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레27장은 내용상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질 수 있습니다. 1~25절까지는 ‘서원(誓願)’에 관한 내용이고, 26~34절까지는 구별해서 드리는 ‘예물(禮物)’에 대한 내용입니다.
‘서원’에 관한 내용은 세부적으로 ‘사람의 서원(2-8절)’ ‘가축에 대한 서원(9-13절)’, ‘집에 대한 서원(14-15절)’, ‘땅에 대한 서원(16-25절)’이며,
‘예물’에 대한 내용은 ‘처음 난 가축(26-27절)’과 ‘무르기 금지(28-29절)’, ‘십일조’(30-34절)에 대한 규례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서원 2절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만일 어떤 사람이 사람의 값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분명히 서원하였으면 너는 그 값을 정할지니”
‘서원’은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을 하겠다고 자원하여 맹세하는 것이죠. 어떤 사람이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성전이나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레위인들에게만 허락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겠다고 서원한 사람은 성소에서 일하는 대신 자신의 노동력의 가치를 돈으로 계산하여 성소에 지불하는 길을 열어주셨죠.
그 값은 본문 2절에서 7절에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남녀노소에 따라 차등 적용되었고, 가장 생산적인 노동을 할 수 있는 젊은 남성이 가장 높은 금액을 드려야만 했습니다.
당시 남자 성인 노동자의 한 달 월급이 은 한 세겔이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서원에 따른 비용은 결코 만만치 않은 액수였습니다. 쉽게 서원하는 일을 막기 위한 방안이었던 것으로 풀이됩니다.
하나님은 즉흥적인 헌신보다 지속적인 헌신을 원하십니다. 감정이나 분위기에 휩쓸려 그 때만 반짝하는 단편적인 헌신이 아니라 끊임없이 연속되는 지속적인 헌신을 기뻐하십니다.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께 대한 헌신은 점이 아니라 선이 되어야만 합니다.
한편으로 서약한 사람이 너무 가난해서 정한 값을 내지 못할 경우, 제사장은 서약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따라서 그에게 값을 정하여 주었습니다(8절). 가난한 사람들을 열외 시키기 보다는 그들의 형편에 맞춰 서원에 대한 값을 지불케 하심으로써 그들을 배려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사랑은 상대의 수준까지 내려가는 거죠. 배려한다고 아예 제외시킴으로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의 형편에 맞춰 함께 갈 수 있게 해 주므로 오히려 자존감을 세워줍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이웃 사랑법입니다.
▲9~13절까지는 ‘가축에 대한 서원’으로 한 번 바치기로 한 짐승은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었습니다(10절), 만일 변경한 사실이 드러날 경우에는 두 짐승 모두 드려야만 했습니다(10절).
하나님의 사역에 요청되는 자세는 ‘신중함’입니다. 함부로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아울러 일단 결정한 후에는 변개(變改)해서는 안 됩니다.
설사 환경이 바뀌고 형편이 어려워질 지라도 처음 마음을 유지하며 그 일을 끝까지 감당해 가야합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도 이루어 가시지만 그 과정을 통해 우리를 다루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만일 서원한 짐승이 제물로 사용할 수 없는 짐승이라면 제사장이 정해주는 값을 대신 치루면 되었습니다(12절). 만일 부정한 짐승임에도 서원한 사람이 그 짐승을 가지기를 원하면 제사장이 정한 가격에 1/5을 더하여 지불하면 소유가 가능했죠(13절).
하나님은 그 어떤 아량 없이 강요만 하시는 폭군이 아니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수준에 맞게 배려하셨듯이 성급하게 서원하는 사람들의 형편 또한 고려하여 수용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사랑은 상대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비록 깊은 생각 없이 속단하여 결정했을지라도 상대의 실수를 용납하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법을 통해 배우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실천법입니다.
