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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9장 해석 및 주석

LNCK 2023. 2. 22. 19:20

HANGL NOCR - 한글 주석

 

◈삼상9장 해석 및 주석

 

1 베냐민 지파에 기스라 이름하는 유력한 사람이 있으니 그는 아비엘의 아들이요 스롤의 손자요 베고랏의 증손이요 아비아의 현손이며 베냐민 사람이더라

'베냐민 지파'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유다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 사이의 땅을 기업으로 분배받았다(수 18:11). 그러나 이 지파는 불명예스럽게도 사사 시대 말기에 레위인의 첩을 윤간하여 죽게 한 사건으로 말미암아(삿 19:22-30), 이스라엘 다른 지파들의 징계를 받아 그 지파의 상당수 남자들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삿 20:29-44). 그때 베냐민 지파의 살아 남은 장정의 수는 불과 600명 밖에 되지 않을 정도였다(삿 20:47). 
그러므로 이후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 12지파 중 숫적으로 가장 미약한 지파가 되었는데, 바로 이 지파 중에서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이 나왔다는 사실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즉 이스라엘 초대 왕이 수행하여야 할 선결 과제는 무엇보다도 각 지파 간의 결속과 단결을 공고히 하는 일이었는데, 바로 그 일을 이스라엘의 막내 지파가 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오히려 나머지 각 지파간의 불필요한 상호 견제, 시기, 경쟁 등을 극복할 수 있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베냐민 지파를 사이에 두고 있는 강력한 유다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의 갈등과 주도권 싸움을 방지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스라 이름 하는 유력한 사람' 
'유력한 사람'(깁보르 하일)은 '부유한 사람'(a man of wealth, RSV)을 의미하거나 (룻 2:1, 왕하 15: 20), 혹은 '강력한 용사'(a mighty man of power, KJV) 등으로 이해될 수 있다(삿 6:12, 11:1). 그런데 우리는 여기 '유력한 사람'을 위의 두 가지 의미 모두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1) 기스는, 약 25,000명의 베냐민 사람들에게 분배되었던(삿 20:46) 땅을 레위인의 첩 윤간 사건(삿 19:16-20:48) 이후 기업(땅)을 나뉘어 차지하게 되었을 600명 (삿 20:47)중의 한사람 혹은 그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부유했을 것이며, (2) 뿐만 아니라 베냐민지파의 후손들 중에는 실제로 용사들이 많았고 (삿 20:16), 또한 기스의 아들 사울의 출중한 외모(2절 :10:23, 24)가 기스의 용사됨을 어느 정도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비엘의 아들이요' 
본서의 기록과는 달리 역대상 9:39은 '넬'(Ner)을 기스의 아버지로 말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족보의 차이는 근본적으로, 성경의 족보는 '선택 기록설'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구속사상 특별하지 않은 인물들은 족보 기록에서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기타 성경의 여러 참조 구절들(창 46:21, 삼상 14:51, 대상 7:6-8, 8:29-33, 9:35-39)을 비교 고찰해 보면, 우리는 역대상 9:39의 언급처럼 '넬'이 실제적인 기스의 아버지이고, 여기서 기스의 아버지로 언급된 '아비엘'(Abiel)은 실제적으로는 기스의 할아버지로 봄이 타당한 듯하다. 이러한 사실은 히브리 어법상 '아들'(벤)이란 개념이 반드시 1대 자손만을 뜻하지 않고, 여러 대(代) 후의 자손을 가리킬 때도 '아들'이란 말을 통칭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코 무리한 추측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본절에 나타난 '손자', '증손', '현손'이란말도 모두 직역하면 '아들'(벤)이란 말이다. 아무튼 본절 묘사의 목적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부각될 사울(Saul)의 역사적 실재성을 밝히고, 나아가 이스라엘 중 그의 위치를 명확히 드러내고자 함에 있다.

2 기스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사울'(Saul)이라는 이름은 '구하여 얻은 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이는 의미심장하다(1:27, 28). 즉 '사울'은 이미 그 이름이 갖는 의미를 통하여, 자신이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세워질 이스라엘의 왕임을 은연중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8: 10). 하나님이 사울을 세워 주셨다기 보다는, 하나님이 백성들의 요구를 마지 못해 용인하신 것이다. 그 이름 뜻에 그 사실이 잘 드러나 있다.

