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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14장 해석 및 주석

LNCK 2023. 2. 28. 18:09

◈삼상14장 해석 및 주석

1 하루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건너편 블레셋 사람들의 부대로 건너가자 하고 그의 아버지에게는 아뢰지 아니하였더라

'병기를 든 소년'
본장의 전체 내용을 볼 때 여기서 '병기든 소년'은 단순히 비서직 그 이상의 역할을 담당한 신분이었던 것 같다(Klein). 한편 '병기를 든 자'(the youngman that bare one's armour)는 아비멜렉(삿9:54), 기드온(삿7:10), 심지어는 요압(삼하18:15, 23:37)에서도 있었다. 그리고 소년 시절 다윗도 사울의 '병기를 든 자'로 선택되었었다(16:21). 이처럼 다윗 같은 유능한 인물이 그와 같은 신분에 뽑혔다는 사실을 볼 때, '병기를 든 자'는 왕이나 군대 장관의 수하에서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자였음이 분명하다.

'건너편 블레셋 사람의 부대'
이때 사울과 요나단의 부대는 믹마스에서부터 뻗어내려오는 협곡에서 약 1.5km 떨어진 게바에 위치해 있었다. 따라서 여기의 '건너편'은 블레셋의 수비대가 자리잡고 있는 믹마스 어귀의 보세스 고지를 뜻한다(4절, 13:23).

2 사울이 기브아 변두리 미그론에 있는 석류나무 아래에 머물렀고 함께 한 백성은 육백 명 가량이며

'함께 한 백성은 육백 명'
이것은 사울의 군사적 형편이 블레셋의 대군에 비해(13:5) 어림도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는 저자의 의도에 따른 언급인 듯하다<13:15>. 또한 저자가 여기서 이같은 언급을 한 중요한 이유는, 뒤이어 나올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의 승리(31절)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따른 것임을 보여 주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3 아히야는 에봇을 입고 거기 있었으니 그는 이가봇의 형제 아히둡의 아들이요 비느하스의 손자요 실로에서 여호와의 제사장이 되었던 엘리의 증손이었더라 백성은 요나단이 간 줄을 알지 못하니라

'아히야'
이 사람은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ahimelech, 22:9)과 동일시 된다. 즉 이같이 보는 사람들은, 아히야의 본명은 아히멜렉('왕의 형제')이었으나, 이 이름이 가나안 사람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으므로 바꿨다는 것이다. 한편 또 다른 사람들은 아히야와 아히멜렉을 형제 관계로 보기도 한다.

'에봇을 입고'
'에봇'은 대제사장들이 대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갈 때(레16:4)와 하나님께 특별한 뜻을 물을 때 착용했던 특수한 제의적(祭儀的) 의복이었다(출28:6-14). 따라서 '에봇을 입고 있었으니'라는 말은 아히야가 대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이처럼 대제사장이 에봇을 입고 왕의 옆에 함께 있는 것은 사울이 대제사장의 '우림과 둠밈'<출28:30>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물으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레8:8).

'거기 있었으니'
이 말은 히브리 본문에는 없는 것으로서 변역자가 뜻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삽입한 것임이 분명하다.

'이가봇의 형제 아히둡'
'이가봇'은 대제사장 엘리(1:3)의 아들 비느하스의 소생이었다(4:19-22). 그런데 성경은 그의 어머니가 그를 낳으면서 죽었다고 했으므로, 여기의 '형제'는 형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한편 '아히둡'은 '형제는 선하다'란 의미이다.
엘리와 홉니와 비느하스는 같은 날에 죽었으나(삼상1~2장), 그 후손은 아히둡을 통해 이어졌다.

4 요나단이 블레셋 사람들에게로 건너가려 하는 어귀 사이 이쪽에는 험한 바위가 있고 저쪽에도 험한 바위가 있는데 하나의 이름은 보세스요 하나의 이름은 세네라

'세네'
'아카시아', 또는 '가시'란 뜻이다. 이러한 이름의 뜻은 다시 블레셋의 주둔지인 믹마스로 뻗어있는 주변 지형이 가파르고 뾰족한 바위와 절벽으로 형성된 험준한 산악 지대임을 보여 준다.
당연한 얘기지만, 지금 현재의 지형도 그러하다고 한다.

5 한 바위는 북쪽에서 믹마스 앞에 일어섰고 하나는 남쪽에서 게바 앞에 일어섰더라

결국 위의 두 큰 바위 절벽은 협곡을 가운데 두고 마주 서 있었다.

6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결국 요나단의 이같은 말은 블레셋 사람들에 대한 승리를 확신하는 말인 것이다(17:26,36). 그리고 이같은 사상에 근거하여 삼손과 사울은 할례받지 못한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의해 죽게 됨을 매우 불명예스럽게 여겼던 것이다(삿15:18, 삼상31:4).

