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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6장 해석 및 주석

LNCK 2023. 2. 19. 08:46

HANGL NOCR - 한글 주석

◈삼상6장 해석 및 주석

 

1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있은 지 일곱 달이라

 

'블레셋 사람의 지방' 여기서 '지방'(사데)'', ''을 뜻한다는 점에서(2:5, 왕하 4:39), 그 당시 언약궤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빈 들(field)에 보관되어 왔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언약궤가 들어간 도시마다 여지없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즉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빈들에 보관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려 한 것이다.

 

'일곱 달' 이것은 물론 문자적인 일곱 달(seven months)을 의미한다. 하지만 성경의 숫자 표기상 '일곱'(7)이라는 숫자가 보통 '완전함'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언약궤가 블레셋 사람들에 의하여 대체없이 빈 들에서 너무 오래 방치되어 있었음을 강조한 말로 볼 수도 있다.

 

2 블레셋 사람들이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까 그것을 어떻게 그 있던 곳으로 보낼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치라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잘못 다룸으로써 엄청난 재앙을 만났다고 생각한 나머지, 이제 정치적인 방법(5:8, 10, 11)을 포기하고 종교적인 방식에 의하여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본처로 보낼 것을'

이 말은 법궤를 빼앗기기 이전 법궤가 안치되었던 실로(Shiloh)의 성소가 여전히 본래의 기능을 발휘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발굴된 고고학적 자료에 따르면, 당시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 전투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이스라엘 영토로 쳐들어 갔고, 심지어 그들은 실로의 성소까지도 그때 파괴했던 것같다(7:12, 26:6, Albright). 따라서 여기의 '본처'(本處)는 실로(Shiloh)라는 특정 장소를 뜻하지 않고, 단지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3 그들이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려거든 거저 보내지 말고 그에게 속건제를 드려야 할지니라 그리하면 병도 낫고 그의 손을 너희에게서 옮기지 아니하는 이유도 알리라 하니

 

'궤를...거저 보내지 말고'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 나라 사람들로부터 '. 금 패물과 의복'을 받아 나왔던 사건과 유사하다(출3:21, 11:2). 더욱이 두 사건의 밀접한 유사성(類似性)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로써 명백히 증명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첫째, 본서 6:8과 출애굽기 12:35 모두 언약궤 및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돌려보낼 때 함께 보낼 예물을 언급하면서 공히 '켈리'('물건') 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둘째, 본문에 언급되고 있는 상황이나 출애굽 시의 상황 모두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극심한 징벌을 받은 후에야(5:3-12, 출 7:10-12:30)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언약궤 및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돌려 보내기로 작정하였다.

한편 바로 이같은 사실들은,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 실수로 타인의 소유물이나 사람을 취했을 경우에는 그 실수를 깨달은 직후 잘못 취한 물건이나 사람을 돌려 보내면서 실수에 따른 보상금(補償金)을 지불 하는 풍습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에게 속건제를 드려야 할지니라'

여기서 ''는 물론 여호와 하나님을 뜻한다. 따라서 당시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무언가 잘못을 범하였음을 인정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한편 '속건제'(아솽)는 모세 율법대로 따른다면 하나님의 성물(聖物)이나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죄를 범했을 경우에 그 죄를 속함받기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혹은 예물이다(레 5:14-16). 이때 죄를 범한 자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전에 먼저 피해자에게 피해물 외에 별도로 1/5을 배상금 조로 주어야 했다(레 6: 5, 6). 따라서 모세 율법에서 언급되고 있는 속건제(repayment offering)는 배상(賠償)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견지에서, 여기서 우리는 블레셋 사람들이 모세 율법에서처럼 체계적으로 정리된 '속건제'(贖愆祭)라는 개념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하여 의심치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여기 '아솽'이라는 단어가 '배상'의 뜻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고 볼 때, 블레셋 사람들은 단순히 하나님께 대해 인간적 차원의 배상을 위하여 이와 같은 예물을 생각한 듯하다.

 

'그리하면 병도 낫고'

블레셋 술사(術士)들이 여호와께 예물을 바치려고 했던 첫번째 이유였다. 여기서 '병'은 말한 나위없이 쥐에 의해서 전염되어지는 독종(毒種), 곧 흑사병(pest)의 일종이었다(5:6 주석 참조).

