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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내래 죽어도 가겠습네다> P6 (마지막 회)

LNCK 2023. 2. 16. 17:02


◈도서 <내래 죽어도 가겠습네다>  P6  (마지막 회)      <지난 글 보기>

◑16장 삼철 들과 만나다    *삼철 : 정철, 성철, 광철 등 '철'로 끝나는 3명

심양에서 갈 곳 없는 3명의 북한 형제들이 숨어서 살고 있다는 소식이 왔다. 
오랫동안 자매들만 만나다가 형제들이 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뛸 듯이 기뻐 서둘러 심양으로 가서 청년들을 만났다. 

이정철, 황성철, 이광철 형제들이 
판자로 대충 지어놓은 창고에서 숨어살고 있었다. 

그들의 사는 형편을 대충 둘러보니, 한족들에게 팔려다니면서 살아가는 자매
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3명의 청년들은 북한 무산시 시골 마을에서 함께 살다가 탈북한 
19살 난 동갑내기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한국 사람을 처음 보았는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앉아야 할지, 서야 할지 몰라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오랜만에 보는 북한 청년들이었고, 또 어린 나이에 무서운 고생을 하면서 살아
가는 모습들을 보니, 어떻게든 데려가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히 차올랐다. 

내 소개를 자세히 하고, 그들에게 물었다. 
'나를 따라오면 안전한 곳에서 먹고 사는 것은 걱정 없이 살 수 있어요. 
또 성경을 1년 동안 배운 후에는 한국도 갈 수 있어요. 
나하고 같이 갈 수 있나요?' 

세 청년은, 처음 만난 한국 사람의 말을 얼마나 신뢰해야 할지 몰라 덤덤이 
앉아 있기만 했다. 서로의 의향을 알고 싶은지 자기들끼리 얼굴만 쳐다보았다. 
성철이가 무엇이 부끄러운지 잔뜩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가겠습니다!'

정철이와 광철이도 덩달아 기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우리도 가겠습니다!'

세 명의 어린 청년들을 데리고 떠나려고 하자 
그동안 이들을 돌본 중국인이 나에게 돈을 요구했다. 

순간 분한 마음과 서러운 마음이 동시에 올라왔다. 
'북한 사람들은, 여자나 남자나 다 돈으로 거래되는 거구나!' 
나는 주인이 달라고 하는 대로 돈을 주고, 그 집을 서둘러 떠났다. 

▲사역장에 형제들이 들어오자, 자매들도 너무 좋아했다. 
자매들은 시간이 얼마나 지나는지도 모르고, 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머니 같은 자매들이 친절하게 대해주자, 형제들은 신이 났는지 
돌아가면서 북한 노래를 두세 곡씩 부르며 춤도 추었다. 

나와 자매들은 이들을 "삼철"이라고 불렀다.    *삼철 : 정철, 성철, 광철

성철은 학교를 1년 밖에 다니지 못했다. 
4살 때 아버지가 떠나셨고, 어머니는 3년 전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중국에 살면서 세 번씩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했다. 
얼어서 죽을 뻔하고, 중국 사람들에게 맞아 죽을 뻔도 했다. 

정철은 그래도 중학교까지 다니다가 탈북을 했다. 

광철은 학교를 가본 적이 없었다. 고아로 살면서 도둑질로 살아 왔다. 
나는 삼철의 이야기를 들으며,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란 것은 어느 정도 짐작했지만 
정작 가르치려고 보니, 도대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 세상에 한국과 중국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것도 몰랐고 
역사도, 일반 상식도..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저 자기들은 한때 북한이라는 나라에서 살다가 온 사람들이라는 것 정도밖에 
자신들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정말 탈북자들답지 않게 명랑했다.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너무 어쩌구니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그것도 모르냐?'고 
놀라자 3철들이 합창을 하듯이 말했다. 
'네 우리는 까마귀들입니다!' 

'까마귀라고?' 

내가 이해하기 힘들어 하자 광철이 설명했다. 
'북한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쟁이를 그렇게 까마귀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부끄러워하지도 않았고,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광철은 한글도 몰랐다. 그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등하는 나에게 하나님은 조용히 일깨워주셨다. 

'미국의 무디 목사도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이다. 
너는 그저 최선을 다해서 가르쳐라!' 
나는 '아멘!' 하고 세 명 모두 영입하기로 했다. 

▲삼철은 문제가 많았다. 모두 반가워해주고 사랑해주니 
도를 넘어서는 행동들을 하기 시작했다. 

모든 말에 다 참견했고, 자기들 기분대로 행동했다. 
엄하게 타이르면 빈정거렸고, 선생들과 자매들을 업신여겼다. 

농구를 하러 운동장에 나가서도, 공을 운동장 저쪽으로 탁 차버리고는 
우르르 화장실로 몰려가서 담배를 피우고 왔다.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자기들의 행동이 얼마나 나쁜지.. 
자매들이 얼마나 자기들을 싫어하고 불쾌해 하는지도 전혀 몰랐고, 
안다고 해도 개의치 않았다. 

며칠 동안 함께 지내본 자실 선생도, 두 손 두 발 다 들어버렸다. 
'이 녀석들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숨만 쉬었다. 

나는 자매 사역장과 남자 사역장을 분리하기로 했다. 
삼철들은 엉엉 울면서 싫어했다. 

'지금까지 외롭게 살아오다가, 고향 어머니, 누님들 같은 분들과 함께 살면서 
정말 행복했는데 왜 헤어져야 합니까? 가지 마세요!' 

자실 선생이 버럭 화를 냈다. 
'이놈들아, 왜 너희들 생각만 하냐? 사역장 안전도 생각해야 하고 
우리는 할 공부가 많은데 
네놈들은 맨날 장난만 치고, 말도 안 듣고 애만 태우니 어떻게 함께 살아?' 

▲이육 선생과 나는 본격적으로 삼철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아침 5 시면 어김없이 일어나는 것부터 시작했다. 

기상 후에는 스스로 식사 준비를 하게 했다. 
식사가 끝나면 한 시간 동안 기도 훈련을 하면서, 찬송가들을 가르쳤다. 

도대체 공부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이들에게, 통독은 무리일 것 같아 
정철은 암송, 성철은 성경만화 읽기, 광철은 한글 자음 모음과 
1 2 3 4 숫자 공부부터 시작했다. 

빼곡히 들어찬 일과들을 시간표대로 다 마치면, 밤 열두시가 되었다. 
공부를 처음 하는 사람들이라, 힘들어하면, 억지로 내몰지 않았다. 
대신 이야기를 해주었다. 

