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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24장 절별 해석 및 주석

LNCK 2023. 3. 21. 09:15

◈삼상24장 절별 해석 및 주석

1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더이다 하니 

'사울이...돌아오매 혹이 그에게 고하여'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돌아오자마자 사울에게는 다윗에 관한 정보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본서 저자는 이때의 밀고자를 구체적으로 언급치 않지만, (1) 사울이 다윗을 체포하는 데 필요한 병력 규모를 결정함에 있어 주저치 않았으며 (2) 사울이 다윗의 은신처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2절)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밀고자는 아마도 그곳 지리에 밝은 '십'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23:19, 26:1).

'엔게디' 
'염소의 샘'(Spring of the goat)이란 뜻으로, 사해의 서부 중앙에 위치해 있는 요새지요, 석회석 고원 지대이며, 또 온천수가 있는 오아시스 지역이다. 후일 솔로몬은 사랑하는 자를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에 비유하기도 했다(아 1:14). 한편 오늘날의 이곳 지명은 '아인 이디'(Ain-jidy)인데, 현재도 숨을 수 있는 많은 동굴들이 도처에 있다고 한다. 23:29 

2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여기의 '택한 사람'(이쉬 바후르)은 문자적으로는 '남자 청년'이란 뜻이다. 그런데 이들은 특별히 이스라엘 전국에서 선발된 자들이라는 점에서, 이스라엘의 최고 정예병들이라고 할 수 있다(9:2, 13:2, 신 32:25, 사 9:17, 겔 30:17).

삼상14:52 ‘사울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과 큰 싸움이 있었으므로 사울이 힘 센 사람이나 용감한 사람을 보면 그들을 불러모았더라’

삼상13:2 ‘이스라엘 사람 삼천 명을 택하여 그 중에서 이천 명은 자기와 함께 믹마스와 벧엘 산에 있게 하고 일천 명은 요나단과 함께 베냐민 기브아에 있게 하고 남은 백성은 각기 장막으로 보내니라’

'삼천을 거느리고' 
'삼천'은 사울이 일찍이 수많은 블레셋 족속들을 무찌를 때 동원했던 수효와 동일한 병력 규모이다(13:2). 사울은 이 규모의 병력으로 다윗과 그의 추종자 육백 명(23:13)을 일거에 제거시키려 했던 것 같다. 아무튼 이처럼 사울이 다윗의 군대에 비해 5배나 많은 정예 병력을 동원하여 엔게디 황무지까지 다윗을 추적한 것은 다윗의 무리를 섬멸하려고 단단히 각오했던 사울의 의지를 잘 나타내 준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비밀스런 보호 아래 있었던 다윗에게는 그와 같이 많고 강한 사울의 군대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시 3:6).

'들염소 바위' 
이곳은 사해로 내려가는 벼랑의 한 지점으로, 그 가파름 때문에 들염소나 산양만이 생존하기에 적당한 곳이었으므로, 이러한 명칭이 부여된 것 같다. 뿐만 아니라 당시 이 지역에는 충분한 풀과, 샘에서 넘쳐 흐르는 신선한 물로 인하여 들염소가 많이 야생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오늘날에도 여행자들은 이 지역에서 서식하고 있는 많은 산양과 산염소를 발견한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는 은신하기 좋은 동굴이 많다고 한다.

3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길가 양의 우리' 이것은 그 지역의 좋은 자연 조건을 이용한 양의 사육처를 가리킨다. 오늘날에도 많이 존재하는 이 '양의 우리'는 대부분 동굴 앞에 돌로 나즈막히 둥글게 쌓아서 만들어졌으며, 그 지붕은 야생 짐승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하여 가시나무로 되어 있다고 한다.

'굴이 있는지라' 그 당시 '굴'은 일반적으로 양을 돌보는 동안 목자들의 주거 장소로 이용되었다. 아울러 이러한 '굴'은 날씨가 추울 때는 동물들의 거처로도 이용되었다.

