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3: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저는 사실 이 말씀을, 처음에 신앙생활 할 때는 그냥 흘려 넘겼습니다. '발 닦아주셨구나, 그러니까 나도 친구 발 닦아줘야지' 이러면서 '섬김이라는게 뭐 그런 거지, 뭐 궂은 일을 하는 거야'
근데 날이 갈수록 이 말씀이 좀 이상해요. 왜냐면 12절을 보면,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발을 닦아주신 다음에 이렇게 물어봐요.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알겠느냐?' :12 *새번역
우리는 일차적으로 '발 닦아주신 일'로 생각을 하겠지만, 그 얘기가 아니에요. '내가 선생인데 닦아줬잖니? 내가 본을 보여준 건데..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으며, 학생이 선생보다 높지 않으며..' :16 그러면서 '너희가 이것을 알고 그대로 행하면 복이 있다' 하셨어요. :17
즉 예수님이 발을 닦아주신 것은, 단순히 흙묻은 발 씻기신 게 아니라 매우 깊은 뜻이 담겨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섬기는 것'은 뭐냐면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자신을 낮춰서 배려하는 것을 '섬김'이라고 하셨죠.
그러니까 낮은 자가 높은 자를 섬기는 것은 너무 당연한 거야, 섬김이 아니에요. 누구든지 처음에는 잘 섬기다가도.. 힘이 생기면 교만해지고, 섬기고 싶지 않고, 섬김을 받고 싶고.. 이것은 세상에서도 그렇고, 교회에서도 그렇죠.
그런데 높은 자가 세상을 섬기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 이거예요. 세상이 그를 다르게 보기 시작하죠.
높은 사람이 잘 섬기지 않죠. 두려움 때문에 그래요. '내가 낮은 사람을 섬기면, 나를 우습게 보지 않을까?' 이런 두려움...
근데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힘이 있고 높은 자가 섬기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다 그렇게 사는 거죠.
◑섬김의 원리 : 내가 망가져야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섬기기 위해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오셨어요. 섬기기 위해서 자신을 망가뜨리는 일을 주저하지 않으셨어요. 섬기기 위해서 자신은 망가져도 좋다.. 지금 그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내가 섬겨서 한 영혼을 얻는다면, 나는 망가져도 좋아!' 이게 교회의 리더요, 교회의 리더십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먼저 털어야' 됩니다.
요즘 턴다고 그러잖아요. 망가진다는 뜻이죠.
셀 리더를 하려면, 나를 먼저 망가뜨리고 남을 배려 해야 다른 영혼들이 다 마음 놓고, 다 본인들을 털어서 같이 회개하고 하나 되고 영혼을 얻고 공동체를 제대로 할 수가 있다... 그런 얘기입니다.
그걸 누가 먼저 예수께서 본을 보여주셨다는 거죠. 하늘 보좌를 버리고 오셨다.. 그건 머리로 외우라고 있는 얘기가 아니죠. 예수님이 먼저 자신을 망가뜨렸잖아요. 인간의 육신을 입었다는 것 자체가 망가진 거에요.
그러니까 성경적 리더십이 되려면, 즉 섬기는 자가 되려면 '교회에서 나 자신을 먼저 털자! 나는 망가져도 좋아! 만약 내가 너를 얻을 수 있으면, 나는 너의 마음을, 너의 진심을 얻을 수 있다면 나는 망가져도 좋아...'
이게 리더십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그거에요. 그러니까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신 거에요.
'주께서 떠날 때가 된 것을 아시고, 망가지시되 끝까지 망가지시리라' 이런 뜻입니다. *요13:1참조
▲제가 목회를 하면 할수록 '카리스마' 이거는 아닌 것 같아요. 솔직히! 예수님은 한 번도 그런 말씀 하신 적도 없고,
주님은 변화산에 올라가면 그냥 카리스마가 그냥 나왔고 그런 거지.. 말씀 자체가 진실이고, 은혜고, 그래서 능력이 나온 거지...
인간적인 카리스마의 테크닉을 한 번도 발휘하신 적, 그런 거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강력한 카리스마로) '너 죄인이지? 회개 해!' 이런 말씀도 하신 적도 없어요.
항상 사랑과 겸손과 섬김 이셨어요. 근데 사람들이 은혜를 받으니까 다 알아서 회개 한단 말이에요.