우리나라 이야기, 세계 역사 이야기, 중국 이야기, 북한 이야기를 해주었고 
북한 사람들이 왜 그토록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지에 대해서도,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도 이야기로 들려주었다. 

삼철들은 이야기 듣기를 좋아했다. 
해주면 해줄수록 계속 해달라고 했다. 

 

이야기는 '까마귀'들을 꿩과 봉황새로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삼철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조리 가르쳐야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인사하는 법부터 가르쳤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식사 하십시오! 다녀오세요. 다녀오셨습니까?' 

밥 먹는 것도 가르쳐야 했다. 이들은 식사 시간이 따로 없었다. 
배가 고프면 먹고, 배고프지 않으면 먹지 않았다. 

아침 식사시간에는 드러누워 자다가 
열시쯤 되면 배가 고프다고, 다른 사람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고기와 반찬들을 모조리 다 먹어버렸다. 

음식을 먹는 것을 찬찬히 살펴보니 기가 막혔다. 
밥이든 반찬이든, 닥치는 대로 가득가득 입안에 밀어넣고는 
대충 씹어서는 삼켜버렸다. 

마치 도둑이 다급히 주머니에 물건들을 쑤셔담듯이 음식을 채웠다. 
배가 고프면 밤이건 새벽이건 상관없이 나와서 먹었다. 
식사시간 개념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들에게, 무조건 정해진 식사시간에 
선생들, 형제들과 다 함께 식사하게 하고, 음식도 절제하게 했다. 

형제들을 영입하면, 수준 높은 성경공부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상상했지만 
나의 바람과는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20살짜리 청년들에게 유치원 과정을 가르치는, 작고 이상한 학교가 만들어졌다. 

철들은 모든 것을 신기해 했다. 마치 달나라에 온 사람들 같았다. 
어느 것 하나도 그냥 지나가지 못하고, 한참씩 지켜보다가, 만져보고야 지나갔다. 

그 중에서도 한국에서 가져온 진공청소기를 제일 재미있어 했는데 
청소할 때면 서로 자기가 하겠다고 다투었다. 

철들은 말을 해야 할 때와, 하지 말아야 할 때를 구분하지 못했다. 
머릿속에 생각나는 것들은 모조리 말해야만 했다. 

한두 시간만 이들과 같이 있으면,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시끄러웠다. 
참다못해 제일 말을 듣지 않는 정철에게 내가 말했다. 

'그렇게 말이 절제 안 되면, 입에 재갈을 묻는 것이 어때요?' 
정철은 갑자기 얼굴이 파래지면서 흥분했다. 

나와 이육 선생이 가까스로 달래고 이유를 물었다. 
'선생님, 북한에서는 사람을 총살시킬 때 입에 재갈을 물립니다!'

아차, 그러고 보니 이들은 탈북하여 
중국에 온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내가 다급히 사과해야만 했다. 
'그래 그래, 말을 해라.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총살시키지 않을 테니...'  하하하

철들은 꾸중을 하면, 저쪽 방으로 뛰쳐나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 
북한 노래를 불러댔다. 

농구를 할 때면, 팀과 함께 움직여야 한다는 개념을 몰랐다. 
자기 쪽으로 농구공이 오면, 먼 곳을 향해 발로 뻥뻥 차버렸다. 

정말 대책이 없었다. 이제는 나도 꽤 탈북자를 안다고 자신했지만 
이들은 언제나 상상이상이었다. 

속이 상한 나는 결국 지쳐버렸다
마음속에서 꿋꿋이 버티고 있던 큰 댐이 와르르 허물어져 버렸다. 

화를 내고 욕을 하고 싶었지만, 알아들을 녀석들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맥없이 의자에 주저앉아 중얼거렸다. 

'저들을 사랑하는 이 마음이 참 좋습니다. 
주님이 주신 선물이 아프고 힘들기는 하지만, 참 좋네요. 

그런데 오늘 보니 저들이 까마귀가 아니라, 제가 까마귀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참 아직도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제게 이런 시간이 필요한가 보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주변에서 사람들이 뭔가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여기가 어디지? 왜 이렇게 조용하지?' 

 

광철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했고 
이육선생이 다급하게 내 몸을 흔드는 것이 비몽사몽간에 느껴졌다. 

'무슨 일이 일어났나?' 
나는 정신이 다시 돌아왔다. 

사람들이 나의 온 몸과 팔과 다리를 주무르면서 안타깝게 소리 지르고 있었다. 
'선생님 선생님, 물 좀 드세요. 정신 차리세요!' 
정신을 잃고, 다리가 굳어져가고, 머리가 뒤로 넘어가고 있는 나를 발견한 것은 
광철이었다. 

내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몸도 지쳤고 영혼도 지쳐있었다. 
다음 날도 계속해서 내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마치 자석에 끌려가는 것처럼, 내 영혼은 자꾸만 어디론가 떠나려고만 했다. 

'하나님, 이들과 함께 숨어살다가, 이렇게 그냥 천국으로 불러주신다면 
저는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가면, 이들을 돌보고, 맡아줄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저도 편안히 눈을 감겠습니다.' 

계속해서 마비되는 몸을 풀어보려고, 나는 안마를 받으러 갔다. 
순서를 기다렸다가 안마를 받느라 시간이 많이 늦춰졌다. 

안마를 받는 동안에도 자꾸만 몸이 마비되었고, 의식이 흐려졌다. 
예정보다 너무 많이 늦어지자,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지 아내가 달려왔다. 
아내는 내 얼굴을 보고는 한숨을 크게 쉬면서 눈물을 흘렸다. 

'당신 괜찮아요?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아침에 안마 받으러 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걱정을 했고 
또 이렇게 오랫동안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니 
얼마나 많은 불길한 생각이 떠오르는지... 
우리 같이 오래 살다가 동시에 함께 천국 갑시다!' 

아내는 말을 하면서도 계속 울었다. 아내가 고마웠다. 

'그래요. 하나님 일 많이 하고 우리 함께 천국 가요' 

안마시는 분이 여러번 당부했다. 
좀 더 오래 살려면 채식과 소식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휴식이 필요하다고 했다. 

▲다음 날 자실 선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실 선생은 뭐가 그렇게 슬픈지 엉엉 울면서 말을 했다. 

'선생님 제가 갑자기 너무 외롭습니다. 너무 슬픕니다. 
내 평생에 이렇게 외로울 때가 없었습니다. 
선생님, 처음에는 선생님도 다른 선교사들처럼 
우리를 이용만 하다가 버리는 사람인 줄 알고 
정말 선생님의 말씀도 안 듣고, 속도 많이 썩였습니다. 

