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가망신’이란 말이 있습니다. 저는 처음에 무식하게도 이 말이 ‘집안이 망하고 남들 앞에 망신당하다.’라는 뜻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가산을 없애고 몸을 망치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엘리의 집’은 그야말로 망한 집안의 대표적입니다. 원래 이스라엘 사회에서 상류 중에도 최상류에 속한 집안이었는데 그만 순식간에 온 가문이 절단 나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지극히 충격적인 일대 뉴스가 되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과연 그런 일이 어떻게 생기는 것입니까? 오늘 우리는 한 집안이 어떻게 망해 가게 되는지를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자식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될 때 그 집안의 망조는 시작됩니다. 2:12~17
삼상2:12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행실이 나빠’란 문자적으로 ‘악한 아들들’이란 뜻입니다. 하지만 여기 엘리의 아들들을 가리켜 악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들의 못된 성격을 가리킨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악함은 근본적으로 ‘여호와를 알지 아니함’에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지식적으로 몰랐다는 뜻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서 교제하는 신앙과 그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화 생활을 전혀 몰랐다는 뜻입니다.
그들 속에 있던 그런 불신앙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는 것을 통하여 밖으로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 중에서 분명히 제사장에게 돌아가는 몫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 온전히 돌려야 할 부분을 먼저 바친 후에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이 엘리의 아들들은 그런 엄연한 규례를 전혀 지키지 아니하고 그냥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을 아무 것이나 ‘자기 것으로 취하는’ 실로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위를 일삼고 있었습니다.
‘세살 갈고리’란 놋으로 만든 도구로서 제물을 다루기 위해 성막에 비치되어 있던 것이었는데, 엘리의 아들들은 그것을 제물 가로채는 일에 도구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기름을 태우기 전’에 제물을 취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화제의 규례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는 레위기 3:16절에 보면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고 명백히 규정하고 있습니다.
레위기7:25절에서는 ‘사람이 여호와께 화제로 드리는 희생의 기름을 먹으면 그 먹는 자는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고 더욱 엄히 경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제멋대로 날고기를 잘라갔던 것입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그런 엘리의 아들들이 바로 제사장들이었다는 점입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 바로 섬기는 법을 제일 먼저 잘 가르치고 본을 보여야 할 직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이들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려고 온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제물을 가로채는 짓을 자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신앙이 없었던 그 엘리의 아들들은 이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우습게 여겼으며, 그들의 제사장이라는 특권을 전적으로 자기 욕심 채우는 데만 남용했죠. 바로 이것이 엘리 집안이 그처럼 망하게 된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자기 자식들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그 집안의 최대의 위험인 줄로 똑똑히 깨달아야 합니다.
어릴 때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어느새 벌써 대학교에 가느라고 부모 밑을 떠나게 된 자녀,
아직 경건생활은 커녕 기도조차 할 줄 모르는 마당에 이미 결혼하고 독립해 버린 자녀를 둔 집안이 있습니까? 그런 자녀들이란 정말 자기 집안을 곧 망하게 할 씨앗인 줄로 알고 부모들이 두려워해야 합니다.
아무리 예수 잘 믿는 가문에 태어났다고 해도 자동적으로 잘 믿는 자식이 된다는 법은 결코 없습니다.
목사, 장로의 아들딸이라 해서 절로 하나님을 틀림없이 잘 아는 사람이 된다는 보장은 결코 없습니다. 그 자녀들에게 적어도 주일예배 출석을 아예 습관으로 익히게 하고, 십일조 생활 정도는 자연스럽게 하도록 어릴 때부터 틀림없이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자녀들이 그들 평생을 통하여 하나님 경외 신앙과 하나님 동행의 삶을 최소한 어느 정도는 기본으로 지켜 나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매일 아침 축복기도 해 준 가장 (펀 글) 어느 날, 한 형제님과 대화를 나누다가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목사님께서 시킨 대로 저는 매일 아침 출근하기 전에 아내와 자녀들에게 축복기도를 해줍니다. 간혹 잊어버릴 때는 문자로 축복을 꼭 보냅니다.
3개월 정도 했는데 우리 가정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우선 내 자신입니다.