'여호와께서...일하실까 하노라'
원문에는 '혹시'(울라이)라는 단어가있어서 요나단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은 양 보인다(창32:20). 그러나 이 말은 또한 '정녕', '필시'라는 뜻의 소망과 확신의 의미도 있는 말로서, 역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다(수14:12). 진정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싸우시는 용사되심을 믿었던 것이다.

'여호와의 구원은...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승리의 관건은 수효의 다소(多少)나 군사력의 우열(優劣)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 여하에 있음을 믿는 요나단의 신앙 고백이다. 이러한 신앙은 기드온(삿7:4,15), 다윗(17:47), 솔로몬(전9:11), 이사(대하14:11), 히스기야(대하32:7,8)의 신앙과도 상통한다.

7 무기를 든 자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에 있는 대로 다 행하여 앞서 가소서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 하여 따르리이다

8 요나단이 이르되 보라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로 건너가서 그들에게 보이리니

여기서는 요나단이 블레셋의 진영으로 가려는 일차적 목적이 언급되고 있다.

'보이리니'
이는 자신의 몸을 완전히 노출시킴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것은 요나단이 블레셋에 대하여 기습 작전을 펼치려는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9 그들이 만일 우리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너희에게로 가기를 기다리라 하면 우리는 우리가 있는 곳에 가만히 서서 그들에게로 올라가지 말 것이요

10 그들이 만일 말하기를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하면 우리가 올라갈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우리 손에 넘기셨음이니 이것이 우리에게 표징이 되리라 하고

'만일...하면...표징이 되리라'
본문에는 두 가지 경우에 따른 블레셋 사람의 반응으로 표징(表徵, sign)을 삼고자 한 요나단의 작전이 설명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요나단이, 이같은 생각을 한 것은 절대로 하나님을 시험키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 다만 요나단은 이와 같이 함으로써 블레셋과의 전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물으려 했던 것이다.
즉 그때 요나단은 첫째, 블레셋 사람들이 요나단에게로 내려오겠다고 하는 경우(9절) 둘째, 블레셋 사람들이 요나단으로 하여금 자신들에게 올라오도록 하는 경우(10절)의 두 가지 중 둘째 경우를 하나님께서 그 전투를 기뻐하신다는 징조로 삼으려고 하였다.

여기서 요나단이 둘째 경우를 긍정적인 표징으로 본 까닭은, 블레셋 사람들이 요나단을 자신들에게 올라오도록 용인한다는 것은 곧 블레셋 사람들이 전투에서 승리하려는 적극적인 의욕의 결여를 뜻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나단은 블레셋 족속들이 자신을 보고 둘째의 경우와 같은 반응을 보일 때, 그들을 공격함으로써 큰 전과를 올릴 것으로 기대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전에 사사 기드온도 이와 비슷한 표징을 통하여 승리의 확신을 얻은 바가 있다(삿7:9-15).

11 둘이 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보이매 블레셋 사람이 이르되 보라 히브리 사람이 그들이 숨었던 구멍에서 나온다 하고

12 그 부대 사람들이 요나단과 그의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너희에게 보여 줄 것이 있느니라 한지라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나를 따라 올라오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셨느니라 하고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이 말은 블레셋 사람들이 요나단 일행의 용기를 모욕하고 그들을 지극히 우습게 보았음을 시사해 준다. 아울러 이같은 블레셋 군인들의 반응은 그들이 정신적으로 나태해 있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였다. 따라서 요나단은 이 응답을 접하면서 블레셋에 대한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하였을 것이다(9,10절).

'한 일을 보이리라'
문자적으로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해주겠다'란 뜻이다. 한편, 여기서 '한 일'(다바르)은 블레셋 군대의 무력적인 힘을 뜻한다.

13 요나단이 손 발로 기어 올라갔고 그 무기를 든 자도 따랐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요나단 앞에서 엎드러지매 무기를 든 자가 따라 가며 죽였으니

'요나단이 손발로 붙잡고 올라갔고'
보세스의 고지는 거의 절벽에 가깝다고 한다. 따라서 요나단은 이같은 방식으로 가파른 그곳을 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블레셋 사람들이...엎드러지매'
이같은 결과는 말할 나위없이 요나단의 민첩한 공격에 따른 것이었다(LXX).

'병기 든 자가 따라가며 죽였으니' 여기서 '죽였으니'(메모테트)는 다시 살지 못하도록 완전히 죽이는 것을 가리킨다(Lange, 창7:22, 신22:24, 왕하8:10). 따라서 병기 든 자는 요나단에 의해 부상당한 자를 뒤따르면서 죽이는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요즘 말로 ‘확인 사살’)

14 요나단과 그 무기를 든 자가 반나절 갈이 땅 안에서 처음으로 쳐죽인 자가 이십 명 가량이라

'반나절 갈이 땅 안에서'
고대 중근동에서는 황소 두 마리가 하루에 보통 밭을 갈 수있는 분량인 약 1에이커(1에이커=약 4km)를 밭의 면적을 계산하는 단위로 삼았었다. 따라서 '반나절 갈이 땅'은 대략 1/2에이커의 땅을 뜻한다.
위의 언급이 블레셋에 대한 요나단의 공격이 반나절 걸렸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때 요나단은 단시간 내에 블레셋 수비대에 대한 공격을 완료했을 것이다.