이제는 나도 압니다. 선생님 속을 압니다. 
그땐 내가 왜 그랬는지 정말 슬픕니다. 

선생님, 건강 생각하십시오. 정말 건강 잘 챙기십시오. 
우리 같이 북한선교 하려면, 선생님부터 건강해야 합니다. 
함께 많은 북한 영혼을, 하나님께 인도 해야 합니다...' 

자실 선생도 울고, 나도 울었다. 
그의 눈물은 내 영혼에 소생하는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내 영의 세포 하나하나가 감격했다. 
북한선교 10년만에, 북한 사람에게 이렇게 영혼에 위로가 되는 
격려와 사랑을 받기는 정말 처음이었다. 

나는 행복했다.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정도로 행복했다. 
'그래, 이게 선교구나, 이게 선교사구나! 


♣다시 한국으로! 

사역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쭉 흑룡강 성 하얼빈 시에서만 살았다. 
이제는 다른 도시로 이사가야 했다. 
우선 자매들 사역장부터 이사가기로 했다. 

나는 자매들을 이끌고 사천성 성도 시로 갔다. 
중국에서 기차를 타고 가는 일은, 탈북자들에게는 언제나 무서운 일이었다. 

그러나 자매들은 불안해하지 않았다. 떠나기 전 예배를 드리면서 
주님께 간구했고, 가면서도 늘기도 했다. 
4박 5일 동안 중국공안이 상주하는 열차 안에서 
공안들의 검문에 걸리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한 사람도, 아니 팀 전체가 검문에 걸리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늑대굴에 들어가는 사람이, 늑대를 만나지 않게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말이 안 돼 보였지만 
나는 늘 탈북자들과 이런 방식으로 여행을 했고.. 그때마다 우리는 안전했다. 

탈북자들은 성경을 배우면서 주님을 배우고 
기차 안에서 주님의 도움을 경험했다. 

대부분 열차여행이 끝나고 나서야, 자기들의 마음에 임하고 있었던 
이해할 수 없던 평안이, 바로 주님의 동행과 임도하심 임을 분명하게 느낀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탈북자들은, 자기들의 이 느낌에 대해서 놀라워하며 
이런 말을 했다. 
'선생님, 옛날에 우리가 혼자 다닐 때에는 무서워서 죽을 것 같았는데 
이번에는 정말 편안했습니다. 유람이었습니다. 
공안들이 지나다니는데도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공산주의 국가는 기차, 시외버스, 배 등에서 검문검색이 잦음)

▲성도에 도착한 우리는 너무 쉽게 좋은 집을 구했다. 
집은 화려했고 가구들은 모두 최고급이었다. 

자매들은 김정일 별장보다 더 좋은 집이라고 좋아했다. 
거기에다 집주인도, 사천성에서 큰 직위를 가진 조선족 공안이었다. 

그 공안은 우리가 탈북자들이라는 것을 알고도, 쉽게 집을 허락해주었다. 
이 집에서 살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자기가 보호해 주겠다고 했다. 

방 여기저기 구석들까지도 부적이 붙어 있는 것만 빼고는 
집은 너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며칠 살면서 이 궁궐같은 집이 
왜 우리에게 임대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문제가 하나 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자실 선생부터 자매들 모두가 
이유 없이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강렬한 욕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이어 자매들끼리 계속해서 하찮은 문제들로 싸우기 시작했다. 
내가 있는 앞에서도 서로 치고 받고 싸웠다. 

이간하는 말들과 음란한 말들이 사역장에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훗날에야 나는, 이 집이 귀신 들린 집이어서, 폐가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집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사람이 생긴 후부터 
'사람을 뛰어내리게 하는 귀신'이 사는 집이었다. 

험담이 시작되었고, 자매들은 집단적으로 자실선생과 찬양자매를 공격했다. 
은혜받고 변화받은 자매들의 모습은 지워져가고 있었다. 
통제가 되지 않기 시작했다. 

답답한 나는, 회의를 열고 왜 이러는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매들이 강경하게 요구했다. 

'선생님, 1년만 공부하면 한국으로 데려다 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자실선생은 1년이 되었으니 그를 먼저 한국으로 보내 주세요. 
그러면 우리도 계속해서 성경공부를 할게요.' 

자실선생은 중국에서 북한선교 5년을 하고 들어가겠다고 하나님께 서원을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자실선생과 찬양자매를 한국으로 데리고 가기로 결정했다. 

두 자매를 한국으로 데려간다고 선포는 했지만 
사실 나는 이들을 한국으로 데려가는 방법을 몰랐다. 

어디로 가서 누구를 만나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성경통독을 시작하면서 한 약속이니, 한국으로 출발한다고 말은 했지만 막연했다. 

▲두 자매가 떠날 준비를 하는 동안, 답답한 마음에 사역장을 나와 걷기 시작했다. 
탈북자들을 전문으로 한국으로 보내주고 돈을 버는 브로커 한 사람을 알고는 
있지만, 이 자매들을 그들에게 넘겨주기 싫었다. 
내가 직접 데리고 가고 싶었지만, 방법을 몰랐다. 

황당하지만 일단 출발부터 하고, 기도하면서 어떻게든 방법을 모색하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나에게 전화가 왔다. 

집을 소개해준 사천성 성도에서 오랫동안 사역하고 있는 
권선교사님이었다. '최광 선교사님, 시온 이라는 분아세요?' 

나는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권선교사가 조금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10년 전 서안에서 사역할 때, 순교선생의 사역장에 
울산교회에서 단기 선교팀이 왔던 적이 있었다. 
그 때 함께 따라왔던 집사님이라고 했다. 

만나기로 약속하고, 만나서 얼굴을 보니 기억이 났다. 반가웠다. 
집사님은 그동안 신학공부를 하고 목사님이 되어 있었다. 

시온 목사님은, 서안에서 탈북자들을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탈북자들을 라오스를 거쳐 한국으로 데려가는 
'탈북자 구출사역'을 하고 있다고 자기를 소개했다. 

뭔가 상황이 맞춰져 가는 느낌이 들어서, 시온 목사께 말씀 드렸다. 
'제가 마침 두 자매를 한국으로 데리고 가려고 하는데,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시온 목사가 말했다. 
'동남아를 통해서 남한으로 가는 길은 제가 전문가예요. 
제가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시온 목사는, 나에게 동남아로 가는 지도를 그려주었다. 
그리고 모든 노하우와, 도중에 만나야하는 가이드들의 전화번호, 
그들과 거래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었다. 
아무에게나 알려주면 안 되는 비밀스러운 것들까지 아낌없이 알려주었다. 

