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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16:12 이가 곧 그니라

LNCK 2023. 3. 4. 16:36

◈이가 곧 그니라          삼상16:1~12               설교녹취, 정리             

◑16:1절부터,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베들레헴으로 가서 기름부으라 명하시죠.

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

하나님이 사무엘 선지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 언제까지 사울의 실패로 인해서 슬퍼할래?

언제까지 실패감과 좌절감에 빠져 있겠느냐? 
아니다. 이제는 뿔에 기름을 채우고 새로운 길을 떠나라!' 
  
본문을 보면서, 제가 하나님께 반문했어요. 
'하나님 사무엘이 겪는 지금의 고통은, 하나님 때문이 아닙니까? 
전부 하나님 때문에 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사울을 왕으로 세우라고 명령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 아니십니까? 

오래전 사울과 함께 밤하늘의 별을 세며, 하나님 나라의 꿈을 이야기 했었는데.. 
사무엘이 라마의 자기 집 지붕에 올라가서 
풋풋했던 청년 사울과 함께 밤새도록 이야기하는 장면, 삼상9:25  
하나님의 명에 따라, 청년 사울에게, 사무엘이 왕의 도리에 대해 가르쳐주었죠.

10:1에 보면, (하나님의 명을 따라) 겸손한 청년 사울에게 기름을 부을 때 
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지 않았습니까? 

11:24에 보면, 사울이 쳐들어온 암몬 족속에게서 처음으로 나라를 구하던 날, 
길갈에 내려가서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쁨으로 왕을 세우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세우라고 한 사람을, 사무엘은 세웠을 뿐입니다.' 

이게 다 하나님 때문에 생긴 고통과 슬픔이 아닙니까!  
사울의 실패로 인한 사무엘의 마음의 슬픔과 상실감...

 

'이 모든 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이 길을 가라고 해서, 제가 이 길을 갔고, 
하나님이 여기 서 있으라고 해서 제가 서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하라고 해서, 제가 이 일을 했습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슬픔과 절망과 상실감은 
다 하나님이 시켜서 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다윗을 세우셨어야죠...'  

 

그런데 제가 이렇게 얼추 계산을 해 보니까 
다윗이 30살에 왕이 되어서 40년을 다스렸는데요. 
사울이 40년을 다스렸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사울을 왕으로 세울 때, 다윗이 아직 태어나지 않았어요. 
사울이 왕이 된지 10년 후에, 비로소 다윗이 태어납니다.
통일 왕국시대 - 성경 역사 연대표 (subkorea.com)

사람들이 조금만 더 기다렸어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최선의 계획을 갖고 계셨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서 
역사에 전무후무한 최선의 왕을 세워 주실 계획을 갖고 계셨죠.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 때를 기다릴 수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의 인생을 향해서 최선의 계획을 갖고 계시죠. 
그러나 사람들은 기다릴 수가 없는거에요. 

사람들은 하나님께 매달려서, 하나님 바짓가랑이 붙잡고 늘어져서 
내가 원하는 응답을 받으면, 내 신앙이 엄청 좋은 것으로 착각해요. 

이스라엘 12지파가 왕을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렸어요. 
하나님은 매달리는 이스라엘에게 어쩔 수 없이 응답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왕은 처음에는 잘 시작했지만, 내리막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시킨 일 때문에 내 인생이 슬퍼졌습니까? 
아니면 내가 하나님께 밀어붙였기 때문에 내 인생이 슬퍼졌습니까? 

백성들의 마음이 너무 급했죠. 
여러분, 사무엘이 그 중간에 서 있는 입장에서 
당해야 되는 이 고통은.. 사실 하나님이 당하셨던 고통입니다. 

호세아가 당했던 고통이 하나님의 고통이었던 것처럼 
지금 사무엘은 하나님이 겪는 동일한 아픔을 겪고 계시는 거예요. 

하나님 입장에서는, 내가 선택한 아담과 하와가 나를 배신하던 그날.. 
내가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를 배신하던 그날.. 
내가 선택한 청년 사울이 나를 배신하던 그날.. 
내가 선택한 네(우리 각자)가, 나를 배신하고 내게 불순종한 그날.. 

그날 하나님이 겪으셔야 했던 그 아픔! 
그때 하나님은 사무엘처럼 주저앉아서 그냥 슬퍼하고 계셨는가요? 

아니요. 하나님은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만약에 사무엘처럼 슬퍼하거나 절망했다면 
하나님은 역사를 접으셨겠죠. 
근데 하나님은 역사를 지금까지 접지 않고, 계속 운행하고 계세요. 

여러분 우리 마음 가운데 '어떻게 세상이 이렇게 엉망인데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는가요?' 
가만히 계시는 하나님이 어메이징 하신 거죠. 이해할 수 없는 거죠. 

▲여러분 사무엘조차도 이렇게 깊은 슬픔에 빠져 있는 날이 있다는 거에요. 
그는 평범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평범한 크리스천이 아니에요. 

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했던 영적으로 충만했던 사무엘조차도 
이렇게 깊은 슬픔가운데 빠지는 날이 있었다는 거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슬퍼하시거나 포기하시거나 절망하시거나 
주저앉아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언제나 다시 시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시는 것이죠. 
대선지자 사무엘이 주저앉아 있을때 
'너 언제까지 슬퍼할래? 네가 눈물을 흘리더라도 
뿔에 기름을 채우고 일어나 길을 가자!'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는데, 막 가슴이 너무 벅찬 거예요. 
'너 언제까지 주저앉아 있을래? 선지자는 눈물을 흘리는 거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눈물을 흘리는 것 아니다. 
눈물을 흘릴지라도 다시 일어나 사명의 길을 가는 것이다. 

이제 너는 자기 연민에서, 그리고 상실감에서 일어나라! 
그리고 나와 함께 걸어가자! 
내가 열어주는 새로운 미래를 향해 길을 가자!' 하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시험에 낙방했다고, 내 인생은 실패라고 선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연인에게 배신을 당했다고 해서, 내 인생은 끝이구나..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직장을 잃었다고 해서, 나는 인생의 낙오자라고 선언하지 말라는 것이에요. 

 

지금 이 시간,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주님은 말씀하시는 것이죠. 
'너 언제까지 슬퍼할래? 기름뿔에 기름을 채우고 일어나 길을 가라! 
내가 너의 인생의 미래를 위해서 아름다운 길을 선택했고 준비해 두었다!'

