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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수한그릇, 흔들리는 다윗의 도피생활

LNCK 2023. 3. 15. 18:43

◈흔들리는 다윗의 도피생활                 삼상20:1~23              인터넷설교녹취

◑1. 다윗의 관점에서 본문을 해석하면  (아래에 요나단의 관점이 나옴)

▲삼상19장 후반부 복습 
사울의 살기등등한 추적과 위협 앞에 다윗이 결국은 도망을 가죠. 
어디로 도망을 갔냐면, 선지 학교 캠프가 있는 라마 나욧으로 도망갑니다. 

이 정보가 사울에게 들어갔습니다. 
'라마 나욧에 당신이 찾고 있던 다윗이 은둔해 있습니다.'  

사울은 자기 사람들을 보내서 다윗을 붙잡아 오려고 해요. 
첫 번째 갔던 군사들이 다윗을 잡으러 갔다가 
성령이 임해 버리는 바람에, 그 군사들이 갑자기 예언을 하게 됩니다. 

두 번째 팀, 세 번째 팀도 성령께 제압이 되어서 예언을 하게 되죠. 
(사무엘이 이끈 라마 나욧 신학교의 영성이 대단했나 봅니다)

세 번씩이나 연거푸 이런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간섭과 보호아래 
하나님은 다윗을 철저하게 감추셨습니다. 

이 소식을 사울이 듣고 '그래? 그럼 이번엔 내가 직접 간다'
그래 가지고 자기가 직접 라마 나욧으로 갑니다.

자기는 다윗을 잡을 줄 알았는데 
자기 마저도 성령에 붙들려서, 예언을 하고, 벌거벗고 한나절 동안 누워있는 
추태를 드러냅니다. 그만큼 다윗을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보호하시고 
그를 감추시고 간섭하셨어요. 삼상19:22~24 

하나님께서 사울의 살의와 끈질긴 추적으로부터
다윗을 계속 보호하십니다. 이걸 다윗이 어디서 경험 하냐면 
과거에도 몇 번 경험이 있었지만, 특별히 라마 나욧에서 크게 경험을 하죠.

(어떻게 자기를 잡으러 온 군대가 세 번씩이나 예언을 하고...  
그러니 정신이 몽롱해진 상태가 된 거죠. 한 번도 아니고
어떻게 그런 일이 세 번씩이나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네 번째는 사울 왕도 벗은 몸으로 정신이 몽롱해서 예언을 합니다.
여기서 '예언'은 정말 선지자처럼 올바른 예언을 한 게 아니라
횡설수설을 한 것에 가깝습니다.)

▲20장 본문 시작
사람이 참 연약한 것이, 우리도 늘 그런 과정을 겪습니다만
신앙이 꾸준히 일관된 사람이 그렇게 쉽지 않아요.

특별히 청년 시절은 그 기복이 더 심한 것 같아요.
과거 제 경험을 봐도, 청년 시절엔 up and down 이 좀 있어요.

나이가 들고 이제 머리가 희끗해지기 시작하면 
웬만한 바람 앞에도 꼼짝하지 않는 신앙의 용기와 담대함이 생기죠. 

그런데 다윗이 19장 라마나욧에서 이런 놀라운 경험을 하고도 계속 불안한 겁니다. 
'내가 여기서 그냥 썩는 거야? 뭐 좀 덜 돌파구가 있어야 될 텐데... 
여기 그냥 이러고 있어도 되나?' 

다윗의 심령이 꿈틀거리고 근질근질 거리기 시작했어요.
'이건 아닌 것 같아'  *라마 나욧에서 계속 죽치고 있는 것

'내가 그래도 명색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는데 
이러고 여기서 죽치고 있는다고 왕이 될까?' 

그리고 지금 사울의 군대가 라마 나욧을 포위하고 있는 상황에서
또 신변의 위기 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라마 나욧을 떠나기로 결정합니다.

20:1 '다윗이 라마 나욧에서 도망하여 요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죄악이 무엇이며 
네 아버지 앞에서 내 죄가 무엇이기에 그가 내 생명을 찾느냐?'

거기서 막 견디지 못해 가지고 라마나욧 를 떠난 겁니다. 
그 말은, 거기에 가장 인생의 멘토요, 영적인 지도자가 있는 
선지자를 성급하게 떠났다는 얘기가 됩니다. 

▲거기를 떠나서 누구를 찾아가냐하면 '요나단에게 이르되'  :1
누굴 찾았어요? 친구를 찾아가요. (아마 요나단은 기브아에 있었을 거예요)

여러분, 요나단은 사울의 아들이에요.
사람이 그래요. 다윗은 아마 이런 계산이 있었던 거 같아요.

