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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16:7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LNCK 2023. 3. 6. 16:38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삼상16:7             여러설교정리

◑서론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두 명의 인물을 선정하면 아브라함과 다윗이죠.
구약 역사에 있어서 인물의 중요도를 선정하는 기준은 
그 사람의 인격이 훌륭하다거나, 혹은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쌓아놓은 업적이 
얼마나 크냐가 아닙니다. 그 기준은 바로 '예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 사람이 자기 인생을 통해서 예수님을 어떻게 나타내는가? 
그 사람이 예수님을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보여주는 모형이 되는가가 
바로 그 인물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 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나오는데,
1:1절은 이렇게 시작이랍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하기 전에, 간략하게 먼저 서론으로 소개할 때 
아브라함과 다윗, 두 사람의 인물을 선정한 것이죠. 

두 분은, 모든 역사에 있어서 반드시 기억해야 될 두 사람,
예수님 가장 잘 드러내는 그런 두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윗은, 아브라함보다 훨씬 더 직접적,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나타낸 사람입니다. 
다윗은 예수님의 조상이면서, 동시에 예수님과 동일시되는 많은 부분들이 
그의 삶에 나타납니다. 
아마 구약에서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 받고 소개된 인물이 다윗일 것입니다.

아브라함, 야곱도 약 10장에 걸쳐 소개되고 있지만,
다윗에 관한 지면을 다 합치면 60장 가량 그런 많은 분량이 소개된 것이죠. 

그러나 그 초점이 어디에 있냐면, 한 사람의 영웅담을 기록한 게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 땅에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인물로서
그토록 자세하게 소개되고 있다는 거지요. 

'다윗' 이름의 뜻은 '사랑 받는 자 beloved' 입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라는
음성이 들렸죠. 이 말은 '이는 내 다윗이요' 라는 뜻도 됩니다. 

다윗은 세 번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본문 삼상16:13에 나온 대로, 사무엘을 통해서 몰래 기름부음을 받았고 
두 번째는 사울이 죽은 후에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았고 
세 번째는 온 이스라엘의 장로들 앞에서 기름부음을 받고, 정식 왕이 되었죠.

아더 핑크는, 예수님도 3번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해석하죠. 
첫째로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실 때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고 
성령으로 잉태되셨고,
둘째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의 충만한 기름부으심을 받았고,
마지막은 승천하실 때, 시편에 '즐거움의 기름부음을 받았다' 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바로 그것은 예수님의 승천을 가리킨다.. 라고 해석했습니다. 시45:7

다윗이 고백했던 수많은 시편, 그 시편에는 많은 예수님에 관한 예언들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 예수님의 초림과, 예수님의 고난과, 예수님의 죽음과, 
예수님의 부활, 승천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모든 일대기에 관한 내용들이 
다윗의 시편 예언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다윗에게 임하신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떤 마음으로 사셨고 
또 어떤 고통을 당하셨는지를, 우리는 느끼고 깨달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윗만큼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살았던 사람이 없을 겁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베들레헴의 목동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악기를 연주하는 연주음악가 였습니다. 
골리앗을 무너뜨리는 군인이기도 했습니다.
사울을 피해서 도망다니면서 그는 많은 시를 짓는 시인이 됩니다.
그리고 그는 왕이 되었습니다. 

왕이 된 후에, 그는 잘못도 저질러서 살인도 하고, 
그리고 도망다닐 때 미친 척을 하는 것을 보면, 배우의 기질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한 사람의 인생에서, 이렇게 다양한 모습과 
다양한 직업이 나타날 수 있을까요? 

근데 이것도 한 사람의 능력이 다양하다는 것, 위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신 것은, 그가 위대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위대한 사람을 선택해서, 위대한 일을 시키시는 분이 아닙니다. 
어쩌면 보잘 것 없고, 알려지지 않고,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무명의 사람, 

어쩌면 은둔해 있는 사람,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겉으로 봐서는 '저 사람이 저런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하나님은 선택하셔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이루시는 일에 사용하시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다윗이 그랬습니다. 

◑사울의 추락과 다윗의 등장

다윗은 사무엘상 16장에서부터 등장합니다.
삼상16장은 하나님이 버리신 사울왕이 점점점 추락해 가는 과정과 
하나님이 택하신 왕이 점점점 역사 속에 부각되는 그런 시점입니다. 

