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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내래 죽어도 순종합네다> P1

LNCK 2023. 2. 23. 11:01

◈도서 <내래 죽어도 순종합네다>  P1              <지난 글 보기>

최 광 목사

[머리말]

나는 주님의 은혜로 1998년 8월부터 중국에서 탈북자들을 대상으로 
북한 선교사역을 시작하였다. 

당시 많은 사람이 내게, 북한 선교는 시기상조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중국 대륙에 깊은 곳에서 10명의 탈북자들을  
북한 선교사들도 키우는 사역을 진행했다.   *길림성 길림시

주님의 도우심과 은혜로 1년 후, 5명의 탈북자 출신 북한선교사들이 양성되었다. 
기적의 시작이었다. 

1년 전까지만 해도 먹을 것과 입을 것만을 찾아 헤매던 탈북자들이 
양육받은 후 직접 (성경통독) 선교사가 되어

다른 탈북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양육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다. 
  
탈북자에 의해, 탈북자가 선교사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10년이 걸려도 이루기 힘든 일들을 
탈북자 출신 선교사들은 1년이면 이루어내었다. 

3년이 지나자 탈북자 출신 선교사들에 의에서만 
250명의 탈북자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였고 
70명 이상의 탈북자 출신 북한 선교사들이 양성되었다. 

그들 중 17명의 선교사들은, 북한땅으로 끌려가 
북한 보위부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선포하고 순교의 길로 갔다.  

이것은 탈북자들을 통해 주님이 하신 일이다. 
주님이 이 놀라운 기적을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 숨막히는 사연과 은혜와 감동을 
<북한선교 실화 시리즈 1부 : 내래 죽어도 좋습네다>를 통해서 소개했다. 
              *지난 글 보기에 있음

 

하나님의 일은 어렵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크고 중요한 일일수록 더욱 그렇다. 
북한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 역시도 그랬다. 

북한선교의 일선에서 사역하던 나는 큰 어려움을 당했다. 
나와 함께 수십명의 탈북자가 중국 공원에 체포되었다.  *76명, 2001년

그들은 북한으로 끌려갔고, 나는 한국으로 추방되었다. 
그러나 신앙은 어려운 때일수록 더욱 더 빛나고 힘을 발한다. 

나는 많은 역경과 고난 속에서, 주님이 주시는 힘과 위로, 지혜로 다시 일어났다. 
붕괴 직전까지 갔던 탈북자 통독사역은 다시 일어났고 
더 원숙하고 깊이 있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이것이 주님이 함께 하는 북한선교의 생명력이다. 
형통이 아니라 어려움 속에서 더욱 더 빛나는 생명력이다. 

나는 사역 중에 있었던 여러 하나님의 동행하심의 간증들을 
<북한선교 실화 시리즈 2부 : 내래 죽어도 가겠습네다> 책을 통해서 소개했다. 
당시는 사역 현장이 중국이었기에, 책의 자료를 발굴하는데 
여러 가지 물리적, 공간적 어려움이 많았다. 

또한 혹시 책을 통해 노출될지도 모를 민감한 안전 문제들도 다수 포함하고 
있었기에, 두 번째 책이 나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이번 <책의 3권, 내래 죽어도 순종합네다>에 소개된 사역은, 
중국이 아니라 한국에서 진행된 사역이었고, 
사역의 공개로 따르는 위험이 별로 없어 
사역을 진행하는 동시에 글로 정리할 수 있었다. 

독자분들이 이 책을 통해서, 현재 북한 선교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확인하며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공감하실 수 있었으면 좋겠다. 

또한 여러분께 북한선교에 관한 열정이 
다시금 뜨겁게 일어나기를 깊이 소망한다. (머리말 끝)


◑1장  한국 사역의 시작 

"선생님, 한국에 오면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한 탈북자의 고백)
한국에 오면 모든 고생이 끝난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힘들고 앞길이 암담하고 
이 지겨운 삶을 언제까지, 왜 계속 살아야 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

♣'한국에서 사역을 다시 시작해라!' 

나는 주님의 이 음성을 듣고 2011년 8월부터 
서울 온수동에 있는 사택에서 교회를 개척했다. 

교회 이름을 <황금종교회>로 짓고 탈북민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교회 숫자가 부족한 나라가 아니다. 

요즘에는 교회를 개척하면, 많은 경우 도중에 문을 닫는다고 했다. 
2008년 중국으로 다시 들어가기 전에도 
서울에서 몇 년간 탈북민 교회를 개척해 보았지만, 별로 뚜렷한 열매는 없었다.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울에서 탈북민을 대상으로 교회 개척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집에 쌀이 떨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안 주시면 안 먹기로 하고, 기도하며 그냥 앉아 있어 보자' 

나는 대책 없이 앉아서 혼자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님, 서울에서 북한 교회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은 '하루에 3시간 이상 기도하라'는 음성을 주셨다. 

그때부터 나는 매일 3시간 이상씩 기도하면서 기다렸다. 
'주님이 하라고 하셨으니, 주님의 인도하심이 있을 거야..' 

