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궤를 대하는 세 부류 삼상6장 여러 설교 정리
사무엘상 4~6장은, 언약궤와 관련된 장입니다.
4장은 언약궤가 빼앗김
5장은 언약궤로 인해 블레셋에 일어난 재앙
6장은 언약궤가 돌아옴
본문 삼상6장에는, 언약궤를 대하는 3부류가 나옵니다.
6:1~6, 언약궤를 대하는 블레셋 인들의 자세 (불량)
6:7~12, 언약궤를 대하는 두 어미소의 자세 (양호)
6:13~21, 언약궤를 대하는 벧세메스 사람들의 자세 (불량)
오늘 본문은 전체적으로 '말씀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말씀(언약궤)을 어떻게 수종들어야 되는가?'에 대한 교훈입니다.
◑1. 언약궤(말씀)를 대하는 블레셋 인들의 자세 6:1~6
그들은 '언약궤(말씀)'를 경외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수업료를 톡톡히 치렀는데, 그것은 다곤신상의 파괴와
그 도시들에 독종(페스트 같은 전염병)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이 언약궤를 돌려보낼 때, 금으로 '독종' 모양과, '쥐'모양을 만들어
수레에 같이 실어보낸 것을 볼 때, (낫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그 형상을 만듦)
그들이 겪었던 재앙이 '쥐에 인해 생기는 병과 그 상처(종기)' 임을 알게 되고,
현대인들이 가장 알기 쉽게 유추하면 '페스트'가 되는 거죠.
성경에는 '페스트'라고 나오진 않지만요.
그들이 그런 '하나님의 손'이 일으키신 재앙을 만났을 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알고 있었지만, 믿음은 없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하나님이 애굽에 행하신 일들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었죠.
그리고 언약궤를 이스라엘에 돌려보낼 때는,
나름 '여호와 신앙의 지식'은 상당히 높은 경지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복술자들에게서 받은 조언이었는데, :2
3 '그들이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려거든 거저 보내지 말고
그에게 속건제를 드려야 할지니라 그리하면 병도 낫고
그의 손을 너희에게서 옮기지 아니하는 이유도 알리라 하니'
여기서 속건제가, 꼭 레위기 규례 대로의 속건제 형식은 아니다 할지라도,
'성물에 대해 범죄하면 속건제를 드려야 한다'는 규정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아마 이방종교에서도 비슷한 규정이 있었으리라고 봅니다.
일례로 살인, 간음, 도적질에 대한 처벌도, 이방종교와 일부 공통된 점이 있죠.
속건제 규례도 그렇게 비슷하고, 공통된 점이 있을 수 있죠.)
4 '그들이 이르되 무엇으로 그에게 드릴 속건제를 삼을까 하니 이르되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 마리라야 하리니
너희와 너희 통치자에게 내린 재앙이 같음이니라'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도, 애굽인들의 금은을 취해서 나왔습니다. 출3:22
일종의 전리품이요, 탈취물 성격이었습니다.
이같은 사실은,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 실수로 타인의 소유물을 취했을 경우
에는 그 실수를 깨달은 직후 잘못 취한 물건이나 사람을 돌려 보내면서
실수에 따른 보상금을 지불 하는 풍습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5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의 독한 종기의 형상과 땅을 해롭게 하는 쥐의 형상을
만들어 이스라엘 신께 영광을 돌리라 그가 혹 그의 손을 너희와 너희의 신들과
너희 땅에서 가볍게 하실까 하노라'
고대 이방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에게 어떤 소망을 빌거나,
혹은 감사의 표시를 할 때
그 내용을 형상화하여 바치는 관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독종, 쥐의 형상을 금으로 만들어 보낸 거죠.
쥐로 인해 생긴 독종을 낫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빌었던 것이죠.
그것들을 각각 "다섯" 개씩 만든 것은
블레셋의 5대 도시의 숫자에 맞춘 것이었습니다. 6:17~18
그들은 언약궤가 전장에 당도했을 때, 매우 떨었다고 했습니다. 4:6~7
이유는, 언약궤가 과거에 출애굽 때 얼마나 위력이 있었는지 알고 있었던 거죠.