자기 체면, 자기 자아 충만으로 가득한 이 사울을, 하나님은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셨다 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한 영혼으로서 그를 버리셨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하시기 때문에 버리신 겁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왕위에서 내려오도록 하신 겁니다.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이 버리셨다고 했지만 
바로 즉시 왕위에서 내려오도록 폐위시키지 않으셨다는 거예요.

어느 정도 일정한 기간 동안 계속해서 왕위에 있었다는 거예요.
(다윗이 충분히 성장하기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신 거죠)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실 때, 비밀리에 먼저 버리신다는 거에요. 
그 버리신 결과가 나타나는 거는, 한참 후에 나타난다는 거죠.

그러니까 내가 어느 위치에 계속 있다고 해도, 
그래서 그게 지금 나의 존재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버렸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서두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어 가십니다.

사울은 사무엘로부터 '하나님이 당신을 버리셨다'는 말을 들었어도
당장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을 계속 택하시고 인정하신 줄 알겠지만 
하나님은 실제로 버렸어요. 그러나 그가 왕위를 계속 (약 20년간) 
존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걸 몰랐던 거죠.

하나님은 사울의 지위를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이루십니다. 
다윗을 훈련시키십니다. 반면 교사를 삼게 하시는 거죠. 

다윗은 사울 왕을 보면서 '아~ 저렇게 하면 안 되는구나!' 를 철저하게 
배웠을 것입니다. '저렇게 하면 망하는구나' 라는 걸 철저하게 배웠을 거예요. 
그리고 그 기간은, 사울 왕에게 하나님은 (돌이킬) 기회를 주시는 
기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왕으로서 버리신 것은 
그의 영혼을 버린 것이 아니라 
어쩌면 하나님의 자녀된 그 영혼을 다시 찾기 위해서 
그 중심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서, 왕의 위치에서 내려오게 하신 거예요.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어떤 위치, 어떤 재물, 내가 가진 어떤 것을 
잃게 하시는 것은, 나를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진정 나를 다시 찾게 하기 위해서.. 내가 가진 어떤 것을 버리게 하십니다.

내가 가진 어떤 위치에서 내려오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진정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를 되찾기 위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고난과 시련과 변화를 주시는 거죠.

스스로 보잘 것 없는 자라고 여겼기에 그가 세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순간부터 (암몬과 승리 이후부터) 

그는 자기로 가득한 사람이 되어 버렸어요. 

사람의 마음 중심은 이렇게 변한다는 거예요.
놀랍고 무서운 것은 자기도 모르게 중심이 변한다는 거죠.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고, 하나님께 붙어 있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신 축복 가운데, 하나님이 주신 축복 가운데
우리의 마음 중심이 쉽게 변질될 수 있다는 경각심을,
우리 역시 본문의 사울을 보면서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 스스로 '나는 보잘 것 없는 존재야' 하다가도, 
어느 샌가 '나 자신은 위대한 존재야!' 이렇게 여기게 된다는 거죠.

하나님을 버린 사울을, 하나님도 결국 그를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새 왕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렸다는 말씀을 듣고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1
사무엘이 슬퍼한 것은, 단지 개인적으로 사울왕과 관계가 깊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 국가의 운명 전체가, 사울의 실정으로 인해 두려웠고 슬펐기 때문이죠. 

이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 :1

사무엘은 '사울이 이 사실을 알면 저는 죽을 것입니다.'  :2

한때는 사울이 사무엘을 두려워했던 때가 있었는데  9:21, 10:22 
이제는 사울의 교만해진 상태가, 위 구절을 통해서 잘 드러나죠.

이때 하나님이 지혜를 주십니다.
'베들레헴에 가되, 제사 드리러 간다고 해라.' :2

왜 비밀리에 했을까요? 다윗을 보호하기 위해서 였죠.
만약에 사울왕이, 다윗에게 기름부어졌다는 사실을 알면, 
다윗의 목숨이 위험하거든요...

