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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설교 10분 이하 아래 녹취, 정리했습니다
◈나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시130:1~5
'구원의 내용이 뭐냐?'라고 물어보면..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내가 하나님과의 연결되어 연합상태를 유지하는 것.. 이 구원입니다.
그런데 맨날 말로만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말만 하지
실제 삶에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려고, 연합하려고 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래서 죄 사함의 얘기가 오늘 본문 시130편의 핵심 주제가 되는데
이 죄 사함이 도대체 우리에게 어떤 걸 요구하고 있느냐? (주님과 연합이에요)
본문 시130편은, 참회시들 중에 하나에요.
마르틴 루터도 아주 좋아하셨던 그런 시편이에요.
1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2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3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여기서 '깊은 곳'이라는 것은
그 깊음은, 바닥을 헤아릴 수 없는 까마득한 심연을 말합니다.
근데 그게 도대체 어떻게 해서 그 상태에서 기쁨이 발생했느냐?
먼저 자기 죄의 깊음을 보는 거예요.
자기 존재의 현실이 어떤 상태냐?
바닥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심연과 같은 죄인인데
그 죄의 깊이가 너무 깊어서 끝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계기에서 인지는 모르겠으나
본 시편의 저자가 지금 '자기 죄가 얼마나 깊은지...
바닥을 알 수 없는 심연 처럼 깊은 죄' 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죄의 무게에 짓눌려서 고통스럽게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3절에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라는 절규는,
도대체 우리 인간의 편에서는
'어떻게, 무슨 힘으로, 그 누구라서
거룩하시고 의로운신 하나님께로 다가갈 수 있겠습니까?'
'주 앞에 서리이까?' 라는 절규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심연과 같이 깊은 죄악으로부터
자기의 삶을 돌아보거나, 아니면 지금의 형편을 돌아볼 때
그 죄로부터 나온 열매로서, 그 결과로서
자기 삶도 아마 엉망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인이 절규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절규의 내용 중에, 4절이 눈에 확 들어오는 거예요.
4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죄 사함에는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죄 사함은 그 목적을 위한 전제 조건이라는 겁니다.
죄 사함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는 죄 사함 자체를 구원으로 생각할 수가 있어요.
근데 죄 사함 자체가 구원이 아니라는 겁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주를 경외하는 상태가 구원이라는 거에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죄 사함 자체가 구원이 아니에요.
죄 사함은 구원의 전제조건인데
구원받았다 라고 하는 것은
내가 지금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는 상태일 때 (또는 연합하고 있을 때)
'구원받았다'는 얘기입니다.
요한복음의 언어로 말하자면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되었을 때'
즉 '내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고..
주님이 내 안에 있고, 내가 주님 안에 있고..'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인 것처럼
그 연결과 연합에 초청받아서
그 (삼위일체의) 하나 됨에 (내가) 참여된 상태가 구원이라는 겁니다.
근데 거룩하시고 또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삼위일체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되려니까
필요한 것이 뭡니까?
나도 거룩해야 되고 나도 청결해야돼요.
하나님이 나를 껴안으실 수 있을 만큼 깨끗해야 됩니다.
내가 하나님께 다가가도,
하나님이 나를 뿌리치지 않으실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해야 하기 때문에
죄 사함이 필요하다.. 라는 겁니다.
죄 사함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죄 사함 받아놓고, 돈을 최고로 여기면 왜 안 되느냐?
죄가 뭐죠?
'돈 많이 벌면 기쁠거야, 돈 많이 벌면 나는 만족할 거야!' 하는
이 신념이 죄예요.
근데 내가 이제까지 아주 열심히 돈을 벌었어요.
근면 성실은 좋은 덕목이지요!
그러나 한 가지 내 마음에 유지되고 있었던 건 뭐냐면
'이렇게라도 돈은 벌어야 된다. 그래야 내 삶이 안정되고 평강할 수 있고
만족과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라고 믿었다면..
