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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11장 사울이 길르앗 야베스를 구하다

LNCK 2023. 2. 24. 19:47

https://www.rayfowler.org/sermons/1-samuel/used-by-god/

◈사울이 길르앗 야베스를 구하다         삼상11장      영어설교정리, 편집

불과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사울은 나귀를 찾으러 다니던 청년에 불과했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기름을 부으시고, 그를 왕으로 세워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베냐민 지파 기브아에서 자기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5
아직 이스라엘이 왕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라서,
수도도, 왕궁도, 정규 군대도 ...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사울에게, 이때 그는 40세였습니다. 13:1

아직은 사울이 교만해서 타락하기 이전입니다.
하나님은 기름부음 받아 왕으로 세워진 그에게
모든 면에서 그가 왕으로 성공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시고
그를 도와주시는 것을, 본문 삼상9~14장까지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은 사울의 좋은 점을, 우리는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 삼상11장을 통해서, 사울을 통해
영적 지도자의 3가지 특징을 보게 됩니다.

1) 영적 지도자는 사람들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2) 영적 지도자는 사람들이 행동을 취하게 하고,
3) 영적 지도자들이 교인들을 하나로 통합시킵니다.

이 세 가지 중요한 특징들을, 사울에게서 발견하게 됩니다.


◑1. 영적 지도자는 사람들의 문제에 관심을 갖습니다 (:1-6)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지금 곤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요단 동편에 세 지파가 있는데, 지도 상 위에서 아래로 (북에서 남으로) 보면
므낫세 반지파 — 갓지파 — 르우벤 지파입니다.

그 중에 길르앗 야베스는 므낫세 반지파에 속한 땅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전 영토 중에서, 가장 전쟁이 빈번했던 지역이었죠.
왜냐면 그 지역 자체가, 요단 동편에서 제일 북단, 국경이었기 때문이죠.

거기서 가까운 암몬이 공격을 해 온 것입니다.
지금 암몬은 길르앗 야베스만 일단 공격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아직 사사시대의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
사사시대의 전쟁 방식처럼, 국지전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므낫세 반지파가 암몬의 위험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만약 길르앗 야베스가 암몬에 점령당한다면
그 다음 12지파의 영토들도, 차례로 도미노처럼
암몬에 수중에 들어가게 될 것이, 자명한 전망이었습니다.

그래서 비교적 국경에서 70킬로나 떨어져 있는
이스라엘의 중심 지역에 살고 있던, 베냐민 지파도.. 울며 떨었던 거죠. :4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므낫세 반지파)은,
암몬 왕 나하스에게 언약을 맺자고 요청했습니다. :1
백기 투항을 하겠다는 것이며, 조공을 바치겠다는 의미였습니다.

문제는, 암몬이 이 제의를 거절한 것입니다.
수그리고 들어갔는데, 수그림을 받아주지 않은 것이죠.

대신에 나하스는 ‘너희 주민들의 오른쪽 눈을 다 빼서 가져오라.
그러면 화친 조약을 받아주겠다’고 으름장을 놨습니다. :2

이 말은, 너희와 화친을 하지 않고,
그냥 너희를 정복해서 다 차지하고, 종을 삼겠다는 야욕을 드러낸 것이죠.

야베스 장로들은, 7일간의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죠. :3
12지파 중에 아무도 자기들을 도와주지 않으면, 나하스의 요청에 응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놀랍게도 암몬의 나하스 왕은 그들의 제안에 동의합니다.
그는 아무도 길르앗 야베스를 도울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거나
혹시 이스라엘이 뭉쳐서 자기를 대항한다고 해도,
그들을 상대로도 거뜬히 이길 수 있다고 믿은 것 같습니다.
결국 그의 오만함은 파멸을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영적 전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탄은, 마치 암몬왕 나하스처럼, 기독교인을 미워하고 공격합니다.

또한 세상도 기독교인을 미워합니다.
요15:18~19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그것은 창세기 3장 이후로 계속되고 있는 영적 전투의 양상입니다.

영적 지도자는, 이런 마귀와 세상의 공격에 당면한 사람들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원해서, 도움의 손길을 적극 내밀어줍니다.