그리고 언약궤를 돌려보낼 때도, 달랑 언약궤만 수레에 실어보내지 않았어요.
그들 나름대로의 상당한 예우를 갖춰서 보냅니다.
-아무 소를 보낸 게 아니라, 멍에 메 보지 않은 소, 즉 순수한 예물을 택한 거죠.
-속건제물을 같이 보냈습니다. 그게 관습이든, 신앙이든 어쨌든 지식은 있었죠.
-특히 독종과 쥐형상의 금을 보냄으로써, '쥐로 인한 독종이 낫기를' 기원했죠.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일반적 지식'은 갖고 있었으나
그게 회개나 진실한 믿음에서 우러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재앙을 면하고자 하는 면피용'이었을 따름이었죠.
오늘날에도 이런 세상 사람들, 심지어 신자들이 많다는 거죠.
기독교 신앙에 대해 피상적 지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주기도문도 외웁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본문 6장에 보면, 그들은 끝까지 '(불신자로서 합리적인) 의심'을 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이 재앙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건가?'
하나님을 조금 아는 사람이니까, 이런 의심이라도 하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런 의심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블레셋 사람들은 그런 엄청난 재앙을 당하면서도,
그리고 그 재앙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이 기껏 내린 결론이란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본처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 죽임을 면케 하자"(5:11)라는 것이었습니다.
6:1절 이하에 보면, 그런 큰 재앙을 받으면서도 블레셋 사람들은
그 탈취한 언약궤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무려 "일곱 달" 동안이나
그것을 이곳저곳으로 옮겨가면서 계속 재앙을 당했었습니다.
하나도 소득 없는.. 환난만 진하게 당한 것입니다.
환난을 당하면, 믿음이라도 얻게 되는 소득이라도 얻어야 했을 텐데...
안타깝게도 블레셋 인들은, 언약궤를 대하는 태도가
처음부터 끝까지 '세속적'이었고, 그들의 믿음에 변화를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이런 블레셋 인들의 '언약궤를 대하는 태도'는
이스라엘의 벧세메스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래 ◑3에서 살펴봄)
◑2. 언약궤를 대하는 두 어미 소의 태도 6:7~12
지금 이 단락에서는, 궤를 운반해 가는 암소 두 마리가
말씀(언약궤)을 대하는 태도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소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말씀을 수종들어야 되는가?..
하는 주제를 살펴보겠습니다.
7개월 동안 (6:1) 언약궤가 블레셋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 동안 블레셋을 박살을 내신 거죠.
본문은 마치 큰 승리를 거둔 부대가
화려하게 귀환하고 있는 장면처럼,
하나님이 스스로 지금 금을 가득 수레에 싣고 개선하고 계십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완전히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한 이후에
그냥 언약궤를 돌려보낸 거예요.
근데 이 장면에서 특이한 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언약궤를
소 두 마리가 지금 수종들고 있습니다.
▲1. 첫 번째는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7절에 '그러므로 새 수레를 하나 만들고 멍에를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소에 수레를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사실 블레셋 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언약궤 어떻게 수종 들어야 하는지
잘 몰라요. 그렇지만 그들의 정성을 다해서 그냥 그렇게 하고 있죠.
어미 소가 두 마리 발탁되었는데, 멍에를 메어보지 않은 소입니다.
소나 말이 무조건 태어나면 본능적으로 수레를 끄는 게 아닙니다.
소나 말이 수레를 끌도록, 또는 사람이 태우고 다니도록, 멍에를 메고 밭갈도록
훈련을 시켜야 됩니다. 그 훈련을 거치지 않으면, 유용하게 쓰임 못 받죠.
그런데 한 번도 멍에를 메어보지 못한 소가 발탁된 것은 Test 1
블레셋 인들이 '정말 법궤로 인한 재앙이 여호와가 보내신 것인가?' 하고
테스트 해 보는 거죠. 그 소가 만약 수레를 잘 끌면.. 여호와가 역사하시는 거죠.
그 외에도, 하나님의 사역에 쓰임 받는 소는
가급적 순결한 소를 골라야 된다는 믿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10절 '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Test 2
소는 본성상 송아지에게 젖을 먹입니다.
