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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내래 죽어도 순종합네다> P5

LNCK 2023. 3. 23. 13:12

[Ep5.오디오북] 최광 선교사의 탈북자 선교 실화- YouTube

◈도서 <내래 죽어도 순종합네다> P5                   <지난 회 모두 보기> 

◑2부 2장 기도하는 학생들

통독 학교는 지하실에 자리 잡고 있어 습기가 많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방 이쪽 저쪽에서 벽에 물기가 스며들어왔다. 

어떤 때는 정화조 펌프가 고장 나서, 화장실에서 내려보낸 물이 
그대로 방 안으로 밀고 들어오기도 했다. 
자주 일어나는 일이라 남학생들이 당번을 짜서 물을 퍼냈다. 

그래서인지 벌레도 많았다. 불만 끄면 사방에서 바퀴벌레가 나타나 기어다녔다. 
저녁 기도 시간에 불을 끄고 기도하다가 불을 켜면 
사람들 사이에서 쏘다니다 줄행랑을 치며 달려가는 바퀴벌레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남한 사람들은 기겁했지만, 탈북민 학생들은 요놈 요놈 하면서 밟고 뛰어다녔다. 
아침에 일어나면 팔과 다리 여기저기에 빨갛게 물린 흠집들이 나타났다. 
여학생들은 깔깔 웃으면서 말했다. 
'전도사님, 이것 보세요. 간밤에 손님이 왔다 갔어요. 
이거는 모기가 문 거고, 이거는 바퀴벌레가 문 거에요'

여전도사님이 놀라서 물었다. 

'바퀴벌레인지 모기인지 어떻게 알아?' 
'전도사님도 자꾸 물려 봐요. 그럼 알아요!' 

여전도사님이 순교선생에게 하소연했다. 
'바퀴벌레가 너무 많아요. 이제는 사람까지 막 물고 다녀요.' 

순교 선생이 핀잔했다. 
'그까짓 거 가지고 뭘 그래요? 여기 바퀴벌레는 선생이에요. 
빈대에 물려봐요. 얼마나 가렵고 괴로운지... 
북한에는 바퀴벌레가 없고 빈대가 많아요. 
앞으로는 빈대에 물리는 훈련도 좀 받아 봐야 돼요.' 

여전도사님은 더 이상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통독 횟수가 늘어나고 학생들이 서로 섬기고 존중하는 법을 터득해 가면서 
학교 분위기는 점점 명랑해지기 시작했다. 

아침식사는 대부분 먹지 않거나, 빵과 우유 같은 것으로 때우기에 
식사 당번이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통독과 성경공부에 몰입하다보니 
학생들이 아침에도 밥을 찾았다. 
뭔가 든든하게 먹어야 오전 통독을 제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침이면 일어나기 힘들어 하는 건 여전했지만 
언젠가부터 아침 식사가 준비되었다. 당번이 따로 없었지만 
매일 매일 누군가가 일찍 일어나 동료들을 위해 죽과 반찬을 만들어 놓았다. 

학생들은 좁은 부엌 식탁에 강아지들 처럼 옹기종기 모여앉아 
서로 농담하고 때리면서 아침 죽을 먹었다. 

농담이 좀 거칠게 나온다 싶으면 유진이가 경찰 행세를 했다. 
'야 임마, 믿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되냐?' 

그러면 학생들은 되려 그를 놀려댔다. 
설경이는 유진이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핀잔을 했다. 
'너나 좀 똑바로 해라. 너 머리부터 좀 깎고 다니고 
옷도 이제는 좀 사람 비슷하게 입고 다녀라' 

성을 낼줄 알았던 유진이가 웃으면서 으름장을 놓았다. 
'나 요즘 잘 하고 있잖아? 너는 눈이 그래 커 가지고 왜 못 보니?' 

어떤 학생들은 자리가 없어 뒤에 서서 먹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상에 앉은 사람이 서둘러 먹고 일어나 자리를 내주었다. 

다 먹고 갈 때도, 자기가 먹은 그릇들은 꼭꼭 씻고 자리를 떴다. 
아침밥을 지은 친구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빼놓지 않았다. 

서로 노려보고 냉랭한 마음으로 견제하면서 질투하고 공격하던 학생들 사이에 
무엇인가 따뜻한 것이 흘러다니고 있었다. 

가끔 나도 그들 속에 끼어앉아 죽 한 그릇씩 얻어 먹었다. 
좋았다. 뭔가 말할 수 없이 좋다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 통독학교를 시작하기 전과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졌고 
학생들도 이 분위기를 좋아했다. 

처음에 유진이는, 공동체 생활의 질서를 '통제'라고만 생각하고 가장 괴로워했다. 
그러나 이제는 공동체 안에서 함께 더불어 지내려면 질서를 지켜야 하며 
그렇게 할 때 자신도, 옆사람도 정말 즐거워진다는 것을 경험하게 시작했다. 

유진이와 점점 대화가 통했다. 
한 번은 유진이가 집사님에게, 응석부리듯 자기 속을 털어놓았다. 

엄마 같은 분들이 꾸중도 안 하고 말 없이 섬겨만 주니, 마냥 좋아하고 따르는 눈치다. 
'이제는 밖의 친구들과 대화가 안 돼요. 
예전에는 술 마시고, 술 친구들 만나는 것이 좋았고 즐거웠는데, 
이제는 술도 안 마시고 신앙 이야기하는데도.. 술 마실 때보다 더 재미있어요.' 

 

통독반 학생들과 주일에 예배만 드리러 오는 청소년들 사이에 
차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통독반 학생들이 추구하고 대화하는 것들이 
세상에 사는 청소년들의 삶과는 점점 동떨어진 것들이 되었다. 

점점 말이 통하지 않아 어색해했고, 교회 청소년들은 
통독반 학생들이 점점 이상해진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학생들은 통독반 안에서 서로 가까워졌다. 
공동체 안에서 믿는 형제자매 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아가고 
서로 걱정할 줄 알고, 누가 힘들다고 하면 서로 위로해 주고 끌어 주었다. 

