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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4장 언약궤를 빼앗기고 이가봇이 되다

LNCK 2023. 2. 17. 21:08


◈언약궤를 빼앗기고 이가봇이 되다        삼상4장        설교녹취, 정리

♣관련설교 임마누엘이 이가봇보다 강력합니다 / 젠센 프랭클린 (추천)

블레셋은 철기를 가진 다섯 방백의 연합국가 입니다.
영적으로는 강력한 '육신'을 상징합니다. 

우리 육신이 오감을 가진 것에 비유되죠.  *5방백에 비유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느끼고, 맛보고...

이런 감각이 얼마나 블레셋처럼 강한지
이것이 연합해서, 5감각이 연합해서
우리를 얼마나 유혹하는지 몰라요.

그것이 마치 철기를 가진 블레셋처럼
너무너무 강력하고

그래서 삼손도 넘어뜨렸던 민족, 
그러나 결국 하나님이 세우신 왕 다윗에 의해서만 정복되는 민족,
블레셋은 바로 우리 속에 남아있는 육체를 상징하죠.

 

(그렇지만 본문은 상징적으로만 보는 것은 아니고, 이것은 해석의 한 방편이죠.

또한 역사적으로도 해석 가능하고, 또 그렇게 해야 됩니다)

◑문제 제기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삼상4:1

하나님의 말씀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었는데,
육체를 상징하는 블레셋에 대패했습니다. 
'그 날에 3만 4천명이 죽었다'고 했어요.   :2, :10

그리고 언약궤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 당했어요.
아울러 엘리까지, 제사장 집안이 몰락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면   *4:1
그들을 지켜주고, 보호해주고,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 줘야 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된 후에
4:2절 이하에 보면,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당시 백성의 최고 지도자였던 엘리 집안은 몰락해 버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왜 그랬던 것일까요?
우리는 질문해봐야 되겠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요 생명이며
주님의 통치 가운데 축복, 은혜, 승리를 가져다주지만
형식적 이스라엘에게 그 축복이 임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가라지 신자들에게는, 그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거죠.

하나님의 말씀에 개인적, 인격적으로 반응하고, 교제하는
알곡 성도들에게만.. 그 은총과 축복이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1. 말씀은 교만한 자에게 역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십자가, 보혈의 피가 역사하면
어떠한 죄를 지은 자라 할지라도
그의 삶에 구원과 영생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누군가에게 역사하면
그 사람안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능력과 생명으로 가득한 이 하나님의 말씀,
그런데 왜 본문 삼상4장에서는 그런 승리와 은총이 일어나지 않은 것입니까?

왜냐면 그들이 교만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씀의 은총은, 교만한 자들에게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거죠.

본문의 이스라엘은 하나님 위에 서 있었습니다.

1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2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 쳤더니'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가장 어두운 시기를 보여주는 사사기의 첫 전쟁에도
저렇게 하지는 않습니다. 

2절에 지금 주어가 누구에요?
'이스라엘은' .. 이스라엘이 주어입니다.

사사기의 전쟁에도 보면
'하나님, 싸울까요, 말까요?'를 먼저 물어봐요. 
그 다음에는 '그러면 누가 먼저 올라갈까요?' 하고 물어봐요. 

그래서 누가 먼저 결정을 합니까? 누가 먼저 앞장 서 있습니까? 
하나님이 앞장 서 있어요. 

그런데 블레셋과의 전쟁을 치르는데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어떠한 교제도 없이, 하나님의 명령도 없이 
이스라엘이 스스로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웠다... 라고 말씀합니다.

블레셋과 싸우는 일은 선한 일이죠.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들과 싸우는 것이니 선한 일이지만 
그러나 그들 스스로 결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삶의 중요한 순간에, 하나님 위에 서서 
자기 스스로 그것을 결정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더 가관은 3절입니다.
3 '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1차 전투에서 이스라엘 군사 4천명이 죽었습니다. :2
패배했단 말입니다. 
그랬더니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3

이걸 지금 누구한테 물어야 돼요? 하나님께 물어야 돼요. 
'왜 패배하게 하셨습니까?' 라고 하나님께 여쭤봤어야 돼요. 

근데 그들이 지금 자기들끼리 회의를 하면서 
자기가 묻고 자기가 답하고 있습니다. 이게 교만인 거죠.

그래서 정말 엉뚱한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3

그래서 전쟁을 시작할 때도 자기 스스로 결정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지고 오는 것을 결정할 때에도 
그들 스스로  결정해서 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이죠.


그리고 또 교만의 특징은 무엇이냐면 
하나님 위에 있기도 하지만, 하나님 앞에 있는 것도 교만입니다. 

