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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17장 해석 및 주석

LNCK 2023. 3. 7. 09:13

◈삼상17장 해석 및 주석

1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의 군대를 모으고 싸우고자 하여 유다에 속한 소고에 모여 소고와 아세가 사이의 에베스담밈에 진 치매

'블레셋 사람들이...싸우고자 하여' 블레셋 사람들의 이같은 전의(戰意)는 당시 악신으로 고통받던(16:14) 사울의 통치력 약화를 기화로, 믹마스 전투에세의 패전(14:31)을 설욕키 위한 것이었다.

'유다에 속한 소고' '소고'는 '가시가 많은 곳'이란 의미이다. 이곳은 유다 산지와 블레셋 평원, 곧 세펠라 지역에 위치한 요새 도시 중 하나로서(수 15:35),
베들레헴 서쪽 약 22.5km, 아세가 남동쪽 약 4.8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한편 블레셋 군이 유다에 속한 이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이스라엘에 대해 기선을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아세가' '파헤친 땅'이라는 의미이다. 이곳은 아얄론 골짜기(수 10:12) 남부의 견고한 도시로서, 해발 약 120m 가량이다. 수 10:10 주석 참조.

'에베스담밈에 진치매' '에베스담밈'(Ephes-dammim)은 '피의 경계선'이란 의미이다. 이같은 지명은 그곳에서의 잦은 전투로 많은 피가 흘려졌기 때문에 붙여졌을 것이다.

2 사울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여서 엘라 골짜기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을 대하여 전열을 벌였으니

'엘라 골짜기에 진 치고' '엘라 골짜기'는 '상수리 나무의 골짜기'란 의미이다. 이곳은 예루살렘 서남쪽 약 22.5km에 위치한 오늘날의 '와디 에스상트'로 추정된다.
당시 그 지역 내에는 나무가 무성하였고, 그 골짜기 밑바닥에는 다윗이 골리앗을 죽였을 때 사용했을 듯 싶은 조그만 돌들이 지금도 깔려있다고 한다. 또한 이 골짜기는 '소고'의 북쪽에서 동서로 가로질러 있다. 한편 이곳은 여름철만 빼고는 항상 골짜기에 물이 흘렀으므로,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이 전투는 물이 말랐을 여름철에 벌어졌음이 분명하다.

‘전열을 벌였으니’
과거 개역엔 '항오를 벌였으니'로 번역했다. '일렬로 정렬하다'란 의미이다(4:2, 욥 6:4). 여기서는 블레셋에 대한 이스라엘의 방어적 자세를 가리킨다.

3 블레셋 사람들은 이쪽 산에 섰고 이스라엘은 저쪽 산에 섰고 그 사이에는 골짜기가 있었더라

본절은 블레셋 족속이 자신들의 본진이 있는 '에베스담밈'<2절>을 떠나 이스라엘이 진을 치고 있던 '엘라 골짜기'로 진격했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다. 이때 양군은 골짜기를 경계로 낮에는 양편 언덕에 대열을 이뤄 길게 늘어서서 전투 내세를 취하다가, 밤에는 자신들의 장막으로 돌아가기를 계속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이에는 골짜기가 있었더라'
여기의 '골짜기'(가이)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일반적 의미의 골짜기(에멕)와는 전혀 다른, 좁고 급격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협곡(峽谷)을 뜻한다. 바로 이같은 지형적 요인 때문에, 이스라엘과 블레셋은 마주보면서도 쉽사리 전면전을 벌이지 못했을 것이다.

4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의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그의 키는 여섯 규빗 한 뼘이요

'싸움을 돋우는 자(아쉬 하베나임)' 문자적으로는 '둘 사이에 있는 사람'(a man between the two)이란 뜻이다. 이것은 결국 단신으로 싸워 단번에 전쟁의 승패를 판가름하기 위해 두 군대 사이에 개입하는 중간사람(middle-man)이란뜻으로, 곧 선봉장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같이 전군(全軍)을 대표하여 선봉장이 상대방의 선봉장과 전투를 하는 방식은 성경 다른 곳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같은 전투 방식은 헬라 민족들 사이에서는 일반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바로 이 블레셋 족속들이 헬라권에서 이민 온 민족이라는 사실은 골리앗의 이같은 전투 형태를 넉넉히 이해케 해준다.

'그 이름은 골리앗' '골리앗'(Goliath)이란 이름이 갖는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 까닭은 이 사람이 비셈계 인종에 속하기 때문이다.

'가드 사람' '가드'(Gath)는 아세가 서쪽 약 8.9km 지점으로, 블레셋 5대 도시 중 하나이다(5, 80. 그런데 이 지역에는 거인족인 아낙 족속이 섞여 살고 있었다(수 11:22). 그러므로 분명 골리앗도 이 거인족의 후예일 것이다.

'그 신장은 여섯 규빗 한 뼘이요' 고대의 측략법에 근거하여 한 규빗(Cubit)을 약45cm 정도로, 한뼘(Span)을 약 13cm 정도로 본다면, 골리앗의 키는 약 283cm 정도로 추정될 수 있다. 한편 NEB는 274cm로 환산하였고, NIV와 Living bible은 '9피트 남짓'(over nine feet, 약 270cm 남짓)으로 보았다. 아무튼 골리앗은 270cm 이상으로, 보통 사람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장대한 거구였음이 분명하다.

5 머리에는 놋 투구를 썼고 몸에는 비늘 갑옷을 입었으니 그 갑옷의 무게가 놋 오천 세겔이며

'그 갑옷의 중수가 놋 오천 세겔' 한 세겔(Shekel)은 약 11.5g이므로, '오천 세겔'은 약 57.5kg이다.

6 그의 다리에는 놋 각반을 쳤고 어깨 사이에는 놋 단창을 메었으니

‘각반'은 다리를 보호하는 장비이다.

