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이 그일라를 구원하다 삼상23장 설교스크랩, 녹취
지금 다윗은 계속 쫓기고 있죠. 쫓기는 삶이 얼마나 고달프겠습니까.
광야에서 광야로, 굴에서 광야로.. 또 다른 광야로 계속 쫓겨다닙니다.
본문 삼상23장은, 사무엘상 전체에서
다윗의 도피생활의 방랑을 가장 길고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살면서 광야에 서 본 적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는... 끝없이 펼쳐진 광야!
저는 짧게 이스라엘에 갔다가, 광야에 한번 들어가 본 적이 있어요.
의외로 참 무서워요. 굉장히 낭만스럽고 경이로울 것 같죠?
근데 의외로 턱 다가오는 감정이 먼저 '무섭다' 이런 느낌이 제일 먼저 왔어요.
그런데 그때부터 이상한... 내 속에 DNA가
평소에 느끼고 공감하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감각이 일어나는 경험을 했습니다.
우리가 일상속에 살면서 도시 속에서는 얼마나 잡음이 많고 소음이 많습니까.
그런 소음에 파묻혀 살잖아요.
스마트폰 확인해 봐야지.. 전화 받아야지.. 사람 만나야지..
일 처리 해야지.. 허겁지겁 하루 종일 지내요.
그렇게 일주일이 휙휙 지나가고, 한 달이 휙휙 지나가죠.
그러다가 광야같은데 한번 이렇게 던져지듯 한번 서 보세요.
평소에 분주함 속에서 전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감각들이 일어나면서
세미한 어떤 소리도 들리고...
가끔가다가 이렇게 휙 지나가는 바람 소리에 놀라기도 하고....
그런 아주 경이로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뜻밖에도 이 광야와 인생의 스토리가 뜻밖에 많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40 년 동안 광야를 걷게 됩니다.
무서운 광야를 지나게 돼요.
그리고 그 놀라운 구원의 히스토리가 만들어지기 전에
하나님은 먼저 사람을 준비하시죠.
모세를 광야에서 사십 년을 준비하게 하세요.
아무것도 없는 곳, 말 벗 하나 만나기 힘든 그 광야에서
모세가 사십년을 보내요. (그래서 말이 어눌해질 정도였어요)
그뿐만이 아니에요. 본문의 다윗도 왕위 throne 에 등극하기 이전에
치열한 광야 생활을 합니다. 쫓겨다니면서요.
짧기는 하지만 예수님도 사십 일 동안 광야생활을 했어요.
짐승만 가끔 그르렁거리는 그 무서운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금식을 하세요.
사도바울도 그를 부르시고 나서 당장 일 시킨 게 아니에요.
아라비아 광야에다 3년을 집어넣어놔요.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사이클이
오늘 현대인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겁니다.
가끔 우리도 광야를 만나죠.
여러분 복잡한 도심속에 있다고 광야가 아닌 게 아니에요.
어쩌면 더 무서운 광야속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지도 몰라요.
아무도 나를 도와주는 이 없고, 아무도 내게 말 건네는 이 없는
그런 무서운 광야에 던져질 수가 있어요. 아주 외롭죠. 고독하죠.
▲오늘 본문을 통해, 다윗의 이 광야의 경험이 갖는 의미가 뭔지?
이 스토리를 통해서 '다윗이 되게 힘들었겠다' 이게 초점이 되어서는 안 돼요.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뭘 말씀하고 싶었던 걸까?'
이게 반드시 우리 첫번째 질문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말씀을 들을 때도 마찬가지예요.
자기의 시각, 자기의 주관.. 이게 우선이 되어서는 안 되고
성경이 뭘 말씀하는가? 오늘 나에게 하나님이 뭘 말씀하고 싶은가?
그래서 성경을 대할 때는 성경을 늘 1차 문헌으로 대해야지
2차 문헌으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게 무슨 차이가 있는가요?
성경을 1차 문헌으로 대하는 태도와, 2차 문헌으로 대하는 태도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어요.
1차 문헌으로 대하는 태도라는 건 이런 겁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 여기에 관심을 두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주장(을 뒤받침하기)을 위해서 어떤 성경 구절이 좋을까?'