우리 모두는 문제에 직면할 때가 있으며,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 때가 있죠.
이때 영적 지도자들은 모르는체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바쁘다고, 손절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할 때는,
영적 지도자는.. 만사를 제쳐놓고 그 위험한 전장으로 달려갑니다.

▲그래서 혹자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지도자란.. 위험한 일을 봤을 때, 피하지 않고 거기로 뛰어드는 사람이다!’ 
그것이 지도자와, 일반 사람을 구분 짓는 중요한 잣대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미디안 우물가에서, 남자 목동들에게 불이익을 당하던 십보라를,
그 상황에서 피하지 않고 적극 뛰어들어서, 구해 주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도.. 길에서 강도만나 쓰러진 사람을 구해주기 위해서
그 위험한 상황에 적극 팔 걷어부치고 스스로 뛰어들었습니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 말입니다. 영적 지도자였기 때문이죠. (예수님 상징)

그러나 레위인, 제사장은.. 위험에 처한 사람을, 못 본체 하고 우회했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진짜 지도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처한 상황을 고의적으로 외면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울은, 암몬의 공격이란 위험을 피하여 우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령의 감동으로,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을 돕기로 결단했습니다.

지금 뭐 군대가 정규군으로 조직되어 있는 상태도 아니고,
무슨 군수물자가 비축된 상태도 아니었지만... 일단 뛰어들고 보는 거죠!
왜냐면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구해주는 본능!’
이것이 바로 영적 지도자에게서 발견되는 공통된 DNA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영적 지도자가 되려면
사람들의 피폐한 상황이 ‘자기 눈에 보여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떠나 사는 사람들의 비참함, 가련함, 곤고함...
마귀의 공격에 노출되어 심하게 영적, 정신적, 신체적으로 학대당하는 자들..
이런 불쌍한 사람들이
자기 눈에 안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반 교인들이, 세상에 불쌍한 사람들, 또한 고난당하는 크리스천들을
도와주지 않는 이유는, 기도라도 해주지 않는 이유는,
그런 사람들이 ‘자기들 눈에 전혀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세상에 고통 당하는 사람들이 자기 눈에 전혀 안 보일까요?
그건 ‘쳐다보려고 하는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찾아보면, 그런 사람들이 주위에 널려 있는데,
아무 관심이 없고, 중보기도의 관심이 없기 때문에 (가족을 위해서만 기도함)
그런 사람들이 전혀 눈에 보이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전혀 도움의 손을 내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바로 자기 자신이 지금 강도 만난 상태이기 때문인 거죠.
지금 자기가 강도 만나서 나동그라져 있는데,
누구를 도울 수 있겠다는 말인지요...

그래서 지금 세상에는, 전도하는 사람, 중보기도 하는 사람, 상담자원 봉사자들,
구호사역자, 병원전도자, 긍휼사역자들.. 이런 봉사자들이 점점 고갈되고 있죠.

여러분, 가인을 보십시오. 가인은 동생의 죽음에 ‘모르는 체’ 했습니다.
자신이 범인인 것도 큰 죄지만,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하면서, 동생의 죽음을 모르는 체 했습니다.
이것도 작지 않은 죄입니다. 적어도 영적 지도자는 아닌 거죠!

사울왕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길르앗 야베스를 지키는 자니이까?’
그러나 아직 타락하기 전이라 생생했던 사울 왕은, 그렇게 형제들의 고난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는 그런 예가 수도 없이 많이 나옵니다.
-라합이 목숨 걸고, 두 정탐꾼을 숨겨 준 일
-다윗이 골리앗 앞에 나아가, 위기를 자초한 것
-느헤미야가 괜히 좋은 관직 내팽개치고, 자기 조국에 휴가받아 떠난 일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나아갔던 일

이들이 다 ‘영적 지도자’의 반열에 들어선 것입니다.
혹시 오늘날 내가 만약 ‘영적 지도자’가 아니라면
가끔씩 우리 인생에 닥치는 ‘위기 상황’에서
내가 너무 피해서, 우회해서, 못본 척 하고 지나간 이유 때문은 아닐까요?

▲하나님이 목동 다윗을 왜 뽑아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는가요?
그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했을 때,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요?

