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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25장 절별 해석 및 주석

LNCK 2023. 3. 21. 10:46

한글 주석 - HANGL NOCR

◈삼상25장 절별 해석 및 주석

1 사무엘이 죽으매 온 이스라엘 무리가 모여 그를 두고 슬피 울며 라마 그의 집에서 그를 장사한지라 다윗이 일어나 바란 광야로 내려가니라 

'사무엘이 죽으매' 사울의 추격과 다윗의 도피가 계속되는 상황 가운데서, `라마나욧 사건'(19:18-24) 이후 중단되었던 사무엘의 기사가 나타나는데, 곧 그의 사망 소식이다. 한편 사무엘의 사망 연도는 83세 때인 대략 B.C. 1017년 경으로 추정된다. 우리가 이같이 볼 수 있는 근거는,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부은 때는 `미스바 전투'(7:5-11, B.C. 1055년)가 있은지 5년 후 즉 사무엘이 약50세 때인 B.C. 1050년 경이며, 따라서 사무엘의 출생 연도는 대략 B.C. 1100년 경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제 언약 백성 이스라엘의 최후의 사사요 최초의 선지자인 사무엘은 자신이 하나님에 의하여 소명된 목적, 곧 신정(神政) 왕국의 건설을 준비하는 직무의 수행을 완료하고(16:13) 하나님의 마지막 부르심에 따라 세상을 하직하고 열조에게로 돌아간 것이다(창 25:8,  35:29,  49:33,  민 20:26).

'온 이스라엘 무리가...애곡하며' 사무엘의 죽음에 대한 백성들의 슬픔은 마치 아비의 죽음에 대한 자식의 슬픔과도 같았다. 즉 이스라엘 온 백성이 하나같이 애곡과 애통의 날을 보냈던 것이다. 실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슬픔은 (1) 선지자로서 영적, 정치적으로 완전히 쇠퇴했던 이스라엘을 회복시켰던 사무엘의 업적(7:3-16), (2)사사로서 청렴 결백했던 사무엘의 인품(12:1-5) 때문이었을 것이다(1:1,  7:16). 
그리고 `집'은 문자적 의미의 `가옥' 그 자체라기 보다는 집(가옥)에 딸린 공지(空地)나 정원 또는 뜰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따라서 혹자(Klein)의 생각처럼 이를 `고향'이란 의미로까지 확대 해석할 필요가 없다. 
유대 전승은 사무엘의 장지(葬地)가 미스바의 고지(高地)라고 주장하나, 지리적 여건상 타당성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사무엘의 장지를 그가 살던 집에 딸린 정원의 공지나 뜰로 이해함이 좋을 것이다. 사실 이와 같은 장사법(葬事法)은 당시 고대 중근동 지역에 흔히 있었던 관례로서, 오늘날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도 입증되고 있다.

'다윗이...바란광야로 내려가니라' 여기서 `바란 광야'는 시나이 반도의 북쪽에 위치한 지역으로서(창 21:21,  민 10, 12,  12:16,  13:3, 26), 아라비아 반도의 최남단부에 있는 오늘날의 `엘-티'(El-Tih)광야이다. 
`바란 광야'는 팔레스틴의 최남 도시 `브엘세바'와 뚜렷한 경계선 없이 인접한 광야로서, 역시 유다 광야와 경계선 없이 이어지는 광야이므로, 당시의 여건상 다윗이 이곳까지 도피했을 가능성이 있다. 사실, 당시 사울 왕을 견제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인 사무엘이 죽자, 그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은 바 있는(16:12, 13) 다윗은 사울에게서 더욱 멀리 도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다윗과 그 일행이 `엔게디 황무지'를 떠나서 `바란 광야'로 내려갔다가, 자신들이 이전에 머물렀던(23:24, 25) `마온 광야'로 다시 올라 온 것은 식량 문제의 해결을 위함이었음이 분명하다(8, 11절).


2 마온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의 생업이 갈멜에 있고 심히 부하여 양이 삼천 마리요 염소가 천 마리이므로 그가 갈멜에서 그의 양 털을 깎고 있었으니 

'마온' `거처', `장소', `뜰'이란 뜻의 `마온'(Maon)은 `십'과 `갈멜' 부근에 있는 유다의 구릉지 성읍이다(수 15:55). 그리고 현재의 이름은 `마인'(Main)이다.

`갈멜'(Camel)은 `마온’의 북쪽 약 1.6km 지점으로, 이전에 사울이 아말렉 전투 후 자신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기념비를 세웠던 곳이다(15:12). 따라서 이 마을에서는 사울이 영웅시되며, 사울의 영향력 역시 컸을 것임이 분명하다.

'양이 삼천이요 염소가 일천' 소유주의 이름을 밝히기도 전에 이같이 재산 명세를 먼저 언급함으로써, 본서의 저자는 `나발'(3절)이라는 인물보다 그의 부유함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한편 여기의 이 가축들은 비록 욥이 소유한 재산, 곧 `양 칠천, 약대 삼천, 황소 오백, 나귀 오백'(욥 1:3)보다는 적은 숫자이나, 당시 팔레스틴의 여러 형편을 기준으로 한다면 엄청난 숫자였음이 분명하다. 아무튼 `나발'은 이 많은 가축들을 마온 광야에 고지대에 방목하고 있었을 것이다.

3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실이 악하며 그는 갈렙 족속이었더라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여기서 `나발'은 `시들다', `바보처럼 행동하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 `나벧'에서 파생된 형용사로서, 성경에서 이 단어는 `어리석은', `우매한', `괴악한'등으로 번역되었다(삼하 13:12,  시 14, 1,  39:8). 그런데이 이름은 본명이 아니라, 아마도 그의 특성으로부터 붙여진 별명(別名)일 가능성이 높다.

