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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1:1~18 여호와 앞에 심정을 토한 것

LNCK 2023. 2. 15. 06:45

https://blog.naver.com/karamos/80087106876

◈여호와 앞에 심정을 토한 것     삼상1:1~18        사무엘상 설교모음  
                                       
'모든 사건 뒤에는 여자가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 그런 의미에서 소위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남자이고 
그 남자를 움직이는 것은 여자다.'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역사의 배후에서 은근하게 발휘되는 여자의 힘은 
본문 사무엘상 1장에서도 나타납니다.

출애굽기는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에 대한 이야기가 먼저 나오고
사사기에는 라합의 이야기가 먼저 나오고, 
본서 사무엘상에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 이야기가 나옴으로써 
구속사에 어머니가 차지하는 비중이 중대함을 가르쳐 줍니다.

사무엘이 중요한 것은, 아직 왕정이 시작되기 전인 당시에 그는 
왕(사사), 제사장, 선지자의 역할을 자기 한 몸으로 다 감당하고 있었죠.

그는 레위인이었습니다.      주1)
그러면서 ‘사무엘 선지자’로 통합니다. 삼상19:20, 대하35:18
동시에 마지막 ‘사사(통치자)’의 역할까지 감당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죠.

더욱이 사무엘이 중요한 인물인 이유는, 
구약에 여러 선지자가 있어서 예언활동을 했지만, 
사무엘처럼 “시대의 흐름을 바꾼” 선지자는... 모세와 사무엘 뿐입니다.
그들이 예언을 했지만, 시대의 흐름을 바꾸지는 못했지요.

그러나 그는 미스바의 회개운동 등을 통해서, 사사시대의 암울한 시대를
“바꾸어” 하나님을 향하는 (왕정시대, 사무엘상의) 시대가 되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처럼 무게 있는 역사서인 사무엘서의 제일 첫 장이 
매우 평범한 한 여인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여인이란 바로 저 유명한 기도의 성도 한나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실로 중대한 전환점이고 또한 어려운 고비이기도 했던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 이름 없던 한 여인의 기도를 그 시발점으로 삼아 
그 실마리를 풀어나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한나의 기도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1. 기도는 사람이 모르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오묘하게 성취해 갑니다.  1~3절

자녀가 없었던 한나는 그야말로 서럽고 한 많은 여인이 될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그녀로 하여금 "실로"에 있는 성소에 갈 때마다 
자기의 처지를 하나님 앞에서 하소연하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게 되었던 이유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기도는 단순히 어떤 한 많은 여인의 개인적인 소원이 성취되는 
정도의 수준에서 머무르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나는 당시 역사적인 큰 배경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저 자기 개인의 슬픈 현실을 두고 간구하며 서원한 것뿐이었었지만, 
그 기도는 한 여인의 소원 성취에서 끝나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그 기도의 결과 태어날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그 시대와 역사를 위하여 
가장 크게 사용하실 인물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사사 시대를 마감하는 마지막 사사가 되었으며, 
타락한 엘리 가문을 청산하고 참된 제사장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왕정 시대를 연 첫 왕 사울을 세웠을 뿐 아니라, 
다윗까지 왕으로 기름부터 세운, 실로 역사적인 큰 인물이 되었습니다.

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셨다"고 했는데, 
이 말은 한나가 임신하지 못한 것도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의도적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한나는 기도하게 되었고, 그 기도 중에 자기 아들을 위하여 
나실인의 서원을 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그 아들은 어릴 때부터 
하나님께 완전히 바쳐짐으로 말미암아 
결국 그처럼 크게 쓰인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나는 자기 아들이 그처럼 이스라엘 전체를 살리는 큰 일에 쓰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기도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그처럼 크게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성도의 기도는 이처럼 엄청난 잠재력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를 두고 기도해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가지고 열을 이루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교황의 대사로부터 최후통첩을 받았던 그날 밤의 기도는 
로마천주교의 1000년의 영적 암흑기를 끝장내어 버리고 
종교개혁이라는 어마어마한 새 역사를 시작하게 만들었습니다.

'스코틀랜드를 내게 주소서'라는 요한 낙스의 기도는 참된 개혁주의 장로교 
신앙이 당시의 스코틀랜드뿐 아니라 오늘의 미국과 한국에까지 이르도록 하는 
위대한 일에 사용되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역사 뒤에는 한 성도의 기도가 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별로 서원하는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그 자녀를 들어서 
지금은 우상종교에 매여 있는 한 민족 전체를 회개시키고 
구원해 내는 엄청난 일에 사용하실 것입니다.