▲14절부터 15절에 나오는 ‘집에 대한 서원’, 16절부터 25절까지 다루어지고 있는 ‘땅에 대한 서원’ 또한 이와 유사한 맥락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자신의 집을, 자신의 밭을 성별해서 하나님께 드렸으나 이후 되 물리려 할 때, 그에 따른 세부 규례입니다. 모두 성급하게 자신의 집이나 땅에 대해 서원한 사람들을 사랑으로 수용하며 품어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제 큰 틀에서 두 번째 내용인 ‘성물(聖物)’에 관한 규례가 26절부터 34절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26~27절 “오직 가축 중의 처음 난 것은 여호와께 드릴 첫 것이라 소나 양은 여호와의 것이니 누구든지 그것으로는 성별하여 드리지 못할 것이며 만일 부정한 짐승이면 네가 정한 값에 그 1/5을 더하여 무를 것이요 만일 무르지 아니하려면 네가 정한 값대로 팔지니라”
‘가축의 처음 난 것’은 본래 하나님 것이므로 서원예물이 될 수 없었습니다. 부정한 짐승의 초태생일 경우에는 제사장이 책정한 가격에 1/5을 더한 가격을 지불함으로 그 동물을 자신의 소유로 할 수 있었습니다.
28~29절 “어떤 사람이 자기 소유 중에서 오직 여호와께 온전히 바친 모든 것은 사람이든지 가축이든지 기업의 밭이든지 팔지도 못하고 무르지도 못하나니 바친 것은 다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함이며 온전히 바쳐진 그 사람은 다시 무르지 못하나니 반드시 죽일지니라”
여기에서 ‘온전히 바친 것’이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헤렘’은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28절의 경우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특별히 바쳐진 예물’이라는 의미로 예를 들면 성막을 위해 특별히 드려진 예물을 의미합니다. 그 예물의 경우, 절대 무를 수 없었습니다.
29절의 경우는 ‘헤렘’이 지닌 두 번째 뜻으로서 ‘죄로 인해 죽음이 예정된 대상’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에 해당되는 사람은 그 어떤 속전으로도 용서를 받지 못하는, 진멸의 대상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가나안의 원주민들이었습니다. 신20:16~18절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령하신대로 하라 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을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게 할까 함이니라”
가나안 족속들이 ‘헤렘’ 곧 진멸의 대상이 된 이유는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신을 섬기는 일을 가르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짓 신을 숭배하는 죄악을 저지르게 할 것이기 때문 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가나안 원주민을 향한 ‘헤렘’의 명령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로 오염되는 것을 막는 예방의 성격을 띠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등을 돌리게 하는 죄악을 범하게 하는 자들을 심판하시는 심판 주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죄에 대해 즉각적으로 심판하시기 보다는 오래 참아주시는 관용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 원주민들을 진멸하게 하신 것은 아브라함에게 그 말씀을 하신후 400년의 시간이 흐른 후였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회개하기를 400년 동안이나 기다려 주신 후 심판의 칼을 뽑으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관용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회개 하지 않는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책임을 물으시는 심판 주이십니다.
▲30~33절까지는 ‘십일조’에 관한 규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밭이나 나무에서 나온 모든 소산물의 십분의 일은 하나님께 바쳐야만 했습니다(30절). 아울러 소나 양의 십일조 역시 하나님께 드려야 했습니다(32절).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행위’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신앙적으로 고백하는 행동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이 실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잊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니 그 모든 것을 허락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를 통해 나머지 십분의 구에 해당하는 물질 또한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물질의 청지기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돈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돈에는 마력이 있습니다. 그에 따라 어느 순간 우리는 돈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삼는 유혹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십일조 생활은 그런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막아주는 영적제동장치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십일조를 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삶의 헌금’입니다. 마23:23절,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바리새인들은 철저하게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였습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십일조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 또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고 계십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물질의 십일조 뿐 만 아니라 정의를 좇고 자비를 베풀며 신의를 지키는 삶의 헌금을 드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뜻을 좇는 그런 그리스도인의 삶은 분명 예수님의 이름을 생각나게 하는 삶이며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삶입니다.
거룩함을 강조하는 레위기의 마지막 장이 ‘서원’과 ‘예물’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즉 거룩함은 서원 곧 헌신과 관련이 있으며, 거룩한 사람은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잊지 않는 바른 물질관을 지닌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을 따르는 일에 자신을 헌신하시며 물질의 청지기로서의 삶 뿐 만 아니라 정의를 좇고 자비를 베풀며 신의를 지키는 삶의 헌금으로 거룩하신 주님의 이름을 생각나게 하는 그리스도인, 더 나아가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시는 사랑하는 교우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레위기 27장은 서원에 관한 규례입니다. 서원은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께 무엇을 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레위기 27장의 내용은 정확히 말하면 ‘인간이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나중에 지키지 아니하고 무르려고 할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즉, <서원의 무름에 관한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레27장이 '서원'에 관한 규례냐, '서원의 무름'에 관한 규례냐? 연구 주제죠. 둘 다 볼 수도 있습니다.)
