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리앗은 원수죠. 요나단은 친구입니다. 그러면 사울은 어떤 사람인가요? 우리의 인생가운데, 우리 인간관계가운데 골리앗과 요나단만 있다면 굉장히 인생이 오히려 쉬울 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우리의 인생에는 원수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사울과 같은 사람들이 매우 많다는 것이죠.
그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인생 가운데 무엇을 깨닫고 또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되겠는가요? 다윗의 인생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삼상18:5 '다윗은 사울이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사울이 그를 군대의 장으로 삼았더니 온 백성이 합당히 여겼고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더라'
5절을 읽으면서 다윗을 여섯 가지로 칭찬을 해주고 싶습니다.
1) 사울이 시키는 일마다 2) 지혜롭게 3) 잘 해냈다 4) 군대의 높은 자리에 앉혔다 5) 모든 백성들 6) 신하들도 기뻐했다
1) 사울이 시키는 일마다 다윗은 예스맨 이었죠. 사울이 시키는 일 중에 거절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너무 어렵다고 거절하지도 않았고, 너무 사소하다고 거절하지도 않았어요.
당연히 왕의 명령을 누가 거역하겠는가요? 그러나 계속해서 심부름을 시키다보면, 사람의 마음에 신중함이 떨어질 수 있죠.
그러나 다윗은 심부름조차도, 그 어느 것 하나 가볍게 다루지 않았습니다. 리더가 시키는 일을 일단 예스하는 긍정형의 사람, 그리고 나서 그것을 어떻게 이룰 것인지 지혜를 구하고 전략을 세웠던 사람! 예스는 능력이 아니라 태도이죠. 그러나 다윗은 태도가 가장 귀한 능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2) 두 번째 다윗은 지혜롭게 일을 했습니다. 생각 없이 일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는 생각하면서 달리면서 뛰면서 일을 진행하면서도 생각하면서 플레이를 한 것이죠.
기계적으로 일한 것이 아니라, 창의적으로 일을 했습니다. 그저 시키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왜 하는지, 그리고 그 일의 큰 그림이 어떻게 됐는지를 알고서 일을 했다는 것이죠.
제가 머리에 떠오른 사람이 하나 있었어요. 제가 가장 처음 번역했던 사람인데
19세기 세계적인 부흥사였던 D L 무디입니다. 무디는 초등학교 중퇴였지만 탁월한 복음증거자였고 조직의 귀재였어요.
무디는 '상식의 힘이 극대화된 케이스다' 이렇게 보통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은 상식이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지혜의 근원이 되었다' 라고 이야기한 사람이었어요. 그는 배운 것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냥 하나님이 내게 주신 상식 하나만으로도 하나님을 신뢰했을 때 하나님이 놀라운 지혜를 부여주셨다.. 라는 것이죠.
여러분 지혜는, 학식이나 경력보다 오히려 상식에서 나오는 법이에요. 왜냐면 상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니까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다 갖고 있는 지식이나 판단력이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근데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지식과 판단력이 상식이기 때문에 이 상식의 힘을 깊이 있게, 지혜의 차원으로 가지고 있으면 인지상정이 여기서 나오고, 여론이 여기서 나오고, 공감대가 여기서 나오고,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가 여기서 나오게 되어 있죠.
여러분 꼭 기억하실 것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이미 지혜의 근간을 다 허락하셨다는 거예요. 누구에게나!
여러분 학력이 높아야만, 학식이 있어야만, 아니면 경력이 많아야만 지혜가 생기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이미 모든 사람에게 지혜로울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부어주신 줄로 믿습니다.
3) 세번째 다윗은 일을 잘했다는 거예요. 지혜롭게 일을 했다 라고만 이야기하지 않고, 지혜롭게 '잘 해냈다'는 것이죠. 그는 일을 열심히 한 것뿐만 아니라, 일을 '잘 했어요'.
예전에 제가 요셉청년부 담당할 때, 저희 전체 담당하셨던 목사님이 교역자 회의를 하면 항상 그런 얘기를 많이 하셨어요.
누가 '전 그래도 열심히 했는데요?' 그러면 그 분은 '열심히만 하면 뭐 하냐? 잘해야지!' 이렇게 얘기하셨어요.
다윗은 예스맨 이고, 지혜로 왔으며, 일이 결과도 좋았다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시작은 있는데 끝이 없어요. 흐지부지합니다. 어떤 사람은 과정은 있는데, 결과가 없어요.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때로 굉장히 억울해합니다.
'나 나름대로 노력했는데...' 결과가 없다는 것이죠. 그러나 마지막을 염두에 두고 사는 것, 그것이 지혜로운 인생입니다.
사실 이런 것이죠. 축구경기를 90분을 풀타임을 뛰면서 2:0으로 이기다가 마지막 5분 남겨두고 역전패를 당하면 그것처럼 허무한 경기가 없는 거죠.
