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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1장 해석 및 주석

LNCK 2023. 2. 15. 05:54

HANGL NOCR - 한글 주석

◈삼상1장 해석 및 주석

<내용 분해>
1-8절 : 엘가나와 두 아내 한나와 브닌나
9-18절 : 한나의 기도와 서원
19-28절 : 사무엘의 출생과 구별

◑절별 해석

1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에브라임 산지'
이 지역에 위치한 '실로' (Shiloh)는 가나안 최초의 성지(聖地),
즉 여호와의 성막이 있는 장소가 되어
사사 시대, 그리고 사무엘 시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정치. 종교.
사회의 중심지가 되었다<3절>.

'라마다임소빔'
'숩 족속의 두 고지(언덕)' 또는 '숩 땅에 있는 고지들' 이라는 의미로서,
사무엘 가문의 조상이었던 '숩'(혹은 '소배', 대상 6:26)이라는 사람이
그곳에 정착함으로써 붙어진 지명이다.

이곳은 예루살렘 북서쪽 약 8km 지점에 위치하였으며,
단순히 '고지'(高地)라는 이름의 의미를 갖고 있는 '라마'와 동일한 지역이다<19절>.

한편 '라마'는 사무엘이 태어난 고향이요, 그가 활동한 사역의 중심지이며,
또한 후일 사무엘이 죽어 장사된 곳으로,
사무엘 시대에 주요한 위치를 점하는 장소이다.

그런데 본절에서 특별히 '라마다임소빔' 이란 원지명을 사용한 이유는
팔레스틴 지역에는 많은 '라마'(언덕 마을, hilltown)가 있기 때문에,
그것들과 사무엘의 고향 '라마'와 서로 구별하기 위함이다.
이 말을 ‘라마’로 간단히 표기하기도 하였다.
(2:11, 7, 8:4, 15:34, 16:13, 19:18, 25:1, 28:3)

한편 이 지역은 후일 시약 시대에 들어와서는
부자 요셉의 고향과 동일한 '아리마대'로 불리워졌다(요 19:38)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
'엘가나'는 본문의 족보와 역대기의 복보(대상6:1, 27, 28)를 종합해 볼 때,
레위 지파의 후예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본문에서 그를 '에브라임 사람' 이라 칭한 까닭은
그가 에브라임 지파의 후손이어서가 아니라,
다만 그가 그 지역에 거주하여였기 때문이다.    ★

사실 레위 지파는 타지파처럼 일정한 기업을 받지 봇하고,
이스라엘 전국에 흩어져 살면서 그들의 종교 생활을 지도했었다(민 35:1-8).

또한 '라마'는 여호수아에 의해 정식으로 지정된 레위인의 성읍도 아니었다(수 21:17).
따라서 사무엘의 조상 '숩'은자신의 조상에게 원래 할당된 지역을 떠나
바로 이곳으로 들어와 살게 된 듯하다(삿17:7, 8).
    
2 그에게 두 아내가 있었으니 한 사람의 이름은 한나요 한 사람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더라

'두 아내가 있으니'
어쩌면 후사를 얻기 위함일런지 모르겠지만,
당시 경건했던 엘가나까지 중혼(重婚)의 관습에 쉽게 물들었다는 사실은
사사 시대가 얼마나 영적.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암울했던 시기였는지를
명백히 보여준다. 한편 신명기 21:15-17의 규례는 마치 일부다처제를
용인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신명기의 규는 단지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아내를 여럿둠으로써 부득이하게 야기될수 있는 경우를 대비케 하는
성경적 해결책일 뿐이다.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브닌나'(Peninnah)는 '진주','보석','산호' 등의 뜻을 지닌 이름이다.
한편 여기서 '자식'(옐라딤)은 '어린이' 혹은 '아들'의 복수형으로서,
이는브닌나가 최소한 2명 이상의 자녀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한나는 무자하더라'
한나(Hannah)는 '사랑스러움' 또는 '은혜스러움'이란 의미를 지닌 이름으로,
히브리 사회에서 흔히 발견되는 이름이다. 그러나 특별히 여기서 이 이름은
그녀가 자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많은 사랑을 받았고(5전),
또한 후일 하나님의 은혜까지도 많이 입었다는(2:21)실제적 사실과
잘 부합되는 이름이다. 그러나 초기에 그녀는 아들을 낳지 못함으로 인해
많은 번민과 소외감에 휩싸일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특히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자녀의 출산을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증거로 삼은 반면(신 7:13,14, 시 107:13),
무자(無子)는 하나님의 징계나 저주의 결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창 20:18).