7 그 창 자루는 베틀 채 같고 창날은 철 육백 세겔이며 방패든 자가 앞서 행하더라

'창자루는 베틀채 같고' 이것은 멀리 던지기 위해 창자루에 고리가 달린 가죽끈을 감아 놓은 창의 모양에 대한 표현이다. 그 모양이 '베틀채'(weaver's beam, KJV, weaver's rod, NIV)를 닮았다는 말이다.

'창 날은 철 육백 세겔' 600 세겔은 약 7kg이다. 따라서 이것은 골리앗의 창이 엄청나게 컸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4-7절에 묘사된 바 블레셋 군대의 선봉장 골리앗은 그 거대한 신장이나 육중한 무기등이 보통 사람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조차 없을 만큼 크고 강했다. 마치 우뚝 솟은 난공 불락의 요새와 전혀 다를 바 없었던것이다.

8 그가 서서 이스라엘 군대를 향하여 외쳐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서 전열을 벌였느냐 나는 블레셋 사람이 아니며 너희는 사울의 신복이 아니냐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보내라

본절에는 골리앗이 자신을 블레셋의 대표로 자처하면서, 이스라엘 군대에게 자신과 싸울 대표를 뽑아 보내라고 호통치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골리앗이 이처럼 일대일 결투를 신청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1) 협곡을 경계로 서로 대치했던 지형 형편상 전면 선제 공격이 곤란했으며 (2) 골리앗이 자신의 힘을 과신하여 이스라엘의 그 누구라도 쉽사리 이길 수 있으리라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사실 이같은 일대일 결투는 고대 이방의 전투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이 경우 선봉장의 승리는 곧 전체의 승리로 간주되어, 패배한 측은 상대국에게 패전국으로서의 모든 의무를 다해야 했다(9절).

'그가 서서' 골리앗은 그때 언덕위에 있던 자신의 진을 나와 골짜기의 중간쯤에 우뚝 버티고 서있었을 것이다.

9 그가 나와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겨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

'종이 되어...섬길 것이니라'
본절에 언급된 골리앗의 이 제안은, 결국 그가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블레셋이 이스라엘의 속국이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볼 때(52-54절), 다만 이스라엘을 공포 분위기 속으로 빠뜨리기 위한 공갈 협박용이었음이 확실하다(10, 11절).

10 그 블레셋 사람이 또 이르되 내가 오늘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어 나와 더불어 싸우게 하라 한지라

'내가...모욕하였으니'
이것은 골리앗이 (1) 이스라엘 사람들을 사울의 노예 혹은 종(신복)이라고 깔보았고(8절), (2) 또한 이스라엘은 겁장이들이므로 블레셋의 종노릇이나 해야 할 무력한 민족이라고 조롱했던 사실(9절)을 가리킨다.

'나로 더불어 싸우게 하라' 골리앗이 이스라엘에게 자신과 맞서 싸울 용사를 요구만 하고 이스라엘 진으로 접근해 갈 수 없었던 이유는 (1)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의 진이 가파른 산 위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2) 또한 그는 중무장을 하여 몸이 무거웠기 때문일 것이다.

11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 여기서 '놀라'(하타트)는 원래 '파괴되다', '부서지다'란 의미로서, 극단의 공포심을 표현할때 사용되는 단어이다(왕하 19:26, 사30:31, 렘 8:9). 그리고 '두려워하니라'(야레)는 '경외하다', '엄위하다'란 의미로서, 어떠한 유.무형의 강력한 힘에 대하여 정신적으로 완전히 압도당하는 것을 가리킨다(창 18:15, 19:30, 신 5:5, 수 4:4, 시 119:120).

이처럼 이스라엘은 사울 왕으로부터 전체 병사에 이르기까지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의 기세등등한 모습에 겁을 집어먹고 기가 질려 두려움으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이는 무엇보다 이스라엘의 총지휘자 사울에게서 여호와의 신이 떠나 버린 필연적 결과였다.

12 다윗은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 이새라 하는 사람의 아들이었는데 이새는 사울 당시 사람 중에 나이가 많아 늙은 사람으로서 여덟 아들이 있는 중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 '에브랏'(Ephrath)은 베들레헴의 고대 명칭으로서(창48:7), 족장 야곱의 아내 라헬이 산고로 죽은 곳이며(창 35:16-19), 무엇보다도 후일 선지자 미가의 입을 통해 메시야가 태어날 장소로 예언된 곳이다(미 5:2). 한편 본서 저자는 여기서 '유다 베들레헴'이라고 분명히 밝힘으로써 스불론 지파의 베들레헴과 구별했고(수 19:15, 삿 12:8), 또한 '에브랏 사람'(Ephrathite)이라고 밝혀줌으로써 이새의 집안이 베들레헴 본토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결국 유다 베들레헴은 이스라엘의 성군 다윗의 고향으로서, 그리고 장차 메시야 그리스도가 태어날 곳으로서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임을 알 수 있다.

13 그 장성한 세 아들은 사울을 따라 싸움에 나갔으니 싸움에 나간 세 아들의 이름은 장자 엘리압이요 그 다음은 아비나답이요 셋째는 삼마며

'장성한 세 아들은...싸움에 나갔으니'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군대에 나갈 자격과 의무가 있는 자는 이십 세 이상의 남자였다(민 1:3).

14 다윗은 막내라 장성한 세 사람은 사울을 따랐고

'다윗은 말째라' 이것은 다윗이 자신의 형들과는 달리 사울을 따라 싸움에 나가지 않았던 이유를 제시해 준다. 즉 이는 당시 다윗의 나이가 20세 미만이었음을 시사해준다.

15 다윗은 사울에게로 왕래하며 베들레헴에서 그의 아버지의 양을 칠 때에

'다윗은 사울에게로 왕래하며' 여기서 '왕래하며'(훌레크 와사브)는 다윗이 사울의 궁전과 베들레헴 집을 반복적으로 계속 오갔음을 뜻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히브리 원문은 다만 '갔다가~그리고 (사울에게로부터) 왔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다윗은 수금을 타기 위해 사울에게 갔다가(16:19, 22), 그의 병이 호전되자 양을 치는 자신의 일을 위하여 다시 베들레헴의 자기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매일 출퇴근이 아니라, 왕궁에 오래 머무르다 집에 돌아옴)

'베들레헴에서...양을 칠 때에' 이것은 오히려 '베들레헴에서 양을 치기 위하여'(to feed...sheep at Bethlehem, KJV)로 번역함이 타당하다. 즉 이것은 다윗이 수금을 타던 일을 그만 두고, 사울의 곁을 떠났던 한 가지 목적을 언급하는 어구인 것이다.

