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바 리더십 행11:19~26 2023.01.29.녹취, 정리
◑도입
본문은 사도행전적 교회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잘 보여주는 중요한 본문입니다.
행11장의 안디옥 교회의 시작 사건은, 사도행전 역사에 있어서
행2장에 나타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다음으로
중요한 사건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되는 사건입니다.
오순절 날 성령님이 임하셨을 때,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두려움과 낙심과 근심속에 있었습니다.
그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능력을 받아서
확신과, 담대함과, 지혜와, 용기로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이 된 것입니다.
핍박도 무너뜨릴 수 없는, 어떤 고난도 가로막을 수 없는
복음증거자들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 자체가
사람들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는 그 광경을 보고도
'의심하는 자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마28:17
그처럼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죄성은, 우리의 믿음을 파괴하고
예수님을 눈앞에 보고,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도
그 자체가 예수님을 증거하는 전도자로 변화시킬 수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오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능력이 되어 주셔서
능력과 확신, 담대함, 지혜, 용기 그리고 성령님의 은사를 덧입어서
그들이 예수님의 증거자가 될 수 있었던 겁니다.
또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각 개인에게
이런 확신과 능력을 부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새롭게 했죠.
행2~4장에 보면,
'그들이 서로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떡을 떼며, 교제하며, 예배하며..'
심지어 자기의 재물을 자기의 소유로 여기지 않는..
그래서 성도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는 그런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은 공산주의 사회가 되었다는 게 아니라
각자 자기 소유가 있어도 자기 소유로 여기지 않고
공동체를 위해서 기꺼이 자발적으로 내어드리는 그런 성도들이 있었다는 거죠.
그래서 필요가 채워지고, 또 그 사랑에 감동하여
또 다른 이의 필요를 채워주는 사람이 나오는...
사랑의 릴레이가 계속 이어지는 공동체!
그 당시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그런 공동체가 생겨난 겁니다.
그것이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예루살렘교회가 그렇게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하여 확신을 받고
또 그렇게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었지만, 한계가 드러났습니다.
성령이 임하심으로 그들이 확신도 얻었고
그런 아름다운 공동체(교회)도 그들에게 있었지만
여전히 예수님의 '지상명령' 앞에서는 *가장 최고 명령이란 뜻
연약하고 부족한 모습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것은 성령님이 이끌어 가시는 대로 자신을 온전히 내어 드리지 못하게 하는
그런 인간의 자기 중심적인 모습이, 여전히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빌립이나 몇몇 제자들이 사마리아로 가서 복음 전하고 그런 일들이 일어났지만
교회에 전체적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으로 확산되는 모습은
지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요소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외부적인 핍박 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부활 믿음 - 성령으로 교회조직 - 핍밥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상에서 제거 하시려고 핍박을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이 핍박을 통해서 하나님이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일을
사용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핍박이 오자, 그들은 어쩔 수 없어서 흩어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환경적인 요소가운데 하나님의 섭리가 숨어있음을 우린 발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코로나 팬데믹도 영적인 시각에서 볼 때
이것은 제 2의 바벨탑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요.
전 세계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 펜데믹을 통해 반드시 영적 교훈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전 세계적인 이런 전염병을 허락하셨는가요?
우리 신앙에 이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것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제 2의 바벨탑, 그것은 하나님 없는 세상을 추구하는 인간들의
그 활동을 잠시 멈추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다시 생각하게 하고
인간이 주인된 세상을 꿈꾸는 인간의 완악함을 깨우치시고
더 나아가 종말이 가까이 왔음을 말씀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마지막 종말에 싸인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세 가지입니다.
첫째, 지진이 더 자주 일어날 것이다.
두 번째, 전염병
세 번째, 전쟁이죠.
이 세 가지가 지금 다 세계를 위협하고 있는 요소 아닙니까?
예수님은 과학자가 아니셨습니다.
지진을 탐지하는 기계도 그 당시엔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도 지진을 강조하셨다는 걸 기억해야 돼요.
