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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2:1~10 한나의 신학

LNCK 2023. 2. 16. 10:22

[데스티니] 27. 한나의 신학 (삼상 2:1-10) - YouTube

 

◈한나의 신학        삼상2:1~10 


▲도입

한나의 destiny(숙명)는 두 가지입니다. 

첫번째, 한나가 이 땅에서 꼭 이루어야 될  destiny(숙명)는
사무엘을 낳는 것입니다. 이것은 룻과 마찬가지로 

룻이 오벳을 낳음으로 다윗의 계보를 이어가는 것처럼, 
그것이 룻에게 주어졌던 아주 중요한 destiny(숙명)이었던 것처럼 

한나도 또 한나의 출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특별히 사무엘을 낳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결국 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무언가를 잉태하고 이 땅에 유업으로 남기는 
존재라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평생을 삶을 살고 나면 
결국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이 땅 가운데 남겨지는 게 있습니다.

일단 여러분들이 사랑했던 사람들,
또 여러분과 함께 했던 가족들,
또 수많은 사람들에게 뭔가 남겨져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좋은 기억으로 남겨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뭐 '떠나니까 속 시원하다' 이렇게 남겨지기도 하고요..

하여간 사람은 뭔가를 남기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 삶의 결과물로 이 땅 가운데 낳는 '출산'이라는 거에요. 
또는 '유업'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믿음'이라는 유업을 남기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순종'이라는 걸 남기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뭔가 안 좋은 유업들을 남기기도 한다는 거지요. 

자 그래서 우리 인생은 룻처럼, 또 한나처럼 
이 땅에 삶을 살아가면서 무언가를 잉태하고 낳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룻의 이야기도 그렇고, 또 오늘 살펴보고 있는 한나의 이야기도 그렇고 
'어떻게 출산한 건가?' 에 대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한나가 사무엘을 낳는 과정은, 쉽지 않았던 과정이었어요. 
그래서 그냥 어느날 사무엘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이 '불임의 기간, 광야의 기간'이 있었죠. 
아무것도 잉태하지 못하는 그런 기간이 있었고 

또 브닌나로부터 핍박을 받는 기간이 있고 
이런 이제 여러가지 기간들을 통과하면서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열매인 사무엘을 낳기 이전에 
우리 내면에 하나님이 이미 출산하게 하시는 것들이 있다는 거예요. 

우리 내면 가운데 만드시는 것(신앙인격)들이 있고 
내면의 사무엘이 다 잉태되고 완성됐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사무엘 아이를 주신다는 거죠

그래서 인생 가운데 반드시 하나님께서 두시는 기간이 
어떤 눈에 보이는 성공과, 눈에 보이는 열매 이전에 
우리 안에 우리 안에 (눈에 안 보이는) 사무엘을 잉태하는 기간을 반드시 두십니다. 

만약 이런 기간이 없이 어느 날 여러분들이 운 좋게 
뭔가가 갑자기 하늘로부터 떨어져가지고, 내 인생의 열매를 맺었다면,
그건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내면의 열매를 맺기 이전에 
그것에 해당하는 어떤 외적인 열매를 주시는 분이 아니세요

반드시 우리 내면의 무엇인가를 만드시고 
그 후에, 그것에 해당하는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그래서 한나가 사무엘을 잉태하기 전에, 사무엘을 낳기 전에 
이 한나의 내면에 이미 사무엘이 다 잉태되고 출산됐어요. 
그리고 나서 눈에 보이는 실제 아이를 갖게 되었다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이런 불임의 기간들, 
열매 맺을 수 없는.. 그런 기간들을 통해서 
우리 안에 뭐를 증폭시키시죠?

그 열매에 대한 갈망, 
그러니까 하나님의 것을 보고 싶은 것에 대한 갈망을 막 증폭시키시고 
또 고난의 기간을 통과하게 하시면서 우리의 동기들을 더 정결케 하시고 
이런 과정들을 통해서, 우리 안에 먼저 하나님의 것(신앙인격)들을 형성하시고 

그것을 그것이 이제 자연스럽게 밖으로 드러나게 하실 때, 
한나가 비로소 아이를 출산하게 되죠.
한나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첫번째 메시지는 이거라는 거죠. 

자 오늘은 이제 이 한나가 가지고 있는 두 번째 레슨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중보기도자 한나

한나는 중보기도자의 상징이죠. 
특별히 구약에 등장하는 믿음의 여인들, 기도하는 여인의 
대표적인 사람이 한나입니다. 

그래서 한나에 두 번째 데스티니(숙명)인 중보기도에 대해서 
좀 살펴보려고 합니다. 

선지자 사무엘을 낳았던 한나는 기도의 여인 이었어요. 
그래서 평생에 기도를 통해서, 선지자 사역을 상징하는 사무엘을 낳았다는 
것은, 참 우연치고는 재밌습니다. 