16 그 블레셋 사람이 사십 일을 조석으로 나와서 몸을 나타내었더라

'그 블레셋 사람' 이것은 단수로 표기되었다는 점에서, 블레셋 군대가 아닌 '골리앗' 개인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사십일을... 몸을 나타내었더라' 이것은 블레셋과의 전투가 계속적으로 소강(小康)상태에 머물고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이같은 상태가 계속된 까닭은 (1) 이스라엘측에서 골리앗을 상대할 용사를 아직껏 내보내지 못했으며(11절) (2)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진(陳)이 자리잡고 있던 지형적 조건상 전면 공격을 감행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3절 주석).
그러나 블레셋의 선봉장 골리앗의 계속 되는 위협으로 말미암아 전황(戰況)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이스라엘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여기 '사십 일'은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해 있었음을 예시해주는 어구로 보아야 할 것이다(창 8:6, 삿 13:1).

즉 본서 저자는 여기서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이 위급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는 언급은 하지 않았으나, 이같이 시련과 위기의 수인 '사십 일'이라는 말을 특별히 언급함으로써, 다윗이 매우 필요 적절한 시기에 이새에 의해 블레셋과의 전투 장소에 보내졌음을 강력히 암시하려고 한 듯하다.

17 이새가 그의 아들 다윗에게 이르되 지금 네 형들을 위하여 이 볶은 곡식 한 에바와 이 떡 열 덩이를 가지고 진영으로 속히 가서 네 형들에게 주고
18 이 치즈 열 덩이를 가져다가 그들의 천부장에게 주고 네 형들의 안부를 살피고 증표를 가져 오라

이새가 여기서 이같은 조치를 위한 이유는, 블레셋과의 사십 일 이상의 대치로 인하여(16절) 이스라엘 군대의 식량이 고갈되었을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각 가정은 싸움에 징집된 자식들에게 일종의 병참 지원을 했던 것같다.

한편 '한 에바'는 약 23리터에 해당하는 구약 시대 고체량의 부피 단위이다(출 16:36).
상당히 무거운 식량을 운반한 셈이다.

'증표를 가져오라' 이것은 (1) 다윗이 제대로 형들을 만나 형들의 안부를 살폈는지의 여부, (2) 예물이 전달됐는지의 여부, (3) 다윗에 의해 이새에게 전달될 형들에 관한 소식의 진위(眞僞) 여부를 증명할 어떤 '증거물'(token, RSV)을 뜻한다. 틀림없이 이것은 서신(書信)의 형태였을 것이다.

19 그 때에 사울과 그들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은 엘라 골짜기에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는 중이더라

20 다윗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양을 양 지키는 자에게 맡기고 이새가 명령한 대로 가지고 가서 진영에 이른즉 마침 군대가 전장에 나와서 싸우려고 고함치며,
21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람들이 전열을 벌이고 양군이 서로 대치하였더라

'일찌기 일어나서 양을...맡기고' 다윗의 순종과 부지런함, 그리고 책임감이 잘 나타난 구절이다. 아마도 저자는 여기서 사울의 왕권을 계승할 자로서의 다윗의 인품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 같다.

22 다윗이 자기의 짐을 짐 지키는 자의 손에 맡기고 군대로 달려가서 형들에게 문안하고

'짐을...맡기고' 다윗은 이같이 함으로써 형들이 있는 전투 대열로 신속히 가려고 했던 것 같다. 물론 여기서 '짐'은 형들에게 주기 위해 아버지에게서 가져온 음식 보따리를 가리킨다(17절).

짐 지키는 자' NEB(the New English Bible, 새 영어 성경)는 이 말을 '병참 장교'(quartermaster)로 번역하였다. 이 번역을 따른다면, 다윗은 그때 집에서 가져온 음식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전하지 않고, 여기의 이 병참 장교의 손을 통해 형들에게 전달하려고 했던 것 같다.

23 그들과 함께 말할 때에 마침 블레셋 사람의 싸움 돋우는 가드 사람 골리앗이라 하는 자가 그 전열에서 나와서 전과 같은 말을 하매 다윗이 들으니라

'골리앗...전열에서 나와서'
여기서 '전열'은 골짜기를 경계로 양쪽 언덕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는 군사 대열을 가리킨다<3절>. 그리고 '나와서'(올레)는 '올라가다'란 의미인데, 이것은 골리앗이 자신의 진에서 내려와 이스라엘 진쪽의 언덕으로 어느 정도 올라왔음을 가리킨다.

24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며

'심히 두려워하여...도망하며' 즉 골리앗이 더이상 따라 올라올 수 없는 안전 지대로 피신했다는 말이다. 이로 볼 때 당시 사울과 이스라엘 군대는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 한 사람으로 인하여 얼마나 사기가 저하되고 두려움과 떨림에 사로잡혔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25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너희가 이 올라 온 사람을 보았느냐 참으로 이스라엘을 모욕하러 왔도다 그를 죽이는 사람은 왕이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그의 딸을 그에게 주고 그 아버지의 집을 이스라엘 중에서 세금을 면제하게 하시리라

여기서는 사울 왕에 의해 약속된 바(27절) 골리앗을 죽이는 자에게 주어질 세 가지 상급이 언급되고 있다.

