 누구 한 명 사주해서 죽인다든지,
자기 마음에 드는 여인 한 명 빼앗아 오는 것은,
어쩌면 다른 나라 같으면.. 죄 축에도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른 나라의 왕이었으면, '공의' 이런 거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을 포함해서,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하나님께서 '공의의 하나님'을 가르쳐 가십니다.
그래서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세밀하게 회개하고 갚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지금 그 과정 가운데를 통과하고 있다는 거죠.

나단 선지자의 지적 앞에서 자기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지만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죄의 결과'를, 그는 책임져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점점 '공의의 하나님'을, 뼈저리게 실감하며 배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 두 사건 말고도, 다윗이 치른 '죄의 결과'는 더 많이 있지요.
우리 역시 신앙의 연조가 길어질수록
'만군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보다는 '공의의 하나님'을 배워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세상에서는 괴롭고 힘든 과정이지만
영원한 삶, 영생에서는 정말 '내가 주의 의를 노래하리이다'  시51:14
라고 찬송할 이유가 될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밧세바'를, 좀더 확장해서 상징적으로 적용해 봅니다.
(삼손과 들릴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죠)

오늘날 우리에게 '밧세바'같은 존재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것을 갖기 위해서, 그것이 너무 갖고 싶은데
여러가지 방해물이 가로막고 있는 겁니다. 우리아가 등장하는 거죠.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내가 가장 사랑해야 될 하나님 대신에 
그 자리를 빼앗아 들어온 '밧세바'를 차지하기 위해서  *돈, 권력, 명예 등등
그 장애물인 우리아를,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없애버립니다. 

그래서 관계가 깨어지기도 하고, 음모가 등장하며, 권모술수가 동원되며
불법과 탈법과 온갖 비리에 휩쌓이게 되는 거죠.
나중에 그게 다, 다윗처럼, 얼마나 수치와 부끄러움으로 되돌려 받을 터인데
지금 당장은 '밧세바'를 차지하겠다는 욕심에.. 그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는거죠. 

이게 목사님들에게는 '목회 성공'이 밧세바가 될 수도 있는 겁니다.
암논이 다말을 취하고 싶은 생각이 될 수도 있고,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는 일도.. 얼마든지 사역현장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이죠.

내가 너무 취하고 싶은 '밧세바' 즉 우상이 있는데,
그 과정에 장애물이 발생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장애를 없애버리려고 하고, 무조건 극복하려고 하는 이게 바로 
우리 믿음의 수준이지요. 이때 '공의의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는 겁니다.

그러나 믿음이 성숙한 자는, 그때 '공의의 하나님'을 염두에 둡니다.
그래서 멈출줄 아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스톱하는 것은, '공의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내 친아들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보기
본문에서 또 한 가지, 다윗이 아들들을 징계하지 않은 이유를
이렇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사랑과 공의.. 이것을 서로 모순적 명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면, 판사가 법집행을 공의롭게 해야 하지만,
판사가 일반 죄인들을 보는 눈과,
법정에 선 자기 친아들을 보는 눈은.. 엄연히 다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는,
공의로운 법정에서
일반 시민'의 입장에서 피고를 쳐다보는 눈이 아니라
‘아버지' 입장으로서 자기 아들을 바라보는 눈입니다.

사랑과 공의는 서로 모순된 명제로서, 서로 맞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집행하면, 다른 하나를 희생시켜야 하는 논리가 아니라)
둘은 항상 같이 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윗이 자기 아들을 성실히 징계하지 않았다'라고 본문을 해석하는 것은
제 삼자의 관점에서 그 아들들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친아버지의 관점에서 본문을 해석하면
그 아들을 징계하지 않은 다윗의 마음이 일면 이해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비슷한 상황에 처한다면, 
제 삼자의 관점이 아니라
친아버지의 관점에서, 죄인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눈물을 머금고서
사랑하는 아들 다윗을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그에게 부족한 '공의의 하나님'을 교훈하기 위해서 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