그때 김광신 목사님과의 만남을 허락해 주셨다. 
김광신 목사님은 미국 은혜한인교회의 원로 목사님이시다. 

은혜한인교회 북한선교국 국장이신 홍장로님의 소개로 
나는 서울은혜교회에 있는 김광신 목사님의 사무실로 갔다. 

백발의 노인이 나를 찬찬이 쳐다보시다가 물었다. 
'최선교사, 북한선교를 어떻게 할 거지?' 

나는 지금까지 해왔던 북한선교사역을 말씀드리고 
2011년 초에 하나님이 주신 마음에 대해서 말씀드렸다.

김광신 목사님은 시선을 아래로 두시고, 내 말을 관심있게 듣고 계셨다. 

"하나님은 저에게 북한출신 북한선교사 5천명을 일으키라는 비전을 주셨습니다." 

이 말을 하는 순간, 김목사님이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셨다. 
눈 속에서 뭔가 번쩍이는 것이 마주쳤다. 

김목사님이 기분 좋은 얼굴로 말씀하셨다. 
"그래 맞아, 그 정도는 되어야지! 
좋아, 나는 북한선교를 위해, 한국에도 북한대형교회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
그러면 그 교회를 중심으로 북한 선교가 진행이 될 거야!' 

나는 이 분이 큰 안목을 가지신 분이라고 느꼈다. 
현재까지 북한선교는, 많은 단체와 선교사가 각자 나름대로 일을 벌이고 
중구난방으로 진행해 왔다. 

북한과 북한사람에 대한 이해 없이 
의욕만 충만한 상태에서 사역을 진행하다 보니 
시행착오도 많았고 부작용도 많았다. 

반면에 북한 선교가 상대하는 북한정부는 
미국과 전 세계를 상대로 군사전략과 6자회담을 진행하고 
주민들을 상대로는 3대까지 정권을 세습하는 프로 단일팀이다. 

이 때문에 북한 선교는, 소모되는 비용과 노력에 비해 
정말 성과가 적은 영역이다. 

북한선교를 장기적인 안목으로 바라보면 
반드시 북한선교의 중심기관 있어야만 했다. 

김광신 목사님도 이 문제를 꿰뚫어 보셨기에 
북한선교에 중심되는 교회를 구상하고 계셨고 
중심이 되려면, 대형교회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계셨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5천명 북한선교사 양육 비전"과 
김광신 목사님의 "북한선교 비전"이 서로 맞아떨어졌다. 

김광신 목사님은 몸을 뒤로 젖히고 앉으시면서 만족한 얼굴로 말씀하셨다. 
"일단 우리 교회 파송선교사로 사역하세요!" 
이때부터 나는 은혜한인교회 파송선교사가 되었다. 

북한 선교는 현재 두 개의 방향에서 진행된다. 
한 방향은 "정문선교" 라고 불리는 북한내부에서 공식적으로 하는 사역이다. 

이 방향에서 일을 하시는 분들은, 합법적으로 북한 정부와 협력해서 일하기에 
위험 부담이 없다. 

이들은 북한정부가 정식으로 건립한 봉수교회 와 칠골교회를 후원하기도 하고 
북한 정부 소개하는 가정교회를 시찰하고 후원한다. 

또한 북한에 고아원, 병원, 국수공장 과 같은 구호단체를 세워 
북한을 돕는다. 
대부분 북한 기독교 연맹의 주관하에, 그들의 통제 속에서 사역을 진행한다. 

또 다른 방향은 "후문선교" 라고 불리는 비합법적인 방식이다. 
이 방면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탈북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다시 북한으로 들여보내 지하교회를 만들거나 
지하교회를 통해 굶주리는 북한 주민들을 후원한다. 

또 중국을 통해 은밀한 방법으로 
북한에 성경과 기독교 영화와 설교 등을 담은 USB, CD 로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진행한다. 

이들은 직접적으로 북한 주민들을 대상으로 사역을 진행하지만 
비합법적인 방식이기에 위험 부담이 크다. 

김광신 목사님은 1986년부터 북한선교를 시작하신 분이었다. 
미국에 대형 한인교회를 이끄시는 분이다 보니 
처음에는 은혜한인교회 내에 북한선교국을 만들었고 
이 단체를 통해 "정문 선교" 방식으로 북한선교를 진행하셨다. 

김목사님은 북한의 국수공장을 세우기도 하고, 고아원도 세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방식의 선교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북한 정권이 외국인들에게 보여주는 겉모습은, 
노동자와 농민들이 다같이 평등하고 자유롭고 풍요롭게 살아가는 나라였다. 

그러나 북한 내부 실정을 하나하나 알아가다 보니 
또 다른 북한의 모습들이 보였다. 

북한정부는 모든 외국인을 통제하고 감시했다. 
외국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24시간 늘 함께 다니면서 
일반인들과의 접촉을 금지했다. 

외국인들이 있는 공간에는 어김없이 방마다 도청장치가 되어있었고 
미리 정해진 스케줄 대로만 움직여야 했다. 

길을 가다가 일반 주민들과 접촉이 불가피한 경우에는 
늦게 출발하거나, 예정 시간보다 빨리 돌아와야 했다. 