26 다윗이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거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거하는' 이 말은 다윗의 의분(義憤)이 단순히 개인적이거나 또는 골리앗을 죽이려한 다윗의 의도가 자신의 영달이나공명심 때문이 아니라, 오직 골리앗으로부터 당한 민족적 치욕 및 신성 모독을 제거하려는 것임을 보여 준다. 한편 여기서 '치욕'(헤르파)은 골리앗이 이스라엘에게 준 '모욕'(10절)과 동일한 어근의 말이다.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것은 다윗이 이미 약속된 것(25절)보다 더 큰 상급을 사울에게 약속받으려 했음을 가리키지 않는다. 다만 다윗은 그때 이 말을 함으로써 골리앗을 죽이는 일의 당위성, 시급성을 시사하려고 했었던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1)본절의 후반부 '이 할례 없는...모욕 하겠느냐'라는 말과 (2) 이후 딸을 주겠다는 사울의 제안을 다윗이 사양했다는 언급(18:18) 등을 통해 분명해진다.

27 백성이 전과 같이 말하여 이르되 그를 죽이는 사람에게는 이러이러하게 하시리라 하니라

본절은 골리앗을 이기는 자에게는 세 가지 상급(25절)이 주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결코 근거없는 유언 비어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28 큰형 엘리압이 다윗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엘리압이...노를 발하여' 다윗의 맏형 엘레압의 이 분노는 다윗의 거룩한 분노와는 뚜렷히 대조되는 것으로, 곧 자신의 편협한 소견에서 비롯된 세속적 분노이다. 어쩌면 엘리압의 이같은 분노는 자신을 제쳐놓고 동생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사실로 인한 질투 및 시기심이 근본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네가 어찌하여...내려왔느냐' 이것은 베들레헴이 해발 690m 높이의 고지에 위치한 성읍이었다는 사실을 앎으로써 이해될 수 있다(15:12, 16:2).

29 다윗이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어찌 이유가 없으리이까 하고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이 말은 자신이 책망받을 일을 전혀 하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말이다.

30 돌아서서 다른 사람을 향하여 전과 같이 말하매 백성이 전과 같이 대답하니라

'백성이 전과 같이 대답하니라.' 이것은 골리앗을 물리치는 자에게 세 가지 상급이 약속 되었다는 사실을 말한다(25, 27절).

31 어떤 사람이 다윗이 한 말을 듣고 그것을 사울에게 전하였으므로 사울이 다윗을 부른지라

32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그로 말미암아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하니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여기서 '사람'(아담)은 정관사가 없으므로 '한 사람'으로 번역해야 타당하다. 따라서 본 어구는 '한 사람도 낙담하지 말 것이라'로 번역해야 좋다. 그런데 70인역은 '사람' 대신에 '나의 주'(아도니)로 번역하여 읽고 있다. 그러나 그처럼 원문을 고쳐 읽을 근거는 전혀 없다(Fay). 아무튼 일개 시골 목동에 불과했던 다윗이 한 나라의 통치자용 군대 총지휘관인 사울에게 오히려 이같은 위로의 말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것이다.

'주의 종이 가서...싸우리이다' 다윗의 이 말은 엘리압이 비난했던 것처럼(28절) 결코 쓸데없는 만용이나 교만이 아니었다. 오직 소년 다윗은 할례받지 못한 이방 족속 블레셋 사람의 그 모멸스런 치용과 경멸로부터 여호와의 군대인 이스라엘의 명예를 되찾고, 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영광을 회복해야 하겠다는 거룩한 열정에 불타 믿음과 확신으로 결연한 의지를 천명한 것이었다.

33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울 수 없으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34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때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아마도 곰과의 사투(死鬪)를 묘사하는 말인것 같다. 왜냐하면 실제 곰은 적을 일거에 강타하여 쓰러뜨리기 위하여 뒷다리로 의지하고 일어서서 앞 다리를 치켜 내리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곰의 취약 부분은 머리 부분으로서 그곳을 정확히 지팡이로 강타하면 제압할 수 있다고 한다. 아마 다윗도 목자의 지팡이로써 곰과 싸워 이긴 듯하다. 사실 고대 문헌을 살펴보면, 이처럼 지팡이로 곰이나 사자와 싸워 이긴 기록이 나타난다.

'수염을 잡고' 사자나 곰은 '수염'이 없다는 점에서, 여기의 '수염'은 '턱'(chin)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이같이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여기 '수염'에 해당되는 '자칸'은, '수염'이란 의미 이외에도 '턱'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Bochart). 한편 이러한 관점에서 갈대아역은 '아래 턱'으로, 그리고 70인역(LXX)은 '목구멍'으로 각기 번역하고 있다.

36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사자와 곰도 쳤은즉...모욕한...블레셋 사람이리이까' 여기서 다윗은 가축을 해하려하여 자신이 쳐죽였던 맹수와, 그때 이스라엘을 해하여 하고 있는 골리앗을 암시적으로 동일시한다. 이같은 동일 묘사를 통해서 다윗은 골리앗에 대한 자신의 승리가 확실함을 사울에게 강력히 시사하였던 것이다.

37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와께서...건져내셨은즉...건져 내시리이다'
골리앗에 대한 다윗의 도전 의사는 결코 일시적 흥분이나, 충동으로 인한 만용이 아니었다. 즉 그때 다윗은 (1) 과거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자신의 양떼를 해하려고 한 사자와 곰을 물리친 경험에 근거하고(2)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고 여호와를 능멸하고 있는 사자와 곰 같은 골리앗을 직시하면서 (3)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자신과 함께하사 그 할례받지 못한 블레셋 사람을 거꾸러드릴 것이라는 미래적 확신에 불타올랐기 때문에, 이스라엘 생사가 걸린 이 골리앗과의 결투에 결연히 자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거룩한 열정과 확고한 신앙에 근거한 다윗의 논리적인 설득에 결국 사울은 크게 감동을 받고, 마침내 골리앗과의 결투를 허락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결국 사울이 다윗의 승리를 강력히 염원했을 뿐만 아니라 더나아가 확신까지도 했음을 뜻한다. 이것은 다윗의 말(34-37절)이 그만큼 믿음과 용기와 확신으로 가득차 있었음을 시사한다.