 

'그 손을...옮기지 아니하는 연고도 알리라'

이것은 블레셋 술사들이 여호와께 예물을 바치려고 한 두번째 이유이다. 즉 그들은 예물을 바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가 멈춰진다면, 블레셋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그같은 진노가 내려진 것으로 확실히 깨닫게 될 것이란 점을 언급한 것이다.

 

4 그들이 이르되 무엇으로 그에게 드릴 속건제를 삼을까 하니 이르되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 마리라야 하리니 너희와 너희 통치자에게 내린 재앙이 같음이니라

 

'블레셋 사람의 방백' 당시 블레셋은 다섯 개의 주요 도시 국가 형태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각 도시는 자체의 방백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었다. 5:8 주석 참조.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

여기서 '금독종'(golden tumor)은 여호와의 궤로 인해 블레셋 사람들에게 임한 '종처'(腫處) 또는 '종양'(腫瘍)의 모양을 금으로 만든 것이고,

'금쥐'(golden mice)는 쥐 모양을 금으로 만든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바로 이것들은 블레셋 사람들이 당했던 재앙의 종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징벌에 의하여 '쥐'를 통해서 맹렬히 전염되는 '독종'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였던 것 같다(5:6).

한편 이와 같이 자신들에게 고통을 주었던 것들을 형상(形像)로 만들어 귀하게 여기는 일은,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당한 '불뱀 사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민21: 4-9).

 

따라서 블레셋 제사장들과 복술자들도 그러한 불뱀 사건의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설사 그러한 영향을 받지 아니했다 할지라도 블레셋 술사들의 이러한 처방은 당시 이방 문화의 일반적 관습이었다.

즉 고대 이방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에게 어떤 소망을 빌거나, 혹은 감사의 표시를 할 때 그 내용을 형상화(形象化)하여 바치는 관습이 있었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질병의 치료를 원하는 자가 그 질병이 든 모습을 금이나 은으로 형상화하여 신에게 바치는 경우, 난파선에서 구출된 자가 자신의 옷을 넢툰(Neptune) 신전에 바치는 경우, 해방된 노예가 그 쇠고랑을 신전에 바치는 경우, 승리한 검투사가 자신의 검을 신에게 바치는 경우 등이 있다. 아무튼 이러한 배경하에서 여기 블레셋 술사들이 하나님께 드릴 예물을 자신들의 나라 바깥으로 보내고자한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에게 임할 재앙도 자신들의 나라에서 떠날 것으로 기대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너희와 너희 방백에게 내린 재앙이 일반임이니라'

'금독종'과 '금쥐'를 방백의 수효대로 다섯개씩 만든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즉 여호와의 재앙이 임했을 때 블레셋의 다섯 방백들(5:8)도 일반 백성들처럼 고통을 당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백성들의 대표가 될 수 있었고, 따라서 그 대표의 수효에 따라 금독종과 금쥐 형상을 각파 다섯개씩 만들었던 것이다.

 

5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의 독한 종기의 형상과 땅을 해롭게 하는 쥐의 형상을 만들어 이스라엘 신께 영광을 돌리라 그가 혹 그의 손을 너희와 너희의 신들과 너희 땅에서 가볍게 하실까 하노라

 

'땅을 해롭게 하는 쥐의 형상'

여기서 '땅'은 문자적 의미로 곧 '토지'를 가리킨다고 보기 보다는, 오히려 이것은 블레셋 국가 곧 '블레셋 족속'을 가리킨다고 봄이 좋다. 즉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재앙의 근본 재앙의 직접적 원인이었기 때문에 '땅을 해롭게 하는 쥐'라고 말한 것이다.

 

'이스라엘 신께 영화를 돌리라'

이 말은 여호와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심을 잘 알지 못하여 그분께 범죄했던 자들이, 이제 하나님의 크신 심판의 손길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는 것을 가리킨다(수 7:19, 렘 13:16). 하나님은 이처럼 이방인 가운데에서도 스스로 영광을 회복하신다.

 

'혹' 여기서 '혹'(*, 울라이)은 하나님 보시기에 합한대로 어떤 행동을 하실 수도 또한 안하실 수도 있는 하나님의 주권(主權)을 언급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암 5:15).

 

'그 손을...가볍게 하실까 하노라'

이것은 배상 예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의 진정을 기대하는 블레셋 사람들의 간절한 마음을 보여준다.

 

6 애굽인과 바로가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 것 같이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겠느냐 그가 그들 중에서 재앙을 내린 후에 그들이 백성을 가게 하므로 백성이 떠나지 아니하였느냐

 

'바로가...강퍅케 한 것 같이'

이것은 블레셋의 술사들이 출애굽 시에 하나님께서 출애굽에 대하여 행하신 권능에 대하여 익히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4:8>.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이 당시 주변 국가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던 역사적 대사건이라는 점을 시사한다(출 15:14-16, 수 2:10).