3 이 사람이 매년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예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에 있었더라

'매년에...경배하며'
경건한 레위인 엘가나는, 히브리 모든 남자는 매년 정한 기간에 중앙 성소로 올라가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율법규정(출 34:23, 신 12:5)에 따라 이 의무를 이행하였다. 물론 성경은 매년 세 차례씩 올라가야 한다고 말한다<출23:17>. 그러나 극히 타락했던 사사 시대의 정황 속에서 엘가나가 이 정도나마 신앙적 열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결코 가볍게 평가될 수 없는 것이다.

'실로'
이곳은 당시 법궤가 보관된 곳, 곧 성소(Tabernacle)가 있는 지역이었다. 법궤(언약궤)는 처음에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 '길갈(Gilgal,수 4:19)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가나안 정복 후 땅 분배할 동안에 '실로'(Shiloh, 수 18:1)로 옮겨진 후 이때까지 이곳 실로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런 이유로 예루살렘 북쪽 약 32Km 지점에 위치한 '실로'는 여호수아 시대 말기로부터 사사 시대 및 사무엘 시대 초기까지 이스라엘의 종교적 중심지요, 정치적 주 무대이며, 군사적 요해지(要害地)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엘리 시대 말기에 블레셋 족속에게 법궤를 빼앗기고 실로가 파괴됨으로 말미암아 실로의 영광은 역사의 무대 위에서 사라지고 말았다(5:1, 시78:60-64).

'제사를 드렸는데(리즈보아흐).'
제물과 감사의 현물, 그리고 기도가 포함된 광의적 의미의 제사를 말한다. 그러나 특히 여기서는 엘가나가 제사 완료후 그 제물을 가족들에게 나눠주었고(4절) 또 그들이 그것을 함께 먹었다는 점(9절)에서 볼때, 여기서 엘가나가 드린 제사는 제사장의 몫 이외의 나머지 부분을 자신과 가족 또는 공동체 전체가 일정한 장소, 곳 성막의 뜰이나 성막의 별채<1:18>에서 함께 나누어 먹을수 있었던 '화목제'(Peace-offering)를 가리키는 듯 하다(레 7:14, 30-36, 민 6:20, 신 18:1).

'엘리'
'엘리'는 제사장 가문중 유력한 비느하스 가문의 후손이 아니고, 이다말(민 4:28, 33)의 후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혼란한 사사 시대 말기에 대제사장직과 사사직을 동시에 갖고 있었음을 볼 때, 그는 유명하면서도 정치적 수완이 뛰어난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다.

4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의 아내 브닌나와 그의 모든 자녀에게 주고

'제사를 드리는 날'
모세 율법상 모든 히브리 남자가 일년 3차씩 중앙 성소에 올라가 준수해야 할 절기는 무교절(유월절), 맥추절(오순절, 칠칠절), 수장절(장막절, 초막절)이었다(출 23:14-17). 그런데 이중 엘가나가 택하여 제사를 드린 날은 무교절(유월절)이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1)이 세 절기 가운데 유월절이 가장 큰절기였고, (2)또한 이때는 전 가족이 함께 여호와 앞에 나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1년 1차 유월절에 중앙 성소로 올라가던 관습은 신약 시대에 이르러 보편화된 것 같다(눅 2:41).

