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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15장 해석 및 주석

LNCK 2023. 3. 2. 15:55

◈삼상15장 해석 및 주석

1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선지자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을 사울 왕에게 전달하기 위해 그에게 다시 온 때는 두 사람이 헤어진 이후(13:15) 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인 듯하다. 대략 당시의 시점을 추정해 보면 다음과 같다. 즉 다윗은 그의 나이 30세 때인 B.C. 1010년 경에 왕위에 올랐는데, 만일 다윗이 최초 기름 부음 받은 때를 대략 15세 때로 본다면(16:11, 12) 그때는 아말렉 전투 직후였으므로(16:1), 아말렉 전투는 B.C. 1025년 경에 벌어졌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결국 사무엘이 사울에게 다시 온 이때는 믹마스 전투 때(B.C. 1048년)이므로 사울과 헤어진 지(13:15) 약 23년 후라는 계산이 나온다.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기름을 부어' 
사무엘의 이 말은 사울이 열방의 왕과는 다른 특성을 지닌 왕임을 보여 준다. 즉 선민 이스라엘의 왕 사울은 열방의 왕과는 달리 신적(神的)인 기원을 가지며, 따라서 하나님의 대리자인 선지자의 지도를 받아야만 하는 왕이었다. 한편, 여기서 '기름을 부었다'는 선지자 사무엘의 말은 10:1의 사건과 연관되는 말이다.

'이제 왕은...말씀을 들으소서' 
이 말은 사울이 전에 여호와의 선지자 사무엘의 직무를 침범했던 제사 사건(13:8-14)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사울은 그 사건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하나님의 일차 시험을 통과치 못했었다. 그러므로 여기 사무엘의 이 언급은 사울이 반드시 통과해야만 할 새로운 시험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질 것을 예시한다. 
이로 볼 때 믹마스 전투 개시 직전, 사무엘이 사울의 불순종에 대해 심판적 경고(13:13, 14)를 내린 것은 최종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그 선언 이후 사무엘이 다시금 사울을 찾아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킬 것을 당부한 것은 여호와께서 아직 사울을 버리지 아니하사, 그로 하여금 새롭게 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고 계심을 의미한다(13:14 주석 참조). 
이것은 마치 니느웨 성에 대한 요나의 심판 선언도 최종적인 선언인 것 같았으나, 니느웨 성이 회개하자 하나님께서 그 뜻을 돌이키신 것과 같은 이치이다(욘 3:4-10).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길이 참으사 죄인이 회개하고 살기를 바라시는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시다(겔 18:23, 33:11, 롬 2:4). 그러나 사울은 금번 아말렉 전투에서도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거역과 반역의 죄를 범함으로써(9절), 마침내 하나님께 버림받고 만다(26절, 16:14).

2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만군의 여호와' 이 표현은 특별히 성전(聖戰)과 관련하여 주로 언급된다(1:3, 11, 4:4, 17:45, 삼하 5:10). 따라서 사무엘은 여기서 이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본절 이하에서 언급되는 아말렉과의 전투 명령의 엄숙성을 더욱 강조한다.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아말렉 족속(the Amalekites)은 에서의 손자 아말렉의 후손들로서(창 36:12, 16, 대상 1:36), 유다 남부 광야 지역을 거점으로 유목과 약탈로 살아간 호전적인 족속이다. 이 족속은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직후 르비딤 광야에 이르렀을 때, 교활하게 이스라엘 후미(後尾)를 기습 공격했었다(출 7:8-13). 그런데 그때는 이스라엘이 오랜 노예 생활 끝에 해방된 직후였으므로 아무런 전투 능력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신 25:17-19). 따라서 그때 이 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입은 타격은 실로 막대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서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은 바로 이러한 아말렉의 기습 공격 사건을 뜻한다. 
아말렉의 이 공격 사건이 특히 용서받지 못할 사건이 된 것은 이것이 (1)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베푸신 크신 출애굽의 은총을 무시한 채 가나안 여정을 방해했던 사건이고, (2) 피곤하고 지친 이스라엘의 후미를 공격하는 비겁한 전술을 구사했던 사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아말렉 족속을 선민(選民) 이스라엘의 제 1의 대적국으로 간주하시고, 그 족속을 천하에서 도말하고 진멸할 것을 선언하시고 명령하셨는 바(출 17:14, 신 25:19), 이러한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는 이방의 술사(術士) 발람의 예언 속에서도 여실히 나타났다(민 24:20). 

한편 이러한 하나님의 형벌 하에 놓여진 아말렉 족속은 비단 이 사건 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이스라엘이 요단을 통하지않고 네게브(Negeb, 유다 남부 사막 지대) 지역을 통과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는 것도 방해하였다(민 14:43-45). 그리고 사사 시대에 들어와서도 이스라엘에 대한 그들의 잔인하고 난폭한 침입은 결코 중지되지 않았었다(삿 3:13, 5:14, 6:3, 33, 7:12, 10:12, 12:15). 이에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사울을 통해 아말렉 족속을 진멸코자 하셨던 것이다. 출 17:14, 민 24:20, 신 25:19 주석 참조.