38 이에 사울이 자기 군복을 다윗에게 입히고 놋 투구를 그의 머리에 씌우고 또 그에게 갑옷을 입히매
  
39 다윗이 칼을 군복 위에 차고는 익숙하지 못하므로 시험적으로 걸어 보다가 사울에게 말하되 익숙하지 못하니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나이다 하고 곧 벗고'

40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막대기(마켈)' 보통 버드나무 가지의 껍질을 벗겨 만든 것으로, 한쪽 끝을 굽어지게 하여 손잡이가 되도록 한 지팡이(staff)를 가리킨다. 이 지팡이는 목자가 산을 오르거나, 걸으면서 나뭇가지와 잎을 칠 때, 그리고 웅덩이에 빠진 양을 구출할때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창 32:10, 출 2:11, 민 22:27). 한편, 그러나 또 다른 종류의 막대기(rod) '맛테'는 구부러지지 않고 곧게 뻗은 모양의 지팡이를 가리킨다(출 4:2, 7:9).

'시내에서' 여기의 '시내'(나할)는 '골짜기'. '하수', '강' 등의 의미로서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진을 치고 있던 엘라 골짜기를 가리킨다(2절). 이곳은 우기인 가을부터 봄까지는 물이 흐르지만, 건기인 여름에는 강 바닥이 말라붙어 버린다.

'매끄러운 돌' 이 돌은 물이 말라붙은 골짜기의 시내(Wadi) 바닥에서 주은 단단하고 매끄러운 차돌을 가리킨다.

'물매(켈라)' 이것은 주로 양가죽으로 만들어졌는데, 던질 돌을 넣을 수있도록 가운데 부분이 넓게 엮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 물매의 한쪽 끝에는 끈이 달려져 있어 엄지에 연결하여 물매를 돌려 던질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 이러한 물매는 막대기와 더불어 목자들의 필수 도구였는데, 곧 목자들은 물매로써 (1) 옆길로 새는 양떼를 멀리서도 통제하고 (2) 양을 노략하려는 야수들을 쫓아내었다. 뿐만 아니라 물매는 조직된 군대에 의해서도 사용된 듯하다. 즉 우선 베냐민 사람들은 성경에서 물매사용의 명수들로 언급되며(25:29, 삿 20:16, 대상 12:2, 대하 26:4), 심지어 최근에 발견된 앗수르왕 산헤립의 궁궐 벽에는 구리로 된 투구를 쓰고 쇠사슬로 만든 갑옷을 입은 물매꾼이 그려져 있을 정도이다.

41 블레셋 사람이 방패 든 사람을 앞세우고 다윗에게로 점점 가까이 나아가니라

'블레셋 사람...방패 든 자가 앞섰더라' 본절은 무장을 안하다시피한 다윗과는 대조적으로, 그러한 다윗과 싸울 골리앗의 완벽한 무장 상태를 의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4-7절>.

42 그 블레셋 사람이 둘러보다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43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의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여기서는 골리앗이 다윗의 연소 혹은 왜소함, 그리고 허술한 무장으로 인하여 그를 조롱하고 그에게 독설을 퍼붓는 장면이 언급된다.

'다윗을 보고' 여기서 '보다'(라아)란 말은 '자세히 들여다보다', '관찰하다'란 의미이다(레 13:3, 왕하 7:13, 대하 12:17, 욥 28:24).

'젊고(나아르)' 흔히 '소년'이란 말로 번역되는 단어로(16:18), 곧 나이의 연소함을 가리킨다<33절>.

'개로 여기고' 문자적으로는 '내가 개냐?'(Am I a dog?)란 뜻이다. 한편 '개'는 중근동에서 가장 싫어하고 금기로 여기는 대표적 동물이다(왕상 21:23, 왕하 9:36).

'신들의 이름으로...저주하고' 여기서 '신들'은 히브리 본문에는 단수로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문자적으로는 다만 '신'이란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골리앗은 분명히 다신주의자였을 것이라는 추정적 사실과 충돌이 될 수 밖에 없다. 이에 따라 이 모순을 해결할 두가지 방법이 제안되어 왔다. 즉 그 방법은 (1) 단수 '신'을 사본상의 오류로 보고, 복수인 '신들'로 이해해야 된다는 것 (LXX, KJV), (2) 단수'신'을 정확한 것으로 보고, 다만 '신'을 다윗의 신 곧 여호와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자신이 믿는 수호신의 이름을 빙자하여 상대방을 경멸하는 일이 고대 용사들에게는 보편적이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볼 때, 위의 두 가지 견해 중 첫번째의 견해가 더 타당한 듯하다. 또한 이같은 추축은 45, 46절에서 다윗이 자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상대방 골리앗을 경멸했다는 점에서, 보다 신빙성을 띠게 된다. 한편 한글 개역 성경의 '이름으로'는 히브리 본문에는 없는 것으로서, 번역자의 의역으로 삽입한 것이다.

44 그 블레셋 사람이 또 다윗에게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하는지라

'네 고기를...들짐승들에게 주리라' 고대의 전사들이 결투를 벌이기 전 이처럼 저주와 위협의 독설을 상대방에게 퍼붓는 것은 스스로 사기를 앙양시키고, 기선을 장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흔히 사용되었다. 고대 서사시인 호머의 작품속에도 이러한 장면이 잘 묘사되어 있다. 한편, 이러한 위협은 실제 고대 중근동에서(1) 패배당한 상대 장수의 옷을 벗기는 등 신체에 모욕적 행동을 가하며, (2) 또한 시체를 장사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 둠으로써 새나 들짐승의 밥이 되도록 하는 등, 보편적인 관습으로 행해지고 있었다31:8-13).

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여기서 다윗은 군대의 무기 보다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여 싸우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성전을 수행하는 자임을 분명히 밝히고있다.

'칼과 창과 단창' 블레셋 군대의 선봉장인 거인 골리앗이 소유하고 있던 막강한 무기들로서(4-7절), 곧 이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무력(武力)을 상징한다고 볼수 있다.