그러니 어미 소의 본성으로는, 새끼를 찾아서 집으로 향해 가서
소젖을 먹여야 되는 거죠. 블레셋 방백들이 시험해 보는 것입니다.
'정말 재앙이 여호와로 말미암았는가?'
만약 암소가 자기 새끼를 떼놓고,
벧세메스로 향해 똑바로 간다면.. 이건 '여호와의 역사'가 맞다는 거죠.
그래서 12절을 보면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소가 벧세메스 길로 향하여, 거기는 소가 모르는 길입니다.
소는 어딜 나가도, 자기 집으로 돌아오지, 낯선 길을 향해서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 번 망설임도 없이, 벧세메스 길로 향해 똑바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울며' 나아갔다고 했습니다.
그걸 블레셋 방백들이 국경까지 따라와서 다 지켜본 거죠. :12
본문에는 안 나오지만, 그들은 그제야 비로소 인정했을 것입니다.
'언약궤를 가져와서 자기들에게 일어난 모든 재앙이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요,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언약궤를 눈물 흘리며 끌고가는 이 두 마리의 암소를 통해
말씀을 수종드는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경험으로, 우리의 어떤 상식으로
따라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그런 길을 내가 걸어간다는 것입니다.
근데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대로 사는 것은 정확하게 육신의 반대입니다.
'성령은 육체를 거스리고, 육체는 성령을 거스립니다' 갈5:17참조
그 소가 언약궤를 메고 울면서 길을 갔던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수종들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내 본성을 거슬러야 되고, 내 욕심을 거슬러야 되고
내 생각을 거스를 수밖에 없고, 내 자아를 부인할 수 밖에 없어요.
그래서 그것이 잘 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기도 하는 거예요.
기도는, 하나님 본성을 따라가도록
내 본성을 거스를 수 있는 영적인 힘을 줍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그 길을 가실 때에
울면서 가셨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특별히 아버지의 뜻을 따라 갈보리로 올라가실 때는
겟세마네에서 정말로 많이 우셨습니다.
무릎으로 그 길을 가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말씀따라 한 번 살아보려고 해!'
이게 무슨 다이어트 하겠다고 결심하듯이..
그렇게 해서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는 거죠.
말씀을 수종들며, 말씀대로 순종해서 살려고 한다면
정말 (피)눈물 나는 발걸음이 아니고는, 그렇게 되기 어렵다는 거죠.
자기 본성을 거슬러야 되고, 자기의 생각과 모든 경험들을 다 내려놔야 되고,
그래서 울며 걸어갔던 '말씀'을 메고 갔던 그 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수종드는 종들의 자세를 .. 교훈 얻게 되는 것입니다.
▲2. 말씀을 수종드는 자는.. 길을 "똑바로" 갑니다.
12절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대로로 가며'
한 길로 똑바로 갔다는 것입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test 3
이 소는 주어진 한 길을 향해서만 똑바로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우리가 배수진을 치지 않으면
다른 길을 생각하거나 고려하면,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너무 많아집니다.
그러면 쉽게 포기하게 되고, 물러서게 되고, 타협하게 되는 거죠.
말씀에 대해서는, 좀 무식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단호해야 된다는 거죠.
△오늘날 우리가 좌우로 치우쳐 있는 모습을 몇 가지 생각해 봅니다.
-어떤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께 너무 치우쳐 있어요
반대로 어떤 사람은 '구원 주 예수 그리스도'께만 너무 치우쳐 있어요.
근데 창조주 아버지가 없으면,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가 없거든요.
근데 어떤 사람은 창조주 아버지만 주목하고,
어떤 사람은 반대로 복음, 구원, 십자가.. 거기에만 너무 치우쳐 있어요.
그리고 또 어떤 분은, 성령 쪽으로만 과하다 싶을 정도로 치우쳐 있습니다.
성경은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의 스텐다드를 우리에게 제시해 주십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에 너무 치우쳐져 있어요.
하나님이 예정하셨고, 작정하셨고, 운행하시고, 하나님이 다 하신다는 거죠.
맞는 말입니다.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대 측면도 성경은 가르칩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너무 치우쳐 있어요.
구슬이 세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듯이,
아무리 말씀이 중요하고, 복음이 중요해도
내가 순종해야 되고, 내 의지로 말씀대로 살아야 되고.. 이렇게 자유의지를 강조하죠.
