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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둘람 공동체, 광야의 예배자들

LNCK 2023. 3. 20. 19:43

“아둘람 공동체, 광야의 예배자들” (삼상22:1-2) - YouTube

◈아둘람 공동체, 광야의 예배자들        행15:16, 삼상22:1~2, 시57편   

사도행전 15:16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 하나님의 비전을, 우리의 비전으로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상 굉장히 많은 예배 처소가 있었는데 
왜 그중에서 특별히 '다윗의 장막'을 그리워 하셨을까요?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내가 다시 후일에 
일으켜 세우겠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암9:11

하나님은 영원하시기 때문에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으시는 분이죠. 
그리고 영원토록 천군 천사들의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우리의 예배와 찬양을 
하나님은 정말 기뻐하세요. 여러분이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양할 때 
하나님의 마음 가운데 기쁨과 흡족함이 넘치시는 거죠. 

▲이 구절을 묵상하다가 제가 대학생 시절에 예배드렸던 기억이 났어요. 
저는 '한사랑선교회' 라는 곳에 소속되어서 활동을 했었는데 
특별히 군대 가기 전에 굉장히 열심히 그 모임에 참석하고 
또 같이 활동하고, 수련회도 가고.. 그랬던 기억이 있습니다. 

근데 저희 (연대) 캠퍼스 안에서 일주일에 한번 화요일날 저녁에 
함께 모이는 예배모임이 있었습니다. 
근데 그 예배모임에, 하루 수업이 다 끝나고 나서 
토레이 채플이라는 언덕 위에 있는 가건물이 있었어요. 

사람들이 빼곡히 앉으면 한 50~60명 앉는 공간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그곳에 문을 열고 딱 문지방을 넘어서는 순간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그런 예배의 장소였어요. 

한 3시간~4시간을 예배를 드리는데, 그냥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찬양이 흘러나오는 그 자리에 하나님의 임재가 너무 너무 강력하고 
충만하기 때문에, 빙 둘러 앉아 저희가 예배를 드렸는데 

빈자리가 어디있는가 그냥 급하게 찾아가서 
그 빈자리에 제가 무릎을 꿇는 순간 
진짜 시간이 멈춘 것처럼 70분, 80분, 90분 
그 찬양하는 동안 눈물 콧물을 다 쏟으면서 
하나님 앞에 예배했던 그런 예배의 기억이 있습니다. 

'제 인생에서 만약 회복하고 싶은 예배가 있다면 어떤 예배일까?'  
이렇게 생각을 해보니까, 그때 그 예배가 생각이 났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어떤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그 공간 안에 있는 사람들, 그 예배자들을 그리워하신다는 거에요. 할렐루야!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예배자들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뭐 사람들하고 만나는 만남도 그런 거잖아요. 
멋진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썰며 고급 음식을 먹어도 
참 불편한 사람하고 앉아있으면, 그 자리를 빨리 떠나고 싶은 거죠. 

그러나 물 한 모금을 나눠 마셔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세상의 모든 행복을 다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에 최고의 로맨티스트 이시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삼하7장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 저는 이렇게 궁궐에 있는데 
하나님의 언약궤는 텐트 안에 있기 때문에 
제가 하나님을 위해서 집을 지어드리고 싶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너무 감동을 받으셔서 
'네가 나를 위해 집(성전)을 짓겠냐? 내가 너를 위해 집을 지어주겠다.' 
왕조를 세워주겠다..는 뜻이었죠. 하나님이 감동을 하시는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볼 때마다 너무 좋은 것은 
다윗이 하나님이 시키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드리고자 했던 그 과도한 헌신과 열정.. 

그래서 하나님도, 다윗이 요구한 적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엄청난 블레싱을 주시는 그 장면! 

다윗도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하나님도 다윗을 뜨겁게 사랑하시죠. 
그런 행복한 관계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저는 오래 교회사역을 하면서 특별히 새벽예배에 대한 애정이 많이 있는데요. 
보면 새벽예배에 안 나오시던 분들이 갑자기 나오시는 경우가 있거든요. 
분명히 사연이 있고 이유가 있습니다. 기도 제목이 생긴 거예요. 
너무 다급한 기도 제목이 생겨서 기도를 하시는데 
보통은 의자에 등을 대지도 못하고, 끝에 걸터 앉아서 
정말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기도하시는 거죠. 

근데 그렇게 한 달 두 달 기도하다 보면 얼굴이 평안해지고, 등받이에 기대고.. 
그 다음에는.. 안 나오기 시작하죠. 

우리 청년들같은 경우에도, 카페를 빌려서 홀리스타 집회를 정말 많이 했거든요. 
그래서 어떤 카페에서는 150명 이상 이렇게 늘 모였거든요. 