전에는 자기들끼리 서로 다투고 뛰쳐나가면, 
나가든지 말든지 눈도 돌리지 않고 자기 할 공부만 했다. 

이제는 누가 뛰쳐나가려고 하면, 달래고 위로하면서 붙잡아주는 사이가 되었다. 
서로 하나가 되어갔고, 공동체가 만들어져 가고 있었다. 

▲나(최광 목사)는 한국에서 통독사역과 함께, 중국에 있는 탈북 자매들에게 

말씀암송을 시키는 사역도 함께 진행했다. 

선교회 간사들과 함께 정기적으로 중국으로 가서 
탈북 자매들의 말씀암송도 점검하고 말씀도 전했다. 

내가 중국으로 단기선교를 떠나면 
성근 선생과 순교 선생은, 이 일을 학생들에게 처음에는 비밀로 했다. 

내가 외국에 나갔다는 것을 알면, 그 순간부터 학교는 엉망이 되어 버렸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두 선생은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학생들이 조금씩 변화되는 것이 보이자 나는 광고를 했다. 
'이번 주에는 나와 사모가 중국에 있는 자매 사역장들을 돌아보러 가야 해요. 
우리 단기선교팀이 돌아올 때까지, 저녁 기도모임 때 중보기도 부탁해요'. 

통독반 학생들은 '파송의 노래'를 불러주면서 잘 다녀오라고 했다. 
두 선생도 편안한 마음으로 우리를 바래다 주었다. 

나는 어느새 탈북 학생들의 기도의 후원을 받으며 중국으로 떠나고 있었다. 
갑자기 마음속에 배부르고 편안한 느낌이 가득 차 올라왔다. 

▲산동성 제난 공항에 도착해보니, 뜻밖에도 정란 자매가 
조선족 허목사님과 함께 우리를 마중 나와 있었다. 

정란 자매는 제남에서 차로 5시간은 더 가야 만날 수 있는 
깊은 시골에서 사는 탈북자매이다. 

우리를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어서, 멀리서부터 마중 나왔다고 했다. 
기분이 좋았다. 왠지 이번 단기선교는 일이 잘 될 것 같았다. 

다음 날, 차로 2시간 반을 달려 복순 자매의 마을로 찾아갔다. 
탈북 자매들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함께 선교현장에 동행한 집사님들과 전도사들이 많이 울었다. 
동생 같은 여인들이, 이 깊은 산속에 팔려와(돈 조금 받고 시집 와서)

험하게 사는 것을 직접 보니 마음이 아픈 모양이었다. 

복순 자매 집에는, 처음 보는 3명의 자매들이 더 있었다. 
정란 자매가 장마당에 나가서 데려온 탈북자매 들이라고 했다. 

마음만 먹으면, 장마당에서 북한에서 팔려온 여인들을 찾아 데려오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니라고 했다. 

처음으로 우리와 함께 단기선교를 나온 한국 교인들은 놀랐다. 
이렇게 깊고 깊은 중국의 내륙 구석진 촌에 
탈북 자매들이 그 정도로 많이 있다는 사실이 충격인 모양이었다. 

지난번에는 암송을 못 했던 복순 자매가, 먼저 1백 절 암송을 시작했다. 
더듬거리며 틀린 것도 있었지만, 그래도 끝까지 암송했다. 

'아이고 혼자 할 때는 잘 됐는데, 목사님 앞에서 하니까 막 떨려서 못 하겠구만 
내가 원래 골이 나쁜 여잔데 이만큼도 기적이구만'
복순 자매는 신이 났는지 막 흥분해서 떠들었다. 

전경숙 자매는 지난 번에 외웠던 1백절 외에도 
새로운 1백 절도 완벽하게 외웠다. 

모두 다 감탄했다. 복순 자매가 옆에서 칭찬했다. 
'어쩜 저렇게 골이 좋을까?' 

경숙 자매가 칭찬을 사양했다. 
'골이 좋은 게 아니라 노력했기 때문에 할 수 있었구만!' 

나경애 자매와 경숙 자매는 6백절 가까이 암송했고 
복순 자매와 정집사도 3백절 이상씩 암송했다. 
탈북 자매들이 말씀 암송을 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많이 경험했다. 

탈북자매들은 숨어서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이라 정신적인 질병들이 많았다. 
우울증부터 시작해서, 신경쇠약과 원인을 알 수 없는 스트레스에 
늘 시달리며 살았다. 

창숙 자매는 신경쇠약 때문에 잠을 자지 못 했다. 
하지만 말씀을 3백절 이상 암송하고 신경쇠약이 나왔다. 

그 후부터는 한족 남편이 이 말을 노래처럼 불렀다. 
'아프면 하나님께 기도해, 그러면 낫잖아!' 

수경 자매는 남편과 그의 가족들에게 두들겨 맞으면서 사는데다 
만성적인 심장병으로 평소에도 항상 숨을 헐떡 거렸다. 

그도 말씀암송을 2백절 가량 하면서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고 
편하고 기쁜 마음으로 살기 시작했다. 

매번 예배 때마다 성경을 암송하지만, 미처 다 외우지 못하는 함께 간 팀원들이 
이들 앞에서 오히려 부끄러워했다. 

암송 점검 후에는, 함께 간 일행들이 
탈북자매들과 서로 짝을 지어 앉아 복음을 전해주었다. 

이집사와 짝이 된 조경숙 자매는 2백구절을 외우고 
하나님을 믿기로 결정했다고 고백했다. 

'처음 외울 때는 주 예수 그리스도 이런 말들이 무슨 뜻인지 영 몰라서 
진짜 힘들었는데, 무조건 암송을 하니까 점점 무슨 말인지 알았지더구만.  
나는 지금까지 주체사상으로 나혼자 힘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믿고 
악착같이 살았는데, 
이제는 더 이상 소망도 없고 내 힘으로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찌 할 바를 몰라 그냥 막연하게 살았는데 
이제는 나를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며 살고 싶습니다.' 