교회가 그랬으면 정말 좋겠어요. 그럼 진짜 이상적인 교회가 되겠죠. 근데 '이제 내 나이 60 인데, 앞으로 얼마나 하겠냐? 앞으로 길어봤자 십년이다' 그렇다면 내가 정말 진짜가 됐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제가 진짜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주여!' 그러니까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네 자신이 망가져라, 네 자신부터 털어라!' *둘은 같은 말
우리 각자는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를 다 갖고 있는데 '나는 망가지지만 주님이 나를 사랑해 주셔서,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이게 진짜 우리가 받아야 되는 은혜라고 믿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이론을 가르치신 게 아니에요. 스스로 망가지시는 본을 보이신 거죠.
'저래도 되나?' 싶은데, 사람들의 마음에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열려지고, 보여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런 것을 보여주시려고 우리 주님은 오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털어서, 자신의 실수, 자신의 연약함을 털고 자신의 재물도 털고, 자신의 시간도 털고... 그래서 한 영혼을 얻어오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주님은 그렇게 하셨다는 거죠.
이것이 사랑이고, 진리이고, 은혜입니다. 이론이 아니라요.
◑예수님은 자존감이 높으셨습니다.
근데 예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는 이유는 뭐냐? 그게 그걸 알아야 우리도 따라서 행하게 되죠.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의 자존감이 무지 높았기 때문이에요. 즉,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다고 해서, 예수님의 자존감에 데미지가 전혀 없었죠. 그러니까 그 일이 가능했던거죠.
큰 자, 높은 자가
작은 자, 낮은 자를 섬겨야 하는데, 여기서 크다, 높다고 하는 것은 자존감이 높은 거에요. 신앙으로 인해 자기 자존감이 높은 거에요.
자존감 self-esteem 이 낮으면... 지위가 높고 돈이 많고 어쩌고 해봐야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자존감이 낮을 수가 있어요. 그러면 이렇게 섬기지 못해요.
돈이 있어도 못해요, 백이 있어도 못해요, 지위가 있어도 못 섬겨요! 왜? 자존감이 낮으니까!
겁이 많고, 두려움이 많고, 자유가 없고, 당당하지 못하고, 보람이 뭔지 모르고, 인생의 의미가 뭔지 모르니까... 못 섬기는거에요.
근데 사실 우리가 열심히 살아도 우리의 돈과 명예와 지위와 이런게 높아진다는 보장은 없잖아요.
그런데 주님을 만나면, 주님을 깊이 만나면.. 자존감이 올라간다는 거죠.
그래서 기도실이 열려 있으니, 가서 기도하십시오.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그거밖에 없어요.
왜요? 기도해서 성령을 받아야 되니까.. 성령님 오셔야 되니까.. 그러면 자존감이 올라가요.
주님께 받은 사랑이 크니까 주변의 형제를 사랑하게 돼요. 형제를 위해서 털게 돼요.
그리고 주께서 주신 사랑과 책임감, 이런 게 막 생기게 되지요. 결국 맨 마지막은 뭐냐면 예수님한테 홀딱 반하면 그분을 닮고 싶어져요. 내가 연약하지만, 한계가 있지만, 담고 싶어져요. 그래서 섬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빌2:5~11절까지 이 말씀을 하시죠.
그는 하나님과 똑같은 모습을 가지신 하나님의 형상이셨으나 자존감이 엄청 높으시니까, 자기를 비워서 십자가를 지실 수 있었습니다. 죽기까지 순종하셔서.. 영혼을 얻으셨던 것입니다. 자신을 망가뜨려서 영혼을 얻으셨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 위의 모든 이름 위에 가장 높은 이름을 주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고 영광을 주셨다.. 이런 말씀입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남을 섬깁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이제 중요한 방향입니다. '그렇구나, 우리도 그렇게 돼야 마땅하고,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처럼 섬김의 삶을 살려면 자존감이 높아야 돼!' 어떻게 하면 자존감을 높이지?'
자존감을 높이는 길은, 기도밖에 없어요. 진짜 기도밖에 없는 것 같아요. 깊은 기도가운데 하나님을 만나면..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을 여셨는데 우리 인간은 다른 영혼들의 마음을 열기가 어렵죠. 어렵습니다.
우리 안에 그분의 비밀이 작동하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얻어오기가 어렵습니다.
선교지에서 더 그럴 것 같아요. 선교사님들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해야 되는 이유는, 거기서 선교사님들이 진심을 보여주고, 진짜 스스로 망가지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렇게 자발적으로 하는 거죠.
근데 우리 교회는 정말 그렇게 하는 것 같아요.