'사울이 그 발을 가리우러 들어가니라' 여기서 '가리우다'(사카크)는'덮다', '둘러싸다'란 뜻이다. 그런데 '발을 가리운다'는 말은 '용변을 보다'란 말의 완곡한 표현이다. 히브리인들이 대변 보는 것을 이같이 표현한 까닭은 대변을 보려고 쪼그리고 앉을 때 옷자락에 의해 자신의 발이 덮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혹자들의 주장처럼, '잠을 자다'란 뜻으로 볼 수 없다. 한편 사울이 바로 이같은 생리 현상을 해결하기 위하여 들어간 그 굴 안쪽에는 다윗의 일행들이 숨어 있었다. (그런데 만약에 용변을 보기 위해 굴에 들어갔다면, 자기 옷자락을 베는데, 인기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잠을 잤기 때문에 자기 옷자락을 베어도, 몰랐던 것이다. 용변을 보러 들어갔다가, 거기서 잠을 잤을 수도 있다)

'다윗과...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엔게디 요새(23:29) 지역에는 많은 동굴들이 있었다. 다윗과 그의 일행은 그 중 은신하기에 좋고 큰 어느 동굴 속에 숨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울이 용변을 보기 위해 그 굴 속으로 찾아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였다. 아무튼 사울은 자기가 들어간 바로 그 굴에 숨어있던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발견치 못했다. 그 까닭은 (1) 동굴의 내부는 지척을 분간 못할 만큼 매우 캄캄했으며, (2) 다윗과 그 일행은 캄캄한 그 굴의 깊숙한 곳에 은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동굴 입구는 볕이 드는 관계로 식별 가능하지만, 동굴 내부는 볕이 차단되기 때문에 캄캄했다. 따라서 동굴 내부의 다윗 일행은 사울의 행동을 관찰할 수 있었지만, 사울은 전혀 동굴 내부의 사정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4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여호와께서...이르시기를' 사울에 대한 다윗의 궁극적 승리를 예언하는 본절에 언급된 하나님의 말씀은 갓과 같은 선지자를 통해서 이미 다윗에게 주어졌던 말씀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때 다윗의 추종자들은 다윗에게 주어졌던 그 말씀을 상기시키면서, 사울이 호위병도 없이 하필이면 다윗과 그의 일행이 숨어있던 그 동굴로 들어온 것은, 사울의 인생을 거기서 비극적으로 끝나버리도록 조성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것으로 인식하고 다윗의 적극적인 행동을 촉구하였다. 그리고 사실 그때 다윗이 사울만 제거해 버리면, 당시의 정황상(18:7) 민심은 다윗에게로 급속도로 기울어질 것이었고, 따라서 다윗은 크게 힘들이지 않고 왕권을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남다른 신앙과 인품 및 우정이 있었다.

'다윗이...사울의 겉옷자락을...베니라' 다윗은 동굴에 들어온 지 오래여서 동굴의 어두움에 이미 적응이 되었으나, 사울은 그렇지 못하여 자신에게 가까이 근접해 온 다윗의 위와 같은 행동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이 행동을 도왔을 것이 틀림없다(26:12). 한편 다윗이 이때 사울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 자락만 벤 까닭은 다음과 같다. 즉 (1) 원수에 대한 복수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께서만 하실 일임을 확신했으며(12절), (2)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는 증거를 남김으로써, 자신이 사울을 해하려고 한다는 사울의 의심과 오해를 풀기 위해서였다(11절). 

한편, 여기서 '겉옷'(메일)은 땅에 끌릴 정도로 긴 도포식 통옷으로서(2:19), 사울은 아마 용변을 보기 위하여 이 겉옷을 벗어 옆에 두었을 것이다. 혹 입고 있었더라도 그 옷은 땅에 길게 축 늘어져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다윗이 사울의 그 겉옷자락을 베는 데 있어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사울은 그때 긴장을 푼, 전혀 무방비의 상태에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다윗의 행동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5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후에...다윗의 마음이 찔려' 다윗은 사울을 죽이자는 부하들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고 단지 사울의 겉옷자락만 살짝 베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 자체가 혹시라도 여호와께 기름 부음 받는 자의 인격을 조롱한 행위로 비쳐지지는 않았는지 괴로워 한 것이다. 더 나아가 아무튼 그 일은 여호와께 기름 부음 받은 자에 대한 결례인 것만은 틀림없기 때문에, 다윗은 그 사실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따라서 이는 도피시절 당신의 다윗의 민감한 신앙 양심을 느끼게 해준다.