만약에 인생을 그렇게 살아야 한다면, 정말 그것처럼 허무한 것이 없어요. 시작도 했어요. 과정도 있어요. 그런데 결과가 실패라면 그 인생은 매우 힘든 것이죠.
다윗은 시작도, 과정도, 결과도 좋았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결과만 평가한다' 라고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원망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좋은 결과는 누구나 원하는 것이라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중요한 고시를 앞두고, 중요한 입시를 앞두고 있는 수험생은 그 시험에서 좋은 결과를 원할 것입니다. 사업에서 중요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사업가가 있다면 그 프로젝트에서 좋은 결과를 원할 거에요.
교제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두 사람의 관계 가운데 좋은 결과가 있기를 원할 거예요. 모든 인생은 좋은 결과를 원하게 되어 있어요.
마무리까지 깔끔한 인생, 다윗과 같은 사람은 누구나 환영이죠. 누구나 찾는 사람입니다.
4) 네 번째로 다윗이 높은 자리에 올랐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높은 자리를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사울이 다윗을 높여주었어요.
사실 다윗은.. 전반적인 다윗의 인생을 보면 굉장히 눈치가 빠른 사람이에요. 센스가 있는 사람이에요. 안 그러면 그 좁은 땅 덩어리에서 십 여년을 도망다닌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고요. 그 조직 안에서, 정치판에서 얼마나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많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지위 왕으로서 그의 사십 년 통치 기간을 지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지혜롭고 센스가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있죠.
그러나 다윗은 사울이 자신을 총애하는 것을 알고 그 권력을 이용해서 자리에 오르지 않았다는 거예요.
리더십은 자리가 아니라 자질입니다. 젊은 날 우리가 요구해야 되는 것은, 자리가 아니라 자질이에요.
자리를 요구하는 인생이 아니라 자질을 갖추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리더가 당신을 발탁하게 돼 있어요. 그리고 조직이 당신을 천거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 사람은 가만히 두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리더가 되게 되어 있는 것이죠.
그냥 모두가 동의해서 자연스럽게 리더가 되는 그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자연스러운 것은 오래가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부자연스러운 것(낙하산)은 오래가지 못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아셔야 돼요.
5) 제가 다윗을 계속 칭찬하려고 합니다. 다섯번째는 모든 백성들이 '이 일을 기뻐했다' 백성들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되는 것이 정말 잘된 일이다' 라고 인정했다는 거에요. (다윗이 군대의 지휘관이 된 것을)
여러분 다윗은 예전의 목동이 아닙니다. 그는 왕의 총애를 받는 고위직분자 예요.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자리가 높아지고 권력의 맛을 보게 되면 변질되기 시작하죠.
교만해지고 사무적이 되고 사람들과 차츰 멀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렇지가 않았다는 거에요. 그러면 그는 어떻게 했는가? 그는 백성들의 앞에 거만하지 않았고 그는 백성들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하면서 자기의 양을 칠 때 한 마리 한 마리가 소중했던 것처럼, 그렇게 사람들을 대했던 것이죠.
누구도 형식적으로 대하지 않고 진심으로 대했던 사람이 다윗입니다.
6) (다윗이 군대장관이 된 것을) 사울의 신하들도 기뻐했습니다.
여러분 이게 쉬운 일일까요? 오늘 부문에 여섯 가지 칭찬을 하지만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동료가 자기들은 다 포지션 그대로 있는데 다윗 혼자 승승장구하고 계속 승진을 한다면 누가 마음에 좋아하겠어요?
가장 마음에 어려워할 사람들조차 (다윗의 승진을) 기뻐했다는 거에요. 왕이 시키는 일을 다윗이 진행을 할 때 이미 각자 신하들이 맡은 역할들이 있을 거 아니에요.
교회도 마찬가지고 또 가정도 마찬가지고 특히 회사에서 그런 경험을 많이 하실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미 늘 있는 상비조직이 있는데 특별한 조직을 만들어서 태스크 포스팅 같은 조직을 만들어서 회장이 재정도 주고 사람도 지원하고, '모든 부서가 TF에 협조해라'
그러면 사실 회장이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협조를 하긴 해야 되지만 피곤한 거에요.
여러분 다윗은 어린 소년이었어요. 십대 소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왕의 총애를 받고 실력이 있어서 왕이 시키는 일, 왕명을 대행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요.
다른 신하들과, 그들의 고유 영역과 반드시 부딪혔을 거라고 생각이 돼요. 그런데도 그 사람들이 기뻐할 만한 일을 했다는 거에요.
다윗은 정말 어메이징한, 놀라운 사람입니다. 왕이 시킨 일은 일대로 진척을 하면서도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그 일을 했다는 거에요.