한나는 모든 선지자의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었던 사무엘을 낳았는데 
한나의 평생의 기도의 결과로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커서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중보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특별히 한나에게 주어졌던 역할은 중보자인데 
이 중보자가 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했더니 
중보의 상징인 사무엘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굉장히 상징적인 의미가 있죠. 

▲제가 사무엘과 한나의 이야기를 묵상하는 가운데 
오늘날 한국 땅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한나 같은 사람을 찾으신다'는 
그런 마음을 주셨습니다. 

고난을 통과하고, 또 환난을 통과하면서도 
결국 그 땅 가운데 이스라엘 나라의 기초를 놓을 
그 사무엘을 낳을 사람이 된 거죠. 

그리고 사사시대의 혼돈을 끝내고, 새로운 이스라엘의 새로운 시대를 열
그게 사실 사무엘이었거든요. 그 사무엘을 낳았던 여인이 한나였어요. 

하나님께서 지금 혼돈가운데 있는 한국땅 가운데 
또 뭔가 새로운 영적인 질서가 요구되는 이 땅 가운데 
지금 사무엘이 출현해야 될 시기인데 
그를 낳을 믿음의 사람들을 찾으신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 누군가가 기도하면서 사무엘을 잉태해야 된다는 거죠.

눈에 보이는 사무엘을 낳는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새로운 시대를 열고 
또 새로운 영적인 질서들을 만들어 갈.. 
그 일들을 행하시기를 원하시는데 

그 일을 잉태하고 낳기 위해서는 
누군가 기도하는 사람이 먼저 기도를 시작해야 된다는 거에요. 

그래서 한나의 기도가 있을 때 사무엘이 출산케 되고 
그 사무엘이 새로운 질서를 열어가듯이 

이 땅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기초를 세웠던 그 사무엘을 낳았던 한나처럼 
이 혼돈과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는 이 시대 가운데 
한나와 같은 믿음의 사람들을 요구하신다...는 그런 믿음을 제게 주셨어요. 

그래서 우리가 오늘 살펴볼 메시지는 
이 "한나의 중보기도"에 대한 것입니다. 
"중보자로서 한나"에 대한 것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특별히 본문 삼상2:1~10절은 <한나의 기도> 입니다. 
한나의 기도를 통해서, 한나는 중보자로서 어떤 사람이었나? 
그리고 그가 믿고 있던 믿음의 내용은 뭐였나? 

그래서 오늘 이 설교의 제목이 "한나의 신학"입니다. 
신학이라고 하는 게 대단한 것이 아니고 
한나가 믿었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었냐는 거예요. 

그리고 중보자로서의 한나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었냐? 
이런 것들에 대한 걸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실은 우리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학은 뭔지... 

여러분들 전부 다 나름대로 신학들을 가지고 계십니다. 
뭐 '신학'이란 용어로 표현되지 않아서 그렇지 
여러분이 믿고 있는 믿음의 내용들이 있잖아요. 

이런 모든 내용들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신학인데 
이 신학은, 우리의 기도의 내용 속에 그대로 반영되는 거 아세요?

내가 뭐라고 기도 하는가를 자세히 살펴보고 있으면 
그 사람이 뭘 믿고 있는지를 알 수 있어요.  

그 사람이 기도하는 내용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것은 이 한나의 기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한나의 기도를 쭉 이렇게 읽고 묵상하면서 보니까,
한나가 무엇을 무엇을 믿고 있는지가, 기도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이 제목을 "한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한나의 믿음의 내용"으로 잡았다가, 너무 길어서 "한나의 신학"으로 줄였죠.

사실 하나님께서, 한나는 '중보기도자의 모델'로 주셨기 때문에 
이 시대에 모든 중보자들에게 요구되는 믿음이고, 
중보자들이 가져야 될 신학이라고 저는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중보자들이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지... 
중보자가 어떤 신학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한나 같은 그런 중보자를 통해서 
사사시대의 혼돈을 끝내시고 이스라엘의 새로운 시대를 여셨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에요. 

한나는 권력이 있었던 왕도 아니었고, 또 큰 영적 지도자도 아니었어요. 
그냥 에브라임 산지에 사는 한 작은 여인, 
아무도 모르는,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무명의 사람... 

그런데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으면서 기도했던 한 여인, 
이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한 시대를 닫으시고 다른 시대를 여시는
이 일을 행하신단 말이에요. 

이것이 과거나 현재나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영원히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어떤 큰 파워들, 큰 권세들, 큰 어떤 지도자들
이런 자들을 통해서 세상 역사를 끌고 가시는 분이 아니세요.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지 않으세요. 