'내가 추억하노니' 
'추억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파카드'(*)는 '방문하다', '생각하다'란 뜻으로서, 곧 어떤 일에 대해 잊지 않고 내내 기억하고 있다가 때가 되어 찾아가는 행위를 뜻한다. 물론 여기에서는 이스라엘에게 행한 아말렉 족속의 적대 행위를 지적하고 있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한 아말렉의 적대 행위 자체만을 기억하고 있음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이때 (1)아말렉 족속에게 복수하라고 당신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셨던 사실(출 17:14, 신25:19), (2) 그리고 아말렉에 대한 복수를 위한 성전(聖戰) 때에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싸우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던 사실(출 17:16) 등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

3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지금' 
출애굽 직후 가나안 행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격한 아말렉 족속의 적대 행위에 대해 이스라엘이 복수해야 할 때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여러 측면에서 안정을 이룩했을 시기로 지정하셨었다(신 25:19).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은 사울 치하에서 정치적인 안정을 이미 구축하고 있었다(14:47, 48). 즉 아말렉을 칠 시기가 도래했던 것이다.

'그들의 모든 소유를...진멸하되' 
'그들의 모든 소유'는 문자적으로는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이란 뜻으로, 곧이어 언급되는 '남녀...나귀' 등 모두를 가리킨다. 
한편 '진멸하되'(하람)는 원래 '금지하다' 혹은 '바치다'란 의미이나, 여기서처럼 사역형으로 사용될 경우 '분리시키다', '금지시키다'란 의미가 된다. 특히 이 단어는 성경에서 사역형으로 사용되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목적으로 부정한 것을 제거하거나 저주받은 물건을 제사장에게 바치는 행동을 나타낸다. 
즉 하나님의 뜻에 의해 '헤렘'(바쳐진 것, 금지된 것)으로 지정된 것은 결코 다른 용도로는 쓰여질 수 없었고, 오직 하나님의 공의(公義)의 만족을 위해 반드시 '헤렘의 법칙'대로 시행되어야만 했다. 

따라서 만일 이 '헤렘'이 산 것이면 죽여야 했고, 그 밖의 물건들은 불로 다 태워버려야 했으며, 불로 태워지지 않는 금.은 등은 성소에 귀속시켜 하나님께 봉헌되어야만 했다(레 27:28, 신 13:16 , 수 6:17). 

'남기지 말고' 
여기서 '남기다'(하말)는 '긍휼히 여기다', '동정하다', '아까워하다'란 뜻이다(23:21, 삼하 12:6, 대하 36:15, 17). 그러므로 이 말은'일말의 동정도 하지 말고' 또는 '조금도 아까워 말고'란 뜻이다. 곧 이는 거룩한 하나님의 의롭고 공의로운 심판대로 철저히 시행하라는 엄숙한 명령이다.

4 사울이 백성을 소집하고 그들을 들라임에서 세어 보니 보병이 이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만 명이라 

'사울이 백성을 소집하고' 
여기서 '소집하다'(솨마)는 원래 '듣다'란 의미이나, 여기서처럼 강조형으로 쓰일 경우 '불러 모으다', '듣게 하다'란 뜻이 된다(시 66:8, 렘 51:27). 결국 이것은 전투의 필요성을 알리며, 그렇게 함으로써 백성들이 전투하기 위하여 모여 들도록 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들라임에서 계수하니' 
'들라임'(Telaim)은 유다의 한 성읍으로서 '델렘'(수15:24)과 동일 지역인 듯하다. 그런데 '델렘'(Telem)은 여호수아서에서 유다의 또 다른 성읍 '십'과 같이 언급된다는 점에서 그곳에 인근한 지역일 것이다. 한편 '십'(Ziph)은 헤브론 남쪽 약 51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결국 '들라임'은 유다 남방의 국경 지대에 있는 장소로서, 곧 아말렉과의 경계 지점에 위치했음이 분명하다. 

'보병이 이십만...유다 사람이 일만' 

여기서 '유다 사람'만 유독 구별되어 있는 것은, 여기에는 본서 기록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의도적으로 반영되고 있기 때문이다(11:8). 즉 이 아말렉 전투가 벌어졌을 당시 유다 지파는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와 완전히 동화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한편 '이십만...일만'은 야베스 길르앗 전투때 소집된 병력 '삼십만...삼만' 보다는 적은 숫자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유다 지파는 병력 소집 장소인 '들라임'에 가까이 거주했으면서도 참여율이 다른 지파에 비하여 훨씬 적었다는 사실이다(11:8). 이것은 결국 유다 지파가 사울의 왕국에 대하여 특별히 도전적 자세를 취하고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아마 유다 사람들은 그때 자신의 지파에서 왕이 나와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창49:10).

5 사울이 아말렉 성에 이르러 골짜기에 복병시키니라 

'아말렉 성에 이르러' 
'아말렉 성'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 곳으로서, 지금도 정확한 위치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아무튼 이때 사울의 군대는 국경을 넘어 아말렉의 영토 안으로 진격해 들어갔음이 분명하다.

