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입 / 분노하는 유형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분노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곳곳에 분노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사회에 대하여 분노하는 사람들, 또한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분노하는 사람들, 심지어 자신의 가족과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 분노하는 사람이 많이 있죠.
뉴스를 보면, 분노가 아니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끔찍한 일들이 분노 때문에 일어남을 종종 봅니다. 이 분노가 얼마나 무서운지 그 분노가 자기를 불살라 버리기도 하고, 그 분노 때문에 우리 관계가 깨어지기도 하고 또 한 사람의 일생이 망쳐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분노할때 내린 결정이나 행동은, 대부분 잘못된 것일 때가 많습니다. 분노 가운데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정말 의로운 분노가 아니라면, 우리의 분노는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서 내려지는 결정이나 행동이 됩니다.
분노가 이렇게 위험해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분노를 내버리지 못합니다. 분노와 함께 살아갑니다. 심지어 '분노 중독'이라는 단어가 나올 정도입니다.
△분노 자체는 에너지가 있지요. 그것이 부정적 에너지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에너지를 주기 때문에 어떤 사람 화내지 않고는 인생을 살지 못합니다. 힘이 없는 거에요.
화내지 않으면, 분노하지 않으면 에너지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끊임없이 화를 내면서 살아가야만.. 살 맛을 느끼는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분노가 영어로 하면 anger 인데, 그 앞에 알파벳 d만 더해지면 danger가 되죠.
분노가 얼마나 위험한지 모릅니다.
▲칩 잉그램 Chip Ingram 목사님이 쓰신 책을 보니까 우리가 분노에 대해서 반응하는 세 가지 유형의 반응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1) 폭발형.. 분노를 터뜨리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 어떤 대상에 상관없이, 마치 폭탄을 터트리듯이 분노를 폭발합니다. 폭탄이 터지면 반드시 사상자가 있게 마련이죠.
폭발형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의 주변에 있는.. 가족과 친구, 직장 동료들은 모두가 깊은 상처를 받게 됩니다.
2) 억압형.. 정반대로 그 분노를 자기가 마치 분노를 안 가지고 있는 것처럼 부정하는 겁니다. 숨기는 겁니다.
자기가 분노를 표현하면, 주위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할 것이라고 두려워 하죠. 다른 사람이 눈치를 보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분노가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없는 것처럼, 그것을 표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노를 섬기는 것은, 마치 우리 영혼이 독을 먹는 것과 같이 반드시 분노는 우리 안에서 다른 문제를 일으키고 또 다른 방향으로 곪아서 터지게 되는 것이죠.
3) 누수형.. 분노를 조금씩 다른 방법으로 흘리는 것입니다. 분노를 분노로 표현하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다른 사람을 비방 한다든지 불평 한다든지, 또 애매하게 다른 사람에게 누명을 씌운다든지 또 보이지 않게 비판 한다든지...
분노의 대상에게 직접 분노를 표현하지 않고 그 사람을 제외하고 그 밖의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분노를 표현합니다.
그러면 그의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막 혼동하기 시작합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을, 모든 사람의 의견인 것처럼 바꾸어서 말하기도 합니다. 부분적인 진실을 가지고, 마치 전부인 것처럼 왜곡하기도 합니다.
결국 자기 분노의 대상인 그 사람을 향해 비방하고, 모욕하고, 그 사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퍼트립니다. 누수형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분노를 흘린다는 말입니다.
이 세 가지 유형으로 우리는 인생을 살아 가고 있습니다. 때로는 폭발하고, 때로는 억압하고, 때로는 자신의 분노를 흘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오래 믿은 성도에게도 이러한 유형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다윗에게도 이런 분노가 나타났습니다.
본문에 놀랍게도 그 분노가 첫 번째 유형인 '폭발형'으로 나타났어요. 본문에 다윗은, 나발에 대해 그 분노가 하늘 끝까지 오를 정도로,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를 정도로 폭발했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그는 복수의 칼을 들고 나발을 죽이기 위해서 달려가고 있습니다.