5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
일정기간 동안 한나가 아이를 잉태하지 못한 것은 '사라'(창 11:30), '리브가'(창 25:21),'라헬'(창 29:31),'마노아의 아내' 등의 경우와 같이 하나님의 적극적인 섭리로 말미암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 친히 모태(母胎)를 주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잉태하지 못하던 여인이 하나님의 능력이나 하나님의 경륜에 의해 자녀를 낳는 예가 많다(창 18:10-15, 21:1-4, 25:21, 30:22-24, 삿 13:3, 눅1:7,57). 그러한 의미에서 여기 한나의 불임(不妊) 역시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로서, 곧 꺼져가는 이스라엘의 운명을 탄생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오묘하신 뜻과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한편, 이처럼 '육적(肉的)인 출생'에 관한 하나님의 주관과 섭리는 역시 '영적(靈的)인 출생'(중생)에 관한 영역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롬 11:36, 엡 4:6).

6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직역하면, '그녀의 태(胎)를 닫으셨기 때문에'란 의미이다. 따라서 이 말은 '태의 문'을 여닫으시는 생명의 주관자가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말이다.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이 말은 브닌나가 무자(無子)한 한나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여자로 보고 온갖 방법으로 그녀를 괴롭혔음을 나타내는 말이다<3절>.

7 매년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분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매년에...그같이 하매'
이는 성소에 올라가 제사를 드린 후 화목제의 희생제물을 가족에게 나눠줄 때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는 일이 계속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하나를 향한 엘가나의 호의가 단순한 동정이 아닌 순수한 사랑에 근거했음을 깨닫게 되나, 바로 이 일로 인하여 브닌나는 시기심에 사로잡힌 나머지 한나를 더욱 격동시키게 되었을 것이다.

8 그의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니라

'어찌하여 울며...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이말은 엘가나가 한나의 우는 이유와 먹지 아니하는 이유를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니다. 이 말은 무자(無子)로 인해 겪는 그녀의 고통을 깊이 헤아리고 그녀의 슬픔에 동참하면서 진정으로 달래는 애정어린 위로의 말이다. 여하튼 본절은 기쁨의 가족 잔치가 되어야 할 화목제사의 시간이 되고 말았음을 보여 준다. 이처럼 창조의 원리(창 2:21-25)에서 보여지는 아름다운 일부 일처(一夫一妻)의 제도가 아닌 일부 다처(一夫多妻)의 가정-예를 들면 아브라함의 가정, 야곱의 가정 등-에서는 항상 기쁨 보다는 슬픔이 도사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9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그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었더라

'엘리는...앉았더라'
'앉았더라'에 해당하는 원어(야솨브)의 원뜻은 말그대로 '거하다', 앉다'란 뜻이다. 그러나 성경 여러 곳에서 이 단어는 '직분을 수행하다'의 뜻으로도 사용되고 있다(신 17:18, 왕상 1:35, 46, 2:12). 이로볼 때 당시 제사장 엘리가 문설주 옆에 앉은 것은 휴식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고유한 제사장 직분을 수행키 위한 것임이 분명하다.

'여호와의 전(헤칼 여호와).'
당시는 아직 '성전'(聖殿,Temple)이 건축되지 않아 '성막'(聖幕, Tabrnacle)에서 제사를 드렸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왕궁'이나 궁전'을 뜻하는 '헤칼'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은 대단히 의미 심장하다. 이는 그곳이 '만군(萬軍)의 여호와'께서 거처하시는 곳이기 때문이다(시5:7). 여기서 우리는 외형에 구애받음 없이 다만 만왕의 왕 도시는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곳이 곧 왕궁이요 궁전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10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기도하고 통곡하며'
공동 번역은 '흐느껴 울며 애원하였다'로 번역하여 그 의미를 생생하게 드러내었다. 진정 한나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솟구처 오르는 모든 인간적 슬픔과 고통을 숨김없이 하나님 앞에 내놓고 애절한 심정으로 간구 기도를 드림으로써, 고통과 번민을 눈물의 기도로 승화시꼈던 것이다.