이게 성경을 2차 문헌으로 대하는 태도입니다.
이 실수는 설교자들도 할 수가 있어요.
'요즘 리더들이 말을 안 듣는데, 어떤 성경 구절이 좋을까?'
이런 사고방식은 안된다.. 말이에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뭘 말씀하고 싶으신 걸까?
그거를 집중하며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그일라를 구한 다윗
23:1 '사람들이 다윗에게 전하여 이르되 보소서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 마당을 탈취하더이다 하니'
지금 다윗은 헤렛 숲 속에 숨어 있어요.
거기 가까운 곳에 (13킬로 떨어진 곳에) 그일라 라는 성읍이 있었어요.
근데 지금 어떤 사고가 난 거예요. 큰일이 벌어졌어요.
블레셋 사람의 쳐들어와서 타작 마당을 탈취해 갔습니다.
블레셋은 당시 강한 국가로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방식이 아주 악질적이에요.
한해 농사를 잘 지어서 추수해가지고 타작 할 때
그 타이밍에 맞춰서, 침략해와서 싹 쓸어가는 거에요.
(요즘도 가끔 가을걷이 한 것을, 야반에 트럭에 싣고 훔쳐가는 일이 있죠)
그런데 여기에 질문이 하나 있어요.
그러면 이스라엘의 그일라 지역에 이런 일이 생겼다면
백성들이 마땅히 지금 도망자 다윗에게 가서 도움을 청하기보다는,
사울 왕에게 가서, 즉 나라에 좀 도와달라고 마땅히 요청을 하는 게 맞아요.
1절의 '사람들'이 꼭 그일라 사람들이 아니라, 제 삼자라 하더라도
지금 그일라 사람들이 노략을 당한 것을,
다윗에게 와서 도움을 요청할 상황은 아닌 거죠.
다윗은 지금 도망자 신세이거든요.
그리고 다윗의 반응도 황당 그 자체입니다.
꼭 사람들이 자기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아둘람 동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그일라 사람들이 침략을 당한 소식을 듣고
자기 마음에 무거운 부담감을 느꼈다'는 거예요.
다윗의 양떼를 사랑하는 마음이, 여기서도 잘 드러나죠.
'아니, 자기 코가 석자인데.. 지금 다윗이 그일라를 걱정할 때입니까?'
사람들이 왜 도망자인 다윗한테 부탁을 했을까요?
(아마 다윗이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에, 당한 급한 불 끄기엔 다윗이 적격이었겠죠)
하지만 여기에 신학적인 의미가 있어요.
다윗은 지금 정식 왕은 아니지만, 이런 사건의 전개를 통해서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다윗의 나라
그리고 그 다윗의 나라를 통해 그리스도가 오신 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쉽게 얘기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계시하는 그림이에요.
그래서 세상 왕국의 실제 실권자인 사울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일라 백성들이
다윗에게 와서 도와달라고 구원을 요청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것은 아직 드러난 나라는 아니지만
장차 이스라엘 한복판에 구현될 다윗의 나라,
그리고 그 다윗의 왕국을 통해서 오게 될 메시아! 그리스도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이런 사건 전개를 통해 슬쩍 계시하고 있는 그림이에요.
자 그래서 이 요청에 다윗이 반응을 합니다.
▲23:2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
다윗이 지금 하나님께, 이 요청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해서 여쭙고 있어요.
여기에 우리는 다윗의 조그마한 변화를 보기 시작합니다.
앞서 21~22장만 해도 다윗이 막 성소에 뛰어들어 가지고
허겁지겁 먹을 것 좀 달라 그러고
골리앗의 칼을 보고는 '이보다 더 귀한 게 없다'고 난리치고
블레셋 가드에 들어가서 미친 척을 하고, 또 모압 쪽으로도 도망가고요,
영적으로 내리막길에 있었던 다윗의 모습을 지난 20~21장까지 봤어요.
그런데 지금 다윗이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와서 헤렛 숲속에 숨어있으면서
이런 그일라 사람들의 도움을 요청하는 전갈을 받고, 지금 하나님께 묻고 있어요.