또한 다윗 입장에서 볼 때, 그때 다윗의 나이가 15세 전후로 봅니다. 
다윗이 왕이 될 때, 이스라엘의 장로들로부터 왕으로 세움을 받을 때가 
30세 였으니, 기름부음을 받은 후 15년 정도 후에 실제 왕이 되었고,
그 기간동안 하나님은 다윗을 훈련시키기 원하셨습니다.


◑인간의 한계 - 사람은 외모를 봅니다.
신령한 선지자 사무엘조차도, 사람의 외모를 보고 판단한 것은
인간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이제 사무엘이 베들레헴에 제사드리러 가서 이새의 가족들을 초대합니다. 
이새의 7명의 아들이 다 모였습니다. 

사무엘이 장남 엘리압을 보자 한 눈에 반했어요. 
거의 겉모습을 보고서 사무엘은 '바로 이 사람이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이구나!'

그러나 하나님은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16:7

여기서 '사람은 외모 outward appearance 를 보지만'에서
'외모'의 히브리어 뜻은 '눈, 또는 눈빛'입니다.  *'아인'

무슨 뜻이냐면, 사무엘이 사실은 
엘리압이 잘 생겨서, 멋지게 생긴 것을 보았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보는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인데,
그의 눈을 통해 뿜어져 나오는 어떤 장래성, 가능성을 봤다는 말이죠.

사실 어떤 겉모습만 보고 평가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때로는 더 신중한 사람들이 많죠.

그 사람의 언행, 심지어 눈빛까지도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합니다.
그의 눈빛을 보면 그의 됨됨이가 보이고, 그 사람의 생각이 나타나고,
만약 눈에 초점이 없는 사람은, 그가 지금 인생을 방황하고 있는 겁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성실한지, 얼마나 인생을 열심히 사는지.. 
그 눈빛에 어느 정도는 나타나요. 

눈빛이 보고, 우리는 사람을 평가할 수 있지만, 그것도 정확하지 않다는 거죠.
선지자인 사무엘도, 눈빛을 보고 판단했는데... 인간은 한계가 있더라는 거죠.
(그저 외모가 잘 생겼다.. 그것만 보고 판단하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사람은 눈빛을 보면서 그의 내면, 그의 기개와 정신을 판단하려고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마음의 중심은 볼 수 없다는 겁니다.

사무엘은 어쩌면 엘리압의 눈빛을 자세히 살펴보았을 것입니다. 
저는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너무 잘생겼다. 몸짱이다.' 
그렇게만 봤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무엘을 너무 무시하지 마세요. 
틀림없이 사무엘은 예리한 눈빛으로 엘리압의 눈빛을 봤을 거예요.

그러나 그 눈빛도, 사람의 시각은 정확하지 않다는 거예요.
사람은 그 마음의 중심을 볼 수 없어요.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을 보고 판단할 때는, 예수님처럼 밤새워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가 예리한 관찰력과 통찰력으로 그를 판단한다고 해도
사람의 판단은 정확하지 않다는 거죠. 사무엘같은 영적지도자도 틀린다는 거죠.

▲둘째 아들 아비나답, 셋째 삼마 다 지나갔지만
하나님이 택하신 자는 거기에 없었어요. 

'네 아들이 이게 전부냐?' 하고 말하니까 
아버지 이새가 참 재미있는 말을 합니다. 

16:11 '막내가 하나 있기는 한데, 지금 양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말했습니다. 그를 불러오너라. 그가 도착할 때까지 
식사 자리에 앉지 않겠다.' 

아버지가 다윗을 부르지 않은 이유는,
아버지 이새에게는, 막내 아들 다윗은 안중에도 없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하찮은 존재로 여겼다는 거죠.

사실 자기 아들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아버지일 것입니다.
정말 아들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보고 키웠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육신의 아버지조차도, 사람의 내면을 정확히 들여다보거나
판단하지는 못한다는 거죠. 이것이 우리 연약한 인간의 한계입니다.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우리 집에 있는 자녀들을 바라볼 때도
조심하고 긴장해야 합니다. 
내가 혹시 내 육신의 눈으로, 아버지 이새처럼, 그렇게 자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가족으로부터 이용당하고 소외당하고 
가족으로부터 주목받지 못했던 다윗을 
하나님은 택하셔서 놀라운 일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중심은, '내면, 또는 양심'입니다. '속마음'이죠.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렘 17:9~10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십니다.
예를 들면, 보아스의 본처는 (성경에 안 나오지만, 있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별로 아쉬울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유력가의 마님에다, 유대인 신분에다...
큰 죄 지은 것도 없지만, 크게 칭찬 들은 것도 (성경기록에) 없습니다.