그런데 그 홀리스타에서 열심히 섬기다가, 
문 입구에 서서 스태프로 열심히 섬기다가 
운명의 그 사람을 만나게 되는 순간 
'내가 홀리스타 새벽예배를 이렇게 열심히 섬겼더니 
하나님이 응답을 주시는구나. 할렐루야!' 
그리고 결혼하면 홀리스타를 안 나와요. 기도 응답이 되면 그 다음부터 안 나와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면 하나님이 선물을 주시죠. 
그러나 선물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평생의 목적이 되는 예배, 
그런 예배를 드리기 원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임재만이 제 예배의 유일한 목적입니다. 
평생에 다윗과 같은 예배자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새벽에도 한밤중에도 그냥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 있는 예배자로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그런 예배가 우리의 예배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다윗이, 삼상22:1절에 아둘람 굴로 도망갔습니다.
아둘람은 피난처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국경사이에 있는, 마치 비무장지대같은 
인적이 드문,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황폐한 지역이었어요.
거기 있는 동굴이 아둘람 굴이었어요.

그런 아둘람 굴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 거예요. 
물론 다윗이 처음 갔고, 그리고 거기로 이제 사람들이 모이게 된 거죠. 

어떤 분이 제게 그런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목사님, 고생 길을 (개척을) 선택하셨네요!' 

온누리교회는 부교역자는 정년이 65세입니다.
그리고 본부장이나 캠퍼스담당 목사들은 70세죠.
제가 정년이 보장된 편안한 길을 포기하고.. 주님의 인도를 따라 개척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왜 고생길을 선택했을까?' 묵상을 해보니까 
딱 이 나이 쯤이 (50대초?) 매너리즘에 빠지기 굉장히 쉬운 때인 것 같아요. 

내가 영적으로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는..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보다는, 익숙한 것에 안주할 수 있는 그런 나이에.. 

새로운 길로 들어설 수 있게 됐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요. 

여러분, 사람이 자기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몰라요. 
물론 인생을 살다 보면, 20대, 30대 초중반 까지는 
새로운 일이 굉장히 인생에 열리더라고요. 

새로운 학교, 새로운 직장, 새로운 직책, 새로운 미션..
그때는 (30대 중반까지는) 이런 걸 자주 만나게 돼죠. 
그러면서 그런 상황이 엄청 부담이 돼죠. 새로운 도전이니까.

근데 인생을 살면서, 삼십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부터는 
이제 한 곳에 정착하게 돼죠. 그때는 어디 옮길 생각도 안 하게 됩니다.

익숙해지고 매너리즘에 빠지고, 더 이상 마음이 새로워지지 않는 게 
인생의 굉장한 위기이고 도전이라는 걸 (최근에) 알게 됐어요. 

그래서 우리가 정말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시간이 갈수록 어려운 일이 되고, 갈수록 불가능해 짐을 보게 되더라고요. 
사람의 굳어진다고 그러죠.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날마다 새로워지는 줄로 믿습니다. 

성령의 감동하심과 인도 하심을 따라가면, 날마다 새로워질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제가 이 고생 길(교회 개척)을 선택을 했어요. 
성경에도 보면, 사람들 이름대로 인생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교회 이름도 잘 지어야 되는데 
'다윗의 장막'을 표방하고 교회를 시작한 거잖아요... 

여러분, 좋으나 싫으나 '아둘람 공동체'에 들어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광야에서 다윗에게 모여든 사람들이 
서로 함께 광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생존했죠. 생존했어요. 

그들의 목적은 다른 게 없었어요. 그냥 생존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처음 시작하는 교회 공동체는 아무런 터전이 없기 때문에 
(목표가) 그냥 생존이에요. 이렇게 버티는 게 상당히 중요하거든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아둘람 공동체가 
생존공동체에서 승리 공동체가 되었다는 거예요. 

그들이 특별히 '우리가 대단한 역사의 족적을 남겨야지' 이런게 없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들어서 
세상을 반전시키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셨다는 게 놀랍습니다. 

이 아둘람 공동체의 처음 목표는 그냥 서바이벌, 
'우리가 이 광야에서 어떻게 하면 버틸 수 있을까?' 

어디 뭐 따뜻하게 지내기도 어렵고, 밤에는 춥고 낮에는 너무 덥고 
또 사울 왕이 삼천명의 정예부대가 있었는데, 그들을 전원 다 동원한 거죠.

(당시 이스라엘은 다들 농사짓다가 소집하면 모여드는 민병대 시스템이었고
정규군은 3천명만 상비군으로 있었죠. 삼상13:2)

사울은 정규군 삼천 명을 데리고 다윗 추격을 했단 말이에요. 
그렇게 다윗 사냥을 10년을 했는데 
이 팔레스타인 이라는 땅덩어리가 굉장히 작습니다. 
그 중에서도 유대 광야는 정말 좁은 지역이에요. 

