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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11:1-9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LNCK 2023. 2. 14. 17:41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대상11:1-9     2013.12.29, 스크랩, 정리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른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일단 윗사람이 되거나 성공을 하고 나면

그 전에 자기가 아랫사람으로 있던 때나 고생하면서 살던 시절을 까마득히

잊어버리면서 사람이 완전히 딴판이 되는 경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마 현실적으로 볼 때에도 이 속담처럼 성공한 후에도

여전히 겸손하고 근면한 사람보다는 소위 전형적인 '졸부'처럼

못난 인간으로 바뀌는 사람이 훨씬 더 많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소수의 예외에 해당되는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그는 황금 같은 청년기를 살기 등등한 사울 왕의 추격에 쫓겨 이리저리

도망 다니느라 다 보내고 말았지만, 그런 기나긴 환난 시기를 지나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고 연단을 잘 통과했습니다.

 

그러던 다윗이 그 천신만고의 날을 넘기고

이제 드디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는 때가 왔습니다.

 

어제의 도망자가 오늘에는 일국의 왕이 되었으니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인생이 확 바뀌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처럼 극적인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런 경우에 처한 사람들이 흔히 빠져 들어가기 십상인

시험에 들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 된 이후에도 승승장구하며

'점점 강성하여 가는' 축복의 가도를 달리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대상11:9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오늘 2013년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게 된 저와 여러분 역시

이 교회의 광야생활 40년을 마감하고

이제 새로운 성전으로 들어가는 전환점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제 경향공동체의 제1세대가 통과해 왔던 '고난의 시대'를 마감하고

앞으로 새로 시작되려 하는 '형통의 시대'를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이런 뜻 깊은 시점에 저는 주신 말씀을 통하여

성도가 '고난' 중에나 '형통'할 때나

변함없이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해 주시는' 대상11:9

은총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고난의 시기를 통과할 때에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성취될 것을

믿고 인내하는 성도는, 결국 축복의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다윗이 고진감래의 성공을 누리게 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대상11:1~3절에 “1 온 이스라엘이 헤브론에 모여 다윗을 보고 가로되

우리는 왕의 골육이니이다 2 전일 곧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한 자가 왕이시었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3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 이르러 왕에게 나아오니

다윗이 헤브론에서 여호와 앞에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매

저희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니

여호와께서 사무엘로 전하신 말씀대로 되었더라"

 

사울 왕이 길보아산에서 전사한 후에 다윗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새 왕이

될 사람이라는 점에 대하여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그야말로 이심전심이었죠.

 

투표는 물론 여론조사 따위도 할 필요 없이 다윗의 등극은 모든 백성들에게

아예 자동적인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던 것이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그들이 다윗을 헤브론에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하면서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그 이유가 세 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 이유는 다윗이 그들의 동족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왕의 골육이니이다" :1

문자적으로 ‘네 뼈와 네 살이라 thy bone and thy flesh’

 

그동안 이스라엘은, 블레셋 사람들과 그들의 다른 적들에 의해 압제받고,

사울 가문의 완전한 실패와 그들의 지도자 사울 왕의 죽음을 목격했죠.

 

이제 이스라엘은 유능한 지도자(다윗) 밑에서 연합의 필요성을 느꼈고,

아브넬의 협상의 중간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마침 사울의 남은 아들 이스보셋이 죽은 직후에

온 이스라엘 12지파가, 다윗에게 모여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우리는 왕의 골육)은,

‘우리는 이제부터 사울 왕가를 따르지 않고,

다윗 왕를 따르겠다’는 서약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자기들의 왕으로 택하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표현이죠.

 

또한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과 한 핏줄을 나눈 사람이었습니다.

 

신명기17:15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왕은 반드시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

나와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다윗은 바로 이 제일 기본적인 조건에 부합되었던 것입니다.

 

▲둘째 이유는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한 자"가 바로 다윗이었다고 했습니다. :2

 

사울은 재위 당시에도 실상 왕으로서 백성들을 위해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전혀 못했던 왕이었습니다.

 

그 대신에 이스라엘을 침략한 외적을 물리친다든지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는 일들,

즉 원래는 당연히 사울 왕이 해야 할 일을

실제적으로는 다윗이 이미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울에게 쫓기는 처지에 있으면서도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섬기는 일에는 오히려 앞장서고 있었고,

(아둘람 동굴로 찾아나오는 환난 당한 자들을 물리치지 않고 돌봄)

바로 그런 면에서 볼 때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훨씬 전부터

이미 진짜 왕이나 다름없이 여겨졌던 것이었습니다.