'사람은 과거의 재앙과 사고에 갇혀서 살아간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람이 재앙과 사고를 한 번 당하면, 거기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 뒤로도 늘 얽매여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2차피해를 계속 당하는 거죠. 

정반대로 하나님은, 모든 절망과 사망과 저주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만의 패러다임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시죠. 

사람들은 삶이 조금만 엉망이돼도 
'망쳤어, 다 끝났어!' 하고 엎어버리는 거예요. 지워버리는 거예요. 
이런 마음이, 이런 잘못된 습성이 얼마나 인간 안에 많이 있는지 몰라요. 

 

제가 어렸을 때, 저희 큰 아들에게, 
아빠 엄마가 첫째에게는 정확한 걸 많이 요구하거든요.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마라, 이거 해야 된다!'
그런데 이제 키워보니까.. 부모도 완벽하지 않고, 부모도 불완전하고, 
아이도 불완전하지만... 하나님 은혜로 크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죠. 

그래서 둘째는 그냥 은혜로 키우게 되어 있어요. 
둘째는 방목, 첫째는 율법!  그렇게 키우게 되더라고요. 

첫째 아이가 뭔가를 정확하게 하지 못하면, 부모 마음이 어려운 거에요. 
그래서 어렸을 때 아이가 6살 때, 보드게임을 하다가 자기가 지면 
엎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아이에게 '게임을 이기든 지든, 좋은 게임을 해라,
페어 플레이를 했으면 이거는 굿게임이야!' 그런 걸 계속 가르쳤어요. 


여러분 조금만 내 인생이 어긋나면, 엎어버리고 싶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죠. 
그것이 자기 내면의 습관이 되어버린 사람들이 있어요. 

관계가 조금 불안해지면, 아예 관계를 끊어버리고... 
여러분이 하는 일에 조금만 진전이 나타나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죠. 

그런데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하나 잘못되면 전부를 다 뒤엎어 버리고 싶어하는 멘탈', 
이것은 절대로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니에요. 

왜? 하나님의 마음이 그렇지 않기 때문이에요.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의 잘못과 실수 하나를 보시고,
우리 인생 전체를 실패로 간주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이 세상의 역사는 이미 끝났을 거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무한 긍정의 마음을 가지고 계신 분이세요. 
완전 절망을, 사망을, 저주를 뒤집어 놓으시는 분이시거든요. 

그러면 누가 이런 '뒤집어 엎는' 사고를 가지고 있는가? 
이것은 정확하게 백프로 사단의 마음이에요. 

사단의 마음이 어떻습니까? 사단의 존재 자체가 이미 끝장난 존재예요. 
영원히 무저갱에 들어갈 존재입니다. 자기가 그걸 알아요. 

그래서 막 소리 지르고, 휘두르고, 사망과 저주의 권세를 사람에게 밀어붙이는.. 
자신이 끝장난 존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의 형상들마저도 같이 끝장, 막장으로 달려가자고 덤벼드는 존재!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우리 안에 습관적으로 자리잡은 어둠의 생각, 절망의 생각, 불안함의 생각,
'뒤집어 엎는 사고방식'은 떠나갈지어다. 

절대로 하나님은 끝났다고 이야기하지 않으세요. 
절대로 하나님은 '여기가 끝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오늘도 세상 역사를 지속하고 계신것이에요. 

◑16:2절
'사무엘이 이르되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고'

오늘 본문 2절에, 사무엘이 힘들기는 굉장히 힘들었나봐요.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제가 어떻게 가겠습니까?' 
그 소식을 들으면 사울이 저를 죽일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걸 보면서 '야~ 정말 사무엘도 이렇게 힘들어 할 때가

있구나' 하고 위로를 받습니다.

'저 포악한 사울이 버젓이 버티고 있는데 
또 다른 왕을 기름부어 세우다니요?
이것은 반역이고 쿠데타 입니다. 사울이 저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입니다.' 

대선지자 사무엘마저도 이 악한 왕의 존재에 압박을 받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러니 그 시대의 사람들은 얼마나 눌려서 살았겠습니까! 

아웃리치를 다니다 보면, 그 지역에 영적인 강한 진(진지)으로 인해서 
교회들이 눌려있고, 목회자들이 눌려있고 
성도들이 눌려있는 경우들을 보게 됩니다. 

해외도 마찬가지죠. 샤머니즘과 이슬람과 불교와 공산주의, 
분열과 전쟁과 어둠의 영에 사람들이 묶여있고 
나라와 민족들이 눌려있는 경우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너무나 힘든 경우이죠. 

제가 파파뉴기니에 몇 년 전에 다녀왔는데, 
그곳에서 이런 얘기들을 들었어요. 

선교사님이 부족 마을에서 사역을 하면서 
예배를 드리고 성경공부만 하려고 하면 
누군가가 다쳐서 실려 나가는 거에요. 

그래서 차를 선교사님밖에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선교사님의 차를 타고 대도시로 나가야 되니까 
예배를 결국 못 드리게 되고, 성경공부를 못하게 되고... 

그 선교사님 자녀가 아주 어려서부터 부족 마을에서 컸는데 
그 아이는 그냥 귀신이 있다는 걸 너무나 당연하게 인정하더라고요. 
그 곳에서는 그게 일상적인 삶이기 때문에... 

'너희들이 예배를 드려? 성경을 봐? 
내가 너희를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사단이 이렇게 압박해오는 거죠. 

그러나 여러분, 크리스천들은 놀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사단이 지레 겁을 먹고 있구나!' 
그래서 사단이 막 난리를 치는 거예요. 설레발을 치는 것입니다. 

그때 성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여서 
선포하고 승리하는 것이죠. 그렇게 마귀를 대적할 때, 큰 승리를 얻는 것이에요. 

▲제가 전국을 다니면서 참 희한한 현상을 보게 돼요. 
일부러 정말 강심장인 분들인데, 해인사, 법조사 등 전국의 주요 사찰이 
자리를 잡고 있는 산기슭에 들어가서 목회를 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거기서 교회 세우고... 

근데 그 지역에서는 사찰 근처의 광범위한 땅도 다 불자들 땅이에요. 
땅도 안 내주고, 막 쫓아내려고 하고... 
온갖 실제적인 영적인 공격을 당하면서도 
그런 주요 사찰 근처에서 들어가서 교회 세우고, 목회하는 분들이 있어요. 