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본절에는 다윗이 사울을 해하지 아니한 결정적 이유가 시사되고 있다.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 다윗의 이 말은 사울이 하나님에 의하여 신정 왕국의 왕으로서 임명된 자, 즉 하나님의 지상 대리자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말이다. 즉 다윗은 사울을 단순한 권력자가 아니라 엄연히 여호와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아(10:1), 선민 통치의 대권을 위임받은 자로 인정했기 때문에 사울을 해치지 않았다. 
따라서 다윗은 사울을 결코 원수로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가 충성을 다해섬겨야 할 주인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7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 

'다윗이...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여기서 '금하다'(솨사)란 말은 '째다', '찢다', '끊다', '자르다'란 의미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 단어는 강조형으로 사용되어, 엄히 책망하면서 상대방의 행동을 적극적으로 차단시키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처럼 다윗은 자신과 부하들의 사사로운 감정을 극복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근거하여 행동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같은 자의 앞날을 보장하신다.

8 그 후에 다윗도 일어나 굴에서 나가 사울의 뒤에서 외쳐 이르되 내 주 왕이여 하매 사울이 돌아보는지라 다윗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내 주 왕이여' 사울을 향한 다윗의 이 호칭은 깊은 존경과 전적 복종의 뜻이 담겨있는 호칭으로서, 다윗은 자신이 여전히 사울의 충성스런 신하임을 강조하고 있다.

'땅에 엎드려 절하고' 당시 다윗은 그 용맹과 지략등으로 인해 주변 이방 국가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는 순한 양처럼 온유했고, 충실한 종처럼 겸손했다. 실로 이러한 겸손과 예의는 참된 그리스도인임을 입증하는 외적 증거가 된다. 진정 겸손한 자세로 진실을 말할 때 성도는 가장 성도답다.

9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 
본서의 내용을 볼 때, 사울이 다윗에 대하여 증오심을 갖게 된 것은 다윗의 명망에 대해 시기와 질투심에 사로잡힌 사울 자신의 잘못된 성격 때문이었지, 특별히 어떤 사람의 충돌질에 의한 것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마치 사울이 다른 사람의 이간질에 의하여 자신에 대한 증오심을 갖게 된 양 말하고 있는 것은, (1) 실제로 사울의 증오심을 부추긴 구시라는 베냐민 사람이 없지 않아 있었으며(시 7편), (2) 완곡한 표현으로 사울의 완악한 마음을 유화시켜 보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10 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넘기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 어떤 사람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하지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 하였나이다 

11 내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 자락만 베었은즉 내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오늘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여기서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결정적 기회가 주어졌었으며, 또한 사울을 죽이라는 적극적인 권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다고 말함으로써, 사울에 대한 자신의 결백을 강력히 주장한다. 즉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을 벨 때(4절) 이미 생각했던 대로, 사울을 향하여 (1) 자신의 결백한 행위와 (2) 전혀 사울왕을 해칠 의사가 없는 자신의 마음을 간절히 호소했다. 이러한 다윗의 호소는 '베냐민인 구시의 말에 대하여 여호와께 한 노래'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시 7편에도 잘 나타나 있다.

'보소서...옷자락을 보소서' 다윗은 이때 자신의 말을 입증하는 증거물로서, 사울의 베어진 겉옷자락(4절)을 제시한다. 실로 다윗의 손에 들려있는 사울의 겉옷자락은 사울의 의심이나 주위의 모든 중상 모략을 일소(一掃)하는 증거물로서, 곧 다윗이 사울을 해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생생한 시각적 증거물이다.