'처음으로 도륙한 자'
여기서 '처음으로'는 본서 저자가 20절 이하에 언급된 블레셋의 수비대는 요나단 일행이 그 가파른 절벽을 타고 올가와 졸지에 습격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마냥 방심하고 있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요나단 일행의 공격에 당황하여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하기 바빴던 것이다.

15 들에 있는 진영과 모든 백성들이 공포에 떨었고 부대와 노략꾼들도 떨었으며 땅도 진동하였으니 이는 큰 떨림이었더라

'들에 있는 진' 여기서 '들'은 넓은 벌판을 가리킨다. 따라서 '들에 있는 진'은 블레셋 본국의 사령부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사실 들('사데')라는 단어는 블레셋 지역을 가리킬 때 사용된 단어였다(6:1).

'모든 백성' 군인과 대조되는 일반 블레셋 백성들을 가리킨다.

'부대와 노략군들'
'부대'는 당시 믹마스에 주둔하고 있던 블레셋의 본대를 가리킨다<13:16>. 한편, '노략군들'은 삼 대(三隊)로 나뉘어 이스레엘의 여러곳을 유린키 위해 떠났던 블레셋의 부대들이다<13:17,18>.

'땅도 진동하였으니'
이것은 '지진'(earthquake, Living Bible)을 가리킨다. 비록 '진동하였으니'(티르가즈)란 말이 때로 심리적인 격동을 뜻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지진을 가리키기 때문이다(삼하22:8, 시18:7, 77:18, 사5:25). 또한 지진은 공포와 함께 성전(聖戰)이 있을 때에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는 큰 떨림이었더라' 원문에는 '하나님의 큰 떨림이었더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블레셋에 임한 공포와 지진의 재앙이 하나님에 의해 내려진 것임을 강조한다.

16 베냐민 기브아에 있는 사울의 파수꾼이 바라본즉 허다한 블레셋 사람들이 무너져 이리 저리 흩어지더라

'파숫군이 바라본즉' 이때 '파숫군'은 약 1.5km 떨어져 있는 믹마스의 블레셋 본진(本陳)을 관찰한 듯하다. 물론 이때 파숫군은 블레셋 진(陳)의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아우성 소리도 들었을 것이다.

'블레셋 사람이 무너져' 여기서 '무너져(나모그)는 문자적으로는 '녹아내리다'란 뜻이다. 곧 이는 극도의 공포로 인해 용기를 잃고 마음이 녹아내리는 상태를 나타낸다. 요나단과 병기 든 자 단 두 사람의 공격에 흔들린 것도 있겠지만, 지진과 굉음이 났으니.. 굉장히 동요한 것이다.

17 사울이 자기와 함께 한 백성에게 이르되 우리에게서 누가 나갔는지 점호하여 보라 하여 점호한즉 요나단과 그의 무기를 든 자가 없어졌더라

18 사울이 아히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궤를 이리로 가져오라 하니 그 때에 하나님의 궤가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있음이니라

'하나님의 궤를...가져오라'
맛소라 본문(Masoretic Text)은 이처럼 '하나님의 궤'(the ark of God)로 되어 있으나, 칠십인역(LXX)은 '에봇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칠십인역의 표기를 정확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가져오라'(하기솨)라는 말은 성경 용례상 언약궤와 관련하여 사용된 적이 전혀 없으나, '에봇'과 관련해서는 몇 회 사용된 단어이다(23:9, 30:7).
(2) 사울은 그때 자신의 아들 요나단의 안전 여부를 대제사장의 에봇에 들어있는 우림과 둠밈을 통해 하나님께 물으려 했던 것이 분명하다(22:10).
(3) 그 당시 언약궤를 전장(戰場)에 가져갔다가 패배했던 아벡 전투(4:5-11)에 대해서 능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궤가...함께 있음이라' 이것은 '하나님의 궤를...가져오라'는 앞의 문구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필사자의 가필(加筆)로 봄이 타당할 것이다. 따라서 물론 칠십인역에는 본 문구가 없다.

19 사울이 제사장에게 말할 때에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 소동이 점점 더한지라 사울이 제사장에게 이르되 네 손을 거두라 하고

'네 손을 거두라'
이것은 사울이, 요나단의 안전 여부 및 블레셋의 진으로 공격해 들어가야 할 당위성이 있는지의 여부를 하나님께 묻기를 포기했음을 시사해 준다. 여기서 우리는 사울의 변덕스런 신앙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즉 사울은 전쟁의 작전 수행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받으려 하다가(18절), 전세(戰勢)가 유리하게 돌아가자 돌연 하나님을 향한 질문을 취소하였던 것이다.