아주 짧은 축복기도이지만, 그 기도를 통해서 내가 주님께 축복받고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집안 분위기입니다. 아침마다 전쟁터처럼 어수선했던 분위기가 차분해지고 따뜻해 졌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감동으로.. 제가 울었습니다.”
“아니, 무슨 일인데요?”
그 형제님은 벅찬 마음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그게 말입니다. 며칠 전에 회사에서 언짢은 일이 있어서 혼자 한잔하고 들어왔습니다.
전에는 제가 기분이 안 좋을 때는, 아이들이 인사만 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방에서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화가 더 납니다. 내가 누구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서글퍼지기도 합니다. 녀석들이 미워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날 제가 막 잠이 들려고 했는데, 녀석들이 제 방에 들어오는 겁니다. 아마 제가 자나보다 하고 생각했겠지요. 저는 눈감은 채 모른척했지요.
그런데 첫째는 제 오른손을, 둘째는 제 왼손을 살포시 잡고 축복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뜨거워지는데 꾹 참았어요. 아이들이 나가고 난 뒤 감동으로 펑펑 울었습니다.
‘아! 이것이 가족의 사랑이구나. 그래! 내일 아침에도 기쁘게 하루를 맞이해야지. 주님 감사합니다.’ ”
◑2. 부모가 자식 앞에서 영적 권위를 발휘하지 못할 때 그 집안은 패가망신의 길로 치닫게 됩니다. 2:22~25
엘리는 당시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아들들의 ‘악행’을 ‘모든 백성에게서’ 이미 듣고 있었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이 제물을 가로챈다는 사실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는 그것을 알고도 아무 소리 하지 않고 있다가 자식들이 더욱 못된 짓을 하고 나서야 겨우 나무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이란 말은 구약 전체에서 이 본문과 출38:8절에만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막에서 제사를 비롯한 주요한 일들은 레위인들이 했었지만, 청소, 요리 등의 일들을 맡아했던 여성으로 짐작됩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정말 파렴치하게도 그런 여인들과 음행을 저지르고 있었고, 그 소문이 쫙 퍼지게 되자 그제야 엘리는 자기 아들들을 불러놓고 책망을 했던 것입니다.
본문2:25절에서 엘리가 하는 말은 정말 지당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판결하시려니와’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사람 사이에서의 범죄는 하나님께서 중재자가 되어 주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즉 사람이 감히 하나님을 정면으로 대항하여 범죄하면 과연 누가 중재해 줄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엘리의 말 자체는 이처럼 논리정연한 꾸중이요 간절한 충고였지만, 문제는 그 좋은 말, 그 옳은 말이 이제는 자기 자식들에게 전혀 먹혀들지 않은 데에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아버지로서의 영적권위를 이미 상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로 가르치려고 해도 그 말에 권위가 대동되지 않으면, 그야말로 ‘쇠귀에 경 읽기’밖에 되지 않을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는 말은, :25 이미 하나님의 심판은 결정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내버려 두셨다는 말입니다.
즉 엘리의 경책은 너무 무력했을 뿐 아니라 너무 늦었던 것이며,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시간이 이미 다 지나가버린 후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엘리의 그런 우유부단한 자세는 자기 아들의 죄를 묵과한 정도가 아니라 더 악화시킨 것이나 다름없는 죄였던 것입니다.
나중에 2:2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엘리를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라고 그의 속마음의 정곡을 찔러 책망하십니다.
엘리가 자기 자식들이 성막 안에서 하나님께 속한 ‘제물과 예물을 밟는’ :29 죄를 그냥 넘기고 지난 것은, 바로 그가 실상 자기 아들을 하나님보다 더 중하게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제물과 예물을 밟는’ 이란 말은, :29 두 아들이 제사제도를 짓밟았다는 뜻이죠.
그는 자식을 감싸고돌려 하다가 영적 권위를 아주 잃어버린 부모가 되었으며, 자식에 대한 값싼 사랑 때문에 하나님 경외까지 상실한 어처구니없는 대제사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부모는 자라나는 자녀에게 영적으로 마지막 수문장과 같은 존재입니다. 물론 교회의 주일학교 교사들을 통하여 신앙생활을 배우기는 하지만, 결국 그들의 영적 고삐를 쥐고 있는 사람은 바로 부모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끊어지면 그 자녀의 신앙생활은 끝장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의 신앙적 타락을 바로잡지 못하면, 그 자식의 영혼이란 사단의 공격 앞에 완전 무방비로 노출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자녀의 신앙교육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까? 부모가 자녀 앞에서 영적인 권위를 절대로 잃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생활까지도 자기 자식들이 알아서 하도록 가만히 내버려둔다면, 그런 경우 그 자녀들은 백이면 백 다 탈선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을 떠나고자 하는 악한 본성을 가진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이며, 내 자식이라 해서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에게 신앙적 문제에 대하여 권위를 가지고 꾸중하고 가르치고 명령할 수 없는 부모는 이미 자녀를 잃어버린 부모입니다.