이 때문에 일정이 뒤죽박죽 엉키면서, 서로 얼굴 붉히고 다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일반인들은 통행증이 없으면, 평양에 들어올 수 없었다. 

평성에서 1시간 떨어진 이웃도시 평양으로 가는데도 
완전무장을 한 군인들이 지키는 검문소를 2~3개 통과해야만 했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평양에 살 수 없었다. 
평양에는 핵심 지배계층 들만 살고 있었고 
지방에는 동요계층과 적대계층 으로 분류 된 사람 살고 있었다. 

*동요계층(動搖階層)은 북한에서 사용되는 계급구조상의 제2계급을 말한다. 
 평민, 양민층에 해당하며, 사실상 북한인들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모든 관직은 출신성분이 좋은 사람들만 가질 수 있었다.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배급과 교육, 직장 등 모든 영역에서 특별대우를 받았다. 

 

▲2008년 2월, 남한의 인천공항에서 아시아나 항공의 전세기가 
직접 평양의 순한 비행장으로 날아갔다. 놀라운 일이었다. 

노무현 한국정부와 김정일 정부의 허용 하에 
미국 뉴욕 필하모닉 교향악단이 들어간 것이다. 

그들과 전직 주한 미국대사,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 
평양과기대 김진경 총장, 통일교가 운영하는 평화자동차 현지 사장 등 
정재계의 특수 고위층으로 이루어진 인사들이 함께 참석했다. 

뒤이어 판문점을 통해서 공연에 필요한 물자와 장비, 인력들과 기자단들이 
개미떼처럼 평양으로 몰려들었다. 

김평안 집사님은 은혜한인교회 북한 선교단을 이끌고 
미리 평양에 거주하고 있었기에 
이 역사에 기록할 만한 사건을, 객관적인 눈으로 목격할 수 있었다. 

평양 시내에는 계엄령이 떨어졌다. 평양 거리에는 외국인들이 떠날 때까지 
주민들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일반 주민들의 남루한 옷차림이나, 그들이 식량을 등에 지고 가거나 
손수레에 무거운 짐을 끌고 다니는 모습들이 
기자들의 카메라에 보이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일반 주민들이 양식과 생필품들을 구입하는 장 마당도 
행사기간 동안은 폐쇄되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 
만성적인 전기 부족으로, 늘 어둡고 캄캄하던 평양시내가 
갑자기 화려해지고 밝아졌다. 

모든 네온사인과 전등에 불이 들어와서 
있지도 않은 풍족함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대신에 지방과 일반 주민들에게 간신히 공급되던 모든 전기 공급은 중단되었다. 
호텔들은 화려했지만, 일반 아파트에서는 전기와 물 공급도 끊겼다. 
주민들은 밤에 잘 때도 추위에 벌벌 떨면서 자야했다. 

2008년 2월 28일, 동평양대극장 에서는 
북한 인공기와 미국 성조기가 나란히 걸리고 
뉴욕 필하모닉 교향악단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그곳에 모인 북한 사람들은, 깨끗하고 고생한 흔적이 전혀 없는 사람들 뿐이었다. 
그들은 남한사람들 못지않게 세련된 모습들과 옷차림 들을 하고 있었다. 

대극장에서 수천명의 인파들은, 감동 속에서 박수를 보내고 
눈물을 흘리면서 공연을 관람했다. 

그러나 공연장 밖의 사정은 달랐다. 
평양시 전역에 호구조사 명령이 떨어졌다. 

야밤에 예고도 없이, 보위부와 안전원들이 집들을 들이닥쳐 
수상한 사람이나 통행증이 없는 사람들을 찾았다. 

서방 기자들과 외국인들에게, 북한의 강제 총살과 같은 인권 문제나 
국가에 해가 되는 사진이나, 정보를 전달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북한 주민들에게 이런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연례행사처럼 겪는 일이라 대수롭지도 않았다. 

북한 주민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뉴욕 필하모닉 공연단이 몰고 온 
잠깐의 불편이 아니라, 그 후의 결과였다. 

이렇게 미국과 북한 정권과의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어 
혹시라도 옛날처럼 미국 정부가 북한에 
대규모 식량원조를 하게 되는 상황을 가장 싫어했다. 

나는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왜 북한 주민들이 대규모 식량원조를 반가워하지 않는지?'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북한 정권이 양식이 없어 배급을 주지 못하기에 
한시적으로 장마당이 허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장마당을 통해 주민들은 개인 상거래를 시작했고 굶주림을 해결했다. 
배급제도 때보다 풍족 했고,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얼마간의 자유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 정권에 다시 양식이 들어오면 
배급제는 부활하고, 또 다시 극심한 통제사회 속으로 들어가고 말 것이다. 

그때는 다시 굶주림과 무서운 억압 속에서 살아야 한다. 
북한 주민들은, 이빨 빠진 이리 같은 지금의 북한 정권이 
미국과 외국의 원조로 다시 힘을 얻을 것이 걱정이었다. 