실로 우리가 한 가지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폭발적인 열 가지로 응답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개인의 문제를 두고 기도할 때에도 우리가 미처 상상도 하지 못할 
큰 일에 그 기도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우리가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기도할 때에는 어떠하겠습니까?

실로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성도의 기도를 통하여 세계를 움직이고 계심을 
기억하면서, 그 하나님께서 오늘 이 시간 내게 기도할 일 한 가지, 
기도할 이유 한 가지를 주실 때 그것을 결코 빼먹지 않고 
곧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간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기도는 사람으로부터 위로 받을 길이 없을 때에도 
참된 평안과 기쁨을 줍니다.  4~8절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중에도 한나와 브닌나의 불화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대적"이란 '경쟁상대'란 뜻이며, "격동시키다"란 말은 '괴롭히다'란 뜻입니다.
자식 못 낳은 여인이 자식 낳은 시앗에게 당하는 고통을 
그대로 드러내는 말들입니다.

한나가 그런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엘가나는 잘 알고 있었던 까닭에 
엘가나는 그녀에게 특별히 세심한 배려를 베풀어주었습니다.

여기 "제물의 분깃"이란 것은 화목제를 드린 후에 
제사 드린 사람들이 나누어 먹는 음식을 말합니다.

그럴 때에 엘가나는 한나에게 특별히 더 많이 주었는데, 
아마 더 맛있는 것을 골라서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한나가 "울고 먹지 아니할" 때 엘가나는 
"당신한테 아들 열 명 있는 것보다도 나를 남편으로 만난 것이 더 행복한 일 
아니요?"라고 위로할 정도였으니, 
그는 한나에게 각별한 애처가였음에 틀림없습니다.

이처럼 남편은 자기에게 더욱 애정을 쏟고 위로해 주었지만, 
한나에게는 그것이 사태 해결에 아무 실제적인 도움은 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나는 그런 문제를 어디서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 고통을 브닌나와 한바탕 싸워서 해결하려 하지 않았으며 
그 억울함을 남편 엘가나에게 원망하거나 바가지를 긁어서 해소하려고도 
하지 않고, 오직 기도로써 하나님께 탄원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지혜로운 대응책이었습니다.

나중에 17절과 18절에 기록하기를 "엘리가 대답하여 가로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가로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고 했습니다.

그처럼 자기를 사랑해고 위해 주던 남편조차 달랠 길 없던 슬픔을 당하고 있었던 
한나가 그날 기도드린 후에는 곧 평안과 기쁨으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선 엘리 제사장이 "평안히 가라"고 축복해 준 것도 
부분적으로는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비록 문제 많은 제사장이기는 했지만 엘리의 축복 자체는 
제사장으로서의 축복이었던 까닭에 효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이유는 엘리 제사장이 말해 준 대로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실 하나님을 그녀가 의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아직 이때까지는 아이를 얻은 것도 아니었고 임신의 징후를 발견한 것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하나님께로부터 무슨 태몽 따위의 계시로 
약속을 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한나는 일단 기도드린 후에는 이제 그 모든 근심 걱정을 
하나님께 훌훌 털어 맡겨 버리고 가벼운 심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자기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은혜" 입혀 주실 것을 
확신하면서 돌아왔으니 그녀에게는 더 이상 "수색이 없고" 
그저 평안과 기쁨만 남게 되었던 것입니다.

괴로운 것을 속에 넣어 두고 혼자 끙끙거리고 있으면 
그것은 그야말로 한이 되고 독이 되고 말겠지만, 
그것을 하나님께 내어 놓을 때에는 더할 수 없이 좋은 기도의 재료가 됩니다.

일단 기도드린 후에 '이제는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시겠지.'하는 
믿음을 얻게 될 때, 그것이야말로 좌절과 절망에 대하여 
기독 신자들이 누리는 최고의 특효약이며 틀림없는 해독제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은 455장 찬송가 2절대로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라고 노래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실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려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벧전 5:7)는 말씀은 틀림없는 약속입니다.


◑3. 기도는 사람으로부터는 오해를 받을지라도 
하나님과는 마음이 통하게 해 줍니다.   9~11절

10절 말씀에 기록된 대로 한나는 그 마음의 괴로움을 
여호와 앞에서 통곡의 기도로 담아내었습니다.

하지만 그 기도는 그저 슬픔 중에 통곡하는 것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서원이 담긴 진실한 기도였습니다.

그것은 만일 자기에게 아들을 주시면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는" 
나실인으로 삼겠다는 서원이었습니다.

엘가나는 원래 레위 족속에 속하였기 때문에 
그의 아들이 성전 섬기는 직무를 얻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한나는 자기 자식을 그저 혈통을 따라서 평범하게 
성전 직원이 되도록 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헌신된 진실하고 충성스러운 
주의 종으로 만들어야 하겠다는 자각을 가지고 그런 서원을 드렸던 것입니다.