어떻게 했는지 구체적인 이야기는 나오지 않지만... 놀랍게도 다윗은 다른 신하들과 관계가 매우 좋았어요.
일도 되고, 관계도 되면 정말 최고죠. 일은 되는데 관계는 엉망이다.. 그러면 삐걱거리게 되어 있어요.
관계는 되는데 일은 되는 게 없으면 사실 이런 사람들은 일하는 데서는 더 이상 머물러 있기 어렵습니다.
일도 안 되고 관계도 안 되면.. 정말 어렵죠.
여러분 다윗에 대한 6가지 칭찬을 했어요. 다윗은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은 인물이었고 모래알속에서 발견한 진주와 같은 인물이었어요.
감춰져 있을 때는 아무도 몰랐지만, 일단 드러나자 모두가 알아보게 되었어요. '와 놀라운 사람이구나!' 기회가 주어지자 모두가 그의 인생이 얼마나 실력 있는지를 알게 되었어요.
관계지수, 일을 진척하는 실행력 등 모든 것에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함께 일을 해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인정하고, 그의 실력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의 인품에까지 감탄했다는 거예요. 모두가 그를 좋아하게 되었어요.
제가 다윗을 6가지로 칭찬을 했는데요.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쟤는 못 하는 게 뭐냐?' 이런 마음이 만약 드신다면 이게 사울심리죠.
'도대체 왜 나에게 하나님은 이런 은사를 안 주셨냐?' '다윗은 사실 모든 걸 갖추고 있지 않느냐?'
그러면 다윗이 정말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나요? 아니죠.
여러분, 사울 같은 마음이 아니라 요나단 같은 마음이라면 '와 정말 훌륭하다. 정말 좋다...'
여러분 우리 곁에 갑자기 우리 부서에 이런 사람이 나타난다고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행복할 수 있겠어요? '너는 뭐든지 잘 하는구나! 나는 지난 5 년 동안 해맸는데...'
여러분 요나단과 같은 마음은,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마음이에요. 멋진 형제가 있으면 '그래 너는 멋지다!' 이렇게 얘기해주면 되는데 '저 친구, 폼잡고 있네!' 이렇게 마음에 어려움을 갖지 마세요.
예쁜 자매가 있으면 그냥 예쁘다고 이야기하거나 생각하고 칭찬해주면 돼요. 그런데 제가 자매들의 심리를 보니까, 자매들은 객관적인 미의 기준이 없는 것 같아요.
뭐냐면 자기하고 친하면 예쁜 거예요. '예쁘다. 예쁘다' 말하고요. 자기하고 친하지 않으면 다 미운 거예요. '저 미운 것!'
본문에 사울은 다윗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요? 좋게 보는 게 아니라 안 좋게 봤어요. 밉게 봤어요.
왜 그러냐면, 그에게는 아비의 마음이 없기 때문이죠. 그에게는 왕이라는 그 권력자의 차가운 마음 밖에 없기 때문이었어요.
◑본문의 굉장히 핵심적인 구절이 6~7절입니다.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엘라 골짜기의 전투가 장기전이었을 것이다.. 라고 성경학자들은 추정합니다. 왜냐면 6절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에서 이 블레셋 사람은 단수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골리앗을 쓰러뜨린 사건에 대한 표현으로 생각이 됩니다.
근데 골리앗을 죽인 직후에 돌아온 것이 아니라 군 장교로 세움을 받고 군대에 높은 자리에 앉혔다.. 이야기를 했죠. 군 장교로 세움을 받고, 그리고 전공을 올린 이후에 돌아오는 장면이에요.
그래서 골리앗을 쓰러뜨린 이후에 전투는 계속되었고 다윗도 군장으로 임명이 되어서 참전을 했던 것이죠.
엘라 골짜기의 전투가 마무리가 되고 사울의 군대가 돌아오던 날 여인들의 대대적인 환영행렬이 사울의 군대를 맞이합니다.
그런데 6절을 보면, 앞뒤가 안 맞는 거예요.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다윗이 군사들과 함께 돌아오는데 여인들은 누구를 맞이했다고요? 사울을 맞이했다고요.
그렇다면 이 행렬은 명목상으로는 왕의 개선 환영 행렬이지만 그 날의 주인공은 누구에요? 다윗이죠.
여인들이 무슨 노래를 불렀는가요?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사실 사사시대만 해도 블레셋 앞에 쩔쩔매던 이스라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우고 나서 블레셋을 여러 차례 이겼어요.
그러더니 다윗이라는 인물이 등장해서 블레셋을 완전히 초토화시킨 겁니다. 그러니 이 노래는, 이스라엘사람이든 블레셋 사람이든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두 귀가 번쩍 뜨이게 만드는 노래였던 거예요.