'그래도 명색이 내가 사울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의 절친인데 
내가 이러고 있는다고 내 위기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담판을 좀 지어야 되겠다. 친구한테 가자! 
그래도 요나단은 아버지(사울)의 속내를 가장 잘 알 거 아니겠는가?

왕이 정말 나를 어떡하려고 그렇게 위협을 하며 뒤쫓아 다니는가? 
그 진의를 좀 알아보고 담판을 짓든지, 
해결책과 방법론을 도출하든지 해야 되겠다.' 

사람은 가장 못 하는 게 뭐냐면, 가만히 엎드려 
하나님의 시간과 하나님의 방법을 기다리는 걸 가장 못 합니다.  

이 훈련이 제일 어려워요. 
사실은 안 보이는 하나님보다는, 보이는 실체에 더 의지가 되고 
그게 더 확실한 것 같고, 그게 해결책인 것 같은 유혹에 계속 빠져요.

어쨌든 요나단은 왕의 아들이 아닙니까!
'이 친구한테 찾아가면 무슨 방법이 있겠지!' 
그런 마음으로 라마나욧을 떠나서 요나단을 찾아 기브아로 가는 겁니다. 

뭔가 요나단을 찾아가면 답이 있을 것 같고 
해결 방법이 생길 줄 알았어요.

하나님은 다윗을 왕으로 기름 부어서 
제일 먼저 사실 훈련 시키고자 했던 것이 뭐냐면 
하나님을 시간과 하나님의 방법을 기다리게 하는 훈련을 시키고자 했어요.

그래서 라마냐옷에서, 말씀의 사람 곁에서 
가만히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고 엎드려 있어야 옳았는데 
그 시간을 다윗은 견디지 못 합니다. 

계속 자기 머리 속에는, 오만가지 계산과 통박이 다 떠오르는 거예요.
'이러면 이렇게 될까?' 
'만약에 이쪽으로 가면 어떻게 되나?' 별의별 생각이 자꾸 다 일어나는 거예요.

(다윗이 일단 라마 냐욧의 포위를 뚫고, 일단 자신을 안전하게 피신시켜야 되겠다는 생각이 제일 컸을 것입니다. 자신이 노출 되었으니까, 자신을 은폐해야 했죠.)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야 이러다가 내가 미치겠다. 여기 있는 게 능사가 아니야. 
뭐라도 움직여봐야 될 게 아니야? 
여기 이 골짜기에서 허송세월하는 거 아니야?' 

벽은 가로막히고 사방에 아무것도 안 보일 때, 우리는 가만히 있질 못 해요.
뭔가 내가 좀 스스로 움직여야 답이 나올 것 같고, 확실할 것 같고, 
안전할 것 같고... 이런 생각이 자꾸 우리 영혼을 쑤시고 들어오죠.

▲결국 다윗은 그곳을 떠나서 도망해서, 요나단을 찾아가요. 
그런데 요나단을 보자마자 다윗이 쏟아내는 말을 잘 들어 보세요.

1절 '다윗이 라마 나욧에서 도망하여 요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죄악이 무엇이며 
네 아버지 앞에서 내 죄가 무엇이기에 그가 내 생명을 찾느냐?'

이 짧은 한 절 속에, '내'가 무려 4번이나 등장합니다. 
근데 지금 이 다윗의 말투를 보면, 확실히 맛이 갔어요.

지금 그의 표정을 상상하면, 굉장히 흥분돼 있어요.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냐?' 
그리고 "자기"에 너무 몰두해 있어요.
그러면 답이 안 보입니다. 

△미국에 아서 애시 Arthur Ashe라는 유명한 테니스 선수가 있었어요.
(1943~1993)
미국 사회는 당시에 흑백 인종차별의 뿌리가 굉장히 깊습니다. 
특별히 동부 쪽은 더해요. 서부는 좀 많이 섞여 가지고 좀 덜하죠.

동부는 60년대만 해도 버지니아 주 같은 경우에는 
법으로 흑인이 테니스를 못하도록 되어 있었어요.

버스 같이 안 타는 것은 물론이고, 공립학교에도 물론 들어갈 수 없었고 
이게 얼마 안 되는 과거 역사입니다. 

근데 아서 애시는 흑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는데, 
그 아버지는 경비원을 하면서 이 아들을 독실한 신앙인으로 키웠어요. 

그는 커서 테니스 선수가 됩니다. 
흑인으로서 최초로 호주 오픈, US 오픈, 윔블던 세계 대회를 석권합니다.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거죠.

그는 그 후에 심장병이 걸리게 됩니다. 
그리고 수술을 하는 과정에서 수혈를 받다가 
에이즈에 감염된 피를 수혈 받는 바람에, 에이즈에 걸리게 돼요.

워낙 유명한 사람이니까 기자들이 붙어서 취재했죠.
어느 기자가 이런 질문을 했어요.
'이럴 때 당신이 믿는 그 하나님에게, Why me 라고 원망해 본 적이 없나요?'