'그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아비가일'은 `기쁘게 하는 자'또는 `기쁨을 주는 자'란 뜻이다. 이 여인은 후에 자신의 남편 `나발'이 죽자, 다윗의 아내가 되어 다윗의 둘째 아들 길르압을 낳았다(삼하 3:3,  대상 3:1).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총명하고'(토바트 세켈)는 `지혜가 뛰어난', `명철한'이란 뜻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성경에서 주로 하나님의 뜻을잘 분별하는 사람에게 적용되었다(대상 22:12,  대하 30:22,  느 8:8,  시 111:10). 그리고 `용모가 아름다우나'(예파트 토에르)는 남녀를 막론하고 내면적, 외면적 아름다움을 동시에 갖춘 사람에게 적용되는 말이다(16:18,  아 4:10,  7:1,6)

'완고하고 행사가 악하며' `완고하고'(카쉐)는 `거칠은', `굳은', `난폭한'이란 뜻이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특히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치 않으며, 또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줄 모르는 `목이 곧은' 사람에게 적용되었다(출 33:3, 5,  34:9, 신 9:6,  삿 2:19). 그리고 `악하며'(라 마알랄림)는 성질을 가리키는 `완고하고'와는 달리, 능동적으로 악한 행위를 일삼는 것을 가리킨다.

'그는 갈렙 족속이었더라' 여기서 `갈렙 족속'(켈리보)은 히브리 본문의 독법(讀法, 케티브)을 따라 해석하면, `그는(그 마음의 소욕을 따라)자기 마음대로하는 자였다'란 뜻이다. 
그리고 70인역(LXX, the Septuagint), 아랍역(the Arabic), 수리아역(the Syriac)및 요세푸스(Josephus)는 이 말을 `개'란 뜻의 `켈레브'에서 파생된 말로 보고, 곧 `개 같이 야비한 자', `개처럼 성급하고 심술궂은 자'란 뜻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본 문맥상의 흐름으로 본다면, 이 말은 난외 독법(케리)을 따라 `갈렙 족속'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켈리비'로 봄이 타당한 듯하다(Klein, Keil, Lange, Simth, Targum, Vulgate). 
한편 갈렙은 그 신실성으로 말미암아 모세로부터 헤브론을 중심한 유다 땅의 일부를 약속 받았었고, 그는 그 자신이 약속받은 그 땅을 정복했었다(민 13, 14장,  신 1:22-36,  수 14:6-15, 15:13, 14). 한편 `마온'(Maon)이라는 지명은 갈렙의 자손인 삼매의 아들 `마온'에게서 유래했다는 점에서 볼 때(대상 2:45), 바로 이 `마온'에 살던 `나발'은 `마온'이라는 인물의 후예인 듯하다.

4 다윗이 나발이 자기 양 털을 깎는다 함을 광야에서 들은지라 

'나발이...양털을 깎는다 함을 들은지라' 본절은 왜 다윗이 자신의 수하 소년을 나발에게 보내게 되었는지를 말해 준다. 즉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양털을 깎을 때 음식을 장만하는 등, 잔치를 벌이며 손님을 접대하는 것이 보편화 되어 있었다(창 38:13). 즉 유목민들에게 있어 양털을 깎는 날은 농민들의 추수의 날에 해당된다. 아무튼 이같은 관례에 따라 다윗은 자신과 부하들의 먹을 식량을 얻기 위하여 나발의 집으로 수하 소년들을 보냈던 것이다.

5 다윗이 이에 소년 열 명을 보내며 그 소년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갈멜로 올라가 나발에게 이르러 내 이름으로 그에게 문안하고 

'열 소년을 보내며' 이것은 다윗이 자신과 육백명의 부하들이 먹을 많은 음식을 나발로부터 기대했음을 시사해 준다. 또한 `열명'이라는 숫자는 상대방에 대한 최고의 예의와 존경심을 상징한다.

6 그 부하게 사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평강하라 네 집도 평강하라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 

'평강하라' 히브리인들의 전통적 인사법으로서, 본절에서 특별히 3번이나 강조된 것은 그 평화가 나발의 집안에 완전히 정착되기를 비는 다윗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대상 12, 18). 다윗은 비록 현상황이 고통과 절망의 시간들이었지만, 그의 생명을 지탱시켜 주시며 원수의 잔학한 손아귀에서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이러한 평강을 이웃에게 전할 수 있었다(눅 10, 5). 이처럼 신앙인은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환경을 초월하여 이웃에게 `평강'과 `복'과 `기쁨'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창 12:1-3,  벧전 2:9).

7 네게 양 털 깎는 자들이 있다 함을 이제 내가 들었노라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들을 해하지 아니하였고 그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에 그들의 것을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니 

'네게 양털 깎는 자들이 있다' 여기의 `양털 깎는 자들'은 양털 깎는 일을 위하여 나발에 의하여 특별히 고용된 자들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같은 자들이 고용됐다는 사실은 곧 양털 깎는 특별한 축제와 잔치가 배설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4절).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이것은 그때 다윗의 일행과 나발의 양을 치던 목자들이 모두 마온 황무지에 있었던 사실을 가리킨다(2절).

'그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에' 나발의 양들은 마온 광야에서 방목되었지만, 그 본거지는 `갈멜'이었다(2절).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니' 이것은 다윗이, 마온 광야 남쪽에 사는 베드윈 족속등과 같은 아랍 족속들의 약탈과 노략 행위로부터 나발의 목자와 양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했던 사실을 가리킨다. 다윗은 비록 사울에 의하여 쫓기는 몸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외적의 손에서 보호해야 하는 자신의 사명을 결코 망각하고 있지 않았다(23:1-5).