이거는 당시에 가장 충격적인 사건을 묘사한 노래였던 것이죠. 나중에 21장을 보면, 다윗이 사울의 위협을 피해서 가드 왕 아기스에게 도망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 아기스의 신하들이 뭐라고 이야기를 하죠? 바윗이 들어오는 걸 보고, 저가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노래하던 바로 그 다윗이 아닙니까? 라고 이야기했어요.
21장뿐만 아닙니다. 놀랍게도 29장에 가 봐도 망명생활 10년 차가 거의 끝나가는 그 장면에서도 블레셋 장군들이 다윗을 보면서 다시 이 노래를 인용하죠. 세월이 십여년이 지났는데도 블레셋 사람들은 잊을 수가 없었어요.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고 노래하던 바로 그 다윗이 아닙니까! 이렇게 다윗의 등장은 당시 중근동을 뒤흔드는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충격적인 사건이었어요.
사울은 개선행렬 선두에서 흐뭇한 얼굴로 행진을 하다가 이 노래를 듣고 일순간 얼굴이 일그러진 거죠.
이건 그냥 지나가는 유행가 가사 라고 이야기할 수가 없는 거예요. 여러분 이 노래 안에 이스라엘의 민심과 여론이 담겨 있었어요.
7절에 그들은 춤을 추며 이렇게 노래했다 라고 되는데 이 노래가 교창, 돌림노래에요. 한 사람이 선창을 하면 나머지 사람들이 따라 부르는 거예요.
안 그래도 유행과 가사 라는 것이 한 번 들으면 계속 기억이 나잖아요. 그런데 이 노래가 사울의 뇌리에 박혀서 끊임없이 그날 밤 그를 미치게 만든거죠.
사울의 마음에 시기심이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결국에는 이상한 묵상을 하게 되죠. 8절에 '그가 더 가질 것은 이제 이 나라 밖에 더 있겠는가?' '이러다가 내가 쫓겨나는 거 아니냐?' .. 이런 묵상을 하게 되었어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되는데, 선한 생각을 묵상해야 되는데 질투와 분노를 내 가슴에 품고 묵상을 하니 이것은 알곡에 물을 주는 것이 아니라, 가라지에 물을 주는 것이고 이런 부정적인 생각, 미움과 분노와 질투와 시기심을 가슴에 품고 묵상하는 것은 내 영혼이 곰팡이를 자라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죠. 자기 영혼으로 썩어들어가게 만드는 것이에요.
▲9절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주목하였더라' 눈이 빠지게 쳐다봤어요. 주목했는데 사랑의 눈빛으로 바라본 게 아니고요. 의심과 미움과 분노와 시기심에 가득 차서 그를 바라본 거에요.
'사람을 주목하며 인생을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주목하며 인생을 살 것인가?'
사울의 인생과 다윗의 인생의 결정적인 차이가 무엇인가요? 주목하는 그 시선의 대상이 완전히 달랐다는 것이죠.
사람들을 주목하면 상대적인 우월감이 들 때도 있겠지만 그러나 내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면 열등감에 빠지게 되어 있죠.
그리고 그 열등감이 시기심과 질투, 급기야는 분노와 내적인 분열까지 이어져 사울과 같이 빠져나오지 못하는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에요. 참 안타까운 것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늘 다른 사람과 자기 자신을 비교하며 살아갑니다.
한 집에서 태어난 형제 자매간에도 누가 엄마 아빠의 사랑을 더 받는가? 누가 공부를 더 잘하나? 누가 학교 체육대회에서 달리기를 더 잘했나? 누가 더 예쁜가?
또 자짓 잘못하면, 부모가 자녀들을 서로 경쟁시킬 수도 있어요. 그것은 좋은 교육법이 아니죠. 아무리 결과가 좋다 하더라도요.
여러분, 모든 것이 비교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형제간의 경쟁, 자기 자매가 가장 큰 경쟁의 대상인 거에요. Sibling rivalry 이런 용어가 생길 정도로
장남 장녀가 태어나서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 하다가 어린 동생이 태어나면 온통 부모가 거기에 집중하거든요. 그때 아이가 느끼는 마음이, 본처가 후처를 보는 기분과 같다는 거에요. 고통스러운 거에요. '저게 내 사랑을 다 뺏어가다니...'
그러면 아이들 뿐인가? 부모들도 똑같죠. 부모들도 똑같아요. 애들 놓고 질투합니다. '아빠를 더 좋아해, 엄마를 더 좋아해?' 하고 묻죠.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주의 사랑을 서로 받기 위해서 몸부림칩니다. 여러분 이런 유치한 마음이 인간 안에 있어요.
누구나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사랑받고 주목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에요. 정신 차려야 돼요. 사람은 근본적으로 비교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키가 나보다 큰 가/ 작은 가? 나보다 저 사람이 예쁜가/ 예쁘지 않은가? 나보다 돈이 많은가/ 적은 가? 학력이 높은가/ 낮은가? 옷은 뭘 입었는지, 차는 뭘 끌고 다니는지... 온통 비교하는 거예요.