'준수한 소년이라' 
이에 해당하는 원문(M.T.)의 '바후르 와토브'를 직역하면 '젊고 잘 생겼더라'(young and handsome)인데, 이는 그 의미상 사울의 미적(美的) 아름다움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사울의 풍채가 뛰어남을 말해주는 단어이다(창 3: 6, 6: 2, 왕상 1:6). 그리고 여기 '소년'은 한글 개역 성졍이 의미상 번역한 단어인데, 이 번역은 적절치 못하다. 왜냐하면 원문의 의미는 아직 미성숙한 남자 아이가 아닌, 오히려 전투의 능력이 있고, 재산을 상속받을 자격이 있으며, 또한 결혼할 정도로 성숙한 젊은 청년을 가리키기 때문이다(왕하 8: 12, 대하36:17, 시 148:12, 전 11:9, 사 31:8, 40:30) 이것은 (1) 사울이 이스라엘을 외적의 손에서 구원할 자로 지목되었고(16, 17절), (2) 사울이 이 일이 있은 직후 암몬 족속을 맞아 싸움을 했다는 사실(11: 6-11) 등에서 분명해진다. 때문에 칠십인역(LXX)과 갈대아역(The Chaldee)에서는 '(성인) 남자'(아네르)로 번역했다.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 하더라' 
'키'는 사람의 외모를 판단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요소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사울의 장대한 신체는 강력한 통치력을 갖고 자신들을 다스려 줄 왕을 요구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8:20).
 
3 사울의 아버지 기스가 암나귀들을 잃고 그의 아들 사울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 한 사환을 데리고 가서 암나귀들을 찾으라 하매 

'기스가 암나귀들을 잃고...찾으라 하매' 
고대 사회에서 '나귀'(아톤)는 귀족들이 자신의 위엄을 과시하면서 즐겨타던 동물이었다(삿 5 :10, 10:4, 12:14, 슥 9:9). 특히 그중에서도 '암나귀'는 그것의 온순성 때문에 숫나귀보다 더 귀하게 평가되었다. 그런데 '유력한 사람'인 기스(Kish)가 '암나귀' 몇 마리에 그렇게 집착한 이유는 (1) 암나귀 자체가 그것을 소유한 주인에게는 부와 존귀의 상징물이었고, (2)따라서 그것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곧 부와 존귀의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한 사환을 데리고...가서' 
기스가 이처럼 아들 사울에게 사환과 함께 암나귀를 찾으라 명령한 것은 '기스'가 그 나귀들을 얼마나 귀중하게 여겼는지롤 잘 보여준다. 아무튼 사울은 사환과 함께 집을 떠남으로써 집으로부터 더 먼 곳까지, 그리고 더 샅샅이 찾아 헤맬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이처럼 사울이 부친의 명을 좇아 잃어버린 나귀들을 찾으러 나선 이 사건은 조만간 이스라엘 왕정(王政) 출발의 중요한 배경을 이루는 역사적 사건이 된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사울과 사무엘의 만남으로 이어지고, 또한 그로 인해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기 때문이다. 이로 볼때 우리는 주변의 사소한 모든 일까지도 하나님께서 친히 주장하시고 섭리하신다는사실을 깨닫게 된다.

4 그가 에브라임 산지와 살리사 땅으로 두루 다녀 보았으나 찾지 못하고 사알림 땅으로 두루 다녀 보았으나 그 곳에는 없었고 베냐민 사람의 땅으로 두루 다녀 보았으나 찾지 못하니라 

'두루 다니되' 
사울과 그의 사환이 나귀를 찾기 위하여 매우 많은 거리를 분주하게 돌아다녔음을 시사해 주는 말이다. 즉 사울은 사환과 함께 고향 기브아를 출발하여 에브라임 산지 일대인 살리사, 사알림, 베냐민 땅 일대를 두루 돌아다니는 동안 어느덧 40km 이상의 긴 여행을 한 것이다. 그 결과 마침내 사무엘의 고향인 라마 근처의 숩땅에까지 이른 것이다. 분명 이 사실은 초기 사울의 남다른 효성과 성실성을 보여준다 하겠다.

5 그들이 숩 땅에 이른 때에 사울이 함께 가던 사환에게 이르되 돌아가자 내 아버지께서 암 나귀 생각은 고사하고 우리를 위하여 걱정하실까 두려워하노라 하니 

'숩 땅에 이른 때에' 
'숩'은 에브라임 산지의 남쪽, 곧 베냐민 지파의 땅 라마와 가까운 지역이다. 따라서 '숩 땅에 이르렀다'라는 말은 사울과 그의 사환이 그때 이미 에브라임 산지를 거의 한 바퀴 일주한 뒤, 다시 자신들의 성읍 기브아에서 가까운 곳에 도달하였음을 시사해 준다. 한편 '숩 땅'이라는 지명은 사무엘의 먼 조상 '숩'이라는 레위인(1:1)이 그곳에 정착함으로써 붙여지게 된 지명이다.