우리가 남한으로 출발하려는 순간, 남한으로 가는 길이 열렸던 것이다. 
나는 숨이 막혔다. 

주님이 이렇게까지 세밀하게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고 
이렇게 우리 가까이 계시는 분이라고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기 위해 제사장들을 앞세우고 
무작정 요단강 속에 발을 내밀었을 때, 요단강이 갈라지는 것을 볼 때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지금도 이 루트를 통해서 많은 탈북자가 한국으로 오고 있다. 
이 때문에 이 책을 통해서 공개하고 싶지 않아, 구체적으로 쓰지는 않는다. 

▲대책 없는 우리 팀은 이렇게 한국으로 출발했다. 
시온 목사가알려준 대로, 중국과 라오스의 국경으로 가서 
국경을 넘나드는 브로커를 찾았고 
다시 마약 밀매범들이 넘나드는 길을 안내해줄 사람을 고용했다. 

밤을 타서 자실 선생과 찬양 자매는, 가이드들과 함께 국경을 넘어갔다. 
국경을 넘고 곧바로, 자실 선생과 찬양 자매에게서 전화가 왔다. 
기쁨으로 충만한 목소리들이었다. 
'선생님, 우리 넘어왔어요. 우리 이제 살았어요. 선생님 이제 한국에서 만나요!'

자실선생과 찬양자매를 무사히 동남아 한국대사관으로 보내주고 
다시 성도에 있는 자매 사역장에 돌아와 보니, 자매들은 모두 떠나고 없었다. 

정작 자실 선생이 떠나자, 구심점이 없어진 자매들은 
성경공부를 할 마음을 잃어버렸다. 

거기에다 두 자매가 한국으로 떠나는 것을 보자 
마음이 달아오른 지혜, 드보라, 은혜, 사랑, 수영 자매들은 
자기들끼리 브로커를 찾아 서둘러 남한으로 출발해버렸다. 

사역장의 자매들은, 한국으로 와서 탈북자들에게 정착교육을 하는 하나원에서 
서로 다시 만났다. 

한국에 와서 보니, 자기들은 브로커에게 거액의 돈을 주고 왔고 
자실선생과 찬양자매는 돈을 한 푼도 내지 않고 
한국에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제야 자매들은 더 이상 내가, 자기들을 붙잡아서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했다. 

정말 먼 길을 걷고 나서야, 자매들은 
믿지 않은 대가가 얼마나 큰 것인지 배웠다. 

▲자매들이 다 떠나자 성도 사역장에, 하얼빈에서 사역하는 형제들이 
옮겨 와서 살기로 했다. 

이육 선생이 철들을 데리고 오면서 말했다.   *삼철 : 정철, 성철, 광철
'선생님, 성도에서는 제가 이 철들을 맡아서 양육해 보고 싶습니다.' 

이육 선생은 철들을 데리고 성도 사역장에 와서 
단단히 결심하고 사역을 시작했다. 

하지만 다음 날, 이육 선생부터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강렬하고도 이해할 수 없는 욕구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이어 철들도, 자기들끼리 피터지게 싸우기 시작했다. 
며칠 후 내가 오자, 이육 선생과 철들이 이구동성으로 간절히 말했다. 

'선생님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저 이 집만 옮겨 주십시오. 
아무리 화려하고 경치 좋아도 뭐합니까? 
맨날 떨어져 죽고 싶은 마음밖에 안 듭니다.' 

돈을 많이 주고 빌린 집이었지만, 결국 포기하고 다른 집을 잡았다. 
이번에는 단단히 기도 하고 들어갔다. 

너무 좋았다. 방이 3개이고, 거실도 좋고, 
예배드리는 방은 아예 이중창문에 방음 장치도 잘 되어 있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부르짖어 기도하고, 마음껏 소리 내어 예배드리고 
찬양을 드려도 될 것 같았다. 

철들이 성도에 온 후, 임철 형제가 새롭게 사역장에 들어왔다. 
결국 철이 사철이 되었다. 

▲사역장 자매들이 전부 한국으로 갔다는 것을 알고 
금란자매가 사역장에 들어와 함께 합숙을 하면서 성경공부를 하기로 했다. 
금란자매도 한국으로 가고 싶었던 것이다. 

금란자매 혼자서 열차를 타고 성도까지 내려올 수 없어서 
나는 아내와 함께 데리러 갔다. 

전번에 자매들을 데리고 올 때와, 금란자매를 데려올 때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나와 아내, 금란자매가 탄 열차가 북경 가까이 접근하자 
공안들이 신분증 검열을 시작했다. 

나와 아내 여권을 받아든 공안은, 뭐가 수상한지 
여권과 나와 아내를 한참동안이나 비교해 보고 들여다보았다. 

나는 평소에 늘 중국인들로부터 '전혀 한국사람 같지 않다'는 말을 듣던 생각이 났다. 
공안도 아마 전혀 한국인 같지 않아 보이는 사람이 
한국 여권을 가지고 다니는 내가 수상했던 모양이다. 

나는 금란 자매 때문에 불안했다. 아내 옆자리에 앉아서 숨도 못 쉬고 
앉아 있는 금란 자매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의 몸 안에서 심장이 툭탁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공안이 나와 아내의 여권을 다 보고 나서 
금란자매를 향해 다시 투박스럽게 말했다. '신분증!' 

탈북자들과 함께 다니면서,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늘 자매들은, 공안들의 눈을 가려서 우리가 보이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기도했던 대로 되었다. 

마치 북한 자매들은, 공안들만 오면, 투명망토를 쓰고 다니는 사람들 같았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고 걱정하지 않았지만.. 이번엔 다른 것 같았다. 

나의 심장이 툭탁거리고 뛰기 시작했다. 내가 서툰 중국어로 말했다. 
'우리 가족이다.' 

겉모습으로만 봐서는 전혀 한국인 같지 않던 사람의 입에서 
서툰 중국어가 나오자, 공안의 얼굴이 밝아졌다. 
더 이상 의심할 일이 없어진 것이 기쁜 모양이었다. 

공안은 노래를 부르듯이 '오케이' 하면서 다음 자리로 떠나버렸다. 
공안이 떠나자, 금란 자매는 안에 무릎 위에 쓰러져 버렸다. 

금란 자매는 5분 동안 사형대 위에 올라 갔다가 내려 왔다. 
아내도 많이 놀랐는지, 그 후부터 한 잠도 자지 못 했다. 