반면에 모압여인 룻은, 모든 악조건 속에서도 꿋꿋이 하나님을 섬겼고
실제 생활에서는 성실히 살았습니다. 마음으로 시모를 섬겼습니다.  

성경 역사의 유유한 물줄기는 여기서 진로를 바꿔 타 버렸습니다.
보아스-본처 로 내려가야 할 역사가
보아스-룻 으로 진로 변경해 버린 것입니다.

과거에 유다-본처 로 내려가야 할 역사가
유다-다말 로 진로 변경해 버렸듯이...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은 외모를 절대 보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이죠.

인종, 가문, 재산, 과부, 학벌, 교단, 출신배경, 외모 등을 일절 보지 않고    
단 한 가지, 우리 중심을 보십니다.

「안산 동산고 이야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사장(김인중 목사)님은 학생들을 몹시 사랑하셨죠. 
그래서 교육사업에 한평생을 바치셨습니다.

그는 학생들의 다양함을 파악했습니다. 
그 다양한 모습을 보면서 
학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는 책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내성적인 학생은 생각이 진지해서 좋다.
사교적인 학생은 정직하고 과장이 없어서 좋다. 
소심한 학생은 실수가 없고 정확해서 좋다.

질투심이 많은 학생은 의욕이 넘쳐서 좋다.
말이 많은 학생은 지루하지 않아서 좋다.
자신감이 없는 학생은 겸손해서 좋다.
직선적인 학생은 속정이 깊어서 좋다."

이사장님의 생각에는 모든 학생이 다 좋아 보입니다.
학생 각자의 중심의 선한 면을 보고 있으니까요.

▲지금 한국교회는 계시록의 사데교회 (이 단락, 설교 스크랩)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사데교회는 
오늘의 한국교회의 실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솔직히 저는 이 말씀을 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우선 제가 너무 부담스러운 말씀이고, 듣기에 거북한 말씀이고, 
기분이 좋지 않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말씀, 오늘 전하고 싶지 않아서 꽤 고집을 피웠습니다마는 
주님은 밤낮 이 말씀에만 매달리도록 종을 몰아붙였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전하고 싶어서 전하는 말씀이 아님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오른손에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국교회를 위해서 주시는 말씀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사대교회를 향해서 주님은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었느니라.   계3:1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었느니라.

‘이름이 살았다’ 하는 것으로 보아 사대교회는 평판이 꽤 좋았던 것 같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사람들은,
“아~ 그 교회, 대단하지. 대단해.”
하고 인정을 했던 것 같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사대교회가 한 때 놀라운 부흥을 경험한 화려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그 후광을 즐기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따라서 사람들 보기에는 살아 움직이는 교회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열심도 뜨겁고, 봉사도 많이 하고, 예배도 감동적이고, 
뭐 하나 흠을 잡을 데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눈에 비친 그 교회 
허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중심을 보시는 주님의 눈에는 
불행하게도 그 교회는 행위가 죽어있었습니다.
행위에서 온전한 것을 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계3: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위가 무엇입니까?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위가 무엇입니까?
믿음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사대교회 안에는 몇 사람을 빼고는, 그렇게 사는 자들이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사대교회를 보면서, 오늘의 한국교회를 보는 것 같다는 
불안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수십 년 동안 기적 같은 부흥을 경험한 화려한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그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5만이 넘는 교회,
천만의 성도,
세계 제일의 교회,
새벽을 깨우는 대단한 열심,
남에게 뒤지지 않는 헌신,
만 명이 넘는 선교사들,
많은 헌금, 큰 교회당 등
자랑거리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세계를 다녀보십시오.
한국교회에서 왔다고 하면 다시 한 번 우리를 쳐다봅니다.
겉으로 보면 한국교회는 절대로 죽은 교회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한국교회는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충성하는 
목회자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목사보다도 힘쓰는 평신도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한국교회의 자존심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만일 누가 오늘의 한국교회를 보고 행위가 죽었다는 소리를 하면 
저는 그 말을 절대로 인정하고 싶지 아니한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그렇지만 저의 이러한 확신을 흔들어놓는 심각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사회가 한국교회를 너무 불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목사의 신뢰도는 오래 전부터 하위권입니다.
교회 들어왔다가 실망하고 등을 돌리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전도를 해도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무종교자들에게는 기독교가 제일 인기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우리를 이중인격자로 보는 것 같습니다.
말하고 행동하고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랑, 사랑하면서 교회는 왜 그렇게 잘 싸우느냐고 비아냥거립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가 자기들보다 더 정직한데가 어디 있느냐고 따져 묻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데는 자기들과 똑같다고 봅니다.
사회의 각종 스캔들에 교회 다니는 사람이 끼어도 
이제는 더 이상 놀라지도 아니합니다.