그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아니요. 단 한 번도 그런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윔블던 우승컵을 들어올릴 때도 '왜 나 입니까?' 라고 묻지 않았듯이
이 갑작스러운 고통과 불행 앞에서도 나는 '왜 나 입니까?' 라고 
하나님께 묻지 않습니다. 

우리 아버지의 가르침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우승을 하느냐/ 못하느냐? 
병이 고쳐지느냐/ 안 고쳐지느냐? 이 문제보다는 
늘 하나님의 뜻에 인생의 초점을 맞추라고, 
저는 그렇게 아버지께로부터 배우고 잘 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것은 
인간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이런 아직 유명한 얘기를 남긴 거예요.
그래서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그를 보고 싶어서 초청할 정도로 
아주 유명한 분이었죠. 그는 50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납니다. 

항상 사람이 영적인 위기에 빠지게 되면, 자기 문제에만 몰두하게 됩니다
사람을 만나도, 뭐 상대방이 사는 형편이 어떤지 물어보기도 하고 해야 될 텐데 
'나는 여기도 아프고, 저기도 아프고..' 계속 자기 말만 하는 거예요. 
이게 문제가 있는 거예요.

지금 다윗을 보세요. 흥분돼서 자기 문제만 말하고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한 시대를 맡기고, 한 역사를 맡기고, 어떤 일을 맡길 때 
제일 먼저 다듬는 게.. 그 사람이 성품을 먼저 다듬습니다.

제가 언젠가 그런 얘기를 했어요.
사탄이 제일 써먹기 좋은 도구는 '분노 하는 사람'이라고요. 

'분노'라는 통로를 통해서 항상 시험이 들어오고 마귀가 장난을 해요.
지금 다윗은 영적으로 이미 절반 이상 망가져 있어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자마자 '야, 내가 무슨 잘못을 했냐? 
너희 아버지 나한테 왜 그래? 내가 뭐 어떡하라고?' 막 퍼붓는 식입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가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때 이걸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서 뿌리뽑아 내야 될 것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하시고 
그를 라마 나욧에 밀어 넣고 
하나님의 시간과,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도록 했는데 
다윗이 못 참고 뛰쳐나온 거예요.
그리고 다윗은 자기 인생의 방법과 수단을 스스로 찾아간 겁니다. 

'내 절친 요나단은 왕의 아들이니까 뭔가 방법이 있겠지..'

(지금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하는 시기, 약 10년으로 추정하는데
지금은 그 시기의 초입 부분입니다. 다윗은 지금 사울왕이 자기를 죽이기로
확실히 마음을 굳힌 줄을 모르고 있어요. 앞서 2~3 차례 사고가 있었지만
'우연히 그랬겠지... 왜, 뭐하러 사울 왕이 나를 죽이겠나? 나는 사위인데...' 
그런 심정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요나단을 만나서, 자기 아버지의 의중을 한 번 확인해 보고자 했던 거죠.
그런데 아래에 나오지만, 요나단도 다윗과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진짜 너를 죽이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면 그렇게 생각하는 게 상식이요, 정상적인 판단이었으니까요.
사울이 그렇게 비정상적으로 미쳐 날뛸 줄이야.. 다윗도, 요나단도 몰랐던거죠) 

▲본문의 다윗과 요나단의 대화를 통해서 
조금 시선을 옮겨서 요나단의 행동을 보십시다. 

재밌는 것은 18:4절을 보세요.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요나단이 다윗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자기 겉옷 벗어주고, 군복 벗어주고, 칼도, 띠도 풀어줬어요.
그 (허리) 띠에는 항상 전대(돈주머니)가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하나 안 준 게 있어요.
자기 신발을 안 줍니다. 

여러분, 무장 하라고 군복을 벗어주고, 칼과 활과 띠를 줬으면,
그 완성의 의미에서 반드시 신발을 벗어 줘야 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복장의 마무리가 신발이에요. 
왜냐면 신발은 신분을, 삶의 내용을 압축적으로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요.

그래서 눅15장에 보면, 거지꼴로 돌아오는 아들에게 
제일 먼저 신발을 신겨요. 신발은 그 사람의 신분이에요. 
'너는 내 아들로 회복이 되었다!' 그 뜻이에요. 

또 서로 거래를 하다가 '이 거래가 완성 되었습니다' 라는 표시로 
자기 신발을 벗어 줘요.

그런데 요나단은, 다 벗어 주었는데, 신발을 안 줬어요. 이거 무슨 얘기입니까? 
두 사람의 길은 달랐다는 거예요.

요나단은 그렇게 다윗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도 
다윗 쪽을 안 따라가요. 다시 사울의 집으로 들어갑니다. 

