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창1:1~5 성경에 나타난 첫 번째 돌파

LNCK 2023. 3. 10. 22:00

[BREAKTHROUGH] 3.The First Breakthrough (창 1:1-5) - YouTube

◈성경에 나타난 첫 번째 돌파            창1:1~5             *지난 회 보기 
[돌파시리즈 #3]

◑서론

창세기 1장을 오늘 전체적으로 살펴볼 텐데요. 
1~5절까지의 말씀이 첫날에 대한 기록이죠. 
첫째 날에 대한 기록인데 이 말씀들을 통해서 
부흥과 확장을 기대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들을 
또 함께 살펴보고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부흥과 확장"은 2015년도에 저희에게 주신 키워드죠.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가운데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불가능한 일들을 가능케 하시고, 기적을 이루시고, 
그래서 우리를 원하던 곳(소원의 항구)으로 인도하시는 그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기적을 행하시는 유일한 방법이 뭐라 그랬어요? 부르짖는 것입니다.
시 107편 기억나시죠.  [돌파시리즈 #2]    *지난 호 보기 click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어요. 
우리 인생에서 맞이하게 되는 여러 가지 다양한 상황들이 있습니다. 

인생을 절망가운데 밀어넣는 상황들, 
도저히 해결될 수 없어 보이는 문제들,
인도하심을 구하는 상황들, 
광풍을 만나는 일들 등  인생에는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지요. 

그런데 원인과 상황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어도 
모든 해결책은 하나로 귀결됐는데, 그 해결책이 부르짖어 기도하라는 거에요.

부르짖어 기도 했더니, 여호와께서 인생에게 기적을 행하시고 
그 난관에서 돌파를 이루시는 것들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015년 한 해 동안, 여러분들 가운데 실질적인 부흥과 확장의 역사들이 
경험되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2015년 연초에 의례적으로 추구하는 슬로건이 아니고,
구체적인 삶의 실제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제는 우리 내면적인 돌파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삶에서 실제적인 경험들이 될 수 있도록 추구해야 될 때입니다. 
'돌파'가 삶의 실체들이 되도록 추구해야 될 때에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이, 실제가 되는 것을 여러분이 경험하셔야 돼요. 
그것이 우리 신앙의 본질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은 무엇인가를 약속하시는데, 그 약속을 먼저 받아요. 
근데 이것은 기도하는 가운데 받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스토리들을 보시면 
하나님의 사람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 으로부터 비전을 받아요.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 으로부터 약속을 받아요.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 으로부터 언약을 받아요. 

그리고 나면 그 다음에 뭐가 이어집니까? 
그 다음에 이 사람의 여정들이 이어져요. 

아브라함, 모세, 다윗, 바울의 스토리를 봐도 전부 다 동일해요. 
하나님 으로부터 말씀을 받고 약속을 받으면 
그것이 금방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약속을 받은 다음에는, 그 약속을 이루어가는 여정이 있다는 거예요. 
이루어가는 여정이 있는데 
이 여정가운데 부르짖어 기도 하고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할 때 
결국에는 그 약속이 실제가 되는 것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약속이 그냥 단순한 약속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경험이 단순한 어떤 종교적인 체험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그렇다면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죠. 
그저 종교적인 체험이고, 우리 심리적인 현상에 불과하겠지요.

근데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셨던 비전과 약속들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실체가 되는 경험들을 하게 돼요. 
그것이 신앙의 본질이라는 거에요. 

아브라함의 믿음도 그런 믿음이었고, 모세의 믿음도 그런 믿음이었고 
다윗의 믿음도 그런 믿음이었어요. 
하나님의 약속이 실체가 되는 여정이 있다는 거에요. 

2015년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약속의 말씀을 주셨다면 *2015년 설교
그것이 1~2년 안에 실체가 되어야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2015년 절반이 지난 이 시점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될 것은 뭐냐면 
그 동안 우리가 어떤 내적인 부흥들, 내적인 확장들, 또 하나님의 약속들 
그것들을 놓고 부르짖어 기도 했다면 
이제는 그것이 실체가 되도록(돌파가 일어나도록) 기도하셔야 될 때입니다. 

그래서 2015년 한 해가 끝나기전에 
크고 작은 하나님의 돌파들을 경험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어떻게 거기에 대해 여러분, 기대들이 있으세요? 
하나님의 약속이 실체가 되는 것에 대한 기대들이 있으세요? 

그래서 금년 12월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막 간증들이 있어서 
서로 간증하겠다고 하는 이런 일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돼야지 정상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니까, 크고 작은 돌파들을 기대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도전합니다. 

그런데 부흥과 확장은 반드시 그 시점이 있다 그랬어요. 
어떤 돌파가 일어나는 시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은근슬쩍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전혀 안 될 것 같아 보이고, 전혀 불가능할 것 같아 보이고, 
그런 상황가운데 하나님께서 돌파를 이루신단 말이에요. 
이게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더라고요. 

하나님 뭔가 약속하시잖아요. 
그럼 그 약속이, 그냥 이렇게 점진적으로 조금씩 조금씩 개선되고 
좋아지고 좋아져서.. 어느 순간에 가보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졌더라... 
이렇게 되는 일이 거의 없어요. 

하나님의 약속은 대부분 결국 어떻게 성취되냐면 
그 약속이 성취되기 직전까지도 가능성이 안 보여요. 
그 약속이 성취되기 직전까지도 조그만 불빛도 안 보여요. 
아무 소망도 없어 보이고, 아무 가능성도 없어 보이고, 
절대로 불가능할 것 같아 보이고... 
그런 상황가운데 백성들이 믿음을 발휘하길 원하세요. 

믿음으로 부르짖기를 원하세요. 그래서 거기서 하나님께서 
이 믿음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돌파를 행하신단 말이에요.   

거기서 돌파가 일어나면서, 그 다음에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것들이 성취되는 
부흥과 확장이 일어나는 일들이 성취되기 시작해요. 

그래서 돌파가 일어나고 난 다음에는 
거기서부터는 점진적으로 점점점 약속이 성취되어 갈 거에요. 

그래서 처음엔 조그만 규모지만, (그 실체가 전혀 보이지 않지만)
점점 커지고 커지고 커져서 마지막에 가보면 
어마어마한 돌파를 보게 되는.. 부흥을 보게 되는.. 
이런 역사들이 일어날 거예요. 