그것은 바로 ‘양떼를 사랑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삼상17:34~35 ‘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아래 구절은, 다윗이 양떼를 잘 치다가 왕으로 뽑혔다는 사실을
더욱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시78:70~72 ‘또 그의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사
그의 백성인 야곱, 그의 소유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잠27:23 ‘네 양 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 떼에게 마음을 두라’
그리하여 다윗처럼, 하나님께 뽑히고 발탁되는.. 쓰임받는 사람이 됩시다.

혹자는 ‘다윗이 그렇게 된 것은, 그가 만세 전에 작정되었기 때문 아닌가요?’
절반 맞는데, 절반 틀렸습니다.
만약 다윗이 양떼에게 마음을 두지 않았다면..
그가 그렇게 살도록 작정되었어도, 자기 과실로 탈락되었을 것입니다.

사실 사무엘상하 전체에, 다윗이 자기 백성들을
마치 양떼들처럼 사랑하고 아끼는 사례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렇게, 양들의 처지와 형편에 관심을 두고,
그들을 위해 늘 기도하며 관심가지는.. 그런 영적지도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영적 지도자는, 행동을 취합니다 (:7-11)
자기만 행동할 뿐 아니라, 팔로워까지도 행동하게 합니다.

영적 지도자의 두 번째 특징은, 행동을 취한다는 것입니다. take action 합니다.
수동적인 passive한 영적 지도자 같은 것은 없습니다.

영적 지도자는, 사람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인식할 뿐만 아니라 *1대지
그들을 돕기 위한 구체적인 액션을 취합니다. *2대지

대부분 이스라엘은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에 대해 듣고 둘러앉아 울었지만,
사울은 적극 행동을 취했습니다.

본문의 사울의 이야기에서 추적할 수 있는
영적 지도자의 행동 단계가 적어도 3가지로 나타납니다.

▲1. 영적 지도자는, 사람들을 규합해서 행동하게 합니다. (:7-8)
자기 혼자 뛰는 게 아니고,
사람들을 끌어모아서, 선한 일에, 영적 전쟁에 동참하게 합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자기 혼자 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부르신 일을 하도록
사람들을 끌어모았습니다. 이런데 은사가 있고, 이런 일을 잘 수행합니다.

:7~8 ‘한 겨리의 소를 잡아 각을 뜨고 전령들의 손으로 그것을 이스라엘
모든 지역에 두루 보내어 이르되
누구든지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의 소들도 이와 같이 하리라 하였더니
여호와의 두려움이 백성에게 임하매 그들이 한 사람 같이 나온지라
8 사울이 베섹에서 그들의 수를 세어 보니 이스라엘 자손이 삼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삼만 명이더라’

여기서 사울이 ‘공포 정치’를 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7절에,
‘여호와의 두려움이 백성에게 임하매 그들이 한 사람 같이 나온지라’
그들은 여호와의 두려움이 임한 것이지, 사울의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죠.

지난 시간에, “지도자가 하나님 한 분만을 잘 섬기면
사람들이 지도자를 자원해서 따른다”고 했습니다.
사울이 의로운 일을 하려고 하니까, 사람들이 자원해서 사울을 따르는 거죠.

사울은 빨리 행동해야 했습니다.
길르앗 야베스까지는 70킬로 떨어져 있었고, 기한은 1주일(:3)이었습니다.

그런데 벌써 전령들이 기브아까지 도착하는 데도 적어도 이틀 걸렸을 거고,
자기가 조각 내서 보낸 ‘소집 영장’,이 도착하는 데도 이틀은 걸릴 것이고,
모집한 민병대들을 데리고 그곳까지 가는 데도, 또 며칠이 걸릴 것입니다.

‘사울과 사무엘을 따르지 아니하면’ :7
사울이 사무엘을 행동 촉구에 포함시킨 것에 주목하십시오.
후에 사무엘과 사울은 헤어질 것이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백성의 유익을 위하여 연합하여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울은 ‘사람들을 규합해서 일을 하게 하는데’ 은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두려움이 백성들에게 임했고, 그들은 모두 싸우러 나왔습니다.
사울은 갑자기 33만명의 군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8

그는 베섹에 군대를 모으는데, 이는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8
베섹은 길르앗 야베스에서 서쪽으로 약 20킬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접근성이 용이했죠.
시간이 촉박한데, 괜히 기브아까지 모여서 출정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죠.
전장에서 가까운 후방인 베섹에 집결시킨 것입니다.