여러분 성경신학 관점이나,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성경전체에서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은 
중요한 공적인 암시가 담겨져있어요.

다윗의 집을 통해서는 그리스도가 오시도록 되어있어요.
그래서 사울의 집은 늘 다윗의 집과 대척점에 서 있어요.

26:25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하니라 
다윗은 자기 길로 가고, 사울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이 두 집안은 절대 함께 할 수 없는 집안이에요.
그래서 다윗은 자기의 길로 가고, 사울은 자기의 곳으로 돌아갔다고 돼 있어요.

요나단은 다윗을 그렇게 만날 때마다 애정을 표시하고 우정을 표시하지만 
요나단은 결국은 아버지 식탁으로 다시 돌아가요. 
 
△이것은 마치 이런 것과 같아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렇게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 신앙고백을 했어요.

근데 바로 이어서 육신의 생각을 하죠. 이때 예수님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나를 넘어뜨리는 자로다'

그 베드로가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을 멀찍이 좇아다니다가, 어린 여자아이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3번이나 완전하게 부정하고 부인합니다. 

이런 요소가 요나단에게도 발견되고,
우리 각자의 신앙속에도 교묘하게 감춰져 있어요.

우린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해요. '아골 골짝 빈들에도 어디든지 가오리다' 하죠.

그런데 마지막 신발은 안 벗어줘요.
이게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를 
많은 강해자들의 주장처럼 아름다운 우정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요나단이 과거에 연기를 했다는 게 아니라, 사람은 이중성이 있다는 거죠)

여기는 교묘한.. 영적인 원리로 볼 때 전혀 다른 두 얼굴 있다는 거죠.
그것이 또한 우리 신앙의 모습 속에 은근히 타고 들어오는 
(요나단과 똑같은) 하나의 유혹이기도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가장 중요한 게 뭐냐면 
'좋은 게 좋은 거다' 가 아니라 
질서와 성경적 원리가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사랑이고, 그 다음에 은혜입니다. 

이런 비유를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린 기억이 나요.
소말리아 해적들이 서로 돕고 살아요. 끈끈한 우정입니다. 의리이죠. 
그러나 국가라는 기준에서 볼 때는, 그건 범죄행위죠. 맞습니다. 

이런 교묘한 도덕적 윤리적 속임수가 
기독교라는 진리 안에 비슷한 모습으로 들어와서 
우리를 헷갈리게 할 때가 많아요.

그래서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진리의 말씀에 서서 그것을 잘 분별할 줄 아는, 눈과 관점을 가져야 됩니다. 
그게 아주 교묘한 거예요.

20:4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든지 
내가 너를 위하여 그것을 이루리라'

지금 다윗의 걱정과 염려와 근심의 핵심은 뭐냐면 
자기 생명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이 또 맹세하여 이르되 내가 네게 은혜 받은 줄을 
네 아버지께서 밝히 알고 스스로 이르기를 요나단이 슬퍼할까 두려운즉 
그에게 이것을 알리지 아니하리라 함이니라 
그러나 진실로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네 생명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 20:3

이것이 다윗의 현실 인식입니다. 
다윗은 지금 자기 앞에 죽음의 그림자가 왔다 갔다 하는 걸 보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를 짓누르는 공포, 두려움, 자기 생명에 대한 위험을 느끼고 있었어요.
사울이라는 존재때문에! 

그래서 다윗이 지금 요나단을 찾아와서 하는 말이
'너희 아버지가, 너하고 나하고 친한 거 아니까 
아들인 네 마음이 상할까 봐, 
너희 아버지가 나를 죽이려는 의도를 숨기고 있는 거 아니냐?' :3

이렇게 좀 따지듯이 말한 것입니다.

다윗의 이 한 마디 속에는, 
다윗이 지금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한 방법과 도움을 
누구에게 의지하고 있는 겁니까? 요나단에게 의지하고 있어요.
이건 다윗의 성숙한 믿음의 태도가 아닌 거죠!

뭔가 지금 다윗의 영혼에는 문제가 생겼어요.
사자를 때려잡던 다윗이 아니에요.

신앙은 출발점에서 종착점까지 일관되게 갈 수 있다는 것이 
쉽지도 않고.. 놀라운 은혜입니다. 
끝까지 충성하는 게 정말 쉽지 않아요. 

자기가 의지로 약속하고, 결단하고, 노력하고 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순간순간마다 나를 은혜로 붙들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게 놀라운 믿음의 사람 다윗이
지금 친구한테 찾아 와가지고, 자기 목숨을 보호받기를 청하고 있어요.
이건 전혀 영적인 사람의 모습이 아니에요.

그는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근본적인 신앙성숙의 문제가 아직 해결이 안 된..
아직 성숙과 연단이 필요한 단계에 있음을.. 본문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죠.