한마디로 자기들하고 다른 점이 별로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기가 막히게도 우리는 이러한 비난을 받으면서도, 
한마디 변명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예수 믿는 우리들의 도덕성, 가치관, 처세관을 놓고 보면 
세상 돌아가는 쪽으로 더 많이 기울고 있다는 것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도 모르게 우리는 세속주의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모습을 
세상 앞에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가 짠맛을 잃으면, 우리보다 더 악한 세상 사람들의 발에 
짓밟히도록 내던져 지는 것이 주님의 징계요 심판입니다. 
우리가 지금 그러한 끔찍한 상황에 놓여 있지 않은지 
두려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지금 주님께서 한국교회의 중심을 보시고 뭐라고 하실까요? 
'이름은 살았으나 행위가 죽었다'고 책망 하시지 않으실까요?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계3:1

누가 아니요 하고 변명할 목사가 있습니까? 
누가 아니요 하고 변명할 장로가 있습니까? 
평양 대 부흥 100주년에 진정한 기념은, 
이러한 우리의 영적 비참함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가슴을 치는 데서 
출발해야 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사데 교회를 보면서 제가 두려워하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일곱 별을 손에 지신 예수님께서 
행위가 죽은 교회에 책임을 지도자에게 묻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사데교회 사자에게 편지하라' 계3:1                           
사자는 교회의 지도자요 목회자를 가리킵니다. 

저는 주님께서 왜 목회자에게 책임을 물으시는지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수십 년 목회를 하면서 목자에 목사에 입장에 서면, 
이름은 요란 하지만 행위가 죽은 교회를 만드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는 것을 저는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는지 여러분 아시고 싶습니까? 이렇게 하면 됩니다. 
목사가 말씀을 가르치거나 설교를 하면서, 복음을 조금씩 변질시키면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복음이 얼마나 변질되고 있는지 조차도 모를 정도로 
둔감해지면 됩니다. 
그러면 교회는 이름만 살았고, 행위는 죽어지고 죽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복음이란,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하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 복음에는 진리의 양면성이 들어 있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그 믿음의 진가는 순종하는 행위로 검증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구원의 절대적인 요소라고 한다면, 
행위는 구원의 필연적인 요소가 됩니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았기 때문에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행위는 따로 놓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가리켜서 좋은 나무와 좋은 열매로 비유를 하셨습니다. 
따라서 목회자는, 믿음과 순종을 똑같이 중요하게 다루고 가르쳐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로마서를 설교했으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었다는 야고보서도 진지하게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외모보다는 인격이다.      주1)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그를 택하셨지만,
그 이후로도 계속 다윗의 마음 중심을 훈련시켜 나가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자를 불러서 사용하신다' 라기 보다는
'그 마음 중심이 온전하도록 가능성 있는 자를 택해서.. 그를 만들어가십니다!'

특이한 점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다윗을 택하여 기름 부었는데 
그 선택된 왕을, 바로 왕위로 올라가도록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본문에서 첫 번째 기름부음을 받고 
세 번째 이스라엘을 장로들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을 때까지는 15년 정도의 
시간이 흐릅니다. 그 기간은 어떤 기간이었습니까? 

