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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18:5~16 다윗과 사울

LNCK 2023. 3. 12. 10:47

[이재훈 담임목사 예배 설교] 다윗과 사울 (삼상 18:5~16) - YouTube

◈다윗과 사울              삼상18:5~16          2013.09.01.

대개 사람들이 더 좋은 사람으로 변화되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법입니다. 
그러나 더 나쁜 사람으로 변화되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고 
짧은 시간에도 더 나쁘게 변화하기가 쉽습니다. 

때로 더 좋은 사람으로 변화되는 데는, 광야같은 고난이 사용되기도 하지만 
더 좋고 더 멋진 그런 축복된 환경 속에서 더 나쁜 사람으로 변화되기도 합니다. 

바로 다윗과 사울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모습입니다. 
다윗은 왕으로 선택을 받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광야같은 고난을 겪으면서 
그는 오히려 더 좋은 사람으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반면에 사울은 왕이 된 이후, 그 축복된 위치와 환경 속에서 
아주 짧은 기간, 수년이 되지 않아 그는 더 나쁜 사람으로 변화되고 말았죠. 

환경이 좋으냐/ 나쁘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냐/ 함께 하시지 않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인생은, 광야같은 고난 속에서도 
정금과 같은 보배로운 인생으로 변화되어 가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은 인생은, 왕이 위치와 같은 축복된 위치속에서도 
오히려 더 타락하고 나빠지는 인생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서에서 중요한 주제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왕으로 세워진 사울이 
하나님의 종이었던 그 사울이, 어떻게 악한 영에 의해서 시달림을 받는 
그런 악의 종으로 후퇴하고 추락되었는가 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생애를 우리에게 보여주지만 
동시에 사울의 생애를 함께 중복시킴으로써 
사울이 죽을 때까지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가를 
아주 자세하게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사무엘서의 말씀인 것입니다. 

왜 사울이 이런 추락을 경험했습니까?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습니까? 그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단 한 순간에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불순종했기 때문에 
거짓과 불순종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때문에 
하나님의께서 그를 버리신 것이죠. 
그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거두셨을 때 
인간이 얼마나 추한 모습으로 추락할 수 있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죠

여러분,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면, 우리가 영적인 중립상태에 있는 걸로 
생각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빈집처럼 그냥 비어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기가 쉬운데, 
영적인 세계에서는 중립지대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속한 것도 아니고 나는 세상 적으로 속한 것도 아니다.
나는 그저 나일 뿐이다!' 그런 건 없습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는 절대 중립세계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든지, 아니면 세상의 영에 인도함을 받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만일 내가 세상에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고 있지 않다면 
나는 세상의 영의 인도함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중립지대에 있어, 나는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아! 
나는 어느 종교에도 속하지 않아! ... 그런 상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 나 이든지, 
아니면 세상에 속한 자로 살고 있는 나 이든지, 
아무리 도덕과 교양과 문화로 잘 포장되었다 할지라도 
그 근본은 세상의 영에 인도함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것이죠. 

하나님의 영의 임재가 떠나면, 우리 인간이 얼마나 추악에 추락할 수 있는가를 
바로 사울의 모습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을 섬기는, 하프를 켜서 자기를 위해 악한 영을 저지시켜주는 다윗을 
창으로 죽이려 하지 않습니까? 직접 자기가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거짓된 약속과 음모를 자꾸 꾸미죠. 
딸 메랍을 주겠다고 했지만 결국 주지도 않았어요. 거짓된 약속을 계속하는 거죠. 

딸 미갈이 다윗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올커니 이 딸을 이용하면 되겠구나' 
그래서 그 다윗을 사랑하는 미갈을 덫으로 만들어서 
블레셋과 전쟁에 내보내서 다윗을 죽게 하려고 거짓된 음모를 꾸민거에요. 

이 얼마나 추하고 악한 아버지 입니까. 
자신의 딸의 사랑을 이용해서, 자신의 딸이 얼마나 큰 상처를 입을까는 생각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이용해서 다윗을 죽이려고만 하는 거죠. 