 

7 그러므로 새 수레를 하나 만들고 멍에를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소에 수레를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새 수레를 만들고'

블레셋 제사장들이 이처럼 법궤를 새 수레에 실어 보내고자 한 이유는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고, 그에게 경외심을 보이고자 했기 때문이다(Keil, Fay).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소 둘'

이것 또한 세속적 목적을 위해서 전혀 사용되지 아니한 소를 가리킨다(민 19:2). 모세 율법에서도 정결 의식에 필요한 희생 제물은 이같은 조건에 부응해야 한다고 언급되어 있다(신 21:3).

 

'젖 나는 소 둘'

즉 새끼가 딸린 암소를 가리킨다. 그러면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운반할 짐승으로 이같은 암소를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당시 블레셋 제사장들에게 있어 주된 관심사 중의 하나는 자신들의 족속들에게 내려진 재앙이 어디서 말미암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즉 그들은 그 재앙의 근원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부터인지 아니면 다만 우연인지를 궁금해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관련하여 9절에서 블레셋 제사장들은 재앙의 근원이 하나님인지 아니면 우연인지를 분간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을 세워놓고 있다.

 

8 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속건제로 드릴 금으로 만든 물건들은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고 그것을 보내어 가게하고

 

'금 보물은...궤 곁에 두고'

블레셋 제사장들이 이같이 한 이유는 여호와의 궤로 인하여 블레셋 족속에게 재앙이 생겼을 것으로 생각하여, 그 예물로써 여호와의 꿰를 달래보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9 보고 있다가 만일 궤가 그 본 지역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의 손이 아니요 우연히 당한 것인 줄 알리라 하니라

 

'벧세메스(베트 쉐메쉬)'

'태양의 집'이라는 뜻. 이 지역이 갖고 있는 이러한 의미는 일찍이 이곳이 가나안인들에 의하여 태양신이 숭배되던 곳임을 암시해 준다. 당시 이곳은 예루살렘 서쪽 약 22km지점에 위치하였고, 블레셋 땅으로 연결되는 동서 골짜기에 있었으며, 제사장의 성읍으로 지정된 유다 지파의 땅이었다(수 21:13-16). 한편 블레셋인들이 언약궤를 이곳으로 보내려 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언약궤가 원래 보관되어 있던 실로는 당시 블레셋 족속들에 의하여 심하게 파괴되었고(4:10 주석 참조). (2) 벧세메스는 언약궤로 인해 마지마긍로 재앙을 당한 블레셋 도시 에그론과 제일 가까운 이스라엘의 성읍이며, (3) 벧세메스는 언약궤를 관리할 수 있는 제사장들이 거주하는 곳이기 때문인 듯하다(수 21:16).

 

10 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블레셋 제사장들은 자신들에게 임한 재앙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확실히 규명하기 위하여(9절) 이처럼 어미 암소를 젖먹이 송아지들로부터 격리시켰다.

 

11 여호와의 궤와 및 금 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

 

이스라엘로 돌아가는 수레에는 여호와의 궤 뿐만 아니라 그 궤로 인해 발생된 독종 재앙과 쥐 재앙을 형상화(形象化)한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도 함께 보내졌다(4절). 이것들은 여호와의 궤를 진정시키기 위한 속건 예물용으로서(3절), 상자에 담겨져 여호와의 궤 옆에 놓여졌다(8절).

 

12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암소가...가며...울고'

이와 같은 현상은 이 암소들로부터 새끼를 떼어 놓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것은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들이, 새끼 송아지에게 모성적 본능이 이끌리면서도 하나님의 강권 하시는 손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이같은 사실은 블레셋의 제사장들이 스스로 기준을 세운 바(9절)와 같이, 블레셋에게 임한 재앙이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았음을 명확히보여 준다(7절 주석 참조).

 

'대로로(비메실라 아하트)'

문자적으로는 '단 하나의 큰길로'(along one highway, RSV)의 뜻이다. 결국 이것은 암소들이 가장 빨리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는 지름길로 행했음을 암시해 준다.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여기서 '치우치다'에 해당하는 '수르'는 '빗나가다', '기울다', '떠나가다'란 뜻이다. 따라서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다'란 말은 종종 성경 안에서 철저한 순종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말이다(신 5:32, 17:11, 수1:7). 여기서는 암소들이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정해진 목적지 벧세메스로 곧바로 갔음을 암시한다.