그뿐 아닙니다. 가족도 비교합니다. 내 집 부모보다 저 집 부모가 훨씬 교양이 있고 훨씬 잘 사나? 저 집 남편이 우리집 남편보다 더 멋진 가?
십계명에 이런거 하지 말라 그랬죠. '저 집 아내가 우리 집 아내보다 더 예쁘고 상냥한가?' 사람의 마음에 이런 아주 유치하지만 모든 것을 비교하는 마음이 있어요.
또 부모들은 '저 집 자식이 우리 집 자식보다 더 예의가 바르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가?' 뭐 그런 걸 비교하는 거예요.
목사도 비교를 합니다. 제가 7월에 오사카에 한 주간 갔다 왔어요. 그때 김태훈 목사님이 오셔서 설교를 하셨는데 청년들 말로는, 설교를 아주 잘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그것도 한국에 와서 들은 얘기가 아니라 일본에서, 온통 막 사방에서 청년들이 카톡에 문자를 보낸 거예요.
'이상준 목사님이 안 계셔서 섭섭했어요' 이런 문자는 하나도 안 들어왔어요. 대신에 '김태훈 목사님의 설교가 너무 좋았습니다'
제가 '속으로 정말 좋았나 보구나!' 그러면서 마냥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하하하, 웃자는 얘기죠. 순간 지나간 생각이었지만 제 마음 안 에도 그런 마음이 들 때가 있어요.
예전에 하용조 목사님은 그런 일이 있었어요. 저희 교회에 맞춤 전도집회를 요즘 자주 하지만, 처음 시작할 때였습니다. 그래서 하목사님이 완전히 넌크리스천들만 수백 명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처음으로 맞춤 전도집회 전도설교를 하셨어요.
그런데 처음 시작할 때는 도입부분이 약간 좀 어색했어요. 그럼 워낙 뭐 탁월하게 설교를 하시니까 중간 과정이나 마무리는 너무나 좋은 설교였어요.
그런데 집회가 끝나고, 이제 사무실로 내려가시는데 한 부목사님이 가볍게 이런 말을 했어요. '목사님, 오늘 설교 어프로치(도입)가 좀 힘드셨네요?'
그분은 당시 저희 교회에서 말씀이 좋기로 굉장히 유명한 분이셨어요. 그래서 그분이 집회를 하면, 낮이고 밤이고 막 수천 명씩 모이던 때였습니다.
사실 한국교회에서 그런 말을 부목사가 한다? 이거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부목사는 그 교회에 아예 존재할 수가 없어요.
한국교회는 부목사가 설교를 더 잘하면 존재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일부러 톤다운시켜서 설교하는 부교육자도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목회자모임이 있었어요. 하목사님이 중간에 들어오셨어요. 그러더니 그 이야기를 하시는 거에요. '어제 내가 설교가 좀 도입 부분이 힘들었는데 아무개 목사가 나한테 그 이야기를 하더구만요'
하목사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서로 배우십시오! 각자가 가진 은사가 다양하기 때문에 서로가 장점이 있습니다. 이제 갓 들어온 사람일지라도, 내가 10년차 되었어도 그 사람이 설교를 더 잘하고, 예배인도를 더 잘하면 배우십시오! 가서 먼저 고개를 숙이고 배우십시오!'
저는 그 이야기를 듣는데 충격이었어요. 저는 너무나 충격을 받고 감동을 받았어요.
자신이 탁월한 사람도 훌륭하지만 자기보다 탁월한 사람들을 품을 줄 아는 사람은, 더 훌륭한 것이죠.
그런 사람이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직장에서도 세상에서도 진정한 리더십을 갖게 되어 있는 법입니다.
자신이 아무리 출중할지라도 마음이 좁은 사람은 자기 곁에 좋은 사람들을 둘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인생의 사이즈가 결국에는 좁아질 수밖에 없어요.
자기 혼자 아무리 잘 나도, 마음이 좁은 사람은 훌륭한 사람들, 탁월한 사람들을 곁에 둘 수 없는 사람은 그냥 그의 인생이 사이즈는 그 정도로 밖에 고착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여러분 다른 사람을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자기 자신도 인정할 줄 아셔야 되고요.
그리고 다른 사람을 있는 모습 그대로 칭찬해주고 인정할 수 있는 마음, 또 자신의 장점과 가능성을 인정할 수 있는 마음, 그것은 하나님을 인정할 때 나오는 마음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인생은, 이 모든 것을 인정할 수 있어요. 그런 하나님을 인정할 수 없는 인생은 자기 자신도 긍정할 수 없고, 다른 사람도 수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관계가 경쟁관계로 가지 말아야 할 이유는 내게는 나만이 가야될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에게 인생은 경쟁이 아닌 부르심 인줄로 믿습니다. 왕에게는 왕으로서 가야 할 길이 있어요. 장수에게는 장수로서 가야할 길이 있는 법입니다.