여러분, 영적 공격을 당하는 횟수로 보거나, 그 압박감으로 보자면 
이런 분들의 목회가 어려워지는 게 정상이 아니겠어요?

근데 참 놀라운 것은, 물론 뭐 다른 곳, 다른 지역이 더 쉽다고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이런 어려운 곳에 있는 분들이 놀라운 부흥을 체험합니다. 

왠지 아십니까? 그 압박을 당하니까, 더 힘을 내야 되는 거예요. 
더 영적으로 분발해야 되는 거에요. 더 살아있어야 하는 거예요. 
이게 참 놀라운 것이죠. 

사단이 공격하는 만큼 더 강해져야 하니까.. 
더 기도에 힘쓰고 더 깨어있어서.. 실제로 더 강해지는 거예요. 

여러분 이런 이야기를 알 것입니다. 
청어 장사가 지방에서부터 서울까지 청어를 차에 실어서 운반하죠.
처음에 산지에서는 신선하고 팔팔하게 살아 있는데 
서울에 올라오니까, 그 사이에 청어들이 다 시들시들 죽어있죠. 

그런데 청어의 천적인 메기를 한 마리 집어넣으면 
그 메기 때문에 한두 마리는 물려 죽어요. 
그러나 나머지는 팔팔하게 살아 있어요. 

캐나다 벤쿠버에는 스텐리 파크 라는 큰 공원이 있어요. 
그런데 아주 강풍이 본 적이 있습니다. 
밴쿠버에 그런 강풍이 분 적이 처음이었는데 
바람 피해가 너무 심한 심하니까, 키가 40~50 미터 되는 
그런 아름드리 큰 나무들이 3천 그루나 뿌리채 뽑히더라고요. 

왜 그러냐면 밴쿠버에서는 기후가 너무 너무 좋아요. 
바람도 잘 불지 않아요. 태풍도 오지 않아요. 
그러니 나무가 뿌리를 깊이 내릴 이유가 없어요. 
엄청나게 많은 물을 먹고, 좋은 환경에서 쭉쭉 뻗어서 자란 거예요. 

그 울창한 나무들이, 강풍 한번 부니까 3천 그루가 뿌리가 뽑혔어요. 
다 쓰러졌어요. 
여러분, 뿌리 깊은 나무가 고난을 헤쳐나가는 것입니다. 

어려움 가운데 처해있다고 해서 
'아~ 나는 어려우니까, 나는 질 수밖에 없다'
그건 사단이 우리에게 속삭이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세요. 
저는 사단을 볼 때 바보라고 생각이 돼요. 
사단은 우리의 승수를 쌓아주는 스파링 파트너에 불과합니다. 

사단이 난리를 치면 칠수록, 공격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사람들은 더 깨어있게 되어 있어요. 

사단은 영원히 무정행에 들어갈 존재이고 
우리는 영원히 대낮 빛보다 더 밝은 저 천국에 들어갈 
하나님의 자녀들인 줄로 믿습니다. 

영적 전쟁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영적인 공격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사단이 나를 공격하는 것은, 자기가 두렵기 때문이에요. 
두려워서 소리지르는 거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여 승리하는 사람들이 될지어다! 아멘! 

2절에서, 하나님이 대답하시죠. 
'네가 여호와께 제사드리러 베들레헴에 왔다고 해라!' 

저는 이 구절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이 '내 핑계대라!' 이렇게 얘기하라고 하시는 것 같아요. 

사무엘은 하나님의 명을 받아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라고 말합니다.

당시에는 중앙 성소가 아직 없었고,  *실로가 불에 타서 소실된 상황
그래서 제사장이자 선지자인 사무엘은 
전국을 돌면서, 그 마을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제사는, 보통 화목제와 병행해서 드리는데,
화목제는, 제물을 나눠먹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만찬'의 의미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사무엘이 베들레헴을 방문할 때, 송아지를 끌고 가서
제사를 드린다고 하면.. 화목제 드리는 줄 알지
아무도 그가 '차기 왕에게 기름 붓는' 줄을 몰랐을 것입니다.

실제로 사무엘은, 소년 다윗에게 은밀히 기름을 부었습니다.
16:13절에 '그의 형제 중에서 기름을 부었다'고 했는데,
형제들만 입회한 자리에서 (장로들이 안 보는 데서) 기름을 부었을 것입니다.

(앞서 사무엘은 사울에게 기름을 부을 때도 은밀하게 기름을 부었죠. 
사울이 공개적으로 왕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사무엘이 기름부은 시점부터가 아니라    10:1
12지파가 모인 자리에서 제비를 뽑아 사울이 뽑힌 때부터이며 10:20~24
그가 공식적으로 왕으로 취임한 것은, 암몬과 전쟁에서 승리한 후부터였죠.

 

기름부음 받았다고 즉시 왕이 된 것은 아니었죠. 다윗도 마찬가지였죠.
기름은 은밀하게 부음 받았습니다.)


◑16:3절
3 이새를 제사에 청하라 내가 네게 행할 일을 가르치리니 
내가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지니라

여러분 사무엘이 지금 마음이 굉장히 무거워요. 복잡해요. 
그런데 하나님은 어떠신가요? 

하나님은 '너가 굉장히 많이 슬프구나, 굉장히 힘들구나, 어떻게 하면 좋을까? 
같이 한 번 전략을 짜볼까?' 이렇게 하지 않으세요. 
하나님은 굉장히 간단하게 얘기를 하세요. 

"그냥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라!" 
사실 이게 하나님의 명령의 전부입니다. 

"그냥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라고!"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하나님께, '내 인생의 계획을 다 알려주시면 내가 가겠다고..' 
그런데 하나님은 '다 알거 없고, 그냥 딱 한 걸음! 
'암소 한 마리를 베들레헴으로 끌고 가라, 그래 나머지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해!'
그리고 '너는 내가 일러주는 사람에게 기름 부어야 한다!'  :3

그러니까 뭐 큐시트(진행 예정표) 대로

네가 언제 누구를 만날 거고 
식사자리에 앉으면 7 명을 선 보게 볼 텐데, 7 명은 다 낙방될 것이고... 
뭐 이런 것까지 꼬치꼬치 자세하게 미리 알려주지는 않았어요. 

대신에 딱 하나! '너는 나만 주목하고 있으면 돼, 내가 시키는 것만 하면 돼!' 
이게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우리는 하나님께 '내 인생의 계획을 다 알려달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아주 조금만 알려주시면서 
'너는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라고 말씀하시는 거죠. 