그런 공동체에서 태어나서, 그런 걸 배우고, 가서 배운 대로 그대로 하니까... 그게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내가 자존감이 높아야 남을 섬길 수 있고, 그래서 내가 망가져서 남을 섬길 때.. 그 영혼을 얻는다는 거죠. 우리는 멋도 모르고 그렇게 살았는데, 이제부터는 알고 예수님을 닮자는 거죠.
제자들도 본문의 시점에, 아직 성령을 체험하기 전이었어요. 그러니까 아직 이 원리를 깨닫지는 못하고 있었어요. 나중에야 성령님이 오시니까 다 알게 되죠.
제일 중요한 것은, 먼저 내가 사랑을 받아야 돼요. 사랑받는 게 중요해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중요하고 공동체에서 섬겨주시는 집사님이나 다른 분으로부터 진심어린 사랑과 섬김을 받는 게 참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열리고... 인격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 사람은 가능성이 있어요. 그 섬김가 사랑에 정직하게 반응하는 사람은 (제자가 될) 가능성이 있어요.
그런데 가룟유다도 있었어요. 그 사랑과 섬김에 대해 정직하게 반응하지 못하는 거죠. 정직하게 수용하지 못하는 거죠.
그런 것에 관심이 없고, 자기 생각과 자기 꾀에 빠져서 결국 미혹에 빠지는 거죠. '로마를 제압하는 그런 정치적인 메시아' 이런 생각이 있었어요. 근데 요즘 예수님이 뭐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이상한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왜 이러지? 내가 사람을 잘못 봤나?'
사랑하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혹시 시험이 들 때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제까지 받은 사랑이 있는 사람은, 쉽게 곁길로 빠지지 않습니다. 왜냐면 이제까지 받은 사랑이 있는 거예요. 감정의 교감이 있었어요. 그러니 리더를, 교회 지도자를 믿는 거죠. 시험이 잠깐 들 때도 있지만.. 믿음과 신뢰를 쉽게 저버리지 못 하죠.
'난 태어나서 이렇게 사랑받아 본 적이 없는데..' 하는게 있는거죠.
여러분 하나님의 공동체는 '성령받아야 됩니다. 회개해야 됩니다. 어쩌고 어쩌고' 하는데..
처음은, 초신자들은 '사랑을 받느냐?' ..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여기서 사랑을 받느냐?' 이것이 신앙을 갖게 만드는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요인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그 영혼을 얻기를 정녕 원한다면 그를 진심으로 사랑해 줘야죠!
정말 내 진심을 보여주고, 예수님의 사랑을 내 몸으로 보여줘야 되는데, 그렇게 하려면 필수적으로 내가 낮아지고, 발을 씻어줄 정도로 내가 망가지고... 그런 노력을 해야죠. 주님이 먼저 그렇게 하셨으니까요.
'진정한 사랑을 난 세상에서 한 번도 못 봤는데 여기서는 봤어요!' 이게 중요하죠.
그게 없기 때문에 새신자의 마음이 열리지 않는 건데, 그 사랑을 보여주고, 또한 받아들이면.. 열 두 제자의 길로 가는 거죠.
◑예수님을 기도로 만나면, 자존감이 높아지죠
디모데후서 1:7절에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 이게 하나님이 주신 자존감이죠.
디모데후서 2: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은혜 받은 사람이.. 사랑 받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직접 심령의 한복판에 공명을 울려준 사람, 그 사람이 자존감이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지 못하면 '두려움에 영이 옵니다.' 딤후1:7
은혜를 받으면 강하여지고.. 강함의 본체, 네이처가 뭐냐? 그것은 성령이 주시는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이다.. 그런 거죠.
근데 그게(능력, 사랑, 절제의 은혜가) 안 오면 어떻게 된다고요? 두려움이 온다는 거죠. 사람이 두려워하며 살게 돼요.
당신은 무엇이 가장 두렵습니까?
저는 어떤 게 두려움이 있냐면 혹시 세상의 악이 선을 이기면 어떻하지? 저도 그런 두려움이 있어요.
이 나라 이 사회가 마지막 때에 주님 오시는 길에 쓰임을 받아야 되는데 거짓이 난무하고, 그렇게 사회가 흘러가고, 하나님의 교회들이 거기서 눌려가지고 타협하고...
