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4장 해석 및 주석 여러 자료 스크랩
<개요>
블레셋과 전투에서 패하고 법궤 뺏기다 (4:1-11)
엘리의 죽음 (4:12-18)
비느하스 아내의 죽음 (4:19-22)
▲언약궤가 빼앗기다
4:1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 쳤더니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싸운다. 역사적 배경으로 보면 사울이 왕이 될 때 기원전 1050년 정도이다. 사울이 탄생하기 직전이니 대략적으로 기원전 1080 정도일 것이다. 이 시기는 철기 시대가 도래하기 시작한 시기다. 철기시대는 기원전 1200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사사기에서 이스라엘이 철공 기술자가 있었다는 표현을 통해 알 수 있다. 당시 철기는 신문명이나 다름없었다.
'사무엘의 말이 전파되니라' :1
이 말은 사무엘이 하나님의 대언자(선지자)로서 그 권위가 모든 사람들에게 미쳤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사무엘의 선지자 직의 권위를 요약 정리하는 말로서, 곧 3장의 결론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준다.
사무엘과 관련된 이 부분이 첫 마디 말씀은 "그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었다" 는 것인데, 이는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와 아무런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며, 그들이 블레셋과 싸우러 간 것은 사무엘의 어떤 지시에 의해서 간 것임을 보여 주지 않고 있다. 비록 그가 새롭게 등장한 선지자이긴 했어도, 그에게 의논하였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가져다 놓은 것보다 더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그가 아직 젊었기 때문에 그를 무시하였으며, 그를 통해서 신탁을 구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역시 아직 공적인 일에 자신을 개입시키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그의 이름을 그로부터 몇 년 후에야 다시 들을 수 있으며(7:3), 여기서는 다만 "그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었다" 고만 되어 있다 말하자면 온 땅에서 모여드는 신앙심이 돈독한 사람들만이 그를 의지하였으며, 그에게 의논하였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블레셋 사람과 싸우려고'
여기의 '블레셋 사람'(the Philistines)은 본래 해양 생활을 하던 민족으로서, B.C. 13세기 말에 헬라 본토인들의 압력에 의하여 자신들의 본거지 에게 해(海) 지역을 떠나 애굽으로 침입해 들어갔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 애굽 왕 라암세스3세(Ramses)에게 쫓겨 다시 가나안 땅의 지중해 쪽 해안으로 건너와 거기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한편 아모스 9:7은 그들이 갑돌(그레데 섬) 지역에서 왔다고 말하는데, 이는 그들이 B.C. 2000년 경의 아브라함 시대에 성경의 무대에 처음 등장할 때에는(창 20:1,2, 26:1), 그레데 섬에 본거지를 두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아무튼 그 이후 블레셋 족속은 특히 사사 시대에 들어와서는 가나안 땅의 남서쪽을 완전히 장악하여(삿 3:3)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괴롭혀왔다(삿 13:1-16:31). 그런데 당시 이들은 높은 수준의 문명을 소유했었다. 즉 이들은 가나안 지역에서 유일하게 제철 기술을 보유하여(13:19-22, 17:7), 이 기술을 기반으로 잘 무장된 강력한 군대를 갖추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다른 금속에 대한 제련 기술 및 공예 기술도 뛰어났던 것 같다(6:4,5). 그러므로 이들은 이때 강력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이스라엘을 완전히 지배하려고 했는데, 그때마다 이스라엘과 심한 마찰이 빚어진 듯하다. 한편, 엘리 당시에도 이스라엘은 B.C. 1095년 이후 40여년간 계속되는(삿 13:1) 블레셋 족속의 압제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여기의 이 전투는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일으킨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때는 블레셋의 압제를 받기 시작한 지 약 20년이 경과한 B.C. 1075년 경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에벤에셀 곁에 진치고'
여기의 '에벤에셀'(Ebenezer)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 족속과의 싸움에서 두번씩이나 패했던 곳으로(2, 11절),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전사한 곳이며, 또한 법궤를 빼앗긴 곳이다. 오늘날 그 위치는 분명치 않으나, 학자들은 야파(Jaffa) 북동쪽의 '마이델 야바'(Majdel Yaba)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곳 '에벤에셀'은 후일 이스라엘이 블레셋 군대를 쳐부수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돌에다 사무엘이 명명한 '미스바'와 '센' 사이의 '에벤에셀'(7:12)과는 다른 곳인 것 같다.