이처럼 (1) 한 번도 멍에를 메어보지 못한 소들이 수레를 이끌고 조용히 앞으로 나아갔다는 점과, (2) 더군다나 젖 빨리는 새끼 송아지들을 둔 상태에서 좌우로 치우침 없이 곧장 갔다는 점은 분명 이 소들이 하나님의 강하신 능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였다는 사실을 충분히 일깨워 준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천상천하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을 당신의 뜻대로 주관하시는 만유의 주인이시다.

 

'블레셋 방백들은...따라가니라'

블레셋 방백들의 이와 같은 행동은 (1) 만약의 돌발 사태에 신속히 대처하며 (2) 재앙의 원인을 직접 확인키 위함이었다.

 

13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 본 것을 기뻐하더니

 

여호와의 법궤를 빼앗긴 일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던 만큼, 법궤의 귀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특히 제사장의 성읍(수 21:13-15)인 벧세메스 사람들에게 있어 다른 무엇보다도 가장 기쁜 소식이었을 것이다.

 

'골짜기'

이는 예루살렘 서남쪽 약 21km지점에서 지중해 쪽의 서북 방향으로 32km가량 이어져 있는 소렉 골짜기이며(삿 16:4), 오늘날의 '와디 에스 사랄'(Wady esSarar)과 동일 지역이다. 한편 삼손의 아내 들릴라가 살았던 딤나(Timnah)는 이 골짜기의 서남쪽 입구에 위치했었다(삿 14:1). 그리고 '벧세메스'(Bethshemesh)는 이 골짜기 남쪽 입구의 동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밀을 베다가' '밀'(wheat)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곡식이었다(왕상 5:11). 그리고 팔레스틴 지역에서 이 '밀' 수확은 보통 5, 6월 경에 이루어진다. 한편 언약궤가 돌아온 때가 마침 밀을 수확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그 오는 장면이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목격될 수 있었다.

 

14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

 

'수레가...여호수아의 밭...이르러 선지라'

수레를 끄는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수레가 이스라엘 땅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까지 와서 딱 멈춰 선 것은 블레셋에 대한 재앙이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내려졌음을 분명히 시사해 준다(9절). 그리고 여기서 '여호수아의 밭'(세데)은 언약궤가 '블레셋 사람의 지방'(세데)에서 이스라엘 땅으로 분명히 옮겨졌음을 강력히 시사하려는 저자의 의도에 따라 언급되었다. 비록 여기의 '여호수아'가 구체적으로 누군지는 알 수 없으나, 가나안 땅 정복의 위대한 지도자인 눈의 아들 여호수(Joshua)와 동일한 이름의 소유자였던 그 사람의 밭에 하나님께서 수레를 멈춰 세우신 데는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다고 볼 수있다.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지성물(至誠物),곧 법궤를 운반했던 수레는 절대로 다른 세속적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없고, 다만 번제를 위한 땔감으로만 사용될 수 있다는 벧세메스 사람들의 공통된 인식에 따라 행해졌을 것이다.

 

'그 소를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번제물은 반드시 수컷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레 1: 3-13>, 여기서 암컷을 번제로 드린 것은 특별히 이 소들은 성물을 운반하여 다시는 세속적 목적으로 사용될 수 없었던 특별한 사정 때문이었다. 아울러 이곳 벧세메스의 희생 제사는 반드시 중앙 성소에서 제사를 드리라는 여호와의 명령(신 12:5-7,11-14)에 심히 위반되는 제사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비록 이 희생 제사가 실로(Shiloh)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행해졌지만 (1) 실로가 완전한 중앙 성소로서 하나님에 의해 지정된 곳이 아닐 뿐 아니라, 당시는 블레셋 족속에 의해 심하게 파괴된 상태였고 (4:10 주석 참조). (2) 또한 무엇보다 그 때에 벧세메스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놓여져 있었으며, (3) 그리고 그 제사가 레위인 제사장들에 의하여 적법한 절차에 따라 집행됐고(15절), (4) 저자도 그 제사를 잘못된 일로 언급치 않고 있다는 점에서 별 문제가 없는 것이다. 한편 벧세메스 사람들은 이와 같은 제사 의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법궤를 다시 돌려 보내주신 데 대하여 감사하였고, 이스라엘의 영광이 다시 돌아오게 되었음을 기뻐하였다<13절>.