그렇지만 돌파가 일어나기 전까지 점진적으로 
이렇게 점점 상승하다가, 어느 시점에서 돌파가 이어지는 게 아니라는 거에요. 
처음에는 전혀 불가능해 보이다가 
한순간에 뻥하고 돌파가 일어난단 말이에요. 
(점진적 상승은 그 후에 일어나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 이걸 (돌파) 놓고 부르짖으셔야 돼요. 
그래서 이 약속을 보기 위해서 필요한 건 뭐냐면, 믿음이 필요한 거예요. 믿음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는 거에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돌파를 볼 수 없다는 거에요. 
그 직전까지도 깜깜할 거예요. 
그 직전까지도 아무 소망도 안 보일 수도 있고 
그렇지만 그 가운데 백성들이 믿음을 가지고 부르짖어 기도하면 
인생에게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돌파가 일어난단 말이에요. 

이 일들을 여러분, 기대하시고 경험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돌파를 보지 못하는 이유는 
약속을 받아야. 
그런데 문제는, 이 여정가운데 믿음으로 끝까지 걸어갈 뚝심(인내)들이 없어요. 

걸어가다가 조금만 약속이 안 이루어지는 것 같고 
조금만 더디 이루어지는 것 같으면 
'아이고 그건 내가 잘못 들었나보다..' 
아니면 '뭐 그건 안 될래나 보다'

뭐 온갖 이유들을 둘러대면서 거기서부터 포기해요. 
그래서 더 이상 믿음의 걸음을 걸어가는 것들을 포기하고 
부르짖는 것들을 포기하고.. 영적으로 침체되고 낙담하고 
그 결과, 하나님의 약속이 안 이루어지는거에요. 

이 하나님의 약속을 보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면 
믿음의 뚝심들이 있는 사람이에요. 

돌파가 일어날 때까지 믿음의 걸음을 포기하지 않는 거에요. 
비전을 받았고, 하나님이 약속을 주셨으면 
그것이 성취될 때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돼요. 

그렇게 가다 보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돌파를 이루세요. 

여러분 돌파를 놓고 기도하시는 제목들이 있습니까? 
가족의 구원이라든지, 아니면 재정적인 문제들, 질병들.. 포기하지 마세요. 
안 이루어진다고 포기하지 마세요. 가능성 없어 보인다고 포기하지 마세요. 
그 직전까지 계속 그런 상황일 거예요. 

그러나 그 임계점을 딱 통과하는 순간이 오는데 
부르짖는 가운데 (임계점을) 통과하는 순간이 오는데 
그 때 하나님은 놀라운 돌파 들을 보게 하실거에요. 

이런 돌파들을 경험하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자 창세기에 대해서 오늘 살펴보려고 하는데 
창세기가 사실은 제가 돌파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 
가장 처음에 했어야 되는 설교 중의 하나입니다. 

창세기 1장은, 성경에 기록된 첫번째 돌파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이 'The First Breakthrough 첫번째 돌파' 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첫번째 돌파일 뿐만 아니고 
인류 역사에 나타난 첫번째 돌파죠. 

그래서 오늘 이 말씀들을 살펴보려고 하는데 
창세기1장은 여러 면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모든 만물의 시작에 대한 책이기도 하지만 
역시 동일하게 '돌파의 시작'에 대한 책이에요. 

그래서 창세기 1장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우리 인생가운데 세상에 돌파를 행하시는지... 
그 돌파의 대상은 뭔지... 돌파의 결과는 어떻게 일어나는지... 
하는 모든 돌파에 대한 신학적인 기초를 제공하고 있는 책이 창1장입니다. 

그래서 오늘 창1장을, 우리가 '돌파'라고 하는 관점에서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돌파를 행하시고, 
무엇을 돌파하시고, 그래서 그 결과 무엇을 이루어내시는지... 

이런 것들을 살펴보면서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태초에 일어났던 돌파뿐만이 아니라 
동일한 돌파가 우리 삶 속에서 일어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 같이 
천지개벽 하는 돌파가 우리 인생가운데 있기를, 여러분은 원하세요? 

무에서 유가 만들어지는 돌파가 일어나기를, 여러분은 원하세요?

어둠 가운데 빛이 있으라 했더니 
환한 빛이 들어오는 돌파가 일어나기를, 여러분은 원하세요? 

이 태초에 일어났던 첫번째 돌파는, 태초에만 있었던 돌파가 아니라 
그 이후에도 하나님이 반복적으로 행하시는 모든 돌파의 모델이고요. 

그리고 하나님은 그 돌파하시는 일을 오늘날까지 멈추지 않으시고 
우리 인생가운데도 동일한 돌파들을 행하신다는 거에요.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또 이 말씀을 살펴보면서 
우리 안에 '하나님, 태초에 있었던 그 하나님의 돌파가 
오늘 이 시간 우리 삶 가운데도 재현되게 해주십시오!' 

이 마음을 가지고 기도 하고 함께 나갔으면 좋겠어요. 

창1:1~2절은, 우리 하나님에 대한 아주 중요한 속성을 계시하고 있는데 
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모든 속성 중에 제일 중요한 속성이라고 믿습니다. 

그건 뭐냐면, '우리 하나님은 돌파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거에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면, 우리 하나님은 무기력하게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거에요. 

혼돈과 공허와 암흑의 상황, 보시기에 좋지 않았던 상황이 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보시기에 좋지 않았던 상황'을 
묵인하고 그냥 넘어갈 수 없으셨어요. 

우리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좋지 않은 상황'을 참으실 수 없는 분이세요. 
그래서 이 보시기에 좋지 않은 상황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로 바뀔 때까지 
하나님은 참으실 수 없는 분이시라는거에요. 

우리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지 않은 상황이 있으면 
'어휴, 그냥 힘드니까 대충 넘어가자! 그 정도야 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묵과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거에요.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무기력한 분이 아니시라는 거에요. 

우리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시냐 하면 
'보시기에 좋지 않았더라' 가 있으면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될 때까지, 멈추시지 않는 분이세요.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돌파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거에요. 

여러분, 성경을 살펴 보십시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백성의 죄를 향해 돌격하시는 
죄를 돌파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시내산에서 우상숭배 했을 때, 출32장)

또 복음서에 하나님은 죽음을 참으실 수 없어서 부활을 행하심으로 
죽음을 돌파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애굽을 돌파하신 하나님이시고,  *10재앙
바알을 돌파하신 하나님이시고 
죽음을 돌파하신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마음 속 깊은 장벽까지 돌파하시는... 