그 좁은 지역을 삼천명의 정예부대가 샅샅이 뒤지면서 쫓아다녔는데 못 잡았어요.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기도 했고 
다윗은 제가 생각할 때, '아마 그 십년 동안 잠을 편히 못 자지 않았을까?'  시4:8
 
이 사람들의 처음 목표는 생존, 서바이벌 이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서 
사사기 시대 동안 바닥을 치던 이스라엘의 역사가 
반전을 일으킬 수 있는 리바이블, 부흥을 허락하신 줄로 믿습니다. 

광야의 모세가.. 그 시대의 대안이 되게 하신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광야의 아둘람 공동체가.. 그 시대에 대안 공동체가 되게 하신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또 빈들의 세례요한이.. 그 시대를 깨우는 하나님의 소리가 될 수 있게 하신 것을 신뢰합니다. 

막 개척을 시작한 저희 교회가 지금 광야에 서 있지만 
'하나님, 이 시대에 예배의 영성을 일으켜 깨우는 
대안적 공동체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것을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을 보게 하여 주옵소서!' 

성도님들 한분 한분도, 여러분의 인생에 광야의 시간을 지나고 있다면 
여러분의 인생도 반전의 승리를 체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반전의 하나님'이시라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여러분의 인생에 '반전의 하나님'을 반드시 체험하셔야 돼요. 

왜냐하면 우리가 세상에서 많은 것들을 누릴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하면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면서 살잖아요. 

근데 그 가운데 정말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세상에 보여줘야 됩니다. 

그것은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거예요. 

'하나님, 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영광을 내려놓고, 포기하고, 하나님을 선택했사오니 
하나님, 하나님의 영광을 내 인생을 통해서 (또한 다른 이를 통해서) 보여주시옵소서!' 

'아버지여, 아버지를 내가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셔서, 아들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시는 역사가 있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그래서 저는 이 새롭게 개척되는 교회 공동체에 대해 기도하고 꿈을 꾸면서 
교회를 위해서 개인들이 희생하는 경우들이 많죠. 

근데 그 헌신과 희생..
저도 20 대, 30 대 때 계속해서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을 
기꺼이 주저하지 않고 해왔지만 

그러나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는 가운데 
그 교회의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도 
한 가정 한 가정마다 
그런 성장과 부흥을 동시에 체험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교회도 승리를 체험하고 
성도들도 승리를 체험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삼상22:1절에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다윗이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였다고 했죠. 
아둘람 굴에 오기 전에는, 
먼저 자신의 영적인 멘토였고 당시 최고의 선지자였던 사무엘이 있었던 
라마 나욧으로 도망치게 됩니다. 

그런데 사울이 라마 나욧에도 또 쫓아오니까 
제사장들의 성읍인 놉으로 도망을 칩니다. 

나중에 그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을 도와줬다는 이유로 
놉의 제사장들을 다 죽이잖아요. 
그 성읍에 있는 남녀노소 어린 아이들까지 다 죽이잖아요. 무시무시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도망칠 데가 없어서, 블레셋 사람들의 도시인 가드로 도망을 
가는 내용이 21장 마지막에 나옵니다. 근데 가드로 도망을 간 이유가 뭐냐면 
'여기까지는 잡으러 오지 않겠지' 

 

왜냐하면 최대 적국이기 때문에, 거기에 만약 사울이 이스라엘 군사들을

이끌고 온다면, 그건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얘기거든요. 그래서 못 오죠. 

 

그런데 가드에 갔더니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보는 거예요.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던 그 유명한 다윗 아니냐?'

그래서 다윗이 미친 척을 하면서, 자기 수염에 침을 흘리며 
그 왕궁의 문짝을 막 빡빡 손으로 긁으면서 미친 척을 하잖아요. 
그래서 미친 사람인줄 알고 쫓겨나게 됩니다. 

자 그가 그렇게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하면서 가드 왕 아기스앞에서 도망을 칠 때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여러분 다윗이 어떤 사람인지 알잖아요. 

그가 비천한 목동이었을 때도 맹수 앞에서도, 등을 보이지 않았던 사람이에요. 
어떠한 적장 앞에서도, 골리앗을 비롯해서, 아무리 많은 적군이 있어도 
아무리 유명한 장수가 있어도.. 결코 자기 등을 보인 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런 다윗이 인생에서 가장 수치스러웠던 순간이,
가드 왕 아기스 앞에서 입니다. 그렇게 자기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 
도망을 쳐서 온 곳이 아둘람이었어요. 

'여러분, 다윗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정말 비참했을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 아둘람 굴에서, 자기가 한 나라의 최고의 장군이었고 
왕의 사위였던 사람이, 완전히 밑바닥이 떨어지게 된 거잖아요. 