다윗 답지 않은 모습이요, 우리가 기대했던 다윗의 모습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렇게 분노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순간적인 분노로 인해서, 만일 그 분노가 표현 됐다면 엄청난 일들이 일어났을 법한.. 그러한 사건을 경험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돌이켜 보니까 제가 분노가 폭발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더군요. 이 자리에서 다 고백하면 여러분들이 앞으로 제 설교를 듣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운전을 하다가도, 갑자기 어떤 차가 끼어들면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일어나기도 하고
때로는 가족들 사이에서도 그런 분노가 폭발하기도 하죠. 우리의 직장에서도 그런 분노가 폭발하기도 합니다.
본문 삼상25장에서 다윗은, 어떠한 상황에서 어떤 모습으로 분노 했을까요? 그 다윗의 분노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었던 분노일까요, 아니면 자기 육신의 혈기로 인한 분노였을까요?
◑먼저 다윗이 분노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무엘이 죽자, 다윗은 바란광야로 내려갔습니다. 25:1 더 이상 의지할 대상도 없어 이제는 그를 따르는 600여명의 사람들과 함께 그는 광야에서만 살아야 했습니다.
허허벌판 광야에서 뭘 먹고 살았을까요? 거기는 농사를 지을 수 없고, 아무것도 없는 버림 받은 환경에서 600여명의 사람들과 함께 다윗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거기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당시의 광야를 넘나들며 출몰하던 강도들, 예수님께서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강도만난 사람에 대해 설명하셨죠.
후진 사회일수록 강도가 많죠. 뿐만 아니라 블레셋이나 다른 민족들은 끊임없이 이스라엘 국경 지역을 침략했습니다. 양을 치는 목자들과 여행객들은, 이런 이방 민족들의 강도와 약탈을 당하고만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다윗 무리들은 그러한 사람들을 보호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럴 힘이 있었고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지역에서 양을 치는 목자들을 보호해주기 하겠습니다. 당연히 목자들은 그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으로, 때가 되면 그들에게 음식을 나누면서 그들은 도왔죠.
다윗과 600명의 사람들은 최소한의 음식만을 가지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 양털깎는 시기가 도래합니다. 양털깎는 시기는, 농사짓는 사람으로 비유하면 추수 날과 같은 거죠.
그때가 되면 평소보다 더 많은 음식을 준비해서, 주위 사람들과 잔치를 벌입니다.
거기 양떼들들 주인은, 자신들을 보호해준 이른바 자율방범대원과 같았던 다윗 일행들에게 음식을 나누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감사의 표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란 광야에서, 다윗과 그 일행들이 보호해주었던 나발 이라는 부자가 있었습니다. 양을 3천마리, 염소를 1천마리씩 거느리고 있던 부자였습니다.
이제 양털깎는 때가 되었어요. 다윗은 기대감을 가지고 그리고 상식적인 차원에서 사람 10명을 보내서 음식을 요청합니다.
열 명을 보낸 이유가 뭘까요? 10명이 운반할 수 있는 만큼의 음식을 기대한 거겠죠.
그러나 말은 어떻게 합니까? 8절에 보면 '그저 손에 닿는 대로 주십시오' 주는 대로 받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공손하게 표현합니다. '당신의 아들인 다윗이 구합니다'. '네 아들 다윗에게 주기를 원하노라 하더라 하라' :8
다윗은 소년들을 보내어, 그렇게 겸손하고 정중하고 상식적인 차원에서 도움의 요청을 예의 바르게 했습니다.
▲그런데 나발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거절했어요.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다윗에게 모욕을 주었습니다.
10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11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 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나발의 말은 다윗의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는 먼저 '이새의 아들(다윗)이 누구냐?' 마치 다윗을 모르는 사람처럼 그렇게 여겼다는 거지요.
나발이 다윗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자신의 양떼를 지켜주었던 다윗과 그 무리들, 그리고 다윗은 유명한 사람이 이미 되었는데 다윗을 모른다는 게 말이 안 돼죠.
무엇보다도 나발은 배은망덕 하지 않습니까? 자기 것을 지켜준 사람들에게 조그만 성의만 표시하면 될 것을, 말 끝마다 '내 빵, 내 물, 내 양을 내가 출신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줄 수 있겠느냐?' 얼마나 인색하고 은혜를 갚지 않는 사람입니까!
그런데 다윗에게 가장 분노를 일으켰던 말이 있습니다. '요즘 주인을 버리고 도망 다니는 그런 배신자, 부랑자들이 있다고 하던데?' :10
다윗을 배신자, 반역자, 주인을 버린 자로 비유한 것입니다. 그 말에는 가시가 들어 있고, 다윗에 대한 평가가 들어 있는 거죠.