△우리의 신앙도 '아 내가 15년 전에 대학 갈 때 장난 아니었어, 
기도하면 막 불이 나왔다고!' 

그럼 지금은요?
지금이 중요한 거에요.
자꾸 추억의 앨범을 뒤적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아무 소용 없어요. 
오늘 살아갈 힘은, 오늘 새 은혜가 필요할 뿐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요나단에게 이런 구차한 부탁을 하게 돼요.
(나에 대한 아버지의 의중을 알아다오)

▲그러자 이 두 사람 사이의 아주 재밌는 약속이 이루어집니다. 
히브리인들은 매달 새로 시작되면 첫 3일 동안은 월삭 제사를 드리고,
왕은 그 3일 동안 식구들이나 중요한 사람들을 자기 식탁에 앉혀서 
국가의 일들도 물어보고, 대화하면서 밥을 먹는 시간을 가졌어요. 

근데 히브리 인들은 자기 식탁에 앉힌다는 것은 보통 의미가 아닙니다. 
시편 23편 에도 '뭔수의 목전에서 우리에게 식탁을 베푸시고' 

왕의 식탁에 앉는다는 거는 이건 대단한 거예요. 
'분명 새 달이 오면 3일 동안 사울이 식탁을 준비할 것이다.'  
그 자리는 다윗도 있어야 돼요. 사위이니까요. 

사울의 딸과 결혼 했잖아요. 사실 그 결혼은 굉장히 큰 실수 였습니다. 
다윗은 사위니까, 또 천부장이니까, 왕의 식탁에 앉아야 돼요.

근데 지금 이런 분위기에 그 식탁에 앉아 있다가 
어디서 또 창이 날아올지 모르는 위기상황이었죠. 

"나는 월삭 제사와 식탁에 앉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에셀 바위 밑에 숨어 있을 테니까 
'다윗이 안 보이네 어디 갔지?' 그러면 
'그가 자기 가족들이 있는 고향집 베들레헴에 매년제 드리러 갔다'고 말해 다오.

그때 사울이 화를 내면.. 다윗을 여전히 죽이기로 결심한 것이고,
그때 사울이 순순이 받아들이면.. 다윗을 죽이는 마음이 없고
과거에 죽이려 했던 것은, 그저 그때 잠시 화가 난 것일 것이다..."  :6~7
이렇게 사울 왕을 시험해 보기로 한 거죠.

그리고 요나단이 사울 왕의 의중을 확인하고 나서
다윗에게 전달하는 방식을 또 두 사람이 약속합니다. 
이렇게 비밀리에 약속을 한 것은, 왜냐면 다른 사람들이 혹시
들판에 있으면, 요나단이 사울의 의중을 전달해 주기가 쉽지 않았겠죠.
목격자가 있을까봐 조심했던 거죠.

다윗은 지금 에셀 바위에 숨어 있어요. 3일 동안이나. 

지금 다윗은 중요한 자기 인생의 경계점 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궁궐 생활을 계속할 수 있느냐/ 궁궐을 떠나느냐? 
지금 기로에 놓인 순간입니다. 

△늘 '빈들, 광야'라는 경험은, 모든 인생들에게 누구나 겪는 피할 수 없는 환경입니다. 
예를 들어서 모세, 예수님, 그 사이에 지금 다윗이 있어요.

모세도 궁궐에서 떠날 수밖에 없었죠. 
그리고 바로 찾아 온 것이, 광야와 빈들의 경험이에요.
그 들, 광야의 경험이 모세를 만듭니다. 
40년 동안을 대화할 사람이 없었어요. 말도 어눌해지고 잊어버렸을 정도였죠.

말이 40년이지.. 그 들판에서 어떻게 지냈을까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갑갑한 정도가 아니죠. 

그리곤 그가 완전 무기력해지고 힘 빠졌다고 생각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역사 속에 콜링하시지 않습니까? 

아마 우리 청년들 가운데서 지금 답답한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뭐 하나 제대로 지금 뚜렷한 게 없는... 
갈 데는 교회 밖에 없는 그런 청년들... 

근데 여러분, 나중에 보면 그게 너무너무 내 인생 속에 
은혜의 시간이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하게 될 거예요.

이렇게 약조하고 두 사람은 헤어졌는데, 
사흘이 지나고, 요나단이 쏜 화살은 다윗의 (종의) 머리를 지나서 날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뜨거운 인사을 나누고 헤어지죠. 
이후로 다윗은 사울의 왕궁의 모든 혜택을 못 누리게 됩니다. 
왕궁 생활이 끝난 거예요. 

그리고 그는 처절하게 들판, 광야에 내몰려서 별짓까지 다 하게 됩니다.
어느 자리까지 전락하게 되는가 하면,
가드 왕 아기스에게 내려갔다가 자기 정체가 발각되어 죽을 뻔 하고, 
침을 흘리며 미친 척 해서 겨우 자기 목숨을 부지하게 됩니다. 21:10~15 
거기 가면, 자기를 못 알아볼 줄 알았던 거죠.