뉴욕필하모닉 공연은, 평양의 소수 지배계층들에게는 감동이었을지 몰라도 
살얼음판 위해서 조심스럽게 생계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북한 주민들에게는 
얼음이 깨지는 차갑고 날카로운 소음일 뿐이었다. 

▲북한이 외국인들에게 자랑하는 것 중에 하나가 무상치료 시스템이다. 
김평안 집사님은 병원들을 돌아보았다. 예상하지 못했던 광경이 펼쳐졌다. 

인민들에게 무상치료 혜택을 주는 병원에서는 
링거병 대신에 맥주 병이나 사이다 병에 수액을 담아 사용하고 있었다. 

주사 바늘도 모자라, 한 개의 바늘을 대충 소독해서 돌려 쓰다 보니 
주사바늘을 통해서 전염병이 옮겨 다니고 있었다. 

국가경제가 몰락한 이후로, 무상으로 주는 약은 전혀 없었다. 
모든 약품을, 환자가 직접 장마당에서 사와서 의사들에게 주어야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정맥주사 링거액도 부족하여 설탕물을 섞어서 만들고 
수술할 때 피를 닦는 거즈도 계속 빨아서 사용하고 있었다. 

전기도 잘 들어오지 않았다. 
전기가 들어올 때도 있었지만, 예고 없이 들어왔다가, 예고 없이 나가 버렸다. 
정밀 수술할 때 필요한 조명도 제대로 켤 수 없었다. 
북한의 만성적인 경제난으로 인해 
북한 의료시스템이 배급시스템과 마찬가지로 붕괴된 지 오래였다. 

북한정권과 아주 친밀하게 지내던 독일의사 한 분이 
북한 병원을 돌아 보고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 소녀가 급성 맹장염 수술 받는데 
마취제가 없어서 의사들이 그 소녀를 꽁꽁 묶어 놓고 수술을 했다. 

그렇게 수술은 끝났지만, 소녀는 고통을 이기지 못해 그만 숨지고 말았다. 
더 어처구니 없는 것은, 아무도 그 일에 놀라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수술을 진행했던 북한 의사들은, 늘상 있는 일이라는 듯 놀라지 않았다. 

 

북한의 현실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독일인 의사는 
그때부터 의사직을 내려놓고, 남한과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북한의 현실을 알리고, 북한인권 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김평안 집사님은 눈 앞에 현실에 화를 내면서 물었다. 
'아니 국제사회에 지원하는 그 많은 의약품은 어디로 가나요?'

돌아오는 대답은 퉁명스러웠다. 
'그런 약품들을 저장하고 보관하려면 냉장 시설이 있어야 하는데 
병원에 그런 건 없습니다. 
있다고 해도, 전기가 한 달에 몇 번 정도만 들어오고 하는데 어떻게 사용합니까?' 

김평안 집사님은 남한이나 미국 의사들이 북한 병원들을 방문하면 
할 말을 잃어버리고 경악한다는 말이 무엇인지 직접 체험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북한 병원들의 형편이, 전부 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평양에 있는 대형 병원들과 일부 특수 병원들은, 형편이 좀 나은 것 같았다. 

외국인들만 전용으로 사용하는 평양친선병원이 있었고 
조총련계 재일 상공인 김만유 씨가 사재를 털어서 만든 김만유 병원과 
한국의 어느 재단에서 후원해서 지은 평양안과병원도 있었다. 

하지만 이 병원들은 북한 일반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일반 노동자, 농민들,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이런 병원들을 텔레비전에서만 볼 수 있었다. 

고위급 간부들은 전용 병원을 따로 가지고 있었다. 
봉화 진료소는, 김정일을 포함한 최고위층 중앙당 장관들과 그 가족들만 
진료 받는 곳이다. 이곳에는 남한에 못지않은 최신 의료설비가 갖춰져 있다. 

그 아래로 남산 진료소는 중앙의 차관급 간부들과 
항일빨치산 출신 가족들만 진료받는 두 번째로 좋은 병원이다. 

다시 그 아래로 평양 제1, 2, 3 병원들이 있고 평양 주민들만 이용할 수 있다. 

 

남한과 미주지역을 포함한 세계각국에서부터 
정말 많은 의료지원이 북한으로 들어가고 있고, 직접 세운 병원들도 있었다. 

김평안 집사님은 그런 병원들도 돌아보았다. 
외국에서 지원으로 들어온 모든 현대적인 의료기계들을 
사용하지 않고 방치하고 있었다. 

북한의 전기 사정도 열악하지만, 생산되는 전기의 질 역시 열악했다. 
고르지 못한 충격적인 전기가 공급되니, 이 정밀한 기계들은 
며칠 버티지 못하고 고장나 버렸고, 한 번 고장이 나면 고칠 수도 없었다. 
비싸고 정밀한 기계이다 보니, 버리지도 못하고 그저 방치되어 있는 것이다. 

남한에서 지어 준 병원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설계부터 자재까지 다 수입해서 지었지만 
시공은 북한의 노동자들이 대충 했기에 
사방에서 물이 새고, 여기저기 보수가 필요한 곳들이 있었다. 

왜 건물을 수리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모든 건축자재가 외국에서 수입한 것들이라 대체할 기자재들이 없다고 했다. 