11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서원하여 가로되...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한나의 서원은 삭도를 머리에 대지 않겠다는 맹세가 수반됐다는 점에서 구약의 여러 곳에서 나오는 '나실인의 서원'과 맥을 같이 한다(민 6장, 삿 13:15). 그런데 이 나실인(Nazirite, 민6:2 주석 참조)의 서원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자기 자식이 소명되었음(렘 1:5, 갈1, 15)을 확실히 인식한 어머니에 의하여<삿 13:12 이하>, 태어날 자식의 평생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겠다는 신앙적 결단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서원은 전쟁과 관계되어 있으나, 사무엘의 경우는 성전 봉사와 관계되 있다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

한편 나실인이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는 이유는 (1) 머리털을 보존함으로써 자신위에 자신을 주장하는 자가 있음을 나타내며<고전 11:3-10>, (2) 또한 머리를 길름으로서 자기 생명의 근원을 인식하고, 이울러 자기 위에 계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오직 그 분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고자 함이다. 민 6:5 주석 참조.

'만일' (임 라오).
여기서 '임 랄'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나 의심 등을 표현한 말이 아니고, 성취를 거의 확신하는 간절한 믿음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나실인(Nazirite)으로서 자신을 구별시켜 여호와께 드리고자 할 때 서원자는 그 기간에 따라 (1) 일정 기간동안, 또는 (2) 일평생 동안 그 서원 준수의 기간을 작정할 수 있었다. 물론 여기서 한나는 아들을 낳을 경우, 그를 일평생 동안 하나님의 성소 봉사를 위한 나실인으로서 구별해 드릴 것을 서원한 것이다. 한편 이에 대하여 혹자는 주장하기를, 사무엘은 본래 레위 족속이기 때문에 한나의 이러한 헌신의 서원은 무의미하다고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비록 레위인이라 할지라도 정식 성소 봉사는 30세 이상(민4:3)으로 정해진 반차를 좇아 일정기간 동안 행해졌기 때문에, 한나의 서원과 같이 아들을 어릴 적부터 성서에 거처토록 하면서 일평생 성소 봉사를 위해 구별하여 바치겠다는 서원은 분명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아무튼 한나의 이 서원은 후일 그대로 지켜지게 되는데(27, 28),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사무엘)을 선지자로 소명함으로써(3:20) 더욱 고상한 형태로 한나의 서원을 승화시켜 주셨다.

12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일반적으로 큰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것이 당연시 되던 당시의 상황에서 입술만 움직이며 기도하는 한나의 기도는 충분히 오해의 소지가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엘리 제사장은 그같은 한나의 모습을 보고 그녀가 잔치에서 포도주를 많이 먹고 취한 줄로 착각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그 당시는 음주가 다양한 종교적 행사와 관련되었고<1:24, 10:3>, 따라서 엘리는 때로 사람들이 술에 취하여 성소를 소란스럽게 하는 광경을 목격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엘리는 바로 이같은 자신의 경험에 의거하여 슬픔이 많은 한 여인의 상처를 건드리고 말았던 것이다.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당시 한나의 기도는 자신의 기도에 스스로 완전히 몰입하여 하나님 앞에 온 심령을 토로하는 깊고도 은밀한 내적 기도였다. 또한 실로 이런 기도는 간절한 소원과 깊은 시앙심 없이는 아무나 힘든 차원 높은 고상한 기도였다.

13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 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14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하니

'엘리는...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물론 엘리의 판단처럼 때로 술에 취한 상태로 성소의 규율을 어지럽힌 자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엘리는 이 말은 분명 이스라엘의 사사요 제사장으로서 엘리의 쇠퇴한 영향력과 감화력을 반영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만일 엘리 제사장 자신이 한나의 기도와 같은 영적이고도 내적인 조용한 기도의 경험을 많이 체험했더라면, 그는 한나의 기도 모습을 '주목하는 동안' 충분히 그 진면목을 파악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년의 엘리 제사장은 그 미미한 판단력으로 한나의 참된 기도의 모습을 단지 술 취한 자의 주정 쯤으로 생각하고 말았던 것이다.

15 한나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한나의 눈언저리가 붉게 물든 것은 결코 '포도주나 독주'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자(無子)한 여인으로서 겪는 모든 인간적인 고통과 수모를 하나님 앞에 모두 아뢰면서 흘린 그 '눈물'때문이었다(Matthew Henry).