엎친데 덮친 격으로 공포가 계속 공포를 낳았던 거죠.
사울이 자기를 죽이려는 공포에, 더하여 아기스가 자기를 죽이려 하는
공포를 느낀 거죠.

다윗이 아기스 앞에서 느꼈던 그 때의 심경을
그는 시34편으로 써서 남겼습니다.

표제어를 보면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 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
여기 아비멜렉이 가드 왕 아기스입니다.     

시34:1~8 '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8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 고백, 그저 한 순간에 얻을 수 깨달았을 수 있었던 고백이었나요?
아니에요. 피말리는 위험 속에서 다윗 자기가 쫓겨 다니면서 
정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매며, 들판의 경험과, 
실패의 뼈저린 공감을 통해서 

'아하~ 하나님께 피하는 게 가장 안전한 것이구나' 
이것을 후손들에게 이런 영롱한 시어로 남겨 놓은 것입니다. 

이것은 아파 본 사람이, 넘어져 본 사람이, 실패해 본 사람이 
쓸 수 있는 간증이에요. 믿습니까?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것이구나!' 할렐루야!
그러니 다윗이 아예 요나단을 만나러 갈 필요가 없었던 거죠.
 
오늘날 여러분이 어떤 경황 앞에 서 있는지, 저는 세세히 알 수 없으나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다가,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뜬금없이 요나단을 찾았다가 오히려 낭패를 당한 그 행로를 
본문을 통해 공부했습니다. 

오늘 배운 소중한 원리는
'나의 가는 길에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것'임을 고백하는
승리의 한 주간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


◑요나단의 관점에서 본문을 풀어보면 (이 단락, 다른 인터넷 설교 녹취)

오늘은 요나단의 대해서 좀 살펴 보려고 하는데요. 
요나단은 다윗을 사랑하여 다윗과 언약을 맺은
즉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그를 주인으로 모신 그리스도인의 대표이고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는 제자들의 대표인데요. 

우리는 이제 요나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의 현실 속에서 마주하게 될 선택에 대해서 
좀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셨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고난과 어려움을 만나기로 합니다. 그것 말고도,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셨기 때문에 
우리의 현실을 가운데서 피할 수 없는 선택 앞에 서게 되기도 하는데 
오늘은 이 피할 수 없는 선택 앞에 선 요나단을 통해서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1. 첫 번째, 육신의 아버지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요나단이 자신을 내려 놨어요. 그리고 다윗을 사랑하였고 다윗과 언약을 맺었어요. 
그래서 다윗을 선택한 순간, 그는 이제 아버지 사울과 
그가 사랑하는 다윗 사이에 서게 되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선택하는 순간 
그는 사울과 다윗 사이에 서야 하는 그런 상황을 맞닥뜨렸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위치가, 
처음에는 그가 사울의 아들로서 다윗을 사랑하는 것이 가능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다윗과 사울간의 갈등이 증폭되고
점점 문제가 커지기 시작해요. 그래도 어느 정도 가능합니다. 

19:6절을 보면, 이제 갈등이 심해져서 
자기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거에요. 

그런데 그때 요나단이 사울에게, 다윗에 대하여 좋게 말했더니 
'사울이 요나단의 말을 듣고 맹세하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 
하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이 시기, 그러니 초반기에는, 사울이 요나단의 말을 듣는 듯 했어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악령이 점점 역사하면서, 사울의 상태가 악화됩니다.
그래서 요나단은 사울의 아들로서, 다윗을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 됩니다. 

20:1절에, 라마 나욧에서 피신한 다윗은 (아마 기브아에 있는)
요나단을 찾아가서 자신의 상황을 하소연합니다.

그러자 요나단은 아직 사태를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19:6절의 상황만 여전히 믿고 있었죠.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20:2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되 결단코 아니라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내 아버지께서 크고 작은 일을 내게 알리지 아니하고는 행하지 아니하나니 
내 아버지께서 어찌하여 이 일은 내게 숨기리요 그렇지 아니하니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아라' 라고 말했더니,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20:3 '다윗이 또 맹세하여 이르되 내가 네게 은혜 받은 줄을 
네 아버지께서 밝히 알고 스스로 이르기를 
요나단이 슬퍼할까 두려운즉 그에게 이것을 알리지 아니하리라 함이니라 
그러나 진실로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네 생명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 

다윗은 요나단의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너희 아버지 사울이 이제는 네게 알리지 않고, 몰래 나를 죽이려고 한다.
왜냐면 네가 나와 친한 줄 아니까, 네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몰래 나를 죽이려 한다'

그러니 이제 요나단은, 더 이상 아버지 사울과 친구 다윗 사이에서
어떤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제 아버지 사울이냐, 친구 다윗이냐.. 지금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 놓인 거죠.