그는 모범시민 인지는 몰라도.. 주님 앞에 죄인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본문 시편의 저자는, 그 자기 죄의 무게를 보는 거예요.
얼마나 얼마나 그것이 하나님께 몹쓸 짓이었는가를 본 거라는 겁니다.
천하에 못할 짓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들어오셔야 될 내 마음의 공백,
마음의 공백은 거룩한 곳입니다. *내 영혼
하나님께서 들어오시기로 작정하셔서 만들어 놓으신 공백이니까요.
그런데 그곳(하나님 자리)에다가
재물을 집어넣고, 출세를 집어넣고,
이 세상의 가족을 집어넣고, 명예를 집어넣고, 자녀를 집어넣고,
별의별 것을 다 집어넣고 보니까
이 순백의 하얗게 지음 받았던..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맞추어진 색깔로 지음 받았던 내 마음이
얼룩지고 찌들고 더러워지기가
마치 깨끗한 순백의 실크 블라우스에
시뻘건 김치국물을 한 사발 뿌려놓은 것과 같다는 거죠.
김치도 더러운 게 아니고, 실크 옷도 더러운 게 아닌데
둘이 붙으면 더러워지지 않습니까. 도저히 입을 수가 없는 상태가 되지요.
그런 것 같이, 순백의 실크같은 마음 안에,
가족은.. 김치 같은 거에요.
더럽지 않아요.
근데 그 가족을 내 영혼에 우선적으로 담으니까, 얼마나 더러워지냐면...
아무리 가족이 좋아도 하나님과 같겠습니까?
근데 하나님이 들어야 할 자리에 그걸 집어넣고 살고 있으니까..
내가 하나님을 두 번째로 미뤄놓고, 자식을 사랑하고
내가 하나님을 두 번째로 밀어놓고, 돈 버는데 열심을 다하고
내가 하나님을 밀어놓고, 내 아내를 우선하고
내가 하나님을 밀어놓고, 내 애인을
내가 하나님을 밀어놓고 권력을
내가 하나님을 밀어놓고 승진을 더 우선적으로
내 기쁨과 내 만족의 이유로 삼고 살았던 모든 것들이
얼마나 얼마나 더러운 죄인가를 깨닫고
시편 기자는 그 죄의 깊은 심연을 보는 겁니다.
(본문에 구체적으로 안 나오지만, 모든 죄가 그런 공통점이 있죠)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제외하기를 좋아하고
하나님을 등지기를 즐겨하고
하나님이 들어와야 될 자리를 더럽히기를 좋아하는 인간이었는가를
깨닫고 절규하는 거예요.
'용서해 주시옵소서, 저를 용서해주시옵소서!'
'용서해 주심으로 제가 이제는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 길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구원이라는 겁니다.
하나님 경외, 하나님과의 연합, 하나님과의 연합을 위해서는
죄 사함이 필수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경외가 뭐에요?
없으면 최고로 두려운 마음가짐,
무엇인가.. 어떤 대상이.. 어떤 존재가 없으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두려운 마음가짐.. 이게 '경외'에요.
반대로, 있으면 살 수 없을 정도로 두려운 것은 '공포'에요.
그래서 똑같이 '두려움'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데
경외는.. 없으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만큼,
그렇게 소중하고 귀중하고 나의 전부인 그런 존재..
그 분이 나의 경외의 대상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죄 사함, 사유하심이 왜 필요하냐?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함인데
우리는 죄사함 받아놓고 '나 구원받았네 너 구원받았네' 찬송부르며
나가서 열심히 돈을 벌고, 돈을 벌어야 된다는 생각으로 돈을 벌고
돈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으로 돈을 벌고,
돈으로만 기쁘고 만족한다는 생각으로 돈을 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죄사함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죄사함 받았어요. '나 구원받았네, 너 구원 받았네' 노래하고 나갔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돈이 자리를 틀고 앉아 있어요.
그리고 자녀의 형통을 위해서 내 있는 힘을 다합니다.
자녀가 형통해야 내가 기쁘고 만족하다고 생각하면서 거기에 몰입합니다.