그렇지만 성경은 양면을 다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명확하게 맞물려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도할 때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이 그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셔야, 그 사람이 돌아오지요..'
그렇지만 우리 같은 전도자가 또 전해야, 전도가 이루어집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 듣는 사람이 결단하고 회개하고 돌이켜야.. 구원 받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다함께 맞물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설교 하기 전에 기도하기를
'하나님이 역사하셔야 설교말씀에 변화받는 역사가 나타날 것 아닙니까?'
하지만 동시에 또 여러분 각자가, 말씀을 잘 흡입해야 역사가 나타나지요.
그래서 '좋은 땅'도 있고, '돌밭, 가시밭'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사람의 자유의지 사이에서 치우치지 않아야 되는데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천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죠.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데 너무 집중되어 있어요.
그러다보니 자기 자신의 변화는 없어요.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영혼에는 별 관심이 없고
나의 성화, 나의 열매, 나의 변화... 여기에만 너무 치우쳐 있어요.
그러니까 양자의 균형이 필요한 거죠.
그래서 어떤 교회는, 사역을 많이 하고 전도도 많이 해요.
그런데 변화나 성장이 없으니까 너무 시끄러워요.
근데 또 어떤 교회는, 자기의 변화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고
기도하고, 자기 성화에 치중되어 있는데.. 반면에 사역이 없고, 전도가 없어요.
치우쳐져 있는 것이죠.
▲3. 두 암소는, 벧세메스까지 "끝까지" 갔습니다.
말씀을 수종드는 자, 말씀과 함께 가는 자의 자세 그 세 번째는
"끝까지"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근데 시작을 했다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한 길로 바로 가야 돼요.
그런데 그 길을 가다가... 끝까지 가야 되는데, 끝까지 가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9절을 보면, 지금 블레셋 사람들이
소들이 벧세메스까지 끝까지 가는 지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과정에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것도 중요.해요.
그렇지만 끝까지 완주하는 것도 중요하죠.
그래서 14절에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선지라' .. 소들이 목적지인 벧세메스까지 갔다는 거죠.
순종도 반만 하면 안 돼요.
'여기까지는 내가 할 수 있는데, 이거 넘어가는 것은 안 돼!'
이런 자의적인 기준을 정하면 안 된다는 거죠.
눅22:51에 예수님은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셨죠.
예수님을 잡고자 하는 자들을 향해
검을 빼서 대항하려는 베드로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자리까지 '끝까지' 순종해야 된다는 거죠.
예수님이 친히 사람이 되신 것, 천한 목수의 아들이 되신 것,
거기에다 죄인이 되시는 것, 거기에다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
주님을 끝까지 순종하시는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라' 혹은 '용서하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러면 끝까지 그 길을 가야 되는데
우리는 사랑하다가, 용서하다가.. 중간에 멈춰 버리는 경우가 있죠.
그러나 예수님께 순종하는 자들은 '끝까지' 순종해야 된다고
언약궤를 운반하는 '소를 통해서' 본문은 교훈하고 있습니다.
▲소들이 순종하니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9절 '보고 있다가 만일 궤가 그 본 지역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의 손이 아니요
우연히 당한 것인 줄 알리라 하니라'
16절 '블레셋 다섯 방백이 이것을 보고 그 날에 에그론으로 돌아갔더라'
블레셋 다섯 방백들이, 소들의 순종하는 모습을 보고서
'이것이 우연히 당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친 것이 하나님의 손이요..' 그걸 인정하고, 자기 처소로 돌아갔죠.
블레셋 방백들은, 큰 재앙을 만난 것이
우연인지/ 하나님의 손이 치신 것인지... 헷갈렸다기 보다는
'그게 하나님의 손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3번이나 테스트 한 것입니다.
-한 번도 멍에 메지 못한 쪼짜배기 소를 써 보자
-그것도 젖 먹이는 송아지를 떼어놓고, 보내보자
-소들이 벧세메스로 향해서 똑바로 나아가는지 한 번 지켜보자
그래서 그들은 국경까지 소들을 따라와서 지켜보았고, :12
그 결과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손이었다'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블레셋으로 돌아갔습니다. :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랬다고 본문에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본문에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죠.