'나의 심정을 통한것 뿐이오니'
문자적으로는 '내가 나의 심령을 쏟아 놓았다'란 의미이다. 그런데 여기서 '쏟아 놓았다'(솨파크)라는 단어는 '부르짖다'의 의미로도 쓰인다(시 102:1). 아울러 '신뢰하다'라는 동사의 의미로서 사용되기도 했다(시 62:8). 따라서 '내가 나의 심령을 쏟아 놓았다'라는 말은 하나님께 자신의 어려움을 전적으로 의뢰하면서 그 문제의 해결을 부탁하는 온전한 신앙의 표현임을 알 수 있다(벧전 5:7).

16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분됨이 많기 때문이니이다 하는지라

17 엘리가 대답하여 이르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평안히 가라...원하노라'
한나의 겸손한 해명을 듣고 난 제사장 엘리는 자신의 섣부른 꾸중(14절)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오히려 한나에게 축복을 빌어 주었다. 한편 여기 엘리의 이 말은 '예언'의 말이 아니라, 제사장으로서 빌어줄 수 있는 '축복'의 말이다.

18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

'당신의 여종이...원하나이다'
한나가 제사장 엘리에게 중보 기도를 요청한 말로 이해하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따라서 이 말은지금 엘리가 한나 자신에 대한 오해를 풀고, 대신 복을 빌어주는 호의를 베풀어 주었듯이(17절), 앞으로도 그와 같은 혹은 그 이상의 호의를 계속적으로 베풀어 주기를 바란다는 의미로 이해햐여야 한다.

'가서 먹고'
심령의 모든 괴로움을 토로한 깊은 내적 기도를 통하여, 그리고 제사장의 축복을 통하여 모든 근심과 슬픔을 해소한 한나는 성소의 뜰을 떠나 성소에 딸린 여러 방 중의 하나, 곧 자신의 가족들이 제물을 나눠 먹고 있을 곳으로 가서 그들과 함께 진정 기쁜 마음으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19 그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의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라마' 1절의 '라마다임소빔'을 참조하라.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자식을 낳는 문제와 관련하여 이같은 표현이 야곱의 아내 라헬의 경우에 있어서도 사용되었다(창 30:22). 한편 성경에서는 한나 외에도 아들을 낳지 못하여 하나님께 간구한 여인들, 즉 이삭을 낳기까지의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창 15:1-21:7). 요셉과 베냐민을 낳기까지의 야곱의 아내 라헬(창 30:1-24), 삼손을 낳기까지의 마노아의 아내)삿 13:2-25), 그리고 침례 요한을 낳기까지의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가(눅 1:5-58)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모두에게 공통적인 것은 (1)기도의 응답으로 늦게 출생된 자식들은 모두 부모에게 하나님의 선물로 인정되었다는 점, (2)또한 그 자식들은 모두 하나님 께 특별히 헌신된 신앙의 인물들이 되었다는 점이다.

20 한나가 임신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사무엘'이란 이름의 의미에 대하여는 여러 견해가 있다.
1)'사무엘'을 '쉠'('이름'이란 뜻)과 '엘'('하나님'이란 뜻)의 합성어로 보고,
곧 '하나님의 이름'이란 의미를 지닌다고 보는 견해

2)'사무엘'을 '구하다'(ask for)란 뜻의 '쇠알'과 '하나님께'란 뜻의 '메엘'의 합성어로 보고, 곧 '하나님께 구했다'란 의미를 지닌다고 보는 견해

3)'사무엘'을 '듣다'란 뜻의 '솨마'와 '하나님'이란 뜻의 '엘'이 합성되고
여기서 '아인'이 탈락되어, 곧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란 의미를 지닌다고 보는 견해 등이다.
이러한 견해 중 그 어원학상 세번째의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
이 말은 한나가 아들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라는 의미의 '사무엘'이라고 지은 중여한 배경을 시사해 준다. 왜냐하면 만일 한나가 하나님께 구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는 들으실 일도 없으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21 그 사람 엘가나와 그의 온 집이 여호와께 매년제와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에