조경숙 자매는 폭력과 폭언을 일삼는 남편을 봐서는
당장이라도 집을 뛰쳐나가고 싶지만, 아이가 받을 상처 때문에 
떠나지 못하고 죽지 못해서 이렇게 산다고 하소연했다. 

이집사는 그에게, 사영리를 통해 복음을 전했다. 
진지하게 듣던 경숙 자매는 자주 감탄했다. 

'아 그게 이제 보니까 그게 그런 뜻이 없구만.. 
아 이렇게 된 거구만.. 이제는 알겠구만!' 

경숙 자매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죄가 무엇인지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죄사함은 어떻게 받는 것인지 
예수님의 누구신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들었다. 

그리고 결심이 섰는지, 영접 기도까지 하고 
자기는 이제 주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확신하기 시작했다. 

역시 북한 선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야만 했다. 
말씀을 알고 있는 것만큼 북한 탈북자들은 은혜를 받았고, 변화되고 있었다. 

오랫동안 방바닥에 앉아 다리를 틀고 앉아 이야기하다 보니 
일어설 때 현기증이 일고 다리가 휘청거렸다. 

그래도 함께 간 사람들은, 영혼들이 살아나는 현장을 보았다는 기쁨에 
흥분이 가득했다. 

그렇게 탈북 자매들이 있는 곳을 찾아서, 차를 타고 몇 시간씩 달리고 달려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고 복음을 전했다. 

이번 길은 통독반 학생들의 중보기도를 받으면서 진행해서인지 
더욱 풍성한 열매를 경험하였고, 이전과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체험했다. 

중국에서 말씀암송 하는 탈북자매들은 
매번 들어갈 때마다, 은혜 받고 변화되는 것을 확연하게 볼 수 있었다. 

지난 해에 처음 복순 자매를 만났을 때 
그는 내가 남조선에서 왔다는 말을 듣고 
안기부에서 보낸 특무 라고 생각하고, 만나기를 몹시 주저했다. 

내가 말씀을 전하다가, 황장엽이 주체사상을 만들었다는 말을 하자 
복순 자매는 손바닥으로 바닥을 막 두들기면서 흥분했다. 

'아니 남조선에서는 어떻게 우리 수령님이 만든 주체사상을 
황장엽이니 뭔지 하는 사람이 만들었다 합니까? 
그런 게 아니구만, 주체사상은 내 손에 장을 지진다 해도 우리 수령님이 만든 거구만!' 

복순 자매 때문에 예배 분위기가 몽땅 엉망이 되어 버렸다. 

다음에는 홍우철 장로님과 함께 들어갔더니 
이번에는 미국 놈까지 왔다고 벌벌 떨면서 만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일 년에 4~5번씩 들어가 자주 만나고 교제 하기도 하고 
일대일로 면담도 하면서 계속 관심과 사랑을 쏟아 주니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번 길에는, 아예 복순 자매가 수가성의 여인처럼 앞장서서 
장마당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아무 문제 없다고, 절대로 나쁜 나람들도 아니고
위험한 사람들도 아니라고 설득하며 탈북 자매들을 데려왔다. 

▲중국으로 다녀오느라고 나와 몇몇 사역자들이
통독학교 저녁기도모임 시간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랬더니 종일이가 이 집사님에게 이렇게 하소연했다. 
'어른들이 안 계시니까 기도 하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보통 종일이는 기도 시간에 불을 꺼 버리면 
바로 뒤로 가서 방석을 펴고 드러누워 코를 골면서 자곤 했다. 

그런 종일이가, 우리가 없는 동안 기도하려고 애를 쓴 것 같았다. 
이 집사가 조금 놀란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종일아, 그랬어?' 
'우리가 아직은 어리잖아요. 기도 할 줄 모르는 우리를 
어른들이 기도로 밀어주셔야 하는데.. 안 계시니까 힘들었어요.' 

우리가 중국으로 다녀오는 동안 훌쩍 커버린 종일이를 만난 것 같았다. 

이집사는 감동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미안해, 앞으로는 어른들이 되도록이면 기도 모임에 빠지지 않도록 할게' 

 

'우리도 어른들처럼 방언으로 기도를 막 뚫고 나가고 싶어요. 
그런데 그게 잘 안 돼요. 
그러니까 힘들어도 이제부터는 우리와 함께 해 주세요. 
우리도 기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종일이는 벼르던 말을 하는 모양인지 매우 진지했다. 
사실 어른들도 매일 5시간 기도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기도가 뚫려서 성령님이 만지시지 않는 한, 
자기 의지로 5시간 내내 앉아 있는다는 것은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다. 

하지 이제 학생들은, 그 시간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즐겁지는 않아도 '기도 시간이니까 기도해야지' 하고 나가서 앉아있기 시작했다. 
점점 학교 훈련들에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그렇게 체질화가 되면 그때부터 역사가 일어난다. 
그렇게 오래 끈질기게 앉아 있다가, 성령님의 만지심을 받고 방언이 터졌고 
마음이 열리곤 했다. 

진아가 그랬다. 
진아는 사람들이 말을 걸어도 날카로운 눈으로 찌르는듯이 보기만 하고 
대꾸도 잘 하지 않았다. 

웃지도 않았고 성경에도 관심이 없었다. 
사모는 전진아를 보고 FBI 요원 같다고 했다. 

다른 여학생들도 함부로 다가가지 못했고 
진아도 사람들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그런 진아가 기도 시간에 하염 없이 앉아 있다가 방원이 탁 터졌다. 
스스로 기도 중에 방언을 받은 것이다. 

그때부터 제일 앞자리에 앉아서 무릎 꿇고 부르짖으며 기도했다. 
기도가 신나고 잘 된다고 했다. 

진아는 은혜를 받고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북한에서 살 때 20살이 되기 전부터 인신매매를 했다고 했다. 
자기 손에서 정말 많은 북한 여인이 중국에 팔려 갔다고 아프게 말했다. 