아마 그들이 왜 언약궤를 가지고 오자고 했을까요? 
아마 과거를 추억했을 거예요. 
요단강을 가를 때, 언약궤가 앞장 섰거든요.

그리고 가장 강력한 성이었던 여리고 성을, 언약궤가 돌았어요. 
그러니까 언약궤를 가지고 와서 앞장세우면 승리할 것이다.. 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언약궤는 하나님을 상징하니까요. 
문제는 무엇입니까? 

언약궤와 함께 하는 것은 옳은 일이에요. 
그러나 수3:3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언약궤를 앞장 세우고, 그 뒤를 따르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언약궤가 일어나거든 너희도 일어나라,
언약궤가 가거든 너희도 따라가라..'
즉 언약궤가 백성을 앞장 서서 이끌고 있어요. 

근데 지금 삼상 4장의 형국은 어떻습니까? 
지금은 백성들이 언약궤를 끌어당기고 있는 거에요. 
자기들이 언약궤 앞에 서 있는 거에요. 

오늘날 우리들도 그렇게들 하죠. 성경 말씀을 읽지만
내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말씀을 아전인수 겪으로 끌어옵니다...

그들이, 하나님 말씀 앞에 서서, 하나님을 끌어당기고 있는 형국이 되었다 
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왜 하나님께서 블레셋과 싸우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와주시지 않았는가? 

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 축복을 가져다 주고, 
승리를 가져다주는 말씀(언약궤)이 왜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는가? 

그것은 바로 그들이 교만하여 
하나님 위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고 
사람이 영과 혼과 관절과 및 골수를 찔러 쪼개면서' 사람을 바꿉니다. 히4:12

사람 속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환경도 바꾸고요.
그 사람의 가정도 바꾸고요. 그 교회도 바꾸고, 그 지역도 바꾸고, 
나라 전체를 바꿉니다. 

그런데 법궤를 모셔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라는 것은 
그 능력의 유효기간이 지나서, 능력이 상실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안에 교만함 때문이었다.. 라고 말하고 있으면서 

'교만한 자에게 말씀은 역사하지 않는다' 라고 말해주고 있어요. 

◑2. 말씀은 인격적 관계를 맺지 않은 자에게는 역사하지 않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 자신을 상징하고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고요. 
그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해요. 

그러니까 구약시대에 언약궤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여기에 임재해 계신다는 것이고 
하나님이 여기서 말씀하신다.. 는 것을 의미하죠.

4 '이에 백성이 실로에 사람을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에 있었더라'

홉니와 비느하스가 언약궤와 함께 있었어요.
자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그들은 전투에서 죽어버리고 말죠.

언약궤가 그 두 사람을 보호해주시지도, 도와주시지도 않았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의 육신은 언약궤와 함께 있는 듯했으나, 
영적으로는, 또한 인격적으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던 자였다.. 라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는 자는 
위기 때만 하나님을 찾는 자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는 자가.. 인격적 관계를 맺고 있는 거예요. 

 

지금 홈니와 비느하스는 자기의 일상속에는 
한번도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있지도 않았어요. 
건성으로, 형식적으로 제사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는 거죠.

그런데 희한하게 전쟁의 위기가 찾아오니까 어떻게 합니까? 
그제야 비로소 가장 가까이.. 언약궤 옆에 서 있었어요. 
언약궤 옆에 바짝 달라붙어서, 위기가 온 그때에 
그 위기 때에 그 언약궤와 함께 하고 있었어요. 

사무엘은 어땠다고 말씀합니까?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3:3

사무엘은 언제나 하나님과 일상 속에서 함께 동행하고 있었어요. 
밤에 자는 시간까지도 말입니다.

근데 홉니와 비느하스는, 언약궤 옆에 항상 있으니까 
사람들은 '와 저들은 하나님 말씀에 가장 가까이 있네!' 라고 보였을지 모르지만 
일상 속에서는 한번도 말씀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며 교제하지 않았던 거죠. 

 

그러다가 인생에 위기가 찾아왔을 때, 자기가 필요할 때에야 
그제야 비로소 하나님의 언약궤에 딱 붙어가지고 있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더라..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이들이 하나님을 이용해 먹고 있는 거예요. 
감히 하나님 앞에 서서 언약궤를 끌어와서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예요? 
자신들의 패배를 돌이키고자 하고, 
자신들의 실패와 아픔을 제거하려고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어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아니다.. 라는 것은 
일시적으로, 자기의 필요에 따라서 위기 때에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과 하나님을 자기 목적대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이 언약궤 옆에 있는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해서도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갈급해서도 아니에요. 