만약에 왕이 장수를 시기 질투한다면 그는 이미 왕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바꿔서 현대판으로 생각을 해봤어요. 여러분, 만약에 대통령이 IT전문가를 질투한다면 만약에 대통령이 군사 전문가를 시기한다면... 뭐 좀 이상한 사람이 되는 거죠. 그거는 정상적이지 않은 거예요.
대통령은 한 분야의 스페셜리스트가 아니라, 제너럴리스트 입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끌어안고 이끌어갈 수 있는 사람인 거예요.
리더는 제일 잘난 사람이 아니라, 모두를 끌어안는 사람입니다. 리더는 가장 탁월한 사람이 아니라, 탁월한 많은 사람들을 품고 비전을 제시하고 그 비전의 길로 이끌어 가는 사람인 것이죠.
청년여러분, 시기하고 질투하는 인생이 얼마나 불행한지 모릅니다. 늘 마음에 평안이 없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이 시기와 질투라는 것은 상대평가이기 때문이죠.
여러분 상대평가에 빠지면 결국에 그 인생은 불행하게 되어 있어요. 물론 비교경쟁을 하여서 자신을 성장시키는 원동력으로 사용하면 행복할 수도 있죠.
그러나 결국에는 나보다 나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면 그 인생은 쉼이 없어요. 그 인생은 평안이 없어요.
여러분 시기와 질투는 상대평가이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은 절대평가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예스냐/ 노냐, 내가 올인할 것이냐/ 낫씽이냐.. 둘 중에 하나에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다른 사람과 비교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자리가 내 인생 최고의 자리인 것이에요. 나를 부르신 자리에서 충성을 다하는 것 그것이 나의 인생을 최고로 실현하는 길입니다. 아멘!
그래서 여러분이 인생의 어느 분야를 선택하느냐 부터 그 일을 어떻게 하느냐, 어떠한 성과를 이루느냐? 모두 부르심에 차원에서 생각하고 판단해야 된다는 것이죠. 결국에는 자신과의 싸움이죠.
여러분, 한국사회가 고속성장을 이루고도 행복지수가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이유는 남부럽지 않게 살고 싶다는 이 경쟁심 하나로 한국사회가 놀라운 성장을 거듭했지만
결국엔 상대평가를 통해서, 우리 모두를 새장 안에 가둬두었기 때문이에요. 전부 새장 안에 가둬 둔 인생이죠.
여러분 이런 상상을 해보세요. 새장 안의 새가 있는데 옆 새장 안에 있는 새를 바라보면서 '야 내 세상이 훨씬 커, 내 세상이 훨씬 데코레이션이 예뻐, 넌 벌써 다 녹슬었구만!' 이러고 살아가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여러분 그런 새장 사이즈를 자랑하고, 모이가 누가 더 많은 지를 자랑하는 게 그게 뭐가 대단한 자랑입니까? 새장을 벗어나 창공을 날아다니고 숲 속에 살고 있는 그 자유로운 새와 비교할 수 있겠어요?
청년 여러분,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문명의 새장 속으로 스스로 기어들어가지 말라는 거에요.
10 대 후반에 대학 전공을 뭘 선택하느냐에 따라 대학을 어디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내 인생은 여기서 끝났다!' 누가 그렇게 이야기하던가요? 왜 새장 안에 기어들어갑니까?
20대 후반, 30대 초중반 직장을 결정하고 다니면서 '내 인생은 여기서 끝났다!' 누가 당신에게 그 새장 안에 기어들어가라고 했나요?
제가 여러분에게 직장에 사표 던지라는 얘기 아니에요. 여러분이 서 있는 자리가, 새장이냐 창공이냐? 이건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부르심을 따라 살아가느냐 아니면 세상 사람들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살아가느냐? 이건 다른 것이에요.
그게 새장이요 덫인줄 알면서도 모이준다고... 새장 속으로 끊임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꾸역꾸역 기어들어가고 있잖아요.
모이를 아무리 많이 먹어봤자, 아무리 공간이 넓어봤자, 아무리 장식이 화려해봤자... 새장은 새장입니다. 창공과는 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과 경쟁하면 살지 마세요. 사명과 씨름하면서 사세요. 사람 바라보며 살지 마세요. 하나님 바라보며 사세요.
여러분 사람은 상대적 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절대 기준을 갖고 계세요. 그분의 거룩도, 그분의 비전도, 그분의 나라도, 그분의 역사하심도 그분의 기준은 절대적이고.. 인간의 기준은 상대적이에요.