마찬가지로, 오늘날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수종들며
'울며 자기를 부인하며'
'똑바로 가며'
'끝까지 갈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이죠!
◑3. 언약궤를 대하는 벧세메스 사람들의 태도 6:13~21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를 돌려보낸 "벧세메스"는 유다 지파의 한 성읍으로서
특별히 제사장들에게 할당되었던 곳이었습니다(수 21:13-16).
따라서 그 동네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다 제사장의 가문이거나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언약궤가 돌아온 것을 보고 처음에는 기뻐하면서 바로 그 자리에서
"번제와 다른 제"로써 감사예배를 드릴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곧 이어서 기가 막히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벧세메스 사람들은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보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얼마 전에 블레셋 사람들에게 하셨던 것과 똑같이
큰 "살륙"의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셨습니다.
왜냐하면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까닭에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극히 존중하는 자세로 대해야 마땅하며, 특
히 레위인들은 "지성물에 접근할 때에 그 생명을 보존하고 죽지 않기" 위해서는
"잠시라도 들어가서 성소를 보지 말아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경고까지 주어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민 4:17-20).
바로 그 명백한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도 제사장이며 레위인이라는
벧세메스 사람들이 어겼던 것이었습니다.
7개월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언약궤를 승리를 위한
'마술적인 도구'로 사용하려 했다가 전쟁에서도 패하고 언약궤까지 잃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언약궤를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으로, 무슨 구경거리처럼
여기다가 또 한 번 큰 재앙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꼴을 당한 후에도 벧세메스 사람들이 한다는 소리가 무엇이었습니까?
그 제사장과 레위인이라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소리가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라는 것이었습니다. :20
다시 말해서 '우리가 조금 실수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엄해서야
그 앞에서 누가 살아남겠느냐?'라고 오히려 불만을 터뜨렸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또 한술 더 떠서 "그를 우리에게서 뉘게로 가시게 할꼬" :20
라는 소리까지 내뱉었습니다. (법궤를 어디로 보낼꼬?)
그렇게 어렵게 돌아온 언약궤를 이제는 무슨 '재앙의 상징'처럼 여기고
당장 자기네 마을에서 떠나보내야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앞서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와 함께 있게 못할지라"(5:7)고
말했던 것과 비교해 보면, 이건 뭐 '오십보백보'입니다.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음에 나오는 7:1절에 보면, 결국 언약궤는 "기럇여아림"이란 곳으로 옮겨져서
"아비나답"이라는 제사장의 집에서
그의 아들 "엘리아살" 제사장이 맡아 지키게 됩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자기네들이 언약궤를 경솔히 다루고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함으로써 벌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블레셋 사람들과 똑같이 어떻게 하면
이 재앙을 피할 수 있을까 하는 데에만 온통 신경을 다 썼던 것이었습니다.
정말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죽임 당해도 마땅한 일이 아니었겠습니까?
명색이 제사장이요 레위인이라는 사람들이 이처럼 블레셋의 우상숭배자들이나
진배없는 불경과 불순종의 모습을 보였던 것이었습니다.
◑적용 / 복음과 예수님으로 인해 실족하는 신자들 vs 광채나는 신자들
본문에 하나님과 말씀을 상징하는 언약궤를 홀대한 두 부류가 나오는데,
블레셋 인들은.. “불신자”로서 그렇게 무시한 것이고
벧세메스 사람들은.. “신자”로서 언약궤를 무시한 것입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법궤를 들여다본 고로 (아마 뚜껑을 열었나 봅니다)
하나님의 치심을 받아서 70명이나 죽는 재앙이 일어났는데요...
마치 하나님이 심술을 부리시기라도 한 것일까요?
벧전2:7~8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똑같은 예수님이요 복음인데,
그 가치를, 그 소중함을 제대로 믿는자들에게는.. 정말 보배, 보화가 되시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냥 믿지 않는 그대로 본전, 중립이 아니라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신다.. 오히려 재앙이 된다는 거죠.