'만군의 여호와(예호와 체바오트)' 이말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원수들을 징치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당신의 군대로 삼고, 친히 그 지휘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밀이다<1:3>.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 이 말은 앞에 언급된 '만군의 여호와'가 갖는 의미를 설명해주는 말이다. 그러므로 여기 나타난 다윗의 말을 통해 볼 때, 다윗은 자신과 골리앗과의 싸움을 단순히 개인과 개인 또는 국가와 국가간의 사움만으로 보지 않고, 골리앗이 숭배하는 블레셋 족속의 신들과 자신이 믿고 의뢰하는 이스라엘의 신, 곧 여호와 하나님 간의 싸움으로 인식한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방의 헛된 목석의 신들은 살아계신 하나님 여호와의 능력 앞에 여지없이 거꾸러지리라는 신앙과 확신으로 담대히 나아갔던 것이다.

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내 손에 붙이시리니' 이 말은 주로 성전(the Holy War)을 수행함에 있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완전한 승리를 주시고자 할 때(수 6:2, 8:1, 7) 사용되는 말이다<14:10 주석>.

'온 땅으로...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다윗의 이 말은 성전(聖戰)의 일차적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준다(수 2:9-11). 즉 성전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보여 준다(수 2:9-11). 즉 성전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살아계셔셔 역사를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섭리.운행해 나가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널리 증거하는 데 있음을 다윗은 올바로 인식한 것이다(고전 10:31). 그러므로 여기서 다윗은 골리앗과의 싸움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계약 백성으로 만천하에 널리 드러나게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알게 하리라' 만일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과 맞싸울 장수로 이스라엘에서도 최대한 비슷한 조건의 용사를 고르고 골라 내보내어 혹시 이겼다면, 그 싸움의 모든 영광은 그 승리한 용사에게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골리앗의 조건과는 모든 면에서 너무나도 현격한 대조를 보이는 다윗이 '창 칼 없이' 막대기와 물매만으로 승리한다면, 그것은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승리요, 오직 그 이름만이 영광받을 것이었다. 따라서 소년 다윗은 이러한 점까지 내다보면서, 진정 골리앗의 창칼이 썩은 지푸라기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을 이스라엘의 거인 하나님과 함께 나아갔던 것이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이 말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전쟁의 하나님'으로서, 곧 (1) 모든 전쟁의 승패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따라 좌우되며(대하 20:15, 시 127:1, 144:1) (2) 또한 그러한 모든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 나가신다는 뜻이다.

48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빨리 달리며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여기의 '일어나'(쿰)는 문자적 의미의 일어남 보다는 차라리 어떤 결정적 행동에 선행되는 의지적 결단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블레셋 사람에게로...빨리 달리며' 이러한 다윗의 적극적인 전투 자세는 오직 여호와의 능력만을 힘입어 싸우려 했던 다윗의 신앙과 용기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아울러 이는 다윗이 골리앗과는 달리 극히 가벼운 무장, 즉 막대기와 물매 만을 지니고 있었던 사실을 암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40:, 43절).

'항오를 향하여' 본 문구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블레셋의 진영과 가까운 지점에서 벌어졌음을 암시해 준다. 아마도 골리앗은 중무장(4-7절)으로 인해 행보가 둔했던 반면, 다윗은 평상시 목동의 복장과 소도구 그대로였기 때문에 블레셋 군대의 대열쪽으로 많이 전진해갔던 것 같다. 한편 '항오'는 '군대의 대열(隘列)'을 의미한다<23절>.

49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돌을...물매로 던져' 여기서 '물매'는 블레셋 사람들이 예기치 못할 정도의 비밀 병기는 결코 아니었다. 그 이유는 (1) 물매는 이미 고대 중근동에 널리 알려져 있던 병기였으며<40절>, (2) 또한 골리앗은 다윗이 물매를 휴대한 채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목격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골리앗은 자신의 거대한 몸집이나 거의 빈큼없는 무장 상태로 보아 그까짓 물매로 인해 어떤 타격을 입으리라고는 상상치 못했을 것이다. 즉 그는 자신의 무력을 과신했던 것이다.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이같은 결과는 일차적으로 (1) 그당시에는 중세기의 기사들이 착용했던 것과 같은 안면 보호대가 개발되지 않았으며, (2) 골리앗 앞에 있던 방패드는 자가 골리앗의 큰 키로 인하여 그의 안면을 방어하지 못했으며, (3) 그리고 다윗의 뛰어난 물매 솜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전과(戰果)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하여 거두어질 수 있었음<45-47절>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실로 이것은 "40일 동안이나 그 교만한 블레셋 사람(골리앗)의 온갖 모욕과 조롱을 당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가 다윗의 물맷돌 속에 응축되어 골리앗의 이마에 박힌 것이다". 한편 '이마에 박히니'라는 말은 (1) 골리앗에대한 다윗의 승리가 결코 다윗 자신의 물매 솜씨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사실과 (2) 골리앗이 단 하나의 물맷돌로 인하여 죽기까지 했던 이유를 시사해 준다.

'땅에 엎드러지니라' 외형적 자세로만 볼 때 이것은 상대에 대한 절대적 존경심을 표할 때에 취하는 자세이다. 일찍이 여호와의 법궤 앞에서 블레셋의 다곤 신상이 이처럼 엎드러졌었다<5:3>. 그러므로 결국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모멸하던 자를 강제로라도 굴복시켜 그로부터 합당한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윗의 물맷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종종 주위의 흔하고 평범한 물체들을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어떤 물체나 대상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사용에 합당하도록 하나님께 헌신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혹시 우리는 우리 주변에, 또는 우리 자신 속에 하나님께서 들어 사용하실 만한 그 무엇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진정 원하시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것, 그리고 그 무엇이라도 당신의 목적을 위한 당신의 도구로 들어 사용하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50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죽였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여호와께서는 창.칼 등 무기의 도움없이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전능하신 분이라는 다윗의 확신과 신앙(47절)이 실제적으로 입증되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 준다. 한편, 이처럼 다윗의 물맷돌이 대적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을 쳐서 거구러뜨린 것은 다니엘서 2:34, 35에 나타난바 '뜨인 돌이 큰 신상을 부숴뜨리고, 이어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다'라는 말을 연상케 한다. 이런 의미에서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의 물맷돌 사건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단의 세력을 징치하고 전멸시킬 것이라는 심판 사건의 전조(前兆)에 다름 아니었다.