물론 거기에도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숨어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한 시대를 닫으시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가실 때 사용했던 
사람들은 항상 중보기도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렇게 많이 알려진 사람이 아니에요. 

그냥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 한 작은 여인,
근데 그 여인의 그냥 소원이 뭐에요? 
뭐 이스라엘에 새로운 질서가 돌아가게 하시고... 이런 게 아니었어요. 

그냥 자기의 자식 없는 것 때문에 애통해하고, 울고 불고 부르짖었던 여인,
그렇지만 그 주신 귀한 자식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할 줄 알았던.. 
아주 단순하지만 정말 하나님을 사랑했던 한 사람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한 나라의 역사를 닫으시고, 새로 여시는 일을 행하셨어요.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찾으시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한국 교회에 진짜로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눈에 보이는 어떤 구조나, 눈에 보이는 어떤 대단한 사역들이나 

이런 것들이 아니고...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하나님 앞에서 한나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한나와 같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자기 것을 드리고 싶어 하는 
그 한 사람,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가서 자기 마음을 쏟아놓고 기도할 때 

삼상1:10, 15절 에서 한나가 하나님 앞에 나가서 통곡하며 기도했듯이 
그 말은 자기 마음을 쏟아놓고 기도했다는 뜻이죠.
그렇게 할 때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낳게 하시고 
새로운 질서를 시작하신다는 거죠. 
그것이 하나님께서 열방을 경영하시는 방식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사실은, 우리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보면 
능력은 별로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께 능력은 막 차고 넘치게 있거든요. 
모든 능력의 근원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능력은 그냥 하나님의 것을 쓰시면 돼요. 

근데 정말로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이 땅 가운데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으며 중보하는 중보자가 있느냐?' 
하는 것이 사실은 더 큰 문제이지요. 능력의 문제는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땅 가운데 우리가 보기에 정말 불가능해 보이는 어떤 문제들,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들, 절망적인 순간들... 
우리가 살아가면서 또 시대적으로 수많은 문제들과 벽들을 맞닥뜨리게 되지만 
사실은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 모든 문제를 넘어서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으세요.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실 하나님의 방식이 있는데 
그건 뭐냐하면 한나와 같은 믿음의 사람들, 기도하는 사람들을 찾으셔서 
그 기도를 사용하신다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 중보자에 대한 이야기를 오늘 할 텐데 
'나는 중보자도 아니고, 중보기도는 나하고 상관 없는데...' 
이렇게 생각하신다면, 여러분 굉장히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으신겁니다. 

물론 오늘날 특별히 조금 더 중보의 은사를 더 주신 분들이 있을 수 있어요.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중보의 사명을 감당하는 
중보자입니다. 기본적으로 그 사명이 장착되어 있어요.

그 이야기는 뭐냐면 중보기도는, 이 땅을 통치하는 하나님의 방식이라는 거에요.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모든 이 땅에 통치권을 위임하셨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한번 결정하신 것을 무르거나 후회하시는 분이 아니시죠. 
인간에게 위임하셨기 때문에, 누군가 인간이 그것을 구하고 결정하고 
하나님이 역사하시도록 문을 열어 드리기 전에는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들어오셔서 일하시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무도 기도하지 않는데, 하나님께서 이 땅의 일을 강권적으로... 
이렇게 일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통치를 위임한 이 땅에 (아담같은) 통치자들,
그 누군가가 하나님 앞에 그 일을 요청하고, 하나님한테 도움을 구하고 
그분이 일하실 수 있도록 문을 열어놓을 때..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결정하신 방식이에요

그래서 중보기도가 없이는, 하나님이 이 땅에 절대로 일하실 수가 없습니다. 
일하시지 않아요. 

그래서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중보기도하는 사람들로 부름을 받았어요. 

그래서 오늘은 한나를 통해서, 
특별히 중보기도자에게 요구되는 믿음은 어떤 것인지... 

그리고 사무엘을 이 땅 가운데 낳는 
그래서 이스라엘의 기초를 세우고, 이스라엘에 새로운 질서(왕정)를 가져오게

했던 그 한나의 믿음은 무엇인지, 한나의 신학은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면서 
저와 여러분 가운데도 이런 믿음들이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1. 한나의 신학 또는 한나의 믿음의 기초는 "기쁨과 즐거움의 영성"

삼상2:1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기쁘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위 구절에서 한나가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는, 기쁨, 즐거움입니다. 
한나의 모든 믿음의 시작이 되는 기초가 있었는데 
그것은 기쁨과 즐거움이었다는 거에요

즉 여호와를 즐거워함의 영성이 한나에게 있었다는 거에요. 
그래서 한나의 모든 신앙의 기초에 들어가 보면 
한나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이것이 기초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친밀함에서 오는 그 즐거움이 
한나의 모든 신앙의 출발점이고, 기초였다는 거에요. 
여러분 이것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기초는 뭐에요? 
이것이 여러분의 영성이 어디까지 자랄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을 아세요?