그는 다윗을 모르지 않고, 사울이 뒤쫓고 있는 도망자 라는 걸 알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사울의 시각으로 다윗을 바라보는 거예요.
'너는 부랑자, 배반자 아니냐? 내가 배신자에게 내 음식을 줄 수 있느냐?' 이것이 다윗에게 큰 모욕이 됐던 거죠. 다윗의 자존심을 건드렸던 것입니다. 다윗이 격분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화를 내는 다윗을 보고, 나무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내가 다윗 입장이라도 당연히 화가 났을 겁니다.
만약 이런 무례한 나발을 보고도 분노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둘 중 하나죠. -진짜 훌륭한 성인이거나 -아니면 나발과 똑같은 부류의 사람이거나
대부분 화가 나야 정상입니다. 화, 분노 자체는 건강한 분노 일수도 있어요. 때로는 의로운 분노 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분노를 어떤 방법으로,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다윗이 본문에서 분노를 펴는 방식을 보면, 의로운 분노 라기보다는, 잘못된 방법으로 분노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죠.
오늘 본문에 나타난 다윗의 분노를 보십시오 13 '다윗이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칼을 차라 하니 각기 칼을 차매 다윗도 자기 칼을 차고 사백 명 가량은 데리고 올라가고 이백 명은 소유물 곁에 있게 하니라'
21 '다윗이 이미 말하기를 내가 이 자의 소유물을 광야에서 지켜 그 모든 것을 하나도 손실이 없게 한 것이 진실로 허사라 그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는도다 22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침까지 남겨 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다윗은 선을 악으로 갚은 나발을 죽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발에게 속한 모든 남자들을 다 죽이기로 결심했습니다. (아마 나발이 모욕적으로 말할 때, 그 주위 시종들도 다 동조했던 모양)
심지어 다윗은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내가 나발을 제거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셔도 좋다'
▲우리는 여기서 있어 다윗에게 어떤 영적인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발이 나쁜 사람, 어리석은 사람, 악한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인정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24장에 나타난 다윗의 모습을 보다가 지금 25장에서 보여지는 다윗의 모습을 보면.. 의아하게 됩니다.
24장에서 다윗은, 동굴속에 들어온 사울을 살려주지 않습니까. 그의 옷자락 제거하는 것으로 너무 마음이 아파 했습니다. 원수를 목전에 두고도, 그는 용서와 긍휼의 마음으로 대했던 다윗 아닙니까?
이것과 비교해서 25장에서 나발을 대하는 태도는 어떻습니까? 나발은 자기도 죽이려고 했던 적도 없고, 자객을 보낸 적도 없습니다. 다만 모욕적인 말을 한 번 했을 뿐입니다. 도움을 거절했을 뿐입니다.
사울에게.. 그렇게 너그럽게 인내하며 온유하게 대했던 다윗이 나발에게는.. 그의 몇 마디의 말에, 이렇게 분노하면서 자기 수하의 군사들을 다 이끌고 가서, 나발의 모든 남자들 다 죽이겠다고 그렇게 다짐하고 분노하는 모습을 보면 너무나 상반된 모습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의아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놀라운 자제력과 인내력으로 사울에 대하여 대응하던 그 다윗이, 그 나발에 말에 이토록 민감하게 분노하는 모습을 보면 평소에 우리가 알고 있던 다윗이 아닌 것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도, 우리 자신이 아닌 것 같은 모습이 숨어 있어요. 저에게도 여러분이 평소에 아는 이재훈 목사가 아닌 모습이 숨어있을 수 있죠. 너무 궁금증을 가지고 깊게 알려고 하지는 마세요.
▲큰 시험에는 잘 견딘 사람이, 작은 시험에는 '분노로' 쉽게 넘어질 수 있다는 거죠. 우리 역시, 분노에 대해 경계하지 않을 때, 그렇게 쉽게 넘어질 수 있다는 거죠.
여러분 나발은, 다윗에게 있어서, 사실 또 다른 사울이었습니다. '작은 사울' 이었습니다. 나발의 태도나 가치관과 언행을 보면 영락없이 사울입니다. 나발과 사울은 서로 상통하는 점이 있는 사람입니다. 매너와 행동과 사고방식은, 똑같은 사울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큰 사울에게는 이겼는데 작은 사울에게는 질 뻔 했던 거예요. 왜 그랬던 걸까요?