지난 10여 년 동안에 지진의 빈도수가
과거 100년 동안의 빈도수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급상승하는 것을 여러분이 인터넷을 통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때를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거 하나만으로도 예수님이 진정 하나님이시라는 걸 우리는 인정해야 됩니다.
어떻게 2000년 전에, 지진에 대하여, 지진이 더 많아질 것을
예언할 수 있었을까요!
전염병, 특별히 동물로부터 사람에게 전염되는 '수인 전염병' *동물 원인 전염병
그 질환들,
놀라운 것은 레위기에 보면 '먹지 말라'는 동물들의 리스트가 나오지요.
놀라운 것은 메르스 라든지, 코로나든지
인간이 정복하지 못한 바이러스에 출현을 가져온 게
'수인 감염 전염병'입니다.
그 원인이 레위기 리스트 하고 다 일치한다는 거예요.
낙타, 박쥐 .. 이런 거 먹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우리가 지금 뉴스에 나오는 전염병을 옮기는 숙주가 되는 동물의 리스트가
레위기에 나오는 부정한 unclean 동물 리스트와 묘하게도 일치해요.
'레위기에 먹지 말라는 것이 예언적인 말씀이기도 하는구나!' 라고 생각됩니다.
하여간 레위기에 먹지 말라 하신 짐승들을
인간이 먹음으로써.. 그런 '수인 감염병, 전염병'이 지금 많아지고 있다는 거죠.
전쟁의 위협, 지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롯해서
뭐 중국이 대만을 침공 할 수도 있다...
북한의 핵무기 위협 이라든지
이제 지도자들이 한 순간에 판단을 잘못하면
전 세계가 세계대전에 들어가는 겁니다.
지진, 감염병, 전쟁, 거기에다가 사람들의 이기주의,
자녀가 부모를 죽이고, 부모가 자녀를 죽이는 이 끔찍한 범죄들을
우리가 보고 있죠.
이게 코로나 라는 펜데믹으로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인간의 죄악들,
이런 환경의 변화가 우리의 신앙과 역사와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면, 우리 신앙생활이 그저 정기적으로 예배당에 출석하고
또 공동체 일원이 되어서 살아가는
그런 쳇바퀴 도는 그런 신앙생활에만 내가 익숙한 것이
신앙생활의 전부 라고 생각했지만
보다 더 넓은 시각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교회가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증거하는
그런 사도행전적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셨는데
시간이 흘러갈수록 그들은, 자기들의 모임으로 안주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핍박이 왔을 때 어쩔 수 없어 흩어졌죠.
우리가 코로나가 왔을 때 어쩔 수 없이 멈추었던 것처럼
끊임없이 우리는 인간들의 기술의 발전, 문명의 발전으로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만에 빠져 있는 걸 꺾으신 거에요.
그처럼 이 핍박을 통해서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던 거에요.
정들었던 교회를 떠나나갈 수밖에 없게 된 거에요.
▲지금 이런 핍박이 중국에서 이뤄지고 있지 않습니까.
중국의 시진핑 정부가 교회에 모이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
그리고 성도들이 예배로 모이기만 하면 그 건물주를 압박해서
임대를 못 주게 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그런 핍박이 주어지고 있죠.
지금 어쩔 수 없이 그들은 작은 모임으로 쪼개어서 모이고 있습니다.
다섯 명 이내의 모임으로 흩어져서
점조직처럼 공원에서 모이고, 그냥 숨어서 모이는 거에요.
그럼 교회가 사라져야 되잖아요.
놀랍게도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더 증가하고 있어요.
최근 중국에 불고 있는 이 핍박은, 사도행전적 사건입니다.
예루살렘 핍박과 비슷하다는 거죠. 행8:1
이 중국 정부가 얼마나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냐면
성경도 공산당 버전으로 다시 썼어요. 성경을 어떻게 다시 씁니까?
그런데 썼어요.
그걸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라는 하고
예배당마다 십자가 앞에 시진핑 사진 걸어 놓으라 그러고
그런 시대가 되어 버렸다는 거죠.