8 네 소년들에게 물으면 그들이 네게 말하리라 그런즉 내 소년들이 네게 은혜를 얻게 하라 우리가 좋은 날에 왔은즉 네 손에 있는 대로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에게 주기를 원하노라 하더라 하라 

'좋은 날' 양털을 깎는 특별한 축제의 날을 가리킨다. 이때는 손님을 초청하여 음식을 대접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물을 나눠 주기도 하였었다.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 이것은 자신을 겸손히 낮추며, 상대방에게는 존경과 헌신을 표시하기 위한 표현법이다. 즉 고대 중근동의 풍습상 연장자 또는 상급자에 대한 존경과 경의의 표시로 장자 또는 상급자에 대한 존경과 경의의 표시로 자신을 `아들'로 낮추어 부르는 일은 보편적이었다. 특히 이 말은 윗사람에게 아버지가 베푸는 것과 같은 자애로운 은혜와 사랑을 기대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표현이다. 한편 이와같은 표현법은 91) 아람 왕 벤하닷에 의하여 엘리사 선지자에게(왕하 8:9), (2) 아하스 왕에 의하여 앗수르 왕 디글랏 발레셀에게(왕하 16:7) 사용되었다.

'주기를 원하노라' 다윗이 나발의 양털 깎는 날을 택하여 이같은 요청을 한 까닭은, 이 날은 특별히 타인에게 은혜를 베푸는 날이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자신의 요청에 대하여 나발이 특별히 불쾌하게 생각지 않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때 다윗은 중근동의 풍습에 따라 자신이 나발의 양들을 지켜주었던 것에 대하여 정당한 대가를 요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러한 방법을 택하지 아니하고, 양털 깎는 날을 기다렸다가 최대의 예의를 갖춰 겸손히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던 것이다.

9 다윗의 소년들이 가서 다윗의 이름으로 이 모든 말을 나발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10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나발의 이 말은 다윗이 사울과 원수의 관계가 된 사실을 염두에 둔 말이다. 즉 이같은 비유를 통하여, 나발은 다윗을 주인(사울)을 배반한 불충한 건달로 몰아가고 있다. 나발이 이같은 반응을 보인 것은, 나발이 살고 있던 갈멜이 사울의 전적비가 세워지는 등 사울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는 마을이라는 사실과 전혀 무관치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울이나 그의 아들 요나단도 다윗을 차기의 왕으로 보는 이 마당에(23:17,  24:20), 일개 졸부에 불과한 나발이 다윗에 대하여 이같은 오만 불손한 태도를 취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뜻에 대단히 둔감한 어리석고 미련한 자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여기서 `억지로 떠나는'(하미트파르침)이란 말은 `깨어지다', `부서지다'란 의미를 갖는 `파라츠'의 재귀적 사역형이다. 따라서 이 단어는 `자신을 위하여(어떤 계약 관계를 일방적으로 깨뜨리고) 튀쳐나가는'이란 의미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나발이 다윗을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사울을 배반한 자로 생각했음을 보여 준다.

11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 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내 떡...물...고기' 이것들은 잔치때에 필수적으로 등장하는 음식물들이다. 그런데 여기서 `술'이 아닌 `물'이 언급된 것은 아마 `갈멜'이 물이 매우 귀한 지역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여기서 나발이 `떡...물...고기' 앞에 `내'(my)라는 1인칭 소유격을 붙여 사용한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청지기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나발의 몰지각성을 잘 보여준다(눅 12, 13-21).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 이말은 다윗 일행이 사울을 피하여 정처없이 돌아다닌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말이다. 따라서 나발은 다윗 일행을 주인에게 좇겨 떠돌아 다니는 부랑아 내지는 건달로 몰아부친 것이다.

12 이에 다윗의 소년들이 돌아서 자기 길로 행하여 돌아와 이 모든 말을 그에게 전하매 
13 다윗이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칼을 차라 하니 각기 칼을 차매 다윗도 자기 칼을 차고 사백 명 가량은 데리고 올라가고 이백 명은 소유물 곁에 있게 하니라

'너희는 각기 칼을 차라' 다윗의 소년들은 나발의 문전 박대로 말미암아 공수(空手)로 돌아와 다윗에게 모든 일을 사실대로 보고했다. 이에 격분한 다윗은 부하들에게 출전 무장을 갖출 것을 명령했다. 이처럼 다윗이 공격적 결의를 하게 된 것은 (1) 다윗은 나발의 양을 지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으며(7절), (2) 그리고 다윗은 식량을 얻기 위하여 최고의 예의를 갖추었으나(8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발은 최악의 모욕적 언사로 응답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그러나 사람이 자신의 원수를 친히 갚은 것은 율법에서 분명히 금지하고 있는 바였다(신 32:35,  롬 12:19,20).

14 하인들 가운데 하나가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우리 주인에게 문안하러 광야에서 전령들을 보냈거늘 주인이 그들을 모욕하였나이다

본절의 언급은 나발의 하인들도 분명히 다윗에 대해서 호의(好意)를 갖고 있었으며, 자신의 상전 나발이 다윗에 대해 취한 태도를 못마땅히 여겼음을 시사해 준다(17절).

'수욕하였나이다' 기본형 `이트'는 `매우 화나게 하다', `격동시키다'란 의미인데, 그 어원은 매나 독수리 등 맹금류(猛禽類)를 쫓아내는 행위에서 연유된다.

15 우리가 들에 있어 그들과 상종할 동안에 그 사람들이 우리를 매우 선대하였으므로 우리가 다치거나 잃은 것이 없었으니

16 우리가 양을 지키는 동안에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어 밤낮 우리에게 담이 되었음이라

여기서 나발의 하인은 나발이 다윗에 대해 취한 태도가 극히 부당한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다윗이 그동안 자신들에게 선(善)을 베풀었던 일을 아비가일에게 세세히 아뢴다.

17 그런즉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할지를 알아 생각하실지니 이는 다윗이 우리 주인과 주인의 온 집을 해하기로 결정하였음이니이다 주인은 불량한 사람이라 더불어 말할 수 없나이다 하는지라

'주인은 불량한 사람이라' 여기서 `불량한 사람'(벤 벧리야알)은 문자적으로는 `사악한 자의 아들' 혹은 `무익한 자의 아들'이란 뜻인데, 곧 그 악한 성품과 못된 성질 등으로 인해 `아무런 쓸모없는 인간' 즉 `백해 무익한 인간'이란 뜻이다. 한편 이와 같은 호칭은 지극히 타락했던 엘리의 두 아들들에게도 적용되었었다(2:12).