근데 저는 이것이 굉장한 은혜라고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사무엘처럼 이렇게 영적으로 낙심하고 소심해져있을 때는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내 인생의 전체 플랜을, 하나님이 미리 내게 다 알려주시면 감당이 될까요?
우리는 아마 질려서 손사래를 칠 것입니다. 

처음부터 마음의 감당이 안 돼서 포기할 사람이 속출할 거예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지 않더라고요. 

하나님은 왜 (내 미래를) 다 알려주시지 않는 것일까요? 
매 순간 우리가 하나님께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또한 여러분, 우리 미래에는 밝은 그림도 있지만, 반대로 어두운 그림도 있어요.
환난, 핍박, 고난, 고민 .. 과연 이런 것까지 다 알려주시면, 내 마음이 편할까요?

(제가 주위 사람들에게, '혹시 어떤 환난이 닥칠지 모르니, 기도로 준비하세요'
이런 말을 가끔씩 합니다. 저는 나름대로 어떤 성령의 지시를 받아서
그 분을 위해서, 사전에 기도로 대비하라고 그런 조언을 해 주는데,
사람들은 다들 듣기 싫어합니다. 아예 나를 안 보려는 사람들도 있어요.

예를 든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미래, 거기에는 부정적 그림도 포함되어있죠.
그걸 미리 다 보여주신다면, 우리는 아마 다들 도망쳐 버리고 말 거예요.

지금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미래 일을 지시하시는데,
큰 그림으로 심플하게 지시하신다는 내용을 설명하는 중입니다. 왜 그래야 하시는지..)

그리고 여러분, "미래를 아는" 것보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미래의 계획"을 의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분의 뜻"을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너는 나를 그냥 따라와라. 
그냥 내가 지시하는 대로만 해라!' 종종 그렇게 우리 걸음을 인도하십니다.

여러분, 장단기 선교를 갈 때도, 

하나님이 세부 그림까지 다 그려주시지 않습니다.
그냥 '가라!'고만 말씀하십니다.
그 다음에 세부 사항은, 그 날 그 날, 그때 그때 알려 주십니다.

그래서 단기선교 가면서도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내가 가면서 뭘 할 수 있을까?, 내가 가서 뭘 해야 될까?' 
기도로 마음 준비하시고, 더 자세한 인도는, 가서 현장에서 받으시면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으면 절대로 복잡하지 않아요. 단순해지게 돼 있어요. 
왜요? 순종이란 단순한 것이기 때문이에요. 

고민하는 사람, 마음이 복잡한 사람은 순종하지 못합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사울의 실패로) 너무나 슬프고 무너져 있는데도 
기름뿔에 기름을 채우고, 베들레헴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냥 가라고 하면, 단순히 순종하고 가는 것입니다.
자세한 세부 사랑까지 일일이 다 알지 못해도, 그냥 일단 가는 것입니다.

노래할 이유가 없어도, 아무도 듣는 이가 없어도 
노래하라 말씀하시면 우리는 그냥 노래하는 것입니다.

당장 들판에 보이는 게 없어도 
씨를 뿌리라고 하시면 그냥 나가서 눈물을 흘리면서 씨를 뿌리는 거에요. 
그러면 어느새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죠.


◑4절부터 보면, 사무엘이 베들레헴에 도착했는데,
그의 행보가 상당히 이례적이었다..라는 것을 분위기를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사사시대에는 사무엘이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를 순회하면서 
이스라엘을 통치 했어요. 그러나 신정정치에서 왕정으로 넘어가면서 
이제 자신의 후임자 사울 왕이 통치하는 시대가 되기 때문에 
사무엘은 (12장) 은퇴하고 자신의 고향 라마에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루살렘 같은 대도시도 아니고 
그 밑에 위성도시로 딸려 있는 베들레헴, 아주 작은 마을이고,
목자들이 주로 사는 그런 작은 마을에 사무엘이 갑자기 등장을 한 거예요.

그래서 그 성읍 장로들이 너무 두려워 떨면서 그를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인사말을 건냅니다. '평안을 위해 오신 것입니까?'  16:4

(사무엘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스라엘의 사사 였어요.

입법 사법 행정부 삼권을 다 쥔 최고 통치자였어요.

그러니 장로들이 두려웠겠죠. 혹시 우리가 뭘 잘못한 게 있어서 오셨나?')

  

사무엘이 대답하죠. 
'그래 평안을 위해 왔어요.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고 합니다. 
장로들도 참석을 하시죠? 그리고 이새와 그 아들들도 초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5

그 저녁에 사무엘이 무슨 예언을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성읍 장로들과 이새 가족만 초대를 했다는 거예요.  

기대반 긴장반 장로들은 목욕재계하고 기름을 바르고 
깨끗한 새 옷을 입고 산당에 저녁 해질 무렵에 모여 든 것이죠. 

그런데 이 산당에서의 장면이, 그들이 긴장했던 것처럼 긴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어요. 그것이 6절과 7절입니다. 

(본문에 장소가 '산당'이라고 나와 있지 않지만, 그 당시 관행은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던 시절이었죠. 적어도 이새의 집은 아니었을 겁니다)
  
6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이새가 아들들을 데리고 산당에 딱 들어서자마자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거예요. 
장로들도 긴장해 있고... 

왜 그런가 보니까 사무엘이 기름 뿔을 들고 있었습니다.
자 이건 뭘 의미하나요?
오늘 저녁에 누군가에게 기름을 붓는다는 거예요. 

기름을 붓는 대상은 왕, 제사장, 선지자거든요.
그러나 이새의 가족은 레위지파가 아니니까 제사장 일리는 없고 
그럼 오늘 기름부음을 받는 사람은, 장차 왕이나 선지자가 된다는 뜻이었죠.

상상해 보세요. 여러분이 그냥 주일 예배에 왔는데 갑자기 목사님께서 
'김 집사님, 가정 강단에 올라가 보세요.' 
그러면 당황스럽지 않겠어요?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들을 한 사람씩 세웁니다. 
그런데 이게 거의 면접 자리 같은 것인데 
질의응답을 하는 것도 없이, 잠시 잠깐 응시하고 
'하나님이 그를 선택하셨나 / 안 하셨느냐?'가 결정되는 숨막히는 자리였어요. 

장자 엘리압을 보자마자 사무엘이 나름 마음속에 감동을 받았어요. 
'아~ 여호와께서 기름부으실만한 사람이 여기 이렇게 서 있구나!' 