결국 공개적으로 발표를 하죠. '나는 다윗을 죽일 것이다!' 
국가의 정책으로 만든 거죠. 
왕으로서의 모든 에너지와 또 모든 가용한 자원들을 다 사용해서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결국 사울은 비참하게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아들 셋과 함께 죽게 되죠. 

그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전쟁하다 보니까 어떻게 죽은 게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치신 겁니다. 하나님의 징벌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 사울의 광기어린 그러한 모습은, 과연 사울만의 문제일까요?
오늘날 일어나는 많은 그러한 범죄, 죄악,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인간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동물적인 모습을.. 
아니 동물보다도 못한 그러한 죄악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의 임재가 떠난 인간들에게서 나타나는 모습들입니다. 

사울은 고대 사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이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사울들이 이 시간 존재한다는 거에요. 

그런데 만일 리더십가운데, 지도자 가운데 사울 같은 사람이 있다면 
그 공동체 국가는 엄청난 재앙이 일어날 거예요.

얼마 전에도 시리아에서 화학무기를 사용해서 
천 몇 백 명의 수많은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어갔잖아요. 
아이들만 해도 4~5백 명 된다고 하죠. 

그런 결정을 내리는 지도자는 
사울과 같은.. 하나님의 하나님의 그 보호하심이 떠난 
하나님의 심판에 처한 인간들의 추한 모습들인 것이죠. 

오늘 이 시대에도 이러한 사울과 같이 악의 영에 의하여 시달림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 악한 영의 도구가 되는 수많은 사울들이 존재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고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아야할 인간들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나타나는 모습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을 떠난 사울이 
왜 이러한 추하고 더럽고 악한 살인자로 변하게 되었는가를 
두 가지 왜곡된 그의 마음의 상태를 통해서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질투심입니다. 질투심! 

사울의 몰락의 첫 계단은 는 질투로 시작되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무너뜨리고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 여인들이 노래했을 때

이렇게 여인들이 노래하는 것을 그 승전 개선식에서 듣고 
사울이 흥분 하게 되는 것이죠. 

사실 여인들이 그 사울과 다윗을 비교해서 
사울을 조롱하기 위해서 그런 노래를 만든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당시 히브리 문화에서 시를 살펴보면, 
'천'과 '만'을 등장시키는 것은 대조하기 위해서 한 게 아니라 
점진적으로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 되었던 하나의 표현이지요. 

그런데 앞에 부분에 먼저 사울 왕이 있고 
그리고 다윗이 나타났기 때문에 
천천이요 만만이라는 것이 대조처럼 사울은 느껴진 거죠. 

그 당시 어떤 사회라고 여인들이 왕을 조롱하기 위해서 
왕과 다윗을 비교해서 왕을 깎아내기 위해서 
그런 걸 의도적으로 했다고 보기는 좀 어려운 것이죠. 

(사울과 다윗을 둘 다 찬양했는데, 
다윗이 새로 등장한 영웅이니, 방점이 다윗에게 좀 더 가 있었던 것이죠)

그 당시에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방법 중의 하나였던 것입니다. 
만약 다윗이 먼저 나오고, 사울이 뒤에 나왔다 하면, 사울이 흥분하지 않았겠죠. 
'다윗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사울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 그렇게 표현했더라면 
사울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그 사울은 그 숫자에 예민하게 되었다는 거에요.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람은, 다른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에 흥분하기 
시작합니다. 이 사울의 질투심이 불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18:8~9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다윗이 실제로 수만 명을 죽였습니까? 아니죠. 골리앗을 무너뜨린거죠. 
사울이 실제로 수천 명을 죽였습니까? 그게 아니죠.
 이거는 하나의 비유요, 표현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울은 화가 치밀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질투가 얼마나 무서운지 성경에 곳곳에 보면 그 예가 등장하고 있죠. 