18 아비가일이 급히 떡 이백 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 부대와 잡아서 요리한 양 다섯 마리와 볶은 곡식 다섯 세아와 건포도 백 송이와 무화과 뭉치 이백 개를 가져다가 나귀들에게 싣고

'아비가일의 급히...취하여' 아비가일의 기지(機智)가 엿보인다. 특히 여섯 종류의 음식을 준비한 데서 그녀의 세심한 정성과 배려를 느낄 수 있다. 이처럼 정성스런 예물은 맹렬한 분노마저도 그치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잠 18:16,  21:14).

'떡 이백 덩이'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한 가족에게 필요한 떡의 양(量)을 `떡 세 덩이'로 보았다(눅 11:5-8). 따라서 육백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있던 다윗에게 이같은 양(量)은 결코 많다고 볼 수 없다.

'볶은 곡식 다섯 세아' 한 `세아'는 약 13.5리터이다. 따라서 `다섯 세아'는 약 70리터정도에 해당되는 분량이다. 그런데 이처럼 그 양이 너무 적다는 이유 때문에 어떤 학자는 `오백 세아'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70인역은 `다섯 에바'로 보고 있다. 그러나 앞에 언급된 떡의 양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음식물은 다윗의 출격 소식을 들은 아비가일이 그 노(怒)를 일단 진정시킬 목적으로 급히 준비하여 간단히 요리된 관계로 적을 수 밖에 없었다. 다라서 본문 그대로를 정확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한편 여기의 `볶은 곡식'은 야전에 나가 있는 군인들에게 적절한 음식으로 인정되었다(17:17).

'건포도...무화과' 이 같은 식품들은 지극히 곤비한 자들의 원기 회복을 위하여 매우 적절한 음식으로 사용되었다(30:11, 12).

19 소년들에게 이르되 나를 앞서 가라 나는 너희 뒤에 가리라 하고 그의 남편 나발에게는 말하지 아니하니라

'내 앞서 가라...뒤에 가리라' 이것은 `아비가일'이 음식을 실은 나귀보다 훨씬 뒤쳐져서 따라가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앞서'는 `면전(面前)에서'란 의미이기 때문이다(수 4:12). 즉 `아비가일'은 그때 짐을 실은 나귀의 뒤를 바로 좇은 것이다. 이처럼 예물을 앞서 진행시키는 것은 상대방의 호의와 은혜 입기를 소원한다는 뜻이 담긴 관례였다(창 2:13-23).

'남편 나발에게는 고하지 아니하니라' 이것은 아비가일이 음식을 갖고 다윗에게 가는 것을 나발이 알게 될 경우 틀림없이 적극 막을 것이 뻔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현명한 자는 때에 따라 침묵하고, 때에 따라 말한다. 말하기에 적당한 때를 분별하는 것이야말로 매우 큰 지혜라고 할 수 있다(잠 15:23,  약 3:2).

20 아비가일이 나귀를 타고 산 호젓한 곳을 따라 내려가더니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자기에게로 내려오는 그들과 마주치니라

'산 호젓한 (과거엔 유벽한) 곳' 이는 마치 산에 의하여 덮여진듯 은밀한 곳을 가리킨다(27:5,  31:20). 한편 카일은 `산의 두 정산 사이에 움푹 들어간 곳'이라 했다. 그리고 NIV는 `협곡'(ravine)으로 번역했다.

'다윗...마주 내려오는 것을 만나니라' 그 당시 다윗은 나발이 살고 있었던 `갈멜'의 맞은편쪽 `요새'에 자리 잡고 있었음을 시사해준다. 즉 `마온 황무지'는 여러 개의 고지(高地)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갈멜'이며, 또 다른 하나가 다윗이 머물고 있었던 `요새'였을 것이다.

21 다윗이 이미 말하기를 내가 이 자의 소유물을 광야에서 지켜 그 모든 것을 하나도 손실이 없게 한 것이 진실로 허사라 그가 악으로서 나의 선을 갚는도다

22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침까지 남겨 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남자(마쉐틴 베키르)' 문자대로 직역한다면 `벽을 향해 오줌을 누는 자'(that pisseth aginst the wall, KJV)란 의미인데, 이 말은 남자를 경멸적으로 일컫는 표현이다(왕상 16, 11,  21:21,  왕하 9:8). 결국 다윗의 이 말은 나발에게 속한 모든 자들을 다 죽이겠다는 단호하고도 분노에 찬 결의이다.

23 아비가일이 다윗을 보고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 앞에 엎드려 그의 얼굴을 땅에 대니라

'아비가일...다윗의 앞에 엎드려' 이러한 태도와 자세는 자신을 낮추는 반면 상대는 높이는 최상의 예우이다. 아비가일이 이처럼 겸손한 태도를 취한 까닭은 일차적으로는 다윗의 분노를 완하시키기 위함이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녀가 다윗을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인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당시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은 백성들에 의하여 이미 보편적으로 예측되고 있었다(18:7, 30). 따라서, 특히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능력을 소유했던 `총명한'(3절) 여인 아비가일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24 그가 다윗의 발에 엎드려 이르되 내 주여 원하건대 이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에게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내 주여...여종으로' 아비가일은 행동 뿐만 아니라, 언사(言辭)에 있었서도 이처럼 겸손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죄악을...내게로 돌리시고' 아비가일의 희생 정신이 돋보이는 말이다. 즉 아비가일은 남편 나발과 자기 집의 모든 남자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희생을 불사하고 다윗에게 간절히 용서를 빌었다.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여기서 `귀에 말하다'라는 표현은 반드시 필요한 내용을 상대에게 은밀하면서도 진지하게 전달.호소할 때 사용되는 표현이다(22:8,  신 31:11,  룻 4:4).