그 전에 이미 벌써 타협해 가지고서 세상이 막 들어와서 막 무너지고... 그러면 악이 선을 잡아 먹고.. 쓰임 받지 못하는 나라 되는 거 아니냐? 저는 두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얻어야 되는 거죠. 기도 해야 돼요. 저도 찬양 틀어 놓고 기도를 한 20분 하면, 두려움이 사라지죠. 하나님이 말씀하시죠.
결국은 기도실에서, 골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듣는 사람이 그 분이 주는 확신을 많이 받는 사람이 자존감이 올라가고.. 은혜로 강해지고.. 두려움이 떠나가고.. '주여, 나를 써 주시옵소서!' 이렇게 된다는 거죠.
이런 사람이 결국은 마6:31~33절을 이루며 사는 거죠.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주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저(설교자)는 영혼들을 향해서 망가져도 좋습니다. 그런 면에 두려움이 없어요. 예수님 은혜를 받고 자존감이 높아진 사람은, 두려움이 없어요.
그렇게 기도하고 그런 사람이 땡땡이 치고 맨날 농땡이 치고 주님 일도 안 하고 게을러지는 사람은 못 봤어요.
다 살게 되어있어요. 우리 필요는 채워지게 되어 있어요. 그가 가진 보물은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자존감이 높아야 돼요. 자존감이 높아야 우리는 당당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자존감이 높으려면, 하나님의 주시는 정체성과 자존감이 제일 중요한데 이게 높아지면 우리는 다른 욕심을 구하지 않아요.
물질관이 달라지고, 세계관이 달라집니다. 세상적 물질관이 사라지고, 영생의 세계관을 갖게 됩니다.
그 다음부터는, 경제적인 삶의 영역에 있어서도 필요를 구하지, 욕심을 구하지 않지요. 그렇게 되더라고요. 명품을 구하지 않아요.
▲저희 부부가 프랑스 여행을 갔어요. 개선문을 보고 '멋있다' 그러고 지나가는데,
거기 일행 중에 한 분이, 루이뷔통 매장이 근처에 있대요. 파리에 와서, 여기 안 들러보는 아줌마는 없다는 거예요.
갔더니 매방 바깥에 사람들이 줄 서 있어요. 루이뷔통 말고도, 여러 명품 가게들이 있더라고요. 주로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들이었어요.
이제 코로나도 끝났는데, 거기는 '사회적 거리'를 두더라고요. 코로나 때문이 아니라, 자기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사회적 거리'였어요.
우리 부부도 순번이 돼서 들어갔어요. 그리고 구경만 하고 나왔어요.
그런데 중국 분인지... 명품을 여러 개 구입하더라고요. 부러워할 거 하나도 없어요.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그런 거 부러워 안 합니다.
남자들은 자동차죠. '이 나이가 되면, 어느 정도는 타야 되고..'
솔직하게 얘기해서, 겉모습을 가꾸려고 하는 사람은 내부가 허해서 그런 거죠. 내실이 허해서 그런 거예요.
자기 속사람이 당당한 사람은, 겉으로 별로 신경 안 씁니다...
옛날에 우리 교수님들도 그랬어요. 1980년도에 우리가 대학 공부할 때는, 교수님들은 양복에 넥타이 딱 메시고... 그런데 강의실에서 배우는 건 별로 없었어요.
그런데 유학 가서 놀란 것이, 거기 교수님들은 대충 입고 나오셔 갖고 뭐 그렇게 가르쳐 주는 분량이 많은지... 1시간이 빡빡해요.
속이 허하신 분들이 겉치장에 신경쓴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죠. 틀림 없어요. 진짜 주님께 사랑받는 크리스천이고, 은혜 받은 사람은.. 외모에 관계 없습니다. 웬만큼 입고 나와도.. 멋있고, 당당하고, 자신감이 있고, 자존감이 있고 '나는 오늘 주님께 쓰임 받을 거야!' 이게 중요하죠.
◑섬김의 열매
고전3:11~15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저는 이 말씀을 굉장히 좋아했고,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인생의 파운데이션(위 구절에서 터) 이 예수님이 아니면 그마저도 불타 버리면 구원 받지 못하는 거예요. 심판을 받는 겁니다.
근데 파운데이션 (예수님의 기초) 위에 벽돌이나 나무를 쌓아서 집을 만든다는 거죠. 그런데 나중에 그거를 테스트 한다는 거예요.
불로 테스트 하신다는 겁니다. 자기는 집을 멋있게 지었다고 생각을 했어요. 근데 불을 지나보니까, 홀랑 다 타고 남은 게 재밖에 없을 수도 있다는 거죠.