아담의 자손이었던 가인과 아벨, 왜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까? 
질투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재산은 받지 않고 동생의 그 예물을 받으신 것에 질투해서 
아벨을 죽였습니다. 질투는 형제까지도 죽일 수 있는 무서운 힘이 있다는 거죠. 
솔로몬 시대의 보면, 한 악한 여인이 나오죠. 
다른 여자의 아기를 자기의 아기라고 훔쳐서 속이고,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죠. 

오늘날처럼 유전자 검사를 할 수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솔로몬 왕이 왔을 때 솔로몬의 지혜를 발휘해서 그렇게 말하죠. 
'아이를 둘로 쪼개서 나눠라' 그때 악한 여인은 찬성이요. 그러는 거죠. 

질투심에 사로잡힌 여인은, 내가 갖지 못할 바에는 
그냥 아이를 죽여버리는 게 낫겠다.. 그게 질투심에 표현인 거에요. 
솔로몬이 그 질투심을 이용해서 분별한 거죠.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동방의 박사들이 와서 유대에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누가 질주했습니까? 헤롯이 질투했죠. 

그래서 그는, 질투심으로, 이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두살 아래의 모든 영아들을 다 몰살시키는 엄청난 만행을 저질렀죠. 
헤롯왕의 질투 때문입니다. 

지도자들의 질투가 얼마나 무서운 악을 행하게 되는지 
사단이 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이 세상을 악한 세상으로 만드는데 
사용하는 게 뭡니까? 지도자의 질투에요. 

이 세상 뉴스에,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악한 일들에 
거의 대부분은 그 지도자들의 질투를, 사단이 사용하는 거에요. 

위치가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 지도자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지 못하고 질투심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그 공동체는 반드시 무너집니다. 큰일 납니다. 

그래서 이 세상 속에 정말 빛을 발하기 위해서 
본인이 어떤 위치에 있든지 간에 
우리의 마음을 지키고 악한 영이 틈타 하지 못하도록 
질투로부터 우리를 멀리하는 것..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질투란 뭘까요? 토마스 아퀴나스는 질투를 이렇게 정의했어요. 
'질투란 다른 사람의 즐거움을 슬퍼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잘 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면 
그때부터 막 그만큼 슬픔이 내게 밀려오는 거에요. 

근데 저는 정반대도 된다고 생각을 해요. 그 정의를 저는 뒤바꿔봤어요. 
'다른 사람의 슬픔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불행해지면 은근히 즐기고 기뻐하는 것 
이게 다 질투심의 표현인 것이죠. 

여러분 질투가 왜 끔찍합니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반드시 그렇게 되는데, 먼저 자기 자신을 망가뜨립니다. 
자기 자신을 파괴시킵니다. 

여러분, 다른 죄들은 그래도 약간의 쾌락과 즐거움이 처음엔 다 있어요. 
모든 죄들을 보면, 그 약간의 즐거움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죄를 짓는 거죠. 
비록 일시적이지만... 

그런데 질투는 즐거움이 하나도 없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전혀 즐겁지 않아요. 
그저 파괴시키고 무너뜨리는 죄가 바로 질투인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죄입니까!

◑이 질투의 원인이 뭘까요? 
생각해보니까 세 가지 정도가 나옵니다. 

1) 첫째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 잘못된 왜곡된 평등사상이란 것이 들어있어요. 
'평등해야 된다!' 물론 평등해야 되죠. 
그런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좋은 것은 나도 누릴 수 있어야 된다..
라고만 생각을 해요. 물론 그게 평등의식 이죠. 

그런데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고통도, 내가 또한 경험할 수 있어야 
평등한 건 아니겠어요? 
그런데 우리는 평등사상을 언제나 좋은 것에만 기준을 맞춰요.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좋은 것을 왜 나는 갖지 못하느냐? 라는 
평등사상만 갖고 있어요. 그게 정말 공평한 평등이 되려면 
저 아프리카에 기근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이 받는 고통도 
내가 경험해야 평등한 거 아니겠습니까? 