이런 외부적 핍박이, 교회가 더 위축되게 되는 것 같고
겉으로 볼 때는 중국의 가시적인 교회, *삼자교회
공산당에 철저히 순응하는 교회만 존재해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세계적인 교회 지도자들 모임에
중국 교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 목사님들은 가족이 핍박을 받고,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리고
생 이별을 당하게 되고, 가택연금 당하고...
정말 이루말할 수 없는 일들을 겪고 있는데
교회는 더 건강하게 복음이 확산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이 중국 디아스포라,
그리고 중국 정부의 핍박속에서 믿음을 지킨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놀라운 일을 이루실 겁니다.
오히려 핍박이 없는 자유국가는, 이상한 일들을 하면서
세상 쾌락에 빠져 '사회적 성'을 운운하며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무너뜨리며
신앙을 떠나고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평균 한 주에 10개 정도의 예배당이 술집으로 팔려가고 있대요.
평균입니다. 그 속도가 이루말할 수가 없어요.
영국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님들은
한국 교회가 영국의 예배당을 좀 사서
이걸 술집으로 팔려나가지 않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왜 술집으로 팔려나가냐 하면, 교회들이 다 오래됐기 때문에
평균 몇 백년이상 다 되었고, 1천5백년 된 교회도 있어요.
그런데 문화재보호법에 의해서, 그걸 헐 수가 없는 거예요.
외형을 보존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외형을 그대로 보존하면 (건물을 매입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할 수 있는 게, 이런 공연장이나 술집이나 레스토랑 밖에 못하는 거에요.
그래서 그런 업종 관계자들이, 교회를 매입하는 겁니다.
그래서 매입한 후에, 십자가만 떼고
조롱하듯이 강대상에서는 춤을 추고
그 아래에서는 술을 먹는 그런 펍이 되고, 술집이 되어 가고 있는 거예요.
그 속도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겉으로는 성공회가 국교고, 다 제도적으로 교회가 조직되어 있는 것 같지만
도리어 신앙의 자유가 있는 곳에서
복음을 복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이 말씀을 지워버리고
그저 예수님은 여러 종교 중에 한 사람처럼.. 문화생활로 만들어 버릴 때
교회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사회는 더 살기 힘든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정부에 요청해서
'우리를 좀 핍박해주십시오, 우리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게!'
그렇게 할 순 없잖아요.
그렇다면 우리가 그런 정도의 핍박이 지금 없을 지라도
정직하게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우리도 얼마든지 영국처럼 그런 사회가 될 수 있다... 는 거죠.
만일 우리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법으로
그런 핍박을 주실 수도 있는 거예요.
▲예루살렘 교회 그런 핍박이 났습니다. 그래서 흩어져야만 했던 거예요. 행8:1
그들은 정들었던 공동체를 떠나 이주함으로써, 신앙을 지키려 했던 거에요.
역사적으로 그런 사례가 많죠.
프랑스의 위그노 들이
가톨릭이 국교화된 그 사회에서
칼뱅의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 예수님 믿고 신앙생활을 하던 프랑스 개신교도,
그들을 '위그노'라고 부르는데,
그 위그노 들이 핍박속에서 살아남으려고 유럽으로 다 흩어져서
제네바, 로잔 등 여러 곳에 흩어져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어요.
그 결과 도리어 종교개혁이 유럽 전역에 확산되는 그런 계기가 되었어요.
네덜란드를 비롯해서 여러 유럽국가에 개신교가 퍼져나갔던 거예요.
그래서 유럽의 여러분 대부분의 국기를 보면, 다 십자가가 들어 있어요.
종교개혁의 영향력이 전 유럽에 미치게 된 거죠.
참 역사의 아이러니죠.
핍박 자체는 정말 고통인데, 하나님은 핍박을 통해 복음이 확산되도록 하시죠.
◑예루살렘교회에 핍박이 일어나서 그들이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흩어져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흩어진 그들이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했다는 거에요. 행11:19
그것은 언어와 문화의 제한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눈에
시각이 아직도 열리지 않는 거예요. 유대인만 사람으로 보인 겁니다.
우리의 유대 문화에 깊이 뿌리내린 문제에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대한민국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저는 '이주민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아요' 이 문제를 꼽습니다.