'돌아가자 내 부친이... 걱정하실까 두려워하노라' 
20절에 따르면 사울과 그의 사환이 부친의 명을 좇아 집을 떠난지 벌써 3일이 되었다. 따라서 사울의 이러한 걱정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한편 이것은 당시 사울이 부모를 공경하던 효성스러운 인물이었음을 시사해 주는 말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사울의 이러한 인간적인 좋은 면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신앙 인격에 뿌리를 두지 못하면, 영속성을 지니지 못할 뿐 아니라 한 인간의 비극적 운명을 막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이것은 후일의 사울의 생애가 입증하는 바이다.

6 그가 대답하되 보소서 이 성읍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 그가 말한 것은 반드시 다 응하나니 그리로 가사이다 그가 혹 우리가 갈 길을 가르쳐 줄까 하나이다 하는지라 

'이 성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여기서 '이 성'은 라마다임소빔(1:1), 곧 라마(1 :19)를 가리킨다. 이곳은 사무엘의 고향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스라엘에 대하여 사무엘이 그의 사사직과 제사장직을 수행 하던 근거지였다(7 :17). 한편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인간들에게 전달하는 직무를 담당하던 '선지자'에 대한 일반적 명칭이다(2:27, 삿 13:6, 왕상 12: 22, 13:1, 14, 왕하 1:9, 13, 5:8).

'존중히 여김을 받는 사람이라' 
이 말은 사울의 사환이 한 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무엘이 그 당시 일반 백성들에 의하여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분명혀 보여 준다. 즉 이것은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3:20) 라는 말씀이 실제적인 사실이었음을 구체적으로 반영해 주는 말이다.

'그가 말한 것은 반드시 다 응하나니' 
이것은 참선지자에게 반드시 나타나야 할 객관적 증거였다(신 13:1-3, 18:21, 22). 또한 이것은 3:8에서 본서 저자가 "여호와께서...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라고 말한 바가 실제로 백성들에게 사실로서 인정되고 있었음을 잘 보여 준다.

'그가...가르칠까 하나이다' 
사환의 이같은 말은 그가 사무엘의 선지자됨을 온전히 믿었음을 시사한다. 물론 사환이 하나님의 선지자를 사사 로운 점(占)이나 치는 사람으로 잘못 이해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를 통해 우리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상 생활에 관한 제반 문제들까지도 사무엘에게 문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F.R.Fay).

'우리의 갈 길을' 
이것은 사울과 사환이 길을 잃어버렸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은 암나귀를 찾을 수 있는 방법과 장소를 알고 싶어한 것이다. 한편,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고찰할 사실은 사무엘에 관한 이야기를 사환이 먼저 꺼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당시 사울이 사무엘의 존재에 대해 잘 몰랐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그런것 같지는 않다. 일개 사환이 알고 있었던 지식을 유력한 집안의 아들인 사울이 전혀 몰랐을 리 없다. 다만 나귀를 정신없이 찾는 중 라마성 근처에 이르자, 사울의 사환이 먼저 그 사실을 깨닫고 이야기를 꺼낸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이어지는 7절에서 사울이 선지자에게 드릴 예물의 풍습까지 알고있었던 점으로 보아 확실하다.

7 사울이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우리가 가면 그 사람에게 무엇을 드리겠느냐 우리 주머니에 먹을 것이 다하였으니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릴 예물이 없도다 무엇이 있느냐 하니 

'우리가...무엇을 드리겠느냐' 
일반적으로 중근동 지방에서는 존경하는 어른을 방문할 때 그의 신분에 걸맞는 예물을 지참해 가는 풍습이 있었다. 특히 이러한 관습은 성경에서 선지자에게 무엇을 물으러 가는 경우와 관련하여 많이 나타난다(왕상 14:3, 왕하 4 :42, 암 7:12, 미 3 :5).

8 사환이 사울에게 다시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내 손에 은 한 세겔의 사분의 일이 있으니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려 우리 길을 가르쳐 달라 하겠나이다 하더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려...하겠나이다' 
이것은 선지자에게 반드시 예물을 바쳐야만 그에게 물어볼 수 있다는 뜻이 절대로 아니다. 사환은 다만 그 당시의 풍습에 합당한 기본적 예의를 갖춘 후 선지자에게 물어보겠다고 한 것이다.