그러면 그의 마음 가운데 '이제 어떻게 하면 내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 
도망을 칠까?' 이 한 가지 생각밖에 없을 텐데 

22:1절에 보면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아둘람 동굴의 그에게 찾아왔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 가족들이 왜 찾아왔을까요? 
다윗이 왕궁에서 잘 나갈 때가 아니라, 왜 어려울 때 찾아왔을까요? 

아무래도 사울 왕이 지금 미쳐 있잖아요. 
그러니까 '연좌제'라고 하는데, 다윗의 가족들에게 죄를 물으려 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다윗을 찾아 피난온 것입니다.

22: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이 사람들은 다 인생에서 지치고 어려운 사람들이었어요. 
다윗이 돌봐줘야 되는 사람들이었어요. 

이 사람들의 숫자가 삼상23장에 보면 육백 명으로 늘어납니다. 
근데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다윗의 가족들도 그렇고 
또 이 어려운 사람들도 그렇고.. 다윗이 이 사람들을 절대로 거절하지 않습니다.

다 품어줍니다. 다 돌봐줍니다. 다 지켜줍니다. 
이후로 십 년 동안 광야를 도망다니면서 
십 년 동안 이 사람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한 거예요. 

그런데 이 아둘람 공동체가 놀랍도록 성장을 하고 
이 사람들이 치유가 돼서, 주변 민족들과 싸울 때 임전무퇴,  
등을 보이지 않고, 도망치지 않고, 물러서지 않는 강력한 용사들.. 
강력한 전사 공동체가 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나라를 나중에 회복하고 통일시키는 개국공신들이 돼요. 
놀라운 반전이죠. 

그러니까 다윗의 인생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개개인의 인생을 반전시켜주시고 
또 이스라엘 공동체를 이들을 통해서 반전시키시고 
여러분, 그런 반전의 역사가.. 하나님 나라의 부흥의 역사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과연 아둘람 공동체의 반전의 역사는 
무엇 때문에 일어날 수 있었느냐? .. 라는 거죠.    *설교의 주제

저는 이 사람들을 보면서, 이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이 힘들어서 
다윗을 의지하러 온 것도 있지만.. 약간 동병상련이라고 해야 될까요? 

다윗이 최고의 장수, 최고의 전도유망한 인생으로 살아가다가 
바닥에 떨어진 거잖아요. 

자신들의 인생이, 뭐 그게 일터가 됐든, 지역사회를 됐든 
이스라엘 나라 안에서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 
광야 아둘람 동굴로 모여든 것이거든요. 

근데 그 사람들이 다윗을 의지하는 것은 
자기들의 인생이 바닥에 떨어진 것보다, 
다윗이 훨씬 낙차의 폭이 크게 더 떨어진 거예요. 그게 동병상련이 된 거죠.

그러면서도 다윗에게 의지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었던 거예요. 
그건 뭐냐면 다윗만큼 힘든 사람이 없는데 
이 다윗이 광야에서도, 동굴에서도 예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여러분 시편을 쭉 보세요. 
그가 쓴 시편의 표제어들을 보면, 
대부분 전부가 광야에서, 사울을 피해서 도망다닐 때, 
굴에 있을 때, 광야에서... 가장 주옥과 같은 그의 찬양의 고백들이 쓰였어요. 

4백인의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
다윗에게서 흩어지지 않고, 계속 붙어있었던 것은, 오히려 그 숫자가 늘어난 것은
다윗에게서 찬양과 예배를 본 것입니다.  
그 영광과 은혜와 신령함을 보고서.. 옆에서 같은 은혜를 나눠서 받은 거죠.

여러분 우리의 예배가 
물론 우리가 궁궐에서 평안할 때도, 
하나님 시온의 대로를 열어주실 때도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 영혼의 가장 주옥같은.. 가장 순전한 예배는 
우리가 광야에 있을 때,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에요. 

왜냐하면 광야에서는 노래할 이유가 없거든요. 아무런 찬양의 제목이 없거든요.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는 제목이 하나도 없는데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찬양과 예배.. 그 때 그 찬양과 예배가 진정한 예배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신앙은 영혼의 오기다!' 이런 생각을 해요. 
욥도 그렇고, 다윗도 그렇고요.
 
여러분 어떠한 인생의 고난의 상황에서도 믿음의 오기를 포기하지 마셔야 돼요. 
그리고 칠전팔기, 일어나서 또 예배하고 일어나서 또 예배하는... 
내가 결코 무너지지 않고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아둘람 굴에서, 그 예배하는 다윗을 보면서 사람들이 감동을 받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많이 찬양하는 복음성가 중에
'오 주여 나의 영혼이 주께로 정하였으니' 가 있죠.