20 사울과 그와 함께 한 모든 백성이 모여 전장에 가서 본즉 블레셋 사람들이 각각 칼로 자기의 동무들을 치므로 크게 혼란하였더라

'사울과...모든 백성이 모여'
여기서 '모여'(자아크)는 원래 '고함을 치다', '소리를 지르다'란 의미이나, 여기서처럼 수동형으로 사용될 때는 '소집하다'란 뜻으로 봄이 타당하다(수8:16, 삿6:34,35). 한편 '함께한...백성'은 사울과 길갈에서부터 동행했던 육백 명(13:15)과 요나단의 수하에 있던 병력 일천 명(13:2)을 합한 숫자를 가리킨다.

'블레셋 사람이...칼로 그 동무를 치므로'
이같은 기묘한 상황은 기드온의 소수 병력이 미디안을 대항해 싸울 때에도 벌어졌었다(삿7:22). 여기서도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드심으로써, 자기들끼리 피차 싸우다 자멸(自滅)하도록 하셨던 것이다. 결국 이같은 상황은, 모든 전쟁을 홀로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간섭하신 결과였으며, 요나단의 신앙적 용기와 도전에 대한 하나님의 도우심의 결과였다.

21 전에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하던 히브리 사람이 사방에서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진영에 들어 왔더니 그들이 돌이켜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 한 이스라엘 사람들과 합하였고

'블레셋 사람과 함께 하던 히브리 사람'
이들은 블레셋 사람의 부대에 편성되어 블레셋을 위하여 싸우던 용병(傭兵) 내지는 징용군(徵用軍)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한때 분명히 이스라엘을 대항해서 싸우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의 군대로 편성된 데에는, 이스라엘 영토의 많은 부분이 블레셋의 지배를 오래도록 받았다는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사방에서...진에 들어왔더니'
이것은 이스라엘 출신의 용병(혹은 징용군)들이 이번 전투를 맞이하여 자신들의 동족 이스라엘과 싸우도록 강제로 동원되었음을 강력히시사해 준다.

22 에브라임 산지에 숨었던 이스라엘 모든 사람도 블레셋 사람들이 도망함을 듣고 싸우러 나와서 그들을 추격하였더라

23 여호와께서 그 날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므로 전쟁이 벧아웬을 지나니라

본절은 그날 블레셋과의 믹마스 전투에서의 이스라엘의 승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에 기인하였으며, 또한 완전하였음을 강조한다.

'전쟁이 벧아웬을 지나니라'
'벧아웬'은 믹마스 서쪽 약 1.2km 지점에 위치해 있다(13:5 주석 참조). 본서 저자가 여기서 '벧아웬'을 언급한 이유는, 13:5에서 블레셋 족속의 군대가 주둔했던 믹마스를 '벧아웬 동편'이라고 소개했던 사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여기서는 '벧아웬을 지나니라'라고 언급함으로써 믹마스에 주둔했던 블레셋 족속들이 이제 자신들의 본국 방향인 서쪽으로 패주했음을 밝히려는 것이다(31절). 

24 이 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곤하였으니 이는 사울이 백성에게 맹세시켜 경계하여 이르기를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복하는 때까지 아무 음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모든 백성이 음식물을 맛보지 못하고

'이는 사울이...맹세시켜 경계하여'
'맹세시켜 경계하여'는 (1) '-라고 맹세하기를 강요하여', (2)'어리석게 행동하여' 등 두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 잇다. 그리고 본 문구 이하는 사울이 백성들에게 맹세하기를 강요한 내용이다.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수하는 때까지'
사울의 이같은 말은, 태양이 질 때까지 원수를 무찌르겠다고 했던 여호수아의 결심을 염두에 두고 한 것 같다(수10:13). 따라서 이 말은 블레셋을 완전 섬멸시키겠다는 사울의 결심을 잘 보여 주는 말이다.
그러나 사울의 이 맹세는 여호수아의 경우와는 달리 여호와를 위한 진정한 충정과 신앙에서 비롯된 열성은 아니였다. 다만 사울이 자신의 공명심과 명예욕을 드높이기 위해 상황을 잘못 판단하고, 그대로 밀어부친 독선적 횡포에 불과했다. 따라서, 결국 사울의 이같은 행동은 여러가지 부정적인 결과를 낳고 말았으며, 전쟁에 이기고도 백성들의 신임을 잃는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사울의 이러한 맹세는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열정이 가져다 주는 폐단을 잘 보여 주는 예이다.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구약 성경에서 성행위를 절제하는 것(21:5), 잠을 줄이는 것(시132:3,4), 그리고 희생 제사를 드리기로 서원하는 것(삿11:30,31) 등은 용사들이 전쟁에서 필승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취했던 행동으로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그때 사울은 이것들과 유사한 형식으로, 자신의 헌신적 자세를 표명키 위하여 자신을 포함한 전군(全軍)에게 금식령을 내린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사울이 군사들로 하여금 금식하도록 한 또다른 중요한 이유는 그 전투를 속전 속결로 끝내기 위함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과 격전을 치뤘으며, 블레셋을 쫓아 먼 거리를 행군했기 때문에 매우 허기진 상태였을 것이다. 따라서 당시사울은 이러한 군사들의 상황을 헤아리기보다는 자신의 공명심을 채우기 위해 경솔한 맹세를 발했던 것이다.