 

15 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매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리니라

 

'레위인은' 여기의 이 '레위인'은 벧세메스에 거주하도록 지정된 자들이었다. 그리고 이곳 벧세메스는 여호수아에 의해 아론 자손의 성읍, 곧 제사장의 성읍으로 지정된 지역이었다(수 21:13-15). 따라서 여기 '레위인'은 아론의 후손들로서 곧 제사장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와의 궤와...큰 돌 위에 두매'

이와 같은 궤 운반 행위는 오직 고향 자손 레위인만이 할 수 있었다(민 3:25-4:28). 한편 고핫 자손 레위인(제사장)들인 벧세메스 사람들은 여호와의 궤를 큰 돌 위에 두었는데, 이는 큰 돌 곧 커다란 자연석을 순수하고 깨끗한 것으로 여기는 구약 성경의 가르침에서 볼 때(창 31:45, 출20:25, 신 4:13, 수 4:3 , 왕상 7:9), 그 당시의 상황에서 벧세메스의 레위인들은 언약궤를 수레에서 옮겨놓을 장소로 그곳이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금 보물 담긴 상자'

당시 레위인들은 블레셋 방백들이 함께 보낸 이것을 언약궤가 놓여 있던 '큰 돌' 위에 같이 올려 놓았다. 이와 같이 한 이유는 당시 레위인들이 그 상자를 하나님께 바친다는 의미였다.

 

'다른 제' 이것은 성경에서 주로 '화목제'(和睦祭, peace offering)를 가리키는 말이다(민 7: 17, 23, 10:10 , 수 22:23, 왕상 8:63, 대하 30:22).

 

16 블레셋 다섯 방백이 이것을 보고 그 날에 에그론으로 돌아갔더라

 

블레셋 족속을 대표하는 다섯 방백들은 법궤의 귀환 과정을 빠짐없이 모두 목도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범궤로 인해 파생된 일련의 모든 사건들이 분명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였음을 마음 속 깊이 깨닫고 체험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도시 에그론과 그들의 신 다곤에게로 다시 돌아갔다.

 

17 블레셋 사람이 여호와께 속건제물로 드린 금 독종은 이러하니 아스돗을 위하여 하나요 가사를 위하여 하나요 아스글론을 위하여 하나요 가드를 위하여 하나요 에그론을 위하여 하나이며

 

'아스돗' '진'(陳)이란 뜻으로 가사 북쪽,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블레셋의 주요 교통 관문이다. 신약 시대에는 '아소도'란 명칭으로 불리웠다(행 8:40). 5: 1 주석 참조.

 

'가사' 이곳은 예루살렘 남서쪽 약 80km지점, 지중해 해안으로부터는 약 5km지점, 아스글론으로 부터는 남쪽으로 약 20km지점에 위치했다. 당시 이 도시는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남서쪽으로는 애굽으로, 북쪽으로는 수리아, 메소포타미아로 통하는 군사, 무역용 도로가 이 도시를 관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 도시는 군대 및 대상(隊商)들이 취거나 물을 공급받았던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곳이었다.

 

'아스글론' 이곳은 아스돗과 가사의 중간에 위치한 지중해변의 비옥한 도시이다.

 

'가드' 아스돗 동쪽 약 20km지점에 위치한 블레셋의 주요 도시로, 오늘날 '텔 엘사피'(Tell el-Sahfi)로 추정된다. 5: 8, 수 11:22, 13: 3 주석 참조.

 

'에그론' 지증해 연안에서 동쪽으로 약 14km, 아스돗 북동쪽 약 20km 지점에 위치한 블레셋의 주요 다섯 성읍 중 하나이다. 수 13: 3 주석 참조.

 

18 드린 바 금 쥐들은 견고한 성읍에서부터 시골의 마을에까지 그리고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큰 돌에 이르기까지 다섯 방백들에게 속한 블레셋 사람들의 모든 성읍들의 수대로였더라 그들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오늘까지 있더라

 

'견고한 성읍'

높은 성벽이 둘러쳐 있고 문과 빗장이 있었던 요새화된 성읍을 가리킨다(신 3:5).

 

'시골의 마을'

이것은 '견고한 성읍'과는 반대 개념으로서, 저지대에 위치하였고 성곽을 갖추지 못한 작은 마을을 가리킨다(겔 38:11, 슥 2:4).