▲내가 탈북자들을 공부시킨 후 한국으로 보내 준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정동현 자매와 한 아주머니가, 흑룡강 성 치타이허 에서 나를 찾아 왔다. 
한국에서 은혜 선교사도, 함께 탈북자 사역을 해 보고 싶다고 찾아왔다. 

새로 들어온 탈북자 자매들은 전혀 다듬어지지 않았다.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사역장에 오자마자 온갖 음란한 말들을 거리낌 없이 하기 시작했고 
이간질하고, 서로 헐뜯고, 마주 앉아서도 서로 흉을 보기 시작했다. 

늘 싸우고, 선생들을 향해서도 비난하고, 흉을 보았다. 
함께 있는 사람들이 너무 힘들어 했다. 

함께 지내던 은혜 선교사가 나를 보고 항의하다시피 말했다. 
'선교사님, 도대체 이 일이 되는 일이라고 하고 있나요?' 

내가 설명했다. '저는 지금이 사역을 10년 이상 하고 있어요. 
지금은 전혀 불가능해 보이지만 
1년만 같이 말씀을 읽고 기도하면서 함께 지내면 
이 사람들도 분명히 변화 된답니다
우리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할 수 있어요.' 

은혜 선교사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한 달 후, 두 손 두 발 다 들고 떠나가 버렸다. 

나는 종종 북한사람들도 하나님을 만나면 변화된다는 것을 
남한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일도 정말 힘들다는 것을 경험했다. 

▲미국에 사는 오수정 자매와 지미 형제가 여름휴가로 사역장에 한 달간 
성경통독 하러 들어오기로 했다. 

미국에서 두 사람의 교포가 온다는 소식을 알려 주자 
정철 형제의 낯빛이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좀처럼 걱정도 두려움도 모르던 정철 형제인지라 
왜 그러느냐고 내가 묻자, 정철 형제가 말했다. 

'이제 이 사역장에 미국 놈까지 와서 같이 살게 되면 
우리는 북한 가서 무조건 총살당합니다. 
선생님, 총살 어떻게 시키는지 압니까? 
사람들을 새까맣게 모아놓고 구경하게 하고 
말도 못 하게 입에 제갈을 물려놓고 총을 땅땅 쏴서 죽입니다.' 

정철 형제가 아무리 두려워 해도, 오기로 했던 사람들이라 받기로 했다. 
교포들이 오자, 4철들은 침실 방문을 잠가 놓고 들어가 숨어버렸다. 

금란 자매도 침실 문을 잠가 버리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나는 어쩔 수 없어 내방을 내어주었다. 

하지만 다음날 교포들이 북한 형제들과 함께 마트에 가서 
미국 음식을 사 주기도 하고, 
사역장에 돌아와서 미국 음식들도 만들어주면서 친하게 지내자, 다들 좋아했다. 
어느새 두려움과 벽이 사라져 버렸다. 
비록 평범 할지라도, 사람이 함께 산다는 것은 참으로 큰 영적 능력이었다. 

어느새 정철 형제는 성경을 600 절 암송했고, 
성철 형제도 500 절을 암송했다. 

내가 조금씩 가르쳐 준 것이 쌓이기 시작하자 
이제 성철 형제는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첫 설교를 한 날, 성철 형제는 너무 기뻐했고 
영적인 시아가 열리는 것에, 잔뜩 흥분하기 시작했다. 
앞으로는 무조건 하나님의 종으로 살겠다고 했다. 

광철 형제는 기도하며 성령의 뜨거움을 체험했다. 

금란 자매도 설교를 하기 시작하면서 변화되었다. 
하지만 금란 자매는 오래 고민하던 끝에 
시골 집에 있는 아들 청일을 두고 한국으로 갈 수 없어, 집으로 돌아갔다. 

많은 탈북 여인이 한국으로 가기 위해, 남편과 자녀와 헤어졌지만 
마음이 여린 금란 자매는, 끝내 가족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몇 달 후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어 금란 자매 집에 전화를 하자 
시어머님이 전화를 받았다. 
금란 자매의 시어머니는, 금란 자매가 나와 연락하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내가 금란 자매를 꼬셔서 한국으로 데려가면 
자기 아들의 가정은 허물어질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차 싶었다. 또 굉장한 욕설이 날아올 것을 각오하고 
금란 자매 안부를 물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를 알아보고 흥분해서 말했다. 

'아이고 선교사님, 너무 고맙습니다!' 
나는 조금 의아했다. 예상 못했던 환대였다. 

시어머님도 짐작을 하셨는지 설명을 했다. 
금란 자매가 우리 사역장에 와서 몇 달 동안 성경을 배우고 돌아간 후
그 곳 시골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면서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골교회 사람들은, 금란 자매를 아예 주의 종으로 인정하고 
그에게 교회의 전권을 맡겼다. 

그랬더니 금란자매의 시어머니가 신이 났다. 
비록 자기 며느리 이지만, 이제부터는 주의 종이 되었으니 
자기부터 며느리를 받들어 충성하고 있다고 했다. 
이곳에 오면, 꼭 자기 집에 오라고, 그러면 단단히 대접하겠다고 부탁까지 했다. 

나는 오랜만에 기분이 좋았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었다. 

결국 금란 자매는 한국으로 가려고 사역장에 들어왔다가 
주의 종이 되어서 다시 중국에 눌러 살게 되었다. 

철 들도 사역장에 들어온 지 1년이 되었다. 
나는 약속대로, 철들도 전에 자매들을 데리고 가면서 익혀 놓은 길로 
안전하게 한국으로 데리고 왔다. 

철 들을 먼저 한국으로 데리고 오자, 임철 형제 혼자 사역장에 남았다. 
아직 1년이 되지 않았지만, 그도 한국으로 데리고 가기로 하고 길을 떠났다. 

임철 형제를 데리고 곤명시 국경지역으로 갔다. 
하지만 철들을 보내고, 다시 임철 형제를 데리고 오는 사이에도 
상황은 급작스럽게 변했다. 

북한 보위부가, 탈북자들이 중국을 탈출하는 길을 발견하고 
이 길을 차단하기 위해 15명의 요원들을 파견했다. 

골목마다 공안들이 CCTV 를 설치하고 감시하고 있었다. 
북한 보위부 요원들은 탈북자들로 가장하고 
한인회, 한인민박집, 한인기업, 식당들을 돌아다니면서 행패를 부리고 
돈을 뜯어 갔다. 일종의 이간정책이었다. 