△여러분, 건물을 지을 때 가장 중요한 게 기초입니다. 
그래서 기초를 어떻게 놓느냐에 따라서, 
그 위에 어떻게 건물을 지을 수 있는지가 거의 다 결정됩니다. 

그래서 기초를 튼튼하게 잘 놓은 사람은 
그 위에 건물을 높이까지 올릴 수 있어요. 20 층, 30 층도 올릴 수 있어요. 

그런데 기초가 뭐 이렇게 이렇게 튼튼하지 못하고 부실하면 
처음에 집을 줄 때는 잘 몰라요. 1 층, 2 층 올라갈 때는 표가 안 나요.
아무 차이가 안 나요. 

그런데 건물이 한참 올라가서, 10 층 이상 올라가면, 
그러면 기초가 튼튼하지 않은 건물은, 더 이상 올라갈 수가 없어요. 
왜냐면 기초가 흔들려서 벽이 뒤틀려지고, 금이 가는 현상들이 나타나죠.

근데 이것이 건물에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라 
사실은 우리의 영성에 해당되는 얘기에요. 

그래서 마7장에 보면, 모래 위에 집 짓는 자와, 반석 위에 집 짓는 자가 나오죠.
그래서 이 기초를 어떻게 닦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영성이 어디까지 자라갈 수 있는지가 결정이 됩니다. 

근데 성경은 뭐라 그러냐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가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우리 영성이 어디까지 자라다가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건물로 얘기하면 높게 높게 올라가라 하는 것이 
성경의 명령인데 

우리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냐는 것이 
사실은 우리의 기초가 무엇이냐에 따라 달려있다는 거예요. 

제가 목회를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정말 뼈저리게 느끼고 또 느끼는 것은 
기초에 대한 문제에요. 

기초가 튼튼하지 않으면 높이 올라갈 수도 없을 뿐더러 
시도때도 없이 보수 공사를 계속 해야 돼요. 

그런데 이 보수 공사가 이게 보통 고된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성도가 신앙이 조금 성장하는 것 같다가 곧 잘 뒤집어지고 
성장하는 것 같다가 시험에 들고, 또 넘어지고... 

한 2층 쌓아 올리는 것 같다가 어느날 와르르 무너뜨리고 
3 층 쌓아 올린줄 알았는데 또 무너져서 새로 시작하고...
계속 이러면, 이거 계속 보수 공사해야 되거든요. 

그러면 보수 공사는 누가 하냐면, 옆에 있는 사람들이.. 또 목회자가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거 하다 보면요, 이게 보통 일이 아니에요. 
이거 하다가 세월 다 지나갑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들이 왜 생기냐면, 결국 기초의 문제예요. 
기초가 탄탄한 사람은, 별로 보수공사가 필요 없어요. 
그래서 확실하게 우리의 기초가, 신앙의 출발점이 튼튼히 쌓여있는 사람은 
별로 손이 가지 않아요. 
그냥 말씀 듣고 기도하면서 자기 혼자서 10층 20층 계속 커가요. 

근데 기초가 없는 사람은, 옆에서 붙잡아 주고, 끌어주다가 
막 올리면 무너지고, 또 올리면 또 무너지고... 막 이런단 말이에요. 
이게 어디서 결정나냐면 기초에서 결정납니다. 

△물론 기초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겠지만 
이 기초 중에 가장 중요한 기초가 
우리의 신앙에 동기가 뭐냐는 거에요?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동기를 가지고 예수님께로 나옵니다. 
-어떤 사람은 죄책감이 동기인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책임감이 동기인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지옥가는 두려움이 동기인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옳으니까 믿는다는.. 어떤 도덕적 책임감에서 믿는 사람이 있죠.
-어떤 사람은 기복주의로, 복받으려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한나가 가지고 있었던 신앙의 동기, 그 기초는 뭐였냐 하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는' 거에요. 하나님이 즐거운 거에요. :1

여러분, 우리 신앙의 건물이 어디까지 올라가냐면, 결국 여기서 결정이 나요. 
하나님과 관계의 즐거움,
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즐거움이 뭔지를 알고 
그것을 누리는 것 때문에 기뻐하고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너무 좋아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결국 굉장히 높은 데까지 올라갈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른 동기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처음에 출발할 때는 다 똑같고, 차이가 안 나 보여도 
결국 멀리 가지 못할 거예요. 

신앙이 계속 성장하는 사람을 보면, 그 안에 뭔가에 대한 열망이 있는데 
어떤 열정이냐 하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가보고 싶다'는 열정이에요. 