25 원하옵니다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의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의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여종은 내 주께서 보내신 소년들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본절에서 아비가일은 나발이 큰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그를 상대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불량한 사람(아쉬 하벧리야알)' 문자적으로는 `무익한 남자', `쓸모없는 남자', `무가치한 남자'란 뜻이다. 17절 주석 참조.

'그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 이름이 나발이라' `어리석은', `미련한'이란 의미를 갖는 `나발'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 나발이라는 인물이 어리석고 미련한 행동을 했음을 가리킨다. 즉, 나발이 다윗을 하나님께서 택하신 차기 이스라엘의 왕으로 바로 보지 못한 채 (1) 오히려 사울을 배반한 불충한 떠돌이 종으로 몰아세웠으며(10절), (2) 다윗에게 주어져야 할 마땅한 수고의 대가를 지불하기 거절한 것(11절)등은 분명히 제 무덤을 스스로 파는 어리석고 미련한 일이었다.

'그는 미련한 자' 문자적으로는 `그에게 어리석음이 있다'이다. 따라서 여기의 `미련한'(네발라)은 `어리석은'(나발)의 명사형이다.

'여종은...소년들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이것은 나발의 허물을 아비가일 자신이 담당해야 할 이유이다. 즉 아비가일은 어리석은 나발을 제대로 감독치 못하였기 때문에, 나발이 다윗을 진토케 하는 큰 잘못을 범하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만일 아비가일이 자신의 남편 나발을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했다면, 그녀는 남편의 행동을 주의깊게 지켜봐야만 하는 책임이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는, 결과적으로 어리석은 나발이 어리석은 짓을 하였는데, 그 모든 일에 대하여 다윗이 어리석은 나발을 상대로 복수할 일이 못되니 제발 마음을 도리시고 용서해 달라는 뜻이다.

26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도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여호와께서 사시고 내 주도 살아계시거니와' 이 표현은 맹세 또는 어떤 말의 신실성을 확증.강조하려고 할 때 사용되는 표현이다(14:45,  17:55,  19:6,  20:21,  26:10, 삼하 2, 27). 즉 이는 `여호와께서 살아계신 것이 확실하듯이 ~도 확실하다'란 뜻이다.

'피를 흘려 친히 보수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아비가일의 이 말은, 그녀가 자신을 다윗의 유혈 보복을 중지케 하기 위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보내진 사자(使者)로 자임(自任)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사실, 당시 다윗은 이글거리는 분노의 불길 속에 휩싸여 있었으므로, 어리석은 나발로 인해 자기 손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피흘리는 복수의 범죄를 저지를 뻔하였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아비가일을 통해 장차 왕위에 오르게 될 다윗을 영적으로 온전하게 보존하셨던 것이다.

'나발과 같이 되기를' 즉 나발과 같이 어리석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여기서 구약 성경은 `어리석음'을 필연적으로 벌을 받게 되는 `불경건'과 항상 연결시키고 있음에 주목해야할 것이다(26:21,  시 14:1,  잠 14:17,  사 32:6,  렘 10:8). 따라서 `나발과 같이'(어리석게)된다는 것은, 곧 그 어리석은 행위로 인하여 결국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7 여종이 내 주께 가져온 이 예물을 내 주를 따르는 이 소년들에게 주게 하시고

'예물(베라카)' 이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대부분 `복', `축복'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아비가일은 여기서 바로 이같은 단어를 자신이 가져온 음식에 적용시킴으로써, 자신의 남편 나발의 모욕적인 언사(10, 11절)와 상쇄시키려고 한다. 즉 나발은 심부름왔던 다윗의 사환들에게 저주스러운 말을 퍼부었지만, 그의 아내 아비가일은 여기서 그 사환들에게 축복된 `예물'을 갖고 온 것인 양 표현함으로써, 남편의 악한 행위를 보상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 소년들에게 주게 하시고' 나발의 모욕적인 언사를 들은 것은 바로 이들이었기 때문에, 아비가일은 `예물'을 다윗이 아닌 `소년'들에게 주는 것처럼 표현했다. 그러나 물론 그 음식은 다윗의 요청에 따라, 그리고 다윗의 진노를 달래기 위하여 가져온 것이다.

28 주의 여종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

'여종의 허물을 사하여 주옵소서' 여기서 아비가일은 남편 나발의 불미스런 행동이 자신 때문임을 재차 언급한다(24, 25절).

'여호와께서 반드시...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 말은 여호와께서 다윗의 왕권을 굳건하게 하실 것을 가리킨다(삼하 7:11, 26, 27,  왕상 2, 24,  11:38). 그런데 여기의 `집'(바이트)은 `가문', `일족'이란 의미이다(창 12:1,  삼하 3, 6, 7:16). 그리고 `든든한'(네에만)은 `신뢰하다', `믿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 `아만'의 수동형 분사이다. 
특히 이 단어는 신적 언약의 신실성을 강조하는 문맥에서 주로 사용된다(시 89:28, 29,  사 55:3). 따라서 여기의 `든든한 집을 세우리니'라는 말은 (1) 다윗과 그의 후손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시며 (2) 다윗의 후손 중 메시야(`기름 부음을 받은 자', 2:10)를 통하여(마 1:1) 하나님의 나라를 통치하실 것(고전 15:25,  빌 2:11)이라는 `다윗 언약'을 예시하는 말임이 분명하다(삼하 7:11). 그러므로 바로 이와 같은 예언적 영안의 소유자라는 점에서 `아비가일'은 가히 `총명한'여인이라 할 수 있다(3절). 한편 이같은 예언은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에 의하여 이미 언급된 바 있었다(2:10).