'블레셋 사람은 아벡에 진 쳤더니'
여기서 '아벡'(Aphek)은 이스라엘이 진 쳤던 에벤에셀 서쪽 약 3.2km 지점인 아르곤 강의 근원지 근처로서, 샤론 평야의 한 지점이었다(29:1). 그런데 이곳은 원래 가나안 족속들의 아성(牙城)이었다는 사실에서 볼 때, 블레셋 족속들이 당시 팔레스틴 지역에서 얼마나 맹위를 떨치고 있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블레셋 족속들이 이곳에 진(陣)을 친 이유는 자신들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군사적 행동을 취한 이스라엘에 보복하기 위함이었다.
4:2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전열을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 명 가량이라
아벡은 현재 이즈벳 짜르타 (Izbet Zartah)로 추측된다. 많은 발굴이 이루어졌다. 촌이지만 군사적 요충지다. 블레셋은 철기 문명이고, 이스라엘은 대부분 청동 무기였다. 그것도 극히 일부만. 블레셋이 대승하여 이스라엘은 사천 명이 전사한다.
4:3 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전쟁에서 패하고 장로들이 모인다. 아직까지 사사 체제이므로 장로들이 군사 대장 노릇을 한다. 그들은 여호와의 궤를 가지고 전쟁에 나가자고 한다. 놀라운 발상이다. '이용당하는 하나님'이 적절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이용하기로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용당하지 않으신다.
‘어찌하여’
다신(多神)을 숭배하는 근동 지방의 사람들에게 불운이 닥치면, 그들은 보통 자신들의 신이 분노했으므로 앞으로 더 큰 고통을 피하려면 더 많은 정성으로 신의 노여움을 달래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당시의 이스라엘의 낮은 영적 수준을 고려할 때, 그들도 여호와에 대해 거의 같은 태도를 가진 사실이 그리 놀랄 만한 것은 아니다.
하늘로부터 온 어떤 조언도 없이, 방백들은 결코 전에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제안하였고 백성들은 이에 동조했다. 그들은 성소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져 있었고, 만일 언약궤가 그들 수중에 있다면, 승리는 틀림없이 그들의 것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이 고귀한 상징물은 천 보자기로 싸여 있었고, 수종하는 레위인들이 휘장 안에 있는 보관장소에서 궤를 꺼내 왔다(민 4:5, 6). 그들이 경외를 표하는 그 모든 절차는 잊은 채 더 이상의 살육을 피하려는 희망으로 싸움터까지 몇 킬로미터를 황급히 왔으리라는 사실이 엘리 아들들의 과거 행적에 비춰 볼 때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원래 법궤는 대제사장이 1년에 1차씩 들어가는 곳이 아닌가!)
그들은 그들의 괴로움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시인하였다(이것만은 그들도 바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우리를 패하게 하신 이는 여호와시다" 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대신 이에 대해 항의하였으며, 하나님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노여움을 표시하였고, 그들이 하나님을 노엽게 한 진실한 까닭을 알아보고자 하지 않았다. "어찌하여 우리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앞에 패하였는가?" 라는 말은 진정한 까닭을 알아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께 대해 그 처사가 온당치 못하다고 불평을 토로하고자 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도 마음으로 는 여호와를 원망한다" (잠 19:3). 그리고 잘못이 하나님께 있다고 불평한다.
4:4 이에 백성이 실로에 사람을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에 있었더라
만군의 여호와는, 모든 군사의 여호와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군대다.
4:5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하나님의 언약궤(4절)가 이곳에서 여호와의 언약궤로 수정된다. 여호와는 오직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이름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고 온 이스라엘이 외친다. 여호수아 6:5의 외침과 동일한 히브리어다. 이들은 지금은 여리고 때처럼 여호와께서 싸워주실 것을 확신한다. 착각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궤에 대해 엄청나게 잘못 생각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그들의 진영에 가져오기만 하면, 그 궤가 "그들을 그들의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여 주실 것이며", 그들에게 승리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궤가 행진을 시작하여 떠날 때에 모세가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라고 한 바가있다(민 10:35).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움직여도 좋다는 허락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지 못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주할 때 그의 궤를 그가 지시하는 곳에 두라고 그의 율법에서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시하였다(신 12:5, 11).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궤가 있는 곳으로 와야지, 하나님의 궤를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가져가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또 그들이 그것을 소유하여도 좋다는 정당한 법적 근거가 없으며 또 그것을 있는 곳으로부터 옮겨도 좋다는 허락이 없는데 이를 마음대로 옮긴다고 해서 어떤 혜택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의 행동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를 욕되게 할 뿐이다.