그런 인생에, 죄사함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게 죄입니다.
자녀의 형통이 내게 만족과 기쁨을 줄 수 있다고 믿었던 그게 죄입니다.
그런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결과,
모든 범죄 행위들도 그 열매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십계명은, 십계명이 아니라
'1계명과 9개의 열매'라고 보면 정확한 겁니다.
내게 기쁨과 만족을 줄 수 있다고 믿어지는 대상이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했을 때의 '다른 신'이에요.
내가 다른 신을 안 섬기면, 아홉가지 계명도 저절로 지키는 거예요.
다른 신을 안 섬기고 여호와를 섬기면, 십계명을 다 지킬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그 다음 구절을 보면
'여호와를 바라도다.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이다.
참으로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하도다.' :6
제가 카투사로 있을 때 보직에 따라서
카튜사도 일반 미국 보병들과 함께 야외훈련을 할 때가 있어요.
3~4월에 야외훈련을 합니다.
그런데 동료 미국 군인이면 '딱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그래요.
왜 죽어버렸으면 좋겠냐 물어보니
삼월 사월인데도 밤에 보초를 설 때 그 새벽이 얼마나 추운지
딱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온몸에 두른 장비가 굉장히 좋거든요. 양털로 만든 파카 에다가
뭐 어마어마합니다. 그런데도 "밤새" 보초를 서다 보면
잠도 못 자고, 춥고, 피곤하고... 그러면 괴롭지요.
딱 죽어버리면 좋겠다 라는 심정이 든다는 거에요. 너무 너무 추워서.
시간이 너무너무 안 가서...
그래서 파수꾼의 심정이 이런 거예요.
'얼른 해가 떠라' 이 심정으로 여호와를 기다린다라는 겁니다.
이렇게 여호와를 기다리는 자들에게 제일 큰 방해가 뭐예요?
죄입니다.
거룩하지 못하면 하나님과 연합하지 (구원의 상태에 이르지) 못 합니다.
여호와는 좋아 죽겠는데.. 여호와 하나님이 그리워죽겠는데
내 죄 때문에 갈 수가 없을 때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짜잔 하고 돌아가신 겁니다.
그래서 복음인거에요.
그러니까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 그렇게 하나님을 기다림 보다
돈이 많이 벌릴 것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는 복음이 아니고, 죄 사함도 의미가 없어요.
자녀의 형통을,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기다리고 있는 분들에게는
십자가는 복음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십자가는
재물을 기다리는 분들에게 재물을 준다는 약속을 담고 있지 않고
건강을 기다리는 분들에게 건강의 약속을 담고 있지 않고
자녀형통을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기다리는 분들에게
자녀형통의 약속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간절한 기다림으로
"하나님"을 갖고 싶어하는 사람들 에게만
십자가는 복음인 거예요. :6
하나님을 갖고 싶은데, 정말 갖고 싶은데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싶은데
하나님과 연합하고 연결되고 싶은데
그 연결된 상태로 사는 것이 구원인데
이 구원을 간절히 바라고 바라는 사람들이
내 죄 때문에
자꾸 자꾸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 기쁘고 만족하려고 하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음은 이미 본능적으로 그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돈 벌어서 기뻐야지'
'건강해서 기뻐야지'
'자식 잘 키워서 기뻐야지'
'승진하면 기쁘지'
'교회가 숫자가 늘어나는 게 기쁘지'
'예배당이 몇백억 짜리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다. 아니다.. 하는데도
내 마음은 자꾸 본능적으로 끌려가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세상 것을 기쁨으로 알고
내 마음이 거기로 매일 끌려가고 있으니
어떻게 아버지 하나님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겠습니까!
▲본문 5절에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말씀 안에 내 소망을 두는 도다' ... 이런 뜻입니다.
여호와를 기다리는데, 어떻게 내가 여호와가 오실지 알 것이며
내가 여호와를 어떻게 만날지 알 것이냐?
말씀 속에 있다..는 거에요.