 

△중보기도자(이하 '중보자')에게 특별히 이 기초가 중요한 이유가 있는데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이 기초가 중요하긴 하지만 
중보자에게는 조금 더 이 기초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면 특별히 중보기도사역 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보수, 보상, 상급...
이런 게 거의 안 주어지기 때문에 그래요. 거의 안 주어집니다. 

사실 다른 사역들은, 한참 하고 나면, 뭔가 눈에 보이는 결과들이 있습니다. 
일례로, 열심히 전도를 했어요. 
그러면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어요. 이런 가시적 결과도 나타나고,
그러면 이제 주변에서도 '누구는 전도를 많이 한다'는 칭찬도 듣지요.

그런데 중보하는 사람들은 열심히 기도해가지고서.. 
무슨 가시적 결과가 뚜렷이 안 보입니다. 칭찬도 들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 이란과 이스라엘이 전쟁을 하려고 하는 
굉장히 아주 지금 첨예한 대치 국면에 있죠. 

그래서 한 중보자가 그 부담을 가지고, 정말 며칠씩 금식하며 주님 앞에 나가서 
'주님, 이 전쟁을 막아 주십시오' 그렇게 간절히 기도해가지고
이란과 이스라엘 사이에 갈등이 더 이상 확전으로 가지 않고, 봉합되었어요.

그러면 사람들이 찾아와서 '오, 당신이 기도해서 이렇게 평화가 찾아왔다!'
이렇게 칭찬받을 일이 없어요. 실제로 기도응답이 되었다는 객관적 결과도 없고요.
다만 성령이 마음에 감동을 주셔서, 기도했을 따름이지요...

국내의 정치적 현안을 두고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죠.
실제로 기도응답이 될 때가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여야가 합의해서
그런 결과가 나왔다든지, 어느 정치인이 정치를 잘 해서 그렇다.. 라고 돌리죠.

이렇게 중보기도사역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 결과나 보답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여호와로 말미암는 즐거움'이라는 보답이 주어지지 않는 한 
이 사람은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여호와로 말미암은 즐거움!'
그래서 중보자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중요한 보상은 뭐냐 하면 
눈에 보이는 가시적 결과가 없고, 또 사람들이 칭찬해주는 게 없어도 
이 중보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더 알게 되고 
더 즐거워하게 되고, 하나님과 함께 있는 기쁨을 누리게 되고 ...
이것 자체가 보상인 거예요. 

그래서 중보자들은 이 보상을 먹고 사는 겁니다. 
중보하는 사람들은 이 보상을 먹고 사는 거기 때문에 
친밀함과 즐거움의 영성에 기초하고 있지 않으면 
절대로 중보자는 오래 지속될 수가 없어요. 

뭐 의무감으로 해야 되니까, 사명이 있고, 은사가 있으니까... 
아니, 그런 거 가지고 안 돼요. 
그런 거 가지고 잠깐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절대로 어느 수준 이상은 넘어갈 수 없어요. 길게 못 가요.

그래서 중보자들은 계속 그에게 주어지는 보상, 보답이 뭐냐 하면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즐거움'이에요. 
한나가 그 즐거움을 알고 있었다는 거죠. 삼상2:1

그래서 이 즐거움때문에, 다른 보상이 주어지지 않아도 
개의치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이미 이미 보상을 받았다는 거죠. 

그래서 중보자의 기초는 뭐냐 하면 "즐거움의 영성"이에요
중보기도사역을 통해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거예요. 

특별히 무슬림 지역에 들어가서 하는 '기도의 집' 사역, 
어차피 가시적, 단기적 열매가 없을 것을 잘 알거든요. 
그러니까 거기서 일년 열심히 기도해도, 
물론 가끔 진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서 열매가 생기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열매가 없습니다. 

일 년만 열심히 거기서 중도기도 하고 돌아올 때 
보면 아무것도 없이.. 그냥 이제 현지 언어만 좀 배워가지고 돌아오는 거예요. 

그랬을 때 이 '즐거움의 영성'의 기초가 없으면 
사람들이 굉장히 번아웃이 되기 시작해요.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열매는 없고 이게 뭐냐? 내 인생의 보상은 뭐냐?' 
막 이런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는 거죠. 

그래서 사실은 중보기도자를 포함해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모든 성도들에게
첫번째 기초가 뭐냐면 '즐거움의 영성'이에요.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 이걸로 이미 보상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이 우리의 기초이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우리의 출발점입니다. 