 

설사 일이 잘되어, 이 최첨단 기자재 들과 병원들이 돌아간다고 해도 
북한 주민들의 삶에는 그다지 영향이 미치지 못 했고 
평양의 간부들에게만 좋은 일일 뿐이었다. 

북한선교를 하는 단체들이 신의주, 회령, 나진 선봉 쪽에서 
북한을 돕는 사역을 처음 시작하면 
평양에서 나온 보위부 사람들이 꼭 빠지지 않고 참여한다. 

이들은 사업의 모든 것을 감시해서, 어떤 종류의 물자가 얼마만큼 들어오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평양에서 부터 지시하고 조종한다. 

이들은 남한이나 해외동포들이 북한에 지원을 하려고 하면 
제일 먼저 평양에 지원하라고 했다. 

평양은 북한을 지배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또 다른 나라 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평양에 있는 고아원이나 국수공장과 병원 같은 곳은 
서너 군데서 겹치기로 지원을 받아 풍족했다. 


▲2008년 7월 16일, 평양에서 봉수교회 증축 헌당 예배를 위하여 
전세계 수많은 목사님과 인사들이 수백 명이나 몰려와 예배를 드렸다. 

김평안 집사님도 미국인 인사 자격으로 예배에 참석하였다. 
김평안 집사님은 평양에 오랫동안 거주하면서 
봉수교회를 관심있게 지켜보았다. 

북한 정부에서, 북한에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선전하고 있고 
그 실체를 보여 주는 대표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양 주민들 중에는 아무도 그런 교회가 있다는 것도 몰랐고 
알았다고 해도 들어갈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 

봉수교회는 외국인들이 오지 않으면 문을 열지도 않았다. 
외국인들이 올 때마다 예배 참여하는 북한주민들도 
북한에서 사전에 준비한 인원들 뿐이었다. 

이들은 외국에서 종교계 인사들이 올 때면 
예배라는 행사에 동원되었다가 돌아가는 사람들일 뿐이다. 

예배 때 외국인들이 내는 모든 헌금은 
감시하고 있던 보위부 들이 국가로 가져갔다. 

봉수교회는 북한 정권이 외국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든 가짜 교회였다. 

▲김평안 집사님과 함께 김광신 목사님은 
더 이상 북한 정권이 보여주는 것들만 보려하지 않았다. 
북한의 지하교회 교인들을 찾기 시작했다. 

625때 미처 남한으로 피신하지 못한 많은 교인들이 북한에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은, 이미 북한 정권의 핍박에 의해 죽었거나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지만, 
그 후손들이 깊은 산골 오지로 쫓겨가서 살고 있었다. 

김광신 목사님과 김평안 집사님은 그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다. 
오랜 노력 끝에 한 명씩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의 삶은 정말 고통스러웠다. 
그들은 북한사회에서 언제나 반동분자 신분이었다. 

그들은 도시에서 살 수 없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외진 곳으로 추방당했다. 

자녀들은 늘 학교에서 사상투쟁의 대상이 되었고 
공부를 잘하고 능력이 있어도 대학에 갈 수 없었고 
군대조차 갈 수 없었다. 

직장도 가장 열악한 곳으로 강제로 보내졌다. 
그러나 그들은 이 모든 고통들을 모면하겠다고,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앙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믿지 않는 가정의 자녀들과는 결혼하지 않으려다 보니 
북쪽 끝에서 사는 장로님의 아들과, 남쪽 끝에서 사는 권사님의 딸이
서로 얼굴도 보지 못하고, 결혼식 날 처음 만나서 결혼했다. 

결혼해서 자녀들이 태어나면, 그들에게도 함부로 신앙을 전수하지 못하고 숨겼다. 
그 큰 핍박과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들은 숨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그들이 진정한 북한의 지하교회 교인들이었다. 

그들은 북한 정권의 야만적이고 잔인한 기독교 탄압들에 대해서 
많은 소식을 전해 주면 절절하게 말했다. 

"지금까지 NGO 들이나 외부에 정부 관계자들이 북한에 들어와서 
한 번이라도 평범한 북한 사람들과 만나 진솔하게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 악한 북한 정권만 잘 되는 원조가 아니라 
북한 주민들의 자유입니다." 

북한은 철저하게 두 개로 분리된 나라였다. 
지배계층들만 살고 있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평양 공화국'이 있고 
다른 하나는, 굶고 병들고 북한 정권에 고통당하는 북한 주민들이 사는 세상이었다. 

김광신 목사님은 수십년동안 북한을 도우면서 
북한 정부와 함께 진행하는 모든 후원과 선교사업이 
결과적으로 북한 정권 만들어 주는 일이었지,
실제로 주민들에게는 아무 혜택과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고 결론내렸다. 

김광신 목사님은 기존의 "정문 선교" 방식의 북한선교를 내려 놓으셨다. 
이제는 진정으로 북한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고 
북한 주민들의 삶에 실제적인 도움이 되는 "후문 선교"를 진행하기로 
북한선교의 방향을 바꾸셨다

김광신 목사님은 한국에서 탈북자들을 대상으로 
북한선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시려고 동역자를 찾고 있던 중
지인들을 통해 나를 만났고, 동역을 약속하셨다. 