북한 보위부는 연변에서도, 중국 조선족 사회가 탈북자들을 동정하고 
도와 주는 것을 막기 위해 요원들을 들여보내 
탈북자들로 위장하고 조선족들을 상대로 살인, 강간, 도둑질을 했다. 

탈북자들에 대한 집단적인 반감이 형성된 중국 조선족 사회는 
결국 더 이상 탈북자들을 도와 주지 않게 되었고 
이 방법을 그대로 한인들에게 적용하고 있었다. 

라오스로 넘어가는 국경은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었다. 
만나는 지인들 마다 '여기 있으면 잡힌다, 어서 돌아가라'고 말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기도만 하고 있는 나의 마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한국에서 사역을 다시 시작해라!' 
나는 하나님의 음성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나님, 아시잖아요? 
이미 6년 이상을 한국에서 사역했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현재 한국의 큰 단체, 큰 교회들이 이미 (탈북자 정착 사역)을 하고 있고 
또 그들도 힘겨워하는 사역입니다. 

저처럼 부족한 사람이, 그 속에 뛰어 들어가서 무엇을 해야합니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나에게는 분명히 영혼들이 살아나게 하는 사역의 현장이 있다. 
나의 관심은 영혼에 있다. 
영혼 살리는 일이 아닌, 행사 위주의 사역은 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 영혼을 살리고, 그 영혼을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는 사역은 
생존권이 보장되지 않는 중국에서만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이 사실을 나는 이미 오랫동안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될지 몰라도, 
'나는 한국에서 사역 못 한다'는 것이 
몇 년간 한국에서 사역을 하고 내린 결론이었다. 

한국에서 사역을 다시 시작하라는 주님의 분명한 음성이었지만 
나는 의식하지 않았고... 잊어버렸다. 

▲그러나 이때부터 나의 사역은, 한국에서 열리기 시작했다. 
못 한다고 고집부리던 나에게 
주님은 <에스더 기도운동 본부 탈북민 캠프>를 책임지게 하셨고 
두 번에 걸쳐 탈북민 집회를 총괄하게 하셨다. 

두 번의 집회는 놀라웠다. 
매번 성령 하나님의 분명하고도 뚜렷한 역사가 나타났다. 

집회에 참석한 탈북자들은,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기를 시작했고 
여기저기서 방언이 터지고, 탈북자들을 사로잡고 있던 귀신들이 떠나가는 
역사가 일어났다. 

탈북자들에게서 영적인 회복이 일어났고, 
죄 사함의 기쁨과 구원의 감격에 기뻐 뛰기 시작했다. 

전도사님들이 전화로, 집회에 참석했던 탈북자들이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내게 알려 왔다. 이후에는 북한 사람들에게서도 내게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내가 중국에서 많은 사역을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한국에서도 해 달라고... 
그러면 자기들이 와서 성경을 배우고 싶다고 간청했다. 

중국에서 들었던 주님의 음성과, 모든 상황이 일치했다. 
그제야 나는 상황을 좀 더 분명하게 다시 볼 수가 있었다. 

이제는 한국에도 당시 2만 5천 명 이상의 탈북자들이 있고 (2023년에는 3만5천)
성령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해 놀라운 일을 하고 계셨다. 

주님은 분명히 한국에 온 탈북자들을 준비시키는 일을 시작하셨다. 
나는 그것을 두 번의 집회를 통해 경험했고 목격했다. 

▲나는 순종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국에서 사역을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탈북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회를 개척하려고 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도 없었고, 돈도 없었다. 

언제나 막무가내로 대책 없이 시작하는 것이, 이제는 내 스타일이 되었다. 
나는 그냥 우리집에서 가족들 부터 시작해서 교회를 시작했다. 

북한 청년들이, 내가 개척교회를 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하나 둘씩 찾아오기 시작했다. 

서안에 있을 때 우리가정에서 살던 봉철이 찾아와서 함께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봉철은 북한으로 끌려가 순교의 길을 간 정용철 선생의 아들이다. 

이후 소문이 나기 시작하자, 북한 청년들이 연이어 찾아오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50명의 북한 청년들이 모이는 교회가 되었다. 

주일이면 우리 집은, 사람들이 움직일 틈도 없이 빼곡히 모여앉아 
말씀을 듣고 예배하는 장소가 되었다. 

금자 선생은 논산에 있는 신학대학에, 
임철 형제를 비롯해 여러 명이 총신대학교에 입학했다.

이외에도 자실 선생, 정철 형제와, 성철 형제, 광철 형제를 비롯한 
많은 북한 청년들과 자매들도, 신학교로 가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이제 주님의 일꾼들이 한국에서도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강명순 집사님이 서울시 영등포구 당산동 163번지 상가에 있는 자신의 건물을 
교회 성전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후원해 주셨고 
리모델링은 남서울 여전도회 연합회에서 바자회를 통해 후원해 주셔서 
성전도 마련되었다. 
주님은 한국에서도 자신의 뜻을 펼치기 시작하셨다. 


♣가정에 주신 은혜 

"내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면 하나님은 나를 위해 헌신하신다. 
그때 행복과 번영이라는 축복이 가정에 임한다." -최광 선교사 

서안에서 사용할 때 미국에서 온 선교사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 교포 선교사는 나에게 자녀들을 어떻게 교육시키고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돈이 없어 네 명의 아이들을 모두 중국 학교에 입학 시키지 못하고 
집에서 공부 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그 선교사는 화를 냈다. 
'당신은 사명이 있어서 그렇게 한다지만,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느냐?
뭔가 대책을 세워야지 어떻게 그럴 수 있냐?' 고 화를 냈다. 

그 선교사는, 자기 아이들은 모두 미국에서 공부하게 하고 
자기 혼자 중국에 왔다고 자랑하셨다. 

그 말을 듣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눈물은 내 마음에서도 흘렀다. 
'당신이 당신 자식을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내 아이들을 더 사랑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방법이 없지 않은가?' 

나는 하나님께 기도 드렸다.
'하나님, 제가 감당하는 사역이, 쫓기면서 숨어다니는 카타콤 사역이고, 
또 돈이 많아도 많은 부작용을 가져오며, 돈이 없어도 안 되는 사역이기에
그때그때 꼭 필요한 물질만 주심을.. 저분은 잘 몰라도, 나는 잘 압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라면 
내 아이들 학교 공부, 제대로 못 해도 감사합니다. 