그 찬양은 시57편을 가져온 것인데
그 표제어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었을 때에' (아둘람 굴도 되고, 엔게디 굴도 되겠죠)

시57:1~5절까지 내용을 보면 
'하나님 제가 너무나 괴롭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죽이려고 합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그런 내용들이에요. 

6절 '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합니다. 

그들이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자기들이 그 중에 빠졌도다. 
하나님 저는 그 웅덩이에 빠지지 않게 해주시고 저를 건져주십시오' 
그런 고백이죠. 

그런데 7절에 보면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8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우리가 젊었을 때 불렀던.. '멜로디~ 멜로디~'
그러면서 굉장히 경쾌하게 율동하며 불렀던 그 찬양이 아니고요. 

시57편은, 사실은 눈물을 머금고 하나님 앞에 그 광야에 굴에 숨어서 
새벽녘에 일어나 불렀던 찬양이에요. 

근데 생각해보면 다윗 곁에 사람들이 이렇게 함께 모여 있는데 
팔레스타인은 밤에 일교차가 워낙 크기 때문에 밤과 새벽에 엄청 춥거든요. 

사람들이 거적대기에 누워서 서로 부둥켜안고 그렇게 잠을 자고 있을 텐데 
새벽녁에 누군가가 굴 어귀에서 찬양을 부르는 거예요. 이해할 수 없는 거죠. 

'이 추위에 누가 이 새벽에 찬양을 하나?' 
보니까 다윗이 찬양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다윗이 뭐라고 찬양하냐면 
하나님 앞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저의 마음은 확정되고 확정되었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저는 어떤 상황에도 찬양하기로, 어떤 상황에도 예배하기로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기도하고,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기로 이미 제 마음을 정했습니다. 

저는 상황이 현재 이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중단,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이미 제 인생을 걸고 결심했습니다. 저는 평생에 예배자로 살 것입니다.' 
이 고백이에요. 

그러고 나니까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시57:8
새벽이 사람을 깨우는 게 아니라, 내가 새벽을 깨운데요. 
여러분 새벽을 깨우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비파야 수금아 깨어날 지어다!'
그러면서 그가 그렇게 가장 어려운 상황에 
가장 압박을 당하는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 앞에 새벽에 찬양하고, 예배하며 나아가니까 

57:9~11절에 놀라운 고백이 이어지게 됩니다. 
9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10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11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그러니까 다윗이 완전히 밑바닥에서 마음을 확정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다 보니까 
그의 마음 가운데 어느 순간부터 영적인 흐름이 뒤바뀌는 거예요. 

절망과 탄식과 근심과 걱정과 우울의 늪에 빠져있던 다윗의 마음이
찬양하고 또 찬양하고 '나는 어떻게 해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예배할 거야' 
그렇게 예배를 결단하고 하나님 앞에 노래하고 기도하다 보니까 
마음에 흐름이 반전이 되었어요. 

그가 찬양하는 가운데 놀라운 예언들을 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하나님, 지금은 제가 도망자로, 하나님 지금은 제가 지명수배자로 
하나님 지금은 제가 인생의 광야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사람으로 
여기서 이 새벽에 굴 어귀에서 처량하게 찬양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 만민 앞에서 열국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리는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이게 다윗의 예언이에요. 

▲여러분, 이게 얼마나 놀라운 예언인지요. 
제가 다윗의 시편들을 이렇게 묵상하면서 알게 된 것은 
모든 예배는 예언으로 가게 돼 있더라고요

왜냐하면 예배에 자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잖아요. 
근데 우리는 시간 세계 안에 갇혀 있는데,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기도하거나 예배할 때 
왜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에 미래를 열어 주시냐면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 다스리시는 분이잖아요. 

그러니까 우리의 인생가운데 내가 꼭 미래를 알려달라고 막 매달리지 않아도 
하나님을 진심으로 진정으로 예배하고 찬양하고 높여드리면 
그 분이 내 인생의 미래를 알려주세요. 

왜냐하면 내가 미래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그분의 세계에 있는 빛을 우리에게 비춰주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에게 예언의 은사가 임할 줄로 믿습니다. 
이거는 제가 여러분에게 어떤 신비한 은사 쪽으로 가라고 얘기하는 게 아니고
'예배자는 예언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인생에 지금 고난과 어려운 가운데 있고 
마음이 낙심되어 있을 때 '하나님, 내 영혼은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인생을 하나님은 회복하실 것입니다.' 
이게 다 예언이에요. 예언이에요. 

여러분의 자녀들이 방황하고, 여러분의 자녀들이 아직 지적으로 미숙하고 
여러분의 자녀들이 인생의 비전을 아직 발견하지 못하였고... 