'골짜기에 복병하니라' 
여기서 '골짜기'는 건기(乾期)에는 물이 흐르지 않는 '와디'(Wady)를 가리킨다. 그리고 '복병'(伏兵)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들과 정복전을 치룰 때 이미 전술의 한 형태로서 사용되었다(수 8:2, 삿 20:29). 그러나 여기의 '복병'은 아말렉을 기습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말렉 사람들과 함께 거주했던 겐 사람들을 대피시킬 시간적 여유를 갖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6 사울이 겐 사람에게 이르되 아말렉 사람 중에서 떠나 가라 그들과 함께 너희를 멸하게 될까 하노라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너희가 그들을 선대하였느니라 이에 겐 사람이 아말렉 사람 중에서 떠나니라 

사울이 후대의 다윗처럼(27:10, 30:26-30), 이스라엘에 대하여 우호적이었던 겐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장면이 언급되고 있다.

'겐 사람' 
'겐'(케니)은 '금속 세공업자' 혹은 '대장장이'란 의미이다. 이와 같은 명칭은 그들이 살던 아라비아 지역에 질이 좋은 동광석(銅鑛石)이 풍부했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 당시 유목민으로서 가나안 땅에 거주한(창 15:19) 겐 족속의 일파는, 모세 당시에는 미디안 지역에 거주했었으며(출 2:16-21, 18:1, 민 10:29),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때에는 그 족속의 한 사람이었던 모세의 처남 호밥이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길 안내자가 되면서(민 10:29-32) 이스라엘과 우호적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후 그 민족은 이스라엘의 남부 브엘세바 근처에서 살게 되었다(삿 1:16). 그리고 이때로부터 점점 남부로 내려가, 사울 시대에는 아말렉 족속들의 지역에 함께 거주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겐 사람들 모두가 이스라엘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여기서 언급된 '겐 사람' 이외의 또 다른 '겐 사람'의 일파는 아라비아의 페트레아(Petrea) 지역에 살면서 에돔과 동맹을 맺고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등, 이스라엘에 대하여 적의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 언급된 겐 사람은 이후 다윗 시대까지 이스라엘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였다(30:29).

'선대하였느니라' 
혹자(Hengstenberg)는 이처럼 아말렉 족속으로부터 겐 족속이 구별되어 보호 받을 것이란 사실은 이방의 술사 발람의 예언(민 24:20, 21) 속에서 이미 나타난다고 한다. 

'떠나니라' 
이것은 겐 사람들이 그 지역에서 영원히 떠났음을 말하지 않는다. 단지 아말렉과 이스라엘의 전투를 피해 잠시 다른 곳으로 이동 대피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후 사울 왕 말기에도 겐 사람들이 네게브(Negeb) 지역에 계속 살고 있었다는 사실로써 확증될 수 있다(27:10, 30:26-30).

7 사울이 하월라에서부터 애굽 앞 술에 이르기까기 아말렉 사람을 치고 

'하윌라에서부터 애굽 앞 술' 
'하윌라에서부터 ~ 술에 이르기까지'라는 말은 당시 아말렉 족속들이 흩어져 살던 거의 모든 영역을 가리킨다(창 25:18). 한편 '하윌라'는 '광황한 모래 사장'이란 의미로서, 아라비아 반도 북서부 쯤에 위치한 한 지역 정도로만 추측된다. 
그리고 '술'(Shur)은 딤사 호수 동쪽에 위치한 시나이 광야를 뜻하는 일반적 명칭인듯 하다(창 16:7). 즉 이곳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 최초로 도달한 지역으로(출 15:22), 애굽과 팔레스틴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아라비아 사막의 일부이다. 
위의 언급을 통해 우리는 사울이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유다 국경 지대로부터 애굽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족속의 거의 전지역을 초토화(焦土化) 시켰음을 알 수 있다.

8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 잡고 칼날로 그의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9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본문은 사울이 하나님의 진멸 명령을 부분적으로만 이행하였음을 보여 준다. 즉 사울은 일반 백성들과 짐승의 열등한 것들은 명령대로 모두 진멸했지만, 자신에게 실리적으로 유용한 짐승 또는 우수하고 질 좋은 것들은 진멸치 아니했다.

'아각을 사로잡고' 
사울이 하나님의 지엄한 명령을 따르지 아니하고, 이처럼 아말렉 족속의 왕 '아각'을 살려둔 이유는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즉 (1) '아각'을 통하여 큰 실리(實利)를 얻기 위한 목적(왕상 20:31-42), (2) 혹은 '아각'을 통하여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한 목적(12절) 등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한편 '아각'은 애굽 왕을 '바로'라고 하듯이, 아말렉 왕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불려지던 명칭이다(민 24:7 주석 참조). 그리고 '아각'의 의미는 '맹화'(猛火)란 뜻이다.

'그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이 말은 아각을 제외한 모든 아말렉 사람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진멸했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거의 모든 아말렉 족속을 쳐죽였다는 뜻이다. 
사실 아말렉 족속이 거주하던 유다 남부 광야 지대는 광활했을 뿐만 아니라, 아말렉 족속은 유랑 생활을 하던 족속이었으므로 이들을 완전 진멸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당시 일부는 피해 달아났거나 또는 발각되지 않았던 관계로 살아 존속했을 터인데(27:8, 30:1, 삼하 8:12). 결국 이들은 히스기야 시대에 시므온 사람들에 의해 전멸되었다(대상 4:43). 한편, 여기서 진멸하였으되(헤헤림)란 말의 개념에 대해서는 3절 주석을 참조하라.