내가 신앙문제를 가지고 내 자녀에게 어떤 충고나 경책을 오늘 한다면 과연 내 자식은 어떻게 반응할는지 지금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자식 앞에서 영적 권위를 발휘하지 못하는 부모는 자식에게 제일 못할 일을 저지른 못난 부모가 되는 것이며, 자기 집안 망하는 것을 남의 집 불구경 하듯이 방관한 그 죄의 결과는 결국 자기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평생을 믿어도 <개인주의적 신앙>에서 못 벗어난다면.. (펀 글) 부모에게 영적 권위가 생길 리가 없습니다.
어떤 분이 페이스북에 써놓은 글을 읽었습니다. 지금 자신의 가정이 잘 살고 있는 것은, 독실한 장모님의 기도 때문이라는 일종의 감사의 글이었습니다. 90세를 넘기신 장모님께서 날마다 자기 가정을 포함해서, 모든 자녀들의 가정을 위해 매일 몇 시간씩 기도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참으로 훌륭하신 장모님을 두신, 복된 사위님이 되시겠습니다. 그런데 만약, 평생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살아오신 장모님/권사님이 90세가 넘어 그토록 오래 드리는 기도가 자기 자녀들만 위한 것이라면.. 충격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세계평화와, 세계복음화와, 남북의 통일과, 주님의 재림을 위해서도 기도하시겠지요. 내막을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러나 만약 이럴 것이라고 가정할 때, 일평생을 주를 위해 헌신하신 권사님의 기도가 아직도 자기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그것은 정말 큰 충격이죠. 신앙이 성숙되면, 그의 신앙연조(연령), 또는 직분에 상관없이, 그의 기도와 관심이, 자꾸 넓어집니다. 그가 아무리 인지도가 높은 목회자라도, 90%이상 관심이, 자기 교회라는 바운더리 안에 수 십 년 동안 계속 머물고 있다면, 차라리 교세가 얼마 안 되어도, 사회의 약자들과, 북한의 동포들과, 세계 복음전파에 대해 관심을 갖고서 기도하고, 성도들이 그 길로 가도록 인도해 가는 목자가 하나님 보시기엔, 더 성숙한 믿음의 사람일 것입니다.
◑3. 하나님께로부터 멸시당하는 집안이 될 때 ‘패가망신은 기정사실이 됩니다. 2:27~29
27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와서 그에게 이르되...’
어떤 ‘하나님의 사람’ 즉 선지자가 엘리 제사장을 찾아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었습니다. 무명의 선지자이죠.
이미 엘리 자신은 대제사장이면서도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듣지 못하는 존재로 전락해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원래 엘리가 속한 가문, 즉 아론의 족속이란 정말 대단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 조상의 집’ 즉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바로의 집에 속하였을 때’ 즉 그들이 종살이하고 있을 때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출애굽 시켜 주셨습니다.
그런 큰 기적적인 구원의 은총을 입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아론 집안을 ‘택하여 제사장을 삼아’ 주셨습니다.
그 이후로 이들은 성막을 중심으로 제사를 인도하면서 백성들이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의 일부를 받아먹으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뽑힌 백성 중에서 또 뽑힌,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영적 특권층과도 같은 집안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존중히 여겨’ 받들어야 할 엘리 집안이 이제 와서는 부자가 같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이 되어 있었습니다.
본문 2:30~34절에 엘리 집안에 대해 저주의 말씀이 선포되지요.