51 다윗이 달려가서 블레셋 사람을 밟고 그의 칼을 그 칼집에서 빼내어 그 칼로 그를 죽이고 그의 머리를 베니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용사의 죽음을 보고 도망하는지라

'다윗이...블레셋 사람을 밟고' 밟는 행위는 완전한 승리.정복의 의미를 갖는다(수10:24, 롬 16:20). 따라서 블레셋 사람 골리앗에 대한 다윗의 이같은 행동은 (1) 다윗을 통한 블레셋 민족 정복(삼하 8:1), (2) 그리스도를 통한 사단 세력 멸절(룸 16:20, 계 20:10) 등의 의미를 이중적으로 예표한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칼을...빼어 내어...그를 죽이고' 전쟁 관례상 자신의 무기를 사용치 않고 상대국 장수로부터 칼을 빼앗아 그 장수를 죽이는 일을 강대국과 그 장수에 대해 수치심을 안겨 주려는 것이었다(삼하 23:20, 21). 한편 여기의 '칼'은 골리앗이 소지했던 창과는 달리 그다지 크지 않았던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이같은 추정은 (1) 소년 다윗이 능히 사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 (2) 제사장 아히멜렉이 그 칼을 다윗에게 적당한 것으로 생각했었다는 사실(21:9) 등으로 충분히 뒷받침 된다. 아무튼 자신의 칼과 창만을 믿고 큰소리쳤던(43, 44절) 골리앗이, 결국 자신의 그 칼로 자신의 목을 베임 당한 이 아이러니컬한 사실은, 악인은 결국 자신이 파놓은 구덩이에 그 자신이 빠지고 만다는 진리를 보여 준다(시 7:15, 9:15).

'그 머리를 베니' 고대의 전투에서 적국의 적장을 죽이고, 그 승리의 증거로서 그 머리를 베어 왕에게 바치는 일(57절)은 하나의 관례였다.

'자기 용사의 죽음을 보고 도망하는지라' 블레셋 군대는 골리앗의 승리를 확신하고 이스라엘 군에 대한 총공격 태세를 갖추었을 것이다. 그러나 골리앗의 패배라는 어이없는 결과에 그만 전의를 완전 상실하고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것은 골리앗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당초에 약속했던 것, 곧 양쪽의 대표 중 진쪽의 군대는 이긴 쪽의 군대에게 완전한 항복의 예를 갖추어야 한다는 선언(9절)을 스스로 파기한 행동이기도 했다.

52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이 일어나서 소리 지르며 블레셋 사람들을 쫓아 가이와 에그론 성문까지 이르렀고 블레셋 사람들의 부상자들은 사아라임 가는 길에서부터 가드와 게그론까지 엎드러졌더라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이...쫓아' 여기서 본서 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같이 분리 언급한 까닭은 다음과 같다. 즉 (1) 본 전투가 있었던 당시와 본서가 기록된 당시의 유다 지파와 타지파가 상호 대립하고 있었다는 사실(11:8, 15:4), (2) 본 전투에서의 승리가 유다 지파 사람 다윗의 결정적 역할에 따른 결과였다는 사실, (3) 본 전투가 유다 지파의 땅에서 벌어졌었다는 사실(1절) 등의 정치.군사적 배경을 암시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여기서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이 함께 블레셋 군대를 추격했다고 언급함으로써, 이방 원수를 격퇴함에 있어서는 온 이스라엘 민족이 한 마음이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가이와 에그론 성문까지 이르렀고' 이것은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대해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음을 강력히 시사해 준다<7:14>. 그런데 한편 여기서 '가이'(*)에 대한 해석으로 다음 두 가지가 있다. 즉 이를 (1)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 명사 '골짜기'(3절)로 보고, '성문'처럼 '에그론'에 속한 한 지점일 것이라는 해석, (2) 필사자의 실수에 따른 오기(誤記)로 보고, 골리앗의 고향인 '가드'(*)를 가리킬 것이라는 해석(LXX) 등이다. 그런데 첫째, 블레셋이 '가드'와 '에그론'까지 엎드러졌다는 언급과(52b절) 둘째, 블레셋에 대한 이스라엘의 완전한 승리를 시사하는 구절 속에 '가드'와 '에그론'이 나란히 언급됐다는 점(7:14)등에서 (2)의 견해가 더욱 타당성이 있다.

'사아라임 가는 길' 이것은 '엘라 계곡'을 가리킨다<3절>. 한편 '사아라임'은 여호수아 15:36의 언급을 통해서 볼때, 소고 및 아세가<1절>와 인접한 한지점에 위치했음이 분명하다. 

53 이스라엘 자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쫓다가 돌아와서 그들의 진영을 노략하였고

'진을 노략하였고' 고대 중근동에서 승전국이 패전국으로부터 전리품을 획득하는 일은 극히 일반적인 관례였다. 그러나 여기 언급된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 행위는 본서 저자의 눈에 부정적으로 비쳐졌음이 분명하다. 그 같이 볼 수 있는 까닭은 저자가 여기서 합법적인 탈취를 뜻하는 '솰랄'이라는 단어를 사용치 아니하고(민31:31, 신 2:35, 수 8:2, 11:14, 삼하 3:22, 대상 20:2), 부정적 의미의 탈취를 뜻하는 '솨사스'(*)를 사용했기 때문이다(삿 2:14, 시 89:41, 사 13:16, 렘 30:16). 그렇다면 저자가 여기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노략 행위를 부정적으로 본 까닭은 무엇일까? 그 까닭은, (1) 그 물건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경멸했던 블레셋 족속의 소유물이었으므로, 필연 하나님께 바쳐진 저주받은 것들이었음이 분명하며(15:3 주석 참조, 수 6:18-21),(2) 따라서 그 물건들은 반드시 영적 지도자의 조언에 따라 처분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임의로 취했다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민 31:21-24, 수6:18).