'기름진 것(미쉐님)' 
직역하면 '두번째로 태어난 것'이란 뜻이다. 그러나 이는 다른 것보다 열등하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것보다 좋다는 의미이다. 사실 고대인들은 동물의 태(胎)에 있어, 첫번째 태보다 두번째 태를 더 좋은 것으로 간주하였다.

10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1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사무엘의 제사권 침해 사건(13:9)에 이어 여기서는 사울이 하나님에 의해 제시된 두번째 시험, 곧 아말렉 진멸 사건에서도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1절, 13:8-14).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여기 하나님의 '후회'는 인간의 후회와는 전혀 그 성격이 다른 것이다. 즉 하나님의 후회는 당신의 어떤 특별한 행위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하여, 거기서 돌이키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29절). 이것은 다만 죄인의 거역에 대한 신적(神的)인 슬픔을 의인법적(擬人法的)으로 묘사한 표현일 뿐이다(창 6:6, 7).

'돌이켜서(슈브)' 
성경 용례상 이 말은 종종 여호와께 대한 반역 및 배교를 나타낼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민 14:43, 32:15, 수 22:16, 18, 렘 3:19).

'사무엘이 근심하여' 
여기서 '근심하다'(하라)란 말은 '(분노로) 타오르다'란 의미이다. 따라서 여기 이 말은 오히려 '진노하여'로 번역함이 타당하다(창4:6, 민 11:33, 신 7:4, 삼하 24:1). 아마도 이때 사무엘은 자신의 간곡한 권면(1절)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자신의 이기적 충동을 따라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결국 왕을 세운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이 손상되고 파괴되었다는 그 사실로 인하여 거룩한 의분(義憤)을 느꼈을 것이다.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사무엘의 이같은 태도는 왕과 백성들을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하겠다고 했던 자신의 각오(12:23)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자신의 각오처럼 이때 사무엘은 (1) 하나님께로부터 사울의 불순종의 죄를 사죄받기 위하여, (2) 그리고 무엇보다 사울이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뉘우치고 회개하기를 바라고 기도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사무엘이 여호와께 부르짖는 모습은 이전에도 수차 나타나는데(7:8, 9, 12:18), 이로 보아 진정 사무엘은 기도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죄인이 죄 용서함 받기 위해서는 가장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전제 조건이 있으니, 곧 당사자인 그 죄인의 회개이다. 그러나 사울은 끝내 회개치 않음으로써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고 만다. 한편, 유대 학자 아바르바넬(Abarbanel)은 여기서 사무엘이 사울을 위하여 그처럼 간절히 중보 기도한 것은, 사무엘이 개인적으로 사울을 그 용모와 용감성 때문에 진정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12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사울이...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여기서는 아말렉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승전비(勝戰碑)를 가리킨다.

'갈멜에 이르러' 
여기의 '갈멜'(Carmel)은 헤브론 남동쪽 약 15km 지점에 위치한 유다 지파의 성읍으로서, 원래 갈렙에게 주어졌었다(수 15:55). 이곳은 또한 나발과 아비가일의 고향이기도 하였다(25:2-40). 

'돌이켜...길갈로 내려갔다' 
사울이 자신의 고향이자 당시 이스라엘의 정치적 수도인 기브아(10:26)로 가지 아니하고 '길갈'로 간 까닭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제단이 있는 여러 곳(7:16) 중 가장 가기에 용이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21절). 한편 '내려갔다'(야라드)라는 말은 길갈(Gilgal)이 요단 골짜기 저지대에 위치했었다는 지리적 특성을 잘 반영해 준다(10:8, 창 43:20, 수 16:7, 18:16). 즉 사울은 갈멜에서 승전비를 세운 뒤 유다 산맥을 가로질러 요단 계곡의 길갈로 향했던것 같다(13:4). 한편 '길갈'(Gilgal)에 대해서는 수 4:19 주석을 참조하라.

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른즉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으소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하니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여호와의 명령'은 분명 아말렉에게 속한 모든 것을 남김없이 진멸하라는 것이었다(3절). 그러나 사울이 이같은 여호와의 명령을 제대로 이행치 않았으면서(8, 9절), 명령을 온전히 이행한 듯 묻기도 전에 말한 것은 죄의식(罪意識)의 소산이요, 외식(外飾)의 결과였다.