'매년제와 그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에'
'매년제'(the yearly sacrifice)는 이스라엘 민족이 해마다 한 해를 마무리 하면서 지킨 희생제사의 일종으로서, 가족 전부가 참여하는 제사였다(2:19, 20:6). 그러므로 이때는 각종 화목 제물들과 한 해의 소산물 중 가장 좋은 것들, 그리고 여호와의 성소에 바칠 십일조 등을 가지고 중앙 성소로 올라가야 했다(신 12:17,18). 그리고 '서원제'(誓願祭)는 하나님 앞에 올린 서원(vow)을 효력이 있도록 확증키 위하여 그리는 제사이다. 한편 모세 율법에 따르면 비록 한나가 사무엘을 평생 하나님 전에 바치겠다고 서원하였다 할지라도(11절), 그녀의 남편 엘가나는 그 서원을 무효화 시킬 수도 있었다<민 30:6-8>. 그러나 엘가나는 그 서원을 기꺼이 인정하였고, 그런 뜻에서 그는 하나님께 서원제를 드리기로 한 것이다.

22 오직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그의 남편에게 이르되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뵙게 하고 거기에 영원히 있게 하리이다 하니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서원한 한나는 그 서원을 성실히 지킬 양으로, 하나님의 전에 올라가고 싶은 마음을 일다 자제하였다.

'아이를 젖 떼거든...여호와 앞에 뵈게 하고'
아이가 하나님의 전에 평생 바쳐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양육이 된 후에야 가능했다. 대개 중근동 지역에서는 이유(離乳) 시기를 타지역 보다 훨씬 긴 약 3년 정도로 잡았다. 그러므로 이 기간이 지나면 사무엘도 어느 정도 자라서 '희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2:22>에게 맡겨져 육체적으로 양육될 수 있었고 또한 제사장에 의하여 영적으로도 훈련될 수 있었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슈미트(Schmidt) 같은 학자는 3년 정도 된 아이는 엘리 제사장에게 오히려 부담만 될 뿐이라는 가정하에서 아이가 젖뗀 후 13살까지는 어머니의 손에서 양육되었을 것이란 추측을 한다. 그러나 이는 벌로 타당성이 없는 견해이다. 왜냐하면 그처럼 서원하여 성소에 바쳐진 어린 아니는 제사장이 직접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희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에 의해 양육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 영영히 있게 하리이다'
사무엘은 레위인이므로 당연히 성소에서 봉사를 할 수 있었다<1절>.  ★
그렇지만 일반적 원리대로 한다면, 그의 봉사 가능 기간은 30세에서 50세까지인 것이다<민 4:30>. 그러나 어머니 한나의 서원에 따라 사무엘은 '평생'(11절) 하나님 앞에서 봉사할 수 있게 되었다. 11절 주석 참조.

23 그의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견에 좋은 대로하여 그를 젖 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의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이에 그 여자가 그의 아들을 양육하며 그가 젖 떼기까지 기다리다가

'젖 떼기까지'
일반적으로 히브리 어머니들이 자식의 젖을 떼는 시기는 아이가 3살되는 때이다.

'여호와께서...이루시기를 원하노라'
17절에서 엘리 제사장이 한나에게 한 말처럼, 엘가나의 이 말 또한 한나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남편 엘가나의 간절한 마음을 나타낼 뿐이다. 따라서 혹자(Rabbins)의 생각처럼 엘가나의 이 말을, 그가 사무엘의 출생과 봉사에 관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직접적인 계시를 받고 한나에게 예언한 말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이다.

24 젖을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올라갈새 수소 세 마리와 밀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실로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는데 아이가 어리더라
25 그들이 수소를 잡고 아이를 데리고 엘리에게 가서

'수소 셋'
세 마리의 수소 중 한 마리는 아이를 주께 바쳐 평생 성전에서 봉사케 하는 의식과 관계된 특별 번제용이며, 또 하나는 엘가나의 가족이 매년 드리던 매년제의 제물이다. 그리고 나머지 한 마리는 서원을 이행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키 위한 감사의 제물임이 분명하다.