'이는(키)' 이 단어는 앞 구절의 이유를 설명해 주는 구절을 이끄는 접속사로서, `왜냐하면'이란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여호와의 싸움'은 하나님의 공의적 심판을 위하여 하나님의 절대적 도우심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 하나님의 대적들과 싸우는 성전(聖戰)을 가리킨다(18:17,  삼하 5:19-23). 
아비가일은 이처럼 다윗이 `성전(聖戰)을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선택된 자임을 강력히 시사함으로써, 다윗으로 하여금 나발을 죽여 손에 피를 흘리는 사사로운 보복을 중지토록 하려고 한다. 아무튼 아비가일이 여기서 `성전 수행(修行)'을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위한 한조건처럼 언급한 까닭은, `성전수행'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고, 그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정치적 상황 가운데서 다윗도 왕위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아비가일은 `성전'과 `왕권'을 밀접한 관계 속에서 바라보고 있음이 분명하다.

29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본절은 28절의 끝부분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 볼 수 있다.

'사람이 일어나서' 여기서 `사람'(아담)은 단수라는 점에서, 다윗을 계속적으로 죽이려 했던 한 인물 `사울'을 가리킴이 분명하다(Smith). 아비가일은 사울이 다윗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사실을 넉넉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한편, 이 말은 더넓은 의미에서 사울처럼 다윗을 대적하는 모든 원수 및 그 세력을 가리킨다고 볼 수있다.

'내 주의 생명은...생명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이 은유적 표현은 값진 보화나 귀중한 물건의 안전한 보관을 위하여 그것을 `싸개'에 잘 싸서 묶어 두었던 고대 중근동의 풍습에서 유래했다. 한편 여기서 `싸개'(체로르)는 `주머니' 또는 `보자기'(bundle, KJV)를 가리킨다(욥 14:17,  잠7:20). 아무튼 본 문구는 다윗의 생명은 하나님의 안전한 보호하에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여호와의 불꽃 같은 눈이 다윗의 생명을 항상 지켜 보호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물매로 던지듯...던지시리이다' 오랫동안 물매를 사용했으며 심지어는 그것으로 블레셋의 용장 골리앗을 죽이기까지 했던(17:49) 다윗은, 한 번 던져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물맷돌 성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같은 사실을 감지한 지혜로운 아비가일은 다윗의 원수의 생명을 물맷돌에 비유함으로써, 원수의 회복 불가능한 완전한 멸망을 설명하고 있다. 즉 여기서 아비가일은 `생명싸개'(체로르 하하임, the bundle of life) 속에 곱게 싸여 여호와의 품속에 간직되어 있는 다윗의 생명과, `물매 속의 물매돌'처럼 획획 돌려져 멀리 날려 버려질 원수의 생명을 대조시킴으로써, 다윗의 궁극적 승리를 기원하고 또한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30 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실 때에

'여호와께서...하신 말씀' 이것은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을 때(16:13) 선지자 사무엘을 통하여 약속받은 말씀일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도 별도의 게시 수단에 의하여 다윗에게 선포된 말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후에도 별도의 계시 수단에 의하여 다윗에게 선포된 말씀이 이썽아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아무튼 총명하고 신앙적인 여인 아비가일은 다윗과 관련된 하나님의 뜻과 계시의 말씀을 아마도 선지 생도들과의 교제 등을 통하여 알고, 오늘날 이처럼 성숙한 예언적 통찰력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모든 선을...행하사' 구체적으로는 여호와께서 다윗을 왕위에 올리는 일일 것이다.

'지도자(나기드)' 엄밀히 말하여 이 말은 `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9:16,  10:1). 그런데 아비가일이 여기서 `왕'을 의미하는 `멜렉'대신에 이단어를 사용한 까닭은, 그 당시 사울이라는 `왕'(멜렉)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의 이 `나기드'는 왕에 대한 조심스러운 은유적 표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31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복하셨다든지 함으로 말미암아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 다만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실 때에 원하건대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 하니라

본절에서 아비가일은 다윗이 나발을 죽이지 않을 경우, 다윗은 후일 왕이 되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슬퍼하실 것도 없고' 여기서 `슬퍼하실 것'(레푸카)은 `거침돌이 될 것'이란 뜻이다. 순간의 격분과 분노로 사람을 죽인 후 자신의 잘못을 나중에 깨달았을 때, 그 사람이 겪게 될 마음의 고통은 실로 대단할 것이다. 즉 두고 두고 양심의 거침돌이 되어 괴롭힐 것이다. 바로 그같은 예 중의 하나가 바로 밧세바 여인과의 간통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그 남편 우리아를 죽였다가 다윗이 겪어야 했던 마음의 고통이 아니었겠는가(삼하 11:14-21,  시편 51편).

'후대하실 때' 구체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위(王位)에 올리실 때'를 가리킨다.

32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이르되 오늘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하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본 절에서 다윗은 아비가일이 자신을 만나러 온 것을, 그녀의 남편 나발의 구명(救命)이라는 사사로운 차원이 아닌, 보다 고차원적인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으로 인식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이 말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 대해서 당신의 계약적 의무를 신실하게 이행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명칭이다(20:12).

'찬송할지로다' 이같은 언급은 하나님의 오묘한 주권적 섭리에 따라 당신의 백성에게 행하신 놀랍고 위대한 일을 찬양하는 문맥에서 종종 나타난다(왕상 1:48,  5:7, 8:15, 56,  10:9,  눅 1:68,  엡 1:3).

33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복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여기서 `칭찬할지며'(바라크)는 32절의 `찬송할지로다'와 동일한 단어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항상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사용된다는 점에서, 여기의 이 `칭찬'은 말할 나위 없이 아비가일에게 그같은 `지혜'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될 바는, 위와같은 `지혜'를 소유한 여자만이 진정 아름다운 여인으로 인정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3절,  잠 11:22).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여기의 `복이 있을지로다'(바라크)도 32절의 `찬송할지로다'와 앞의 `칭찬할지며'와 그 기본형이 동일한 단어이다. 따라서 여기의 이 단어는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복이 있기를 하나님께 비는 일종의 기도로 이해해야 할것이다(삼하 14:22,  19:39). 바로 이같은 점에서 여기의 `복이 있을지로다'와 같은 성경적 축복 행위는, 복을 주는 주체자에 대한 분명한 인식도 없이 의례적으로 하는 우리나라 전래의 `복 받으세요'라는 축복적 인사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34 나를 막아 너를 해하지 않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급히 와서 나를 영접하지 아니하였다면 밝은 아침에는 과연 나발에게 한 남자도 남겨 두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라

'남자(마쉐틴 베키르)' 문자적으로 `벽을 향해 오줌을 누는 자'(one who urinates against the wall)란 뜻으로서, `남자'(man)를 가리키는 일반적 용어인 `이쉬'의 속어(俗語)이다. 22절 주석 참조.