12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여호와께서는...보복하시려니와 내손으로는...않겠나이다' '원수 갚는 일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롬 12:21, 히 10:30, 신 32:35)는 사상은 다윗의 철학이요, 신앙이었다. 따라서 다윗은 하나님을 '보수하시는 하나님'(시 94:1)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이처럼 사람이 자신에게 극악한 죄를 범한 자에 대하여 그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위임한다는 것은 곧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신앙하는 행위가 되므로, 하나님께서 심히 원하시는 일이다.

13 옛 속담에 말하기를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하였으니 내 손이 왕을 해하지 아니하리이다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이 속담은 악한 마음의 소유자만이 악을 행할 수 있다는 뜻이다(잠 13:16, 마 7:16-20, 12:35, 눅 6:43, 약 3:11, 12). 바꾸어 말하면 '그 사람이 어떤 자인지는 그의 행위를 보아 알 수 있다'는 뜻인데, 따라서 이 속담은 '열매로 그 나무를 알수 있다'(마 7:20)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일맥 상통하는 말이다. 아무튼 다윗은 이 속담을 언급함으로써, 만일 자신에게 왕이 되고픈 야욕이나 사울을 해할 악의가 있었다면 자신에게 기회가 왔을 때 사울을 죽였을 것이나,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다만 겉옷자락만 벤 것은 자신에게는 그러한 야욕이나 악의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내 손이 해하지 아니하리이다' 앞에서의 속담을 언급함으로써 자신이 악인이 아님을 증명한 다윗은, 이제 반대로 자신은 선인이기 때문에 그 선한 성품에 따라 자신은 절대로 사울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14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의 뒤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다 

'이스라엘 왕이...개나 벼룩을' 여기서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도록 하나님에 의하여 세워진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영광스럽고 위엄있는 호칭이다. 반면 '죽은 개나 벼룩'은 가장 비천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를 상징한다. 아울러 전혀 해(害)를 끼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상대할 가치조차 없는 존재를 상징한다. 그런데 여기서 다윗은 '이스라엘 왕'이라는 칭호는 사울에게, 그리고 '죽은 개나 벼룩'은 자신에게 대조적으로 적용시킴으로써, 사울에 대한 자신의 현저한 상대적 열등성을 강조한다. 다윗이 이같이 한 까닭은, 사울로 하여금 다윗 자신에 대하여 어떠한 적의나 질투, 그리고 경계심 따위 등을 갖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삼하 9:8, 16:9, 왕하 8:13).

15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심판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참 재판장으로 인정하고 전적 의뢰하는 다윗의 신앙을 잘 보여 주는 말이다.

16 다윗이 사울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마치매 사울이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하고 소리를 높여 울며 

'내 아들 다윗아...소리를 높여 울며' 진실에 근거한 다윗의 간절한 호소(8-15절)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즉 다윗은 '내 주 왕'(8절).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10절), '나의 아버지'(11절) 등의 표현으로써, 최대의 충성과 존경과 사랑을 나타내면서 사울의 양심에 호소한 결과, 사울의 무디고 강퍅한 마음의 심금까지도 울릴 수 있었다. 
따라서 결국 사울은 다윗을 '내 아들 다윗아'라고 부르면서 대성 통곡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울의 이같은 반응은 그가 진실하게 회개했음을 의미치 않는다(26:1, 2). 단지 사울은 감정에 강하게 좌우되는 자신의 균형 잡히지 못한 성격에 따라 다윗의 설득력 있는 호소에 감동되고 말았을 뿐이다. 
한편 '내 아들 다윗아'는, 11절에서 다윗이 사울을 '나의 아버지여'라고 한 것에 대한 적절한 응답이라 볼수 있다. 아무튼 사울의 이같은 표현은, 사울이 이전에 다윗을 '죽어야 할 자'(원문대로 한다면 '죽음의 아들')라고 한 것에 비하면 실로 놀라운 호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20:31).