학생들의 신앙은 눈에 띄게 성장해갔다. 
그들에게 기도가 열리니 말씀도 열리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훈련의 고달픔과 함께, 마음 속에 갈등도 생겼다. 
여태까지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살아지는 대로 살았다. 

그러나 말씀이 읽혀지자, 마음속에서부터 자기들의 모습을 느끼고 보게되었다. 
'너희들 이러면 안 돼!' 하고 설교하면 
기를 쓰고 대들기만 하던 녀석들이 
평소에 하던 대로 밖에 나가 술 마시고 담배를 피우다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이러면 되는 거니?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전에는 자연스럽고 당연하던 행동들이 점점 불편해졌다. 
그들은 '이렇게 살면 안되는데.. 고쳐야 하는데..' 하는 생각들을 하다가 
고통스럽게 호소했다. 

'나도 이제는 착하게 살고 싶어요. 나도 이제는 당당하고 가치있게 살고 싶어요. 
그러나 그것이 잘 안 돼요.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안타까워요. 그래서 어떤 때는 더욱 술을 마셔요.' 

자기의 모습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벽을 넘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되니 
홧김에 술을 마시며 스트레스를 푼다는 것이었다. 

기도 시간에 그런 것들을 주님께 호소하면서 엉엉 울었다. 
유진이는 이제 기도시간이 기다려진다고 했다. 즐겁다고 했다. 

이제는 PC 방에 앉아 있으면 갈등하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랬다가 다시 지겨워지면 뛰쳐나갔다. 

▲정숙은 브로커에게 속아 탈북 후 한족에게 팔려갔다. 
그 후 언니도 역시 팔려갔다. (시집간다는 뜻인듯)

두 자매는 서로 기약 없이 바다처럼 큰 중국 대륙으로 사라져 버렸다. 
서로 다시 만난다는 것은, 바다에 떨어진 바늘을 찾는 것처럼 희망 없는 일이었다. 

정숙은 기도 시간에 언니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매달리기 시작했다. 
찾게 해 달라는 것은 너무 불가능하기에 구하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언니도 나처럼 중국에서 그렇게 억울하고 비참하게 살 것 같아요. 
그러니 제발 언니만은 나 같은 일을 당하지 않고 살게 해 주세요. 
내가 그렇게 산 것도 억울한데, 언니만은 내 몫까지 행복하게 해 주세요.' 
이런 기도를 하면서 울었다. 

팔려간 여인이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떼를 쓰는 자신이 너무 멍청해 보여서 더 울었다. 

언니를 위해 기도 할 때는, 5시간의 기도가 오히려 짧게 느껴졌다. 
금식하면서 계속해서 기도를 했다. 

금식 3일째 되던 날이었다. 밤 11시에 국제 전화가 왔다. 
'나에게 국제 전화가 올 일이 없는데?' 

한국사회에는 속임수가 많다는 것을 알기에 
평소 정숙은 모르는 전화는 무조건 받지 않았다. 
그런데 자꾸만 끊이지 않고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정숙은 어느새 전화를 받고 말았다. 

'야, 나 알겠어?' 
목소리를 들으니 옛날에 엄마에게 돈을 보낼 때 거래했던 브로커 였다.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그때 엄마에게 돈을 보내 준다고 약속해 놓고, 보내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호되게 화를 내고 욕을 해 주고 싶었지만 
금식하는 중이라 소리 지를 힘도 없어서 참았다. 

대신 정숙의 눈에서는 눈물이 탁 터져 버렸다. 
울면서 정숙은 말했다. '왜요? 또 뭐가 문젠데요?' 

'전화번호 하나 적어!' 
적어보니 중국 전화번호였다. 

브로커는 '거기다 전화해 봐!' 하고 끊어버렸다. 

속에서 욕이 올라왔다. 
'나쁜 놈, 또 뭘 사기 치려고 전화 한 거야?' 

욕을 하면서도 전화를 해 봤다. 
전혀 알지 못하는 중국인의 말 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아마 중국말로)
저쪽에서 자꾸 말을 하는데 정숙이는 할 말이 없었다. 

무슨 전화번호이고, 왜 전화해야 하는지 아무 이유도 모르고 전화했기 때문이다. 
화가 나서 한국말로 중얼거렸다. 
'이건 도대체 뭐야?' 

그 순간 저쪽에서 이런 말이 날아왔다. 
'너 김정숙 아니야?' 

정숙이가 깜짝 놀라 말했다. 
'그래 맞다.' 

'너, 김미숙을 아니?' 
순간 정숙이는 머리를 뭔가로 띵하고 얻어맞는 것 같았다. 

미숙이는 정숙이 언니다. 
'미숙이 옆에 있어, 전화 받아!' 

'꿈인가? 내가 금식을 했더니 환상이 보이는 건가?' 

'정숙아!' 
전화기 안에서 자기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언니 목소리였다. 

정숙이는 그저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배가 너무 고프다보니 내가 미쳤구나!' 

저쪽에서 언니가 울기 시작했다. 
꿈이 아닌 것 같았다.
'언니야?' 
'그래 맞아!' 

정숙은 기적처럼 언니를 만났다. 분명한 하나님의 은혜 없다. 
'이것이 기도응답이구나. 기도하면 절대 안 되는 일도 모두 가능해 지는구나' 

정숙은 그렇게 응답을 받고 하나님을 확실히 믿게 되었다. 
그때부터 정숙의 마음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이 
도장을 딱 찍어 놓은 것처럼 믿어지기 시작했다. 


◑2부 3장, 사역은 우리가 변하는 만큼 변한다
 
모두가 다 금방 성년이 된 학생들이다 보니 에너지가 넘쳤다.
서로 장난 칠 때는, 어른들이 (놀라서) 입을 딱 벌릴 때가 많았다. 

민혜에게 맨날 시달리던 영민이가 
어느 날 결심한듯 민혜 두 다리 붙잡고 번쩍 들어 올려 
회전 그네 돌리듯 빙빙 돌렸다. 어지럽게 해서 혼내 주려는 모양이다. 
그러다가 잘 안 되자, 방안 여기저기로 질질 끌고 다녔다. 