 

보통 이 세상의 정치 상황에서는 이 정도만 되어도 충분할 것입니다.

왕으로 추앙되기에 아무런 법적 결격 사유가 없고,

온 백성으로부터 최고의 인기와 지지도를 누리고 있으며,

정적은 이미 다 사라지고 하나도 남지 않았으니,

이것만 해도 평화적 정권 교체의 조건들이 완전히 충족된 것이나 다름없었죠.

 

하지만 다윗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결국 왕이 된 데에는 그런 정치적 상황이나 현실적인 조건을

훨씬 초월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세 번째 이유는 바로 2절 하반절에서 백성의 대표자들이

다윗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는 대로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라는 사실이었습니다. :2

 

다윗 역시 그가 사울의 손으로부터 도망 다니던 시절 내내

이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겠지만,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런 약속의 말씀을 내리셨다는 것을 전해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취임식 준비위원회로부터 이런 말을 듣는 순간

감회가 무량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가 사무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던 날은

지금 백성들로부터 왕으로 추대 받고 있는 때로부터

무려 이십 몇 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때 아직 새파란 소년에 불과했던 다윗은 베들레헴 시골구석에 있던

자기 고향 집에서 자기 가족들만이 보고 있는 가운데

선지자 사무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으면서

장차 그가 이스라엘의 임금이 될 것이라는 엄청난 말씀을 들었던 것이죠.

 

그리고 그때로부터 지금까지의 다윗의 인생은 오직 그 말씀 하나만 붙잡고서

온갖 험한 날들을 구사일생으로 통과해 왔던 기간이었습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이미 자기 목숨이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빠지는 경험을

여러 차례 겪었습니다.

 

그는 채 십대를 통과하기 전부터 정치꾼들의 중상모략과 동료의 배반이라는

쓰라림도 톡톡히 맛보았습니다.

 

물론 배고픔과 잠 잘 곳 없이 헤매는 고생 정도는

그저 일상의 다반사일 뿐이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황금 같은 청년 시절을 그야말로 온갖 인생 고난의 산전수전을

다 겪어 본 노인처럼 보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기나긴 이십여 년 동안 다윗이 자신의 인생을 두고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오직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주권자가 되리라" :2

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 이것 한 가지였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말씀 하나만 붙잡고 그 수많은 날들을 끝까지 인내하면서

견디어 낸 결과 이제 바로 그 약속의 말씀이 마치 꿈처럼

그대로 성취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3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헤브론에서 다윗의 대관식을 거행했습니다.

 

여기서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저희와 언약을 세웠다"는 말은,

왕이 되는 다윗이나 그의 신민이 되는 이스라엘 백성이 다 함께

하나님 앞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본분과 의무를 다할 것을 서약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두고 3절 끝에 결론적으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사무엘로 전하신 말씀대로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임금이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사선을 넘나드는 고난이 연속되는 청년기를 보내면서도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하나만을 끝까지 믿고 인내했던 결과,

그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공수표로 끝나지 아니하고

그 '말씀대로' 축복의 날은 오고야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성도의 인생은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 말씀을 자신의 삶 속에서

체험할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입으로 선포하는 목사나 하나님의 말씀을

학문적으로 증거하는 신학자들의 사명도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바로 자기 실제 삶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신실한 것인지,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 얼마나 은혜롭고 복스러운 것인지를

몸소 보여 줄 수 있는 성도 또한 그에 못지않게 지극히 귀중합니다.

 

특히 불신자들이 보기에 축복은커녕 환난만 연속되는 것 같은 시기를 통과

하면서도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잡고 끝까지 인내함으로써

끝내 승리하고야 마는, 실로 자랑스럽고도 멋진 생애를 보여 줄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경향인의 10대 생활강령 중에서 네 번째가

바로 "설교말씀을 생활에서 체험하자"가 아니겠습니까?

 

아직은 가난하게 살아도 오직 말씀을 믿고 인내할 때

결국 나중 축복을 창대하게 해 주신다는 이 약속을

실제로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중병에 걸려 있어도 예수님께서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을 굳게 붙잡음으로써,

병 때문에 낙심하거나 원망하는 시험에 빠지지 아니하고

끝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는' 축복을 직접 누려야 합니다.