베섹은, 적군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적을 공격할 만큼 가까웠습니다.

사울은 백성을 일제히 불러 모았습니다.
사람들을 행동으로 이끌 수 없다면 당신은 리더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섬기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교회에 영적 지도자들을 세워주십니다.

엡4:11~12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이렇게 리더를 세우십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세워진 리더, 곧 영적 지도자는
사람들을 모아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게 합니다.
이런 은혜가 있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2. 영적 지도자는 믿음으로 사람들을 격려합니다. (:9)
그래서 사람들은 항상 영적 지도자를 통해서, 힘과 담력을 얻습니다.

9 ‘무리가 와 있는 전령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내일 해가 더울 때에 너희가 구원을 받으리라 하라
전령들이 돌아가서 야베스 사람들에게 전하매 그들이 기뻐하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권능으로 임하심으로써
사울에게 나타난 강력한 믿음의 선포입니다.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할 때, 당신은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강하고 담대하라. 겁먹지 마십시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리라." (수1:9)

영적 지도자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신뢰는 주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며,
그들은 매번 두려움 대신 믿음을 선택합니다.

믿음은 행동으로 이어지는 반면,
두려움은 행동하지 않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영적 지도자는 두려움보다 믿음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액션(행동)으로 옮기게 되는 것입니다.

△지도자는 믿음으로 사람들을 격려합니다.
사울 왕이 길르앗 사람들을 격려한 말을 들어보십시오.

9 ‘내일 해가 더울 때에 너희가 구원을 받으리라 하라
전령들이 돌아가서 야베스 사람들에게 전하매 그들이 기뻐하니라’

오늘날 성도들은 교회에 와서 설교 말씀을 통해서
격려와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격려하는 능력 – 이것은 영적 지도자의 중요한 자질입니다.

아무리 사업에 실패해도,
아무리 가정에 문제가 있어도,
아무리 중병에 걸렸다 할지라도,
영적 지도자를 만나면.. 새 힘이 솟아나고, 극복할 용기가 생깁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지도자에게 주시는 ‘격려의 은사’입니다.

바나바는 ‘격려의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가 다녀가기만 하면 낙심했던 사람이 용기를 갖고,
시험에 빠졌던 사람이 시험을 이겨내고,
고통 가운데 신음하는 사람들의 아픈 마음이 치유가 됩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그에게 '바나바'(위로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죠.
다시 말해서 ‘격려의 사람’이란 뜻입니다. 행4:36

그는 고향에 낙향해서 실의에 빠져있던 사울이란 청년을 격려했습니다.
후에 사울이 바울로 변화되어 했던 놀라운 모든 선교의 열매들은
사실은 그 절반, 바나바에게 돌아가야할 공로였습니다.

▲3. 행동할 때 하나님은 영적 지도자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사울은 전쟁 전문가가 아니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심지어 암몬 사람들에게 군사적 허위 정보를 퍼트리는듯 했죠.
"야베스 사람들이 이에 이르되 우리가 내일 너희에게 <나아가리니>
너희 생각에 좋을 대로 우리에게 다 행하라 하니라“ :10

그럼 이스라엘이 암몬에게 거짓말 한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10절에 ‘나아간다’는 말은,
암몬 측에서 해석하면 ‘항복하러 온다’가 되겠지만
이스라엘 측에서 해석하면 ‘진군하러 나아간다’는 뜻도 되기 때문입니다.
이중의 뜻을 담고 있는 말이었죠.

약속대로 이스라엘은 ‘내일’ 암몬에게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다들 잠들어 있는 시간에 진군해서
그들을 기습 공격한 것입니다. :10~11

암몬은 아마 이스라엘이 ‘항복하러 나아오는구나’ 라고
그 말을 해석한 듯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방심하며 자고 있다가, 새벽에 결국 이스라엘에 패하고 말았죠.
그 전투는 정오까지 계속되었고, 이스라엘의 대승으로 끝났습니다. :11

△사람이 지도자 자리에 오르면, 남다른 지도력과 지혜를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아직 리더십과 지혜와 용기가 없으니, 지도자가 못 돼!’
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당신에게 리더십과 지혜와 용기가 없을 수 있습니다.
그건 당신이 아직 지도자의 자리에 올라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어느 날,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서
사울처럼 영적 지도자의 자리에 서게 된다면,
하나님은 감당할 힘과, 용기와, 지혜와, 리더십을 반드시 주십니다.