옆에 있던 성근 선생이 기겁을 하고 말렸다. 
'야 이놈아, 다 큰 숙녀에게 뭐 하는 짓이야?' 

영민이 손에서 빠져나온 민혜가 얼굴이 빨개져 가지고 난리가 났다. 
자기보다 키가 한참이나 큰 영민에게 팔딱팔딱 뛰면서 달려들었다. 

머리끄덩이를 잡으려고 뛰어 올랐다가, 짧은 머리카락이 잡히지 않자
발로 엉덩이를 차고 또 돌려차기도 했다. 

성난 강아지에게 맹렬하게 시달리던 덩치 큰 송아지가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밖으로 내뺐다. 
그때부터 영민이는 한 달 이상 민혜에게 시도 때도 없이 시달렸다. 

학생들은 휴식시간이 조금이라도 길어지면 자기들끼리 난장판을 벌이고 장난을 쳤다. 
그러다 보니 늘 애꿎은 물건들이 부서져 나갔다. 

방바닥 여기저기 뒹굴어 다니던 충전기들이 발에 밟혀 깨졌고 
휴대전화들도 자꾸 액정들이 깨졌다. 

어떤 때는 노트북까지 밟아 액정을 깨뜨렸다. 
그래 놓고는 '어 이거 누가 그랬어?' 하고 자기들끼리 놀라서 묻다가 
아무도 몰라서 유야무야 넘어가버렸다. 

액정이 온전한 휴대전화를 쓰는 학생이 별로 없었다. 
얌전한 에스더와 금란의 휴대전화 액정도 조금씩은 다 부서져 있었고 
장난이 심한 애들은 벌써 몇 번씩 휴대전화를 바꿨다. 

성근 선생이 이상해서 이렇게 물었을 정도였다. 
'요즘은 액정이 깨진 휴대전화가 유행이니?' 

여학생들이 대답했다. 
'아니요. 조금만 지나면 휴대전화들이 알아서 깨져 있어요.' 

'그럼 수리해서 써야지? 다 큰 여자들이 이게 뭐냐?' 
'한두 번이라야 말이죠.' 

충전기를 비롯해서 양말, 드라이기, 화장품 등 
네 것, 내 것이 없어진 지 오래 됐다. 

손에 닥치는 대로, 눈에 보이는 대로, 쓰고 신고 다녔다. 
어떤 때는 유진이 양말을 정철이가 신고 다니고 
정철이 양말을 광철이가 신고 다녔다. 

옷도 손이 가는 대로 집어 들고 몸을 쑤셔 넣어 보고는 
대충 맞으면 누구 건지 상관하지 않고 그대로 입고 다녔다. 

다들 그러려니 하고 별로 신경도 안 썼다. 
통독실 한 편에 임자 없는 옷들이 점점 쌓이다가 동산처럼 되어버렸다. 

그러면 집사님이 야단을 쳤다. '이거 누구 옷이니?'
다들 눈만 껌뻑거리고 대답을 못 했다. 아무도 누구껀지 모른다. 

가져다 빨아 놓으면, 임자가 없어도 이 사람 저 사람 잘 입고 다녔다. 

자기 물건을 알뜰하게 챙기는 유정이가 마음에 안 드는지 
충전기에 "유정이" 하고 메모해 놓았지만 상관이 없었다. 
돌아서면 없어졌다가 며칠 후면 어느 구석에서 굴러다녔다. 

화장실도 그랬다. 처음에는 남자들이 정 급하고 사람이 없을 때에만 
여자 화장실을 사용했지만 
이제는 여자고 남자고 상관없이, 여자 화장실 앞에 대기하고 서서 기다렸다. 

나중에는 신분증까지 막 돌려가면서 사용했다. 
휴대전화 비용을 못 내서 정지를 당하면, 다른 애 신분증을 가져다가 개통해 버렸다. 

그리고는 '저놈이 내 이름으로 개통해 놓고는 
휴대전화비 못 낸다고 나에게 와서 징징거린다'고 말했다.

선생들은 이렇게 말해주었다. 
'그래 잘했다. 휴대전화 값 대신 내는 것 가지고 뭘 그러냐? 
더 많이 당해야 해! 한국에 살려면 그 정도 교육비는 아무것도 아니야.  

다들 몇 천만 원씩 사기도 당하고 그러는데 
뭘 그까짓 거 가지고 그러냐?' (아예 신분증을 빌려주지 말라는 뜻)

▲한국에서 사역하라는 음성을 듣고 교회를 시작을 했고 
다시 통독을 시작하라고 해서 이렇게 시작했더니 

선교센터도 아니고, 교회도 아닌 
아주 이상한 사역이 되어 버렸다. 

주일에 탈북 청소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그들을 양육할 때는 
교회 비슷하게 돌아갔지만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학교가 되었다. 

사역자들이 혼란스러워했다. 
통독학교 일과, 교회행정 일과, 식당 일까지 다 해야 했고 
홈페이지를 만들고 관리하는 일, 운전하기, 설교 등 
여러 가지 일을 다 사역자들이 해야 했다. 

할 줄 알고 모르고는 상관 없었다. 
그냥 시키면 그때부터 배워서 했고, 또 두루두루 다 잘해야만 했다. 

이순중 전도사는, 찬양시간 피아노 반주부터 시작해서 
회계도 해야 하고, 장도 봐야하고, 홈페이지 관리도 해야 했다. 

성근선생은, 설교부터 시작해서, 통독반 관리와, 홈페이지에 올릴 글을 만들고 
동영상을 제작하고, 여전도사들과 집사님들이 장 보러 갈 때는 
운전기사 역할까지 해야 했다. 

동역하는 여자 목사님도, 주말에는 탈북 청소년들을 가르치고 
평일에는 식당에서 밥을 하고, 애들 방 청소하고, 빨래해 주고 그러다가도 
내가 '갑시다!' 하면 중국부터 시작해서, 필리핀으로, 일본으로 단기선교를 동행해 주셨다. 