여러분 그러면 누구하고 씨름하는 게 훨씬 쉽겠어요? 당연히 상대적인 거죠. 기준이 훨씬 낮잖아요. 근데 그렇지 않아요. 왠줄 아세요?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우리가 그분의 부르심에 순종하면 그냥 그분의 절대성으로 우리를 덮어버리시는 거에요. 그것이 곧 구원이고, 그것이 곧 성령의 기름부으심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다 상대적이니까 '저 산만 넘어가면, 저 고지만 넘어서면 될 것 같은데...' 아니요. 끝이 없어요. 끝이 없죠. 여러분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오십 대, 육십 대 가서야 깨달으시겠습니까? 이제는 알아야 되지 않습니까? 상대적인 세상에서 끝이 없어요.
그래서 저는 '블루오션 전략', '누가 내 치즈를 옮겼는가?' 그런 책들이 뭐 굉장히 당대에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도전을 주고..
'레드오션이 꽉 차면 블루오션으로 도전하면 되지' '이쪽 골목에 치즈가 떨어지면(고갈되면) 다른 쪽 골목으로 도전하면 되지' '그래 인생을 새롭게 도전하는 거야!'
저는 그걸 보면서 '아~ 참 이게 인간의 한계구나!' 그래봤자 치즈먹는 거예요. 그래봤자 미로안에 갇혀 있는 거예요. 그 미로 위에서 나를 보시고, 나를 부르시고, 그 미로(또는 새장) 안에 갇혀 있는 나를 건져내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과연 나는 바라보고 있는가요?
아니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비교하며, 일희일비하며 살아가고 있는가요? 여러분 더 나아가서 '우리가 경쟁하지 말고 살아야 되는' 것은
우리의 관계가 협력하고 연합하며 살아가야 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아름다운 팀웍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개인도 훌륭한 팀을 이길 수 없는 법입니다. 이건 세상 사람들도 이야기하는 것이죠.
만약에 이렇게 밴드가 있는데 리드보컬이 '쟤는 나보다 드럼을 잘 치네' 드러머가 '쟤는 나보다 일렉을 잘 치네' 일렉연주자가 '쟤는 나보다 건반 연주를 잘하네' 이렇게 서로 경쟁하며, 부러워하며, 어려워하면서 살고있다는 거예요.
우리가 그러면서 살고 있어요.
여러분 각자의 역할을 하나님이 주신줄로 믿습니다. 은사와 부르심이 있는 것은, 우리가 각자의 소명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때 하나의 아름다운 그림을 이루어 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통로가 되기를, 하나님이 원하시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그것이 진정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에요. 그것이 진정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기쁨이에요.
자기는 최선을 다하고도, 부르심의 자리에서 노력하고도 늘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마음은 바닥을 치고.. '나는 뭘 못가졌고, 나는 뭐가 부족하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신의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아멘! 절대자이신 그분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 내 인생은 부족함이 없어요.
아니 상대적 존재가 다 부족하지, 어떻게 부족하지 않습니까? 부족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세상과 경쟁하면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10~12절 '그 이튿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그가 집 안에서 정신 없이 떠들어대므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그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11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사울이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의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 12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이 단락에 대한 제목을 붙인다면 "사울의 창과 다윗의 하프"입니다. 여러분 인생에 비교하기를 멈추세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인줄로 믿습니다. 비교하는 것을 멈추셔야 돼요.
여러분이 부르신 대로 살지 않고 계속 비교하면서 살면 그 시기심과 상처가, 오늘 본문에 보면 악한 영이 사울에게 강하게 내리덮쳤다...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마음 가운데 그 부정적인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면, 벗어나지 못한다면, 멈추지 못한다면... 악령이 역사를 한다는 거예요.
악령이 그 거절감과, 분노의, 그 상처의 빈틈을 파고들어서 역사하는 것이죠. 다윗이 사울을 위해서 수금을 탑니다. 하프를 연주해요.
그런데 사울은 다윗을 향해서 창을 던지죠. 저는 이 장면이 굉장히 중요한 상징적인 장면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다윗의 하프는, 사랑과 위로, 헌신과 섬김을 의미하지만 사울의 창은, 애증과 집착, 분노와 절망을 의미하는 것이죠.
나는 내 손에 창을 들고 있는가요/ 아니면 하프를 들고 살아가는가요?
사울이 골리앗에게 창을 던졌습니까? 아니요. 던질 용기가 없었어요. 밖에 나가서는 무서워서 창도 못 던지면서 집에 들어와서는 자기 가족에게 창 던지는 사람들이 있죠.
회사에서는, 위에 임원들한테 불려가서는 아무 소리 못하다가 자기 팀원들에게 와서 창던지는 부서장들이 있죠.
그런 이중적인 생활, 이중적인 내면... 그러나 다윗은 밖에 나가서 골리앗을 쓰러뜨렸어요.