레위기의 내용은 다섯 제사와 일곱 절기입니다. 다섯 제사는 번제와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입니다. 일곱 절기는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일, 장막절입니다.
이렇게 레위기는 다섯 제사와 일곱 절기에 관한 규례를 다루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구약 예배의 교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레위기의 마지막 27장이 서원에 관한 규례로 끝나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서원은 예배의 가장 고급스러운 형태로 인정을 해야 하고 하나님께 서원하는 것을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1. 서원(Vow)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을 상대로 해서 인간이 약속하는 것이 서원입니다. 사람끼리 약속하는 것을 서원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약속하는 것만이 서원입니다.
국기에 대한 경례, 국가에 대한 맹세와 같은 것은 서원이 아닙니다. 서원의 대상은 언제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인간이 무엇인가를 약속할 때 그것을 서원이라고 하죠.
사람이 하나님을 상대로 서원을 하는 경우는 대체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인생의 큰 위기를 겪을 때 이것은 ‘위기서원(Vow of crisis)’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서 외삼촌의 집 밧단 아람으로 피신을 갈 때에 벧엘이라는 곳에서 밤에 서원했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위기 가운데 드린 서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사사기 11장을 보게 되면 사사 입다라고 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입다가 서원을 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저 암몬과 전투를 하는데 이번 전투에서 이기게 해 주시면 내가 돌아갈 때에 우리 집에서 맨 먼저 나와서 나를 반기는 사람을 여호와께 번제로 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이 이처럼 위기 시에 서원을 하고 후회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인생의 위기시에 서원을 하는 것은 좋습니다만, 경솔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은혜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해서 드리는 서원이 있습니다. 그것을 ‘감사서원(Vow of gratitude)’이라고 합니다.
한나는 “하나님 내게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아들을 바치겠습니다.” 그 기도를 듣고 하나님이 한나에게 아들을 주셨습니다. 삼상1장 한나는 서원대로,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러면 서원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서원의 내용은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한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드리든지, 아니면 짐승을 드리든지, 집을 드리든지, 밭을 드리든지... 그것이 서원입니다.
네 가지 중에 하나를 드리겠다는 것이 서원인 것입니다. 그런데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을 드리는 것은 서원이 아닙니다. 의무적으로 드릴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드릴 때에 그것이 서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원에서는 “자발성”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강요된 것은 서원이 아닙니다. 할 수 없어 협박 받아서 하는 것은 서원이 될 수 없습니다. 자발적으로 드리는 것만이 서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서원은 갚아야 합니까? 여러분 중에 서원하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아들을 주의 종으로 드리겠습니다. 내가 이번 건축에 얼마를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서원하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서원은 갚아야 합니까? 예, 꼭 갚아야 합니다.
신23:21-23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 네가 서원치 아니하였으면 무죄하니라 마는 네 입에서 낸 것을 그대로 실행하기를 주의하라 무릇 자원한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네가 서원하여 입으로 언약한대로 행할찌니라”고 나와 있습니다.
전도서 5장 4-5절에도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
여러분, 서원한 것은 갚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서원하고도 갚을 필요가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서원장은 오늘 본문인 레위기 27장에도 있지만 민수기 30장에도 있습니다.
시집 안간 여자가 서원합니다. “하나님, 우리 집에 소가 여섯 마리 있는데 한 마리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듣고서 그날에 “야! 그것이 네 것이냐? 내 것인데 왜 네가 맘대로 드리느냐? 안된다!” 이러면 시집안 간 딸의 서원은 무효가 되는 것입니다.
또 결혼한 여자가 서원을 합니다. “하나님, 우리 집에 양 다섯 마리가 있는데 한 마리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그날 듣고서 듣는 그날에 “안 된다!” 이렇게 말하면 그 여자의 서원은 무효가 됩니다.
그런데 아버지든, 남편이든간에 그 서원을 듣고서 그날 무효로 해야지 한 열흘쯤 있다가 “생각해보니 그건 안 되겠다.” 이렇게 말하면 그 서원은 유효가 되는 것입니다. 듣는 날에 취소를 해야 무효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역사에 보면 이 서원 문제로 충돌한 경우가 있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16세기입니다. 그때 서원에 관한 문제가 첨예하게 대립이 되었습니다. 루터같은 개신교 지도자들은 대부분 카톨릭 신부였습니다.