그들 이주민들을 그저 노동력으로만 보지요...
공식적으로 지금 우리나라에 와 있는 이주민은 220만명입니다.
비공식적으로는 250만은 족히 넘습니다.
250만 명의 사람들에 대해서
어떤 정치가가 그들에게 '정말 우리가 잘 대해줘야 된다'고 얘기합니까?
250만 명의 이주민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 왔지만
또 일부 사람들이 사회를 혼란케 하는 일도 있지만
'그들을 어떤 시각으로 대하는가?'가 한국의 수준이에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대한민국은 선진사회로 바뀔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는, 우리 주변에 많은 이주민들을 보면서
나와 동일한 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
복음을 들어야 될 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그랬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 보면 페니키아(베니게), 키프로스(구브로), 안디옥 까지 흩어졌는데
그곳에 사는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했다는 거에요. 행11:19
이것은 전 세계적으로 미국 같은, 다인종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도 보면
우리 한국 분들이 많은 경우 해외에 가서 교회를 세우면, 한인교회만 세워요.
제가 뉴저지에서 목회할 때, 교회의 비전을 선포할 때
이렇게 선포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비전은 '코리안 한인교회'에서 '한인' 이란 말을 떼야 됩니다!"
한인들끼리 모이니까 모여서 예배 끝나면, 밥 해 먹고, 된장찌개 끓여먹고
우리끼리 모이니까 좋은 거예요.
그래서 예배당을 새로 지으면서 장로님들과 결정을 내렸어요.
'새예배당에 들어가서는 한국 음식을 해먹지 말자!'
이민교회를 경험해보면 알겠지만
'주일 점심 식사를 안 해 먹는다'는 것은 엄청난 결단이에요.
어떤 분은 '설교는 못 해도 밥만 잘 해도 된다' 이런 얘기가 나올 정도로
'밥만 잘해도 목회는 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얘기가 돌 정도로
이민교회는 밥 해주는 게 굉장히 중요해요.
그런데 '밥을 해먹지 말자!' 왜요?
우리는 이 마늘냄새, 김치냄새, 된장국 냄새가 구수한 냄새이지만
외국 사람들이 교회에 올 수가 없거든요.
우리가 뭐 인도라든지 다른 나라에 가보면,
카레 냄새라든지.. 묘한 그 나라 특유의 냄새가 납니다.
그것 자체가 장벽이 되지요.
근데 한인교회에 가보면 그 부엌에서 나오는 냄새가
그냥 온통 교회에 가득 차 있으니
어떻게 외국인들이 오겠습니까? 이민 2세들도 오기 힘든 거에요.
그래서 부엌에서 일부러 그냥 밥을 못하게 했어요.
커피 도넛 이렇게 미국식으로 간식을 제공했습니다.
그랬더니 여성분들이 싫어할 줄 알았는데 대환영이더라고요.
'그동안 말을 못했지만, 이 부엌일이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래서 제가 권사님들에게 인기가 최고로 올라갔어요.
새로운 시대를 열어준 목사로, 부엌으로부터 해방시켜 준 목사로 호평받았죠.
섭섭해할 줄 알았는데 너무 좋아하시더라고요.
어쨌든 그렇게 하니까 외국분들이 예배당을 이용할 수 있게 되고...
'한인'이라는 타이틀을 떼야 된다.
그런데 미국가면 아직도 '아프리칸 처치, 히스패닉 처치, 코리안 처치'
다 그렇게 끼리끼리 동족끼리 교회에 모여 있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 한인교회들도 저 멀리 남미로 단기선교 가는데
바로 옆에 있는 남미사람에게는 복음을 전하지 않는.. 그런 모순이 있는 겁니다.
▲행11:19~21
19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바로 그 때 소수의 몇 사람, 이름도 알려져 있지 않는 몇 사람이
안디옥에서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했던 거에요.
그들은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 이라고 했습니다.