'그러나 하나님 내 자녀가 하나님을 뜨겁게 만나면, 성령체험하면, 
그 인생에 평생을 헌신할 수 있는 비전의 길을 
하나님이 그 아이에게 보여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기도하게 되잖아요) 이게 다 예언이에요. 

여러분이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배하면 
예언의 은사는 그냥 열리게 돼 있어요. 

그래서 미래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예언의 은사를 구하지 마시고 
그런 분들은 꼭 사고 치게 되어 있어요. 아니요. 그런 거 말고 

내가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알아가면 
그분의 세계가 내게 열리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기도하고 선포하고 찬양하는 가운데 
여러분의 인생에 대해서, 여러분의 가정에 대해서, 이 시대에 대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을 가지고 예언하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
예언하고 선포할 때, 그대로 이루어지는 역사들이 나타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광야에서의 예배... 저와 여러분이 아둘람 공동체로, 
또 다윗의 장막공동체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여러분, 광야에서 하나님 앞에 진심의 예배를 드리는... 
그런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그런 추억을 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내가 평생에 드렸던 예배가운데, 어떤 예배가 회복되기를 원하는지요?' 

저는 중학생일 때 중2병이 있었던 것 같아요. 굉장히 우울증에 많이 시달렸고 
욕도 많이 했고, 자살 충동에 굉장히 시달렸던 때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을 뜨겁게 만나게 되면서 
매일 낮에 성경을 한 두 시간씩 읽고 
그리고 밤에는 혼자 동네 상가 2층에 있는 제가 다니던 교회에 가서 
깜깜할 때 제가 읽던 성경을 펼쳐놓고 

옛날에 학생들이 많이 차고 다니던 카시오 디지털 시계가 있어요. 
그 작은 손목시계의 불빛으로 이렇게 성경을 비춰가면서 
'하나님, 제가 오늘 이 구절을 읽는데 이해가 잘 안 됐습니다. 
하나님 이 구절을 제게 이해시켜 주세요.'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제 삶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고 엎드리면서 
나아갔던 시간들이 있었어요. 
한 시간 두 시간 예배하고.. 때로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그 앞에서 뛰며 찬양하고 했던 적이 있었어요. 

제가 춤은 안 췄어요. 제가 몸치라서요. 
하여튼 간에 그래도 저는 뛰며 찬양하고 
그러가 이제 밤 11시, 12시가 돼서 떠날 때는 
'하나님 섭섭해하지 마세요. 내일 다시 올게요'
그렇게 혼자 예배드렸던 그런 시간들이 있었어요. 

제가 완전히 우울증에 미쳐 갖고 죽고 싶었던 그 인생을 건져주신 하나님! 
제가 고3 때까지 그 상가 2층 예배당에서 예배드렸던 그 예배,
정말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고3 때는 하루 종일 스트레스를 받는 거잖아요. 
앉아서 공부를 하면서도 스트레스를 받고 
친구들하고 얘기 하면서도 스트레스를 받고 
스트레스 받는 게 이제 1년 내내 잖아요. 

제가 다니던 독서실 원장님이 연세가 좀 많으신 분이었는데 
끝나는 시간이 새벽 한 시였죠. 

그러면 원장님이 봉고차로 집에 데려다 주시죠.
그럼 저는 집 앞에 내려다 달라고 한 게 아니라
항상 그 상가 앞에 내려달라 그랬거든요. 
'너는 도대체 어딜 가니?' 

그분이 몰아주는 독서실 봉고를 타고, 그 상가앞에서 내리는 거예요. 
그 상가에 앞에 내려서 그 계단을 올라갈 때, 
제 마음은 진짜 너무 너무 지쳐있는데 
그 예배당 안에 들어가서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그 하나님의 임재, 포근함, 
그 가운데 그냥 안겨서.. 제가 무슨 기도를 했는지 기억도 잘 안 나요. 

뭐 대학에 붙여달라는 것도 아니고 
뭐 점수를 올려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하나님, 제가 왔습니다' 하고는 그냥 하나님 품에 안겨서 
하염없이 20분이고 30분이고 울다가 나오면 
하루 종일 그 스트레스에 어깨가 무겁고 목이 아프고 했던 그게 
다 풀리는 거예요. 

그래서 엄청 피곤했는데, 엄청 피곤해서 빨리 집에 가서 자야 되는데 
저는 그 상가 예배당에 가서, 그 밤에 20~30 분 기도하고
'하나님, 제가 더 있고 싶지만 가야 됩니다..' 

20~30분 밖에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 중심을 쏟아놓고 내 영혼이 자유함을 얻었던 시간, 
그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저는 고3 시절을 잘 보냈었던 것 같아요. 

여러분의 인생에 가장 목마르고 가장 춥고 가장 힘들었던 시간에 
그때 여러분이 피신했던 그 예배의 처소가 어디였는지 한번 기억해보세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제가 대학에 들어가서 
조금 이상한 인생을 살았는데 
그때 제 마음 가운데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사람이 있다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미팅, 소개팅을 안 하고.. 데이트를 일절 안하고.. 그러고 지냈거든요. 