한나의 기도가 그처럼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성취하고 
자신의 심령에 놀라운 평안과 기쁨을 얻게 된 것은, 
그녀의 기도가 이처럼 질적으로 차원 높은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그저 '다고 다고 하는 거머리 딸들' 식의 기도가 아니라, 
그런 간절한 소원 중에서도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진실한 서원의 기도를 드렸던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일방적으로 올리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왔다 갔다 하는 영적 교통이 있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12~16절에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것 뿐이오니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음을 인함이니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 한나의 기도의 질이 어떠했는지를 더욱 잘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녀가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성막의 전 문설주 곁의 의자 (자기 정 위치)
에 앉아 있던 엘리 제사장은 "그녀의 입을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교인이 와서 간절히 기도하면 함께 기도해 주는 것이 
제사장의 당연한 자세일 터인데, 엘리는 기도의 조력자가 되는 대신 
기도의 감시자 노릇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한나가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않는" 기도를 하는 것을 보고 
그녀가 술 취해 있다고 단정을 내렸습니다.

그 당시에는 기도를 큰 소리 내어 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례였기 때문에 
그런 오해를 했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엘리 제사장은 성도의 기도를 도우지 못하는 제사장이었을뿐 아니라, 
성도의 기도하는 심정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지극히 한심한 제사장이었습니다.

비록 그녀가 "속으로 말하면서" 입술만 달싹거리는 기도를 했지만 
오직 하나님만은 분명히 들으실 수 있었습니다.

그 기도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이라고 할 정도로 
똑똑하고도 분명한, 하나님과의 영적 의사소통이었습니다.

그녀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마음을 다 쏟아내어 놓고' 
아무 숨길 것도, 남길 것도 없는 깨끗한 기도였던 것입니다.

성도는 무슨 유창한 말의 기도가 아니라 이처럼 
'하나님과 마음이 통하는' 기도를 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묵상으로 하든지, 소리 내어 하든지, 함께 통성으로 하든지, 
그 어떤 형식으로 드리든지 간에, 오직 자신의 심령을 진실하고도 뜨겁게 
내어놓음으로써 늘 '하나님과 통하는' 기도를 드리고 응답받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한 평범한 여인, 아니 엄청난 한을 품고 살아가던 
한 여인의 기도였지만, 그 기도는 모든 신자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그 기도는 개인 소원 성취에서 끝나지 않고,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을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이끌어간 기도였습니다.

그 기도는 그녀를 가장 사랑하는 남편까지도 위로할 수 없던 고통 중에서도, 
오히려 완벽한 평안과 큰 기쁨이 주어진 큰 축복의 기도였습니다.

그 기도는 소위 대제사장이라는 사람까지도 오해했던 것이지만, 
하나님과는 명확하게 의사소통이 된 진정한 영감의 기도였습니다.

바둑 두는 사람들은 하수와 두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상수와 두게 되면 자기 실력이 늘 수 있는 기회가 되니까 좋지요.

매사가 그렇지 않습니까?
무엇이든지 간에 자기보다 수준 높은 사람과 자주 만나고 대화하고 
교제하고 배우고 해야 자기 수준이 점점 더 높아질 수 있는 것이지, 
하수나 동수하고만 상대하면 항상 제자리걸음 인생이 될 뿐인 것입니다.

신자가 기도하지 아니하면 어디에 머물러 있게 되겠습니까?
그 생각하는 것이 매사에 이 세상 것들에 머물고 그 말하는 것이 
늘 인간 수준에만 맴돌 뿐입니다.

오직 기도하는 신자만이 하나님 뜻대로 생각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말하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대로 행동하는 가운데, 그 영적 수준이 점점 더 
성화되고 그 삶의 질이 날로 향상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욕심 충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찾고 
조국과 세계를 살리는 일에 쓰이는 기도를 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여호와 앞에 심정을 통하는 기도'를 통하여 
오늘도 자신이 서 있는 모든 자리에서 하나님의 보좌와 영적 사닥다리를 잇고, 
그 하나님의 크고 깊으신 뜻과 섭리의 응답을 개인의 삶과 하나님의 나라에서 
성취해 나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주1)

'엘가나'는 본문의 족보와 역대기의 복보(대상6:1, 27, 28)를 종합해 볼 때,
레위 지파의 후예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본문에서 그를 '에브라임 사람' 이라 칭한 까닭은
그가 에브라임 지파의 후손이어서가 아니라,
다만 그가 그 지역에 거주하여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