14 사무엘이 이르되 그러면 내 귀에 들려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라 

여기서 사무엘은 들려오는 짐승의 소리를 증거로 사울의 말(13절)이 위선이요 거짓임을 예리하게 폭로한다. 이에 대해 스미드(R. Payne Smith) 박사의 다음과 같은 표현 역시 날카롭다. '사울의 양심은 침묵하나 오히려 짐승은 사울의 위선과 불복종을 외치고 있다'

15 사울이 이르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하는지라 

'그것은 무리가...끌어 온 것인데' 
여기서 '무리가'란 말은 13절의 '내가'란 말과 너무나도 대조된다. 즉 13절에서는 자신을 내세워 자신의 공로를 주장하다가, 이제 상황이 불리해지자 재빨리 '무리가'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그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한 것이다. 이렇듯 진정한 회개 및 죄의 고백으로부터 점점 멀리 떠나가는 사울의 위선이 애처롭다. 이는 마치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그 죄를 하와에게 떠넘기려는 책임 전가와 다를 바 없다(창 3:12). 그러나 당시 백성들은 사울의 허락이나 묵인 없이는 결코 짐승들을 끌고 올 수 없었다(14:24-26).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남김이요' 
사울의 이 말은 거룩한 제사 의식을 빌미로 하여 자신의 범죄와 이기심을 합리화 하려고 애쓰고 있음을 잘 보여 주는 말이다. 그러나 비록 사울이나 백성들이 짐승들을 실제로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위하여 진멸치 아니했다고 할지라도, 그들에게 잘못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짐승들을 하나님께 제사드린 후 그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결국 그들은 바로 이같은 이기적인 계산에 따라 '제사'를 빙자하여 짐승들을 진멸치 아니한 것이었다.

16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가만히 계시옵소서 간 밤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신 것을 왕에게 말하리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말씀하소서 

'가만히 계시옵소서'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레프'는 문자적으로 '중지하라!'(Stop!)란 뜻이다. 결국 이 말은 핑계와 변명, 책임 전가 등을 이제 그만두라는 의미로서, 사울의 구차한 변명을 더이상 듣지 않겠다는 사무엘의 확고한 의지를 반영하는 말이다.

'간밤에...이르신 것' 
이 계시는 사무엘이 철야하며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임하신 사울에 대한 말씀인 듯하다(11절).

17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것은 말할 나위없이, 처음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우려는 의사를 보였을 때에 사울이 취했던 겸손한 행동을 가리킨다(9:21). 그러나 왕위에 오르고 권력이 생기자 사울은 점차 교만한 자가 되어, 결국은 비천한 자신을 들어 왕으로 세우신 여호와의 명령까지 무시하는 패역한 자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여호와께서...기름을 부어...왕을 삼으시고' 
이것은 (1)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른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2) 따라서 사울의 왕권은 이방의 그것과는 달리 하나님의 명령과 뜻을 온전히 실행할 의무가 뒤따른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18 또 여호와께서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19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여기서 사무엘은 사울에게 하달된 여호와의 신성한 명령을 사울이 전적으로 이행치 아니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사울의 주장(13, 15절)이 자기 변명과 외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

'길로 보내시며' 
여기서 '길'(데레크)은 여호와께서 사울에게 아말렉족속을 진멸하라는 신성한 명령을 주어 내보낸 원정의 길을 뜻한다(Fay).

'죄인 아말렉' 
여기서 '죄인'이란 말은 '아말렉' 족속들이 마땅히 진멸됐어야 할 합당한 이유이다. 그런데 여기 아말렉 족속의 용서받지 못할 죄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백성을 멸절시키려 했던 죄이다(2절, 출 17:8-13).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이것은 문자적으로 '탈취물에게로 날아갔다'(flew on thespoil, KJV)란 뜻이다. 이 말은 아말렉과의 전투시 사울이 아말렉의 좋은 것들을 보고 그 마음에 탐심이 생겨, 그것을 간절하고도 열정적으로 원했다는 뜻이다. 결국 사무엘의 이 말은 사울이 여호와께 제사드리기 위해 아말렉의 좋은 것들을 남긴 것이 아니라,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음을 지적하는 말이다.

20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아각을 끌어왔고' 
사울은 여기서 여호와의 진멸 명령을 거역하고 '아각'을 살린 자신의 사악한 행위(8, 9절)를 전혀 죄로 인정치 않고 있다. 오히려 여호와의 명령을 좇아 아말렉과 전투를 수행했다는 그 실제적인 증거로서 아각을 사로잡아 왔다는 식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강변하고 있다.

21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는지라 

사울은 15절에 이어 여기서도 아말렉의 짐승을 진멸치 않은 자신의 범죄를, (1) 하나님의 제사를 빙자하고 (2) 또한 백성들에게 떠넘김으로써 정당화시키려 한다(15절).