'가루 한 에바'
'에바'(Ephah)는 구약 시대에 고체의 부피를 측정하는 단위로서, 에바는 약 23리터 가량이다. 그런데 한마리의 수소를 번제로 바필 경우 밀가루 한 에바의 십분의 삼(3/10)이 필요하다는 민수기 15:8-10의 규정에 비추어 볼때, 여기 '가루한 에바'는 수소 세 마리를 제물로 바칠 때 소용돼는 밀가루의 분량임이 분명하다.

26 한나가 이르되 내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내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이같은 표현은 사무엘서와 열왕기서에서 주로 발견되는 독특한 맹세의 방식이다(14:39, 삼하 14:19, 왕상 1:29, 왕하 2:2). 그런데 이러한 식의 맹세는 자신이 지금 언급하는 말의 진실성을 강력히 호소하고, 또한 그 말이 상대에게 그대로 받아들여지기를 간절히 소원할때 사용되었다.

'서서...기도하던 여자라'
선 자세로 기도를 드리는 것은 그 당시의 보편적 습관이었다(창 18:22, 19:27). 그러나 헌신을 깊이 다짐할 때나 진실한 기도를 드릴 경우 종종 무릎을 꿇거나 몸을 땅에 엎드려 기도를 하기도 하였다(왕상 8:54, 대하 6:13 , 스 9:5). 그런데 여기서 한나의 이 말은 반드시 그녀가 선 자세로 기도를 드렸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제사장이 보던 앞에서 열심히 기도를 드렸다는 사실, 그 자체를 언급하는 말일 뿐이다.

27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

'여호와께서...허락하신지라'
여기서 한나는 사무엘의 출생이 전적으로 자신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요, 또한 은총의 선물임을 고백하고 있다. 사실 오랜 기간동안 무자(無子)로 인해 당한 온갖 고통과 수모를 생각할때, 어렵게 얻은 자식을 여호와의 전에 바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나는 그 아들이 '하나님의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기에, 자신의 서원을 변치 않고 그 아들을 여호와께 도로 바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한나의 신앙을 귀하게 보신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그 정성과 신앙을 기억하시고, 그녀에게 사무엘 외에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허락해 주셨다(2:21).

28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가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한나의 이 말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복한 자만이 할 수 있는 결단이다. 여기서 한나가 하나님께 사무엘을 드리겠다고 한 것은 일시적인 위탁이 아닌 영원히 양도하겠다는 뜻이다. 실로 그녀는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왔다는 의식을 갖고 있옹고(욥 1:21), 아울러 하나님께 대한 서원의 존엄성을 깨닫고 있었으므로(시 15:4) 모성애를 초월한 헌신적 결단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드리나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울'은 직역하면 '요구되다','구하여지다'란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요구를 듣고 그 아이를 두셨으므로, 자신도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여 그 아이를 바친다'는 뜻이다.

'그 아이는...경배하니라'
문자적으로는 '그가 경배했다'(이쉬타후)란 뜻이고, '그 아이'란 말은 없다. 그런데 여기서 '그'(he)라는 3인칭 단수 대명사를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한글 개역 성경처럼 '그'를 '사무엘'로 볼 경우, 당시 3살짜리 사무엘이 경배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인 듯하다. 그래서 어떤 사본 및 역본들(별겟역, 수리아역, 아랍역)은 이 말을 복수 형태의 '그들'(이쉬타하우)로 번역하여, 곧 '엘가나와 그의 가족이 경배했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이처럼 히브리 사본을 고치는 것 역시 무리이다. 그러므로 가장 타당한 해석은 '그'를 '엘가나'로 보는 것이다. 즉 한나가 제사장에게 아들을 바쳤을때 남편 엘가나는 아직 성소에서 여호와께 경배하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기 때문에, '엘가나는 경배하니라'라고 번역함이 타당할 듯하다. 더욱이 다음 장에서 곧이어 한나의 찬양(2:1-10)이 언급되는 것은 아직 엘가나와 한나가 모두 여호와의 성소를 떠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