좋은 시설에서 좋은 교사를 통해 교육 받는 그런 
요즘같은 해외유학의 기간이 아니었습니다. 
그 기간은 광야의 기간이었습니다. 

그는 사울 왕의 위협을 받아, 광야란 광야는 다 다녀봤습니다. 
숲이란 숲은 다 다녀보았습니다.

다윗에 도피 경로를 살펴보면, 그는 이제 광야 지리의 박사가 돼 버렸어요. 
어떤 이스라엘 왕이 광야를 다 다녀 본 사람이 있겠습니까? 

억울한 누명을 쓰고, 그리고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버림받은 사람들을 아둘람 동굴에서 만났습니다. 

그 4백여명의 아둘람 공동체 일원들이
이제 이후에 다윗 왕국의 중요한 지도자들이 다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시대에 버림받은 사람들을 다 모아서 
다윗으로 하여금 그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게 하시고 
바윗을 왕으로 세우는 일에 밑거름이 되게 하셨습니다. 

다윗이 받았던 고통과 시험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기름부음을 받으셨지만 
승천 하실 때까지 예수님은 무수한 시험과 고난을 당하신 것 같은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목동 생활을 통해 
그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했습니다. 

위기가 올 때, 사자나 곰이 양을 물러가려고 할 때 
그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맞서 싸웠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그의 아버지가 되셨고, 
하나님의 친히 그의 교사가 되어 주셔서
광야 속에서 그의 마음의 중심을 훈련하신 겁니다. 

하나님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으셨어요. 
그는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 수많은 케이스들을 판단하고 결정해야 됩니다. 
앞으로 수많은 많은 나쁜 사람들을 이끌어가고, 다스려야 되는 왕으로 
세워지기 위해서 더 많은 훈련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 왕을 어느 정도 내버려두었던 겁니다. 

그리고 사울의 위협을 통해 다윗을 훈련 시켰습니다. 
하나님이 기름부으셨기 때문에, 즉시로 왕으로 올라가지 않고 
백성들로부터 옹립 받도록..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백성들의 칭찬을 받고, 백성들로부터 왕으로 세움받도록 
하나님은 15년동안 마치 내버려두시는 것처럼 
그렇게 다윗을 광야 속에 방황하도록 하셨습니다. 

때로 다윗은 이해할 수 없었을 겁니다. 
'내가 왜 이런 시련을 당해야 되는가?' 이해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가 기름부음을 받을 때 성경에 그에게 임하셨기에
그가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그 안에 임하시는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그를 지탱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를 인도해 주었던 것입니다. 

때로 사울에게 복수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하나님 앞에 권리를 내려놓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훈련의 과정을 통하여 그 마음의 중심이 
정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으로 훈련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바윗의 마음은 
한순간에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 중심으로 끊임없이 훈련되는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께 합당한 자로 그는 세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하나님께로 올려 드리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마음의 중심은, 나조차도 알 수가 없어요. 
다른 사람이 모르는 거는 당연하고, 나 조차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때로 고난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고난당하고 시험당할 때, 우리는 내 마음의 중심이 어디 있었는가를 
그제야 비로소 알게 돼요. 

평안한 환경에서는 절대 내 마음의 중심을 알 수 없습니다.
고난과 시련을 통해 내 마음의 중심이 온전히 하나님을 향하였는가, 
아니면 나 자신이 얻는 재물과 세상 명예였는가...를 분명히 깨닫게 되는 거죠.

 

...................................

 

주1) ◑외모보다는 인격이다. 
꽃은 곧 시든다. 우리 외모가 그렇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잠 31:30) 

외모는 장점과 동시에 단점을 갖는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지만, 반대로 사람들은 일단 외모부터 본다. 
그러므로 외모가 잘 생긴 사람은 유리한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남자들도 성형 및 피부 관리를 하는 세상이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외모가 잘난 사람은(특히 여자), 자신이 탁월한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 능력보다는 자기 외모만 쳐다보기 때문에 분개하기도 한다. 

반대로 외모가 쳐지는 사람은, 자기 외모로는 도저히 경쟁력이 없으니까, 
실력으로 승부를 보려고... 도서관에서 각고의 노력을 하게 된다. 