마25장의 달란트 비유에서도 보면,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들이 각각 심판을 받지 않습니까. '너는 네 달란트로 무엇을 남겼니?'
(이 교회는 신촌에 있는 대학생, 교수 중심의 교회입니다) '저는 세계적인 논문을 200 편을 썼고요..' 그래봐야 심판대 앞에서 남는 게 하나도 없을 수 있어요.
그럼 뭐가 남는 거냐? 그 속에 내가 사랑했던 학생들의 영혼들, 그 가운데 정말 진실로 우리가 피땀 흘려서, 나를 낮춰서 학생들을 섬기고... 그들을 전도하고 제자 삼는게... 그게 영생에 남는 거죠.
그런데 자기 직업을 너무 사랑해서 그 직업에 열중하고 영혼들을 놓친다면 저는 교수라서 교수직에 너무 열심내다가.. 영혼들을 놓친다면...
진짜를 해야 된다는 거예요. 진짜 남는 것은 불에 타지 않는 것은 영혼이에요. 영혼은 불에 타지 않아요.
근데 알고 보면 유형은 불에 타고, 무형은 불에 타지 않아요. 영혼, 사랑.. 이런 무형들은 눈에 보이지 않고, 불에 타지도 않아요.
눈에 안 보인다고 무시하지 마세요. 이게 타지 않고 남는 겁니다. 주님이 항상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사랑 하였느냐, 진실 하였느냐?' 남는 게 사랑과 진실, 성령의 열매, 영혼의 열매가 남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이 나중에 천국에 갔어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섰습니다. 그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뒤를 돌아보라!'
뒤를 돌아봤더니 내가 사랑하고 섬겼던 수많은 영혼들이 내 뒤에 서 있어요. 그러면 나의 공적은 남는 거지요. 나는 영생에 남는 장사를 한 거에요.
근데 어떤 이는 많은 일을 했다고 하나, 뒤로 돌아보니 아무도 없어요. 그럴 수 있어요.
'나는 대단한 업적을 이루었다!' 이렇게 생각을 할 수 있지요. 정말 진실한 사랑으로 섬김을 해야 되는데
만약 진실한 사랑이 아니었다면 .. 풀이나 지푸라기처럼.. 다 타버리고 말죠.
열심히 일했는데, 열심히 봉사했는데.. 불에 다 탔다는 거죠! 내가 목회 25년을 했는데.. 다 불에 타고 아무 것도 남지 않을 수 있는 거죠. 사랑이 없고, 진실이 없었다면...
◑역청을 발라야!
노아가 방주를 열심히 만들었어요. 근데 주께서 뭐라고 말씀 하시냐면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창6:14
역청을 바르지 않고, 배를 띄우면 물이 새는 거예요.
저희 신촌교회는 노아의 방주 사명을 감당해야 돼요. 이 지역의 영혼들을 살리는, 구원의 방주에 태우는.. 그 사명을 감당해야 돼요.
그런데 아무리 방주를 크고 잘 만들어도, 물이 새면 가라앉는 거예요. 그래서 역청을 발라야 하는데, 역청은 기름이거든요. 그래서 '성령님'으로 상징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어요.
우리 인간의 열정으로 아무리 잘 만들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우린 연약합니다. 실수합니다. 열심이 있어서 주님이 우리를 봐 주시지만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뭐냐면 '체질 개선을 해라' 즉 '역청을 안팎에 발라서 물이 새지 않게 해라 그래야 방주가 될 수 있다'
그러니 우리 사역 전과 후에.. 기도해서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연약하고 부족해서, 곧잘 물이 샙니다. 쉽게 넘어져요.
제가 전 세계를 돌아다녀봐도 지금은 방주를 마련할 때입니다. 근데 물이 새면 안 돼요. 역정을 바를 때입니다.
기도가 체질이 되어야 돼요. 우리가 기도를 하지 않으면 반드시 실수하고, 반드시 오해가 생기고 반드시 물이 새고, 반드시 사단이 마귀가 침입할 가능성이 많아요. 그래서 사역의 전과 후에 늘 기도를 해야 된다는 거죠.
성도들이 아이디어도 좋고, 교회 일도 많이 하고 열심히 봉사도 하고, 찬양도 하고, 말씀도 가르치고...
그런데도 사람은 온전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마치 방주에 물이 새듯이, 세상의 물결이 스며들게 되어 있어요. 방주에 역청을 바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