그저 지금 이 위기를 어떻게든 극복해보려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랬더니 언약궤가 옆에 있어도 
홉니와 비느하스에게는,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7:21~2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들은 예수님을 '주여, 주여' 하고 두번 부렀어요. 
히브리인들에게는 두 번 반복해서 말하면, 강조법이예요. 
그러니까 '주여, 주여!' 한 것은 친근감의 표현이에요. 
그들은 '내가 주님을 잘 안다' 라고 말하는 거죠. 

근데 마지막 날에, 주님은 그들을 모른데요. 왜요?
그들은 늘 자신의 위기 때나, 자신이 필요할 때만 주님을 찾았었고 
주님을 이용해 먹기 위해서만 주님을 찾았었고,

그러니 일상 속에서는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가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주님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라고 말씀하셨죠. 

그러면서 또 그들이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했고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했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았다'는 거예요. 

이걸 보면서 '아~ 그들도 역사가 나타났네?' 
근데 무서운 건 뭐죠? 

그를 통해서 귀신이 쫓겨나가기도 하고 
그를 통해서 누군가는 복음을 듣고 회심하기도 하고 
그들의 권능을 보면서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도 했는데 
그런데 정작 그들 자신에게는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라는 거죠. 

가룟 유다가 복음을 전파했을 때도 
누군가는 가룟유다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왔을 겁니다. 
가룟유다를 통해서 기적이 일어날 때 
어떤 사람은 병 고침을 받기도 했을 것입니다

어떤 목회자의 설교를 듣고서, 어떤 사람을 회심을 하고, 
어떤 목회자의 설교를 듣고서, 어떤 사람은 더 성숙하고 성장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인생이 돼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아름다운 찬양 인도때문에 
그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을 높였어요. 

그런데 그가 설교자, 찬양인도자가 
인격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면 

그 자신은 혹시 자신이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다고 착각할런지 모르지만,
마지막 날에 홉니와 비느하스가 깨달았던 것처럼 

그리고 '주여 주여!' 하던 이 사람들이 마지막 날에 깨달았던 것처럼 
주님은 그 설교자, 찬양인도자를 '나는 너를 모른다!' 라고 하실 것입니다.

누가 복음을 전해서 수 백, 수 천 명의 사람은 회심하고 돌아왔는데 
그 복음을 전했던 자기에게는 회심의 역사가, 중생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고...

자신의 인도하는 찬양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고, 주님을 높이게 되었는데 
그는 하나님이 '나는 너를 모른다!' 하실 수 있다는 거죠.

말씀은 (언약궤는) 인격적 관계를 맺지 않은 자에게는 역사 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있어요. 
근데 그 사람들에게 왜 아무 일도 안 일어날까요?

말씀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자기 일상 속에서, 자기 삶 속에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 말씀은, 돌이킴이 없는 자에게는 역사하지 않습니다. 

30년 40년 50년을 말씀앞에 서 있고, 말씀을 들었다 할지라도 
그가 마음으로 돌이키지 않으면 
그 능력의 말씀, 그 생명의 말씀, 그 축복의 말씀, 
그 우리를 지켜 주시는 보호의 말씀, 그 말씀이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게 남의 얘기니까 그렇지 
20~22절을 한번 꼼꼼히 읽어 보십시오. 

이가봇 이라는 한 인생을, 정말 우리 옆에 누구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고,
즉 이씨 성에, 가봇 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시고, 읽어보십시오.

'(비느하스의 아내가) 죽어갈 때에 곁에 서 있던 여인들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아들을 낳았다 하되 그가 대답하지도 아니하며 관념하지도 아니하고
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기 때문이며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이가봇이 하필 이 날에 태어났어요.
이가봇은 자기 생일이 돌아올 때마다 뭐가 생각날까요?

자기가 태어나던 날,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었던 명문 가문이
대제사장이었던 자기 할아버지가 그날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자기의 아버지, 큰 아버지도 이날 돌아가셨어요. 
자기를 낳아주신 어머니도 이날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동족 삼만 사천명이 죽었어요. 
그리고 그 날에 언약궤도 빼앗겼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하나님의 영광이 없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 하고 부르고 있어요. 
너무 가혹하지 않습니까!

▲어쨌든 이가봇도 제사장입니다. 왜냐면 직계 아들이니까요.
나중에 엘리의 가문이 일부 회복됩니다. 

왜냐면 비느하스의 아내가, 그 아들을 '이가봇'이라고 이름 지음으로써
겸허하게 자신들의 잘못을 그렇게 대외적으로 시인한 결과 
하나님의 긍휼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죠.