이때 요나단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됩니까? 
20:13 '그러나 만일 내 아버지께서 너를 해치려 하는데도 
내가 이 일을 네게 알려 주어 너를 보내어 평안히 가게 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나 요나단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와 함께 하신 것 같이 너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니'

라고 말하면서, 
'나는 내 아버지 사울이 아니라 너를 선택했다.. 라고 말하고 있어요.' 

16절 '이에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지어다 하니라'

이것은 다윗과 요나단 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윗의 집과 사울의 집의 문제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지어다 하니라'
요나단은 자기 집안 전체를 치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다윗 편에 확실히 섭니다.

그러면서 요나단은 곧 이어 다윗과 언약을 맺죠.
'우리 집안 (사울의 집안) 전체를 치는 일이 발생하게 되더라도,
요나단 내 집은 거기서 제외시켜 다오'

15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함을 내 집에서 영원히 끊어 버리지 말라 하고'
  
16 '이에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지어다 하니라'

과거 당시에는, 왕조가 바뀌면, 이전 왕의 가문은 모두 멸족되는 문화가 있었죠.
그러니 다윗이 왕이 되면, 사울의 집안은 (세상 문화에 의하면) 다 죽게 되는
운명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나중에 다윗은 사울의 가문을 실제로 다 죽이지 않았죠. 
사울의 가문이 죽은 것은, 길보아 전투에 나가서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이 같은 날에 전장에서 죽은 것입니다. (이스보셋 제외)

그리고 다윗은 왕이 된 후, 요나단과 이 언약을 지켜서
그의 아들 절뚝발이 므비보셋을 왕궁에 데려와서, 자기 왕자처럼 돌봐 줍니다.

결국 요나단은, '네가 내 아버지 집안을 쳐도 나는 그것을 용납 하겠다'
라고 말하면서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자기 아버지 사울이 아니라, 다윗을 선택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주로 모시고 살아 갈 때 (불신 가정에서 나 혼자 예수 믿을 때)
처음에는 본문의 요나단처럼, 별 탈 없이 지낼 때가 있어요.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속에서 갈등이 생기게 되고 
결국은 어디까지 몰리냐 하면, 
-내 소중한 가정을 선택할 것이냐 
-아니면 주님을 선택할 것이냐?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해야 될 순간이 반드시 오게 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0:34~37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이 말씀은 '부모를 섬기지 말아라, 자식을 돌보지 말아라' 
모든 가족관계를 청산하라는 말이 물론 아닙니다. 

우리는 부모를 섬기고 사랑 해야 되고, 우리의 자녀들을 돌봐야 되고 
내 배우자, 친척들을 사랑해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면 
여기서 말씀 하신 주님의 의도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냐, or 네 소중한 사람이냐?' 라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순간이 반드시 오게 될 것인데 
그 때는 어떻게 해야 된다는 겁니까?

내 소중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셨다는 것은 
그와 함께 겸하여 누군가를 섬긴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만 섬긴다.. 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는 
부모라 할지라도, 자녀라 할지라도 
예수 앞에 세우면 안 되고 
내 마음 중심에도 (우상처럼) 세우면 안 된다 라고 말씀하시죠. 

눅9:59~62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61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61절도 너무 합리적인 것이고 당연한 거 아닙니까? 
왜냐하면 가족은 하나님께서 묶어 주신 가장 소중한 관계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62절에 예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집에서 혼자만 예수를 믿습니다. 
근데 그분이 강력한 부르심을 받고 선교지로 나가게 되었어요.

근데 아직 부모님들도 예수를 믿지 않고, 그의 형제 자매들도 예수 믿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 선교사님 마음속에 
'주님 그런데 내 아버지 어머니에게 라도 복음을 전하고
그리고 그들이 교회라도 좀 나가고 난 후에,

혹은 내 형제들, 그들이라도 예수를 믿고 나면.. 제가 선교지로 나가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어요.
'야~ 외국인들한테 복음 전하기 전에, 네 집안 식구부터 전도해야 맞지!'
이런 비난을 들을 수도 있고, 

'야~ 늙은 부모님 계시는데, 네가 안 모시고 그렇게 팽개치고 가버리면 돼?'
이런 말도 들을 수 있죠.

그리고 부모님도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분들은 예수를 믿지 않아요. 
시험에 들 수도 있죠. '하나님이 내 사랑하는 자녀를 빼앗아서 
먼 나라로 데리고 간 것 같은' 생각이 되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이런 순간에 
주님도 선택하고,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 둘 다 선택하면 제일 좋겠지요.