끊임없이 도전하고 또 도전하고 
그래서 어둠과 공허와 혼돈을 참으실 수 없는, 
돌파의 하나님이시라는 거에요.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씀 속에 
얼마나 엄청난 에너지가 담겨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태초에 하나님께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보시기에 좋아하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기에 창조의 질서를 부여하시고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를 행하시기로 결정하시고 
그래서 인간의 역사 가운데,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의 의지와 힘이 돌파하여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이게 창세기의 역사죠. 
이 일에 여러분, 얼마나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에너지가 
그 안에 잠재되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천지를 창조하는데 얼마나 큰 에너지가 들까요? 
여러분 천지창조는 고사하고요, 저희 집에 그 집안 대청소만 한번 하려고 해도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저는 청소를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닌데, 집사람은 청소를 너무너무 사랑해요. 

어떨때 대청소하자고 이렇게 조를 때가 있죠. 대청소는 정말 엄두가 안 납니다. 
청소도 엄두가 안 나는데, 대청소는 정말 엄두가 안나요. 
집안에 있는 온갖 (먼저의) 혼돈과 공허와 어둠과... 이게 온 집안을 덮고 있어요. 

그러면 이것을 이제 바로잡으려고 하면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드는지 아시잖아요. 
집안 대청소 하나 하는 것도 얼마나 큰 에너지가 드는지요.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 
집안 하나 바로잡는 수준이 아니고 
온 우주의 질서를 바로잡기로 결단하셨다는 거에요.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그 안에 있는 이 혼돈을 바로잡으려고 하면 
이건 집안 청소하는 거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일이죠. 

그 안에 공허함을 생각해보세요. 
온 우주를 텅텅 빈 이 공허함! 
거기에다 뭔가 만들어서 채우시려고 하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창조하셔야
그 안을 채우시겠어요. 

여러분, 이 지구 위에 창조해 놓으신 것만 봐요. 
얼마나 많은 것들을 창조하셨는지요. 

그런데 이런 지구 같은 별이, 우주에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아요. 
우리 지구가 속해 있는 은하계 하나 안에만 해도, 10의 22승 정도의 별이 있고,
이런 은하계가 다시 우주안에 10의 22승 정도의 은하계가 있는데 
그건 태양의 갯수만 센 거에요. 10의 44 승계가 있는 거지요.

이 많은 것들을 창조하시려면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있어야 될지 
생각해보세요. 우리 하나님은 에너지로 가득 차 있으신 분이세요. 
보시기에 좋지 않은 것을,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바꿀 수 있는, 
변화시키는 에너지! 

우리 하나님의 속성이 드러날 때까지 
모든 만물을 '보시기에 좋았더라'로 변화시켜 가시고자 하는 에너지로 
가득 찬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묵과하실 수 없는 분이세요. 
질서에 벗어나는 것, 하나님의 속성에서 벗어난 것을 
그냥 두고 보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시죠. 

그것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아질 때까지 
절대로 포기할 줄 모르시는 분이시고 
절대로 멈출 줄 모르시는 분이시고 
그 일을 끝까지 이루어 내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세요. 

그러므로 여러분, 빨리 항복하세요. 
여러분의 삶에, 그 하나님이 집요하게 달라붙으실 겁니다. (택하신 자녀라면)

여러분의 삶 가운데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않았더라' 가 
'보시기에 좋았더라' 가 될 때까지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거에요. 

그런데 이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우주의 만물이 하나님의 속성(보시기에 좋았더라)으로 드러날 때까지 
포기할 줄 모르시는 그런 에너지로 가득한 분이신데 
그런 상상할 수 없는 에너지를 가지신 분이세요. 

그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란 말이에요. 
그러므로 여러분, 빨리 항복하시고 빨리 포기하세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될 때까지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셔요. 

그래서 빨리 우리 인생가운데 변화가 일어나야 되고 
빨리 이 돌파가 일어나야 (여러분의 삶이) 편해요. 


창세기 1장이 우리에게 계시해주고 있는 첫번째 진리는 뭐냐 하면 
우리 하나님 은요. 묵과하시지 않으시는.. 
참으실 수 없는 '돌파의 하나님'이시라는 거에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멈추지 않으시는 하나님!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돌파하실까요?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자, 세 가지를 얘기합니다. 태초에 세 가지 돌파가 있었는데 
첫째 혼돈의 돌파가 있었고요. 
둘째 공허의 돌파가 있어요. 
셋째 흑암의 돌파가 있었다는 거에요. 

이 세 가지 돌파가, 저는 모든 성경이 얘기하는 돌파의 
기본적인 돌파라고 믿습니다. 
그 이후에 나오는 모든 성경의 이야기들도 
결국 이 세 가지 중에 한 가지가 돌파되는 거고, 

아니면 세 가지 중에 몇 개가 이렇게 섞여있는 것이 돌파되는 거고, 

오늘날 우리 인생가운데 기대하는 돌파도 
이 세 가지 중에 하나, 둘, 또는 세 가지가 돌파되는 거라는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돌파하시나?
'돌파의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그럼 무엇을 돌파하십니까?

우리 인생가운데, 우리가 돌파를 기대한다고 했는데 
무엇이 돌파되기를 기대해야 되는 건가요? 

이 세 가지 중에 하나가, 또는 둘, 셋이 돌파되는 거라는 거죠.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혼돈을 돌파하시는 하나님이시고, 
공허를 돌파하신 하나님시고, 흑암을 돌파하시는 하나님이세요. 

사실은 이제 그 안경을 가지고 보면 
6~10절까지는 혼돈의 돌파

혼돈가운데 있는 세상을,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누시고
하늘과 땅을 나누시고, 천하의 물을 한 군데로 모아서 
물의 땅 물과 땅의 경계를 정하십니다. 이게 뭐하시는 거예요?

혼돈 가운데 질서를 부여하시는 거잖아요. 
이게 혼돈의 돌파를 행하시는 이야기라고요. 

모든 것이 다 mix up 돼 있고 혼돈되어 있는데 
이걸 하나님께서 다 정리하시는 거에요. 
그래서 질서를 부여하신 단 말이에요. 

11~28절까지는, 공허를 돌파하신 얘기에요. 
하나님께서 각종 나무와, 각종 새들과, 물고기와, 씨 맺는 것, 열매 맺는 것.. 