54 다윗은 그 블레셋 사람의 머리를 예루살렘으로 가져가고 갑주는 자기 장막에 두니라

'블레셋 사람의 머리를 예루살렘으로 가져 가고' 이같은 언급은 여기의 '예루살렘'이 그 당시 여전히 여부스 족속의 수중에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상충된다(삼하 5:6-9). 바로 이같은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시도로서 다음과 같은 해석이 제시되었다. 즉 그것은 (1) 당시 예루살렘이 여부스 족속에 의해 부분적으로 장악되긴 하였으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곳에 이미 살고 있었기 때문에(수 15:63, 삿 1:21), 다윗은 그때 블레셋과의 싸움 직후 골리앗의 머리를 가까운 그곳으로 가져갔다는 해석, (2) 그 당시에는 예루살렘이 여부스 족속의 절대적 영향력 아래 있었기 때문에 싸움 직후에는 골리앗의 머리를 다른 곳에 임시 보관하였다가, 마치 임시장사 되었던 사울의 시체가 후일 그 아비의 매장지에 완전히 안장되었듯이(삼하21:12-14), 여부스 족속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한 후 그곳으로 옮겼다고 보는 해석 등이다. 그런데 다윗 당시 예루살렘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일부 거주 하기는 하였으나, 그 도시는 여부스 족속의 강력한 지배 아래 있었고 또한 다윗과 같은 특별한 인물들의 출입은 엄격히 통제되었다는 점에서 두번째의 견해가 타당성이 있다. 따라서 다윗이 골리앗의 머리를 예루살렘으로 가져갔다는 여기의 언급은 후대에 본서를 기록한 저자의 결과론적 진술임이 부명하다. 본서 저자는 이같이 의도적으로, 후일에 이스라엘의 수도가 된 '예루살렘'으로 적장의 머리를 가져갔다고 함으로써, 적국 블레셋에 대한 다윗 혹은 이스라엘의 완전한 승리를 강조하려고 했던 것이다.

'갑주는 자기 장막에 두니라' 여기서 '갑주'(켈리)는 문자적으로는 '기계' 혹은 '물건'이란 의미이다. 그러나 다른 문맥에서처럼 여기서도 '무기'(NIV)란 의미로 보아야 할 듯하다(14:1, 12, 20:4, 21:8). 그리고 여기서 '자기 장막'은 혹자들의 주장처럼 '여호와의 장막'을 가리킨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다윗의 베들레헴 집을 가리키는데, 그 근거는 여기서 '장막'(tent)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오헬'은 '거주지'를 가리키는 고대 어휘로서(Fay), 그 용례가 성경 다른 곳에서도 종종 나타나기 때문이다(4:10, 13:2:삼하18:17, 19:8, 20:1). 한편 이러한 사실은 후일 골리앗의 칼이 높(Nob)에 있던 여호와의 성막에 보관되었다는 본서 21:8, 9의 언급과 모순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후일 다윗이 블레셋 거인으로부터 자신을 건져내 승리케 하신 여호와의 영광과 명예를 기리기 위해 놉에 있던 여호와의 성막에 그 칼을 기념물로 바쳤을 것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가능한 추측이기 때문이다.

55 사울은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나아감을 보고 군사령관 아브넬에게 묻되 아브넬아 이 소년이 누구의 아들이냐 아브넬이 이르되 왕이여 왕의 사심으로 맹세하옵나니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하매

'군장 아브넬' 사울의 숙부 넬의 아들로서 사울과는 사촌 형제지간이다(삼상14:50, 51). 사울의 군장(軍長)이자 사울 가의 능력있는 무사로서, 사울을 보필하다가 사울 사후 다윗 가에 대항하기 위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옹립, 사실상 실권을 장악한다. 그러나 사울 왕의 첩 이스바와의 통간 사건으로 이스보셋으로부터 질책을 당하자 격노하여 다윗 가로 귀순하려고 한다. 그러나 귀순의 과정에서 다윗의 군장 요압의 계교에 걸려 살해당하고만다. 다윗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격분했으며 슬퍼했다. 다윗은 후일 아들 솔로몬에게 아브넬의 원수를 갚을 것을 유언하였다(삼하3:6-39, 왕상 2:5, 6). 한편 아브넬은 적어도 아들 하나 이상은 가졌던 것 같다(대상27:21).

56 왕이 이르되 너는 이 청년이 누구의 아들인가 물어보라 하였더니

'청년(엘렘)' 그 당시 다윗에게 적용되었던 '소년'(나아르)이라는 단어(35, 58절) 대신 사용된 이 단어는 다윗의 연소함을 특별히 강조한다(20:21, 22).

57 다윗이 그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그 블레셋 사람의 머리가 그의 손에 있는 채 아브넬이 그를 사울 앞으로 인도하니

'블레셋 사람의 머리가 그 손에 있는채' 고대의 전투에서 패배한 적장(敵將)의 머리는 승리의 기념물로서, 또는 전사의 업적으로서 흔히 베어졌고, 그리고 그것은 존경과 충성에 대한 표시로서 왕에게 바쳐지는 관례가 있었다.

58 사울이 그에게 묻되 소년이여 누구의 아들이냐 하니 다윗이 대답하되 나는 주의 종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이니이다 하니라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 대해서는 16:1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그러나 이같은 다윗의 대답만으로는 다윗 가문의 사회적 지위가 분명히 밝혀질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 문구 뒤에 다윗 가문의 혈통이나 사회적 신분 등에 관한 사울과 다윗의 긴 대화가 분명 있었는데, 여기에는 생략되어 있는 것으로 추측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18:1의 첫 문구는 그러한 추측을 충분히 가능케 한다. 사울과의 불편한 관계를 청산하고자 그의 사위가 되기로 작정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