항상 나보다 좋고 더 낫고, 그리고 더 높은 것에만 초점을 맞춰서 
'나도 똑같이 누려야 된다'라는 평등 사상에 빠져 있는 거에요. 

자기보다 더 어렵고 힘든 사람들과 나도 동일하게 어려워야 된다..라는 
평등의식으로는 사람들이 절대 적용하지 않는다는 거죠. 

만약에 그런 마음이 있다면, 
절대로 그 마음이 악한 질투로 향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단지 부러워하고.. 그렇게 되길 바라는 것 자체가 질투는 아니에요. 
그런데 잘못된 평등사상이 있을 때, 반드시 그렇게 된다고 생각할 때 
사람들은 그 질투심이 악한마음으로 변화가 되는 거에요. 

2) 또 한 가지는 열등 컴플렉스입니다. 
여러분 아주 심리학에 중요한 법칙이 하나 있죠. 
그것은 사람은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는 거에요. 

어떤 정보나 경험을 통해서 그 기억이 형성되는 것 같지만 
자기가 가진 선입관, 어떤 믿음이 있어요. 

'나는 무가치한 사람이야!' 라는 어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모든 일어나는 일들 속에서 '내가 얼마나 무가치한 가를 증명해주는' 
그러한 것들만 기억한다는 거에요. 

'자기가 얼마나 가치 있는가?' 라는 것을 보여주는 그러한 사건은 
기억을 안해요. 사람은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합니다. 
아들러 라는 심리학자가 말한 법칙이죠. 아주 중요한 법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열등 컴플렉스에 빠져 있었던 것이죠. (아마 어릴적부터)

사울은 하나님을 떠났을 때 
자기의 인생, 자신의 위치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지.. 그걸 잃어버렸어요. 

비교에 빠진거죠.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
그 노랫말 한마디에 그는 뒤집어져 버린 겁니다. 
그의 마음속에 있는, 열등 컴플렉스가 
그로 하여금 악한 질투의 사람으로 변화되게 만들었던 거에요. 

3) 근데 그보다 더 중요한 세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질투뒤에 숨어 있는 더 무서운 죄,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반항이죠. 
'하나님께서 너를 버리셨다' 라는 그러한 해고 통지를 사무엘로부터 받았죠. 

그랬으면 그 말씀을 가지고 자기를 돌아봐야 되죠. 
'하나님이 왜 나를 버리셨을까? 내가 어떤 죄와 어떤 불순종을 행했기에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을까?' 그렇게 자신을 돌아보았더라면 
그리고 회개했더라면... 

하나님은 그를 바로 왕에서 내리지 않으셨죠. 
그 남은 기간 동안 정말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다윗을 잘 세워 가면서 
참된 모습으로 그는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을 거에요. 

그런데 사무엘로부터 '하나님이 당신을 버리셨다. 
왜냐면 당신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다' 라는 분명한 메시지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그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지 않았어요. 
그리고 하나님에게서 찾은 거예요. 
'나를 버린 하나님이 문제다!' 

가인이 왜 아벨을 죽였습니까? 겉으로 나타나기에는 질투심이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하나님께 대한 반항인 거죠. 

'나의 제사를 안 받으셔? 아벨 것만 받으셔?' 하나님께 대한 반항입니다. 
하나님이 예배를 안 받으셨으면, 왜 안 받으셨는지 자기를 돌아봐야죠. 
나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자신을 살펴야죠. 

그런데 자신을 살피지 않고, 하나님께 원인을 돌린 거죠. 
하나님이 문제다! 하나님께 대한 삐딱한 반응,
결국 그것은 교만이죠. 

결국 이 열등감과 질투는 교만이 뿌리라는 거에요. 
열등감과 교만은 동전의 앞뒷면인 걸 아시죠?

열등감이 심한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에요. 
굉장히 교만한 사람은 그 안에 깊은 열등감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 깊은 것이 어떤 때는 열등감으로 나오고, 어떤 때는 교만으로 나와요. 
자기보다 나은 사람 앞에서는 지극히 열등해지고 
자기보다 조금 못한 사람인 것 같으면, 굉장히 교만해지고 무시하는 거죠. 
열등감과 교만이 같이 가는 거죠.