여자 전도사님도 연세가 많으신 분이지만 
주일헌금과 통독학교 회계부터 시작해서 
운전이며 장보기 등 자질구레한 일들에 정신이 핑핑 돌아 갈 정도로 바쁘고 힘들었다. 

거기에다 남한 성도들은 뭔가 자꾸 맞지 않으니 
이렇게 저렇게 불평하기 시작했다. 

나는 남한 성도들을 따로 모아 놓고 정식으로 선포했다. 
'여기는 한국 성도들이 양육 받으라고 오는 교회가 아닙니다. 
내가 위로받고 양육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힘들어서 여기 못 있어요. 
여기는 선교 현장이고, 내가 선교사로 왔다는 마음으로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힘들어서 여기에 있지 못해요.' 

남한 성도들이 물었다. 
'목사님, 지금 이 사역이 도대체 무슨 사역이에요?
교회에요, 선교센터 이에요?'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기는 내게도 매한가지였다. '이게 도대체 무슨 사역이지?'
딱히 명확하게 정리 되지 않았다. 

한국의 교회 기준에서 봤을 때는 설명이 난해했다. 
무엇이라고 설명하려고 하면, 말이 안 되는 것이 많았고 
어떤 것과 비교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다. 

일반적인 기준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이상한 사역이 만들어졌다. 
기존에 봉사하던 방식과 사고로는, 이곳을 혼란스러워 할 수밖에 없었다. 

효율성도 없고, 되는 일도 별로 없고, 가능성도 거의 없는 이상한 짓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시험에 들고 깨어지기만 하다가, 결국에는 지쳐서 떠난 분들도 많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기존의 한국교회는, 일이 중심이지, 사람 중심이 아니다. 
일을 위해서 사람들이, 자기의 많은 것을 포기하고 헌신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일은, 정말 효율적으로 잘 돌아가고 화려하게 잘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에 남는 것은, 은혜보다 상처가 더 많고 
무미건조함이 가득하다. 

나는 처음부터 사역을, 사람중심으로 했다.
사람의 마음이 치유되고, 영혼이 살아나는 것에 맞추다 보니 
일은 언제나 매끄럽지 못했고, 효율이 많이 떨어지고, 엉망이 되어 버릴 때가 많았다. 

일 중심에서 살던 문화에서 보면, 엉터리로 일하는 곳이 이곳이었다. 
어떤 날에는 녀석들이 '여기 아프다. 저기 아프다' 하고 빠져 버리고 

또 어떤 녀석들은 말도 없이 그냥 배째라 하고 도망가버려 
강의실이 횡 할 때도 있었다. 

김광신 목사님이 오셔서 강의를 해도 
평소와 똑같이 졸고, 말을 안 듣고 삐죽댔다. 

그래도 나는 이 사역의 의미를 정리하려고 나름대로 고민하다가 
대충 그냥 '교회가 딸린 선교센터' 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랬더니 또 학생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다. 
학생들에게 이곳은, 교회를 넘어 선교센터의 의미도 넘어,
너무 뭔가 또 다른 것을 느끼고 있었다. 

성근 선생과 순교 선생은 자주 뛰쳐나가는 학생들을 다시 받아 주지 말자고 했다. 
학교 질서가 엉망이야 된다고... 학교가 세운 원칙들도 엉망이 된다고... 
그냥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고 했다. 

나는 못 들은 척하고 계속 학생들을 받아주었다. 
오늘 뛰쳐나갔다가 다시 돌아오고, 
내일 또 돈벌이에 마음이 빼앗겨서 뛰쳐나갔다가
그 다음 날 오면 또 받아 주고, 또 받아 주고 했다. 

광철이, 정철이, 광수는 솔직히 붙어 있는 날보다
나가 있는 날이 더 많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하지만 그렇게 뛰쳐나갔다가는 태연하게 다시 돌아와 통독실에 앉아 있었다. 
선생들이 처음에는 몇 번 꾸중을 하고 벌을 주기도 했지만, 그 때뿐이었다. 

나중에는 선생들도 학생들이 뛰쳐나가는 데 적응 되었는지 
나가면 '쟤는 또 나가네..' 하고 가만히 쳐다보았고 

 

뻔뻔스럽게 들어와 앉아 있어도 '얘는 또 들어와 앉았네' 하고 쳐다보기만 했다. 
결국 시간이 지나도 훈련에 적응하지 못하고 들락거리는 학생들은 
2기생으로 받아 들였다. 1년 더 훈련시키면 나아지리라 믿었다. 

그렇게 광철, 철명, 유진이는 함께 시작했지만 2기생들이 되었다. 
말썽꾸러기들 뿐만 아니라, 공부 열심히 하는 학생들도 
지각을 밥 먹듯이 했고 무단결석을 자주 했다. 

학생들은 학교가 정한 원칙과 규율들을 모조리 뒤범벅으로 만들고도 
당당하게 손까지 막 내밀었다. 
'목사님, 나 지금 휴대폰 요금 밀렸어요. 경찰서에서 막 호출해요. 
좀 도와주세요. 집세 밀렸어요. 좀 도와주세요.' 

옆에서 보던 선생들이 황당해서 꾸짖었다. 
'야 이놈아, 너는 도대체 뭘 잘한 것이 있다고 이렇게 당당하니?'

달라고 하는 놈이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항의하듯 말했다. 
'목사님, 제가 급해서 그러는데 금식해서라도 꼭 갚을게요. 좀 도와주세요.' 

시간이 지나도 학생들이 뛰쳐나가고 들어오는 일을 밥 먹듯이 반복하자 
참다 참다 뚜껑이 열려 버린 성근 선생이 사무실로 뛰어들어와 고함을 지르며 나에게 대들었다. 