그 말씀이 육체가 되어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겁니다.
십자가에서 죄 사함이 이루어지고, 십자가로 하나님은 오실 수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삼라만상을 지금도 다스리고 계시지만
인격적으로 내가 하나님 안에 들어가 있고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실 수 있는.. 그러한 사랑의 관계를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실 수 있는 포인트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위 밖에 없는 거예요.
우리는 말씀으로 그 십자가를 만납니다.
그래서 죄 사함 받은 자들은, 돈을 최우선으로 살면 안 돼요.
돈과 관계되는 일을 할 수는 있지만
돈 버는 것으로, 내 만족을 얻으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자녀 양육과 관계된 일을 하지만
자녀 양육을 통해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게 죄니까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나님만이 내 기쁨이고 만족이기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이미 기쁘고 만족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직장에 나가서 일을 할 수 있지요.
그러나 그 직장 일로 돈을 벌어서, 내가 만족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죄 사함이 의미는 사라져 버리고 만다는 거에요.
(내 만족의 근거는 오직 하나님이어야만 해요)
죄사함의 의미는 뭐에요?
직장에서도 하나님과 연결되어서
다른 모든 사람은 직장에서 돈 많이 버는 게 기쁨인데
나는 이미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에서 (연합되어) 기쁘면서
그 넘치는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 직장에 나가서 일하는 겁니다.
결혼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우자를 통해서 만족을 얻는 게 아닙니다. 얻지도 못합니다.
내가 하나님으로 인해, 그 연합의 기쁨과 만족을 얻는 후에,
그 다음에 내 배우자를 만나는 겁니다. 이때 가정에 평화가 연속되지요!
그렇지 못하고 배우자를 통해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 하면.. 전쟁이 연속되지요!
모든 엄마들, 죄사함 받지 못한 엄마들은, 복음을 안 받아들인 엄마들은
자녀 양육을 통해서 기쁘고 만족하려고 자녀를 키우는데
나는 하나님과 연결된 구원받은 상태여서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과 만족을 가지고서
그 기쁨과 만족을 표현하는 대상으로서 자녀를 만나고
자녀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고, 키워나가는 것입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예요. 교회 부흥을 위해서 목회하지 않아요.
하나님과 만나서 만족과 기쁨을 얻은 상태에서, 목회를 하는 겁니다.
목회가 잘 되든/안 되든.. 만족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내 인생의 완성이에요. 내 인생의 완성!
우리가 별의 별 일을 다하고, 별의 별 성과를 다 남겨도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이루신 십자가가 내 것이 되는 것,
그 이상의 성과를 올릴 수가 없습니다.
내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돼가지고
남북을 통일시키는 역사적인 과업을 수행했다 해도
그 대통령 자신에게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었다는 사건보다
더 위대한 사건이 될 수가 없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사건을 그냥 '내가 주님과 함께 같이 죽었다.
주님이 죽으실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주님이 죽으신 사건을 가만히 뒤져보니까 주님이 죽어야 할 이유가 없어요
'그 이유가 나한테 있구나..' 그 이유가 뭐에요?
내가 하나님을 제껴놓고 이 세상에서 다른 것들로 기쁘고 만족하려고 살았구나.
내가 세상을 사랑했다는 거에요.
하나님 말고 다른 대상을 사랑했다는 거예요.
▲조지 뮬러의 묵상으로 기도하기 (펀 글)
기도의 성자라고 일컬어지는 영국의 죠지 뮬러는
기도의 비밀을 묻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이런 충고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기도하십시오!” Pray according to His promise!
전에는 일어나자마자 가능한 빨리 기도하려고 했으며,
아침 식사를 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기도에 전념하려고 했습니다.
저는 어떠한 경우에도 무조건 하루를 기도로 시작했는데,
(그게 잘 안 되었다는 거지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상태에서
기도만 맹목적으로 하려고 했으니까)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저는 종종 영혼의 위로와 격려와 겸손의 필요 등을 깨닫기도 전에
무릎을 꿇은 채 15분이나 30분, 혹은 한 시간 가량을 허비했던 것입니다.