그 결과, 엘리와 비느하스 시대는.. 하나님의 치심을 받았지만,
그 후손의 시대는
엘리→ 비느하스 →아히둡 → 아히멜렉 →아비아달까지
제사장의 직분을 계속 감당했습니다.  

즉 다윗 시대까지, 제사장으로, 그 가문이 계속 쓰임받았던 것입니다.
다윗이 야인 생활을 할 때, 아비아달이 측근처럼 제사장 역할을 감당했죠.

그러다가 후에 제사장 아비아달이
솔로몬 편에 가담하지 않고,
아도니야 편에 가담하게 됩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아비아달을 낙향시키고
대신에 사독을 제사장에 앉히게 된다. 

'아비아달을 쫓아내어 여호와의 제사장 직분을 파면하니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엘리의 집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함이더라' 왕상2:27

요지는, 
비느하스의 아내가 ‘이가봇’이라고 믿음으로 고백하니까
자기 가문의 죄를 겸허히 시인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니까

‘이가봇’은 막내라서 크게 쓰임을 받지 못했지만,
비느하스의 장자 (이가봇의 형) 아히둡으로부터 시작해서
아히멜렉, 아비아달까지.. 그 제사장 직분이 3대로 계속 내려갔습니다.

비록 솔로몬 왕 때, 제사장 직이
아비아달로서 끝나고.. 대신에 사독 계보가 시작되는데

(비느하스 대로 끝나지 않고) 저주 받은 비느하스 이후 3대째까지라도, 
계속 제사장 계보가 내려갈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비느하스의 아내’의 믿음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결국은 사무엘의 예언이 응하였죠. 왕상2:27

▲다시 설교의 원래 흐름으로 돌아가서
왜 엘리와 그 아들 세대는, 그렇게 하나님이
보호 해주지 아니하셨는가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도, 돌이키지 않았기 때문이죠. 
하나님이 거듭 말씀 하셨는데도, 돌이키지 않았기 때문이죠. 

1) 먼저 엘리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들었어요.  2:23
'네 자식들이 지금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하고 동침을 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기름도 드리기 전에 
하나님이 받으시기도 전에 먼저 기름(좋은 부위)을 챙겨가고 제 멋대로 하더라'

그런데도 엘리는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보다 아들을 더 사랑하여, 고치지 않았습니다.

2)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이름도 나오지 않는 "무명의 하나님의 사람"을 엘리에게 보내셨어요.
 그리고 저주의 말씀을 쏟아 부으셨습니다. 
'네가 어찌 나보다 더 자식을 더 사랑하여서 그렇게 하였느냐?'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 엘리에게 말해줬어요. 2:27~36
그런데도 고치지 않았어요. 

3)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말씀에 선포자(선지자)가 되는 
"사무엘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경고의 말씀을 해 주셨어요. 
'너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삼상3장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특별히 큰 재난을 보내시기 전에는 
수많은 전조 현상들을 먼저 보내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특별히 저주를 내리시기 전에, 징계를 하시기 전에는 
명확하게 들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미리 경고하십니다. 

-목사의 입을 통해서 
-성도들의 입을 통해서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를 통해서 
-혹은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나에 대하여 경고의 말씀을 들려주세요. 
부인할 수 없도록,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 정확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그런데 신자들은 어떻게 합니까?
엘리처럼 돌이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왜 엘리 집안을 이렇게 폭망하게 하시는 겁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거듭 말씀 하셨고, 명확하게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돌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말씀을 듣고 돌이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가 사랑하던 것, 거기에서 결코 돌이키지 않았다는 것을 봅니다. 

본문에 엘리가 죽은 장면을 보면서, 참으로 안타깝고 비참한 것은 
엘리가 죽은 이유를, 사무엘이 4:18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사십 년이었더라' :18

법궤가 빼앗겼다는 것은, 
법궤의 관리 책임자인 대제사장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관리 책임자가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는 두 아들과 함께, 한 날에 다 죽고 만 것입니다.

사무엘을 통해서 하신 예언이, 그 날에 그대로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말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 날에 그에게 다 이루리라' 3:11~12

결국 사명자가, 자기 사명을 감당 못하면
하나님은 몇 번의 돌이킬 기회를 주시다가
결국 데려가 버리신다는 거죠. 살아봐야 자기 사명도 감당 못 하니까요.