지구상에 10억 이상이 문맹이라는데, 
아이들 넷 중에서 셋은 글 읽을 줄도 알고, 성경도 여러 번 읽었습니다. 
더 이상 공부 못 해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기도는 감사하다고 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1년 후 아이들을 중국 학교에 보내어 공부시킬 수 있었고 
네 아이 모두 중국어를 잘 하게 되었다. 

그렇게 고생을 많이 했으면, 아빠가 하는 선교에 대해 
자기들은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할 법도 한데 
우리 아이들 모두의 비전은 놀랍게도 다 선교사이다. 

큰 딸은, 한국에서 중학교 1학년 때 중국으로 들어가 공부하였고 
그러다가 아빠가 (약 4년 후) 추방 되면서 갑작스럽게 다시 한국으로 나왔다. 

추방된 선교사가 되니, 아이들 학교 보낼 돈도 없었다. 
큰 딸은 자기의 진로를 생각하면서 자주 울었다. 

'아빠, 나도 교복 한번 입어 보고 싶고요. 
친구들 사귀어서 놀러도 다니고.. 그렇게 살고 싶어요.' 

딸의 말을 듣고 나는 도망치듯 집을 나와 버렸고, 아내는 울었다. 
길을 걸을 때도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울 때가 많았다. 

네 명의 아이들 모두 검정고시 출신이다. 
큰 딸은 그후 가톨릭대학교 중문과를 수시입학 지원을 했고 
하나님의 은혜로 합격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합격할 수가 없는데 합격을 했다. 

 

그 후부터 큰 딸에게 하나님의 도우심이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는 곳마다. 중국어를 통해 자신감을 얻은 큰 딸은 
계속해서 일본어와 영어에 도전했고, 
일본어 1급, 영어 테솔 교사 자격도 얻었다. 

이어 뉴질랜드에서 사역하시는 이은태 목사님께서 큰 딸을 스카웃해 갔다. 
목사님은 에딘버러 칼리지에서 중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사역하면서 
예배도 드렸다. 

큰 딸은 중국어 동시통역 사역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영어 공부도 했다. 
하나님은 큰 딸에게 특별히 찬양의 영감을 부어 주셨다. 

둘째 딸도 초등학교 3학년을 다니다가 중국으로 들어갔다. 
추방 후 한국으로 나와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적응이 너무 힘들어서 
1학년 가을에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했다. 

중국에서 살면서 조금 익숙했던 중국어를 계속 공부해서
HSK 11급 만점에 10 급을 받았다. 

둘째가 자신감을 얻었는지, 그것으로 이화여대 와 숙명여대의 언론홍보학과에
지원했다. 한국에서 경쟁력 있는 학과라고 했다. 그러나 떨어졌다. 

3개월 공부하여 10 급이라는 성적을 받으면서, 잠시 교만했던 것 같다. 
서울에 웬만한 대학에 갈 수 있다고 자신했던 모양인지.. 좌절감도 컸다. 

며칠 동안 침대에 엎어져 밥도 안 먹고 기도하다가
하나님을 깊이있게 만나 교제했다. 

하나님은 둘째에게, '대학을 왜 가야 하느냐?'고 물으셨다. 
그제야 둘째는, 자신이 대학을 가고자 했던 동기는 
인간적인 욕심과 허영심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이 주시는 분명한 목적을 붙잡았다. 

둘째는,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서 대학에 가기로 결단하고 
마음을 꼿꼿이 세우고 나에게 말했다. 

'아빠, 아무리 힘들어도 나를 1년만 기숙학원에 보내주세요!' 
나는 둘째를 양주에 있는 기독교 기숙학원에 보냈다. 

레벨 테스트를 해보았더니 수학과 몇 과목이 7등급으로 나왔다. *낮은 등급
총무 선생님이 면담을 하면서 둘째에게 물었다. 
'어느 학교에 가고 싶나요?' 
'서울대학교에 가고 싶어요!' 

총무 선생은 어처구니 없는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상담을 끝냈다. 

내가 찾아가니, 나에게 다시 물었다. 
'자녀의 등급이 7등급 인데 서울대에 가고 싶어 하네요. 
아버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선생님, 안 된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주세요!' 
내가 부탁하자 총무 선생이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네요!'

그때부터 하나님은 둘째와 동행하시고 시작했다. 
둘째에게 범상치 않은 지혜와 열정이 나타났고, 정말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내가 중국에서 잠시 돌아와 면회를 하자고 해도, 점심시간에만 만나 주었다. 
그러면서도 매일 아침 저녁, 학원 내에 있는 교회에 가서 
하나님과 깊은 교재를 놓지지 않았고, 
기도 시간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하루하루 시간을 알차게 공부했다. 

정확히 3개월 후 둘째는 월반을 했다. 3반에서 1반으로 옮겨갔다. 
1반은 서울대, 연고대 반이다. 

6개월을 지나니 총무 선생님이 감탄을 하면서 말했다. 
'이런 아이는 처음 보네요. 이렇게 나가면 서울대도 가능하겠네요!' 

11개월 동안 공부를 열심히 한 둘째는, 연대 외대 한동대에 원서를 넣었고 
외대와 한동대에 합격했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11개월만에, 다른 아이들이 수 년에 걸쳐서 해야 하는 공부를 끝냈다. 
어느 학교에 갈지 몰라 며칠 동안 갈등 하더니 
아무래도 한동대로 마음이 더 끌린다고 했다. 

한동대에 가서 얼마간 공부하더니, 아무래도 영어가 힘들었는지 휴학을 하고 
뉴질랜드에서 언니가 하던 일을 넘겨받아 하면서 
뉴질랜드 에딘버러 칼리지에 들어가 중국어 예배 동시통역을 하면서 
나머지 시간에는 영어를 배웠다. 

거기서도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서, 얼마 되지 않아 
영어 태슬 교사 자격 시험 1등을 했고 
이은태 목사님의 책을 중국어로 번역 하기도 했다. 


셋째는 아들인데, 초등학교 1학년 때 중국으로 들어갔다. 
중국학교에 적응이 되지 않아, 매일 싸움만 하다가 집으로 쫓겨오곤 했다. 

중국 초등학교에서 3학년까지 다니다가, 나와 함께 한국으로 옮겨왔다. 
한국에서도 초등학교 과정을 힘겹게 마쳤다. 

그 후 이사장님과 교장선생님의 배려로 지우 국제학교에 입학을 했다. 
지우 국제학교는, 영어로만 공부하는 학교이다.  *경기도 가평

아들은 국제학교에서도 1년 동안 적응 하지 못했다. 
이사장님과 교장선생님은 적응못하는 아들을 매우 힘들어 하셨다. 
다시는 선교사 자녀를 받지 않겠다는 말씀까지 하셨다. 