2:30~32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31 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지라 32 이스라엘에게 모든 복을 내리는 중에 너는 내 처소의 환난을 볼 것이요 네 집에 영원토록 노인이 없을 것이며’
엘리 집안은 제사장 집안이었으면서도 이미 하나님을 ‘존중’할 줄 모르고 오히려 ‘멸시’하는 집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을 대하는 자세 그대로 똑같이 그들에게 대해 주시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원래 제사장 가문으로 ‘영영히 행하도록’ 뽑혔던 그 집안이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고, 즉 제사장 가문으로서의 특권과 축복을 더 이상 누리지 못하게 되는 징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모든 복을 내리는 중에’란 말씀은 :32 앞으로 사무엘, 다윗, 솔로몬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축복을 베푸실 시대가 곧 다가오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엘리 집안은 그런 축복의 시대를 함께 누리지 못하고 그 대신 ‘내 처소의 환난을 볼 것’ 즉 법궤를 블레셋 군에게 빼앗기고 성막이 있던 실로가 파괴될 것을 목격하게 될 뿐이었습니다.
그의 집안은 ‘팔이 끊기는’ 즉 무력한 집안이 되며, *팔은 힘을 상징, :31 또한 ‘노인이 없을 것이며…집에 생산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는’, :31 즉 결국에는 완전히 대가 끊기는 집안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33
그 사이에 하나님께서 ‘끊어버리지 아니할’ 엘리 계통의 제사장들이 잠시 있기는 하겠지만, 그들은 엘리의 ‘눈을 쇠잔케 하고 마음을 슬프게 할’ 존재가 될 뿐이었습니다.
실제로 엘리 가문의 제사장직은 홉니와 비느하스가 전쟁터에서 죽게 될 때부터 약해지기 시작하다가, 나중에 솔로몬 시대에 그 집안의 마지막 제사장이었던 아비아달이 제사장직에서 물러나게 됨으로써 완전히 끝나게 됩니다.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34 자식 둘이 한 날에 죽게 되는 것을 엘리가 보게 되면 바로 그것이야말로 지금 자기 집안 전체에 내려진 하나님의 저주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표징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엘리는 아버지로서 자식을 잘못 다스린 죄뿐 아니라, 대제사장으로서 다른 제사장들의 큰 죄를 묵과한 죄를 함께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버지로서 또한 대제사장으로서 마땅히 행했어야 할 징계를 하지 못했을 때, 그 결과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진짜 무서운 징계를 자신과 자기 자신이 함께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본문 2:35~36절에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36 그리고 네 집에 남은 사람이 각기 와서 은 한 조각과 떡 한 덩이를 위하여 그에게 엎드려 이르되 청하노니 내게 제사장의 직분 하나를 맡겨 내게 떡 조각을 먹게 하소서 하리라 하셨다 하니라’
하나님께서 엘리 집안을 대신해서 세울 ‘충실한 제사장’이란 아마도 나중에 아비아달 대신 대제사장이 되었던 사독을 가리키던지 아니면, 대제사장은 아니었지만 그 직무를 수행했던 사무엘을 가리킵니다.
이 제사장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대로 순종할 것이며, ‘견고한 집’ 즉 엘리 집안 대신 새로운 제사장의 가문을 이루고 ‘기름부음을 받은 자’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세우실 왕들 앞에서 ‘영구히’ 제사장으로 행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될 때 ‘네 집에 남은 사람’ 즉 엘리 집안의 남은 자손들은 ‘은 한 조각과 떡 한 덩이’를 얻기 위하여 그 대제사장에게 ‘제사장 직분’을 구걸하는 처지가 될 것이었습니다.
제사장 집안이 그 직분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섬기지 못하고 자기 생계유지를 위해 얻고자 하는 것이 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비참한 결말이며 최악의 집안 망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에 하나님을 멸시하고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이라는 사람이 동시에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았을 때, 그 집안은 이처럼 하나님께 멸시를 당하게 되었으며 온 가족과 자손들까지 ‘모든 것을 잃고 자신을 망치는’ 패가망신의 벌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기 자녀들이 좋은 대학을 나오고 세상적으로 매력있는 배우자를 만나고 좋은 직장을 가지고 해서 사회적으로 부러움 받는 인물이 되는 것은 물론 기분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는 과연 얼마만큼 사랑받고 있는 자들인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자식들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모든 것이 다 부모님 덕이라고 치켜 주면서 여러분을 육신적으로 호강시켜 드린다 해서, 그것만 가지고 ‘내가 우리 가문 잘 세웠다.’고 성급히 자부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지금 당장 먹고 사는 것은 잘 된다 해도, 후손으로 내려 갈수록 점점 더 신앙생활 못하는 집안이 되면 이미 패가망신은 시작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멸시하시면, 하나님께서 우습게보시면, 그 성공이란 것은 순식간에 사라질 초개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식이 부모보다도 예수님 사랑하는 마음이 약해지고 손자가 자식보다도 더 신앙생활에 게을러지는 것은 눈뜬 신자라면 정말 통곡해야만 할 비극입니다.