사울에게는 다윗이 늘 긴장하면서 대비를 했죠. 그러나 나발은, 다윗이 긴장하지 않고 대한 거예요.
여러분, 왜 가정에서 분노가 많이 일어나죠? 다른 사람을 만날 때는 긴장하고 마음의 빗장을 풀지 않잖아요. 그런데 가족들에게는 마음의 빗장을 다 플고, 무방비로 대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벌컥 벌컥 집에서는 화를 잘 냅니다.
밖에서는 다른 사람이 주는 시험은 잘 견디면서도 가정에서는, 사소한 한 마디 말에, 비수를 맞은 것처럼 피흘리며 쓰러지는 거죠.
다른 사람이 그렇게 얘기했더라면 아무 말도 아닌데 집에서는 화를 벌컥 냅니다. 지금 다윗이 그런 상황이라는 거죠.
다른 사람은, 다윗이, 속으로 기도하면서 만났죠. 그러나 나발은 자기가 한 수고가 있기 때문에 그 수고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는다고 생각하고, 보상을 당연히 기대한 거예요.
사울은 자기를 죽이려고 했지만, 다윗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진 않았어요. 그러나 나발은, 죽이려고 하진 않았지만, 자존심을 상하게 했어요.
어떤 사람은, 자기 생명보다, 자기 자존심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죠. 몇 대를 두들겨 패도 상처가 안 되는데 말 한마디로 자존심을 건드리면, 두들겨 맞는 거보다 훨씬 더 상처를 받는 사람들이 있어요...
혹시 다윗에게는 '거절감'에 대한 상처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어릴 때부터 말째로 자라면서, 집안에서 무시를 당하며 자랐을 것입니다. 사무엘이 왔을 때, 그는 부름을 받지도 못하고 들에서 양을 치고 있었어요. 다윗의 어린 마음에, 어리니까 말을 못 하고 있었지만 거절감에 대한 상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어릴 적 상처가, 나발에게 무시를 당하면서, 잠재되어 있던 것이 폭발한 것이 아닐까? ..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분노란 이차적인 감정이라는 거죠. 분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분노는 하나의 경고등과 같은 거예요.
자동차에 빨간 경고등이 자꾸 뜨지 않습니까? 그건 경고등이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엔진이나 냉각수에 이상이 있다는 거에요.
분노가 이차적인 감정이라는 말은, 분노할 때, 그건 경고등과 같다는 거예요.
뭔가, 엔진이나 냉각수나 타이등 등 다른 부분에 문제가 있을 때, 경고등으로서 분노가 일어난다는 것이죠.
다윗이 왜 분노 했습니까? 그가 분노한 원인을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그는 그 모욕을 받은 것에 자존심이 상한 것입니다. (내부적) 자존심의 문제가 (외부적) 분노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또 6백명의 식솔들을 먹여 살리는 책임감, 중압감, 스트레스가 있었는데 이러한 원인들이 다윗으로 하여금 분노로 폭발하게 한 거죠. 여기에서 다윗이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분노할 때, 내가 일어나고 있는 분노를 객관적으로 그 원인을 찾을 수 없다면... 반드시 그 분노를 표출함으로 인해서 나는 망하게 됩니다.
내가 분노 할 때, 내가 왜 화를 내고 있는가? 그 원인을 하나님 앞에서 내가 찾을 수 있다면, 나는 (분노에서) 회복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을 해결, 또는 제거하는 거죠. 그러면 분노가 해결돼죠.
무엇보다 내가 자주 분노하는 분야가 있다면, 만약 그게 자존심이라면.. 먼저 그 과도한 자존심을 해결해야 되는 거죠.
'십자가에서 내 자아가 아직 죽지 않아서 분노하는' 것이라면 나 스스로 십자가에서 더욱 나를 죽여야 하는 거죠. 그러면 분노가 해결되고, 그 분노로 인해 야기되는 2차피해를 줄일 수 있는 거죠.
◑다윗의 이 위험한 시기에, 아비가일이 구세주처럼 등장합니다.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대응을 보면, 벌써 이런 상황을 여러 번 해결해 봤던 경험이 있었던 것 같아요.