9 (옛적 이스라엘에 사람이 하나님께 가서 물으려 하면 말하기를 선견자에게로 가자 하였으니 지금 선지자라 하는 자를 옛적에는 선견자라 일컬었더라) 

'옛적 이스라엘에' 
본서의 저자는 사무엘이 활동하던 당시를 이처럼 오래 전의 일로 봄으로써, 사무엘서가 사무엘이 활동했던 얼마 후에 성경으로 기록되었음을 시사해주고 있다(6:18). 한편 혹자는 9절 전체를 후대의 어떤 필사자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1, 18, 19절) 주해(註解)하여 삽입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하나님께...물으려 하면' 
이것은 우림과 둠밈으로 하나님의 뜻을 묻던 계시 수납의 방식이(출 28:30) 더이상 사용되지 않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물론 이후 시대에도 우림과 둠밈이 간혹 사용되기는 하였으나, 일반적으로 그 당시에는 여러 형편에 따라 우림과 둠밈이 사용되지 않았던 것 같다. 결국 이것은 그당시 제사장의 권위가 현저히 떨어졌고, 그 역할도 제대로 수행되지 못하였음을 뜻한다.

'선견자' 
'선견자'(로에)는 '보다'(see)라는 동사 '라아'에서 파생된 말로, 곧 '보는 자'(seer)라는 의미이다. 이 명칭은 '선지자'(나비)라는 명칭이 아직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던 시기에 사용된 명칭으로서, 주로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계시를 '보는' 측면에 강조점을 둔 고대적 명칭이다. 
아울러 성경에는 '로에'와 더불어 '선견자'(先見者)로 번역되는 단어가 또 있는데, 곧 '호제'이다(삼하 24:11, 왕하 17:13, 대상 25:5, 대하 9:29, 사 29:10, 암 7:12, 미 3:7). 이 '호제'는 정신적(영적)인 것을 '인지하다'(perceive)라는 뜻의 동사 '하자'에서 파생된 말로, 역시 '보는 자'(beholder)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명칭은 주로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신령한 환상'을 보는 측면에 강조점을 둔 시적(詩的) 명칭이다. 

한편 '선지자'(나비)라는 명칭은 '말하다' (speak), '선포하다'(declare)라는 뜻의 동사 '나바'에서 파생된 말로, 이 명칭은 주로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측면을 강조한 율법적 명칭이다

그러므로 선견자('로에' 또는 '호제')와 선지자('나비')는 근본적으로 같은 부류의 사람을 가리키는 호칭으로서(삼하 24:11, 사 30:9, 10), 공히 '영감받은 하나님의 사람'을 가리키며, 따라서 선견자와 선지자는 일반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사실을 꿈, 환상, 계시 등을 통해 '보고'(seeing), '파악하며'(perceiving), 나아가 그 보여진 것이나 파악된 것을 일반 백성들에게 '선포하는'(speaking forth) 자들을 일컫는 명칭들이다.

10 사울이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네 말이 옳다 가자 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 성읍으로 가니라 

'네 말이 옳다' 
초기의 사울은 사환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만큼 진지하고 겸손했다. 그리고 이러한 겸손의 자세는 왕으로 선출되는 과정에서도 나타났다(9:21, 10:22). 그러나 이러한 초기 사울의 겸손의 모습은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고 주관적으로 행동한 망령된 제사 사건(13:8-14) 이후 점차 퇴색되고, 오히려 교만한 자로 바뀌어 갔다.

11 그들이 성읍을 향한 비탈길로 올라가다가 물 길으러 나오는 소녀들을 만나 그들에게 묻되 선견자가 여기 있느냐 하니 

'선견자가 여기 있느냐' 
'여기'는 라마 성(城) 전체를 가리킨다. 사울의 사환은 사무엘이 다른 지역으로 출장갔을 가능성 때문에 이같은 질문을 한 듯하다<12절>.

12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있나이다 보소서 그가 당신보다 앞서 갔으니 빨리 가소서 백성이 오늘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므로 그가 오늘 성읍에 들어오셨나이다 

'그가 당신보다 앞섰으니' 
이 말은 사무엘이 사울과 그의 사환보다 먼저 라마 성에 들어와 있었음을 뜻한다.