바로 이런 모습들을 통해서, 이 사울의 내면에 나타난 이러한 모습들, 
잘못된 평등의식, 열등 컴플렉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반응 
이러한 잘못된 마음의 상태들이 결국 다윗을 죽이려는 
그러한 엄청난 무서운 파괴적인 인간으로 사울이 변화되었다는 거에요. 

우리 마음속에 질투, 그까짓 것 아무것도 아니겠지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살며시 들어온 그 질투심, 
우리가 매일매일 살아가면서 형성된 그 마음의 열등 컴플렉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올바르지 않은 교만이 
결국 우리가 얼마나 무서운 인간이 될 수 있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사울입니다.

그런데 그 상황이, 언제 그렇게 될 수 있다고요? 
광야같은 고난이 아니라, 축복된 환경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 속에서, 더 나은 환경 속에서 
우리는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 많은 것을 가졌고, 더 높은 위치에 있고, 더 많은 지식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질투하지 않아도 되는 다윗에게, 질투하며 그를 죽이려 했던 사울처럼 
우리는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다는 거에요. 

▲또 한가지 사울에게서 나타나는 중요한 잘못된 마음의 상태가 있죠. 
그것은 바로 두려움입니다. 

사울은 백성들을 두려워했고 또한 다윗을 두려워했습니다. 
왜 사울이 다윗을 두려워합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두려움은 겉으로 보기에는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려움이 많은 사람은, 반드시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킵니다. 

여러분 사울은 왜 하나님한테 불순종했습니까? 
사람들을 두려워있기 때문이에요. 

15:23~24절에 보면 사울왕이 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는지 
그 원인이 자신의 입을 통해 나옵니다.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사울왕은 백성들이 두려웠습니다. 왜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했습니까?
왜 아말렉을 다 진멸하라고 했는데, 살진 양과 염소를 남겨두었습니까? 
백성들을 두려워했던 거에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될 하나님의 지도자가, 백성을 두려워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의 지지를 잃을까봐 두려워해서, 그들의 의중을 따르기 시작했을 때 
사울은 불순종 했고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던 거에요. 

사울은 또한 다윗도 두려워했죠. 
본문 12~15절에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그러므로 사울이 그를 자기 곁에서 떠나게 하고 그를 천부장으로 삼으매 
그가 백성 앞에 출입하며
다윗이 그의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사울은 다윗이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고 그를 두려워하였으나'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는 것이 마땅한 것 같은데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사울이 다윗을 두려워했어요.

다윗을 보면 얼마나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지 몰라요.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사울왕이 그렇게 자기를 죽이려 해도 절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도망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다 지혜롭게 행합니다. 

그리고 사울왕이 거짓된 약속으로 '자기의 딸을 주겠다' 그래도 사양합니다. 
'내가 어찌 감히 왕의 사위가 될 수 있단 말이냐' 겸손함으로 사양합니다. 

여러분, 겸손한 사람은 절대 거짓된 음모에 빠져들어가지 않습니다. 
거짓된 약속, 음모에 넘어가는 사람은, 마음이 교만한 사람이에요. 
내가 교만할 때, 항상 이 거짓된 약속에 빠져 들어가요. 

그러나 다윗은, 사울이 감언이설로 자기 딸을 주겠다, 뭐를 주겠다... 
절대 자기 마음이 안 흔들립니다. 왜요? 
'하나님이 다 주시는 거지.. 왕이 준다고 내게 주어지는 게 아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마음의 중심의 향해 있기 때문에 
절대 그 다윗의 거짓 약속, 음모, 또 심지어 위협에도 두려워하지 않아요. 

정말 다윗과 같은 담대한 마음, 지혜로운 마음, 분별력 있는 마음으로 
우리가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렇게 사람을 두려워하니까, 이 사울은 자기 체면에 집착하는 사람이 되었죠. 
그래서 이후에 사무엘이 지적했을 때 뭐라고 말합니까? 
'제발 백성들 앞에서 내 체면만 좀 살려주십시오!' 
얼마나 추한 인생이 됩니까? 