교내 루스 채플 지하에 기도실이 있었는데 
그 기도실에 매일 가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앉아서 기도 하고 
무릎 꿇고 기도하고, 방언 찬양하고... 

그 캠퍼스 안에서 모두가 그 젊은 날 20대 초반에 
'내가 그동안 쌓인 것을 풀면서 놀아보리라' 뭐 다 그러고 지내잖아요. 

아니면 '열심히 공부해서 내가 한번 세상에 나를 증명해 보리라..'  
그렇게 두 부류로 나눠지는 시간이잖아요. 

그런데 저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루스 채플 지하실에 있는 그 작은 기도실에서 
무릎 꿇고 하나님 앞에 예배하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평생을 살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제가 마음 한 편은 굉장히 외롭지만 
저도 대학교 1학년 때 굉장히 옆구리가 시린 게 (외로운 게) 어떤 증상인지 알겠더라고요. 
그런 증상을 심하게 앓아보기도 했지만 
그러나 저는 하나님이 내 인생에 대해서 
최선의 계획을 갖고 계신다는 걸 신뢰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걸 제 인생에 증명시켜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 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줄 알고 보내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그래서 제 아내를 그 기도실에서 만났거든요. 
그때 그 기도실에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드렸던 제 기도, 

그리고 제가 '영문과 기도인 모임'을 인도했는데 
멤버가 한 육십 명, 팔십 명 됐어요. 
근데 기도하러 모이는 건 4~5명 
그러니까 잘 안 되는 모임의 리더를 제가 한 5년을 했어요. 

군대에 있을 때도 리더를 했기 때문에 5년이 된 거죠.
용산에 카투사로 있으면서 매일 학교에 왔다 갔다 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그 기도 모임의 멤버들을 놓고 
무릎 꿇고 한 시간 씩 계속 기도했어요. 
한 사람씩 이름을 불러가면서, 모임에도 나오지 않는 사람들을 
일년 내내 열심히 왜 기도를 해줬나 몰라요. 하여튼 열심히 기도 했어요. 

그리고 캠퍼스에서 그들을 만나면 
그들은 저를 보면 미안하니까 이렇게 홍해가 갈라지듯이
저 멀리서부터 저를 피해가요. 

그런데 저는, 만나면 그들이 얼마나 반가운지 
그리고 어딘가에서 하나님 예배하고 살아 있다.. 그게 확인되면 
그것만으로 감사하더라고요. 

우리 모임에 나오든/ 나오지 않든 
그가 어디선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으면 마음이 감사한 거에요. 

'내가 그 사람을 꼭 우리 모임에 나오게 해야지' 막 이런 게 아니었어요. 
저게는 그게 또 굉장히 중요한 훈련이 되어서 
교회 사역을 하면서도 '내 사람으로 만들고, 내 팀으로 만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 걸 하지 않고 '하나님이 세우시는 하나님의 공동체'를 늘 추구했어요.
'하나님, 제가 사람들을 내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하는 제자들로 세우게 하여 주십시오!' 
그런데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저를 대학 캠퍼스에서, 영적인 광야에서 
한 5년을 훈련시켜 주셨던 시간이 있었어요. 

그때 그 기도실에서 드렸던 예배.. 그게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리고 하나 더 있습니다. 
그건 뭐냐면 제가 고등학교 3 학년 때 
서빙고 온누리교회 본당에서 하는 <목요 경배와 찬양>
그때 엄청 뜨거웠잖아요. 

그때 같이 잠실고등학교 동기생으로 다녔던 동수하고 저하고 
항상 고등학교 때 매달 모의고사 보고 나면 

우리가 매주 가기에는 시간이 없으니까 
약속을 해 갖고, 딱 그 모의고사 끝나는 첫번째 목요일에 
항상 전철을 타고 서빙고 본당에 가서 목요 경배와찬양 예배를 드렸던 기억이 있어요. 

그 예배당에 기둥이 있는데, 그 기둥옆에 엎드려서 
하염없이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면서 예배했던 그때 기억이 있어요. 

그래서 제가 목회자가 되고 나서 
동일하게 그 기둥 옆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하나님, 제가 여기 다시 왔습니다. 하나님이 그때 제가 이곳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해주셨던 게 너무나 감사하고 
그리고 그런 예배에 자리를 다시 드릴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예배는 성도들에게 생명줄 입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정말 하나님 앞에 중심을 쏟아서 예배할 수 있는 
하나님을 뜨겁게 만날 수 있는 예배의 자리가 살아있기를 축복합니다. 