사울이 남다른, 남보다 월등히 뛰어난 힘과 용기, 지혜, 리더십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평범한 당신도 만약 사울처럼 지도자의 위치에 부름 받으면
하나님이 감당할 힘과 용기를 반드시 주십니다.
그걸 지레 겁을 낼 필요는 없습니다.

♣주기철 목사의 순교를 격려했던 조만식 장로 (영적 지도자의 예)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한국교회의 승리)에는,
주목사님 혼자만의 투쟁이 아니라,
그분을 격려하고, 곁에서 도왔던
주목사의 은사였던 조만식 장로의 공로를 기억해야 합니다.

「평양 산정현교회는, 마산 문창교회에서 섬기고 있던
주기철 목사를 청빙했습니다. (마산 문창교회에 가면 기념관 있죠)

조만식 장로와 주기철 목사는
오산 학교 시절에는 사제 관계였으나 (주기철이 학생)
이제 한 교회의 목사와 장로로서 그 관계가 바뀌어졌습니다.

그러나 조만식 장로는 제자였던 주기철 목사를 잘 받들었습니다.
김인서 장로는 이 점을 이렇게 높이 평가했습니다.

"조 장로가 오산학교 교장시대에 주 목사는 오산학교 학생이었으니
학교로는 조 장로가 선생이요 교회로는 주 목사가 선생이다.
두 분이 서로 선생으로 모시는 미덕은 참 부러웠다.

그래서 주 목사의 지도라면 일일이 순종하였고
전 교인이 효자가 아버지에게 드리는 정성으로 받들었다.

주 목사로 하여금 주 목사 되게 함에는
오부인(주목사님 사모)의 격려와 함께, 조장로와 산정현교회의 힘이 컸었다."

일제의 모진 핍박과 간섭 속에서도 산정현교회는
주 목사의 신사참배반대 투쟁을 적극 격려했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조만식 장로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옥 중에서 신사참배에 반대하며 신앙의 순결과 민족의 정조를 지키는
주 목사를 격려했을 뿐 아니라,
옥밖에서 옥중 순교자와 동행하는 삶을 살아갔던 것이었습니다.

순교자 주기철 목사 곁에는, 항상 충성스러운 격려자와 협력자인
조만식 장로가 있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는 옥 중에서, 조만식 장로는 옥 밖에서,
신사참배 강요와 싸우면서
자신들의 신앙과 한국교회의 신앙을 사수했습니다.

「신사참배 반대투쟁 정신사」를 쓴 안도명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평양 산정현 교회는 일본 제국주의가 식민통치 하에서 강요한
신사참배를 반대하고서 승리한 유일무이한 교회이다.

이 역사적인 사실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고당 조만식 선생이 그 교회의 장로였고,
소양 주기철 목사가 그 교회의 당회장이었기 때문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신사참배 반대라는 하나님의 뜻이,
조 장로와 주 목사가 신앙적으로 조화됨으로 이루어졌다.

평양 산정현교회와 고당 조만식 장로는
우리민족 역사에 길이길이 빛나는 횃불이 될 것이다."

그 목사에 그 장로였고, 그 장로에 그 목사였습니다.」
-윗 단락 출처 https://rfcdrfcd.tistory.com/15974004


◑3. 영적 지도자는 사람들을 하나로 통합시킵니다. (:12-15)
서로 연합하게 만들지, 서로 분열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12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사울이 어찌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한 자가
누구니이까 그들을 끌어내소서 우리가 죽이겠나이다
13 사울이 이르되 이 날에는 사람을 죽이지 못하리니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구원을 베푸셨음이니라’

사울은, 자기의 왕 옹립을 반대한 자들을 죽이자는
자기 지지파의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자기를 반대하는 자들 역시, 자기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타락하기 이전의 사울은, 놀라운 통합의 리더십을 보여줍니다.