이것은 텅 빈 공간을 채우시는 하나님의 창조의 얘기잖아요. 
온갖 풍요로움과 온갖 각양각색의 피조물들로 
하나님께서 공허를 채우시는 이야기란 말이에요. 
그래서 11~28까지는 '공허의 돌파'를 기록하고 있어요. 

또 3절과 14~19절은, 흑암, 어둠의 돌파를 기록하고 있어요.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고 
하늘이 광명체를 만드시고 그래서 밤과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어둠을 밝히시는 얘기란 말이에요. 

그래서 창1장의 내용은, 이 3가지 이야기를 풀어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태초에 어떻게 <혼돈>을 돌파하셨는지, 
태초에 어떻게 <공허함>을 돌파하셨는지, 
태초에 어떻게 <흑암>을 돌파하셨는지... 
이것이 창세기 1장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돌파가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거예요. 오늘날까지! 

이 돌파의 이야기는, 창세기를 지나서 
모세의 공허한 인생 가운데 돌파를 행하시고 
혼돈된 야곱의 인생 가운데 돌파를 행하시고 
소망없는 어둠 속에 있던 바벨론 이스라엘 포로에게 다시 돌파를 행하시고 

타락한 인간 역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역사를 돌파하여 들어오시고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까지 돌파하여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돌파는 오늘도 계속 현재 진행형 이라는 거에요. 

그래서 저와 여러분의 삶까지도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도 태초에 있었던 돌파이야기가 
계속 이어져 오고 있는 거에요.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 삶가운데도 이렇게 돌파하기 원하세요. 

우리의 혼돈과 공허와 어둠을 돌파하기 원하신다고요. 
이 돌파가 일어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제가 자세히 풀어서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이 돌파되어야 할지를 명확히 모르고 있다'는 거에요. 

제가 사람들을 만나서 이렇게 물어보거든요. 
'특별히 기도 하시는게 있습니까? 
우리가 돌파를 놓고 기도하는데, 어떤 돌파를 놓고 기도하십니까?' 

그러면 많은 경우에 대답이 추상적이에요. 
그 이야기는 뭐냐면, 자기가 뭐를 돌파해야 할지를 잘 모르는 거에요.
그걸 모르니까 갈급함도 없는 거에요. 

여러분 오늘 특별히 기도하실 때는 
내가 무엇이 돌파되어야 될지를, 성령께서 조명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혹시 돌파가 필요없으세요? 아니잖아요. 
다들 돌파에 갈급함을 가지고 여기까지 왔잖아요. 

인생에 다 돌파해야 할 장벽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자기가 무엇이 돌파해야 되는지를 잘 몰라요. 

그것이 흑암인지, 공허인지, 혼돈인지... 뭐 이것도 모르고 
그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건지도 잘 몰라요. 그래서 부르짖지 않는 거예요. 
여러분, 이래서는 돌파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돌파되어야 될지를, 성령께서 조명해 달라고 기도하세요. 
'하나님, 제 삶가운데 구체적으로 어떤 돌파가 일어나야 됩니까? 
하나님 가르쳐 주십시오. 성령님 계시해주십시오!' 
이거 가지고 먼저 기도해야지요. 

그래서 우리 안에 돌파가 일어나고 있지 않은, 
공허가운데 있는, 혼돈가운데 있는, 어둠 가운데 있는 
모습들을 성령께서 하이라이트 시켜서 보여주시고 
그랬을 때 우리 안에 갈급함이 나오는 거잖아요. 

'아이고 하나님, 이게 돌파돼야 되는데... 
내 삶 가운데 어둠이 물러나야 되는데... 
내 삶 가운데 공허가 채워져야 되는데... 
내 삶 가운데 혼돈이 돌파돼야 되는데...' 
그 갈급함이 나올 때 부르짖어 기도하지 않겠어요?
그랬을 때 거기 돌파가 일어나는 거지요. 

돌파의 목표가 명확하지 않아요. 
여러분, 아무리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어도 
아무리 강력한 미사일을 가지고 있어도 
어디를 돌파해야 될지 목표물을 정확히 지정하지 않으면 
돌파가 안 일어나는 거에요. 

강력한 미사일을 쏠때, 어디를 무너뜨려야 되는지 
목표물을 명확하게 좌표를 줘야 
그 좌표에 미사일을 쏴가지고 무너뜨리는 거죠.

근데 좌표가 주어지지 않으면, 아무리 미사일에 강력해도 쏠데가 없어요. 
마찬가지로 우리 하나님께서 아무리 강력한 능력을 부으셔도 
우리가 뭐가 무너져야 될지 모르고 있으면.. 그럼 무너뜨릴 수 없는 거에요. 

그래서 오늘 밤에는, 특별히 성령께서 내 안에 어떤 것들을 무너뜨리려고 하시는지 
어디에 돌파가 일어나야 되는지... 이거 놓고 기도하십시오 
그걸 위해서 계속 부르지 저기도 하세요. 

멀지 않은 시간 가운데 하나님께서 돌파를 이루실 거에요. 


자 이 세 가지 내용을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해 드릴게요. 
그래서 혼돈의 돌파, 공허의 돌파, 어둠의 돌파!


◑1. <공허의 돌파>가 일어나야 됩니다

태초의 돌파는 공허의 돌파였어요. 
공허는 히브리어로 보면 '보후'라고 하는데 
이것은 무슨 뜻이냐면 '텅 빈 상태, 아무것도 없는 상태' 라는 의미에요. 

그래서 공허의 돌파, 보후의 돌파는 뭐냐 하면 
이 텅 빈 상태를 돌파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풍요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부자이실까요, 가난하실까요?

우리 하나님은 모든 걸 다 가지신 분이세요. 부자에요. 
그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부자가 되길 원하실까요, 
가난한 자가 되길 원하실까요? 여기서 이제 조금 헷갈리죠. 

신학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그래서 부자가 조금 오해의 소지가 있다면, 표현을 바꿔 봅니다. 

하나님은 풍성함, 풍요로움을 원하실까요? 아니면 정말 황폐함을 원하실까요. 
네, 풍성함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황폐함, 열매없음을 원치 않으시고, 
풍성함을 원하세요. 우리 하나님은 부요한 분이세요. 풍성한 분이세요. 
당신의 백성들이 풍성하고 더 풍요롭길 원하시는 분이세요. 

재정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풍성한 부자가 되기를 원하세요. 
믿으십니까? 

그러면 어떤 성도님은 '목사님, 변하셨네요! 
어느 순간 기복신앙으로 돌아서셨네요...' 라고 하지 마십시오.