 

고난을 통과하는 중에도 오직 말씀의 약속만을 붙잡고 끝까지 견디어내게

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장차 신앙의 위인으로 더욱 크게 쓰실

인물을 키우시는 방법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불운과 고생만 연이어지는 생을 살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의 신실하심을 믿고 인내함으로써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신' 축복을

반드시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형통의 날을 누리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매사에 동행해 주심을 믿고

영광을 돌리는 성도에게는 생애 최고의 전성기가 열리게 됩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이후에도 그 정도로 그치지 않고

더더욱 태평성대의 축복을 구가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4~9절의 말씀에 "4 다윗이 온 이스라엘로 더불어 예루살렘 곧 여부스에

이르니 여부스 토인이 거기 거하였더라 5 여부스 토인이 다윗에게 이르기를

네가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나 다윗이 시온산 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성이더라 6 다윗이 가로되 먼저 여부스 사람을 치는 자는

두목과 장관을 삼으리라 하였더니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먼저 올라갔으므로

두목이 되었고 7 다윗이 그 산성에 거한 고로 무리가 다윗성이라 일컬었으며

8 다윗이 밀로에서부터 두루 성을 쌓았고 그 남은 성은 요압이 중수하였더라

9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다윗의 집권 초반기는 그야말로 파죽지세였고 만사형통이었습니다.

 

그가 초창기에 이루었던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예루살렘 성을 점령하고

그것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만든 일이었습니다.

 

본문에 "다윗이 온 이스라엘로 더불어 예루살렘 곧 여부스에 이르니

여부스 토인이 거기 거하였다"고 했습니다. :4

 

사사기1:8절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을 정복해 들어올 당시

유다 지파가 이 예루살렘 성을 일시 점령했었지만,

그 이후 곧 여부스 족속에 의하여 다시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다윗 왕 때에 이르기까지 약 400년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을 탈환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 성을 탈환하는 것이 이스라엘 왕국을 튼튼히 세우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급선무라고 판단했습니다.

 

수도로서 전술적인 위치도 좋았지만, 또한 예루살렘은 남쪽 유다 지파와

북쪽 지파들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서

정치 전략적으로도 중립적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이 자기네 성을 공략해 온다는 소식을 들은 여부스 거민들은

"네가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사무엘서에도 보면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너를 물리치리라"며

다윗을 업신여겼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고지에 있는데다, 그 주위가 골짜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형적으로 방어하기에 아주 유리했습니다.

 

게다가 이 여부스 족속은 작지만 강한 민족이었던 까닭에

이스라엘 백성은 그처럼 가나안 한복판에 이방 민족이 버젓이 자리 잡고

살고 있는 것을 그때까지도 전혀 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다윗은 "먼저 여부스 사람을 치는 자는 두목과 장관을 삼으리라"고

선언했습니다.

 

즉 이 예루살렘 성 공략에 성공하는 자를 장차 이스라엘 군의 총사령관으로

삼겠다고 공언함으로써 자기 부하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이 전투에 임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요압이 그 전투를 진두지휘하여 결국 여부스 사람을 물리쳤고,

다윗은 그 산성을 다윗성이라 이름하고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게 되었습니다.

 

이어지는 8절에 "밀로"는 예루살렘 바로 바깥쪽에 있는 요새를 가리키는 말인데,

다윗은 이 곳을 역시 보강함으로써 예루살렘의 수비 상태를 더욱 강화시켰습니다.

 

이처럼 다윗이 예루살렘을 새 수도로 세우게 됨으로써

이스라엘의 통치자로서의 그의 위상은 더욱 확고히 굳혀졌습니다.

 

가나안 한가운데 눈엣가시처럼 박혀 있던 강력한 이방 민족을

단숨에 물리쳤을 뿐 아니라, 군사적으로 정치적으로 더할 나위 없이

이상적인 곳에 이스라엘의 수도를 건설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온 백성의 인기와 지지를 한 몸에 받고 왕이 되었을 뿐 아니라

국정 초기부터 실로 능력 있는 군주임을 이처럼 멋있게 과시했던 것이죠.

 

▲그런데 이 모든 일을 두고 이 역대기는 어떻게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까?

 

9절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다윗의 그와 같은 성공적인 초기 사역을 두고

역대기는 다윗이 시기를 잘 타서 왕이 된 까닭에 그렇게 되었다고 하거나

다윗이 사람들을 잘 써서 그처럼 시급한 현안 과제를 잘 해결해 내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다윗이 정확한 판단과 먼 미래를 내다 본 안목을 가졌던 까닭에

그처럼 왕으로서의 입지를 초창기부터 탄탄히 잘 다져 나갔다고 칭찬하지도

않았습니다.

 

역사 교과서였다면 아마 틀림없이 그런 식으로 주석을 달았을 것이며,

웬만한 정치가들이라면 언론을 부추기거나 강압을 해서라도

자기의 능력과 치적을 과시하는 글들을 쓰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은 그 대신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갔다"라고 간결하면서도 무게 있게

다윗의 성공적인 초기 사역을 요약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다윗이 왕으로서의 초창기 활동과 업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증거했다는 뜻이 됩니다.