'백성이 오늘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므로' 
'산당'(바마)은 가나안어에서 유래된 단어로서, 원뜻은 '높은 곳' 혹은 '산등성이'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우상 숭배와 관련된 장소로 주로 사용되었다(레 26:30, 민 22:41, 왕상 3:2, 12: 31, 15: 8, 왕하 15:4). 그것은 이방의 우상 제단이 흔히 산 중턱이나 고지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들이 자선들의 우상 숭배 장소를 높은 곳에 세우는 이유는 (1) 우상 숭배자들로 하여금 그곳을 속세와 구별된 거룩한 장소로 여기게 하며 (2) 또한 그들로 하여금, 예배 대상이 거한다고 믿어졌던 하늘과 가까이 있다고 생각토록 하려는 등의 심리적 효과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방의 우상제단이 세워졌던 이런 산당에서는 비단 우상 숭배 행위 뿐 아니라 종교적 매춘 행위따위의 성적 음란 행위가 수반되었기 떼문에, 성경은 산당에서의 제사 의식을 엄격히 금했던 것이다 (민 33:52, 왕하 23:8). 

그러나 사무엘 시대의 '산당'(山堂)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 나오는 산당의 개념과는 전혀 달랐다. 즉 사무엘 시대에는 실로에서의 성막 제사가 불가능 하였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대신 산당에서 종교 행위가 행해졌던 것이다(왕상 3:3, 4). 성경에서 이렇듯 성막이 아닌 곳에서의 제사 행위가 불가피했을 뿐 아니라 묵허된 시기는 (1) 성막이 설립되기 전(출 40:17), 곧 모세 이전의 족장 시대와 (2) 성막이 파괴되어 제사가 중단된 이후로부터(4:10, 11) 예루살렘 중앙 성소가 건축되기까지(왕상 6:37, 38)의 기간이다. 그러므로 이 기간에 사무엘은 고향 라마에제단을 쌓은 것이다(7:17). 따라서 여기의 산당은 우상 숭배 의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여호와의 제단이다.

'그가 오늘 성에 들어오셨나이다' 
이같은 행위는 사무엘이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사사직(士師職)을 수행했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7:15-17). 

13 당신들이 성읍으로 들어가면 그가 먹으러 산당에 올라가기 전에 곧 만나리이다 그가 오기 전에는 백성이 먹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가 제물을 축사한 후에야 청함을 받은 자가 먹음이니이다 그러므로 지금 올라가소서 곧 그를 만나리이다 하는지라 

'그가 먹으러' 
이것은 그때 산당에서 드려진 제사가 화목제(和睦祭)였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즉 화목제만이 제사 의식이 끝난 후 예배 참석자가 공동으로 그 제물을 함께 나눠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그리고 사실 제물을 함께 나눠 먹는 일은 화목제 제사 의식의 필수적인 한 부분이었다(레7:11-18). 왜냐하면 화목제는 하나님과 백성 및 백성과 백성 간의 화목과 친교 도모를 제일의 목표로 하였으며, 그같은 화목과 친교는 여호와 앞에서 함께 먹고 마심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레 7:11, 19-21).

'청함을 받은 자가 먹음이라' 
여기서 '청함을 받은 자'는 단순히 제사 의식에 참여했던 일반 백성들을 가리키지 않는다. 이들은 사무엘의 선견 지명에 따라 특별히 초청되었던 그 성읍의 지도자들인 듯하다(22-24절). 즉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우대하고, 또 기름 붓는 자리에 참여할 증인들이었을 것이다<22절>.

14 그들이 성읍으로 올라가서 그리로 들어갈 때에 사무엘이 마침 산당으로 올라가려고 마주 나오더라 

'마침...마주 나오더라' 
사무엘과 사울의 이 만남은 하나님의 적극적인 섭리 하에 이루어진 것임이 이어 나오는 15, 16절에서 밝히 설명되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나귀 사건'(3절)이란 미미한 사건을 통하여, 장차 메시야 왕국을 예시케 하는 이스라엘의 왕정 제도 설립이란 당신의 원대한 구속사적 목적을 이루어 나가셨던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확고한 진리는, 특히 성도에게 있어서 삶의 우연이란 결코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성도는 영적 귀를 기울여 매사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신령한 메시지를 청취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마 10:29-31).
 
15 사울이 오기 전날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되 

'사무엘에게 알게 하여' 여기서 '알게 하여'(갈라 에트 오젠)란 말을 직역하면 '귀를 열다' 또는 '귓속에 속삭이다'란 의미이다(룻 4:4, 삼하 7:27, 욥 33:16, 36:10, 15). 결국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특별한 내용을 은밀하게 말씀하셨음을 보여 주는 말이다.