그런데 이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면, 자꾸 다른 보상에 기웃거리게 돼요. 
그러다보면 사람이 망가지는 거에요. 
자꾸 다른 보상에 기웃거리다 보면,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하게 되고 
선택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선택하게 되고 
사람의 비위를 맞추게 되고... 이렇게 엉뚱한 길로 빠지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 "기쁨과 즐거움의 영성"의 기초 위에 있지 않으면 
결국 다른 보상들을, 신자들은 찾게 돼 있어요. 
그러나 한나는.. 당장 자녀가 없어도, 당장 기도 응답이 안 되어도
"기쁨과 즐거움의 영성"위에 기초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노래했던 것이죠.
 
2:1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2. 중보자로서 한나의 두 번째 신학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신뢰"입니다.
주님 밖에는 믿을 분이 없고, 의지할 분이 없는 거예요.

2절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한나는 '주님 밖에는 다른 믿을 분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
그러니까 '이것 말고 다른 반석은 없다'는 거에요. 

여러분 이게 쉬운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게 쉽지 않아요. 
성도들 가운데, '여호와로 반석을 삼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에요. 
전부 다 여호와로 반석을 삼는다고 말은 하지만 
문제는 '실제 매일의 현실에서 정말 여호와만으로 반석을 삼느냐?' 
이게 이제 관건인 거예요. 

보면 여호와말고도 다른 돌들을 갖다가 반석으로 이렇게 섞어놓고 사는 거예요.
여호와만 자기 삶의 반석으로 삼기에는 조금 불안불안한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어떤 중요한 문제, 또는 어려운 문제
그런 문제에 딱 부딪치게 되면, 우리는 어디로 돌아가냐 하면 
'내가 반석으로 삼은 걸'로 돌아갑니다. 거기가 내가 믿을 구석이라는 거죠. 

그래서 여호와만으로 반석을 만들지 않고 
여호와말고 다른 반석들이 막 섞여있는 사람은 
이 생명을 담보로 한 중보의 자리에 나아가지 않아요. 
반드시 다른 것에 자기 손을 뻗치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 중보자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진짜 중요한 것은 
'생명을 담보로 한 중보'에요. 
'이것밖에 없다, 하나님 밖에 없다'고 하는 믿음이에요. 

그래서 기도의 자리에 나가는 거에요. 
그래서 목숨 걸고 기도에 올인 하는 거예요.

기도의 자리에서 승부를 보지 않으면 
다른데서는 해답이 없다고 믿는 사람, 그가 중보자거든요. 

그래서 이 중보자들은 항상 마음 가운데, 이제 어떤 부담과 어떤 믿음이 있냐면 
'이것 밖에는 길이 없다!'는 믿음이 있는 거에요. 
이 중보의 자리말고는 길이 없다..는 믿음이 있는 거에요. 

그런데 다른 반석들을 의지하게 되면 
뭐 사회적 힘을 의지한다든지, 조직을 의지한다든지, 
아니면 프로그램을 의지한다든지, 단체를 의지한다든지.. 
내가 뭐든지 간에 내가 의지하는 게 있잖아요? 
그러면 '생명을 담보로 중보'의 자리에 나가지 않아요. *자기 목숨 거는 기도

반드시 다른 것에 자기 손을 뻗게 되어 있어요. 
물론 기도는 하지요. 
근데 기도 빨리 끝내고, 자기가 손을 뻗은 일.. 그거하는 거예요. 

여러분, 그런 유혹을 받으신 적 없어요? 
뭔가 문제가 생겼어요. 심각하게 기도를 해야 돼요. 
그러면 '이 기도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면 거기서 금식 들어갑니다. 
'기도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하는 사람은, 그럼 금식 들어가요. 

근데 기도 이외에도 다른 길이 조금 보이는 것 같으면 
빨리 기도 끝내고, 그 길이 보이는 쪽을 향해서 나아가는 거예요.
그리고 그 일을 추진하는 거죠.
'여호와 이외에 다른 반석'을 찾는 것입니다.
결국 그 반석에 자기 손을 뻗치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중보자에게 두번째 기초는 뭐냐면 
여호와로만 반석을 삼는 거에요. 
'주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은 없도다!' :2
이 한나의 고백이, 중보자에게 요구되는 두번째 신학입니다. 


근데 물론 이것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 이외에 
다른 일은 다 손 놓고 하지 마라.. 이런 뜻은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기도하는 것 이외에 다른 행동들은 다 신앙이 없는... 이런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 하면서도 무언가 해야 될 때들이 분명히 있어요. 

(중보)기도가 중요한 것은, 기도시간에 이미 승부가 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승부가 난 것들을 실제로 집행하고 뒤처리하는 행동들이 

뒤따라 나오는 것이지요. 이해가 되세요? 