하나님의 궤가 도착했을 때 이스라엘 진영에는 큰 기쁨이 터져 나왔다. (5절).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렸다." 그들은 이제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도 치르기 전에 승전가를 높이 불렀다. 그들은 이처럼 함성을 지름으로서 그들 자신들에게는 생기를 북돋아 주고, 대적들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에 승리는 확실한 것이라고 보았을 것이다.
4:6 블레셋 사람이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이르되 히브리 진영에서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찌 됨이냐 하다가 여호와의 궤가 진영에 들어온 줄을 깨달은지라
블레셋 사람들이 듣는다. 이들도 여리고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4:7 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이르되 신이 진영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 이르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날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블레셋 사람들이 두려워 한다. 그들은 낙담하며 '우리에게 화로다' 말한다. :8
‘신이…이르렀도다’
4:8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우리에게 화로다'를 다시 언급한다. 그만큼 그들은 두렵다. 그들은 여호와를 '이 능한 신들의 손'으로 표현이다. 복수 형태로 이야기한다. 그들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였는가를 들어 안다. 그때는 당시로부터 350년 전의 일이다.
'이 능한 신들'
“능한”에 해당하는 단어는 “위엄 있는”을 뜻하는 앗디림(’addirim)으로, 하나님이 전에 여러 나라와 민족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블레셋인들이 듣고 깨닫게 된 하나님의 고귀한 능력에 대한 추가적인 생각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들은 거의 자포자기 상태에서, 지난 수 년간 자신들에게 종노릇했던 자들에게 다시 종노릇하게 되는 운명을 죽기까지 저항하자는 비장한 결의로 분발했다
4:9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 같이 되지 말고 대장부 같이 되어 싸우라 하고
하지만 블레셋 사람을 도망가지 않고 힘을 내기로 한다. 왜 그들은 도망가지 않았을까?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징벌하신다.
4:10 블레셋 사람들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 명이었으며
각기 장막은 자기이 집이다. 이스라엘이 삼만 명이 죽었다. 참혹한 전쟁이다. 완전히 패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하지 않았다. 아니 함께 했다.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라 명백한 임재다. 패역한 이스라엘을 징벌하시는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하나님은 누구처럼 자기 자식이 죄짓는다고 봐주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의 공평하시다.
4:11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결국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었다. 예언이 성취된다.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이 사건에 대해 말하면서 시편 기자는 “[그가] 실로의 성막…을 떠나시고 그 능력된 자를 포로에 붙이시며 자기 영광을 대적의 손에 붙이시고…저희 제사장들은 칼에 엎드러지고”(시 78:60~64)라고 기록했다. 승리에 대한 이스라엘의 기대가 그들의 대적의 기대보다 더 컸고 이길 것이라고 확신하며 싸움에 나갔지만, 그들은 철저히 패해서 생존자 모두는 3절에서처럼 진이 아니라 “각기 장막으로” 도망쳤다.
이 비극을 시편 기자는 78편 61,64절에서 이렇게 노래하였다. "그 능력을 포로에게 붙이시며, 자기 영광을 대적의 손에 붙이시고, 저희 제사장들은 칼에 엎드러지도다."
▲엘리가 죽다
4:12 당일에 어떤 베냐민 사람이 진영에서 달려나와 자기의 옷을 찢고 자기의 머리에 티끌을 덮어쓰고 실로에 이르니라
실로는 에브라임 산지에 있다. 베냐민 사람이 와서 보고 한다. 옷을 찢고 머리에 티끌을 날리는 행위는 비참과 슬픔의 표식이다.
4:13 그가 이를 때는 엘리가 길 옆 자기의 의자에 앉아 기다리며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떨릴 즈음이라 그 사람이 성읍에 들어오며 알리매 온 성읍이 부르짖는지라
엘리가 자기 의자에 앉아 소식을 기다린다. 보고자가 실로로 들어오며 패전 소식을 전해오자 성읍이 울부짖는다. 엘리도 들었을 것이다. 엘리는 여호와의 궤가 밖에 신경을 곤두 세우고 있었다.
4:14 엘리가 그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이르되 이 떠드는 소리는 어찌 됨이냐 그 사람이 빨리 가서 엘리에게 말하니
백성들의 울부짖음이 엘리에게 들린다.
4:15 그 때에 엘리의 나이가 구십팔 세라 그의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눈이 멀었다. 이삭도 그랬다. 눈이 어두우면 잘못된 판단을 한다. 엘리의 나이가 무려 구십팔 세다.
「70인역」에는 “구십”이라고 되어 있다(참조 2:22 주석).