35 다윗이 그가 가져온 것을 그의 손에서 받고 그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평안히 올라가라 내가 네 말을 듣고 네 청을 허락하노라

'네 청을 허락하노나' 여기서 `허락 하노라'(나사 파님)는 문자적으로 `얼굴을 들게 해주다'란 의미이다(창 19:21,  32:20, 21). 그런데 히브리인들이 `청원을 허락하다'란 의미를 이같이 표현한 까닭은, 청원의 당사자는 겸손한 자세를 취한 나머지 항상 얼굴을 들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36 아비가일이 나발에게로 돌아오니 그가 왕의 잔치와 같은 잔치를 그의 집에 배설하고 크게 취하여 마음이 기뻐하므로 아비가일이 밝은 아침까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다가

'왕의 잔치 같은 잔치를...배설하고' 나발의 이같은 행동은 자신에게 유익을 주었던(7, 15, 16절) 다윗의 자그마한 요구(8절)를 모욕적으로 거절했던 사실(10, 11절)과는 극명하게 대조된다. 즉 나발은 자신이 욕심껏 먹고 마시는 데는 아낄 줄 몰랐지만, 대의(大義)를 위해 자신의 몫을 조금 나눠주는 데에는 인색하기 그지없는 실로 `미련한 자'였다(25절).

'대취하여' 양털을 깎는 잔치 때에 술에 취하는 것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보편적이었던 것 같다(삼하 13:23-28). 그러므로 나발이 그 당시의 풍습에 따라 이같이 취했다고 할지라도, 아무튼 술에 취하는 일 재는 경건 생활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정죄되어 마땅하다(롬 13, 13,  고전 5:11,  6:10). 따라서 성경은 `술취하는 일'을 어리석은 자의 한 특징으로 말하고 있다(잠 20:1,  23:21,  26:9,  눅 21:34).

'마음에 기뻐하므로' 만취로 인해 정신을 잃을 정도로 방종의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을 가리킨다. 후에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자신의 여동생 다말을 겁탈했던 자신의 이복 형제 암논을 양털 깎는 잔치에 초대한 후, 그가 바로 위와 같은 상태에 빠지면 그를 살해하려고 했었다(삼하 13:28).

'다소간 말하지 아니하다가' 여기서 `다소간의 말'이란 다윗이 나발의 모욕적인 응답(10, 11절)에 격분한 나머지, 그를 죽이러 병사들을 데리고 쫓아왔던 사실을 가리킨다(13절). 그런데 아비가일이 여기서 이같이 행동한 까닭은 (1) 나발이 술에 취한 그때는 잘잘못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으며 (2) 술에 취한 나발에게 다윗이 그를 죽이려했다는 말을 할 경우, 그는 정신적 충격을 크게 받을 것이 뻔하였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같은 점에서, 아비가일은 가히 `총명한 여인'이라 할 수 있다(3절).

37 아침에 나발이 포도주에서 깬 후에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 일을 말하매 그가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었더니

'이 일' 이것은 91) 다윗이 나발을 죽이러 갈멜로 향했었다는 사실(13절). (2) 아비가일이 다윗의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많은 음식을 다윗에게 가져다 주었으며, 또한 다윗에 대한 나발의 냉대(10, 11절)를 그의 어리석음 탓으로 돌렸다는 사실(25절) 등으로 이해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의 `이 일'(하데바림 하엘레)이 복수(複數)라는 점에서, 위의 (1)(2) 모두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발에게 더 큰 충격을 준 `일'은 (1)의 사실일 것이다.

'낙담하여' 문자적으로는 `그의 마음이 그 사람 안에서 죽었다'(his heart diedwithin him, KJV)란 뜻이다. 즉 나발의 `기뻐하던 마음'(36절)이 이제 `죽어버린 마음'이 되어버린 것을 뜻한다.

'몸이 돌과 같이 되었더니' `돌과 같이 되었더니'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돌이 되었더니'란 뜻으로, 즉 강한 충격(shock)에 의하여 어떤 심인성(心因性)질환에 걸린 것을 말한다.

38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

'한 열흘 후' 여기서 `열흘'은 나발이 병고로 고생하던 기간이다. 아마도 나발은 어떤 충격 내지는 고혈압 등으로 인한 전신 마비의 중풍(中風)에 걸렸던 듯하다.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여기의 `치시매'(나가프)는 `상처내다', `쳐부수다'란 의미로서, 신적(神的) 징벌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이다(삼하 12, 15,  슥14:18). 결국 나발의 죽음은 그의 어리석음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임이 분명하다(29절).

'그가 죽으니라' 나발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다윗에게 자기 소유물 중 일부를 공급해 주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1) 공적인 면에서 다윗은 나발이 속한 민족 이스라엘의 구원자였다(17:41-51,  18:5, 30,  19:8,  23:1-5). (2) 개인적인 면에서 다윗은 나발의 양떼와 소유를 보호해 준 은인(恩人)이었다(7절). (3) 이 외에도 나그네를 대접하라는 율법(신 10:18, 19)을 생각한다면, 나발이 다윗 일행을 접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발은 예의를 갖춘 다윗의 정당한 요구(4-9절)를 교만한 말로써 일축하였다(10, 11절). 나발의 이 악한 행동은 스스로가 자기 무덤을 판 격이되고 말았다. 즉 나발은 그의 행동에 격분한 다윗(12, 13절)에게 복수당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공의의 하나님에 의해 병으로 죽게됨으로써 보응을 받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건은 재물과 돈을 생의 최고 목표로 추구하는 자의 말로(末路)는 파멸이라(딤전 6:9, 10)는 엄숙한 경고와 교훈을 제공하고 있다.