예배는 교회에 심장입니다. 
절대로 우리가 예배를 타협할 수 없어요. 

지난 26년 동안 온누리교회에서 사역하면서 
제가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던 한가지는 뭐냐면 
예배에 사람들을 동원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예배에 사람들을 동원하고 싶은 유혹, 아니면 그런 의견들이 있어도 
제가 그건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원하는 사람들의 예배를 기뻐받으시기 때문에 
하나님 교회의 어떤 사역, 어떤 컨퍼런스, 어떤 집회가 아무리 중요.할지라도 

 

'하나님 저는 사람들을 동원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 그 예배가 하나님의 강력한 기름부으심과 임재하심의 예배가 되어서 
사람들이 자신의 발로 나아오는, 달려오는, 헌신하는, 와서 엎드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위로부터 하나님의 기름부심이 분명하게 임하면 
우리가 그것을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들을 부르실 줄로 믿습니다. 

그런 예배... 
여러분 예배를 교회의 어떤 프로그램으로 전락시킬 수 없습니다. 
예배를 교회 조직을 운영하기 위한 어떤 수단으로 전락시킬 수 없습니다. 

예배를 사람들을 위한 문화공간이나 침묵모임으로 전락시킬 수 없습니다. 
예배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 영광을 받으시는 자리인 줄로 믿습니다. 

저는,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길 원하시는 그 하나님의 마음,
그 하나님의 목마름을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우리가 분명히 우리의 영적인 목마름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것은 맞아요.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만나는 것을 사모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더 간절히 사모하고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로 나오면서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실까? 
하나님이 내게 응답을 하실까?' 이런 것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초대하실 때는 
초대하신 그분이 미리 그곳에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제가 청년부 사역할때, 유럽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한 청년이 
프랑스의 한 도시에서 불문학을 공부하던 청년인데 
이 청년의 고백을 듣고 굉장히 안타까웠어요. 

'내 영혼에 목마름이 있어서, 이 목마름을 어딘가에 가서 해결하고 싶은데 
갈 교회가 마땅히 없다는 거예요. 물론 교회는 있죠. 교회는 있는데 
거기에 가서 내 영혼이 목마름을, 하나님 앞에 내 중심을 쏟아놓고 
내 영혼이 목마름을 채우고 싶은데...' 그게 안 된다는 거예요. 

저는 지금 교회를 개척하면서 
우리가 다윗의 장막의 영적인 DNA 를 갖는 교회가 되면 
이 핵심 DNA를 카피하는 교회들을 계속해서 세울 생각이거든요. 

그것이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 어떤 곳이든 
목마름이 있는데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는 곳이 있다면... 

제가 캐나다 밴쿠버에서 사역을 하면서 
국경을 넘어서 시애틀 이나 샌프란시스코 에 직접 차로 운전해서 가서 
또 사역하고 그렇게 교류를 했던 적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도시들마다 영적인 기류와 영적인 기상도가 
너무나 다른 거예요. 제가 어떤 특정 도시를 폄훼하려는 게 아닙니다. 

시애틀 에도, 그 아래 산호세에 가도.. 영적으로 굉장히 좋아요. 
하나님 앞에 그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는 교회들이 있어요. 

근데 참 이상하게 샌프란시스코는 그게 없어요. 너무 너무 많이 무너져 있어요. 
제가 있었던 밴쿠버도 영적으로 너무너무 힘든 도시였어요. 
무너져 있는 곳이었죠. 

그러니까 성도들이 목이 마른데, 그 목마름을 해갈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십니까? 

여러분의 인생에 여러분이 광야를 통과하고 있을지라도 
여러분의 인생에 가장 큰 결핍의 시즌을 보내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그 영혼에 해갈을 주시는 예배의 처소가 있다면 
그는 능히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예외가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가, 목마른 영혼들이 
그 목마름을 해갈할 수 있는 예배의 처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목마름을 해결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 왔는데 
하나님을 뜨겁게 만나고 놀라운 승리자가 되어서 
주의 은혜를 담대히 선포하고 나아가는 사람들로 변화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모두가 인생의 아둘람 굴에 모인 사람들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피난처가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목마름 때문에 오지만 
하나님은 목마름을 해결하실뿐만 아니라 
승리자가 되게 할 수 있는 하나님! 
인생에 대해서 놀라운 자신감과 담대함과 비전을 갖게 해주시고 
세상에 나아가서 아둘람 공동체의 사람들처럼 강력한 용사들이 되고 
하나님 나라의 승리자들이 될지어다.. 라고 축복드립니다! 

작은 아둘람 공동체가 이스라엘 나라 전체를 뒤바꾸고 
당시 중근동의 역사 전체를 뒤집어놓는 하나님의 대안적 공동체가 된 것처럼 

그런 역사가 오늘 우리를 통해 이뤄지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