 

그는 여부스 족속을 무찌르고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다윗성을 중건하고

나라의 기반을 다져 가는 이 일련의 성과를 통하여,

자신의 능력을 과시한 왕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살아 계셔서 그와 함께 계심을 온 백성 앞에 보여 주었죠.

 

즉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잘 풀려나가고 있을 때에도

다윗은 그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해 주심으로써 이루어진

일인 줄을 한시도 잊지 않았으며, 그 사실은 또한 그의 곁에서 보는

모든 사람의 눈에도 너무나도 명약관화했습니다.

 

▲사무엘하 23:5절에 보면 다윗이 먼 훗날 자기의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함께 하심으로써

나로 하여금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게 해 주셨다"라고 회상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된 후에 그야말로 만사가 형통하게 되어 갈 때에도

그 모든 것을 두고 오직 하나님의 동재와 도우심 때문이었다고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림으로써

더 큰 축복의 전성기를 향해 치닫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고난 중에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모습을 증거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만사형통할 때 그 모든 공로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자세 역시

그리 쉬운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어려울 때에는 하나님 이름 부르다가도

숨통이 트이고 살만하게 되면 절로 교만하게 되기 쉬운 것이 보통일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는 자신의 생애에 모든 일들이 잘 풀려나가게 되는 것을 두고서

진정으로 하나님께만 모든 영광을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누군가가 잘 되어 나갈 때 흔히

"저 사람은 참 팔자 좋게 태어나서 저렇게 복 받는구나."라고들 말합니다.

 

"그 사람은 마침 기회를 잘 타고 사업을 시작한 바람에

저렇게 돈 많이 벌고 있는 거지요"라든지,

"그 사람은 정말 사람이 똑똑하고 실력이 있으니 당연히 성공한 것이지요”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성도들은 그와는 다른 말로 칭송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저 장로님은 정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나보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저렇게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 -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을 정복하며 사는 날 동안 이런 칭송을 들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 집사님은 어쩌면 저렇게도 하는 일마다 잘 풀려나가고

주변 상황이 저렇게 딱딱 들어맞을까? 정말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면서

만사형통하게 해 주신다는 말씀이 바로 저런 성도를 두고 하는 말이구나."

- 적어도 교회의 직분자로서 이처럼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게 되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은 물론 성경 말씀이 제일 먼저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말 못하는 만물도 그 자연계시를 통하여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성도들은 각자의 주어진 생을 통하여 신행일치의 열매를 가득

거둠으로써 우리의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며 당신의 사랑하시는 성도와

동행하시면서 그 길을 형통하게 해 주신다는 사실을

온 세상 사람들 앞에 똑똑히 보여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직장이나 사업에서 남보다 몇 배 더 성실하게 노력하여

끝내 성공했을 때야말로 결코 자만에 빠지지 말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려야 그 축복이 거기서 끝나지 않고 더 창대하게 됩니다.

 

학생들이 주일에는 아침부터 밤까지 빠짐없이 예배에 참석하고

또 엿새 동안에는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에 합격하게 되었을 때

그 모든 것을 두고 오직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신 덕택'이라고 영광돌리면

그때부터 진짜 복스러운 상아탑의 학창 시대가 활짝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의 시기를 잘 통과하여 축복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을 때에

거기서 그만 자화자찬의 교만에 빠져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실패를

당하지 않도록, 만사형통할 때일수록 더욱 '이제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일 뿐이라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림으로써

그 앞에 예비되어 있는 더 큰 축복의 전성기까지 꼭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다윗은 이처럼 자신의 삶을 통하여 백 마디의 웅변보다도

훨씬 더 강력하게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했습니다.

 

그는 어려울 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만을 굳게 믿고 인내함으로써

끝내 그 말씀대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탄탄대로가 활짝 열리게 되었을 때에도

결코 교만에 빠지지 않고 오직 모든 영광을 그와 함께 동행하시는 하나님께만

돌림으로써 이스라엘 역사상 최고로 위대한 성군으로서의

전성기를 향해 내닫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신앙의 큰 인물이 되는 데에는 고난을 통한 연단의 과정은 필수적이며,

'나중 축복'이 '이전 축복'보다 오히려 더 큰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형통할 때에 자신과 동행해 주시는 하나님께만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것이 필수인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환난이 닥치고 고난이 연이어지게 될 때

그 때문에 낙심하거나 원망하게 되면 그 시험은 진짜 시험이 되어버립니다.