요지는, 외모가 쳐지는 것이 꼭 자신에게 핸디캡(장애)은 아니라는 뜻이다. 
외모가 떨어지기 때문에, 무섭게 실력과 인격을 쌓는 일에 집중할 수도 있다.
이른바 약점을 강점으로 바꾼 인생이 된다. 

▲못 생긴 사람은 대체로 겸손하다 
어떤 조사에 의하면, 잘생긴 사람들이 오히려 이혼율이 높다고 한다. 
잘 생긴 탈랜트 영화배우들 얼마나 이혼을 많이 하는가. 
자기의 준수한 외모 때문에 교만하기 때문이다.
잘 생긴 사람치고, 고매한 인격을 찾기 힘든 것은 - 교만 때문이다. 

결혼을, 왕자와 공주가 만나서 산다고 생각하면 분란이 그치지 않는다. 
실제로 머슴과 시녀가 만나서 산다고 생각하면 평안하다. 실제로 그렇다. 
‘나는 왕자(공주)니까 나를 섬겨라’ 하면 깨지고 
‘나는 머슴(시녀)이니까 당신을 섬기겠습니다.’ 하면 원만해진다. 

반면에 못 생긴 사람들은 매사에 자신을 조심한다. 
조심할 수밖에 없다. 
‘내가 조금만 잘못 실수하면 언제든지 깨질 수 있다’ 라고 생각하니 
늘 조심하고 겸손히 섬기게 된다.

배우자가 조금이라도 잘 해 주면 ‘이 무슨 은혜인가!’ 또는 
‘만 가지 은혜를 받았으니...’ 하며 더 겸손해진다. 
그래서 못 생긴 사람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인격적인 면에서 앞서간다.

▲미모에 승부를 거는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낙심한다. 
20대에 아무리 아름다워도 30대가 되면 약간 꺾인다. 
40대가 되면 더 꺾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자기 외모로 인해 한 번 주목을 받았던 사람은 
그 외모에 대한 애착을 쉽게 못 버린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더 크게 낙심한다. 

과거에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만 쳐다보았는데, 
30대 후반이 되면, 이제 눈길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그 실망이란... 
그래서 거의 발악을 할 정도로 외모에 치중하는 엉뚱한 해프닝도 벌어진다. 

반면에, 20대부터 외모 쪽으로 거의 포기하고 살았던 사람도 있다. 
이들은 내면의 아름다운 인격과, 인간성 등에 치중하며 살게 된다. 

30대 후반부터 외모는 평준화가 시작된다. 
‘예쁜 할머니’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똑같은 할머니인데...  

그래서 내면의 아름다움이 있는 사람은, 중년에 이를수록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고, 인정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느끼게 된다. 
젊었을 때 힘들었던 것이(외모)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유리한 점이 된다. 

▲우리나라에서 롱런하는 연예인들 중에 상당수는, 
그들의 고등학교 때 사진을 보면 ‘이 얼굴로 어떻게 연예인이 되었나?’ 싶다. 

‘성형수술을 해서 예뻐졌다...’ 그렇게만 생각하면 안 된다. 
‘그 동안 자기 내면의 인격을 가꾸어왔다’는 점을 파악해야 한다. 
자기 외모가 출중하지 않은 사람으로서의 겸손을 터득하고 살아온 것이다.
(그것이 롱런의 비결이다.) 

어느 분야든지, 롱런하려면... 겸손해야 한다.
그래야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승자는, 외모보다 
내면의 아름다움, 겸손한 인격을 가꾸는 사람에게 돌아간다. 

▲외모는 지극히 문화적인 것이다. 
당나라 수도 서안(장안)에 가서 보니, 절세미인 양귀비 그림이 있는데  
그림에서 그녀는 깜짝 놀랄 정도로 뚱뚱했다. 
당나라 시절에는 뚱뚱한 여자가 매력이 있었단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영락없는 식당 아줌마 스타일이다. 
(오히려 당시 시녀들은, 못 얻어먹어서 몸매가 날씬했겠다.) 

지금 한국 여성의 아름다움의 기준은 서구 여성이다. 
우리가 서양 여자 따라가려고, 눈 크게 보이려고 쌍꺼풀 수술하고 
몸매를 호리호리하게 다듬는다. 