예수님과 복음을 진짜 그 가치 그대로 믿으면
‘밭에 감춰진 보화’처럼,
사람이 자기 재산을 모두 팔아서 밭을 사도.. 후회가 전혀 없는
고귀하고, 존귀하고, 나를 살리고, 나에게 생명과 평안을 주는 주님이 되시지만
예수님과 복음을 그냥 지식적으로 믿고
내가 복받기 위한 수단쯤으로 믿는다면, 자꾸 복음과, 주님과 충돌이 발생하죠.
그래서 성도들은, 자기 가정에서부터 핍박을 받기도 하고,
직장에서나 사회에서 따돌림과 무시와 불이익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 것을 받으면.. 자신이 참된 성도라는 증거이므로.. 오히려 기뻐해야죠!
그러나 예수 믿는 신앙 때문에, 한 번도 불이익을 당해 본 적이 없으면
오히려 교인인 내가, 다른 성도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사람이 되기 쉽죠.
그러나 때가 이르면.. 벧세메스 사람들처럼,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날이 닥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라고 했죠. 롬11:22
하나님의 사랑과 더불어, 두려우심을 알라는 것입니다.
만약 교인이, 성도가 하나님의 징계와 징벌을 당한다면,
그가 평소에, 벧세메스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두려우심을 등한시했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두려우심을 알면, 내게도 변화가 일어납니다!
성도의 영광, 성도의 권세.. 그것으로 인해 얼굴이 환하게 변하는 것이죠.
복음을 진정으로 만나고, 복음을 진정으로 믿고 살면,
즉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둘 다 바라보고 살면,
그 복음의 광채가 내게 반사되어, 내 얼굴도 옅은 광체가 반사되는 겁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대면하고 온 후에, 그 얼굴에서 광채가 났던
것처럼, 신약성도인 우리가 복음과 날마다 대면해서 살면,
그 얼굴에 광채가 나는 것입니다. (보톡스, 필러 이런 거 안 해도 됩니다)
아래는 펀글입니다. 성도의 얼굴에는 후광, 아우라 같은 게 있다는 거죠!
“옛날 아주 먼 옛날에 정말 성인(聖人)처럼 거룩하게 사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주위의 다른 사람들은 그가 거룩하게 산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자신은 거룩한 줄 모르고 거룩하게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람이 지니고 있는 특징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그 사람들의 과거에 대한 어떤 것에도 상관없이
항상 처음처럼 새롭게 대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도 그를 사람들 중에 가장 거룩한 사람이라고 인정하여,
한번은 수호천사를 불러 그에게 모습을 보이고
소원을 하나 꼭 들어주도록 시켰다.
하나님의 명을 받은 수호천사가 그에게 모습을 보이고
소원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런데 그는 소원이라고는 없다고 하였다.
글쎄 소원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러나 그는 한사코 소원이 없다고 하였다.
할 수 없이 천사가 "네게 사람의 병을 치유하는 기적의 은사를 줄까?" 묻자,
병자를 치유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는 일이라면서 거절하였다.
그러자 천사가 "죄인들을 회개시켜 바른 삶을 살도록 하는 힘을 줄까?" 묻자,
그런 일이라면 당신들 천사들이 해야 할 일이라며 거절하였다.
마지막으로 천사가 "그러면 너의 거룩한 삶을 사람들이 모범으로 삼아
존경할 수 있도록 해 줄까?" 하고 묻자,
그는 펄쩍 뛰면서 절대 안 된다고 하였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교만해져서 사람들에게 오히려 해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무슨 소원이든 한 가지는 꼭 들어주어야 한다는 명을 받은 천사가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다며 난처해하자, 그가 말했다.
"사람들이 저를 통해 착한 마음을 가지고 살도록 해 주시되,
그 사실을 내가 모르도록 해 주십시오."
그랬다. 천사는 하나님께 가서 그대로 고하였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해줄 수 있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시더니,
천사를 시켜 그 착한 사람에게 후광(後光)을 걸어 주도록 하였다.
(자기는 광채가 나는 것을 모르게 된다)
이것이 성인들의 후광(後光, 아우라)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것이 앞도 옆도 아닌 성인의 머리 뒤에 빛나는 광테이다.
자신만 볼 수 없고, 다른 사람만 볼 수 있는 후광인 것이다.
물론 살아 있는 우리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함께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 후광을 빛내고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