16 내일 이맘 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로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되었으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았노라 하셨더니 

'내가...한 사람을 네게 보내리니' 
이것은 결국 사울의 아비가 암나귀를 잃어버린 일(3절)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3절>. 즉 하나님께서는 때를 맞춰 사울의 아비가 그에게는 귀중한 암나귀를 잃게 하였고, 그에 따라 그 아들 사울로 하여금 암나귀를 찾아 나서도록 하게 하심으로써, 결국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도록 배후에서 주권적으로 섭리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삼으라' 
여기서 '지도자'(나기드)는 보통 '족장', '두령'이란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이다(대상 12:27, 대하 11:22, 시 76:12). 따라서 여기의 '지도자'는 왕과는 다르다. 그런데 구약 성경에서 '왕'(멜렉)이라는 단어는 이미 창세기에서부터 사용됐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사울에 대하여 굳이 '지도자'(Captin, KJV, leader, NIV, prince, RSV)라는 단어를 적용하신 것은 열방과 같은 왕을 기뻐하지 않으셨던 하나님의 본심이 반영된 것이다(8: 7, 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의 방백 정도로 세우셨지만, 나중에 사울은 백성들의 인본주의적 요구에 부응하여 왕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삼으라'는 말은 히브리 원문에 별도로 나와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 개역 성경이 그같이 번역한 이유는 앞의 '기름을 부어'라는 말 자체 속에 '삼다'란 의미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하나님께서 사울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신 직접적 목적이다. 사실 그당시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압제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즉 사무엘의 미스바 전투 대승리 이후(7:7-11) 블레셋으로부터 잃어버린 입지(立地)를 많이 회복하기는 하였지만(7: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블레셋의 계속되는 위협과 압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그로 인해 백성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사 베냐민 지파의 사울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아 군사적 목적을 수행토록 하셨던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 그러한 목적을 수행할 인물이 베냐민 지파 출신(9:1, 2)이라는 점은 적절하다. 첫째 그 지파의 혈통적 성격상 호전적이었고 (창 49:27, 삿20:12-16), 둘째 그 지파의 지리적 위치상 블레셋과의 충돌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17 사무엘이 사울을 볼 때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이는 내가 네게 말한 사람이니 이가 내 백성을 다스리리라 하시니라 

'여호와께서...이르시되' 
여기서 '이르다'(아나)란 말을 직역하면 '대답하다' (answer) 또는 ''응답하다'(respond)란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은 사무엘의 내적 기도와 물음에 대해 하나님께서 신령한 계시로써 응답해 주셨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러나 앞서 2절에서도 언급했듯이, 이것은 하나님이 사울을 지명하여 불러 왕으로 세운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요구에 하나님이 용인하셨다는 의미로 일관성있게 해석해야 한다)

'이가 내 백성을 다스리리라' 
'다스리다'(아차르, govern, rule over)는 '닫다', '제한하다','소집하다'란 뜻으로서(시107:29), 장차 사울의 통치 방식을 부정적으로 예시해 주는 단어이다.

18 사울이 성문 안 사무엘에게 나아가 이르되 선견자의 집이 어디인지 청하건대 내게 가르치소서 하니 

'사울이 성문 가운데 사무엘에게 나아가' 
본절은 그 내용 전개상 14절과 이어진다. 즉, 물 길러 나오는 소녀들의 안내대로 사울이 성읍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막 들어서자, 때마침 제물 축사를 위해 성읍에서 산당으로 가고자 성물을 나오는 사무엘을 만났던 것이다.

'가로되...가르치소서' 
이 말은 사울과 사환이 사무엘을 한 눈에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이처럼 사울이 사무엘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사무엘이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어떤 치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19 사무엘이 사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선견자이니라 너는 내 앞서 산당으로 올라가라 너희가 오늘 나와 함께 먹을 것이요 아침에는 내가 너를 보내되 네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네게 말하리라 

'내 앞서...올라가라' 
이것은 사무엘이 사울을 중요한 인물로 평가하고 존중히 여기고 있음을 시사해 주는 말이다.