엘리압은 '나의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다'라는 뜻인데, 
이름도 훌륭하고 용모와 신장이 준수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리고 장남이기 때문에 나름 늠름했겠죠.
사무엘은 '이 사람인가 보다' 하고 기름뿔을 들려는 순간
하나님이 딱 막으시죠.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마라'  :7

저는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사무엘이 좀 안쓰럽기도 하면서 
굉장히 목회자로서 위로를 받는 부분도 있어요.

사무엘도 몰랐잖아요. 목회자가 성도의 사정을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즉 사무엘도 못 맞췄습니다. 엘리압이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인줄 알았던 거죠.

 

가끔 성도님들이 기도 요청을 합니다. 
그러면 제가 '어떤 기도 제목이 있으십니까?' 

그런데 어떤 성도님들은 '그냥 기도해 주세요!' 
그러면 그 마음 가운데 내용이 복잡해서 그냥 기도해 달라는 분도 있고 
그냥 축복기도를 원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뉘앙스가 애매한 분이 계세요.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내가 기도제목을 얘기하지 않아도 
척 쳐다보면 알아야 되는 거 아니냐?' 이런 분위기 있잖아요? 좀 당황스럽죠. 

하지만 그럴 때마다, 저는 성경의 이 장면이 생각이 납니다. 
대선지자 사무엘도, 하나님의 알려 주셔야 아는 거예요. 

우리 가운데 예언의 은사, 신유의 은사, 중보기도의 은사가 있는 분들 
특별히 겸손 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알려줄 수 있는 만큼만 아는 것이고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만큼만 듣는 것입니다. 모두 다 알지는 못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목회자나 영적인 사역을 하는 사역자들에게 
많이 의존한다 할지라도 

마치 목회자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역할극을 하는 것은.. 거짓에 빠지는 거예요. 
자기를 속이고, 상대를 속이고, 감히 하나님을 속이려고 하는 행동입니다. 

이 시대가 영적분별을 요구하는 굉장히 중요한 시대입니다. 
영적분별의 핵심은 순전함이에요. 사역자는 하나님 앞에 정직해야 돼요. 

▲그런데 왜 사무엘은 엘리압을 보고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오해를 했을까요? 
그런데 왜 또 하나님은, 그 사람이 절대 아니라고 이야기를 하셨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할 때 
특별히 주의해야 되는 몇 가지 사항들이 있습니다. 

1) 첫 번째, 자신의 선 경험으로,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왕을 요구했을 때, 첫 번째 왕으로 사울이 세워졌죠.
사울은 용모와 신장이 준수한 청년 이었어요. 엘리합 하고 똑같은 모습이죠.

사무엘이 왜 착각을 했냐면, 엘리압을 보니까 사울과 외모가 비슷한 거예요.
그러니 속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겠죠. '맞아, 지난 번에 사울은 잘못 세웠는데,
이번에 하나님이 사울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진짜 왕을 기름부으시나 보다...'

이것은 사무엘의 지레 짐작이었고, 선 경험이나 편견이었죠.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내 경험을 기준으로 분별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한번 이렇게 응답을 하셨다고 해서 
그 다음에 또 똑같은 방법으로 응답하시리라는 보장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은 기계적인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세요. 

만약에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에, 한 번도 선례가 없는 길로 
새로운 길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할지라도 
놀라지 마시고, 두려워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순종하며 따라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만난 하나님은, 기적을 베푸시는 하나님 이셨어요. 
불로 응답하시고, 3년 반만에 비를 내려 주신 기적의 하나님! 

그러나 호렙산으로 부르셔서 그를 만나주신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으로 임재하시는 하나님'이셨어요. 

성도님들이 서로 신앙상담을 하고, 본인의 신앙체험을 이야기하실 때 보면 
'그렇게 해선 안 돼, 이렇게 해야 하나님 응답을 받는 거야!' 
그래서 사람들마다 경험이 다른 거예요. 

'나는 새벽기도 하다가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 
'아 나는 금식기도 하다가 응답받았다' 
'나는 교회에서 봉사하고 사역하다가 응답 받았다'

그러면 내가 응답받은 방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겁니다.
자신의 신앙 체험을 절대화시키는 오류를 범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요. 내가 믿는 하나님이 절대자이신 것이지 
나의 신앙 패턴과 방식이 절대적인 것이 결코 아니라는 거에요. 

하나님은 알아갈수록 무궁무진하신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2) 두 번째는 외적이고 세상적인 기준으로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시면 안됩니다. 
첫 번째가 선先경험의 문제라면, 두 번째는 선先이해의 문제입니다. 
내 내면 가운데 세상적인 가치관이 가득 깔려 있는데 

내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다고 이야기하면서 
끊임없이 나의 시선으로는 세상적인 조건들만 따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바로 지적하신 거잖아요. 
'사무엘아, 네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냐? 
왜 외모를 보고, 왜 그의 신장을 보고 있느냐?' 하고 책망하신 거예요. 

우리가 그토록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으면서도 
잘 알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면 
나의 관점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나님께서 좋은 걸 보여주셔도, 그거를 내가 좋다 라고 보는 관점 자체가 
없기 때문에 그게 좋아 보이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놓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음성 인줄 모르는 거예요. 
하나님의 응답인 줄을 모르는 거예요. 

여전히 내가 볼 때, 세상 것이 참 좋아 보이는데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들, '그게 정말 좋은 거네!' 
이렇게 흔쾌하게 동의가 안 되고, 깨달아 지지를 않는 게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음성을 구하기 전에 구할 것이 있는데 
'하나님 나의 관점을 바꿔 주십시오.' 
관점이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뀌어야, 그분이 보여 주시는 게 응답인 걸 
내가 알게 되어 있어요. 

시119: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나의 감겨있는 눈이 열려지지 않으면, 말씀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게 글자로만 보이고, 이게 인간의 역사로만 보입니다. 

그래서 '제 눈을 열어 주십시오. 하나님, 감겨있는 눈을 열어 주십시오. 
제 눈에서 비닐을 벗겨 주십시오. 그래야 제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둘째아들인 아비나답, 셋째 아들인 삼마.. 일곱 아들을 다 보여 줬어요. 
10절에 '여호와께서 이들을 선택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좀 심각한 평가를 들었던 한 사람 있죠. 
첫 번째 아들인 엘리압은, 하나님이 '내가 이미 그를 버렸다' :7

저는 이 본문을 볼 때마다 충격적입니다. 
어떻게 이 젊은 사람이 이미 하나님께 버림을 받을 수가 있는가요? 