▲서울시 온수동에 있는 우리집, 사택 교회로 탈북자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청소년들만 받는 교회 라고 말한 적이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청소년들만 모여들었다. 

20평이 채 안 되는 작은 집에, 50명의 북한 청소년들이 모여들었다. 
콩나물시루 처럼 붙어 앉아서 예배 드리다가 
사람들이 계속 들어오면, 서서 예배를 드렸다. 

사택 교회의 이 사정을 알고 마음 아파하시던 강명순 집사님이 
본인소유의 빌딩 지하를 무료로 내주셨다. 

때맞추어 남서울교회 연합여전도회가, 바자회를 통해 리모델링 비용을 마련해
주셔서 2012년 4월부터 영등포구 당산동에 50평 크기의 성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원룸 건물 지하이지만, 새로 리모델링을 해서 사택교회보다 깨끗하고 넓었다. 
새로운 성전으로 이사오자, 북한 청소년들이 더 몰려왔다. 
주일에는 90명 이상이 오기도 했다. 

새 성전에 온 지 3개월 만에 다시 빽빽하게 붙어앉아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김광신 목사님이, 새로 장만한 지하성전에 와서 보시더니 말씀하셨다. 

"대형교회를 하려면 건물 있어야 돼! 
최선교사가 나하고 같이 미국으로 갑시다. 
가서 우리 교인들에게 호소해 봅시다." 

▲김영녀 전도사님과 정봉철 형제, 김유정 자매가 나와 함께 미국으로 출발했다. 
정봉철 형제는 탈북민 출신 순교자 정용철 선생의 아들이다. 

 

봉철 형제는 아버지의 순교를 통해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간증했고 
유정 자매와 영녀 전도사는, 탈북민들에게 임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했다. 

나는 오랫동안 지속해온 북한 선교보고를 하였고 
김광신 목사님도 옆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셨다. 

은혜한인교회 성도님들은 뜨겁게 호흥해 주셨다. 
많은 분들이 작정헌금을 하셨고, 그 자리에서 많은 헌금을 주신 분도 계셨다. 

어떤 분은 집을 사려고 넣어두었던 적금까지 깨서 헌금해 주셨다. 
뉴욕 WMBC 방송국 사장이신 주목사님도 많은 돈을 선뜻 헌금해주셨고 
방송국을 통해 수차례 우리 사역을 방송해 주셨다. 

▲최순교 선생은 중국에서 통독반 2기생으로 공부했고 
북한 선교사로 세워진 선생이었다. *본명 최원 목사로 현재 활동 중

그는 한국으로 와서 총신대학교에 다니다가 
8년 전에 미국 유학을 떠났지만 
공부를 끝내지 못하고 힘든 이민생활에 영적으로 피폐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리 팀이 여러 교회를 순회하면서 간증집회를 하고 
(한인)방송에도 나오는 것을 보고, 우리와 함께 동행을 시작했다. 

순교선생은 봉철형제와 유정자매가 담대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하고 
기도모임을 인도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들을 보며, 탈북자 했던 자신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떠올렸고 
자신을 향한 부르심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 

'중국에서 살 때 작은 꼬마였던 봉철이가 
어느새 저렇게 커서 큰 일을 하고 있는데 
나는 지금 도대체 무엇을 한단 말인가?' 

충격을 받은 순교 선생은, 그 길로 미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우리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제부터는 북한선교에 남은 인생을 헌신하겠다고 하나님께서 서원했다. 

나는 매우 기뻤다. 
이번 미국 방문 길에 얘기치 못했던 귀한 수확이었다. 

♣집이 된 교회 
황금종교회에는 집이 없는 청소년들이 많았다. 
정부에서 탈북민 들에게 임대주택을 주기는 하지만 
21살 이하 청소년들에게는 주지 않는다. 
줘봐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어린 청소년들 중에는, 어머니와 함께 한국으로 들어왔다가 
엄마가 재가를 하면, 그 집을 나와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동철이와 유진이가 그랬고, 철명이, 광철이, 정철이 등 
집 없는 청소년들이 계속 늘어갔다. 

이들의 주거 문제가 급했다. 
처음에는 신촌 쪽에 급하게 조그만 방을 하나 얻어 
그곳에서 자기들끼리 임시로 거처하게 해 주었다. 그랬더니 난리가 났다. 

며칠에 한 번씩 내가 교회 집사님과 숙소로 가보면 
방에 담배 냄새가 진동을 했고, 술병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온 사방에는 라면 봉투가 널려 있었다.
호되게 꾸중을 해 놓고 와도 그때뿐이었다. 

그러다가 영등포 쪽에 예배 처소가 생기자, 녀석들을 몽땅 데리고 왔다. 
'매일 같이 살면서 통제하면 어떻게 좀 되겠지..'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때부터 교회는, 주일이면 성전이 되지만 
평일에는 집도 없고 갈 곳도 없어 빈둥거리는 녀석들의 집이 되었다. 