구브로는, 지중해 동북부에 위치하여 안디옥과 다소 지역과 마주하고 있는
섬으로 구약 시대에는 `깃딤'(민 24:24)이라고 불리어졌으며
오늘에는 `키프러스'(Cyprus)로 알려져 있죠. 바나바는 이 섬 출신이며(4:36)
그곳에는 유대인들의 회당이 있었고
나중에 바울도 바나바가 함께 그곳에서 설교하게 됩니다.(13:4-12).
구레네는 북아프리카에 있는 리비아의 중심 도시로서
헬라 문화권에 속한 지역이며, 이곳은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구레네 시몬의 출신지이기도 하죠(눅 23:26).
여기서 언급된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서
기독교로 개종하여 선교 활동에 참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정확히 누구를 가리킬까요?
-예루살렘에서 흩어진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구브로, 구레네를 거쳐서
안디옥에까지 이르러 거기서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일까요?
-아니면 히브리파 유대인들에게 전도받은 구브로, 구레네의 새신자들이
안디옥에서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일까요?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이론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흩어진 성도들가운데
이미 헬라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도 헬라파 유대인이며,
또한 바나바도 구브로 출신이었죠.
그러므로 20절의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은
-'구브로와 구레네 출신의 헬라파 유대인들'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대표적으로 스데반과 바나바죠. 바울도 그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죠.
그들은 헬라어에도 능했으므로, 헬라인에게 복음을 전하기도 용이했죠.
꼭 오늘날 우리로 대입하면, 미국교포, 일본교포, 중국교포 성도들이 되겠죠.
그들이 헬라인, 즉 그리스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하여
교회가 태어난 것이.. 안디옥 교회의 시작입니다.
핍박이 나서 흩어져서 모두가 유대인에게 말씀을 전했지만
소수의 몇 사람이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하여
안디옥교회가 태어난 이것이,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지는
세계 선교의 전초 기지가 된 안디옥 교회의 탄생의 배경입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는 안디옥 교회의 역사라고도 말할 수 있는 거에요.
▲그러면 초기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같이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했던 초기 제자들이 중심이었던 예루살렘 교회가 아닌
안디옥 교회가 세계선교의 전초 기지가 됐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루살렘는 늘 갈등속에 갇혀 있었어요. 율법에 갇혀 있었고
유대인이라는 민족주의에 갇혀 있었고
또 '우리가 예수님을 직접 보았던 사도들'이라는 그런 의식의 잡혀 있었고
그래서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지는데 통로가 되지 못하는
많은 장애물들이 있는 거에요.
하나님은 핍박을 주셔서 그들을 흩으셨지만
그들의 눈에는 여전히 유대인만 보였고
그들은 율법을 너무 중요시해서 복음의 능력을 제한했고
이런 여러가지 제약 요건들을 예루살렘교회를 가두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나 안디옥 교회는, 복음이 전해지는 선교적 교회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져야 된다' 라는
그런 선교와 사명 중심의 교회가 시작이 됐던 거에요.
그래서 사도행전 11장장 이후로부터의 모든 사도행전의 역사는
안디옥교회 이야기라고 봐도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결정을 해야 돼요.
우리는 예루살렘 교회의 모델을 따를 것인가, 안디옥 모델을 따를 것인가?
여러분은 어느 교회를 택하려 하십니까?
'그래도 원조 예루살렘교회가 좋지..' 하시는 분 계십니까?
그런데 의외로, 많은 교회들이
그저 예루살렘교회처럼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몇 개월 전에 제가 다른 교회에 설교하러 간 경험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을 오랜만에 만나서 이제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가운데
제게 이런 얘기를 들려줬습니다.
"목사님, 제가 이 교회에 부임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서
이 교회에서 가장 오래되신 원로급 되시는 분이 찾아오셔서
제게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담임목사님, 우리 교회가 오래돼서 여러 목사님들이 바뀌었는데
새로 목사님이 오실 때마다, 이 세 가지를 공통적으로 강조하시던데
저는 그 세 가지가 너무 싫습니다. 그 세 가지가 뭐냐면
첫째는 다음 세대.. 목사님들마다. 다음 세대가 중요하다고 얘기하는데
우리 같은 올드세대는 왜 무시합니까?