25 그들이 다 수풀에 들어간즉 땅에 꿀이 있더라

'땅에 꿀이있더라'
벌들이 나뭇가지나 바위틈 사이에 집을 짓고 거기에 꿀을 만들어 놓느다고 한다. 심지어는 꿀이 벌집에서 넘쳐 땅으로 흘러내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신32:13, 삿14:8, 시81:16, 마3:4).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러한 나뭇가지나 바위틈 사이에서 꿀을 취해 먹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신11:9 주석 참조)으로 묘사하기도 했던 것이다(출3:8, 민13:27, 신8:8).

26 백성이 수풀로 들어갈 때에 꿀이 흐르는 것을 보고도 그들이 맹세를 두려워하여 손을 그 입에 대는 자가 없었으나

'맹세를 두려워하여' 이스라엘 군사들의 이 두려움은 결국 자신들이 한 맹세를 지키지 못할 경우 사울에 의해 시행될 엄중한 징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27 요나단은 그의 아버지가 백성에게 맹세하여 명령할 때에 듣지 못하였으므로 손에 가진 지팡이 끝을 내밀어 벌집의 꿀을 찍고 그의 손을 돌려 입에 대매 눈이 밝아졌더라

'지팡이 끝을 내밀어 꿀을 찍고' 이처럼 요나단이 손이 아닌 지파이로 꿀을 찍어 먹은 이유는 시간의 낭비없이 신속히 적을 추격하기 위해서였다.

'눈이 밝아졌더라'
이 말은 블레셋 군대를 추격하던 중, 피로하고 허기에 지친 요나단이 수풀 나뭇가지에 뭉쳐있는 꿀을 취해 먹고 기력을 다시 회복하였음을 가리킨다(스9:8, 시13:3).

28 그 때에 백성 중 한 사람이 말하여 이르되 당신의 부친이 백성에게 맹세하여 엄히 말씀하시기를 오늘 음식물을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백성이 피곤하였나이다 하니

29 요나단이 이르되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이 땅으로 곤란케 하셨도다'
여기서 '이 땅으로'(에트 하아레츠)는 '이 땅을'이란 뜻인데, 곧 25절의 경우처럼 '이 땅의 백성들'이란 의미이다. 그리고 '곤란케 하다'(아카르)는 '해롭게 하다', '고통을 주다'란의미이다(창34:30, 수6:18). 또한 이 단어는 문맥에 따라 '성전(聖戰)을 망치다'란 의미로 확대 해석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울의 잘못된 금식령으로 인해 이스라엘 군사들이 탈진 상태에 놓였고, 결국 그로 인해 블레셋을 철저히 추격 섬멸하지 못함으로써, 믹마스 전투의 승리가 불완전한 상태에 머물고 말았기 때문이다. 한편 여호수아는, 전리품의 일부를 사취(詐取)함으로써 '아이 성' 전투에서 이스라엘을 패배케한 아간에 대해서 이 단어를 사용했었다(수7:25). 그리고 사사 입다는, 자신의 맹세로 인해 결국 자신을 괴롭게 했던 자신의 딸에게 이 단어를 적용하였다(삿11:35).

30 하물며 백성이 오늘 그 대적에게서 탈취하여 얻은 것을 임의로 먹었더라면 블레셋 사람을 살륙함이 더욱 많지 아니하였겠느냐

본절에 나타난 요나단의 말은 사울의 어리석은 맹세가 왜 믹마스 전투를 망치는 행위였는지를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31 그 날에 백성이 믹마스에서부터 아얄론에 이르기까지 블레셋 사람들을 쳤으므로 그들이 심히 피곤한지라

'아얄론에 이르기까지...쳤으므로'
'아얄론'은 '사슴의 자리'란 뜻으로, 이곳은 믹마스로부터 서쪽으로 약 20km 지점에 위치했으며 블레셋과의 국경에 인접한 성읍이다. 또한 이곳은 역사상 여호수아가아모리 족속을 패배시켰던 전적지이기도 하였다(수10:12). 결국 이스라엘이 금식을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얄론까지 블레셋을 추격했다는 사실은 (1) 요나단의 말처럼(29,30절), 만일 금식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 승리가 얼마나 더 컸을 것인가를 짐작케 해주는 반면 (2) 또한 그당시 이스라엘 군사들이 얼마나 허기지고 피곤했을 것인가를 가히 짐작케 해준다.