이건 뭘 얘기할까요?
다윗의 영성이 조금씩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자 그러면 다윗이 회복되는 게 중요하지만
무엇이 이런 다윗의 회복을 가능케 했을까요?
그것이 바로 광야생활입니다.
광야생활이라는 게 어떤 삶이에요?
아무 것도 눈에 도움이 될 만한 게 보이지 않는 공간이 광야 입니다.
숲에도 들어가보고 굴에도, 들어가 보지만
결국 그것이 영구한 피난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그래서 그는 시37, 23, 54편 등 이런 훌륭한 시를 통해서
어떤 고백을 후대에 남겼던가요?
'여호와께 피하는 자가 복이 있더라!'
물리적인 피난처가 나에게 진정 피난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광야의 도망과 방황과 방랑생활을 통해서
철저하게 자기 몸으로 깨닫게 되는 겁니다.
'천연요새인 굴도 나에게 영구한 피난처가 될 수 없고
캄캄한 숲 속도 나에게 영구한 피난처가 될 수 없고
하나님만이 내 피난처가 되시는구나!'
이게 어디서 만들어지는 거예요?
광야의 연단에서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광야'라는 말이 미드바르 인데,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다바르' 라는 말이 거기서 생성됩니다.
그러니까 광야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음성을 듣는 공간일 수밖에 없어요.
이 도심 속에서는 도무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공간이 없어요.
아무것도 없는.. 끝없이 적막함만이 펼쳐져 있는 그 광야에 툭 홀로 던져졌을 때
'아~ 정말 주님밖에는 내게 피난처가 없구나, 그분만이 내 피난처구나!'
그러면서 다윗이 나락에까지 떨어졌던 그 영성이
서서히 꾸물꾸물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징조로 다윗이 하나님께 물어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2
그런데 하나님께서 즉각 답을 해주세요. '그일라를 도우러 가라!'
(이런 과정은 아비아달이 가져온 에봇의 우림과 둠밈을 통해 물었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23:6)
그런데 문제가 생겨요. 하나님의 단호하고 분명한 응답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일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이 분명한 응답이에요. 하나님의 계획이에요.
그런데 다윗의 추종자들이 들고 일어났어요.
▲23:3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한지라'
맞아요. 저는 이 백성들의 아우성이 너무 당연하다고 봐요.
'다윗이여, 제 정신입니까?'
지금 우리 몸 하나 숨기기도 바쁜 도망자의 신세인데
아무리 그일라가 지금 탈취를 당하고, 어려움을 겪었다고 해도
우리가 들고 일어나 좇아가서 전쟁을 벌이면
대번 이것이 사람들의 입에 의해서 알려질 것이고, 우리는 노출이 될 텐데...
아주 죽으려고 각오를 하지 않는 이상 왜 이러십니까?'
백성들이 그렇게 아우성을 치고 일어났어요. :3
'지금 유다 땅에 머물고 있는 것도, 사울의 살해 위협 속에 전전긍긍하고 있는
판국에,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들이 군대를 치는 일이니이까?' :3
이때 저 같으면 이랬겠어요.
'무슨 소리야? 내가 기도 했어! 하나님이 분명히 가라고 응답했어!'
그랬을 거예요.
'내가 기도 했는데 분명히 응답을 받았는데 말이 많아? 따라와!'
다윗은 이렇게 고집 세우지 않았죠.
그런데 혹독한 광야의 생활을 통해서, 다윗이 말하자면 혈기가 많이 죽었어요.
순이 많이 죽었어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다시 기도 합니다. :4
▲23:4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여러분 어떻습니까? 다윗이 다시 기도 하니까
하나님이 이번에는 더 확실하게 답을 해주세요.
'가라 그리고 블레셋을 너한테 넘길 것이다!'
그때 백성들의 반응을 잘 보세요.
이 다윗을 따르던 6백 명의 군사들이
다윗의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태도를 보고 목숨을 걸고 따라 나섭니다.
이게 소위 말하는 '겸손과 섬김을 통한 리더십'이에요.
