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 사무엘의 등장, 소년 시절부터 미스바의 승리와 왕을 세움까지. 9~15장 : 사울의 등장, 사울의 성공과 실패 16~31장 : 다윗의 등장, 사울에게 쫓기는 다윗
본문 삼상15장은, "사울의 성공과 실패"의 마지막 사건입니다. 사울이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을 거역해서, 삼상13장에 이어, 다시 한번 하나님께 결정적인 불순종을 저지릅니다. (*13장은, 사울이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해, 자기 임의로 제사를 드렸었죠.)
사울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후, 결국 주님으로부터 계속 떨어져 나가는 과정을 성경이 추적하고 있습니다. 반면교사의 교훈을 우리에게 주는 거죠.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사울의 실패를 보면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몰락을 예정하시고, 그를 왕으로 기름 붓진 않으셨죠. 하나님은, 비록 백성들의 강한 요구에 의해, 사울을 왕으로 허락하셨지만, 사울의 성공을 바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왕으로서 성공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지만 사울은 자신의 어리석은 선택 때문에..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본문 삼상15장은, 사울의 마지막 실패를 상세히 보여줍니다. 그것을 4대지로 나누면, 그의 불순종 / 교만 / 자기기만 / 마침내 거절당함 입니다. disobedience / pride / self~deception / finally rejection
사울의 최후는 마지막 31장에 자세히 나옵니다. 본문 15장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는 장면이 나오고요, 강을 건너버린 것이죠. 이제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된 것이죠.
이어지는 16장부터는 하나님이 진짜 예비하신 왕, 다윗이 드디어 등장합니다.
◑1. 불순종 Disobedience
부분적인 순종은 여전히 불순종입니다. (1~9절)
하나님은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사무엘을 통해 말씀하셨죠. :1~3 그런데 사울과 백성들은, 그 명령에 순종했지만, 부분적으로 순종합니다.
9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일부에 순종했다면 그것은 순종으로 간주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분적인 순종은 여전히 하나님 보시기에 불순종입니다.
일례로,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 각자에게 ‘아말렉과 같은 죄성, 육신적 본성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부는 진멸하되, 일부는 여전히 남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울처럼, 버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사울과 백성들은, 다 진멸하지 않았을까요? -아각 왕을 살려둔 것은, 아마 사울이 자기 전공을 널리 선전하는데 증거로서, 즉 개선 퍼레이드에 등장시킬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가축 중에는 하찮은 것만 진멸하고, 좋은 것을 남겨 둔 것은 나중에 하나님께 제사 용 제물이었다고 변명하지만, :15 사실은 진멸하기 아까웠던 것입니다. 경제논리가, 하나님의 명령보다 앞섰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명령에 100% 순종하기가 항상 쉬운 것은 아닙니다.
▲:3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그들의 모든 소유를...진멸하되' '그들의 모든 소유'는 문자적으로는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이란 뜻으로, 곧이어 언급되는 '남녀...나귀' 등 모두를 가리킵니다.
진멸(하람)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목적으로 부정한 것을 제거하거나 저주받은 물건을 제사장에게 바치는 행동입니다. 주1)
따라서 만일 이 '하람'이 산 것이면 죽여야 했고, 그 밖의 물건들은 불로 다 불로 태워버려야 했으며, 불로 태워지지 않는 금.은 등은 성소에 귀속시켜 하나님께 봉헌되어야만 했죠.