그런데 그 신부들은 반드시 서원을 해야 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독신서원(Vow of celibacy)입니다. 그런데 독신서원을 한 마르틴 루터가 개신교 지도가자 되어서 결혼을 안했을까요? 아닙니다. 수녀와 결혼을 했습니다.
루터가 결혼을 하니까 카톨릭에서는 “독신서원을 하고도 지키지 않았으니 옳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루터는 “그 독신서원은 성경에 없는 것이고 성경이 명하지 않는 불법한 서원이기 때문에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했죠.
저는 목사도 장가들 권리가 있고 신부들도 장가가라고 권면합니다. 독신은 은사입니다. 혼자 살아도 외롭지 않고 혼자 살아도 밥 잘 먹는 사람만 독신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고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신서원은 지킬 필요가 없는 것이라는 것이 개신교의 입장입니다. 그리고 루터 이후에 일어난 급진종교개혁자들 소위 아나뱁티스트(재세레파)들은 서원은 절대 안 된다고 했습니다. 맹세도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는 서원이나 맹세를 절대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서원한 것을 지키라. 그 대신에 서원을 대단히 신중하게 하라’는 입장입니다.
◑2. 레위기 27장의 구조
그런데 본문 레위기 27장은 서원을 할 때 (현실적 방안으로) 그 가치를 돈으로 바꾸어, 하나님께 드리는 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 짐승, 땅, 집을.. 실제로 이삿짐처럼 실어와서 바치면 혼란이 되니 거기에 상응하는 돈으로 계산해서 바치는 것입니다.
레위기 27장의 구조는 간단합니다. 서원의 네 가지 구조에 따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2-8절까지는 사람의 서원에 관한 경우입니다. “하나님, 내가 여호와께 나 자신을 드리고 내 가정을 드리겠습니다. 여호와께 자기 자신을 드리겠습니다.”라고 서원해놓고 나중에 마음이 바뀌어서 서원한 것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면 벌금을 내라는 것입니다.
벌금은 성별에 따라 다르고 나이에 따라 다릅니다. 남자 어른은 50세겔, 여자 어른은 30세겔, 남자 아이는 5세겔입니다. 한 세겔이 은 11g인데 이것은 노동자 4일 임금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50세겔이면 노동자의 200일 임금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서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율법은 무자비하지 않습니다. 서원한 사람이 만약에 그것을 감당할 수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7:8절 “그러나 서원자가 가난하여 너의 정가를 감당치 못하겠으면 그를 제사장의 앞으로 데려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값을 정하되 그 서원자의 형세대로 값을 정할찌니라.”
이것은 서원했는데 돈이 없다면 디스카운트를 해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디스카운트를 해주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시험을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들을 주의 종으로 드리겠다고 했는데 그 아들이 주의 종이 되지 않고 엉뚱한 삶을 산다면 부모는 어떻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예를 들면 1억 감사헌금을 작정을 했는데 형편이 바뀌어서 헌금을 할 수 없게 되었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오늘 레위기의 원리에 따르자면 목사를 찾아가서 상의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내가 서원한 것이 있는데 도저히 형편이 안 되서 못하겠습니다. 깎아 주십시오.” 오늘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에 비추어 볼 때 그러한 것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 9-13절은 동물을 하나님께 서원한 경우입니다. 서원해서 드린 것은 정한 짐승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장들이 그것을 팔아서 성소의 일이나 제사장 집안의 일에 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단 서원해서 바친 짐승은 거룩한 짐승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께 짐승을 바치기로 서원을 했는데 그 짐승과 너무 정이 들어서 그 짐승을 바칠 수가 없겠다고 하면 그 짐승 값에다가 1/5의 범칙금을 더해서 제사장에게 주면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못된 사람이 못된 성품을 발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린 송아지였을 때에 하나님께 서원한 짐승이 너무 잘 먹고 잘 커서 살쪄서 우량한 소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마음이 바뀌어서 “하나님 이것은 내 것으로 하고 2년 길러서 제일 빈약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우열을 바꾸는 경우에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9-10절 “사람이 예물로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 생축이면 서원물로 여호와께 드릴 때는 다 거룩하니 그것을 변개하여 우열간 바꾸지 못할 것이요 혹 생축으로 생축을 바꾸면 둘 다 거룩할 것이며”