문화마다 아름다움의 기준이 틀린다. 
절대적인 아름다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국 여성이 서구의 아름다움을 따라갈 필요는 없다. 

서양 남자가 한국 여자와 결혼한 경우를 예로 보면, 
서양 남자는 자기 와이프가 매우 예쁘다며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다. 
그런데 한국인 남자의 시각으로 보면, 그의 부인은 대개 힘들게 생겼다. 
서양 남자와 한국 남자의 미의 기준은... 결코 같지 않다. 
아프리카 어떤 지역에서는 목이 길면 아름답다고 느끼지 않는가. 
<절대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은 없다. 문화적으로 각기 다르다>라는 점이다. 

요지는, 기준도 불분명한 외모의 아름다움에 매달리지 말고 
문화와 시대를 뛰어넘는 내면과 인격의 아름다움에 집중하자는 것이다. 

▲세계 공통적 아름다움 -자신감과 생기
세계 어느 문화를 가든지, 자신감과 생기가 넘치는 사람은 매력을 발산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 곧 생기로 지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울창한 나무 숲, 뛰어다니는 동물들 등... 
사람은 생명을 보면 생기를 느끼며 기뻐한다.  

그러므로 리더가 되려면, 외모보다 생기가 도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럴 때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 몰려다닌다. 

얼굴이 예쁘게 타고나든지 꾸며서 예쁘든지, 표정이 우중충한 사람보다는 
얼굴은 보통이고 몸매가 뚱뚱해도, 생기와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은
실제로 사람들에게 더 많은 매력을 발산한다. 

수련회 가서 보면, 아침에 머리 안 감아도 생기가 넘치는 자매가 있고 
아침에 머리 감고 화장하는 데 신경 무지 쓰다가, 
수련회 모임에 늘 지각하고 빠지는 자매가 있다. 
누가 더 매력적이겠는가. 

항상 꾸미고 다니는 여자보다는 (사실 이런 여자는 별로 매력 없다.) 
평소에는 수수하게 다니다가도, 승부를 보는 자리에서는 화려하게 꾸미고 
나타나면, 모든 사람들은 시선을 그녀에게 집중하게 된다.     

이런 생기와 자신감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서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 생긴다.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과 교제하면, 생명감이 충만한 사람이 된다. 
크리스천은 이런 생명감에서 오는 생기와 매력을 마음껏 발산한다.

▲사랑의 생기는 치유의 능력이 있다. 
사랑은, 긴장을 풀어주고...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능력이 있다. 
남자든지 여자든지, 그를 만나면 
나의 쌓인 긴장이 풀어지는 느낌을 받는, 그런 믿음직한 사람이 있다. 

믿음의 사람끼리 서로 진실한 사랑의 대화를 나누다 보면, 
모든 긴장이 스르르 풀린다. 

믿음, 소망, 사랑, 그 다음은 유머다. 
시의적절 한 유머 한 마디에, 그 웃음에, 모든 긴장이 다 떠나간다. 
여기서 유머란, 웃으면서 상대를 세워주는 건설적인 유머를 뜻한다. 
(보통 유머는 상대를 깔아뭉개는 유머다.) 

부부간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5분간의 진지한 대화는 
50송이의 장미보다 더 가치 있다. 
대화는 자주 하고  
장미는 가끔씩 사 주면 된다. 

▲사랑은 피로를 풀게 만든다. 
어떤 날은, 늦게 공부를 마친 딸을, 우리 부부가 함께 데리러 간다. 
(보통 때는 아내 혼자만 데리러 간다.) 
딸은 차에 타면서 ‘어쩌다가 같이 오셨어요?’ 라고 의아스럽다는 듯 말하지만 
그 환한 표정에서, 딸의 하루의 힘든 공부 피로가 다 눈 녹듯 사라져 내림을 
본다. 이렇게 사랑은 치유의 능력, 피로를 풀게 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결론은, 생기와 사랑... 이런 것들이 외모보다 훨씬 중요하다. 
이런 것은 매력 차원을 넘어서 
다른 사람들을 치유하고, 긴장을 풀어주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이것들은 오직 신앙에서 온다. 
그러므로 이제 무엇에 더 집중해야 되는지 깊이 생각해 보자.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잠 3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