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 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번제와 다른 제사' 
'번제'는 헌신을 상징하는 제사이다(레 1:3-17). 그리고 '다른 제사'(제바힘)는 문자적으로 '희생'(sacrifices)이다. 그런데 이것은 복수로 언급되어 있다는 점에서, 번제 이외의 다른 희생 제사 모두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아말렉 족속에 대한 여호와의 진멸 명령(3절)을 무시한 채, '여호와께 제사드릴 목적으로'(15, 21절) 그 족속의 가장 좋고 기름진 짐승들을 끌고 왔노라고 극구 주장하는 사울에게 사무엘이 명쾌히 선포한 이 말은, 오고오는 세대들에게 외적 의식(儀式) 행위 보다는 내적 마음의 순종 자세가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금언적(金言的)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사무엘 이후 많은 선지자들에 의해, 여호와께 대한 합당한 예배의 기본 자세로 거듭 강조되었다. 즉 시편 기자(시 50:8-15, 51:16, 17), 이사야(사 1:11-17), 예레미야(렘 6:20), 호세아(호 6:6), 미가(6:6-8), 그리고 마침내 참 선지자요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 사실이 다시금 확증되고 강조되었다(마 9:13 , 12:7). 
따라서 이 말씀의 핵심을 다시 요약하면, (1) 예배의 형식 보다는 예배자의 마음 자세가 더욱 중요하며(전 5:1, 미 6:6-8), (2) 영(靈)이신 하나님께서는 수양의 피나 기름보다 인간의 전인격적 마음을 원하시며(시 51:17, 요 4:24), (3)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모든 신앙 생활의 척도가 된다(딤후 3:16, 17)는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실 구약 시대의 모든 희생 제사 행위는 짐승을 잡아 피를 뿌리고 그 고기를 제단 위에서 태우는 일,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다만 그러한 행위를 통하여 인간이 그 행위 속에 담긴 참뜻을 깨달아, 하나님께 헌신하고 순종하는 일이더욱 중요한 것이었다. 즉 '제사'는 그림자요, '순종'은 실체인 것이다. 

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사술의 죄' 
여기서 '사술'(케셈)은 점(占)을 치는 행위를 뜻하며, 이같은 행위는 당시 이방 세계에서 보편화 되었었다(6:2, 민 22:7, 신 18:14, 수13:22). 그리고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 행해졌었다(렘 14:14 , 27:9, 29:8, 겔 13:6, 23, 미 3:7). 따라서 이러한 행위는 우상 숭배죄로 규정되어 성경에서 절대 금지되었다(신 18:10, 왕하 17:17).

'사신(邪神) 우상' 
'사신'(아웬)은 '악함', '무가치함', '허탄한 것'등의 의미로서, 성경 다른 곳에서는 '우상'으로 번역되었다(사 66:3). 그리고 '우상'(테라핌)은 중근동 사람들이 가신(家神)으로 섬기던 우상의 한 종류인데(창 31:34, 35, 삿 17:5, 18:14),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점(占)을 치는 수단으로써 언급되기도 한다(겔 21:21, 호 3:4). 창 31:19 주석 참조.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여기서 '버려'(이므아스카)는 미완료형이므로 미래형의 의미로 번역해야 된다는 점에서, 사울의 왕권이 머지않아 끊어질 것을 시사해 주는 단어이다. 그러나 만일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지 않고, 그 말씀을 제대로 좇았다면, 그의 왕권은 그의 후손들에게까지 세습될 수 있었을 것이다(13:13). 한편 여기의 '버려'라는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방과 같은 왕을 요구함으로써 하나님을 배척했던 그 행위를 나타낼 때, 하나님께서 친히 사용하셨던 단어이다<8:7>.

24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사울은 사무엘의 날카로은 심문과 경고에 의하여, 변명으로 일관하던 태도를 바꿔 이제 자신의 죄를 시인했지만, 그 시인한 죄조차도 불가피한 상황하에서 백성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사울의 이 고백은 진정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범죄하였는지를 깨닫고 뉘우치는 참된 회개라고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1) 계속 자신의 죄를 시인치 않고 변명과 책임 전가로만 일관하다가, 사무엘의 무서운 심판적 선언(22, 23절)을 듣고 난 후에야 비로소 어쩔 수 없이 시인했기 때문이며, (2) 또한 죄의 고백 후에, 다시금 백성들의 탓으로 그 죄의 원인을 책임 전가하는 말(24b)을 덧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3) 나아가 고백 후에도 계속 왕위 보존과 왕권의 명예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30절). 
결국 라피데(C.V. Lapide)가 정의한 것처럼, "사울의 이 고백은 순수한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온 통회의 회개가 아니라, 단지 왕국의상실과 명예의 실추를 두려워한데서 비롯된 '입술의 회개'였다".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사울의 이 변명은 어느 정도 진실임에 틀림없다. 그당시 사울의 왕권은 웬만큼 백성들로부터 인정은 되고 있었으나, 근본적으로 사울은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세워진 왕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눈치를 실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30절). 바로 이 사실이 사울 왕권(王權)의 한계요, 비극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폐하고, 당신께로부터 비롯된 마음에 합당한 한 인물(다윗)을 따로 세울 필요가 있었다(13:14, 행 13:22).

25 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하여금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니 

'지금 내 죄를 사하고' 
사실 사울의 죄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라는 점에서, 하나님께 자신의 죄 용서를 구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여기서 사무엘에게 자신의 죄 용서를 간절히 요청하고 있다. 이 사실은 사울이 아직까지도 그가 지은 죄의 근본 성격을 제대로 이해치 못했음을 시사해 준다. 즉 사울은 하나님께 대한 범죄를 인간에 대한 범죄 정도로 가볍게 인식했던 것이다.