바꾸면 둘 다 거룩할 것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둘 다 하나님의 것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래 서원한 짐승에다가 나중에 바꾸려고 했던 열등한 짐승까지 다 하나님의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 꼼수를 쓰면 안 되겠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계산이 정확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4-25절은 집이나 밭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한 경우입니다. 집이나 밭은 50년 희년이 되면 원 소유주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바쳤는데 다시 무르고 싶을 경우에는 희년까지 남은 기간을 계산해서 그 가격에다 오분의 일의 벌금을 더해서 돈으로 드리면 그 땅이나 집은 다시 무를 수가 있게 된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6-33절에,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해서 드릴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서원으로 바칠 수 없는 세 가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첫 새끼입니다. 사람의 장자, 혹은 짐승의 첫 새끼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께 서원해서 바칠 수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것을 어떻게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의 장자들은 하나님이 살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으셨으면 애굽에서 다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장자를 소유하시는 것이 부당합니까? 아닙니다. 장자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를 취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 대신에 레위인을 취하셨습니다. 레위인을 취하고 장자 취할 것을 대신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계산이 얼마나 정확하십니까?
레위인의 숫자와 이스라엘 장자의 숫자를 계산해서 장자의 숫자가 더 많다면 그 많은 수 만큼 속전을 받으십니다.
민3:46-47절에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난 자가 레위인보다 이백 칠십 삼인이 더한즉 속하기 위하여 매명에 오 세겔씩 취하되 성소의 세겔대로 취하라 한 세겔은 이십 게라니라”
계수를 해보니까 이스라엘의 장자가 더 많다면 그만큼은 여호와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의 장자로 취하였기 때문에 오세겔씩 속전을 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정확하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지 마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첫 생명, 장자나 첫 새끼는 여호와께 드릴 수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서원으로 드릴 수 없는 것은 27장 28-29절에 나와 있습니다. 아주 바친 물건, 아주 바친 사람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예를 들면 여리고성 물건이나 여리고성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쳐들어갈 때 하나님이 여리고 성 안의 모든 물건이나 사람은 기생 라합과 그 가족을 제외하고는 여호와께 바쳐진 존재이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모두를 다 죽이고 그 안에 있는 물건은 하나도 취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주 바쳐졌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저주하셨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취하지 말라고 했는데 누가 취했습니까? 아간이 그것을 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가족과 함께 아골 골짜기의 돌무더기에 묻혔습니다. 아주 바친 물건이나 아주 바친 사람은 서원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세 번째로 십일조는 서원대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십일조는 이미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짐승 열 마리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것을 구별하는 방법은 막대를 놓고서 짐승이 자유스럽게 지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열 번째 지나가는 것이 하나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조작을 해서 짐승을 줄을 억지로 세워서 열 번째 제일 열등한 것을 지나가게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그것을 속고 계시겠습니까? 아닙니다. 32절 “소나 양의 십분의 일은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째마다 여호와의 거룩한 것이 되리니 그 우열을 교계하거나 바꾸거나 하지 말라 바꾸면 둘 다 거룩하리니 속하지 못하리라.”
열 번째 지나가는 것을 보니까 “아이고 왜 저렇게 튼실한 것이 지나가는 거야?” 이러면서 그것을 빼고 빈약한 것을 집어넣어서 순서를 바꾸면 하나님이 그 둘 다 취하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꼼수를 쓰지 말라는 것이죠. 십일조는 레위인이 받는 것이고 레위인은 제사장, 레위 지파중에 아론의 후손에게 십일조를 드리도록 했습니다.
결론
왜 예배의 책인 레위기가 서원장으로 끝나고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서원도 예배의 고급스러운 형태의 예배로 인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서원할 수 있습니다.
서원은 고급스러운 예배입니다. 고차원적인 예배의 형태입니다. 왜냐하면 서원은 아주 자발적으로 드리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서원한 것이 있으시면 갚으시고 정 못 갚는 경우에는 목회자와 의논하여 서원에 대한 마음의 부담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나중에 사람은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에 신중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서원한 것을 잊어버리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잊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잊지 않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