32 백성이 이에 탈취한 물건에 달려가서 양과 소와 송아지들을 끌어다가 그것을 땅에서 잡아 피째 먹었더니

본절은 사울의 어리석은 금식 명령이 야기시킬 수 밖에 없었던 부정적 결과에 대한 언급이다. 즉 맹세의 유효 만료 기간인 저녁이 되자마자(24절), 이스라엘 군사들은 너무나 허기에 지친 나머지 자신들의 굶주린 배를 채우느라 율법의 주요한 두 가지 계명을 범하고 말았다. 곧 이때 이스라엘 군사들이 범한 죄는 (1) 소와 송아지를 같은 날에 잡아먹은 것(레22:28), (2) 고기를 피채 먹은 것(창9:4, 레17:10-14, 신12:23)등이다. 이 중 특히 '고기를 피채 먹은 것'은, 거듭 반복 금지된 율법의 핵심 명령을 어겼다는 점에서 더욱 큰 잘못이었다. 레19:26 주석 참조.

'땅에서 잡아'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고팠던 나머지 허기(虛飢)를 채우는 일에 급급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돌 위에서 가축을 잡아야만 고기로부터 피를 뺄 수 있었던 것이다.

33 무리가 사울에게 전하여 이르되 보소서 백성이 고기를 피째 먹어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사울이 이르되 너희가 믿음 없이 행하였도다 이제 큰 돌을 내게로 굴려 오라 하고

34 또 사울이 이르되 너희는 백성 중에 흩어져 다니며 그들에게 이르기를 사람은 각기 소와 양을 이리로 끌어다가 여기서 잡아 먹되 피째로 먹어 여호와께 범죄하지 말라 하라 하매 그 밤에 모든 백성이 각각 자기의 소를 끌어다가 거기서 잡으니라

'거기서 잡으니라'
즉 사울의 명령으로(33절) 마련된 큰 바위 위에서 짐승을 잡았다는 뜻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군사들은 짐승으로부터 피를 뺀 후 살코기만 구별하여 먹을 수 있었다.

35 사울이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으니 이는 그가 여호와를 위하여 처음 쌓은 제단이었더라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으니'
여기서 '단'(壇)은, 그곳을 희생 제사가 계속적으로 드려지는장소로 삼으려는 목적에 따라 세워지지는 않았다. 다만 사울은 그때 본(本) 믹마스 전투를 승리로 이끄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7:12) 단회적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그 단을 쌓은 듯하다.

'처음 쌓은 단이었더라'
문자적으로는 '단을 쌓기 시작하였다'란 의미이다. 즉 이것은 특별한 목적에 따라 왕이 단을 쌓는 일에 있어서, 사울이 선구자가 되었음을 뜻한다. 한편 후일 다윗도 여호와를 위해 단을 쌓았다(삼하24:25).

36 사울이 이르되 우리가 밤에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 동틀 때까지 그들 중에서 탈취하고 한 사람도 남기지 말자 무리가 이르되 왕의 생각에 좋은 대로 하소서 할 때에 제사장이 이르되 이리로 와서 하나님께로 나아가사이다 하매

'제사장이 가로되...하나님께로 나아가사이다'
여기의 '제사장'은 말할 나위없이 대제사장 아히야(Ahijah)임이 분명하다(3,18절).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가사이다'란 말은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기 위해 취하는 행동이다. 따라서 그때 제사장 아히야는 밤중인데도 불구하고 블레셋 군대를 계속 추격하자는 사울의 결정이, 전투중인데도 백성들을 금식시켰던 전번의 결정만큼이나 경솔하지나 않은 것인지를 염려했던 것이다.

'이리로' 방금 전 사울이 쌓았던 제단을 가리킨다.

37 사울이 하나님에 묻자오되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리이까 주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되 그 날에 대답하지 아니하시는지라

'사울이 하나님께 묻자오되'
사울은 이때 대제사장의 에봇에 들어있는 '우림과 둠밈'(출28:30 주석 참조)을 통하여 블레셋을 추격해야 할지의 여부를 질문하였을 것이다.

'대답지 아니하시는지라'
대제사장의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합법적으로 문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전혀 응답지 않으셨다는 사실은, 분명 이스라엘 중에 어떤 하자(瑕疵)가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38 사울이 이르되 너희 군대의 지휘관들아 다 이리로 오라 오늘 이 죄가 누구에게 있나 알아보자

39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아들 요나단에게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죽으리라 하되 모든 백성 중 한 사람도 대답하지 아니하매

'반드시 죽으리라'
전투 중에 군사들을 금식케 한 사건(24절) 이후, 사울의 경솔한 맹세가 여기서 또다시 나타난다(수9:15-21).