'아니 하나님, 제대로 인생을 펼쳐 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꺾일 수 있는 겁니까? 이렇게 하나님께 버림받을 수 있는 겁니까?' 

그런데 성경은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해서 
모든 것을 다 기록한 것은 아니잖아요. 한 두 가지 사건을 통해서 
그 사람의 인생, 영적인 본질(밑천)을 드러내주는 거예요. 

그럼 엘리압 이야기가 17:28절에 또 나와요. 
전쟁터에 나가 있는데, 동생 다윗이 
그 당시에 다윗의 나이는 15세 정도로 추정합니다. 

어린 막내 동생이 음식 도시락을 가지고 왔잖아요. 
그러면 고맙다고 칭찬해 주고, 격려해 줘야 마땅하죠. 

근데 그 막내동생을 멸시하고, 동생을 괴롭히는 내용이 나옵니다. 
겉으로 볼 때는 모든 사람에게 감동을 줄 정도의 외모를 가진 사람이 
내면세계가 망가져 있는 인생이라는 걸 보여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엘리압은, 또 하나의 사울이었습니다. 
우리가 '내가 이미 그를 버렸다' :7 이 말씀에 충격을 봤지만 
이 표현이 15장 에서도 한번 나오고, 16:1절에서 한번 나왔어요. 

사울 왕이 하도 반복적으로 불순종 하니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미 당신을 버리셨다 reject' 

16:1절해서도 '내가 이미 그를 버렸는데, 너는 언제까지 그를 슬퍼하겠느냐?' 
이렇게 15:26, 16:1, 16:7  똑같은 표현이에요.
15:26, 16:1은 사울에게, 
16:7은 엘리압에게 하신 말씀이죠.

▲자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선택하시는가요?

어느 한 분이 질문 하셨어요. 
'저희 가문에서 제가 제일 먼저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근데 제가 걱정이 있습니다. 
만약에 저만 저희 가정에서 선택을 받은 것이라면 
나머지 저희 가족 친척들은 선택을 받지 못했다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

예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도 보는 것이지만 
선택을 받은 사람과, 선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명확하게 구분돼죠.

이게 만약에 구원의 선택이라면, 영생과 영벌이 갈라지는 것이죠. 
표면적으로 보면 분명히 나눠 있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큰 그림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모세를 부르실 때, 
다윗을 부르실 때.. 그 한 사람만 부르시고 
'너만 구원받아라' 이렇게 선택하시는 게 아니죠. 

그 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가기를 원하시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여러분의 가문 가운데 흘러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한 게, 이스라엘만 예뻐서 선택하신 게 아니잖아요. 
열방에 구원의 통로가 되라고 선택하신 거죠. 


◑다윗이 기름부음 받음

11 '또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이새가 10절에 보면, '자신의 아들들을 모두 보여줬어요.' 
저는 이 표현이 굉장히 마음에 안 들어요. 

왜냐면 그러면 일곱 아들만 자기 아들들의 모두이면, 
여덟 번째 아들은 자기 아들이 아니냐고요? 

본문을 좀 날카롭게 보면, 이새는 일곱 아들만 자기 아들로 여긴 거죠.

그래서 자신의 자랑스럽고 소중한 7 아들들을 다 선보였는데 
전부 다 탈락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7 번째가 탈락할 때까지 
이새는 막내 8번째 아들이 생각도 나지 않았다는 게 문제인 것이죠. 

그러면 그 막내를 소환한 사람은, 이새도 아니고, 형들도 아니었어요.
그들은 다윗 얘기를 언급조차 하지 않았어요. 

사무엘이 그때 질문한 것이죠. 11절에 '네 아들이다 다 온 것이냐?' 

사무엘은 이제 나이가 들어 늙었고, 세상을 떠날 날이 가까워 오고 있고 
자신의 후임자로 세운, 왕이 실패했어요. 하나님이 그를 버렸어요.

그리고 하나님은 '내가 새로운 사람을 준비했다'.. 고 하셨죠. 
그래서 베들레헴에 왔는데, 7명을 봤는데 거기에 없잖아요. 

지금 사무엘의 심정은 절박한 거예요.
떠나는 지도자 입장에선, 빨리 올바른 후계자를 세워야 되는데...
한 시가 급한데... 그 마음의 초조함이 '네 아들이다 다 온 것이냐?'에 배여 있죠.

이 대목에서 이새의 말이 가관입니다. 
'막내가 하나 있기는 한데.. 굳이 뭐 별로 언급할만한 애는 아닌데.. 
멀리서 양을 치고 있는데..' 이런 뜻이죠.

저는 이 장면을 볼 때마다 신데렐라 스토리가 생각이 나요.
Cinderella 에서 cinder 는 '재'라는 뜻이거든요.
그러니 신데렐라는, '부엌에서 늘 일만 해서 잿더미를 뒤집어 쓰고 있는 아이' 
라는 뜻이죠.

그러니까 신데렐라 스토리와 연결해서 본문을 상상해 보면,
집을 나서면서 아버지 이새가, 또는 장자 엘리압은 
'야 막내야, 네 형들하고 정말 일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한 
대선지 사무엘 선지자님하고 만찬 자리에 갔다 올테니까 
양들 똥 다 치우고 우릿간 다 정리하고, 딴짓하지 말고 양떼들 잘 보고 있어라'
이렇게 말하고는 집을 나간 거예요... 

저는 집에서 막내로 태어났는데, 그 막내의 (서러운) 심정을 잘 알죠.
저희 집이 삼형제 거든요. 
저희 큰 형이 태어났을 때 저희 아버지가 굉장히 기뻐 하셨대요. 

 

저는 그때 없었으니까 아버지 기뻐하는 모습을 못 봤죠. 
증거물이 남아 있습니다. 큰형이 태어났을 때 그때 집중적으로 찍어놓은 사진이 
두꺼운 앨범으로 두 권이나 돼요.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둘째가 또 아들이 태어났어요. 
셋째는 '딸이었으면 좋겠다' 했는데, 제가 막내아들로 태어났어요. 

저는 어릴 때부터 '막내'라는 말을 듣기가 무척 싫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님이 저를 부르실 때 '막내야, 이리 와 봐' 하시면, 

제가 진지한 표정으로 가서 어머니에게 이렇게 얘기했어요. 
'어머니, 저를 막내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저는 셋째 입니다.' 