'너희가...나와 함께 먹을 것이요' 
사무엘이 사울과 함께 온 사환까지도 한 식탁에 앉게 한 것은, 역시 같은 맥락에서 사무엘이 그 사환의 주인되는 사울을 가볍게 대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네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네게 말하리라' 
여기서 '네 마음에 있는 것'은 단순히 암나귀를 찾아야 하는 일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말은 선지자로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보다 중요한 일을 알려주겠다는 뜻으로, 구체적으로는 블레셋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 하는 일, 또는 이스라엘의 왕정 제도에 관한 일 등을 선지자의 자격으로서 사울과 대화를 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울로 하여금 그 자신이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압제에서 해방시키는 문제와 관련하여 하나님에 의해 지명되었음을 깨닫게 해줄 말한 내용에 관한 것임이 분명하다.

20 사흘 전에 잃은 네 암나귀들을 염려하지 말라 찾았느니라 온 이스라엘이 사모하는 자가 누구냐 너와 네 아버지의 온 집이 아니냐 하는지라 

'암나귀들을 염려하지 말라' 
본절 초반부에서 사무엘은 사울이 묻기도 전에 먼저 암나귀에 관한 언급을 한 뒤 그 문제를 해결해 줌으로써, 자신이 신뢰할 만한 하나님의 선견자임을 강력히 시사한다(단 2:26-46). 이같은 언급은, 사울이 하나님에 의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워졌음을(16절) 알려야 했던 사무엘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조치였다.

'온 이스라엘이 사모하는 자가 누구냐' 
이것은 히브리 원문의 정확한 번역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1) '누구를 위하여 이스라엘의 사모함이 있겠느냐', 혹은 
(2) '누구에게 이스라엘 안의 사모할 만한 것들이 속하겠느냐' 등의 
두 가지 중 하나로 번역해야 할 것이다. 

그 중 첫째 번역은 장차 왕으로서의 사울의 높은 신분을, 
둘째 번역은 장차 왕으로서의 사울에게 홀러들어가게 될 재물을 강조한다. 
아무튼 이 두가지 번역 모두 사울에게 돌아갈 왕권(王權)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사모'(헤므다트 이스라엘)는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게 될 이스라엘의 왕권과, 또한 그 왕권으로 인해 소유하게 될 모든 값지고 귀중한 것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너와 네 아비의 온 집이 아니냐' 
이것은 위의 첫번째 번역을 취하면 '너와 네 아비의 온 집을 위함이 아니냐'로, 그리고 나중 번역을 취하면 '너와 네 아비의 온 집에게가 아니겠느냐'로 각각 번역된다.

21 사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하니

'나는...가장 작은...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이는 사울의 왕권(王權)을 암시하는 선지자 사무엘의 말(20절)에 사울이 겸손히 대답하는 모습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일련의 행동(4, 5, 10절, 10: 22)으로 보아 분명 초기 사울은 겸손, 성실, 효성의 덕(德)을 지닌 자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사울의 이러한 인간적인 덕도 여호와를 향한 선실한 신앙에 뿌리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왕위에 오르고 백성들의 인기를 의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서서히 사라져 결국 교만한 자가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실로 사울의 경우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 4:6, 벧전 5:5)는 진리를 입증한 경우가 되고 말았다.

'베냐민 사람이 아니오며' 
한편 사울의 겸손한 발언 저의에는 실제로 이스라엘 12지파 간의 세력 분포에 관한 현실적 이해가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베냐민 지파는 역사적으로 숫적 열세를 면치 못했으며(민 1:20-46, 26:511 주석 도표 참조), 더욱이 사울의 이같은 말 속에는 사사기 20장에서 발생했던 내전의 상흔이 아직까지 베냐민 지파에게 남아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22 사무엘이 사울과 그의 사환을 인도하여 객실로 들어가서 청한 자 중 상석에 앉게 하였는데 객은 삼십 명 가량이었더라 

'객실로 들어가서' 
'객실'은 산당에 부속되어 있던 별실로서, 이곳은 화목제를 드린 후 그 제물을 먹던 방이었을 것이다(1:4, 8, 18). 한편 이때에 일반 백성들은 산당의 마당에서 화목 제물을 먹었음이 분명하다.

'청한 자...삼십 명' 
여기 30명은 성읍의 유력 인사들이었을 것이다. 한편, 이처럼 왕을 세을 때에 손님을 초청하는 일은 고대의 보편적 관습이었뎐 것같다. 그 증거로서 성경은,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모반을 하면서 손님 200명을 초대했던 사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삼하 15:10-12). 그러므로 틀림없이 이들은 (1) 특정인이 왕으로 세워졌음을 확증하며(13절 주석), (2) 또한 그 특정인으로 하여금 자신이 왕으로 채택되었음을 일깨우게 하는 증인들이었을 것이다.