이것이 잔인하게 보이나,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엄중한 최후의 심판을.. 즉 장차 다가올 최후의 심판에 대한 표적과 경고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어쨌거나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가 언제나 쉬운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16:24절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일부 영역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지만 내가 아끼는 또 다른 일부 영역은, 여전히 숨겨두고, 아까워 남겨둘 수 있죠. 그 일이 회개치 않고 5년~10년 계속 지속된다면.. 우리도 사울처럼 버림 받게 될 것입니다. 사명을 박탈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다 부분적으로 순종하지만, 역사상 모든 인류가운데, 완벽하게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죠. 그래서 우리에게는 구주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오직 예수만이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완벽하게 순종하셨습니다. 예수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그는 자기의 완전한 생명을 우리 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 바치셨고, 이는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공로를 힘입어,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받은 사람은, 남은 생애 최선을 다해서 순종하기로 힘씁니다. 구원 받은 사람이, 성화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은, 성화의 삶을 등한시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느냐에 따라서 ‘구원의 완성’을 이루는 정도가, 성도마다 달라질 것입니다. 빌2:12
나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는 만큼, 완성도가 높은 만큼 나는 이 세상의 삶에서 벌써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며 더 자유롭고, 더 평안하며, 더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더 사명감당 할 것입니다.
◑2. 교만 Pride (10~12절)
잠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라 했죠.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울의 흥망성쇠를 연구하고 있으며, 교만이 그의 타락의 주요 원인이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습니다.
10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1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우선, 죄를 지을 때 하나님을 슬프게 한다는 것을 아십시오. :11 그 점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죄를 지을 때 하나님을 슬프게 합니다.
우리는 죄를 지을 때 하나님을 근심하게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엡4:30절은 "구속의 날을 위하여 인치심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사울은 앞서 제사장의 제사권 침해 사건(13:9)에 이어 여기서는 사울이 하나님에 의해 제시된 두번째 시험, 곧 아말렉 진멸 사건에서도 불합격 판정을 받았습니다.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롬11:29에는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라고 했는데, 본문 11절에서 하나님은 후회하고 계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도, 못 하시는 게 몇 가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사람이 죄를 짓는데, 적극 막지는 못하신다는 거죠.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 때문입니다. 주2)
사울 왕을 하나님이 버리신 것은, 하나님이 그를 애당초 잘못 선택하신 것도 아니요, 하나님이 그를 아예 ‘버리기로 작정’하신 것도 아니요, *주인공 등장을 위해 자신의 계속적 교만과 불순종으로.. 끝내 회개하거나 돌이키지 않았던 거죠. 그래서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하신 것입니다. :11
혹시 하나님은, 오늘날 나를 보고 ‘후회 (나함)’하시진 않을까요? 하나님은 과거에, 홍수로 심판하기 전에, 세상에 사람 지으신 것을 후회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창6: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나함) 마음에 근심하시고’
재미있는 것은, 같은 단어(나함)가 창24:67에는 ‘위로’의 뜻으로 쓰였습니다.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나함)를 얻었더라’
그러니 똑같은 단어인데, 긍정적으로 쓰이면 ‘위로 comfort’가 되고, 잘 못 쓰이면 ‘후회 repent’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24:67에서 이삭이 리브가로 인해서 ‘근심, 후회’를 받을 뻔도 했다는 뜻이고,
본문 11절에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워서 ‘위로’를 받으실 수도 있었는데.. ‘후회’로 결판나고 말았던 거죠.
오늘날 우리 각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각각 5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겨 주셨는데, 누구를 통해서 하나님은 ‘위로’를 받으실 것이고 *나함 또 누구를 통해서는 ‘후회’를 가지실 것입니다. *나함 어느 쪽인가요?
사울의 왕 됨을 통해서 하나님은, 삼상 9, 10, 11장에서는 ‘위로’를 받으셨다가, 13, 14, 15장에서는 ‘후회’를 하게 되신 거죠.
'후회 (나함)’이 쓰인 다른 예는, 창38:12절에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유다는 자기 아내가 죽어서 ‘위로’도 받았지만 동시에 ‘후회’도 생겼을 것입니다. 아내가 죽었는데, 마냥 좋아할 일만은 아니었고,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하는 거죠.
창50: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총리가 된 요셉이 형들을 위로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말이 형들에게 위로만 되었을까요? 물론 위로도 되었겠죠. 그렇지만 동시에 근심, 걱정, 후회도 되었던 거죠. 자기들 과거가 있었으니까요.