칼과 창을 들고 블레셋 군대를 마주하여서 놀라운 공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집에서는 창을 던지지 않았어요. 창을 잘 던질 수 있는 사람이지만, 집에서는 창을 던지지 않았어요.
집에서는 하프를 연주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을 바라볼 때, 우리는 철저히 직장에서나 교회에서나 대중 앞에서는 예의를 잘 입니다.
그러나 집에 가서는 창 던지고, 언어의 예리한 칼 휘두르고 온갖 욕설과 독설과 짜증과 분노와 몰매너와 이기심을 쏟아놓는 사람들이 있어요.
당시는 사울인가/ 다윗인가요? 당신 손안에 들려있는 것을 보면, 당신이 누구인지를 확인할 수 있어요.
당신의 손에는 도대체 다윗의 하프가 들려 있는 것인지, 아니면 사울의 창이 들려 있는 것인지... 살펴봅시다.
회사에서는 하고 싶은 얘기를 잘 하지 못하고, 예의 바르게 지내던 사람이 명절마다 집에 가서는, 나를 위해서 평생을 수고하신 부모님께 속에 담아두었던 그 모든 쓴 이야기를 다 쏟아놓고, 짜증내고... 부모님 가슴에 못을 박고
뒤돌아서는 '내가 왜 이러는가?' 하면서도, 늘 그것이 반복되는 사람들이 있죠.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프는 약하지만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창은 강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사랑은 약해 보이지만 결국에 승리할 것입니다. 권력은 강해 보이지만 결국에는 망할 것입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게 돼 있죠. 사랑을 베푸는 자는 사랑 받게 되어 있고요.
다윗의 하프는 그가 일개 목동임을 보여주는 상징이지만 사울의 창은 그가 일국의 왕임을 보여주는 상징물이었어요.
그러나 사울은 창을 휘두르며, 왕의 권력을 오/남용했기 때문에 그의 왕권은 온전할 수가 없었죠.
그러나 다윗은 하프를 연주하며, 왕으로부터 모든 백성에 이르기까지 온 국민을 위로했기 때문에 그는 날로 사람들의 사랑을 더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결국에 사울은 최고의 자리에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내리막길로 갔고, 다윗은 가장 미천한 자리에 있었지만, 인생이 갈수록 오르막길로 올라가게 된 거예요.
여러분 저는 이 사울이 가지고 있는 마음과, 다윗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차이는 두 사람이 갖고 있는 거울의 차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12절에, 사울이 왜 다윗을 두려워했는가요? 하나님의 임재가 사울을 떠났고, 하나님의 임재가 다윗에게는 있었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의 얼굴을 의미하고 하나님의 얼굴은 우리 인생의 거울과 같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마주 바라보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 바라보면 내가 어떤가요? 볼품없죠. 너무나 망가져 있죠.
근데 참 놀라운 것은, 절대자 앞에 망가져 있는 나 자신을 보면서 자격지심에 빠지는 게 아니라, 회복이 일어난다는 거에요.
왜냐하면 '내가 나의 형상으로 너를 창조하지 않았느냐? 내가 목숨을 걸고 너를 구원했다.'
부모 앞에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보이는 거는 부끄럽지 않죠.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임재라는 그 거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볼지라도, 그 인생은 회복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요. 다윗은 그래서 그가 정말 밑바닥이었지만, 목동이었지만, 사랑받지 못했지만, 가정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하나님을 거울삼아 살았기 때문에, 늘 자존감이 충만한 아이였던 거예요.
사울은 최고의 자리, 왕의 자리에 올라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버렸기 때문에 '거울아 거울아 거울아' 아무리 불러봐도 하나님을 바라볼 수 없어요.
보이는 것은 주변에 잘난 사람들, 자기가 사실 모든 것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위 사람이 조금이라도 자기보다 나은 것이 있어 보이면... 불안한 거예요.
가지지 못한 사람이 가진 사람을 시기하고 지위가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의식할 것 같지만
사실은 많은 걸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시기심과 질투심에 가득 차 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인생을 바라보고, 사람을 바라보는 거울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나의 인생에 거울로 삼아 살아가는 인생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인생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 사람은 결국에 올라갈 것입니다.
여러분, 사울의 창과 권력과 왕권이라는 것은 세상에 그것보다 더 강력하고 실제적인 것은 없잖아요. 그것을 발판삼아 디디고 올라가면, 자기 인생이 막 올라갈 것 같은데
참 놀랍게도, 왕이 가지고 있는 그 철권은 밟을수록 늪처럼 빠져 들어가는 것이고요.
반대로 하나님의 임재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의 임재와 성령의 감동하심을 타고 올라가는 사람은 마치 창공을 비상하는 새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데 그 바람이 그 인생을 비상하게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나는 세상을 의지하면서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것인가요? 함께 눈을 감고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