17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학대하되' 문자적인 의미는 '악으로 보답하되'(have rewarded' evil, KJV)란 뜻이다.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하나님께 기대되던 (15절) 판결이 사울에 의하여 먼저 이같이 행해지고 있다. 실로 증오심과 질투로 불타오르던 사울의 마음이 다윗의 진실하고도 겸손한 호소와 변호로 말미암아 녹아 내렸을 때, 사울은 사태를 바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사울의 이러한 마음은 일시적인 감동에 근거한 사과에 불과할 뿐 진정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는 회개는 아니었다. 이것은 얼마 후 사울이 또다시 다윗을 죽이기 위해 추적한 사실로 보아 명백하다(26장). 이처럼 한 순간의 감정이나 감동으로 행해지는 사과는 진정한 회개에 이를 수 없고, 따라서 진실성이 결여된 것일 수 밖에 없다. 

18 네가 나 선대한 것을 오늘 나타냈나니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넘기셨으나 네가 나를 죽이지 아니하였도다 

본절은 다윗이 사울을 선대(善待)한 내용으로서(17절), 곧 사울이 다윗을 자신보다 더 의롭다고 말한 근거이다.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붙이셨으나' 여기서 '붙이셨으나'(시그라니)는 '닫다', '가두다'란 의미가 있는 '사가르'의 강조형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여호와께서 당신의 뜻에 의하여 당신의 원수를 택한 백성(자)에게 넘겨주는 것을 뜻하는 동사 '나탄'(*)과는 전혀 다르다(23:4). 

따라서 우리가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항은, 다윗의 부하들은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결정적 기회를 가졌던 동일한 사건에 대하여 '나탄'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반면(4절), 사울 자신은 '사가르'라는 단어를 적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이것은, 다윗의 부하들은 사울과 다윗의 갈등과 다툼을 성전(聖戰)의 차원에서 보는 반면, 사울은 의도적으로 그렇게 보지 않고 개인적 차원의 정적(政敵) 관계로 국한 시키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해준다. 
그러나 아무튼 사울의 이러한 깨달음과 고백은 이전에 사울이 호언한 바(23:7), 하나님께서 다윗을 자신의 손에 붙이셨다고 하던 때와는 뚜렷이 대조된다.

19 사람이 그의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 내게 행한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20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나는...알고...아노니' 본절에서 언급된 사울의 이같은 확신은 이미 요나단에 의하여 다윗에게 정확하게 알려졌었다<23:17>. 즉 사울은 (1) 하나님의 신이 자신에게서 떠났던 사실(16:14), (2) 하나님께서 전쟁터에서 다윗을 형통케 하신다는 사실(18:5), (3) 다윗이 온 백성들로부터 칭송받고 있다는 사실(18:6, 7), (4) 심지어 다윗이 자신의 가족들로부터도 호감을 사고 있다는 사실(18:1, 20) 등으로 인하여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에 오르게 될 것을 확신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무엘에게 다윗이 기름부음 받았다는 사실은 몰랐을 것이다)

21 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버지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게 맹세하라 하니라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이것은 왕조가 바뀔 경우 후환을 없애기 위해 구 왕조의 후손들을 멸절시켰던 고대의 풍습과 연관시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20:14, 15 주석 참조).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 이것은 앞에 나오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에 연이어진 대구법의 표현이다. 따라서 이 말은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와 동일한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고대 중근동에서는 (1) '이름'을 곧 그 사람의 '인격'으로 간주했으며, (2) 또한 후손들은 조상에게 포함되는 것으로 인식됐다는 점(히 7:5)등에서 볼 때, 사울의 '후손'이 멸절되는 것은 곧 사울이 멸절되는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22 다윗이 사울에게 맹세하매 사울은 집으로 돌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요새로 올라가니라

'다윗...요새로 올라가니라' 다윗의 이같은 행동은 (1) 자신에 대한 사울의 일시적 호의를 근본적 변화로 볼 수 없었으며, (2) 다윗을 경쟁 관계로 생각하는 사울이 내심 그의 입경(入京)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편 여기서 '요새'(함메추다)는 '그 요새'(the stronghold)란 뜻으로서, 말할 나위없이 유다 광야에 속한 '엔게디 황무지'(엔게디 요새, 23:29, 24:1)를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