△잭 푸닌은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천국에 가서 후회할 일을 하지 마십시오. 죽어서 천국에 들어간지 딱 5분 만에, 5분도 안 되어 우리는 후회할 일이 아주 많이 생길 것입니다.
먼저 자기가 지상에서 회개(삶의 교정)하지 못한 일에 대해 후회할 것이고 또한 자기가 지상에서 하나님을 힘껏 섬기지 못한 일도 후회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상에서 철저히 회개(삶의 교정)한 사람은, 또한 지상에서 힘껏 하나님을 섬긴 사람은, 그 일들로 인하여, 그는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참고로 사랑/질투 역시 같은 단어지만, 구약 성경에서 2가지 용례로 쓰인다고 하죠)
▲교만과 죄는 항상 함께 갑니다 (12)
12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사무엘은 사울을 찾으러 나갔지만, 사울은 동상을 세우러 나가버렸죠. 그는 승리에 대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대신에, 자신의 영광을 위해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결코 자신을 위해 동상을 세우지 않을 수도 있지만, 오늘날 우리 자신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세우는 다른 방법들이 있습니다.
가장 흔히 방식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자신을 지나치게 홍보하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이 추켜세워준 댓글 등을 읽으면서, 너무 만족할 수도 있죠. 그러면서 점점 더 조회수를 올리기 위한 방식으로, SNS를 제작하는 거죠.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SNS가, 정말 우리 자신의 명예를 높이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기 위한 것입니까? 혹시나 사울의 길로 빠져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3. 죄는 나를 속입니다 Self-Deception (13~19절)
‘속인다’는 말은, 속고 있는 줄 모를 때 쓰는 말입니다. 즉 죄가 우리를 계속 속이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 사실을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게 죄의 속성이기 때문이죠. 나를 속이는 것 Self-Deception!
사울은 지금 하나님게 전적으로 순종하지 않고 있지만, 자기는 스스로 그걸 모르고 있습니다. 왜냐면 자기 논리로는, 자기는 정당한 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15절에 보면, ‘사울이 대답하되, 백성들이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제물로 바치기 위해 가장 좋은 양과 가축을 아껴 두었지만, 나머지는 우리가 완전히 멸하였소.’
나는 슬픈 마음으로 가게에서 나왔다. 싼 값으로 ‘완전한 진리’를 얻을 수 있을 줄로 나는 생각했던 것이다.
아직도 나는 진리를 위하여 값을 치를 각오가 되어있기는커녕 걸핏하면 평온과 안일을 갈구하고 있고, 아직도 나 자신을 두둔하고 합리화하여, 조금씩 스스로를 속일 필요가 있으며, 아직도 의문의 여지없이 ‘확고한 나의 믿음들’이라는 은신처를 찾고 있다.
(주/ 대가 치름 없이 얻는 진리, 그러나 내가 ‘전체 진리’라고 확신함.)
▲17~19절을 보십시오. 17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18 또 여호와께서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19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하나님은 사울에게 너무나 선하셨습니다. 정말 무명의 청년인 그를 데려다가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부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하나님께 ‘위로’를 줄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죄성(‘아말렉’의 상징)을 진멸하지 못해서 결국 하나님이 ‘후회’하시도록 만들고 말았습니다.
롬2:4에서 바울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본문의 사울을 포함해서, 대부분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고,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는 이유는, 자기 스스로 속아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나는 문제 없어! 지금 전쟁에서 이기고 있잖아?’
◑4. 순종하는 것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20~35절)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20~23)
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사울은 아직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는 여전히 부분적인 순종이 불순종이 아니라 순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탈취물 중에 일부는 진멸했습니다. 다만 다 진멸한 것은 아니죠)
그래서 사무엘은 문제의 핵심을 바로 잘라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고, 따라서 하나님은 그를 거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당신의 제사(오늘날의 예배)는 당신의 평소 삶에서의 순종 없이는 의미가 없습니다.