대신 사울은 사람들의 관심을 주님께 집중시켰습니다.
‘지금은 사람을 처벌할 때가 아니다. 지금은 주님의 역사를 축하할 시간이다!’

사울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오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건져내셨도다!" :13

사울은 여호와께 백성들의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그들을 하나로 모았습니다.

영적 지도자는 사람들이 주님께 초점을 맞추도록 함으로써
사람들을 하나로 모읍니다.

이어서 14~15절에 길갈로 가서 여호와께 화목제를 드립니다.
사울과 사무엘 (영적 지도자)은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포커스를 두도록 한 것입니다.
자신의 리더십에 주목하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14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15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서 사울을 왕으로 삼고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사람들의 존경과 지지를 얻었습니다.

사울은 이 암몬과의 전쟁에 승리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굳게 굳히게 됩니다. :12

그리고 반대파까지 포용함으로써,
대단한 통합의 리더십까지 보여줍니다. ;13

그리고 전쟁의 모든 승리의 공을, 화목제를 드려서 여호와께 돌림으로써
백성들의 시선이 하나님을 주목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길갈’에 내려가서 이 모든 일을 행한 것은,
길갈에 대한 특별한 영적 의미는 없습니다.
그저 그 당시에 알려진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 때 요단강을 건너고, 그곳에 기념비를 세웠던 적이 있었죠.

아직 예루살렘이 수도로 정해지기 전이고,
실로는 불에 타서 무너졌고,
당시로는 길갈이, 이스라엘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길갈에서 자기 조상들과 함께 해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이번 암몬과 전쟁에서도 승리하게 해주신 하나님을
똑같이 기리고, 감사드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화목제엔 감사제의 의미가 있죠.

▲마치는 말
영적 지도자는 1대지에서 ‘타인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자라고 했습니다.
소설가 박완서 선생의 얘기를 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1988년 우리 나라에서 올림픽이 열릴 무렵,
그 분은 5남매 중 하나 뿐인 아들을 잃었습니다. *교통사고
당시 25세였던 창창한 젊은 의사였던 아들이었어요.

박완서의 고백에 의하면 자기 슬픔은
“수시로 짐승처럼 치받치는 통곡”이라고 표현을 했더라구요. .

명색이 신앙인(가톨릭)이라고 하면서도
그의 수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부정과 회의, 포악,
심지어는 저주로 차 있을 만큼, 그 분의 아픔은 지독했습니다.

“눈을 뜨니 낯선 방이었다. 꿈이었으면 하는 몽롱한 착각을 할 새도 없이
아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무서운 괴물처럼 가차없이
육박해 왔다. 아들이 이 세상에 살아있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 다음은 가슴을 쥐어 뜯으며 미친 듯이 몸을 솟구치면서 울부짖을 차례였다.

목청껏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통곡하면 소리와 함께 고통이 발산되면서
곧 환장을 하거나 무당같이 되어서 죽은 영혼과 교감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이런 식으로 얼마나 고통의 터널을 진하게 지나가는지요?

“자식이 죽었는데도 고을마다 올림픽 성화가 도착했다고 잔치를 벌이는 걸
어찌 견디랴. 내가 만일 독재자라면 88년 내내 아무도 웃지 못하게 하련만…”

그 수기를 보면 계속 이런 식으로 진행되다가,
어느 순간 그 분이 뭔가를 깨닫는 부분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슬픔이 아주 숭고한 다른 뜻으로 승화되는 것을 봅니다.
엄청난 아픔이 어느날 부턴가 절실하게 드리는 기도로 치유되기 시작합니다.

그해 10월의 어느 날, 갑자기 계시처럼 자기의 죄가 떠오른 겁니다.

먹은 음식이 안 좋았는지 토하느라
변기 앞에 엎드렸을 때 번뜩 주어졌다는 거예요.

자신이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인 인간이었다는 사실이
엄청난 죄악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겁니다.