'뭐 말이 많아? 내가 기도 했는데 응답 받았잖아, 따라와!
이건 재론의 여지가 없어!' 이랬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다윗은 자기 고집으로 밀고 나가지 않고 다시 한번 기도 합니다.
(아마 우림과 둠밈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물음)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힐 때
한 번 더 기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일이 언제나 정확해 집니다. 하나님이 정확하게 답을 하십니다.
그 다윗의 모습을 보고, 백성들은 목숨을 건 다윗의 추종자가 됩니다.
▲23:5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쳐서 죽이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 오니라
다윗이 이와 같이 그일라 주민을 구원하니라'
이렇게 하나의 스토리가 아름답게 일단락을 맺습니다.
다윗은, 도망자의 위험한 신분이지만
그일라에 가서 그 백성들을 구원해 내고, 빼앗겼던 모든 것들을 회복해 냅니다.
이것은 서두에 말씀을 드린 바와 같이, 이 사울의 왕국 속에, 이 세상 나라 속에
감춰놓은 하나님의 나라에 신비와 계시를 그리고 있는 그림이에요.
'그것이 정말 그럴까?' 한번 우리가 추적을 해 보십시다.
◑왕, 제사장, 선지자가 모여 나라의 기틀을 갖추다
▲23:6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그일라 다윗에게로 도망할 때에
손에 에봇을 가지고 내려왔더라'
여기 아비아달 이라는 제사장이 등장하죠.
그가 다윗에게로 도망올 때, 손에 에봇(제사장이 입는 조끼)을 가지고 있었어요.
이 아비아달은 나중에 왕국에서 (대)제사장을 합니다.
자 그러면 다윗은 앞으로 왕이 될 사람이죠.
이미 기름부음은 받았어요. 취임만 남겨놓고 있는 겁니다.
자 다윗은 왕이 될 사람이에요.
그리고 아비아들은, 지금 보이지 않는 왕국이지만
감추어진 다윗 왕국의 제사장역할을 할 사람이에요.
여기 이제 하나 마저 구비를 해야 될 직임은 선지자입니다. *왕, 제사장, 선지자
22:5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
이 대목은, 다윗이 모압 땅에 들어가 숨어 있을 때
갓 선지자가 장차 이스라엘 왕이 될 도망자 다윗에게로 옵니다.
'여기 모압에 있으면 안 됩니다. 유대 땅으로 들어가십시오!'
그래서 그 갓 선지자의 충고와 조언을 듣고
다윗은 식솔들을 끌고 유대땅으로 들어가서 헤렛 수풀에 숨어있었던 겁니다.
그러면 갓 선지자와, 제사장 아비아달, 그리고 왕이 될 다윗
이 세 사람의 기름부음 받은 자가 구비되어야, 온전한 나라가 구성이 돼요.
그런데 이 나라는 아직 감추인 나라이에요. 아직 드러나지 않는 나라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불행하게도.. 보이는 나라의 권력을 더 의지했습니다.
다윗의 나라보다, 사울의 나라를 더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다윗)보다 보이는 나라(사울)를 더 의지하는 백성들
▲23:7 '다윗이 그일라에 온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알리매 사울이 이르되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넘기셨도다
그가 문과 문 빗장이 있는 성읍에 들어갔으니 갇혔도다'
그일라는 다윗에 의해서 구원받은 마을이에요.
그런데 이 그일라 사람들이, 사울왕에게 다윗을 고발해요.
세상은 그래요. 늘 속고 속이고, 배반하고 배반 당하며 삽니다.
그게 세상 나라의 속성이에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나라보다는, 보이는 가치를 더 신뢰하게 되어 있습니다.
더 의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그일라 사람들이 도움을 받고도
다윗을 사울에게 고발하는 이유가 있어요.
'이 다윗이 여기 그일라에 계속 머물면, 우리들에게 불리할거야'
그 계산을 한 거죠.
그러니까 세상에 속성이라는 건 그래요.
세상은 언제나 '이게 옳으냐/ 그르냐?'가 기준이 아니에요.