처음에는 이게 가능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별 갈등 없이, 둘 다 선택하면서 신앙생활 합니다.

그러나 내 믿음의 분량이 커지고,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상황이 오는 거예요. 
이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해야 되는 순간이 오는 거예요. 

이때 요나단은 과감하게 다윗을 선택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될 때는 
눈물을 머금고서라도 예수를 선택해야 된다.. 라고 본문은 우리에게 교훈합니다.

우리가 주로 모셨기 때문에, 현실속에 고난과 어려움을 만난다는 말씀도 
상당히 부담되는 말씀이지만 
그것보다 더 우리 마음을 힘들게 하는 것이 
이런 종류의 선택을 만난다는 거예요. 
혹시 과거에 이런 선택의 기로가 없었다면, 앞으로 반드시 생길 것입니다.
그때는 주님을 우선으로 사랑하고, 가족은 주님께 맡겨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2. 두 번째, 자기 자신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 됩니다. 

요나단의 아름다운 모습은 다윗을 사랑하되 자기 생명처럼 사랑했다 것입니다.

17절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사랑이 그를 다시 맹세하게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

내 생명이 우리에겐 본능적으로 소중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근데 희한하게 우리가 살다보면, 내 생명처럼 사랑하게 되는 것들이 생겨요. 

어떤 사람은 차를 새로 구입하면, 그 차가 자기 생명처럼 여깁니다.
차가 좀 긁히면, 마치 자기 몸이 긁힌 것처럼 아파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살다보면, 내 생명처럼 사랑하게 되는 
남자도 만나고, 여자도 만나고, 자식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부분 삶은, 내가 내 생명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주님을 사랑하며 사는 시간들이 됩니다. 전혀 갈등 될 게 없죠. 

그런데 본문에 요나단은, 자기 생명과 다윗의 생명,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되는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 믿음이 자라나면, 
어느 순간에 하나님께서 걸어가라 하신 길을 걸어가다보면 
'나냐, 주님(본문에는 다윗)이냐' 
그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해야 되는 순간이 온다 라는 것이고, 

그때 요나단은, 다윗의 생명을 선택한 것입니다. 
13절 '그러나 만일 내 아버지께서 너를 해치려 하는데도 
내가 이 일을 네게 알려 주어 너를 보내어 평안히 가게 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나 요나단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와 함께 하신 것 같이 너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니'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와 함께 하신 것 같이 너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니'
이 말은,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를 왕으로 세우신 것과 같이
앞으로는 너를 왕으로 세우시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요나단은, 자기가 받아야 할 왕위를
다윗에게 양보하는 것입니다.

4절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든지 
내가 너를 위하여 그것을 이루리라'

요나단은 자기가 아니라 다윗을 선택했는데, 
곧 우리에게 적용하면, 자신이 아니라 주님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외우며 신앙을 고백할 때마다 등장하는 본디오 빌라도,
그는 내 생명이냐, 예수의 생명이냐.. 그 선택의 기로 앞에서 
자기 생명을 선택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가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그의 아내의 꿈을 통해서도 '그 사람에게 손을 대지 마라. 내가 밤에 힘들었다'
라는 말을 들었어요. 

본디오 빌라도 그걸 알았어요. 그래서 예수의 생명을 살리려고 엄청 노력해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결국은 '당신이 예수를 살리면, 가이사의 반역자가 돼요!'
라고 협박하니까, 결국 그 선택의 기로에서
자기 손을 씻어버리며 '나는 이 일에 아무 상관이 없다' 라고 말하면서 
예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목숨을 선택했던 사람입니다. 
그 결정으로 인해, 전 세계 성도들이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욕 먹는 이름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은, 저 세상 사람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도 있겠지만,
사실은 우리 신자들에 의해서
'예수냐, 나냐?'의 선택의 기로에서
자기 자신을 선택하고, 자기 목숨을 선택하는 신자들에 의해서
계속 십자가에 못 박히고 계십니다.

마10:38~39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예수를 따르는 자에게 예수께서 축복도 주세요. 예수께서 은혜도 주세요. 
예수께서 말씀도 주세요. 더하여 예수를 따르는 자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내 몫의 태인 십자가를 주셨죠.

그러니 예수를 따라가다가 
나도 사랑하고 예수도 사랑하면서 따라가다가 
그러나 선택의 순간이 옵니다. 
예수만 선택하고, 나는 십자가에 죽어야 하는 선택의 순간이 온다는 겁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죽음을 선택하면서 
예수와 다윗을 살리는 자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가장 신비한 면입니다.
내가 나를 살리려고 살아 보면.. 나를 잃는다는 것을 알게 되고요 
그러나 내가 주와 복음을 위해 죽으면.. 오히려 내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구약에서 마치 그림책처럼
자신은 죽고 예수님을 살리는.. 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간 사람의 예를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