저는 기복신앙이 아니고, 우리 하나님은 풍성함을 원하세요. 
이게 성경적이에요. 

그럼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주시고 싶고, 너무 주시고 싶은.. 
그런 재정의 축복이 있는데 
이것을 정말 막 마음을 다잡아가면서, 너무 아프지만 
주시기를 보류하실 때가 있어요.

왜냐면, 이거를 주면 우리가 영적인 풍요로움을 잃어버리는 거예요.
그 준비가 안 된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물질을 주시고 싶어도 보류하세요. 
왜? 그걸 주면 우리가 영적으로 죽으니까요. 
그래서 그걸 잠깐 보류하실 수 있어요. 

그러니까 풍요로움에도 등급이 있는 거예요. 
-영적인 풍요함 
-그 다음에는 혼적인 풍요함 
-그 다음에는 육적인 풍요함.. 등의 등급이 있는데 

이 하등급의 풍요함을 누리는데 그냥 정신이 팔려서 
더 중요한 풍요로움을 못 누리게 되면, 그럼 이건 어리석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것을 금지시킬 수는 있어요. 

그렇지만 우리가 영적인 풍요로움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영적인 성숙함이 준비돼 있으면 
하나님이 재정적인 풍요로움을 주십니다. 
그걸 다룰 수 있을 만한 사람이 되면 주신다고요. 

우리 하나님은 '재정의 돌파'를 기뻐하는 분이십니다.
여러분들이 '빈자의 영'을 갖기를 대체로 원하지 않으십니다.

근데 어떤 사람은 자기의 부르심 자체가 빈자인 사람도 있어요. *구약의 레위인
그건 특별한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자녀를 많이 낳기를 원하세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녀를 낳지 못하게 하신 사람이 있다고 했잖아요. 

태어날 때부터 고자된 자도 있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스스로 자녀를 낳지 않는 사람도 있다고 그랬거든요. 
특별한 부르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세요. 
그러니까 이것(가난의 영성)을 일반화시키면 안 돼요.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부요함을 주시는 분이세요. 
거기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돼요. 

그래서 이 자리에 혹시 가난한 것에 만족하시는 분이 있으면,
거기에 대한 특별한 소명이 있으셔야 돼요. 
'나는 이 가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특별한 소명이 있는 사람은.. 그렇게 해야 돼요. 

그리고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기독교 역사에 있었죠. 
성프란시스 .. 이런 분들은 거지로 살면서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어요.
돈의 부요함 보다 더 풍성한 부요함이 있다고 하는 걸 보여주셨죠.

그런 부르심이 있는 분들은, 그 길을 추구하셔야 돼요. 
그런 분들은 재정에 대해서 아무리 부르짖어도, 재정의 돌파가 안 일어나죠. 
그런 분들은, 자족하는 마음을 달라고, 
가난가운데서도 만족하는 마음을 달라고 부르짖으셔야 돼요. 


그런데 그런 은사가 아니고, 그런 부르심이 아니라면 
재정돌파를 위해서 기도하세요. 풍요로운 하나님이라는 걸 기억하세요. 

하나님은 공허를 좋아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거에요. 
우리 하나님은 텅 빈 우주를 바라보면서 '아름답다!' 하시는 분이 아니세요. 
텅 빈 우주를 바라보면서 '이것은 좋지 못하다!' 이렇게 말씀하세요.

그래서 그 가운데 그 창조해 놓으신 각종 피조물들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 공허를 못 견뎌 하셨는가요! 

그 만들어 놓으신 수많은 피조물들을 보세요. 
얼마나 기기묘묘한 동물들이 많은지요!

개미핥기 라는 동물 보셨어요? 
하나님이 그거 만드시려고 얼마나 연구를 많이 하셨을까요! 

악어만 해도 여러분, 종류가 백 가지가 넘는 거 아세요? 
그거 다 디자인 하시느라고... 왜 하나님은 이런 수고를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공허를 견디지 못하시는 분이시라는 거에요. 

빈곤과 가난을 견디지 못하시는 분이시라는 거에요.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은 풍성함을 주시기 원하세요. 
이 '공허의 돌파'가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가난의 돌파'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빈곤의 돌파'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요한삼서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영혼이 잘되는 거 하나님이 원하시고요. 
우리 삶가운데 풍요로움이 있기를 원하신다는 거에요. 

1 자 우리 안에 첫째 영적인 공허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충만하지 못한 것, 영적으로 빈곤한 것, 가난한 것 
이게 돌파되기를 원하세요. 

그래서 계3:17절에 라오디게아 교회에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 하는도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는 가난과 빈곤을 돌파하기 원하시는 분이신데 
풍요로움을 주기 원하시는 분이신데 
첫번째 우선순위가 있다는 거에요. 그건 뭐에요? 
영적인 풍요로움이 있기를 원하신다는 거에요. 

그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면, 육적인 풍요로움은 있었던 것 같아요. 
'나는 부자라' 하는 거 보니까 돈이 많았던 것 같아요.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도다' 아마 마음에도 뭐 기쁨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 마음과 육적으로는 풍요로움이 있었을지 몰라도 
거기서 예수님은 뭐라고 그랬어요?
'네가 실제로는 가난한 것과, 가련한 것과, 곤고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는 거예요.

우리 하나님이 첫번째로 돌파하기 원하시는 것은 
영적인 빈곤을 돌파하기 원하세요. 영적인 가난을 돌파하기 원하세요. 

영적 가난함이 무엇입니까? 
계3:17절에서 이 말씀을 했는데 바로 직전 구절을 보면 
왜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알게 됩니다.

3:15~16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네 안에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신앙이 있다는 거에요.
여러분 이게 영적인 궁핍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신앙의 뜨거움이 있으세요?
주를 향한 열정이 있으세요?

정말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내가 생명을 걸겠다..고 하는 불이 있으세요?
이 하나님을 향한 열정도 그저 그렇고.. 
강력한 은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역에 열매가 큰 것도 아니고.. 마음에 불도 없어.. 
그렇다고 교회를 떠나지는 않아요. 열심히 예배는 나와요. 

그런데 그 안에 뜨거운 게 없어요. 
이게 영적인 가난, 영적인 궁핍함 이라는 거예요. 
그걸 '네가 자기를 지금 모른다'는 거에요. 