그는 수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물질도, 사랑도, 내가 아낌없이 물질과 사랑을 나눈 범위는
가족과 친척 중의 극히 일부와 소수의 친구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 밖에 이웃이라 부를 수 있는 타인에게 나는 철저히 무관심했다

최소한 의식적으로 남에게 악을 행한 적이 없다는 자신감이
내가 하나님께도 겁없이 당당하게 대들 수 있는 유일한 도덕적 근거였다.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 타인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이야말로
크나큰 죄라는 것을,
그리하여 그 벌로 태산 같은 고통을 받았음을 명료하게 깨달았다” 

그러면서 기도가 튀어나오더라는 겁니다.

“주여 나를 받아 주옵소서. 나의 모든 자유와 나의 기억력과 지력과
모든 의지와 내게 있는 모든 것과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을 받아들여 주옵소서.
나의 고통까지도. 당신이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주셨나이다.
주여! 이 모든 것을 당신께 도로 드립니다. 모든 것이 당신 것이오니
온전히 당신의 의향대로 그것들을 처리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내게는 당신의 사랑과 은총을 내려 주소서. 이것이 내게 족하나이다”

이렇게 기도하고 나자 그분에겐 행복에 가까운 기쁨이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그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아픔에도 분명 하나님의 전능하신 숨은 뜻은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자신과 가족밖에 모르고 살아왔다는 것에 대한 회개였습니다.

그리고 그 상처나 깨달음은 나머지 그녀의 생애와
독자들에게 충분한 자양(滋養)으로 열매맺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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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 관련글

저 헨리 블랙가비(목사)는, 오늘날 우리 미국이 당하고 있는 위기가
‘금융권 붕괴’로 인한 재정적 위기가 아니라, 그것은 표면적인 위기고요,
우리의 진짜 위기는 ‘영적인, 도덕적인 위기’가, 실제적 위기라고 봅니다.

모든 계층의 사람들도 그렇겠지만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의 ‘영적인 도덕적 위기’가 아주 심각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매일 아침마다, 시간을 넉넉히 잡아서,
내가 하나님과 친밀하게 만나서 교제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고,
그 시간을 5분, 10분 조급하게 후다닥 마쳐 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그날 하루 동안에 일어날 일에 대해, 하나님과 충분히 대화, 의논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의 감동에 따라서,
그날 내가 수행할 일에 대해, 밑그림을 다 그리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각계각층에, 이런 영적 지도자들을 필요로 합니다
그가 매일 그렇게 주님과 충분히 교제하고,
주님이 주시는 영적인 권위로써, 자기 직무를 수행해 나갈 때,

사람들은 알게 됩니다. ‘저 분은, 정말 진짜 영적 지도자야!’
왜 모르겠습니까? 세상 사람들도 그를 다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영적 지도자들이, 교계뿐 아니라,
사회 각계각층에 다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지도자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진정한 위기입니다.

그 지도자는 말로나, 행위로나, 라이프스타일로나, 그의 가족관계로나
정말 ‘하나님의 사람’임을 나타내 보여줍니다.
교계에도 이런 영적인 지도자들이, 너무나도 절실히 필요한 시점입니다.

저는, 그 영적 지도자의 핵심적 자질로,
매일 아침마다, 충분히 주님과 만나고, 주님과 교제하며, 주님과 의논하며
주님의 임재를.. 가급적 깊이 체험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지도자의 ‘기본 조건 prerequisite’입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말로는 영적 지도자라는데,
그에게서 어떤 영적인 능력도 보이지 않고,
그냥 매너리즘에 빠지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역대하7:14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이 말씀은 반대적으로, 우리에게 적용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악한 길에서 떠나지 않고, 스스로 낮추지 않고,
주님의 얼굴을 찾지 않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지 않고, 그들의 죄를 사하지 않고,
그들의 땅을 고쳐주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911을 보냈다’ *2001년.
‘내가 허리케인을 보냈다’ *2005년 경 카트리나 등.
‘내가 재정위기를 보냈다’ *2008년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
그래도 아직 우리가 못 깨닫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회개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찾자’라고
독려하는 영적인 지도자를, 교계에서, 사회에서,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상은 분별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분변하지 못하는 태도가 아닌가요?’

제가 서두에 ‘교정을 위한 점진적 심판
remedial judgment’에 대해 경고했는데,
지금 우리 미국이 점진적 심판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는다면, 최후의 심판까지 받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