'한 사람도 대답지 아니하매'
요나단이 사울의 명령을 범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군사들까지도 이같이 한 것은, 이처럼 침묵함으로써 사울의 경솔함을 책망키 위함이었을 것이다.

40 이에 그가 온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너희는 저쪽에 있으라 나와 내 아들 요나단은 이쪽에 있으리라 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왕의 생각에 좋은 대로 하소서 하니라

41 이에 사울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아뢰되 원하건대 실상을 보이소서 하였더니 요나단과 사울이 뽑히고 백성은 면한지라
42 사울이 이르되 나와 내 아들 요나단 사이에 뽑으라 하였더니 요나단이 뽑히니라

우림과 둠밈을 통한 문의에 하나님께서 대답이 없자(37절), 사울은 여기에서 제비를 뽑는 방식에 의하여 범인을 가려내고 있다. 즉 그때 사울은 제비 뽑기를 통하여(1) 백성과 자기 가족 두편 중에서 먼저 범인이 속한 한 편을 가려내고 (2) 이어 범인이 속한 한 편으로 밝혀진 자신의 가족 중 최종적으로 범인 요나단을 가려냈던 것이다.

43 사울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네가 행한 것을 내게 말하라 요나단이 말하여 이르되 내가 다만 내 손에 가진 지팡이 끝으로 꿀을 조금 맛보았을 뿐이오나 내가 죽을 수밖에 없나이다

본절에서는 요나단은 자신의 행위(27절)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도, 겸손히 부친 사울의 뜻을 좇기로 작정한다.

44 사울이 이르되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사울은 여기서 자신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했던 바(39절)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지켜저야 한다고 생각한 듯하다. 물론 그때 사울은 자신의 맹세가 경솔한 것이었다는 사실로 인하여 내심 후회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한편, 그런데 여기서 요나단이 금식령 기간 중 꿀을 먹은 사실은 결코 사울의 맹세에 대한 거역이나 불복종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때 요나단은 그러한 사울의 명령을 전혀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27절). 즉 요나단은 전혀 고의성(故意性) 없이 '부지중에' 잘못을 범한 것이다. 이런 경우 율법에 의하면(레4:3,13,14,22-24,27,28), 합당한 제물을 가지고 대속을 위한 속죄제를 드림으로써 죄 용서함 받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요나단에게 속죄제를 드릴 기회조차 주지 않고, 자신의 맹세를 따라 요나단을 죽이려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사울이 자신의 권위에 스스로 빠져버린 어리석은 행위였다.

45 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이스라엘에 이 큰 구원을 이룬 요나단이 죽겠나이까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은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역하였음이니이다 하여 백성이 요나단을 구원하여 죽지 않게 하니라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백성들은 제비를 뽑기 전에는 소극적으로 침묵으로 일관했으나, 제비에 의해 요나단이 맹세를 범한 장본인으로 판명되고, 이에 따라 그가 죽임을 당할 위기에 놓이자 이제 적극적으로 요나단의 구명(救命)을 위해 사울에게 항의한다.

46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 추격하기를 그치고 올라가매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이것은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투를 완전히 중지한 채, 자신의 고향이자 당시 정치적 통치 중심지인 기브아(10:26)로 돌아갔음을 뜻한다. 한편 이것은 사울이라는 인물이 경박한 인격의 소유자임을 보여 준다. 사실 하나님께서 사울의 질문에 대하여 대답지 아니하신 것은(37절), 블레셋을 추격치 말라는 의미에서 그리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볼 수 있는 까닭은, 대답지 아니하셨다는 것은 이스라엘 중에 어떤 하자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는 바(37절),
이제 그 하자가 발견되어 완전히 해소되었기 때문에 다시금 일치 단결하여 추격의 고삐를 당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울은 그 하자(瑕疵)가 결국 자신의 경솔한 맹세(24절)로 귀착되자 그만 블레셋에 대한 추격까지 포기하고 만 것이다.

'블레셋 사람이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즉 믹마스 땅에 진쳤던(13:16)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에 패하여, 결국 자기 본토로 돌아갔다는 뜻이다. 따라서 결국 이번 믹마스 전투에서 살아남은 블레셋 군대는 이후 다시 세력을 키워 이스라엘을 재차 침공하였고(29:1), 그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대패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울과 요나단이 전사하기까지 하는 비극을 당하고 만다(31:1-6).

47 사울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른 후에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 곧 모압과 암몬 자손과 에돔과 소바의 왕들과 블레셋 사람들을 쳤는데 향하는 곳마다 이겼고

'사울이...왕위에 나아간 후에'
사울이 처음 길르앗 야베스 전투(11:11)를 통해 암몬 족속을 꺾음으로써 공식적으로 이스라엘의 왕위(王位)에 추대되었듯이(11:15), 이제 사울이 믹마스 전투(14:23,31)를 통해 난적 블레셋의 세력을 꺾음으로써 왕으로서의 통치권을 완전히 확립했음을 보여 준다.
한편 여기서 '나아간'(*, 라카드)은 '획득하다', '점령하다'란 의미로서(신2:35, 수8:21, 삿1:12), 이는 곧 사울이 왕으로서의 통치권을 확고히 굳혔다는 의미이다.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
이 표현 그대로, 당시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모압과 암몬은 동편에, 에돔은 남방에, 소바는 북방에, 그리고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서편에 각각 위치하고 있었다.