4:16 그 사람이 엘리에게 말하되 나는 진중에서 나온 자라 내가 오늘 진중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엘리가 이르되 내 아들아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
4:17 소식을 전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였고 백성 중에는 큰 살륙이 있었고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
그는 거짓 없이 있는 그대로 말한다. 심지어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죽음까지, 거기에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음을 보고하다.
'이스라엘이…도망하였고'
하나님의 얼굴을 찾고자 한 지도자가 몇 명만 더 있었더라도 이스라엘의 역사가 얼마나 달라졌을까.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므로 패배의 길을 열었던 이기적인 지도자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은 당신의 얼굴을 신실히 찾는 개인의 부르짖음에 귀를 닫지 않는다.
느부갓네살에 의해 예루살렘 거민이 포로로 잡혀갔을지라도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자신들을 포로로 잡은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할 만큼 여호와와 가까이 살았다. 빛은 가장 어두운 밤에 가장 밝게 비치며, 최고의 품성은 종종 최악의 환경 가운데 계발된다. 하나님은 비참한 굴욕의 순간들을 영광스러운 기회의 시간으로 바꾸는 능력을 가졌는데, 이것은 비단 이스라엘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도 가능한 일이다.
4:18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사십 년이었더라
엘리는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의자에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는다. 그가 사사된 지 40년 된 때다. 사울, 다윗, 솔로몬은 모두 40년 동안 통치한다. 40년은 구약에서 광야의 시간이자 준비의 시간이다.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렸다" (3:11). 그들의 가슴은 무서움에 떨었고, 그들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온 성이 부르짖었다" (13절). 이것이 온 이스라엘에 대해서도 침통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서는 더욱 실로의 멸망과 쇠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궤가 그 후 얼마되지 않아서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아오기는 하였지마는, 다시는 결코 실로에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처음 사랑을 버렸기" 때문에 그들의 촛대가 그들에게서 옮겨졌으며, 그 성읍은 점차 쇠잔해져서 자취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다.
하나님은 "실로의 성막을 떠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그들에게서 떠나 가시게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궤를 그들 속에 간직함으로 340년간 축복을 누려왔던 에브라임 지파는 그 영광을 상실하였다(시 78:60, 67). 그리고 그후에 그 영광은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 산" 으로 옮겨졌다(68절). 이는 실 로 사람들이 "그들의 은혜의 날" 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실로를 버렸던 일을 오랜 후에 예루살렘에 대한 경고로 이용된 일이 있다(렘 7:12).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실로게 가서, 내가 어떻게 행하는가를 보라." 그러한 까닭에 실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다는 말을 듣고 부르짖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법궤가 빼앗겼다는 것은, 법궤의 관리 책임자인 대제사장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다.
더 이상 관리 책임자가 필요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엘리는 두 아들과 함께 한 날에 다 죽고 만 것이다.
▲비느하스의 아내가 죽다
4:19 그의 며느리인 비느하스의 아내가 임신하여 해산 때가 가까웠더니 하나님의 궤를 빼앗긴 것과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은 소식을 듣고 갑자기 아파서 몸을 구푸려 해산하고
엘리의 며느리 즉 비느하스의 아내 가 임신하여 해산 때가 되어 소식을 듣는다.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음과 시아버지, 남편의 죽음을 듣고 갑자기 해산한다.
4:20 죽어갈 때에 곁에 서 있던 여인들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아들을 낳았다 하되 그가 대답하지도 아니하며 관념하지도 아니하고
결국 그녀도 사망한다.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에도 넋이 나가 아무 대답도 못한다.
4:21 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기 때문이며
죽으면서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났다' 말한다. 아기 이름을 이가봇이라 짓는다. 이가봇은 '영광이 어디에 있는가?'이다. 그녀는 여호와의 궤가 떠남으로 여호와의 영광이 떠났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분명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궤에 갇히지도 제한되지도 않는다.
4:22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며느리의 말을 반복한다.
하나님을 부릴 수, 이용할 수 있다는 착각이 얼마나 위험한다. 하나님 영광 받으실 분이지 이용당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부재로 패한 것이 아니라 불의하기 때문에 패한 것이다. 하나님을 직면할 때 사람들은 공포에 떨 것이다. 그것은 이방인이든 이스라엘이든 상관 없다.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고 그녀는 말했다(22절).
그녀는 자기가 속한 자기 가족의 멸족보다도 하나님의 궤가 빼앗기게 됨으로써 당하는 이스라엘 온 민족의 침울한 운명을 더욱 안타깝게 한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슬픔이 그녀를 죽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