우리 집안에 과연 대대로 이 신앙이 이어지겠는지, 적어도 내 살아생전에 눈으로 목도할 수 있는 세대까지라도 이 신앙이 계속 전해지겠는지 한번 주의 깊게 살피고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 집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믿음의 대가 끊기게 된다는 것이야말로 바로 그 집안이 하나님께로부터 멸시를 받아 온 가족들이 영육으로 완전히 패가망신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자와 모녀가 공히 ‘하나님 존중’하는 신앙에 닮게 되는 것보다 더 멋진 집안은 없습니다. 반면에 온 집안 식구가 ‘하나님 멸시’하는 일에 같이 닮아가는 것보다 더 비참한 가문은 없습니다.
어찌하든지 예배생활을 바로 가르치고 성경말씀으로 권위있게 자녀들을 훈계하며, 그리함으로써 온 집안이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가문의 축복을 누리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빠오 족을 선교한 헥켓 가문 (펀 글)
미얀마에 빠오 족이 있다. 빠오 족 선교는 지금부터 100년 전, 1907년 3월 미국에서 온 윌리엄 헥켓 Hackett 선교사로부터 기원한다. 그는 빠오 족과 어울려 살면서 40년 동안 복음을 증거 했다.
그는 자기 스스로 “나는 빠오 족이다!” 라고 말하며 빠오 족과 동화되기를 원했다.
그러던 중 핍박이 일어나서, 헥켓 선교사는 강제로 추방당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본국에 되돌아가지 않고, 산 속으로 도망 다니는 생활을 10년간 계속 했다.
미얀마는 산이 많아서, 깊은 산속에 숨으면 찾아내기도 쉽지 않다. 도피 생활 10년 만에, 결국 그는 붙잡혔다. 그래서 40년 사역기간과 합해서 선교 사역 50년 후에, 그는 미국에 되돌려 보내졌다.
그러나 그는 미국에 돌아가서도 결코 미얀마를 잊지 못했다. 그래서 미국을 순회하면서 미얀마에 대해 설명하고, 기도회를 만들고, 선교후원회를 조직했다.
그러다가 그는 81세에 소천 하셨는데, 운명 당시 그의 마지막 유언은 “빠오 족을 잊지 말라!”였다.
그래서 그의 후손들이 지금도, 미얀마 빠오 족을 계속 방문하며 돌아보고 있다고 한다.(아래 인터넷 기사)
제가 미얀마를 방문해서 여러 부족들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여러 부족들이 미지근하게, 신앙이 꺼져가고 있었는데, 유독 빠오 족 교회를 방문했을 때는 신앙이 살아있는 생동감을 느꼈다.
나는 거기서 ‘왜 빠오 족은 신앙이 뜨거울까?’ ‘이것이 윌리엄 헥켓의 믿음의 영향이 아닐까?’ 라고 혼자 생각해 보았다.
강인한 생명력!, 핍박가운데서도 굴복하지 않고 견디는 그 믿음!, 헥켓 선교사가 전해준 그 초기 신앙이 종자 믿음이 되어서 1백년이 지난 지금도 그 열정이 빠오 족 가운데서 사라지지 않고 지속됨을 느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한국교회는 초기 신앙의 조상들에게 많은 빚을 졌다. 새벽기도의 전통, 핍박을 이기는 신앙, 순교하는 신앙 등 아름다운 신앙적 전통을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셨다.
이제 세계에 남은 미전도 종족을 향하여 윌리엄 헥켓 선교사가 빠오 족을 선교한 것처럼 한국 크리스천들이, 그들 미전도 종족들에게 아름다운 종자 믿음을 전해주는 그런 시대적 사명을 오늘 우리 세대가 충실히 감당하게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