18 '아비가일이 급히 떡 이백 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 부대와 잡아서 요리한 양 다섯 마리와 볶은 곡식 다섯 세아와 건포도 백 송이와 무화과 뭉치 이백 개를 가져다가 나귀들에게 싣고'
여기 보니까, 이 음식의 양이, 아까 다윗이 보냈던 10명의 소년들이 운반할 수 있는 정도의 양이었던 것 같아요.
그녀는 남편에게는 말하지 않습니다. 말하면 틀림없이 가지 말라고 할 테니까요.
그런데 아비가일의 말속에는, 예언적인 메시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었어요.
이 아비가일의 메시지 속에는, 우리가 분노를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 분노할 수밖에 없는 상황속에서도,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분별할 수 있을까에 대한 귀한 교훈이 있습니다.
1) 아비가일의 말은 '어리석고 악한 사람의 말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말고 때로는 무시해도 된다'는 거예요.
25~26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의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의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여종은 내 주께서 보내신 소년들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도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복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다윗 당신에게 누가 모욕을 줬는지 한 번 생각해 보라는 거예요. '당신을 모욕한 사람은 나발입니다. 그 이름의 뜻도 바보란 뜻입니다.' 주1) 그런 사람의 말을, 다윗의 마음에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 생각없이 내뱉는 말을 '아멘'으로 잘 받아들이는 습관이 있어요.
나발 같은 사람이 어떤 말을 하면 못 들은 척 하는 거에요.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들는 많은 말 중에, 귀담아 들어야 될 말도 있지만 무시해버려야 될 말도 많더라고요. 때로는 못 들은 척 하는.. 그런 습관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왜냐면 자기가 말을 해 놓고도, 곧 잘 잊어버리더라고요. 말한 사람은 돌아서서 잊어버렸는데, 자기는 혼자 그 말을 마음속에 품고 끙끙거리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2) 아비가일의 말의 두 번째 요지는 더 중요한 건데, 자신의 소명을 확인하고, 정체성을 확인하고, 미래를 내다보라는 것입니다.
28 주의 여종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
29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30 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실 때에 31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복하셨다든지 함으로 말미암아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 다만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실 때에 원하건대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 하니라'
요지는 뭡니까? '당신은 앞으로 왕으로 살아갈 것이고 하나님이 부르신 종이고, 당신의 미래를, 소명을, 정체성을 생각하면 나발에게 지금 복수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기억하십시오. 당신의 미래를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종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당신이 지금 사사로운 감정에 쓰러지면 당신의 미래에 큰 오점을 남기게 될 것입니다.'
지금 아비가일이 걱정하는 건 뭡니까? 자신과 가족들의 생명을 걱정하는 것보다, 다윗의 미래를 더 걱정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지혜로운 설득력입니까!
다윗이 이 말을 듣고, 정신이 버쩍 났을 거예요. 이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권면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다윗이 다시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권면할 때, 두 가지 방식이 있다.
1) 하나는 정죄 condemn 하는 방식입니다.
2) 또 하나는 죄를 깨닫게 convict 함으로써 스스로 교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아비가일의 권면을 다윗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언어 속에 하나님의 임재하심 있었기 때문에, 기도하는여인이었기 때문에 다윗이 그의 말을 들은 것입니다.
다윗은 복수의 칼을 내려놓습니다. 분노를 거둡니다. '너를 나에게 보내서, 복수의 피를 흘리지 않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노라!' :32
우리 안에 많은 분노의 원인들이 있습니다. 여러 상황과 사람들과 사건들과의 부딪힘 속에서 때로는 폭발하고, 때로는 분을 속으로 억누르고 있고, 때로는 다른 곳으로 그렇게 분노를 흘리고 있는 많은 분노들...
그 상황 속에서 정말 아비가일이 조언했던 그 아름다운 말처럼 무시할 것은 무시하고, 잊어버릴 것은 잊어버리고 그러나 기억할 것은, 내가 누구인가? 내가 어떤 사람인가? 이렇게 나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소명과 정체성을 가지고 내가 하나님 앞에서 내 감정까지도 순종할 때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판 사람이라 인정받을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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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부모가 태어나면서부터 '넌 바보야' 해서 나발이라고 짓기는 어렵겠죠. 그래서 학자들은 그의 진짜 이름은 따로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가 했던 행실을 종합해서 사람들에게 별명처럼 나발이라고 불렸을 것이다.. 라고 여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