우리가 얼마나 헌신하고 했는데, 우리 올드세대를 좀 알아줘야죠.
둘째로 싫은 것은, 땅끝 땅끝 하는데,
예루살렘이 중요하지 왜 땅끝을 강조합니까?
셋째로 싫은 것은 새신자입니다. 목사님들은 새신자가 왔다 그러면
발 벗고 나섭니다. 우리 같은 구신자는 알아보지도 않고
새신자만 환영합니다.' "
그 장로님은 어떤 면에서 너무 솔직해요.
사실 저도 그런 비슷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미국에서 목회할 때인데, 오래된 안수집사님이 찾아오셔서
제가 목회하던 교회가 막 이렇게 성장을 하니까
주차할 데도 없고, 앉을 자리도 부족하고 그러니까
그분이 저한테 두 가지를 따지러 온 거예요.
첫째는, 자신의 3주 동안 예배를 못 나왔는데
어떻게 담임목사가 전화 한 통이 없냐, 심방 안 하냐? 그러는 거에요.
그때 교회가 막 두 배 이상 성장하면서, 예배도 늘어나면서
그분이 좀 안 보인다는 생각을 했지만
저는 어디 출장가셨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니까 속으로 제가 '그러면 전화를 주시든지, 그럼 매주 출석을 부를까요?
바코드를 다 만들어 드릴까요?' 속으로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거죠.
그렇지만 그랬다가는 큰 일 나니까, 저도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제가 목회경험이 짧아서 죄송합니다' 하고 일단 사과를 드렸죠.
그분이 마지막에 하는 얘기가 '목사님, 저는 새가족 많이 오는 거 싫습니다.
주차할 데도 없고, 앉을 데도 없고...
목사님이 너무 그렇게 전도 강조하지 마십시오!'
그 말이 제게는 충격이었어요.
그런데 그 분이 찬양할 때는 '주의 나라 임하시고.. 예수 우리 왕이여'
또 열심히 찬양하시더라고요. 그 분은 찬양대는 열심히 하시는 분이었어요.
우리의 신앙생활이 '나는 열심히 믿고 있는데
결국은 그 공동체가 나 중심, 우리 중심이 되어 갈 수 있다'는 거죠.
▲예루살렘 교회도 그랬어요.
예루살렘 교회에 성령님이 임하시지 않는 교회가 아니었어요.
성령님이 임하셨어도,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면
성령받은 사람들이 자기 고집을 부리면,
자기 고집에 성령의 능력이 부어지기를 구해요.
그래서 핍박을 받아 흩어졌어도, 유대인만 사람으로 보이는 거예요. :19
여기 부천에도 이주민들이 있을 거에요. 없는 데가 없습니다.
보이지 않을 뿐이에요. 우리 눈에는 지금 한국 사람만 보이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너무 익숙해서, 이 사회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거예요.
여러분 대한민국은 이제 다민족 사회가 되어가고 있고, 되지 않으면 안 돼요.
왜냐면 인구출산률이 세계 최저입니다.
이렇게 몇 십년이 지속되면 나라가 사라집니다.
연금 개혁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어요. 연금을 낼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개혁해봐야 소용이 없는거에요.
연금개혁 아무리 해봐야 출산율이 이대로 가면
연금낼 사람이 없는데 무슨 제도가 유지 됩니까?
그래서 이 인구가 감소되는 것을 커버하려면
이 규모의 경제를 유지하려면, 이주민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요.
250만 갖고 안 되고, 4백 만 정도 되어야 이게 우리 사회가 유지가 되는 거에요.
그럴 때 우리는 이주자들을 어떻게 대하는가요?
여러분의 회사에서, 여러분 주변에서 일하는 이주민들을
사람이 아닌 어떤 존재로 대하고 있지는 않는지...
그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는.. 너무나 좀 외롭고 힘겨운 상황에 있는 그들에게
여러분이 이웃이 되어주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변화시켜야
대한민국이 정말 좋은 사회가 되는 겁니다.