'목사님 지금 우리가 뭐하고 있는 겁니까? 
자꾸 뛰쳐나가는 학생들은 다시 받아 주지 말고 내 보냅시다. 
되는 애들만 붙잡고 사역을 합시다. 
지금 잘하는 애들 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저 망나니들 때문에 학교가 지금 엉망이 되고 있습니다.' 

'안 된다!' 나도 벌컥 해버렸다. 

성근 선생도 지지 않고 맞섰다. 
'왜 안 됩니까?' 

'그냥 안 된다!' 
성근 선생은 털썩 주저앉으면서 입을 다물어버렸다. 
속이 어지간히 상한 모양이었다. 

나는 성근 선생을 타일렀다. 
'성근 선생은 공부 잘 하고 말 잘 듣는 학생들만 일꾼이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아니야, 처음부터 쭈욱 잘하는 애들은 원래 자기가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늘 당당해! 

그러나 자꾸만 혈기 부리고, 뛰쳐나가고, 방황하고, 좌절하는 애들은 달라. 
그 아이들을 기다려주고, 용서해 주고, 안아 줄 때 
그때 그 애들의 마음에서 느끼는 감동과 감사는 
모범생들이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야! 

넘어진 것이 쪽팔리고 부끄러워서 못 돌아올 때 
그럴 때도 우리가 또 받아 주고, 안아 주고 
이런 것을 7 번이고 70 번이고 반복해 줘야 하는 거야. 

우리는 아프고 힘들겠지만, 그것이 사역이야! 
그렇게 해야 그들이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이 그들의 내면에서 그들을 바꾸게 된다고 나는 믿어!  

이렇게 변화된 사람이라야, 그들도 똑같은 방식으로 
사람들을 용납해 주고, 포용해 주는 그릇들이 된다고 나는 생각해. 
복음이라는 게 원래 병든 사람을 고치는 힘이거든!' 

성근 선생은 대꾸하지 않았다. 
선풍기가 눈치 보듯 우리 두 사람을 이리저리 번갈아 둘러보며 돌아갔다. 

내가 다시 설명을 이어갔다. 
'머리 좋고 성실한 사람은, 배우는 일이 쉬워. 
그런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일도 쉬운 일이야. 
그런 사람들만 가지고 프로그램 진행하는 것.. 그건 힘든 일이 아니지. 

정말 힘든 일은 바로 
용납해 주고.. 또 참아주고.. 또 져 주고.. 하는 것들이야. 
이런 일을 하려면 정말 순간순간 자기를 죽여야하는 눈물의 길이야. 
이게 사역이야!' 

성근 선생이 다시 발끈했다. 
'그렇게 사랑해주고, 용서해 줘도 저들이 변화될 낌새가 보입니까?' 

성근 선생은 사랑의 아름다움은 인정하고 있지만, 
그 힘의 능력에 대해서는 전부를 다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해야 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야! 
나는 사랑의 능력을 믿어' 

바닥만 내려다보던 성근 선생이 
'후~' 하고 큰 숨을 내쉬며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저 말 안 듣는 녀석들을 가만히 지켜 봐, 
그들은 마음이 내키면 하고, 내키지 않으면 안 해 버려. 
그들은 이 복잡하고 계산적인 세상에 살면서도 
손익 계산을 전혀 하지 않고 행동하고 있어. 

그들은 단순해. 그것이 바로 능력이야. 
저 능력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덧입혀 지게되면 

그것은 치밀하게 계산을 해서 행동하는 똑똑한 애들이 
흉내도 내지 못하는 아름다운 힘이 되고, 괴력이 되거든...' 

성근 선생은 못 마땅한 듯, 책상 위에 두 팔을 올려 놓고 
그 위에 엎어지듯 얼굴을 박았다. 

'하나님 일은 머리가 하는 것이 아니야, 마음이 하는 것이야!' 

성근 선생은 입을 내밀고 집무실을 나왔다. 
그때 마침 며칠 동안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앉아서 통독하는 광철이 눈에 들어왔다. 

성근 선생은 작심하고 광철을 붙잡고 밖으로 데리고 나가 물었다. 
'도대체 이 재미없는 곳에는 왜 다시 돌아온 거니?' 

미안한지 광철도 마음을 열고 솔직히 말하기 시작했다. 
'통제받는 규율 생활이 너무 지겹고, 밖에 나가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면 재밌을 것 같아서 나갔어요. 
그런데 정작 그렇게 해 보니까, 별 재미가 없더라고요. 

그리고 제일 힘든 건..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 
고작 이렇게 살려고, 그렇게 힘들게 한국에 왔나? 하는 생각 때문에 
이번에는 정말 잘해 보자.. 하고 왔어요.' 

'그러면 이번에는 마음을 딱 붙들어 매고 다신 안 나갈 거니?' 

자신이 없는지 광철이는 웃었다. 
성근 선생은 커피를 나누면서 광철의 마음속 여기저기를 찔러보기도 하고 
뒤집어보기도 하면서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너는 글도 잘 읽지 못하기에 훈련이 참 힘들 텐데 
뭐가 좋아서 자꾸만 돌아오는 거니?' 

광철이 는 어려서부터 꽃제비로 살아왔기에 예의가 무엇인지 몰랐고, 
사랑을 받아 본 적도 없기에 사랑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에게는 윗사람도 없었고 아랫사람도 없었다. 
다 친구였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다보니 계속해서 미움을 받았고, 싸울 일이 많이 생겼다. 
싸우면 절대로 지지 않았다. 
힘이 약해서 어쩔 수 없을 때에는, 아무리 맞아도 절대로 굽히지 않았고, 울지도 않았다. 

'어떤 경우에도 지면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중국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말도 듣지 않고, 내키는 대로 무례하게 마구 행동했다. 

그와 반면에 성철은 여자처럼 싹싹했고, 붙임성이 좋았다. 
목사님의 말을 잘 듣고 잘 따랐다. 

그러나 광철은, 목사님이 보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고 
자기가 내킬 때만 열심히 하고, 말도 별로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그랬는데도 최광 목사님이 자기를 사랑해줬다고 말했다. 
어디 가든지 데리고 다니고, 그가 먹고 싶어 하는 눈치가 보이면 
배가 불러 더 이상 먹지 못 할 때까지 사줬다고 했다. 