제가 왜 '막내'라는 말이 싫었느냐면, 
그 말은 뭔가 천덕꾸러기 같기도 하고... 말째 라는 느낌도 들고...

근데 이새의 집도 똑같아요. 보니까 다윗에 대한 이새의 말투가 떨떠름한 겁니다. 
'뭐 변변찮은 녀석이 하나 있긴 한데, 들판에서 양을 치고 있는데... 
데려와서 선을 뵈어도 별 수 없을 게 뻔한데... 꼭 여기로 데려와야 하나요?'
뭐 이런 분위기죠.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11

그런데 그 변변찮은 어린 소년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세우신 최고의 왕이 됐죠. 

요즘 젊은이들 표현으로 하면 '하나님의 원픽'인 왕이었어요.

12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숫자도 참 성경에서는 의미가 많지 않아요. 
이새는 자기 생각으로 완벽한 "7"명의 아들로 이미 끝났다고 했는데 
여덟 번째 별 필요 없는 막내가 딱 등장을 한 거에요. 

그러니까 뭐 빈들에서 급하게 오느라 씻지도 못 했을 것이고 
막 달려오느라 땀범벅에 냄새가 풀풀 나고, 
하루종일 뙤약볕에서 일했으니까 '얼굴이 붉게 탄' 불그레한 다윗,

그 다음에 두 가지 표현이 굉장히 주목할만한 표현이에요. 
첫 번째는 '눈이 빼어났다(반짝였다)' 히브리어로 '야페'인데    :12  
이 단어는 창39:6장에 '요셉의 용모가 빼어났다' 할 때, 같은 단어입니다. '야페'

또 한가지는 '얼굴이 아름다웠다'.. 히브리어로 '토브'입니다.  
모세가 태어났는데 엄마가 보니까 '잘 생겨서' (토브) 강물에 버리지 못했죠.  출2:2

요셉과 모세에게 적용된 단어를 다윗에게 지금 사용했다는 것은,
성경(사무엘상은 사무엘이 썼다고 봄)이 
이 소년 다윗을 특별한 아이라고 보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이렇게 성경에서 칭찬하는 소년 다윗을, 왜 부모가 버렸을까요?
기라성같은 7명의 형들이 있는데 
맹수가 출현하는 그 빈들에 양을 지키라고 막내 아들을 내보냈다? 

좀 쉽게 납득이 안 되는 대목이죠. 

왜 형들이 막내를 미워하고, 왜 부모가 그 아이를 버렸을까요?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은 그런 소년을 
시대를 바꿀 인물로 선택하셨을까요? 

제가 다윗을 좋아해서 많이 묵상했지만, 이 부분이 늘 궁금했어요. 
근데 이번에 이 본문을 묵상하고, 또 성경전체를 보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어서 나누고자 합니다. 

요셉과도 같고, 모세와도 같은 다윗에게도 
한 가지 굉장히 결정적인 문제점이 있었어요. 

그 문제점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선택하신 겁니다. 
그 문제점이란, "내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되는 일에 나서는 사람"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

우리가 '과도한 열정'이라고 하죠. 
다윗은 '과도한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어린 양 한 마리가 맹수에게 물려서 잡혀가면 
그 어린 양을 살려 내겠다고 달려가서, 10대소년이 목숨을 걸고 
혈투를 벌이는 거예요. 그러면 생각해 보세요. 

다윗은 가족에게 버림받은 소년입니다. 내 양떼도 아니에요. 아버지의 양떼입니다. 
내가 목숨 걸고 나설 일이 뭐가 있냐 하는 거죠. 

또 도망자 시절에, 그일라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약탈 당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도 지금 400명의 사람들과 도망 다니는 중인데 
다윗은 목숨 걸고 나서서 그일라 사람들을 구원해 줍니다. 

아니 나라의 왕인 사울도 그일라로 와서 도와주지는 않는데 
무슨 도망자가 나서서 목숨 걸고 그들을 구원해줄 일이 뭐가 있냐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보니까 요셉도, 모세도 마찬가지 삶을 살았더라고요.

 

요셉이 아버지에게 채색옷 받아서 입고, 그냥 그 집안의 왕자처럼 대우 받으며
맛있는 거 먹으면서 편하게 지내면 되잖아요? 
왜 형들 일에 나서서 개입을 해서, 형들에게 미움을 받았느냐? 하는 것이죠. 
(형들의 잘못을 꼬치꼬치 아버지께 보고함)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한 사람 자기 동독이 학대 받는 것을 목격했는데,
당시에 학대 받던 히브리인이 그 사람 뿐이었겠어요?

수 십만의 히브리 노예들이 애굽인들에게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고요.
그런데 그 한 사람을 돕겠다고, 모세가 발 벗고 나섭니다. 

결국에는 그 일로 모세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던 것이죠. 
그렇게 자기가 나서지 않아도 되는 일에 나서서 
요셉은 13년 동안을 고생했고 
모세는 40년 동안을 광야에서 자기 인생이 썩었어요. 

다윗도 그런 유형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런 유형의 사람은 조직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거든요.
이런 사람은 한지로 밀려나게 되죠.

왜 다윗이 사랑을 받지 못하고, 그렇게 그 집안에서 내버려 졌던 걸까요?
아버지에게도, 형들에게도 계속 튀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하도 말을 안 들으니까 내 보낸 거죠. (다윗은 자기 생각에 옳은 일을 한 거고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귀한 아들 다윗을
빈들에 홀로 내버려 둘 수가 있었을까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은 포기하고, 버리고, 
'너는 체제 순응형이 아니야' 그러고 보내버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주목하고 계신 거예요.

시편 27:10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 하시리로다'
다윗이 쓴 시편입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 눈물이 나요. 
'내 부모 조차도 나를 버렸습니다.' 

'하나님, 저는 외톨이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저를 버리시면 
저는 갈 데가 없습니다. 하나님 저를 거두어 주십시오!' 
이것이 다윗의 어린 소년시절부터의 기도였어요, 빈들에서!