나는 교회 사역자와 성도들과 함께 
매일 저녁 7~10시까지 기도 모임에 가졌다. 

'매일 3시간 기도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은 후에는 
이 시간을 생명처럼 시켰다. 

녀석들도 '주님이 만지시면 언젠가는 우리와 함께 기도하겠지' 싶어서 
억지로는 권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니, 녀석들도 아무래도 하루 세끼 공짜로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섬겨주는 곳에, 잠만 자러 들어오기는 미안한 모양이었다. 

점차 한두 명씩 기도모임에 얼굴을 비치기 시작했다. 
그래봐야 종일 술 마시고, PC 방에 앉아 있다가, 
기도모임이 끝나기 바로 전에 쭈뼛거리고 들어와서 
뒤에 가만히 앉아서 기도하는 척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기도모임이 끝나면 다시 PC 방으로 나갔다가 
새벽 3시가 넘어 들어와서 자고, 낮 12시가 넘어서야 깨어났다.

나는 녀석들이 체면이라도 챙긴 답시고 
잠깐 동안 기도 모임에 들어오는 것이 대견해 내버려 뒀지만 
아무래도 답답한 모양인지.. 전도사님들은 아이들을 꾸짖었다. 

'이놈들아, 황소처럼 다 큰 것들이 
이제는 생각도 그만큼 할 것 아니야? 이게 뭔 짓들이야? 
기도모임이라도 제대로 참가 해라!' 

오늘은 전도사님들이 잔소리 하고, 내일은 권사님 집사님들이 권면하니
미안하기는 한지 녀석들이 기도모임 시간에, 딴 데 가지 않고 잘 앉아있기 시작했다. 

저녁 기도 시간이 되면, 성전에 불을 다 꺼 버린다. 
그러면 십자가의 빨간 빛만이 예배당 안을 희미하게 비추었다. 

찬송가를 큰소리로 틀어놓고, 별다른 기도 인도 없이 
7~10시까지 각자 알아서 기도했다. 

사역자들과 집사님들은 찬송가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큰 소리로 방언을 하면서 기도했다. 기도생활이 습관이 되신 분들이라 
하루 3시간을 별로 길게 느끼지도 않았다. 

아이들은 기도 시간에 뒷자리에 방석을 이부자리처럼 쭉 펴 놓고 
큰 대자로 뻗어서 잤다. 

처음에는 조금씩 눈치를 보다가도 
뒤에 가서는 코를 드르렁 드르렁 골아대면서 잤다. 

중국 사역장 같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둠 속에서 가만히 다가가서, 한 사람씩 붙잡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잔등을 철썩철썩 때리면서 '주여 주여!' 하고 큰소리로 기도해 주었다. 

녀석들이 아프다고 몸을 비틀면서 구석으로 도망갔다. 
따로 기도 제목도 주지 않고, 인도해 주지도 않는 기도를 
매일 3시간씩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른들이라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대부분 하루 1시간 정도는 기도하는 것 같았다. 

나는 매일 그 만큼이라도 기도하는 청소년들이 대견하기도 했지만 
한편 답답하기도 했다. 

억지로라도 3시간씩 앉아는 있는데 
삶과 기도가 전혀 일치가 되지 않았다. 
마치 직장인이 출근하는 것처럼, 기도시간에 들어와 얼굴 도장만 찍어 놓고 
끝나기 바쁘게 다시 PC 방으로, 술집으로 달아나버렸다. 

북한선교를 하든지, 한국사역을 하든지, 내 목적은 언제나 영혼 구원이었다. 
지금 하는 일이 북한선교이니, 북한청소년들이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변화되어야 하는데 
그들을 보면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나는 주님께 질문했다. 
'주님, 이런 일을 몇 년 정도 해야, 그들이 변화가 되겠습니까? 
얼마나 더 하면, 그들의 기도와 삶이 일치가 되겠습니까?' 

주님은 침묵 하셨다. 아무런 응답도 없으셨다. 
나는 답답해서 다음 날 또다시 물었다. 
'30년쯤 계속하면 되겠습니까?' 

주님은 며칠이 지나도 여전히 응답이 없으셨다.
나는 다시 따지듯이 기도했다. 
'내가 여기서 왜 이런 일을 해야 합니까? 
나는 한 사람이라도 영혼이 살아나는데 모든 것을 투자하고 
생명을 걸고 일하고 싶습니다. 
차라리 여기를 접어버리고 중국으로 들어가면 
1년에 최소한 몇 명은 살아나지 않습니까? 
되지도 않는 이 일을, 30년을 해도 자신 없는 이 일을, 제가 왜 계속해야 합니까?'

며칠후 주님의 음성이 내 마음을 세게 내리치셨다. 
'여기서 통독학교를 하라! 중국에서 처럼' 

나는 오래 기다리던 응답이라 너무 기뻤다.
'이제 됐다. 그래, 여기서도 이제 통독학교를 하면 되겠다.' 

기도회가 끝나고 냅다 흥분해서, 사역자들과 섬기는 분들에게 말했다. 
"하나님이 제게 여기서 통독 학교를 하라는 감동을 주셨습니다!"