항상 '이게 내게 이익이 되냐/ 아니냐?'가 세상의 판단 기준이에요.
누가복음에도 거라사 광인이 고침을 받고
그 안에 있던 귀신들이 전부 돼지 떼에 들어가서
2천 마리가 바다로 뛰어들어가 몰살이 되죠.
그때 마을 사람들의 반응을 보세요.
'한 사람의 영혼이 온전하게 되어졌느냐/ 안 되어졌느냐' 관심이 없어요.
오직 경제논리, 이익과 손해만 따져요.
여러분 그런데 사람이 돈 때문에 당하는 고통보다도
정말 무너지는 큰 아픔이 사람한테 배반당하는 겁니다.
지금 다윗이 그일라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말았죠.
▲23:9 '다윗은 사울이 자기를 해하려 하는 음모를 알고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에봇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고
10 다윗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사울이 나 때문에 이 성읍을
멸하려고 그일라로 내려오기를 꾀한다 함을 주의 종이 분명히 들었나이다
11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주의 종이 들은 대로 사울이 내려 오겠나이까?'
다윗은 그일라 사람들의 배신을 알고는, 거기를 떠나야 될지
제사장 에봇 속에 있는 우림과 둠밈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있어요.
다윗은 그러니까 광야의 영성을 통해서 철저하게 훈련되어져서
그것이 행복한 일이든/ 불행한 일이든
하나님께로만 집중해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놀랍게 그를 왕으로 세우기 전에
그를 왕답게 만드는 게 우선이었어요.
왕이라는 직함을 주는 게 우선이 아니에요.
그를 왕으로 결정해 놓고, 왕다운 왕으로서 만들어가는 거에요.
근데 그 학교가 '광야'라는 학교에요.
여러분들이 지금 혹독하고 지독한 이중 삼중의 광야에 내던져져 있다고 느끼십니까?
그러면 그 생각하기도 싫은 시간들이
나중에 얼마나 보석처럼 빛나는 용도로 내 인생에 역할을 할지 아무도 몰라요.
제 짧은 인생을 반추해 봐도, 그때는 그 일이, 그 시간이, 그 현장이
너무 너무 싫었는데, 훗날 그것이
'만약에 그 때 그 시간이 없었다면, 내가 지금 제대로 된 사역을 할 수 있었을까?'
자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응답하십니다.
23:12 '다윗이 이르되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들이 너를 넘기리라 하신지라'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14절입니다.
23:14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
모순된 듯 보이죠.
하나님이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을 사울에게 넘길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12
그런데 다윗을 사울에게 결국은 누가 안 넘기죠? 하나님이 안 넘기세요. :14
사람은 배반해서 다윗을 넘길지라도
하나님이 막으시면 안 되는 거예요. 믿습니까?
그런데 중요한 게 또 하나 있어요.
왜 하나님은 그것을 다윗에게 가르쳐줬을까요?
'분명 그일라 사람들이 너를 배반한다. 너를 사울에게 넘길 것이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요.
올라가려는데 선지자들이 그 길을 막죠.
자기 허리띠를 풀어 가지고 퍼포먼스를 해요.
자기 손을 묶어서 바울에게 얘기를 합니다.
'당신이 예루살렘이 올라가면 이렇게 결박을 당합니다. 올라가지 마십시오'
근데 그 사람들이 성령충만해서 그걸 가르쳐 줘요.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당신이 이렇게 붙잡힙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도 누구의 지시였어요? 성령의 지시였어요.
자기 계획과 의지대로 가는 게 아니에요.
이거 같은 얘기입니다. 다른 얘기가 아니에요. 두 가지를 다 얘기한 겁니다.
'바울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
그런데 올라가면 이런 고난이 너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거를 하나님께서 순차적으로 가르쳐주신 겁니다.
자 여기도 분명 '그일라 사람들이 너를 넘겨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래저래 막고 있어요. 이건 뭘까요?
아직도 다윗에게는 더 광야의 시간이 필요했다는 말입니다.
그가 저 높은 왕으로 가는 자리까지
아직도 그에게는 더 많은 헤매임과, 하나님만 절박하게 매달리고 바라는
그 영혼에 심령의 훈련이 필요했다는 그 말이에요.