'나와 함께 돌아가서' 
이때 사울이 사무엘과 함께 가려고 했던 목적지는 길갈 제단이었을 것이다(21절).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여기 사울의 이 '경배' 허락 요구는, 사울이 하나님께 회개할 기회를 갖고자하는 의도에 따른 것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사울은 그때 사무엘이 집전하는 제사의 현장에 사무엘과 함께 있음으로써, 자신이 왕으로서 건재함을 만백성들에게 과시하기 위한 의도에 따라 사무엘에게 함께 제사를 드리러 가자고 요청했던 것이다<30절>.

26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사울의 심중(心中)을 간파한 사무엘은 여기서 사울의 폐위된 왕권은 어떤 방법으로도 회복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단호히 선포한다. 여기에 왕권에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는 참 선지자로서의 절개가 돋보인다. 
한편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점은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 왕직 박탈은 단순히 사무엘의 제사직 침해 사건(13:9)과 아말렉 왕과 짐승을 살려둔 사건(15:9)의 두 가지 사건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즉 이 두 가지 불복종 사건은 사울이 저지른 유일한 불복종 사건이 아니라, 많은 반역적이고 불순종적인 사건들 중 대표적인 경우라는 점이다.

27 사무엘이 가려고 돌아설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사무엘이 가려고 돌이킬 때에' 
사무엘의 이같은 행동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 사울에게 그의 폐위가 확정적임을 행동으로 선언한 것이다. (2) 사울의 반복되는 간청 때문에 인정에 얽매여 혹시 범할지 모르는 인간적 실수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겉옷 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여기의 '겉옷'(메일)은 몸에 꽉 붙는 옷을 가리킨다. 따라서 사울이 붙잡았다는 것은 그가 사무엘에게 극렬히 매달렸음을 뜻한다. 한편 사무엘의 옷이 찢어진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에 따라 이뤄진 일임이 분명하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의 옷이 찢어지게 하심으로써, 그 일을 사울의 왕권이 취소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하나의 징조로 삼으셨던 것이다. 
그같이 볼 수 있는 근거는 여기 '찢어진지라'는 말이 28절의 '떼어서'(카라)란 말과 동일한 단어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28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 
여기서 '이웃'(레아)은 비한정적인 용법으로사용된 말로, 곧 '누구든 간에 어떤 다른 사람'(an other)이란 의미이다. 그런데 이후 전개되는 역사에 견주어 볼 때, 여기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곧 다윗을 가리킨다(13:14, 행 13:22).

'주셨나이다(네타나흐)' 
여기서 이 단어는 13:14에서처럼, 다윗이 이미 왕으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는 과거 완료형의 의미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이때 사무엘은 사울을 이어 이스라엘의 차기 왕이 될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었다(16:3, 6-13).

29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니

사무엘은 인간의 가변적(可變的) 속성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하나님의 불변적(不變的) 속성을 소개함으로써, 사울의 왕권이 다시 회복되기 불가능함을 명확히 선언하고있다.

'지존자(네차흐)' 하나님의 신적(神的) 속성을 시사하는 명칭 중의 하나로서, '영광스러우신 분', '영원히 계시는 분', '승리하시는 분', 그리고 '변함이 없으신 분' 등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Klein).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 
여기서 '변개(變改)하다 (나함)‘란 말은 11, 35절의 '후회하다'란 말과 같은 어근(語根)의 말이다. 그렇지만 본절의 '변개함이 없다'란 말과 11, 35절의 '후회하셨다'라는 말은 상호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11, 35절에 묘사된 하나님의 후회(변개)는 사람의 후회나 변개처럼 그 마음의 변덕이나 어떤 계획의 차질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고, 다만 인간의 타락에 대해 가지는 신적 긍휼과 슬픔을 신인동형 동성론적으로 묘사한 것 뿐이고(창 6:6, 7), 본절에 묘사된 바 '변개(후회)함이 없다'란 표현은 신적 섭리와 경륜에 대한 하나님의 속성을 순수하게 신성론적(神性論的)으로 기술한 것이기 때문이다. 실로 스스로 계시는 영원자 하나님께서는 과거.헌재. 미래가 동일하신 분이시다(출 3:14). 다만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과 섭리가 인간의 자유 의지와 맞물려 역사가 진행될 때, 인간 편에서 일어나는 영고 성쇠(榮枯盛衰)가 마치 하나님에게 어떤 변화가 있는 것으로 보여질 뿐이고, 또한 11, 35절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의인화시켜 묘사했을 뿐이다. 민 23:19 주석 참조.

30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

'범죄하였을지라도...나를 높이사...경배하게 하소서' 
여기서 사울은, 하나님의 작정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왕권이 건재함을 만인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 줄것을 사무엘에게 다시금 요청한다<25절>. 이로써 사울은 죄의 고백(24절)이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음을 보여 주었으며, 또한 여호와께 대한 경배 역시 자신의 명예 때문이었음을 드러내고 말았다. 실로 사울은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딤전 6:5)로서, 선민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말씀으로 이끌 왕의 직무를 감당하기에는 부적격자라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하고 말았던 것이다.