다들 어처구니 없어 하며 한 마디씩 했다. 
"선교사님 말도 안 돼요. 여기서 무슨 통독입니까? 
여기가 중국인줄 압니까? 요즘은 중국에서도 통독이 안 되는데 
여기서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듣기만 하고 대꾸를 하지 않았다. 

"여기 애들 중에 그렇게 꽁꽁 묶여서 살 애들이 어디 있습니까? 
애들은 돈이 많이 필요해요. 당장 아파트 세금을 내야 하고, 
용돈을 써야 하고, 휴대전화비도 나간대요. 

밖에 나가 대충 알바만 해도 한 달에 돈 백만원은 버는데 
누가 여기 앉아서 새벽부터 성경을 읽겠습니까?"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듣고 보니 그랬다. 다 옳은 말들이었다. 
대충 얼버무렸다. "나도 잘 모르겠네요. 그래도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지 않겠어요? 계속 기도해 봅시다!"

성근 선생에게도 말을 꺼내봤다.
'여기서 통독 하면 어떨까?' 

성근 선생은 실처럼 가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선생님, 요즘은 신학생들도 성경에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다들 돈에 미쳐서, 하나님에게 관심이 전혀 없습니다. 
다들 선생님 같은 줄 아세요?"

나는 속이 상했다. 통독에 대한 말을 다시 꺼내지 않았다. 
이 문제로 혼자서 기도만 했다. 

'하나님이 하라 하셨으니까, 하나님이 일하시겠지..'

은혜한인교회 북한선교 국장이신 홍장로님이 말씀하셨다. 
"김광신 목사님 건강이 많이 좋아지셨어요. 
그리고 이제 생애 마지막 시간을 북한선교와 이슬람 터키 선교에 
몰두하시겠다고 합니다. 
그러니 선교사님, 앞으로 북한선교를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 
계획서를 김광신 목사님께 올려 주세요." 

나는 통독학교를 핵심사역으로 정하고 계획서를 작성했다. 
특히 통독학교에서 공부하는 탈북민 청소년들에게는 
장학금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거기에다 학교를 할수 있는 공간도 필요했다. 
이렇게 저렇게 하다 보니 돈이 많이 들게 생겼다. 
대충 잡아도 1년 예산이 3억 이상이었다. 

계획서를 다 써놓고 다시 읽어보니 
내가 봐도 제정신으로 쓴 것 같지 않았다. 
개구리가 황소를 바라보면서 '한번 해 보자고.. 할 수 있다고..' 하며 
눈을 부릅뜨고 쓴 것 같았다. 

'주님이 하신다고 했으니 뭐 어떻게 되겠지..' 
눈을 꾹 감고 보고서를 올렸다. 

김광신 목사님이 개인적으로 북한선교에 대한 어떤 구상을 갖고 계시는지 
말씀을 안 하시니 딱히 알 수도 없었고 
이 정도 계획서 허락해 주실지 확신도 서지 않았지만 
올리라고 하니까 그냥 올렸다. 

얼마 후 서울은혜교회에 있는 김광신 목사님 사무실로 찾아갔더니 
목사님이 가만히 앉아 무릎만 내려다 보시면서 말이 없으셨다. 

에어컨에서 바람 나오는 소리만 들렸다. 
한동안 뜸을 들이시던 김광신 목사님은 고개를 들고 짧게 말씀하셨다. 
"하세요!"

'어, 정말?' 
나는 숨이 막혔다. 이번에는 내가 침묵했다. 

김광신 목사님은 통독학교를 할 모든 재정을 부담해 주시겠다고 약속했다. 
거기에다 신촌하나교회, 아가페 교회 등 
많은 교회와 지인들이 매달 정기적으로 후원하기 시작했다. 

나는 뛸듯이 기뻤다. '그래 이제부터는 통독이다! 여기서도 통독을 할 수 있다!'

주일예배가 끝나고 탈북청소년들에게 광고했다. 
"이제부터 황금종교회는 <성경통독 100독 학교>를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그러니 여러분 전부 다 성경통독 학교에 참여하세요." 

여기저기서 질문을 했다. 
"며칠 동안 하나요? 지금 다니는 학교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1년 동안 합니다. 그리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집에 가지 못하고 여기서 먹고 자고 하면서 합숙훈련을 해야 합니다. 
지금 다니고 있는 대학교나 다른 학교들은 다 휴학을 하세요!"

다들 눈이 커지고 입이 벌어지더니 말이 없어졌다. 
매주 광고시간에 통독학교를 해야 한다고, 같이 하자고 독려를 했다. 
나중에는 설득을 했다. 

"탈북자들은 꼭 이 학교를 이수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탈북자들에게만 주시는 축복이에요.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입니다. 하게 되면 절대로 후회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나중에는 집까지 찾아 다니면서 강권하기 시작했다. 

다른 교회들에도 찾아갔다. 
탈북자가 있을 만한 곳이면 다 찾아가서 광고를 하고 
극동방송과 CTS 기독교 방송에도 광고를 했다. 

하나님이 하라 하셨으니, 사람은 하나님이 보내 주실 것이었다...

(P2에 계속, 총11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