 

'그 돌은...오늘까지 있더라' 성경에서 '돌'은 특별히 기억해야 할 가치가 있는 사건들을 세월이 흐른 후에도 생생히 일깨우게 할 증표로서 종종 언급되곤 한다(창 31:52, 수 4: 5, 24:27). 따라서 여기의 '큰 돌' 역시 빼앗겼던 언약궤를 다시 되찾은 기념비적 사건을 후일에 되새기도록 하는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였다. 한편 '오늘까지'는 본서를 기록할 그 당시까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19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고로'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보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범하는 일이기 때문에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민 4:5, 6, 15-20). 그럼에도 불구하고 벧세메스 사람들이 그것의 내부를 들여다 본 것은 사악한 세속적 호기심 때문이었으며, 그 같은 호기심은 결국 하나님을 만홀히 여긴 결과였다(갈 6:7).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 궤를 전리품 취급한 블레셋을 정벌하셨듯이(5:1, 2), 그 궤를 단순히 세속적 구경거리로 삼은 벧세메스 사람들도 엄히 정벌하신 것이다.

 

'(오만)칠십 인을 죽이신지라'

여기서 '오만'이라는 숫자는 필사자의 실수에서 기인한 듯하다. 즉 숫자 표기를 종종 상이한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내는 고대의 숫자 표기 방식에 따라 '칠십명'(쉬베임 이쉬)을 달리 설명하는 과정에서 착오가 생겨 '오만'이라는 말이 삽입된 것 같다. 어쩌면 '아인'(70)을 '눈'(50,000)으로 잘못 보았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후일 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예루살렘의 인구가 최고로 번성했을 때에도 7만에 불과했다는 점에서, 여기의 '오만 칠십 인'은 그냥 '칠십 인'으로 봄이 타당하다. 이런 점에서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도 '칠십 인'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히브리 여러 사본들 에서도 '오만'이란 숫자는 빠져 있다.

 

'백성이 애곡하였더라'

하나님의 징계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벧세메스 사람 '칠십인'은 한 가정의 가장(家長) 등 중요한 위치에 있던 인물들이었을 것이므로, 그 두려운 사건은 각 지역 주민들에게 큰 충격이 되고도 남았다. 그러나 이러한 징계를 통해 모든 사람들은 그 누구도 범할 수 없는 '여호와의 거룩성'을 깊이 깨달아야만 했다.

 

20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르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 하고

 

'누가 능히 서리요'

여기서 '서리요'(아마드)는 원래 '서다', '머물다','시다' 등의 의미이다. 특별히 이 단어는 성경에서 '존경하는 자세로 어떤 특별한 대상 앞에 서있는 것', 곧 '경배' 혹은 '숭배'의 의미로 사용된다(왕상 1:2, 17:1, 18:15, 왕하 3:14, 렘 40:10). 따라서 '누가 능히 서리요'라는 말은 감히 받들어 모실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적 거룩성과 인간의 철저한 부패성을 시인하는 말임에 틀림없다.

 

'그를...뉘게로 가시게 할꼬'

법궤를 경솔히 돌여다 본 범죄의 대가로 하나님께로부터 엄청난 징계를 받은 벧세메스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전과 같은 징계가 또 내려질까 두려워한 나머지 그 궤를 다른 지역으로 보내려 했다. 따라서 이것은 벧세메스 사람들이 자신들이 징계를 당한 분명한 이유를 모르고 있었으며, 또한 그들에게 언약궤와 관련하여 미신적 신앙이 다분히 있었음을 보여준다(4:3, 5:8)

 

21 전령들을 기럇여아림 주민에게 보내어 이르되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도로 가져왔으니 너희는 내려와서 그것을 너희에게로 옮겨 가라

 

여기의 '기럇여아림'(Kirjath-jearim)은 '숲의 성읍'이란 뜻으로서 오늘날의 위치는 '쿠르엣 엘 에납'(Kuryet el Enab)으로 추정된다. 당시 이 성읍은 벧세메스 북동쪽 약 145km, 예루살렘 북서쪽 약 13km지점에 위치하였다. 그러면 벧세메스 사람들이 다른 성읍들을 제치고 하필이면 왜 기럇여아림으로 언약궤를 보내려 했을까? 그것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방어하기 좋았을 것이다. 또 지정학적으로 높은 지대라고 한다.

 

'너희는 내려와서'

여기서 '내려와서'라는 말은 벧세메스(Beth' Shemesh)가 해발 약 305m, 그리고 기럇여아림(Kirjath-jearim)이 해발 약 762m라는 점에서, 문자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