살전4:8에서는 "그러므로 이 교훈을 거절하는 자는 사람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는 하나님이니라“
▲불순종의 결과는 오래도록 고통 스러울 수 있습니다 (24~35)
사울이 마지막 절망적인 행동으로, 자기 손을 뻗어 사무엘의 옷 자락을 붙잡았을 때, 그만 사무엘의 옷자락이 찢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는 하나의 상징, 또는 징조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는다는 뜻이었죠.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 왕에게까지 올라갔지만, 이제 일련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왕국은 그에게서 찢겨져 다른 사람에게 주어졌습니다.
(아직 사무엘은 그게 다윗인줄 모르고 있죠. 그래서 이새의 집에 가서 그의 장자 엘리압에게 기름부을 뻔 했습니다)
사울의 불순종의 결과가 당장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런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도 :23 실제로 그가 폐위되기 까지는, 약 15년 가량이 지난 것으로 여겨집니다. 주3)
하나님은 모든 일을 자기 뜻대로, 가장 적절한 타이밍에 행하시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 가운데도, 하나님이 주신 ‘위’에 앉아 있어서 아직은 습관적으로 그 직무를 계속해 나갈 수도 있습니다만 사울처럼, 이렇게 ‘위 throne’가 이미 폐하여 진 자도 있을 것입니다.
그 특징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고, 자기의 뜻대로, 자기 판단대로, 자기 고집대로 모든 것을 행하고, 순종을 하기는 하되, 부분적인 순종을 하면서,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는 명목으로, 자기가 계속 쓰임받고 있는 줄로 착각하죠.
△마지막으로 본문의 아각 왕은, 자기가 뿌린 것을 거둔 또 다른 예입니다.
33 사무엘이 이르되 네 칼이 여인들에게 자식이 없게 한 것 같이 여인 중 네 어미에게 자식이 없으리라 하고 그가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 찍어 쪼개니라
'여인들로 자식이 없게 한 것 같이...무자하리라' 사무엘은 '동해 복수법'(Lex Talionis, 출 21:24, 25, 신 19:21)에 근거하여 아각에게 사형을 집행했습니다.
한편 사무엘의 말을 통해, 아말렉 왕 아각이 수많은 전쟁과 약탈을 통해 매우 잔인하고 포악하게 행동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죠.
여기서 '여인들로 자식이 없게 한 것 같이'란 말은 아각이 여인들을 얘기 못낳는 불임 여성으로 만들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만 여인들의 자식을 죽여 없앴다는 뜻입니다.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쪼개니라' '여호와 앞에서'는 곧 여호와의 제단 앞을 가리킵니다. 특별히 이같이 언급한 까닭은, 사무엘의 아각 처형이 단순히 정치 보복적 차원이 아닌, 철저히 하나님의 아말렉 족속 진멸 명령(3절)에 근거하여 영적.공의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임을 강조하려는 의도 때문이었죠.
▲정리/적용하면, 1) 3절과 9절에 의거,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 각자에게 ‘아말렉과 같은 죄성, 육신적 본성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부는 진멸하되, 일부는 여전히 남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울처럼, 버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하나님이 진멸하라’고 명하신 명령을 받고도 계속 고의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영역은 무엇입니까?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느냐에 따라서 ‘구원의 완성’을 이루는 정도가, 성도마다 달라질 것입니다. 빌2:12
나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는 만큼, 완성도가 높은 만큼 나는 이 세상의 삶에서 벌써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며 더 자유롭고, 더 평안하며, 더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더 사명감당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을 때 하나님을 근심하게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11 오늘 내가 하나님을 근심하게 하는 영역은 무엇입니까?
2) 11절에 '내가 사울을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하나님은 후회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기름부으셔서, 그가 훌륭한 왕이 될 것을 기대하셨죠. 그러나 사울 자신의 불순종과 교만으로.. 하나님께 후회를 끼쳐드리고 말았죠.