평생을 그러고 살고 있어요. 목사인 제가 봐도 속터져 죽겠는데 
하나님은 어떠실까요? 하나님은 저보다 더한 표현을 쓰셨더라고요. 
'토하여 버리겠다' 계3:16

이게 영적인 궁핍함 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여러분 돌파하시는 분이라고 그랬어요. 
공허를 참고 보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시죠. 

우리 안에 이런 영적인 곤고함이 있는 걸 
하나님은 토해버릴 지경이라는 거에요. 그걸 용납할 수 없다는 거예요. 

영적인 가난을 돌파하는 분이세요. 영적인 충만함으로 돌파하십니다. 
복음을 향한 열정으로 돌파하시고, 성령충만함으로 돌파하시고, 

그래서 과거에 우리 선배들은요. 이것을 '불받는다'라고 했어요.
정확한 표현인 것 같아요. 

그래서 불이 우리 영혼가운데 그냥 가득해야 돼요. 
불이 있으세요?

옛날에 1970~80년대는, 금요일에 모여서 한번 기도하기 시작하면 
진짜 불이 왔어요. 그런데 여러분, 요즘 불받는 게 있으세요?
우리 영혼가운데 막 뜨거워지는 게 있어요?

그래서 불받으면 거기서 바로 우리 헌신했어요. 
'내 평생 주님 위해 살겠습니다. 제 생명을 주님께 바치겠습니다!' 
이거 당연한 당연한 고백으로 나왔는데 
요즘은 이런 고백이 없어졌어요. 

다들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아니요. 여러분 이렇게 되면 안 된다는 거에요. 

우리 가운데 일어나야 될 첫번째 돌파는 
'보후'의 돌파, 공허의 돌파!   *보후 : 히브리어로 공허

거기에 하나님의 풍성함이 임해야 돼요. 불이 임해야 돼요. 불이! 
이 영적 보후의 돌파야말로 다른 모든 돌파의 기초에요. 

이 돌파가 안 일어나면, 그 위에 다른 돌파는 안 일어납니다. 
제가 예언할 수 있어요. 다른 돌파는 절대로 안 일어나요. 

왜 안 일어나는 줄 아세요? 재정의 돌파?
영적으로 지금 다 가난하고 말라 죽게 생겼는데 
재물을 왕창 갖다 안겨주면, 그 사람은 뭐야? 죽으라는 거죠. 

하나님이 이루시는 돌파에 가장 첫번째 기초는 뭐냐면 
우리 영혼의 공허함이 돌파돼야 돼요. 
우리 영혼의 미지근함이 돌파돼야 돼요. 

그래서 그 안에 정말 불로 가득 차야 돼요. 
'내가 주님 나라 위해 살겠습니다. 내가 주의 영광 위해 살겠습니다!'
이 불이 있어야지요! 이 영혼의 충만함이 있어야지요! 

영원히 그냥 텅 비어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영혼이 비쩍 메말라 있는 상태에서,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고 
그런 상태에서 다른 돌파가 일어나겠냐고요? 

그래서 모든 돌파의 기초, 
그 위에 하나님이 이루실 돌파를 세울 수 있는 든든한 기초가 있다는 거에요. 
그건 바로 영적인 풍성함이죠. 

내 안에 영적인 풍요로움이 있냐는 거에요. 
내 안에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불로 가득 차 있는 이 돌파가 있냐는 거에요. 

여러분의 영혼은 텅 빈 상태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과 불로 가득 차 있습니까? 
이거부터 질문해야 돼요. 

그래서 뭐가 돌파되어야 될지 모르시는 분들은, 이거 돌파해야 되는 거예요. 
여기서부터 돌파가 일어나야 돼요. 

그래서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 
'하나님, 내 영혼이 왜 이렇게 식었습니까? 
하나님, 내 영혼 가운데 다시 한 번 불이 임하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내 영혼 가운데 다시 한번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게 해주십시오. 
내 영혼 가운데 다시 한 번 하나님으로 충만케 하여 주십시오!' 
이 부르짖음부터 나와야 되는 거예요. 

과거 하고 비교해 보세요. 여러분 영혼의 온도가 떨어졌어요/ 올라갔어요?
조금이라도 떨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것부터 돌파해야 돼요. 이거부터! 
'내 안에 하나님, 불이 다시 한번 임하게해 주십시오!' 
내 인생의 최고의 순간은, 영적으로 최고의 순간은
오늘 지금 이어야 해요.
내 인생의 영적으로 최고의 피크는, 오늘 지금 이어야 돼요!'

'하나님, 내가 왜 내리막길에 있습니까?' 
피크가 아니라는 말은, 지금 내리막 길에 있다는 뜻이잖아요! 
오르막길에 있어야지요. 

오르막길에 있는 사람은 매일매일 신기록 갱신하는 거죠.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내일보다 모레가 
매일매일이 피크가 돼야지요!
거기서부터 돌파가 일어나야 돼요. 아멘! 

오늘이 여러분 인생에 피크가 되도록 하십시오!

어제의 승리가 오늘의 승리를 보장해 주는 게 아니에요. 
내가 전쟁해서 10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다 승리해봤자 뭐 해요? 
오늘 전쟁에서 지면 잡혀 죽는 건데! 안 그래요? 
전쟁에서 한 번 지면 잡혀 죽는 거죠. 

어저께 내가 승리했다고 해서, 오늘 자동적으로 승리하는 거 아니라고요. 
여러분들이 과거에 아무리 여러분들이 뜨겁고 뭐 어쩌고 저쩌고 다 했어도... 
과거의 훈장들 다 떼 내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영성이 내 인생에 피크가 되어야 합니다.

2 마음의 공허

이건 마음이 가난한 게 아니고, 마음이 황폐한 거죠.
마음에 기쁨이 없고, 즐거움도 없고, 만족도 없고, 
슬픔과 고통과 두려움과 외로움과 불안.. 이런 걸로 가득한 상태! 
이거 하나님이 돌파 하신다는 거예요. (여기에 대해선 다음에 자세히 살펴봅니다)

3 육체의 공허, 외적인 공허  (영적인 공허의 반대 개념) 
질병이 있다든지, 물질적인 가난이라든지, 
사역에 열매가 없는 것, 교회가 부응하지 못하는 것, 
하여간 육적으로 보이는 풍성함이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도 하나님은 돌파하시는 분이시라는 거예요. 
텅빈 공허를 좋아하는 분이 아니시라는 거예요.