이 교회도, 많은 이주민들이 출석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제 목회 비전은, 만약 우리나라 이주민의 비율이 전제 국민 대비 10%라면,
저희 교회 성도들 가운데 이주민이 10%가 되는 거예요.
그래야 올바른 소명을 감당하는 거죠.
▲다시 본문으로 와서 이제 안디옥 교회가 이렇게 시작됐죠.
근데 그 안디옥교회가 더 쓰임 받는 교회가 될 수 있도록
촉매제 역할을 한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예루살렘교회에서 파송을 받았던 바나바에 의해서 :22
더 믿는 이들이 늘어났는데 그 비결이 뭐냐하면
다소에 있던 바울을 찾아서 세운 겁니다. :25~26
바울이 왜 고향 다소에 내려가 있었습니까?
사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인정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서 핍박했던 바울을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공동체 일원으로 받아들이기도 힘든데, 지도자로 세운다는 건
더욱 할 수 없는 일이었죠.
그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의 중심에 있었던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나중에 보면, 바울을 뒤따라다니면서 괴롭혔습니다.
과거의 이력이 어떻고, 저런 사람을 어떻게 지도자로 받아들이냐?
그 사람은 율법을 준수하는 것을 어기게 한다.. 등등
바울을 공격하는데 있어서 그들이 앞장을 섰습니다.
바울에 있어서 정말 육체에 가시도 있었지만,
더 큰 영혼에 가시는.. 바로 그 사람들이었어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율법적 그리스도인들
그들이 바울을 가장 힘들게 했어요.
그러니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사도로 부름을 받았지만
바울이 사역을 하는 것을 받아들여 주고 동역해주는 이가 없었기에
그는 다소로 내려갔을 겁니다.
그때 바나바가 바울을 픽업해서 세운 겁니다.
그리고 안디옥 교회에 가장 중요한 지도자로 세운 겁니다.
바나바로 인하여 안디옥교회가 세계선교에 쓰임 받는 거예요.
사도행전에 이후부터는 바나바 이름이 거의 나오지 않고 주로 바울입니다.
바울의 일차 이차 삼차 전도여행을 통해
이 소아시아 유럽에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이 확산되는 역사가
사도행전의 역사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 터닝포인트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게 바나바 입니다.
여러분 한 교회가 정말 사도행전적 교회로 쓰임 받을 때는
반드시 바나바와 같은 리더십이 있는 거에요.
예루살렘 교회는 늘 먼저 온 순서대로, 또 오래된 익숙한 대로
그런 것이 중요하지만
안디옥교회는 소명을 받은 대로, 은사 대로 쓰임을 받는 거예요.
바나바는 바울의 은사를 확인했고, 그가 부르심을 받았다는 걸 확인했고
그의 은사를 확인했기 때문에, 그를 세워서 함께 가르쳤을 때
안디옥 교회가 성령충만한 선교적 교회가 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저희 교회는 우리 목회자들도 뭐 신학교 졸업기수, 서열 이런 거 없어요.
어떤 교회에 가 보면, 뭐 신학교 졸업 기수 따지고, 나이 따지고, 경험 따지고
그래서 선후배간에 복잡합니다.
제가 저희 교회 담임목회자될 때도 나이가 (목회자들중에) 딱 절반이었어요.
제 형님들이 많았어요.
그 당시에는 엄청난 모험이었죠.
기수 따지고 서열 따지고 했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에요.
우리 교단에서도 난리가 났죠.
그런데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은사와 소명과 다른 요소들이
더 중요한 거죠.
예루살렘 교회가 왜 바울을 세우지 못했을까요?
뭐 거기에 얘기가 많을 거에요.
'그가 진짜 예수님 만났냐 부터 조사해 봐야 된다.
과거 이력 따지고, 바울한테 상처받은 사람 가족은 어떻게 하냐?'
그러나 바나바는 '이 사람은 분명히 예수님이 부르신 사람이고
이 사람에게 주어진 은사가 있고, 그래서 이 사람을 세워야 된다'
해서 은사 중심으로 세운 거에요.
그래서 안디육 교회가 사도행전적 교회에 중심이 된 거에요.