15:30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

'내 체면을 세워주십시오!' 
사울에게는,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내 체면이 중요한 거에요. 
자신의 체면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반드시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신의 체면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다윗과 사울의 분명한 대조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사울의 마음속에 있었던 이 질투와 두려움을 넘어서서 
다윗과 같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셨습니까? 

▲첫 번째는 회개해야 돼요. 
우리 마음속에 질투와 그 두려움이 있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흘러가서는 안 돼요. 그거 분명히 죄입니다.

만일 그걸 회개하고 끊어내지 않으면,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는 거에요. 
관계의 갈등뿐만 아니라 많은 일들이 생깁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벌도 받을 수 있어요. 

그 질투와 두려움을 가슴에 품는 것을 털어내는 길은.. 회개하는거에요. 
토해내야 되는 거에요. 회개란 토해 내는 거에요. 

여러분 우리가 먹지 못할, 썩은 음식물을 먹으면 토하죠. 
살아있는 생명체는 먹어서는 안 되는 걸 먹으면 토해냅니다.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은, 우리 영혼에 들어와서는 안 되는 
그러한 죄와 불순물이 들어오면.. 토해내는 거에요. 회개하는 겁니다. 

▲두 번째는 비교의식을 버리고 창조의식을 가지고 사는 거에요. 
비교의식은 뭡니까?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거죠. 
창조의식은 뭡니까? 오직 우리의 비교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밖에 없는 거에요. 

예수 그리스도만을 비교로 할 때는, 절대 우리는 열등감에 빠지지도 않고 
교만에 빠질 수도 없어요. 

우리의 비교의 거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앞에 설 때만, 우리는 교만할 수도 없고, 열등할 필요도 없는거에요. 

그분앞에서 우리는 죄인일 뿐만 아니라 
그분 앞에서 우리는 구원받은, 용서받은 죄인일 뿐만 아니라 
그리고 그분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가치를, 우리 주님을 통해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죠. 

비교의식을 버리고, 주님 앞에 창조의식을 가지고 날마다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우리 주님이 사랑하시는 다른 사람들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을 사용하실 수 있다는 것, 
그들을 축복하고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남만 사용하셔야 된다는 것, 그걸 내려놓는 거에요.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이 사용하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거죠. 

모세의 시대에 민수기 때 이런 사건이 있었죠. 
이스라엘 지도자가 모세였습니다. 

그런데 예언하는 엘닷 과 메닷이라는 사람이 등장했죠. 
모세의 시종이었던 여호수아가, 엘닷과 메닷이 예언하는 걸 보고 
모세에게 달려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세여, 빨리 금하소서. 저들이 지금 예언을 합니다.' 

모세의 리더십에 영향을 줄까봐 금해야 됩니다.. 라고 했을 때 
모세가 뭐라고 했습니까? 여호수아를 야단을 쳤어요. 
민11:29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 질투하느냐? 나는 하나님께서 그 영을 
모든 백성에게 주셔서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한다.' 

그러니 그들이 예언하는 것을 금하지 마라!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도 사용하실 수 있다는 거예요. 
그걸 기뻐하고 축복하는 것, 그것이 바로 참된 하나님의 사람인 것입니다. 

사울의 불행한 인생을 보면서, 하나님의 임재앞에 머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는 깨닫습니다. 
이 모든 부정적 결과는, 그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고, 하나님께 묻는 기도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떠난 인생은, 반드시 추락하는 인생이 되고 맙니다. 
자신만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치가 높을수록 
수많은 사람들을 추락시키는 인생이 됩니다.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 머무는, 
말씀앞에 머물고 기도안에 머물고 성령안에 머무름으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면서
사울과 같은 인생이 되지 않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다윗처럼 하나님의 임재앞에 머물며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걸음으로 순종하며 나가는 복된 인생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