그래서 계속 배반을 거듭 당하게 만들고, 쫓기게 만듭니다.
그렇게 쫓겨다닙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십 광야로 옵니다.
근데 이 '십' 이라는 말은, 제련소 라는 뜻이 있습니다.
다윗은 그 하나님 나라 왕국의 그 왕위에 오르기 위해서
철저하게 이 광야에서 제련을 받습니다.
▲23:19 '그 때에 십 사람들이 기브아에 이르러 사울에게 나아와 이르되
다윗이 우리와 함께 광야 남쪽 하길라 산 수풀 요새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이번에는 십 광야 사람들이 사울에게 다윗을 고발합니다. *아까는 그일라
또 다윗은 도망을 다니게 되요.
23:20 '그러하온즉 왕은 내려오시기를 원하시는 대로 내려오소서
그를 왕의 손에 넘길 것이 우리의 의무니이다 하니'
본문을 보면, 중요한 대립각이 하나 나옵니다.
사울은 '보이는 왕국'이에요.
지금 다윗의 나라는, '보이지 않는 나라'에요. 이 나라는 장차 도래할 나라죠.
그런데 엔게디 광야든지, 그일라 사람들이든지, 십 광야의 사람들이든지
다윗의 도움을 받고도, 계속 사울을 의지합니다.
그것은 사울을 의지하기 이전에, 보이는 것에 더 신뢰와 믿음을 둔 겁니다.
그런데 여기 제사장 아비아달, 갓 선지자,
그 외 다윗과 함께 한 원통하고 빚진 자, 환난 당한 자들은
'보이지 않는 정권'을 의지하는 거에요. 다윗의 정권을 의지하는 거예요.
말하자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져진 신앙의 위치가
어디에 서 있는가를
이 분명한 극한 대립의 구도를 통해서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정신줄을 놓으면
'보이는 것'이 나를 확실하게 세워질 것 같고
안전하게 할 것 같고, 보장해 줄 것 같은 생각들이 들어요.
그런데 결국 우리에게 진정한 힘이 되고, 피난처가 되고,
우리를 견고하게 하시는 분은 보이는 나라입니까, 보이지 않는 나라입니까?
보이지 않는 나라죠.
이것이 우리 입술의 고백으로만 머물러서는 안 돼요.
그일라 사람들은, 다윗에게 입술로는 감사한데
사울 왕국에다 다윗을 고발해 버리지 않습니까?
명분을 좇은 겁니다. 이익을 좇은 겁니다.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이 세상의 속성과 원리일 수밖에 없어요.
▲자 그런데 하나님은, 그 추적하는 사울을 기가 막히게 따돌립니다.
27절 '전령이 사울에게 와서 이르되 급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들이 땅을 침노하나이다'
십 광야에서, 다윗을 무섭게 추적해서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는사울에게
전갈이 왔는데, 블레셋이 (북쪽에서) 침략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28 '이에 사울이 다윗 뒤쫓기를 그치고 돌아와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 갔으므로
그 곳을 셀라하마느곳이라 칭하니라'
29 '다윗이 거기서 올라가서 엔게디 요새에 머무니라'
사울이 다윗의 코앞까지 추적해서 다윗을 체포해서 죽이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엉뚱하게 어느 군대를 일으켜요? 블레셋 군대를 일으켜서
사울의 정신을 빼앗아 버립니다.
그래서 다윗을 쫒던 행로를 바꾸어서 그만 블레셋을 막으러 갑니다.
코앞에서 또 다윗을 놓아주었던 것입니다.
이거 다윗이 꾸민 계획인가요? 아니에요.
하나님이 택한 백성을 보호하시기 위해서, 이방 군대도 사용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의 유일한 스펙과 빽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셔야 맞습니다.
그분만이 확고한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속성과 보이는 가치에 속지 마십시오.
늘 세상에 가치는, 이익이 안 되면 가차 없이 나를 버리고 배반합니다.
거기에 쓴 눈물을 흘리지 말고
우리의 영원한 친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
오늘도 내일도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