31 이에 사무엘이 돌이켜 사울을 따라가매 사울이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하나님의 최종적인 폐위(廢位) 선언으로 말미암아(23, 26절), 사울은 이후 왕위에는 있으나 실상은 왕이 아닌 자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사무엘은 함께 제단으로 가서 여호와께 제사드리자는 사울의 간절한 요청(25, 30절)을 들어주었다
이처럼 사무엘이 사울의 요청을 허락한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1) 비록 형식적이긴 하지만 차기 이스라엘 왕이 등극할때까지 그래도 사울을 통하여 외적인 정치 질서를 유지시켜 나갈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2) 사울과 함께 가서 아말렉왕 아각을 죽임으로써, 사울이 완수하지 못한 일을 자신이 마저 처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32 사무엘이 이르되 너희는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내게로 끌어 오라 하였더니 아각이 즐거이 오며 이르되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도다 하니라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도다' 
벌겟역(the Vulgate)과 수리아역(the Syriac)은 아각의 이 말을, 그가 자신의 죽을 운명을 예견하고 불안과 체념으로 한 말이라고 보고 "실로 죽음은 괴롭도다"란 의미로 번역했다(R. Payne Smith). 
그리고 혹자는 아각의 이 말을, 죽음을 앞둔 전사로서의 영웅적 용기로 치켜 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문맥을 통해 볼 때, 여기 아각의 이같은 언급은 자신이 사무엘에게 넘겨짐을 알고, 여호와의 선지자 특히 노년의 선지자는 적어도 왕이나 군대 보다는 긍휼이 풍성할 것이라는 그 자신의 판단에 따라 '마침내 죽을 고비를 넘겼나 보다'(공동번역)라는 의미로 한 말이었다.

33 사무엘이 이르되 네 칼이 여인들에게 자식이 없게 한 것 같이 여인 중 네 어미에게 자식이 없으리라 하고 그가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 찍어 쪼개니라 

'여인들로 무자케 한 것 같이...무자하리라' 
사무엘은 '동해 복수법'(Lex Talionis, 출 21:24, 25, 신 19:21)에 근거하여 아각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한편 사무엘의 말을 통해 우리는 아말렉 왕 아각(Agag)이 수많은 전쟁과 약탈을 통해 매우 잔인하고 포악하게 행동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여기서 '여인들로 무자케 한 것 같이'란 말은 아각이 여인들을 얘기 못낳는 불임 여성으로 만들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만 여인들의 자식을 죽여 없앴다는 뜻이다.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쪼개니라' 
'여호와 앞에서'는 곧 여호와의 제단 앞을 가리킨다. 본서 저자가 여기서 특별히 이같은 언급을 한 까닭은, 사무엘의 아각 처형이 단순히 정치 보복적 차원이 아닌, 철저히 하나님의 아말렉 족속 진멸 명령(3절)에 근거하여 영적.공의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임을 강조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한편 선지자의 이같은 직접적인 형 집행은, 왕이 합당한 형 집행을 게을리하는 경우에 대신 이뤄졌었다(왕상 18:40).

'찍어 쪼개니라' 
기본 동사 '솨사프'는 '여러 조각내다'(cut inpieces) 또는 '토막토막 끊다'(hew in pieces)란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은 아각의 비참한 죽음을 연상시켜 주는데, 우리는 이를 단순히 잔인하다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포악한 아말렉 족속의 아각 왕에 의해 더욱 비참하게 살해당했을 수많은 자들을 생각해야 하며,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와 그 백성을 파멸시키고자 끝없이 이스라엘을 괴롭힌 아말렉 족속의 극한 죄악을 기억해야 한다. 즉 이는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사단 왕국의 우두머리에 대한 신적(神的) 공의의 정당한 수행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34 이에 사무엘은 라마로 가고 사울은 사울 기브아 자기의 집으로 올라가니라 

'사무엘은 라마로...사울은 기브아 본집으로' 
길갈에서 여호와께 대한 제사와 아각의 처형을 마친 후, 사무엘과 사울은 각자의 거처로 각각 돌아갔다. 이 사실은 단순히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의미 외에, 이후 두 사람의 교제가 단절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35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사무엘이...사울을 다시...보지 아니하였으니' 
이 말은 사무엘과 사울이 죽기까지 서로 상면조차 아니했다는 의미라기 보다는(19:24), 사무엘이 사울에 대해 선지자로서의 권고를 더이상 하지 않았음을 가리킨다. 결국 이것은 사무엘이 사울을 신정(神政)왕국의 왕으로 더이상 인정치 아니했음을 뜻한다. 
즉 신정 왕국의 특성은 왕에 대한 선지자의 신의(神意)의 전달 및 권고로 요약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볼 때, 선지자가 왕을 만나지 아니했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왕의 폐위'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처음 사무엘이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었을 때는 그를 진정 위하는 마음으로, 사울의 왕직(王職) 수행을 기꺼이 도와주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계속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열방과 같은 왕으로 전락하자, 그는 마침내 하나님께로부터 왕직을 박탈당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된다(23,26절). 따라서 이제 사무엘은 여호와께서 폐위시켜버린 왕을 위해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다만 사울을 위해 슬퍼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 말속에는 사무엘이 사울의 회개를 위해 개인적으로는 계속 기도했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