여러분 삶을 돌아보십시오. 비어 있습니까, 아니면 차 있습니까? 
열매들이 풍성해요? 계속 부흥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외적 삶의 영역에도 텅 비어 있다면, 이거 놓고 기도하세요. 
이거 놓고 거기에 돌파가 일어나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 공허함을, 텅 빈 것을 풍요로움으로 채우실 거예요. 

◑2. 두 번째 돌파는 <혼돈의 돌파> 입니다.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혼돈은 히브리어로 '토후'에요. 
그 문자적인 뜻은 뭐냐면 '형태가 없는 formless' 이란 뜻이에요. 
형태가 없으니까, 질서가 없는 이런 뜻도 되죠. 

질서를 잡아가고, 형태를 만들어 봐야 되는데 
그렇지 않고 그대로 버려져있는 상태.. 이거를 '혼돈, 토후'라고 해요.

자 그렇다면, 형태를 갖추려면 어떻게 되어야 돼요?
형태를 만들려는 의지와 힘이 있어야 돼요.

엔트로피의 법칙 알지요?
가만히 놔두면 무질서를 향해서 가게 되지요.
이게 질서를 향해 가려면 에너지가 들어가야 되거든요.

그래서 이게 가만히 놔두면 엔트로피가 증가된다고요.
엔트로피를 낮추려면 에너지가 들어가야 되죠.

누군가 이것을 내가 스스로 개혁하겠다고 하는 
의지와 에너지를 가지고 개입을 해야 
거기서 형태가 생기고 질서가 잡히는 거지 
가만 놔두면 계속해서 혼돈이 되는 거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혼돈을 돌파하는 분이시라는 거예요. 

우리 인생에도 말이에요. 우리 인생의 형태, 모양을 빚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어요.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의지가 있어요. 
이걸 destiny 라 그럽니다. 작정이죠.

그런데 이 계획과 의지가 실제로 실체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개입이 실제적으로 이루어져야 되는 거죠. 
자연스럽게 되는 건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아주 유명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토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토기를 만들려고 할 때 
어떤 토기를 만들지, 아이디어를 갖고 있을까요/ 안 가지고 있을까요? 
가지고 있지요. 

그래서 그 토지에 대한 그림이 자기 머리 속에 있어요. 
그 토기에 대한 어떤 형태가 머리 속에 그려져 있어요. 

그게 데스티니 라는 거예요. 
그 진흙의 데스티니는 토기장이의 머리 속의 이미 있어요. 

'너는 이런 모양으로 빚어져라, 너는 접시가 될 거야, 너는 컵이 될 거야' 
그 데스티니가 토기장이의 머리 속에 있어요. 

그렇지만 그것이 실제로 형태를 갖추려면 
토기장이의 의지와 힘이 개입되어야 되는 거지요. 

그래서 진흙을 가지고 주무르고 돌리고 뜯어내고 만들고 
이 실질적인 그 의지와 힘이 개입 됐을 때 
토기장이의 머리 속에 있었던 그 그림이 실체가 드러나는 거죠. 

이게 뭐냐면 '토후(혼돈)의 돌파'라는 거예요.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그림이 있으세요. 태초부터 가지고 계세요. 
'너는 그릇으로 지음 받았어, 너는 컵이야!, 너는 접시야, 
또 누구를 밥그릇, 국그릇, 된장 그릇

하여간 그 데스티니가 머리 속에 있다는 거예요. 
그 형태와 그림이 있다는 거예요. 

그렇지만 하나님의 돌파가, 실질적인 의지와 하나님의 손이 
우리 인생 가운데 개입해서 이것을 빚어나가기 전에는 
그냥 진흙은 진흙덩어리로 있는 거예요.
형태가 없는 폼리스, 토후(히브리어) 상태라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토후를 돌파하시는 분이시라는 건 뭐냐면 
하나님의 머리 속에 있던 그 데스티니가 
하나님의 머리 속에 있던 그림이 
사람의 인생가운데 실체가 돼서 나타나는 돌파를 행하신다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의 손이 개입되고, 의지가 개입되고 
그러기 전까지는 그냥 진흙덩어리 라는 거예요.

여러분의 인생은 어떠세요? 
진흙덩어리 입니까, 아니면 토기로 빚어가고 있어요?

이 돌파를 하나님이 행하신다는 거예요. 
그냥 버러져 있는 진흙덩어리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손이 개입되어서
하나님의 생각 속에 있었던 그 그림들, 그 형태들이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나타나게 되는 거... 그게 뭐예요? 
그게 '토후의 돌파'라는 거예요.

그 데스티니를 만들어 가는 것, 이게 토후의 돌파라는 거예요. 
이건 뭐냐면,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 인생 가운데 실제가 되는 돌파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그냥 이론과 추상적인.. 또는 마음의 위로를 주는.. 
이런 게 아니고 
하나님의 가지고 있었던 계획들이 우리 인생 가운데 실체가 되는 거예요! 아멘! 
'혼돈의 돌파'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세 번째 돌파는 <흑암의 돌파> 입니다. 

'흑암'은 명백합니다. 이것은 무지, 파괴, 죽음 이런 거예요. 
하나님은 이런 것을 돌파하시는 분이시다는 거예요. 

1 흑암은 첫째 무지를 의미합니다. 진리를 알지 못하는 거에요. 
'어둠'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 사실 실제가 아니에요. 
이것은 있어야 될 게 없는 것이 어둠 이예요. 

빛이 없는 상태를 어둠이라고 하지 
어둠이라는 물질이 있는 걸 어둠이라 하죠.

뭔가 부재한, 뭔가가 없는 상태가 '어둠'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인생 가운데 무지, 진리가 있어야 될 자리에 진리가 없는 거에요.
이게 어둠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태초의 돌파는 
무지를 돌파하는 돌파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진리를 얻게해 주시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8:32

여러분 아세요? 해방의 진리!
우리는 더 이상 묶여있는 자가 아니라는 거죠.

흑암을 돌파하는 하나님의 진리를 뭐냐면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그 진리의 돌파,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이 진리의 돌파,
우리를 자유케 하셨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부활할 거라고 하는 진리의 돌파죠.

그 전에는 우리가 흑암 가운데 있어서, 이런 진리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진리의 돌파를 이루어, 이 모든 것들을 알게 되었죠!

2 흑암은 둘째 '죄'를 의미합니다.
거룩함의 부재가 흑암입니다. 
태초의 돌파는 이 죄를 돌파하는 거룩함의 돌파입니다.
(이 내용은 다음 주에 더 자세하게 할게요.) 