이미 기도의 자리에서 '쇼부'가 났어, 이미 승부가 났어요. *일본어로 승부 
그것에 대한 뒤처리하는 거에요. 
뒤처리하고 그것을 마무리하는 작업으로서 어떤 행동들이 필요한 것이지 
'기도도 하고.. 일도 하고..' 이건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은 중보자말고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은 명백합니다. 
일단 기도의 자리에서 뭔가 쇼부를 보고, 거기서 승부를 내고 
그것에 대한 뒷처리로 우리가 뭔가 액션에 옮기는 것이죠.

그래서 이 기도의 자리에서 먼저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가 
결판이 나야돼요. 
그리고 그것에 따라 움직이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오케이 그럼 그 기도는 내가 들었으니까 
너는 그걸 이렇게 저렇게 해라!' 
그럼 내가 순종에서 그대로 하는 거라는 거에요. 

그래서 기도의 자리에서 이미 승부가 난 것들을 
내가 집행하고 처리하는 과정이지 
그것이 기도와 병행하는 게 아니라는 거에요. 

△그래서 모든 중보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뭐냐하면 
'생명을 담보로 (목숨 거는) 한 기도'에요. '이것밖에 없다'고 하는 믿음! 

한나에게 있어서 반석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었어요. 
그래서 1:10, 15절에 보면,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만으로 반석을 삼는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 앞에 나가서 쏟아놓는 거예요. 쏟아 놓는 거!  

 

1:15절에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개역에 '통했다'고 번역했는데, 이 표현이 영어성경이나 히브리어에
'쏟아놓았다 pour out'는 뜻입니다. 물동이 쏟듯이 다 비워내는 것을 뜻하죠.
새번역이 '쏟아놓았다'고 번역했습니다.*pour out, 1:10


한나에게 원통한 일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첫째는 자녀가 없는 것이고 
둘째는 그로 인해서 브닌나가 자기를 핍박하는 것이죠. 

이 원통한 일 앞에서 한나가 취한 행동은, 하나님 앞에 나간 거에요. 
그리고 그 앞에서 통곡하며 자기 마음을 쏟아놓은 거예요. 

중보자는, 하나님 앞에 쏟아놓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우리 반석이시니까, 
다른데서는 쏟아놓을 곳이 없으니까... 

'쏟아놓는다'는 말은 뭐냐하면, 그것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니까 
쏟아놓는 거지요. 즉 반석으로 믿는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반석으로 삼는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께 쏟아놓을 줄 아는 사람이에요.  오직 하나님께 쏟아놓습니다. 

여러분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쏟아놓는 기도를 하세요? 
내 안에 어떤 고통이 있을 때,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쳤을 때 
어떤 원망, 원한, 불안, '브닌나'가 못 살게 굴 때, 내가 억울할 때 
그럴 때 여러분은 어디로 나가세요? 남편한테 쏟아 놓으세요? 
그럼 여러분의 반석은 남편입니다. 

어디다 쏟아 놓으세요? 그 쏟아놓는 곳, 그곳이 우리 반석이에요. 
한나는 하나님 앞에 나가서 쏟아놓는 사람이었던 거예요. 
여호와가 자기의 반석이시니까. 
그래서 중보자는 여호와 앞에 나아가 쏟아놓는 사람입니다. 

△또한 중보자는 하나님 앞에 쏟아놓는 기도를 하는 것으로부터 
중보자의 사역이 시작돼요. 

여러분이 기도를 배우는 과정에 있어서 중보자는 
주위 사람의 기도제목들, 또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제목들 
이런 것들을 가지고 나가서 하나님 앞에 아뢰는 사람이 아닙니다. 

중보자는 여러분, 하나님 나라의 보고자, 리포터가 아니에요. 
리포터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정보를 쫙 수집해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정보를 쫙 이렇게 리포트 해 드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에요.  

중보자는 말이에요, 하나님 앞에 자기의 마음을 쏟아놓을 줄 아는 사람이에요. 
이것이 사실은 중보의 시작이에요. 

그렇게 여러분들의 마음을 쏟아놓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뭐 처음부터 거창한 기도제목들, 다른 사람을 위한 중보기도 제목
이런 거 들고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처음에 여러분 가운데있는 고통들을 들고 나가는 거에요. 
자녀가 없는 걸 가지고 한나가 주님 앞에 나가서 괴로워했듯이 
브닌나의 핍박가운데 나가서 고통스러워했듯이... 먼저는 쏟아놓는 거에요. 

그랬을 때, 하나님이 나의 이 쏟아놓는 마음들을 
어떻게 만지시는지를 경험하는 게 있어야 돼요. 

하나님께서 내가 그렇게 주님 앞에 나갔을 때 
어떻게 나의 반석이 되시는지 경험해야 된다는 거예요. 

한나가 말이에요. 자녀가 없어서, 또 브닌나의 핍박때문에 
정말 하나님 앞에 괴로워서 고통 가운데 통곡하며 나아갔을 때 
하나님께서 한나의 기도를 들으세요. 