그러나 아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늘 하나님을 사모하고 찾고 갈망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아들도 회복시키기 시작하셨다. 
그에게도 특별한 지혜와 총명을 주셨다. 

아들은 수업시간에는 늘 공부를 별로 하지 않고 삐딱 했지만 
시험만 치면 늘 100점이 나왔다. 
다음 해에, 그러니 1년이 지나서는, 학교에서 수석이 되었다. 

고 3때는 미국 수능시험인 SAT에 1990 점과 토플 108점을 받았다. 
지우 국제학교에서는, 아들이 미국의 최상위권 대학에도 
얼마든지 갈 수 있는 실력이라고 적극 추천 했지만, 장학금을 준다는

미국 테네시 주에 있는 Freed-Hardeman Univ. 신학교에 입학했다. 

막내 딸은, 금방 걸음마를 마치고 말을 배우려고 입을 쫑알쫑알 열기 시작할 때 
중국으로 갔다.
그래서인지 중국이 외국인지도 모르고 그대로 잘 적응했다. 

중국에서 살 때 막내는 한국어를 잘 못했다. 
하루 종일 중국 아이들과 놀면서 중국어를 배우다보니 
한국어가 불필요한 외국어 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한국으로 나왔다. 
막내에게 한국은 생소한 외국이었다. 

위로 세 아이들은, 중국에서 적응하기 힘들어했지만 
막내는 한국에 적응하기 너무 힘들어 했다. 

결국 막내는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집에서만 공부했다. 
하나님은 막내에게, 언니 오빠보다 더 총명한 지혜를 주셨다. 

막내는 하이디 베이커 목사님의 집회 때 은혜를 받고 
그때부터 자신의 비전을 고아사역으로 잡았다. 
5천 명 이상의 고아들을 돌보는 사역을 하고 싶다고 한다. 

지금은 내가 사역하고 있는 <성경통독 100독 학교>에서 
북한 청년들과 함께 성경을 배우면서 훈련하고 있다. 
앞으로 귀한 일들을 감당하게 하실 줄 믿는다. 


나는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도, 가르치지도 못했다. 
그럴 시간도, 힘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친히 아이들을 가르쳐 주셨고, 
아이들에게 믿음을 주셨고, 정말 바르고 건강한 인격으로 성장시켜 주셨다. 

아이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린 아빠를 믿지 못해요. 아빠는 돈이 없잖아요.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요!' 

처음 그 말을 들을 때는 못내 서운했지만, 곰곰이 되돌아보면 
아이들이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아빠로서 많이 미안하다. 
지금까지 탈북자들만 붙들고 씨름하면서 살다 보니 
아이들에게는 정말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었다. 

어느 날 아이들이 또 말했다. 
'아빠를 믿지는 못 해도, 세상에서 가장 존경해요!'
애들에게서 그 말을 들은 날, 나는 하루 종일 바보처럼 펑펑 울기만 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마음속에 있는 믿음과 신앙을. 아이들에게도 상속해 주셨네요. 
정말 내가 바라던 대로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렇게 큰 은혜임을 오늘에서야 느낍니다...' 

하나님은 사역자들이 맡겨 주신 사명을 감당 할 때 
가정은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책임지신다. 

물질 문제도, 가정과 자녀문제도.. 다 여호와 이레로 예비하시고 책임지신다. 
그리고 또 축복하신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이삭을 바쳤지만 
이삭은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드려졌다. 

그 일로 아브라함에게는 '믿음의 조상' 이라는 복을 주셨지만 
이삭에게는 백배의 수확의 복을 주셨다

우리 아이들도 그랬다. 나는 선교의 사명을 붙잡고 나갔지만 
아이들은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험난한 길을 걸어야만 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아이들에게 정말 많은 복을 주셨고 
앞으로도 주실 것을 확신한다. 


◑맺는말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 같이, 내 길을 너희 길보다 높고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 사55:8~9 현대인의 성경 

이 세상 그 어떤 일보다 가장 중요한 일은, 사람을 준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더욱더 그러하다. 
하나님은 크고 귀한 사역일수록, 사람부터 미리 준비하신다. 

북한 복음화도 다르지 않다. 북한을 복음화 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도 아니고, 건물도 아니다. 바로 사람이다! 

하나님은 일시적으로 흥분하는 군중을 사용하지 않는다. 
비록 적은 수이지만 준비된 종들을 사용하시어 뜻을 이루신다. 

북한을 영적으로 회복시키는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준비는 
일꾼들을 키우는 것이다. 

다년간의 북한선교 경험에 의하면, 북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장 잘 전할 수 있는 이는.. 북한 사람이다. 

탈북자 한 사람을 변화시켜서, 북한 선교사로 키우는 것은 
정말 크고도 실제적인 북한 선교 방식이다. 

이름 없고 가난한 한 사람의 탈북자에게 
탄탄한 성경적 기초를 쌓게 하고, 
깊은 신학적인 안목을 키워 
삶 속에서 하나님과 깊고 친밀한 관계를 가지도록 하는 데는 
많은 시간, 물질, 인내와 정성, 희생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북한출신 선교사 한 사람은 
남한의 선교사 수 십 명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한다. 
나는 그것을 계속해서 경험했다. 

말씀으로 사람을 키우면 
그렇게 키워진 사람들이 북한으로 가서, 
북한을 살리고 변화시킬 것을 확신한다. 

그래서 나는 이 일을 한다. 앞으로도 변함없이 일할 것이다. 
나의 믿음과 확신은, 책을 읽고 지식으로 습득한 것이 아니다. 

십수년간 북한 선교 사역 속에서, 탈북자 선교사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순교와 헌신과 희생 속에서.. 나는 깊이 체험했다. 
나는 이 일에 내 삶을 걸었고, 생명을 바칠 것이다. 
나뿐 만이 아니라, 많은 선교사들이 탈북자들을 남한으로 데리고 오다가 
생명을 잃고, 중국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평범한 탈북자 사람 한 사람이, 주님께는 그만큼 소중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지나온 시간은, 하나님이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어떻게 변화시켜 
주님의 제자 삼으시는 지를.. 확인해 온 시간이었다.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 가운데 세워진 탈북자 출신 선교사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북한의 영혼들을 구원하시려는 뜻을 
신실하고 아름답게 오늘도 이루어 가고 계신다. 

모든 찬양과 경배를 주 하나님께 올려드린다. 
'오라 주의 청년들이여! 가자, 북한으로, 그리고 세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