그 시간 동안 어지러운 마음으로 많은 고통을 겪은 후에야
겨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식으로 고통을 당하는 데서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제 마음은 먼저 진리의 말씀으로 꼴을 얻고,
(말씀 묵상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말씀 묵상을 통해 하나님을 뵙고 나서)
하나님의 귀하신 말씀을 통해 제게 비추어주신 것들에 대해,
그분과의 체험적인 교제 가운데서 저의 아버지이자 친구 되신 주님께
하나하나 말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기도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조지 뮬러의 일기에서
▲주님 지금 제가 절망하는 것은
저에 대한 지나친 사랑 때문입니다
저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고
제가 받아야 할 영광이 훼손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인가를 상실했지만
그로인해 누려야 할 저의 기쁨이 떠나간 것으로 인해
힘들어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 자신을 학대하고 있지만
주님앞에서 저를 내려놓은 겸손이 아니라
내가 무엇인가를 이룰 수 없다는 실망감으로
무기력해져 있습니다
이제까지 달려 온 정상을 향한 길에서
갑자기 마비가 온 것은
저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자신감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꽂아놓은 깃발이 나부끼는 자기 공화국에서
저는 보좌에 앉아 그 속에서 군림하기를 원했습니다
기도를 했으나.. 저를 세우기 위함이요
봉사를 했으나.. 제가 남보다 선행을 했다는 자기만족이요
교제를 나누웠으나.. 제가 인정받고 있다는 기쁨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을 했으나.. 그곳에도 저의 행복이 우선시되었고
축복을 했으나.. 상대보다 저를 더 우위에 두고 싶어 했으며
이 땅이 아니면, 하늘에서조차 보상받고 싶어 했습니다
나의 주님,
그토록 당신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주께서 저의 낡은 옷을 벗기시고,
묵은 짐들을 정리할 때마다
감사하기는커녕 비통해하고, 고뇌했으며
당신을 원망했습니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기보다는
날마다 힘겨운 잔들이 옮겨지기를 구하였습니다
오직 십자가 없는 면류관만을
믿음의 기적으로 사모했습니다
주님은 저에게 생각할 수 있는 지성을 주셨고
사랑할 수 있는 감성을 주셨으나
이 모든 능력을 당신의 보좌로 가져가기 못했기에
나의 하늘은 먹구름이 끼었고
나의 얼굴은 굳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하기를 저는 주님을 향한 순교자로 여겨졌고
세상에서 일방적으로 당한 피해자로 여겨졌습니다
지나친 열정과 강박증에 가까운 집착 후에는
자기비하, 열등감, 무력증에 시달렸으니
내가 앓고 있는 우울증과 무력감의 중병은
자기사랑으로 인한 부패된 죄성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자기 환상’과 ‘자기 확신’을 불어넣으면서
‘네 믿은 대로 될 지어야!’ 하며
이루어질 수 없는 자기와의 사랑을 부추길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에 왕국에 이르는
절망의 나락으로 초청하는 것입니다.
나의 주님
이 세상에서 완전한 상실은 없습니다.
이는 애초에 제 자신도 주님의 것이었고
제가 가진 것은,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벗기시고, 낮추시고, 방향을 돌리심은
낮아진 저를 입히시고, 높이시고, 온전한 새 길을 주시기 위함이십니다.
우리의 완전한 행복은 나를 부인하는 그곳에만
존재할 뿐입니다
나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만 바라는 그곳에만.. 온전한 자유가 있습니다
당신을 구하는 그 곳에만.. 참된 기쁨이 있고
당신의 영광을 소원하는 그 곳에만..
주께서 임재하시는 거룩한 희락이 있나이다
진정한 겸손은
내가 사라진 보좌위에
오직 주께서 왕이 되셔서
저를 다스림 속에서 존재하나이다
주님을 최고로 사랑하지 않고서
저를 사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니
이는 당신만이 저의 진정한 근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부인하는 것이 곧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