▲지도자는 방향을 제시해 주는 사명이 있습니다. (이 단락 펀글)
‘한국교회에는 어른이 없다, 지도자가 없다’는 얘기가 솔솔 들립니다.
영 맞는 말은 아니지만, 영 틀린 말도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그런 말이 회자되는 것은, 비판보다는 안타까움인데
‘방향을 제시해줄 만한 어른은 없다’는 것이지요.

일례로, 모 기업의 이병철 회장은
모든 임직원이 결사 반대하고, 뜯어말렸는데도 불구하고
앞으로 우리 기업, 우리나라의 먹거리는 ‘반도체’에 있다고 판단하고
과감한 투자를 한 것이... 두고두고 역사의 화제가 되는 선견지명이었습니다.

또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때도, 
반대파 사람들이 공사현장 도로에 드러눕는 퍼포먼스를 하면서 반대를 했지만
결국에는 나라의 대동맥을 살린, 현명한 판단으로 결판났고

거기엔 당시 방독했을 때, 독일 에르하르트 수상의 조언이 있었다고 합니다.
고속도로 건설 말고도, 정유, 제철공장 등을 그 수상이 조언했다고 합니다.

에르하르트 수상의 조언을 그대로 받아들인 제3공화국은, 대박을 터트렸죠.
당시 독일이 분단국가 였고, 그래서 분단국가였던 한국과 
남다른 교감이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광부와 간호사도 지원했지만요.

지금 물질적인 면에서 ‘지도자의 혜안, 지도자의 비전’의 예를 들었지만,
영적인 측면, 신앙적인 측면에서도 
지도자의 올바른 방향 제시는..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신의 한 수’가
되겠습니다. 

흔히 말하길 모세와 여호수아는 스타일이 완전 다른 지도자라 하지 않습니까.
출애굽 시대에는 모세 스타일의 지도자가 필요했다면 (율법 제정, 문인)
가나안 정복시대에는 여호수아 같은 지도자가 요구되었죠. (장군, 무인)

그러다가 사무엘상 시대, 왕국 초기에는
이제 시내산에서 제정받은 율법을 잘 가르치는 '사무엘 스타일'의 
말씀의 종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엘리 가문이 그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하니까.. 그게 사무엘에게로
촛대가 넘어가버린 것이죠.

실제로 사무엘은, 말씀을 가르치는 종이었습니다.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삼상12:23

'(말씀에)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삼상15:22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23 

그리고 룻기와 사무엘상을 사무엘이 썼다고 할 정도로,
'말씀'에 대해서 관심이 깊었고
모세 선지자 이후, 하나님의 말씀을 본격적으로 가르친 '말씀의 사명자'였죠.


정리하면, 본문 삼상4장의 충격과 교훈은
1절에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해 놓고
2절에서 끝절까지는 비극적인 결과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법궤까지 블레셋에 빼앗기고 마는, 당시 역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거죠.

교훈이 뭐죠?
돌이킴이 없는 자에게는 말씀이 역사하지 않더라..는 것이죠.
말씀(언약궤)이 그저 액세서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치 두 사람이 함께 맷돌 갈다가
한 사람은 들림 받고, 한 사람은 남는다는 말씀처럼, 
다같이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해도,
그 언약궤로 능력과 보호와 인도를 받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하고 블레셋에 속절없이 패하고 마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블레셋은 상싱적으로 우리 '육신'이라고 할 때,
그저 언약궤와 피상적인 관계를 맺은 사람들은, 
언약궤를 메고 나와도.. 전혀 블레셋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은 '이가봇' 인생으로 끝나버린다는 것이죠.

이스라엘 역사는.. 늘 ‘이가봇’을 반복했습니다. 
엘리 가문에 일어난 비극은, 
엘리 시대에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그 후에도 계속 반복되었죠. 

즉 신앙의 본질/ 내면적 신앙 /인격적 하나님과 관계를 추구하지 않고 
다시 말해서 자기 죄 관리하지 않고, 자기 경건 생활 관심 갖지 않고 

겉으로 교회 생활 꼬박꼬박 하는 것.. 
이거 ‘문화적인 종교생활’이 되기 쉽습니다. 

이게 오래 지속되면.. 결국 ‘이가봇’이 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지독한 만성질환>인가 하면 
그 ‘문화적 종교생활, 외적인/외식적 신앙생활’ 때문에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서 70년이나 연단을 받았습니다. 

70년 후에 귀환해서, 일정 기간 잘 믿는 듯 하더니, 
결국 또 ‘외적인/외식적 신앙’으로 치우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탄생된 것이 ‘유대교, 사두개인, 바리새인’이며, 
그 유대교는 신약시대까지 계속되었고, 
예수님의 신랄한 공격과 책망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