온누리교회가 일반 한국 교회의 역사와 다른 길을 간 것은
이렇게 은사 중심, 부르심 중심,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선교 중심의 길을 걸어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들이 같은 마음을 가져야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담당 목회자가 교체될 때도 은혜스럽게
정말 더 하나님께서 쓰시는 적합한 은사와 소명을 따라
이렇게 교체되고, 또 다른 바나바들이 나오고, 또 다른 바울이 나오고
계속해서 교회 안에 그런 바울을 찾아 세우는 일들이 일어나야 될 줄 믿습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모두가 바나바가 되어서
이 일을 나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세워주는 거에요.
'이 시대에 바울이 어디 있나?'
부르심을 받고 헌신하고 싶은데
스스로 '내가 이거 하겠다'고 할 수 없잖아요.
'당신이라면 이 일을 더 잘 할 수 있을 거다'
그렇게 끊임없이 세워주는 그러한 교회가 될 때
그 교회는 사도행전적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하 목사님이 그런 바나바와 같은 분이셨어요.
제가 목사님과 오래도록 비서실에 가장 오래 있었고, 가장 가까이 있었는데
목사님은 정말 부교역자들이 성도들에게 칭찬받고 잘 한다는 말을 들으면
너무 좋아하셨어요.
'누구 부교역자가 잘한다' 그러면 너무 좋아하셔서
마치 본인을 칭찬하는 것 이상으로 막 좋아하시고
반드시 인사에 반영이 돼요.
그러니까 성도님들이 칭찬하시면, 반드시 뭔가 바뀌어요. *등용
성도님들이 그 부교역자를 좋아하니까요.
참 무서울 정도로 그렇게 부교역자들이 성도들에게 칭찬받는 것을
정말 기뻐하신 목사님... 질투가 없으신거죠. 질투가 없으신거에요.
저도 제가 맞춤전도사역 진행할 때, 하목사님은 교계에 나가서
'이 친구가 다 하는 거야' 하면서 막 이렇게 저를 세워주시고
정말 기뻐해 주셨습니다.
저도 이제 담임목사 자리에 서 보니까
'그게 (부교역자 칭찬) 참 중요한 거구나!' 하고 느낍니다.
성도님들이 우리 목회자들(부교역자들) 칭찬을 하면..
그 말을 들으면 저도 진짜 기쁩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저한테 와서
자꾸 다른 목사님 칭찬을 하는데.. 너무 오래 하시는 거예요.
2~3분 하시면 되는데... 5분, 10분도 하십니다.
그러면 저는, 같은 목회자로서 듣기 거북한 때도 있을 수 있죠.
'아~ 이게 하목사님의 그릇과 나의 그긋의 차이구나!' 생각이 듭니다.
'그 정도 하면 됐는데 왜 자꾸 칭찬하시지? 내가 뭘 잘못 한다는 건가?'
그렇지만 그것(경쟁심 같은)까지 다 눌러야 되는 거에요.
그래서 저는 끝까지 기뻐했어요.
그리고 누가 잘한다는 칭찬을 들으면, 저도 덩달아 그를 칭찬해주고 있어요.
제가 제 자신을 이렇게 오픈해서 말하는 것은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말하는 거지요...
혹시 오해해서 '그릇이 작은 사람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래서 목회자들이 자기 은사에 따라서 정말 마음껏 사역하고
또 다른 교회에 담임목사가 돼서 잘 할 분들은, 또 그렇게 추천해드리고
좀 어떻게 보면 아까운 분들을 제가 추천해요.
저는 저희 교회 담임 목회자를 추천해 달라는 요청을 최근에 많이 받는데
정말 같이 오래오래 하고 싶은 사람을 추천하지
그냥 내 눈에서 없었으면 좋겠다.. 그런 분은 추천 안 합니다.
그렇다고 지금 남아 있는 분들이 다 그런 분이라는 건 아니에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런 마음으로 한국교회를 또 축복하고 있습니다. (훌륭한 목회자를 개척으로)
지금까지 저희 교회가 하나님의 귀한 쓰임을 받은 것은
여러분들이 다 그런 마음이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