39 나발이 죽었다 함을 다윗이 듣고 이르되 나발에게 당한 나의 모욕을 갚아 주사 종으로 악한 일을 하지 않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나발의 악행을 그의 머리에 돌리셨도다 하니라 다윗이 아비가일을 자기 아내로 삼으려고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말하게 하매

'나발에게 당한...욕' 여기서 `욕'은 문자적으로는 `욕의 원인'이란 의미인데, 그 구체적 내용은 10, 11절을 참조하라.

'(모욕을) 갚아 주사(라브)'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다'란 뜻이다. 구체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억울한 형편(2절)을 살피셔서, 그의 원수를 갚아 주신 것을 가리킨다(38절).

'악행을 그 머리에 돌리셨도다' 자신이 행한 악한 행위만큼 결국 자신이 그 악행의 대가를 받는 일을 가리킨다(왕상 2, 44).

'다윗이 아비가일로...아내를 삼으려고' 이와같은 구혼(求婚)은 미망인의 법적 애곡(哀哭) 의무 기간인 칠 일이 지난 다음에 제안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구혼하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즉 (1) 그녀는 지혜와 신앙에 있어서 자신의 내조자가 되기에 매우 적격자였으며 (33절) (2) 다윗의 처 미갈이 다른 남자와 재혼하였기(44절) 때문이다.

40 다윗의 전령들이 갈멜에 가서 아비가일에게 이르러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당신을 아내로 삼고자 하여 우리를 당신께 보내더이다 하니

41 아비가일이 일어나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이르되 내 주의 여종은 내 주의 전령들의 발 씻길 종이니이다 하고 

'그가...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이와 같은 겸손한 행위는 그녀가 다윗을 처음 만났을 때에도 취해졌었다(23절). 따라서 여기 아비가일의 이 행동은 다윗의 요청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의 겸허한 태도이다.

'내 주의 여종은 내 주의 사환' 이미 다윗의 수하에 있던 `사환'들처럼 아비가일도 다윗에게 `내 주'라는 말을 적용시킴으로써, 자신도 그들처럼 다윗의 사람이 될 것을 강력히 시사해 주고 있다.

'발 씻길 종이니이다' 발 씻기는 행위는 종들이나 하는 지극히 미천한 행위이다. 따라서 다윗의 구혼을 받은 아비가일은 그러한 다윗의 구혼은 자신의 분에 넘치는 과분한 것으로서 감사하게 받아 들임은 물론, 요구하신다면 다윗의 수하에 딸린 사환들의 발이라도 씻기는 지극히 미천한 일도 기꺼이 감당할 것이라고 겸손히 말하고 있는것이다.

42 아비가일이 급히 일어나서 나귀를 타고 그를 뒤따르는 처녀 다섯과 함께 다윗의 전령들을 따라가서 다윗의 아내가 되니라

'따르는 처녀 다섯과 함께' 여기의 `처녀 다섯'은 아비가일을 수종드는 시종(侍從)들을 가리킨다(창 30:4, 9). 아비가일의 집은 대단한 부호였으므로, 이러한 개인 몸종이 있었던 것이다.

'다윗의 아내가 되니라' 다윗이 아비가일을 자신의 아내로 맞이한 이 사건은 매우 의미 심장한 것이었다. 즉 순수한 애정이나 신앙적인 목적 이외에도, 후일 다윗은 유다의 왕이 되기 위하여 헤브론으로 입성할 때 유다 지파에 속한, 그것도 갈렙의 후예인 아비가일(3절 주석 참조)을 대동함으로써, 유다 지파 사람들의 호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같은 결혼에 따라 다윗과 아비가일 사이에는 `길르압'(삼하 3:3)과 `다니엘'(대상 3:1)등, 최소한 두명의 아들이 출생하였다.

43 다윗이 또 이스르엘 아히노암을 아내로 맞았더니 그들 두 사람이 그의 아내가 되니라 

'이스르엘 아히노암' 여기서 `이스르엘'은 사울의 아내 `아히노암'(14:50)과 구별하기 위하여 덧붙여진 지명이다. 
한편 `아히노암'은 `나의 오빠는 유쾌하다'란 뜻이다. 다윗은 아히노암과 결혼함으로써 아비가일과의 결혼에서처럼(42절 주석), 그가 헤브론에서 유다의 왕이 됐을 때에 유다 지파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이끄는데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다윗은 아히노암과의 사이에 `암논'이라는 아들을 두었다(삼하 3:2).

44 사울이 그의 딸 다윗의 아내 미갈을 갈림에 사는 라이스의 아들 발디에게 주었더라 

'사울이...미갈을...발디에게 주었더라' 일찍이 사울은 골리앗을 죽인 대가로 다윗에게 주기로 약속했던 맏딸 `메랍'을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는 변덕스러운 짓을 하기도 했었다(18:19). 여기서의 이같은 사울의 행동 역시 메랍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다윗에 대한 증오심 때문이었을 것이다(18:8, 10, 11). 한편 `발디'는 `여호와가 구원하신다'란 뜻으로, 삼하 3:15에서는 `발디엘'(Phaltiel)로 표기되었다. 그런데 `발디'란 이름과 동일한 이름의 소유자가 가나안 정탐을 했던 이스라엘 지파의 대표 중에서 발견된다(민 13:9). 그는 곧 베냐민 지파의 대표로서 가나안 정탐에 참여한 `라부'의 아들 `발디'였다. 그렇다면 여기의 `발디'는 자신의 조상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삼았음이 분명하다(22:5).

'갈림에 사는' 문자적으로는 `갈림 출신인'이란 뜻이다. `갈림'은 `무더기'란 뜻으로, 이곳은 이사야 10:30에 따르면 예루살렘과 사울의 기브아 사이의 베냐민 지파의 땅에 위치한 성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