 

그럴 때일수록 오직 '하나님께서 나를 더 크게 쓰시려고 이처럼 연단의

기한을 길게 하고 계시는구나.'라고 깨닫고 인내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형통한 때를 열어 주시기 시작할 때 자칫 방심하거나 교만에

빠지면 그야말로 '공든 탑이 순식간에 무너져' 버리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축복을 내려 주시기 시작하면 당연히 하나님께 더 많이 감사를 드리고

더욱 온전히 영광을 돌릴 줄 알아야만

그 축복은 가파른 급상승 곡선을 그리면서

자신도 전혀 기대할 수 없었던 최고의 전성기를 향해 치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는 성도에게는 그 길을 완전히 막아 버리는

고난의 장애물이란 있을 수 없으며, 이제는 더 이상 복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상한선 역시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난 40년 동안 그래 왔던 것처럼 경향의 새 시대를 통해서도

고난의 때에는 오직 말씀만 끝까지 붙들고 연단을 받음으로써

결국 그 약속 성취의 날을 맞이하고,

 

형통한 때가 오면 더욱 모든 영광과 감사를 하나님께만 바침으로써

그 앞에 예비되어 있는 축복의 전성기를 향해 '점점 강성하여 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다윗의 ‘강성함’을 신약 복음적으로 해석해 보겠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 누가 가장 큽니까?

 

마23: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보잘 것 없는 어린아이를 영접하라.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 말씀하십니다. 막9:37

 

즉, ‘낮은 자가 높은 자를 받아드리는 것’을 뜻합니다.

곧 '하찮은 어린아이들보다 더 낮은 자가 되어서,

어린아이를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비천한 어린아이들보다 더 낮아 질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거지들을 영접한 적이 있으십니까?

자선은 베풀어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거지들 보다 더 낮아져서 그들을 영접하라' 하면

당황하지 않겠습니까?

제자들은 아마도 고개를 흔들다 못해 분노했을지도 모릅니다.

 

제자들은 어릴 때, 이미 어린아이의 고통을 다 겪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그 고통으로 들어가라 하십니다.

 

그 뿐 아닙니다.

어린아이보다 더 낮아지라고 주님은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때야 비로소 그토록 원하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은,

다른 말로, 가장 낮고 천한 자보다 더 낮아져서, 그를 섬기라는 뜻인데,

곧 자신의 ego를 완전히 무시하며 살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ego(자아)를 세우기 위해,

천국에서 위대한 자가 되길 원했는데

천국에서는 실제로 자신의 ego를 완전히 버리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음을 보게 됩니다.

 

그 후 제자들은 어린아이만 보면 갈등이 시작됩니다.

"저렇게까지 해서 천국에서 위대한 자가 될 필요가 있나?"

 

그런데 이들은 갈등하면 할수록, 자신의 ego를 죽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천국에서 위대한 자가 점점 되어 갔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ego를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시진 않으셨습니까?

여러분의 ego를 위해서, 천국에서 위대한 자가 되시길 원하시진 않으셨습니까?

 

우리에겐 갈등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저렇게까지 하면서.. 천국에서 위대한 자가 될 필요가 있나?"

 

이 갈등을 시작하신 분들은 언젠가는 자신의 ego를 죽이실 것입니다.

그리고는 천국에서 위대한 자가 되어 가실 것입니다.

 

소화 데레사는 'little flower'(소화)로서,

가장 작은 자로 이 땅에서 살다가..

천국에서 가장 큰 자가 된 성자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소화, little flower라고 할 때, 고상한 느낌이 듭니다마는,

들판에 가면 발에 밟히는 작은 들꽃을 연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 소화 데레사(St. Therese)가 쓴 글을 보면,

그가 얼마나 작은 자로 살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씁니다.

 

"제가 언제나 작은 한 톨의 모래로 남아 있게 기도해 주세요.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는, 모든 눈에 숨겨진,

단지 주님만 볼 수 있게 말이에요..."

 

이 분은 늘 큰 자가 되길 원하는 세상에서,

모래처럼 작은 자가 되길 원하셨습니다.

 

평범한 소녀가 되길 원하셨습니다.

하나님만 아는 자기가 되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한 톨의 모래와 같이 되길 원했습니다.

 

소화 테레사가 세상을 떠날 때,

수도원 친구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친구들 눈에 띄이는 일은 하질 않았습니다.

오직 주님 눈에 띄이는 일만 하길 원했습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는 안 띄어도, 주님에게만 보여지는 삶을 사는 것,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우리도 이처럼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