'수석에 앉게 하였는데' 
이것은 높은 사람을 예우하는 고대의 일반적 관습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사무엘이 사울의 사환까지 함께 대우한 것은 그를 왕의 신하로서 예우한 셈이다.

23 사무엘이 요리인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주며 네게 두라고 말한 그 부분을 가져오라 

'넓적다리와 그것에 붙은 것' 
이것은 사무엘이 그의 예언자적 선견지명으로 이미 요리인에게 간직해 두라고 지시했던 희생 제물로서, 곧 사울과의 화목 잔치용 음식물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넓적다리'(쇼크)가 제사장 몫인 우측 넓적다리인지(레 7:32-34), 아니면 일반 경배자 몫인 좌측 넓적다리인지는 확실치 않다. 초기 주석가들은, 사무엘이 공식 위임된 제사장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일반 평민 몫인 좌측 넓적다리라고 보았으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즉 당시 산당의 실질적인 제사장 역할은 사무엘이 감당했으므로, 당연히 그에게 제사장 몫인 우편 넓적 다리가 돌아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붙은 것'(헤알레하)은 넓적다리 위에 부어진 양념 국물이라든지 (Dathe & Maurer), 또는 콩팥(kidney) 같은것(Thenius)이 아니다. 그것은 제단에서 화제로 드려지지 않은, 제사장 몫의 넓적다리 고기에 붙은 기름(fat)을 가리킨다.

'네 앞에 놓고 먹으라' 
아무튼 대선지자 사무엘이 사울을 수석(首席) 자리에 앉히고, 또한 가장 귀한 음식을 미리 준비케 하였다가, 그에게 준 것은 분명 그를 왕적 지위로 예우했음을 뜻한다.

24 요리인이 넓적다리와 그것에 붙은 것을 가져다가 사울 앞에 놓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보라 이는 두었던 것이니 네 앞에 놓고 먹으라 내가 백성을 청할 때부터 너를 위하여 이것을 두고 이 때를 기다리게 하였느니라 그 날에 사울이 사무엘과 함께 먹으니라 

'사무엘이 사울과 함께...담화하고' 
이 때의 담화 내용은 전반적으로는 사울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는 문제와 관련된 것임이 분명하다(19절 주석). 그러나 구체적으로 이때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한 것은, 아마도 그당시 이스라엘의 특별한 정치.종교적 상황에 관한 것과, 그리고 사울로 하여금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소명되었음을 스스로 인식케 하는 정도의 예비적인 수준의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사울에게 대한 구체적인 하나님의 말씀은 그 다음 날에야 사무엘이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25 그들이 산당에서 내려 성읍에 들어가서는 사무엘이 사울과 함께 지붕에서 담화하고 
26 그들이 일찍이 일어날새 동틀 때쯤이라 사무엘이 지붕에서 사울을 불러 이르되 일어나라 내가 너를 보내리라 하매 사울이 일어나고 그 두 사람 사울과 사무엘이 함께 밖으로 나가서 

'일찌기 일어날새...지붕에서 사울을 불러' 
이는 사울이 지붕 위에서 잠을 잤음을 시사한다. 즉 사울은 연일 계속된 긴 여행과 전날의 긴 담화등으로 인해 그대로 지붕 위에서 잠을 잤던 것이다. 한편 칠십인역(LXX)은 이 사실을 뒷받침이나 하려는듯 25절의 뒤에 '그들이 지붕 위에 사울을 위해서 자리를 깔아 주므로 그가 누웠다'라는 말을 삽입시키고 있다.

27 성읍 끝에 이르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사환에게 우리를 앞서게 하라 하니라 사환이 앞서가므로 또 이르되 너는 이제 잠깐 서 있으라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네게 들려 주리라 하더라 

'사환으로 우리를 앞서게 하라' 
이것은 사무엘이 사적(私的)으로 비밀리에 사울에게 기름을 붓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네게 들리리라' 
이것은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우기 위한 본격적인 헹동을 취하겠다는 뜻으로서, 곧 기름 붓는 일을 가리킨다(10:1). 그러므로 여기서 사무엘은 하나님의 뜻을 말로써가 아닌 행동으로써 사울에게 전한 것이다. 물론 이때 사무엘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사울에게 기름을 부었는데, 그이유는 당시 사울이 왕으로 세워진 사실이 널리 알려질 경우, 그 절차상의 문제에 따른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