한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로 하여금 사무엘을 낳게 하시고 
뭐 이런 과정들을 통해서 
한나가 '아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반석이시구나!' 이것을 경험 하잖아요. :2
알게 되잖아요. 

그리고 이 경험이, 한나로 하여금, 다른 기도제목들 들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믿음이 되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앞에 기도한 것도 하나도 응답받은 경험이 없어요. 
그런데 과연 민족과 열방의 기도제목을 들고 나가서 믿음으로 기도하게 될까요? 

특별히 열방을 위한 기도, 이거는 빨리 빨리 응답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굉장히 더디게 응답되는.. 눈에 잘 보이지도 않고.. 
설령 응답됐다고 해도, 이게 과연 내가 기도해서 응답 된 건지, 
아니면 나보다 영력이 더 있는 사람 누군가가 금식해서 응답된건지.. 
뭐 알 수도 없는 이런 애매모호한 상황 가운데 

'내가 경험한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 이라는 이 경험없이 
우리가 중보의 자리로 나갈 수 있냐는 거예요. 아니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여러분, 중보자는 처음부터 다른 사람에 대한 
어마어마한 긍휼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중보의 사명이 있기 때문에 기도하는 게 아닙니다.

중보자도 하나님 앞에서 한 계단 한 계단 점점 세워져 가는 건데 
첫 번째는 자기의 개인 기도제목으로 나가는 거예요. 

'내 안에 있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원통함' 
'브닌나에 대한 억울함' 
이런 것들을 들고 그냥 하나님 앞에 "쏟아내면서" 나아가는 겁니다.
왜? 그 분이 나의 반석이신 라고 했으니까! 

그래서 그분이 진짜 나의 반석이신지 확인해야 되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 앞에 나가서 기도하며 통곡 했을 때 
하나님이 정말로 내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지.... 
이 기도응답의 경험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제가 요즘 셀 리더들과 함께 모임을 가지면서 이런 얘길 했어요.
'셀의 생명이 뭔지 아십니까? 셀이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계속 그 가운데 생명이 역사하기 위해서는, 그 중에 기도응답이 있어야 돼요!
셀에서 함께 기도 했을 때, 뭔가 응답되는 경험이 조그만 거라도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거기서부터 '아 우리가 함께 기도할 때, 주님이 응답하시는구나! 
살아 계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시다!'고 하는 것이 
이게 경험 되어지고, 내가 보고 듣고 만져져야 
거기서부터 하나님에 대한 열정도 나오고 
정말 중보기도를 계속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거지,

셀 small group 로 모여서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도 응답되지도 않고...
그럴 리가 없겠지만요.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진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마음을 쏟아놓고 기도 했을 때 
응답받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셀 모임의 생명력이 되고, 거기서부터 우리가 매너리즘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건데.. 응답받는 경험도 없으면, 뭘로 그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들을, 어떻게 우리가 경험하고 체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기도가 응답 받아야 되는데, 그러려면 구체적인 기도를 해야 돼요. 
너무 공중에 붕 뜬 기도를 하지 말아야죠.
중보자는 처음부터 이렇게 크고 위대한 기도를 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자기 필요가지고 나가는 데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하나님, 지금 내 안에 이런 문제가 있고 
내가 이것 때문에 너무너무 원통하고, 이게 해결이 안 돼 가지고 미치겠고, 
이 사람이 나를 이렇게 맨날 쪼으고 있는데.. 이 문제 좀 해결해 주세요!'
뭐 이런 걸 가지고 그냥 주님 앞에 나가서 기도하셔야 돼요. 

그래서 지금 자기가 처한 문제를 가지고 구체적으로 기도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하시는지를 경험하면서
그 경험을 통해서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 되신다'고 하는 믿음이 생기는 거예요. 

이것이 우리를 중보자의 자리로 올라가게 하는 겁니다. 아멘!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자기 마음을 쏟아놓을 줄 모르는 사람은 
중보자가 될 수가 없어요. 

여러분 가운데 있는 문제들을 가지고, 우리 하나님 앞에 나가서 
쏟아놓으시길 바랍니다. 

쏟아놓는 게 뭔지 아세요?
자매님들이 진짜 답답한 거 있으면 베프 (베스트 프랜드) 만나 가지고서 
다 쏟아놓잖아요. 막 그러면 좀 속이 후련해지잖아요. 

후련해지는 건 심리적인 효과죠.
그렇다고 친구가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죠.

어쨌든 친구에게 다 쏟아놓듯이
기도를 그렇게 하라는 거예요.
이게 쏟아놓는 기도입니다.
거기서부터 기도를 배우셔야 됩니다.

세번째로 넘어가겠습니다. P2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