'소바의 왕들' '소바'는 유프라테스 강 상류에서 야르묵 강 사이에 자리 잡았던 아람족의 일파이며(삼하8:3), 여러 부족으로 이루어진 부족 연합 성격의 국가였다. 한편 '왕들'은 이들이 부족 연합의 성격을 띠고 있던 도시 국가였음을 잘 보여 준다.

48 용감하게 아말렉 사람들을 치고 이스라엘을 그 약탈하는 자들의 손에서 건졌더라

'아말렉 사람을 치고' 사울이 '아말렉'을 친 사실은 15:1-9에 언급되고 있으나, 여기서는 별도의 사건을 다루고 있는 듯하다. 그같이 보아야 할 까닭은, 15:1-9의 언급은 출애굽시 아말렉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여정(旅程)을 방해했던 역사적 사실에 따라 그 족속에 대하여 행해진 징벌과 관계되지만, 본절의 언급은 아말렉족속의 이스라엘 영토 침입에 따른 징벌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49 사울의 아들은 요나단과 이스위와 말기수아요 그의 두 딸의 이름은 이러하니 맏딸의 이름은 메랍이요 작은 딸의 이름은 미갈이며

'말기수아' 이 이름은 '나의 왕은 구원이다'란 의미이다. 한편, 사울과 그의 세 아들 요나단과 리스위(아비나답)와 말기수아는 후일 블레셋과의 길보아 전투에서 함께 전사(戰死)한다. 그리고 이 외에도 사울에게는 '에스바알'이라고도 불리우는(대상8:33) 그의 네째 아들 '이스보셋'이 있었다(삼하2:8).

'메랍'
'증가하다'란 의미의 이름인 메랍은 원래 골리앗을 죽인 사람에게 시집보내기로 약속이 되었었다(17:25). 그러나 그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고, 골리앗을 죽인 다윗 대신 므흘랏 사람 아드리엘에게 시집보내졌다(18:19).

'미갈'
'누가 하나님 같으냐?'란 뜻이다. 사울의 차녀인 미갈은 다윗과 결혼했으나, 언약궤로 인하여 기뻐서 춤추던 다윗을 비웃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아이를 낳지 못했다(삼하6:23). 한편 사울의 두 딸 메랍과 미갈은 18:17-21의 사건에 대한 배경으로 여기 기록되었다.

50 사울의 아내의 이름은 아히노암이니 아히마아스의 딸이요 그의 군사령관의 이름은 아브넬이니 사울의 숙부 넬의 아들이며
51 사울의 아버지는 기스요 아브넬의 아버지는 넬이니 아비엘의 아들이었더라

'아하노암'
'나의 형제는 유쾌하다'란 의미이다. 부친은 '아히마아스'인데, 그 이름에 '아히'('형제'란 뜻)란 접두어가 붙은 것으로 보아(3절) 제사장 가문일 가능성이 있다.

'아브넬'
'나의 아버지는 넬'이란 뜻이다. 사울과는 사촌 관계로서, 사울 왕국의 군대 장관을 맡았던 아브넬은 요압이 다윗을 군사적으로 도왔듯이 사울과 그의 아들 이스보셋을 군사적으로 보좌했던 인물이다(삼하2:8,9).

'사울의 숙부 넬'
'넬'은 '등불'이란 뜻이다. 이 사람은 사무엘이 사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표명했던 인물이다(10:15,16).

52 사울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과 큰 싸움이 있었으므로 사울이 힘 센 사람이나 용감한 사람을 보면 그들을 불러모았더라

본절은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왕국을 통치하는 기간 동안에 있었던 가장 특징적인 사실들을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즉 (1) 숙적 블레셋과 간단없는 전쟁을 치루었다는 사실이며(17:1-3, 23:27, 29:1, 31:1,2), (2) 따라서 그러한 블레셋과의 전쟁에 대비키 위하여 정예 상비군을 조직함으로써, 국방력을 키워나갔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사울은 이스라엘의 사사(士師)시대를 마감하고, 왕정 시대를 문을 열고 그 기반을 닦은 무사적(武士的) 왕으로서, 실로 백성들의 요구대로 '열방과 같은'(8:5,20) 왕처럼 활약한 인물이었다.

'사울이...불러 모았더라' 이 말은 사울이 열방과 같은 왕처럼 조직적인 군대를 소유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즉 사울은 힘있고 용맹한 백성들을 병사로 징집함으로써 상비군(常備軍)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