돌파가 일어날 때 여러분 우리의 죄가 (어둠이) 돌파되어야 됩니다. 
거룩함이 우리 안에 회복될 때, 거기에 실질적인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요. 

거룩함을 율법적으로 지켜졌다고 해서, 돌파가 일어나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부담들이 있어요. 

죄에 대해서.. 또 거룩함에 대해서.. 
그런데 이게 참 힘들어요. 순종하기가 참 힘들어요. 

어 이거 그렇게 했다가는 큰일 날 것 같고 
그렇게 했다가는 망할 것 같고 
그렇게 했다가는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당할 것 같고
그렇게 했다가는 내가 원하는 게 안 될 거 같고... 

근데 성령께서 조명 하시는 게 있어요. 
'내가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 
'너희는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하라' 마5:48

이렇게 도전하시는데, 이거를 여러분들이 순종 하잖아요. 
그래서 거룩함의 실체가 여러분 가운데에 있게 되면,
그러면 거기서부터 어마어마 사람의 돌파가 일어나요. 
제가 장담할 수 있어요. 

그런데 거룩함에 실패 하잖아요. 그러면 아무것도 안 일어나요. 

3 흑암은 절망을 상징합니다.
소망이 없는 게 정말이고,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스러운 상태가 흑암이지요. 
부활은 죽음의 절망을 돌파하는 거죠.

위 세 가지 절망은 한 가지로 집약되는데,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이 어둠, 흑암의 본질은 뭐냐면
진리가 없는 거고, 소망이 없는 거고, 거룩함이 없는 건데 
그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상태,
그게 흑암이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돌파를 행하시는데 어떤 돌파냐면.
우리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의 돌파를 행하세요.

그래서 사실은 예배가 중요한 거예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 가운데 회복되는 거예요. 

임재 라는 것은,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이시고 
세상 땅 끝에 가도 거기 계신 분이시고 
내가 죄 짓는 현장에서도 지켜보는 분이시고.. 
근데 하나님의 임재를 굳이 강조해서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하나님은 언제 어니나 계시지요. 
그런데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
나에게 피부로 깨달아지는 것이 임재이죠. 

이 임재가 없는 것이 어둠이예요.
그럼 거기에는 진리도 없고요. 거기에는 소망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거죠.

거룩함은, 여러분, 하나님이 바로 내 옆에 계시다고 하는 
그 임재를 느낄 때 나오는 거죠. 이게 율법적 거룩함이 아니라고요. 


◑그렇다면 어떻게 돌파를 경험할 수 있는가요?

아 이거 계속 반복 하는데요. 상황 인식이 되어야 돼요. 
이게 인식이 안 되면 돌파가 안 일어나요. 
첫 단계는 내 현실 상황을 인식하는 거에요. 

내가 지금 어떤 돌파가 필요한 상황인지.. 이 상황을 인식해야 돼요.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부르짖자는 거죠. 

창세기 1장을 보면 성령께서 운행 하셨어요. 
흑암과 혼돈과 어둠으로 수면 위에 하나님의 영이 운행 하셨어요. 

그래서 여러분 어떻게 돌파가 일어날 수 있는가 이건 몰라요. 
왜? 
성령께서 그분의 주권적인 역사로 돌파를 허락하시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하면 돌파가 안 일어나는지는 알아요. 
내가 성령께서 운행 못 하시도록 하면 되는 거죠. 그러면 돌파가 안 일어나요. 
성령께서 운행 못 하시도록 하는 건 뭐예요?
내가 기도 안 하고 있으면, 절대로 돌파가 안 일어나고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으면 절대로 돌파가 안 일어나고 
불순종하고 있으면 절대로 돌파가 안 일어납니다.

그래서 돌파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모르지만 
어떻게 안 일어나는 지는 알아요. 

제가 다음 다음 시간에 이 설교를 좀 하려고 하는데 
"우리 안에 돌파를 방해하는 장애물들을 제거하라"는 거예요. 

장애물들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대표적인 게 회개하지 않는 죄입니다.

물론 우리가 모든 죄를 다 해결하고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지만 성령께서 조명해주시는 죄들이 있거든요. 
그거는 버티고 있으면 안 돼요. 
성령께서 조명해 주시는 죄는, 회개하고 나와야 되는 거예요. 

성령님이 원하는 방식대로 해결해야 돼요. 
어떤 죄들은 사람 앞에서 공적으로 고백해야 되는 죄가 있고요. 
어떤 건 그 죄를 바로 사람에게, 리더십이나 아니면 
내 죄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한테 가서 사과하거나 고백해야 되는 죄도 있고요. 
어떤 죄는 하나님 앞에서만 고백해야 되는 죄가 있고요, 다 달라요. 
성령께서 원하시는 방식대로 해결해야 돼요. 
성령께서 말씀하신 대로 해야 돼요. 

그래서 어떤 것들은 내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잘못했습니다 하고 회개해도
계속 찝찝한 경우가 있어요. 사죄의 확신이 안 들 때가 있죠.
그건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방식이 아닌 것으로 회개했기 때문이에요.

하나님 앞에 물론 돌이켜야 되지만 어떤 죄들은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그 피해를 입은 사람한테 가서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피해를 입힌 거를 보상하고 그래야만 해결된다는 거예요. 

또 어떤 죄들은 혼자서 그냥 하나님 앞에 고백한다고 안 되는 죄들이 있어요. 
그것은 자기의 영적인 리더한테 가서 공식적으로 고백하고, 
거기에 대해서 다시 축복을 받고 그래야만 해결되는 죄들도 있어요. 

해결되지 않은 죄가 남아 있다면, 돌파는 절대 안 일어나요.
죄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셔야 되요. 

창세기 1장 에서 가장 많이 쓰는 말이 뭔지 아세요.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그대로 되었습니다.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돌파가 일어나요. 
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봄에 개화하고, 꽃가루를 만들고..
열매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에 순종해서, 열매를 결실하죠.
 
이게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돌파 없는 거야, 열매가 없는 거예요,

그 말씀에 순종할 때 말씀이 그대로 될 때 
그때 여러분 돌파가 일어나는 거예요. 
하늘에서도 바다에 물고기도 꽃과 나무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돌파가 일어납니다. 

그 반대로 순종하지 않으면 거기는 공허와 혼돈과 어둠이 그대로 있는 거죠.
사람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 하실 때,
그것에 순종할때, 말씀의 약속대로 이루어지는 돌파가 일어나는 거에요.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