여러분, 이 두 장면이 너무나 대조적이잖아요. 
형들은 지금 저녁에 산당에서 멋지게 옷을 차려입고 
'야 내가 선택 받지 않을까? 기름뿔을 나에게 부어주지 않을까?' 
이런 상상을 하며, 사무엘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많이 쓰고 있는데 

빈들에서 소년 다윗은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거에요. 
'저는 버림받은 아들입니다. 하나님, 저를 거두어 주십시오. 
저는 하나님만 찬양하며 살겠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소년 다윗을 보고 계셨고, 그를 선택하셨다는 거예요. 할렐루야! 
여러분, 절대로 조직에서나 공동체에서나 여러분의 일터에서 
한지로 몰렸다고 해서 포기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하나님이 부르시고 선택하시면 
여러분의 인생에 반전의 승리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소년을 바라보고 있는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세요. 
'저 아이가 맞다. This is he 일어나 그에게 기름을 부어라' :12

제가 이 구절을 읽으면서 '하나님, 어떻게 인생을 사는 것이 맞는 인생입니까? 
자기 앞가림 하고, 자기 성공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 신경 안 쓰고, 나서지 않고 (복지부동하고)
그냥 내 인생, 내 가족, 내 자식, 내 사업, 내 교회만 잘되면 되는.. 
그런 인생을 사는 것! 

세상 사람들은 그런 인생이 지혜로운 인생이라고 이야기 하잖아요. 
자기가 괜히 나서지 않아도 되는 일에 나서서, 
어려움을 당하고, 한지로 몰리고... 
그런 인생을 어리석은 인생이라는 거잖아요. 

근데 하나님께서는 '저 아이의 인생이 맞다'는 거예요.
'나는 저런 아이를 원한다'는 거예요. 

△오늘날 20대, 30대를 보면 극단적인 개인주의 이기주의 인생입니다. 
욜로 YOLO 라는 게 뭔가요?    You Only Live Once

인생은 단 한 번 뿐인데, 내가 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손해를 봐야 되나? 
날 위해서 즐겁게 살면 되는 거지.. 
결혼을 왜 해? 내가 왜 다른 사람의 인생을 책임져야 돼? 
내가 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손해를 보고 희생을 해야 돼?' 

결혼을 해도 배우자에 대해서, 가족에 대해서 책임지려고 하지 않고, 
심지어 자식을 낳고도, 내 자식에 대해서도 손해 보고 싶어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애를 방치, 학대 하는 거예요. 
세상에서 오르지 나만 중요하지, 다른 거는 중요한 게 없는 거예요. 

아무리 인권을 외친들, 인권교육을 한들, 인권에 대한 정책을 세운들
소용이 없어요. 물질 만능에 '너만 최고야!' 하는 소리를 어릴 적부터 듣고 자란
지금의 20대, 30대는... 지극한 이기주의로, 본문의 다윗과는 정반대라는 거죠.

하나님의 어떤 사람을 선택하실까요?
하나님은 정말 이 가정을 살리기 위해서 
이 한국교회를 살리기 위해서 
이 나라와 민족, 이 시대를 살리기 위해서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을 찾으시는 거예요. 

 

온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바보같이 여기는 사람들.. 
'야 너는 왜 네가 나서서 
요셉처럼, 모세처럼, 다윗처럼 그렇게 고생을 해야 되니?' 
그런 사람을 찾으시는 거예요. 

바로 이어지는 17장 내용이 그 내용 아닙니까? 
다윗은 또 자기가 나설 필요가 없는 일에, 목숨걸고 나서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전 군대가 아무도 나서지 않는 자리였습니다. 
왕도 나서지 않았어요. 장군들도 나서지 않았어요. 

그런데 단 한 번도 전쟁이나 가보지 않은 어린 소년이 거기를 왜 나섭니까? 
나지가 낄 자리가 아니죠. 자기가 나설 자리도 아니었어요. 

그런데 '나는 우리나라가, 우리 민족이 이렇게 비난받는 것을 참을 수 없다. 
나는 하나님의 이름이 이렇게 모독을 당하는걸 참을 수가 없다.' 

아니 뭐 십대 소년이 참을 수 없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렇지만 자기가 목숨 걸고 거기를 나선 거잖아요!

자기 양떼가 아니어도, 자기 목숨을 던지고 나서는 거잖아요. 
자기 백성도 아닌데, 왕도 나서지를 않는데, 자기가 나서는 거잖아요. 

여러분 직장에서 조직에서 일해 보시면 '교통정리를 잘한다' 그러죠. 
자기가 낄자리가 있고, 안 낄 자리가 있는 거죠.
안 낄 자리를 자꾸 끼고 나서면.. 그러면 싫어합니다. 왕따 됩니다. 
있는 자리도 뺏어 버립니다. 한지(변방)로 몰아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런 사람이었던 거죠.

여러분 이 시대의 지도자들을 향해서, 왜 백성들의 마음이 어려운 걸까요?
그 자리에 오르기를 원할 뿐이지, 그 자리에서 희생할 마음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죠.

다윗의 이런 점은, 아마 가족 내력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다윗이 유다지파 입니다. 
유다 지파를 하나님이 왜 왕의 지파로 선택하셨나요?
조상 유다의 희생의 리더십 때문입니다. 
애굽에 내력갔을 때, 유다가 두 번이나 희생해서 자기 가족을 살리죠.

다윗을, 왜 하나님은 '넌 정말 내 마음에 합한 자다' 하고 선택하셨나요?
다윗이 가진 희생의 리더십! 
그건 바로 양무리를 사랑하고, 양무리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치는
희생의 리더십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목동 다윗을 왜 뽑아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는가요?
그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했을 때,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요?
그것은 바로 ‘양떼를 사랑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삼상17:34~35 ‘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아래 구절은, 다윗이 양떼를 잘 치다가 왕으로 뽑혔다는 사실을
더욱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시78:70~72 ‘또 그의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사
그의 백성인 야곱, 그의 소유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잠27:23 ‘네 양 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 떼에게 마음을 두라’
그리하여 다윗처럼, 하나님께 뽑히고 발탁되는.. 쓰임받는 사람이 됩시다.

혹자는 ‘다윗이 그렇게 된 것은, 그가 만세 전에 작정되었기 때문 아닌가요?’
절반 맞는데, 절반 틀렸습니다.
만약 다윗이 양떼에게 마음을 두지 않았다면..
그가 그렇게 살도록 작정되었어도, 자기 과실로 탈락되었을 것입니다.

사실 사무엘상하 전체에, 다윗이 자기 백성들을
마치 양떼들처럼 사랑하고 아끼는 사례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렇게, 양들의 처지와 형편에 관심을 두고,
그들을 위해 늘 기도하며 관심가지는.. 그런 영적지도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