재미있는 것은, 같은 단어(나함)가 창24:67에는 ‘위로’의 뜻으로 쓰였습니다.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나함)를 얻었더라’
그러니 똑같은 단어인데, 긍정적으로 쓰이면 ‘위로 comfort’가 되고, 부정적으로 쓰이면 ‘후회 repent’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24:67에서 이삭이 리브가로 인해서 ‘근심’이나 ‘후회’를 받을 뻔 했으나 리브가가 잘 해서 그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본문 11절에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워서 ‘위로’를 받으실 수도 있었는데.. 하나님은 ‘후회’를 받고 말았죠.
오늘날 우리 각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은 ‘위로’를 받으실 수도 있고 *나함 나를 통해서는 하나님은 ‘후회’를 가지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나함 나는 어느 쪽인가요?
사울의 왕 됨을 통해서 하나님은, 삼상 9, 10, 11장에서는 ‘위로’를 받으셨다가, 13, 14, 15장에서는 ‘후회’를 하게 되신 거죠.
우리는 천국에 가서 후회할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죽어서 천국에 들어간지 딱 5분 만에, 5분도 안 되어 우리는 후회할 일이 아주 많이 생길 것입니다.
동시에 그러나 지상에서 철저히 회개(삶의 교정)한 사람은, 또한 지상에서 힘껏 하나님을 섬긴 사람은, 그 일들로 인하여, 그는 천국에서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3) 22절에 의거, 순종하는 것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또한 우리가 전적으로 순종하지 못하고 부분적인 순종에 만족하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건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치러야 했을 대가는, 육축의 좋은 전리품을 다 버리는 것이었죠. 그러나 그는 그 대가가 너무 혹독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오늘날 내가 치려야 할 대가는 무엇입니까? 나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 온전히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까?
..................................
주1) 한편 '진멸'(하람)은 원래 '죽이다, 바치다'란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사역형(히필)으로 사용되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목적으로 부정한 것을 제거하거나 저주받은 물건을 제사장에게 바치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즉 하나님의 뜻에 의해 '하람'(바쳐진 것, 금지된 것)으로 지정된 것은 결코 다른 용도로는 쓰여질 수 없었고, 오직 하나님의 공의의 만족을 위해 반드시 '하람(진멸)의 법칙'대로 시행되어야만 했죠. 여리고 성을 공격할 때도 이 법칙이 적용되었는데, 아간이 무시해서 죽었죠.
따라서 만일 이 '헤렘'이 산 것이면 죽여야 했고, 그 밖의 물건들은 불로 다 태워버려야 했으며, 불로 태워지지 않는 금.은 등은 성소에 귀속시켜 하나님께 봉헌되어야만 했죠. (레 27:28, 신13:16, 수6:17)
'남기지 말고' 여기서 '남기다'(하말)는 '긍휼히 여기다', '동정하다', '아까워하다'란 뜻이죠. 그러므로 이 말은 '일말의 동정도 하지 말고' 또는 '조금도 아까워 말고'란 뜻! 곧 이는 거룩한 하나님의 의롭고 공의로운 심판대로 철저히 시행하라는 엄숙한 명령입니다.
주2)
롬11:29에서 ‘후회하심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로 부르셨다면, 반드시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이스라엘이 다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죠.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기름부으셔서, 그가 훌륭한 왕이 될 것을 기대하셨죠. 그러나 사울 자신의 불순종과 교만으로.. 하나님께 후회를 끼쳐드리고 말았죠.
물론 하나님의 뜻에 의해 ‘멸망의 자식’으로 태어난 사람들도 일부 있습니다. 벧후2:12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딤전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애굽 왕 바로에게도, 처음에 돌이킬 기회를 몇 차례 주셨으며 그 증거는, 10가지 재앙이 자꾸 하나씩 터진 것이며, 회개의 기회를 주신 거죠.
심지어 가룟유다에게도 경고를 주셨습니다. 마26:2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경고하신다는 것은.. 그가 돌이켜서 회개할 것을 바라셨던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