광철이가 말했다. 
'최광 목사님은 안 된다 했다가도 
우리가 말을 안 들으면 자꾸만 져 주고, 뒤로 물러나고, 용서해 주고, 용납해 주세요. 
저는 그렇게 해 주시는 것이 너무 좋아요. 
그래서 감사하고 제가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아요. 

그런데도 가끔씩 너무 힘들어서, 저도 모르게 뛰쳐나가고, 말 안 듣고 그럽니다. 
술 먹고 마음대로 살아 보니까.. 하루 이틀만 좋고 또 다시 힘들었어요. 

집사님이랑 이모가 보고 싶기도 하고 
그리고 정작 혼자 살아 보니까, 밥도 온전히 해먹기 힘들더라고요.' 

탈북청소년 학생들은 잘못을 해도 품어 주고 
돈을 주고, 용납해 주고 
자기들이 난장판을 벌여도, 학교가 자기들을 쫓아내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챘다. 
처음에는 자기들도 머릿수를 채워서 사역을 하려는 것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 때문에.. 아버지의 마음 때문에 쫓아내지 못한다는 것을 경험하면서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무엇인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북한에서부터 부모없이 힘들게 살다가 남한으로 찾아왔지만 
어디서도 자기를 받아 주지 않았고 
소외당하고 겉도는 저 아이들이 지금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원하는 것은 
인정사정없는 일 중심의 교회도 아니고 
효율과 성과만을 요구하는 선교 센터도 아니었다.

세상이 궁금해서 뛰쳐나갔다가도, 언제든지 되돌아올 수 있는 곳, 
정신없이 놀다가도, 집이 생각나면 돌아올 수 있는 곳, 
배가 고파 돌아오면 따뜻하게 받아 주고 채워 주는 그런 곳을 원하고 있었다. 
바로 그들이 어린 나이에 잃어버렸던.. 따뜻한 관심과 사랑이 있는 집이었다. 
사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집이었다.

어려서부터 집이 간절히 그리웠던 그들은 
자기들도 모르게 집이 있는 아이들이 하는 행동을 따라하고 있었다. 

집에서 하듯이, 이곳에서 마음대로 행패를 부리고 
장난을 치고 응석을 부리고 있었다. 

학생들이 집사님들과 사역자들 향해 부르는 호칭들이 엉뚱했다. 
광철은 섬기는 분들에게 이모라고 불렀다. 

유진이도 처음에는 사모와 집사님을 이모라고 부르다가 
아예 '엄마, 마미'라고 불렀다. 

은정이는 사모와 이순중 전도사님을 향해서 '엄마'라 불렀고 
나를 향해서는 대놓고 '아빠' 라고 불렀다. 

어느때부터인지 아이들은, 혹시 섬기는 분들이 며칠 보이지 않으면 
카톡으로 '왜 안 오시나요, 아프신 거 아니세요?' 하며 걱정하는 문자를 보내 왔다. 

점점 나의 마음 속에 그들이 주는 따뜻한 무엇인가가 채워지고 있었다. 
어른들이 원리와 원칙으로 요란하게 간판을 꾸며서 만들어 놓은 '학교'를 
녀석들은 고집스럽게 자기들이 원하는 '집'으로 대하고 있었고 
천천히 그렇게 만들어 가고 있었다. 

탈북 학생들에게 이곳은 교회도 아니고, 선교 센터도 아니었다. 
따뜻한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는 그들에게 
이곳은 마음 둘 곳 있는 따뜻한 집이었다. 이런 집을 느끼고 싶어 했다.

'아 그래서 주님은, 이곳에 탈북청소년들만 보내 주고 계셨구나. 
여기를 집으로 삼고 살라고... 이것이 그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이었구나' 

'그래서 우리의 예상과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이곳은 서서히 집으로 변해가고 있었구나' 

'우리는 그들이 변하기를 그토록 고대 했었는데 
주님은 우리가 변하기를 바라고 계셨구나...' 

주님의 이 뜻을 읽지 못했기에 
사역자들은 아이들의 무모한 행동에 학교 원칙들이 공격 당하고 
허물어진다고... 저런 아이들은 내보내야 된다고 그렇게 펄펄 뛰었고 
애를 써서 학교의 모습을 유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이곳은 '학교'에서 천천히 '집'으로 변하여 갔다. 
주님의 위로와 마음을 이해하고 나서부터 
왜 학생들이 잘못을 잔뜩 저질러 놓고 밖으로 뛰쳐나갔다가도 
돌아와서는 그렇게 당당하게 손을 내미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들의 마음의 소리가 내 마음에 들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깊은 마음은, 우리가 자기들의 아빠와 엄마의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아빠니까, 엄마니까 
내가 잘 났던지 못났든지 나를 품어 줘!' 

'왜 공부 잘 하고 착하게 시키는 대로 하는 애들만 예뻐해 주고, 관심을 주는 거야?' 
나도 그런 관심을 받고 싶고, 사랑을 받고 싶어! 
그런데 어릴 적부터 그렇게 똑바로 살아 보지 않아서, 그것이 너무 힘들어! 

그렇다고 내가 사랑을 받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 
나도 사람이기에 나도 사랑을 받고 싶어. 
나도 관심을 받고 싶어!' 

나는 울고 싶었다. 그들이 뻔뻔스럽게 손을 내밀고 원하는 것은 
몇 푼의 돈이 아니라 
속이 상해 펄펄 뛰면서 욕을 하면서도 
그런 어머니 같은 사랑을 베풀어주기를 원하고 있었다. 

내 안에서 다른 마음이 눈을 떴다. 
'그렇구나 봉사자들도 그저 윗사람이니까 아랫사람을 섬기는 자세가 아니라 
엄마로서 아빠로써 섬겨야 하는 곳이구나.. 
그런 부모의 심정으로 잘났던지/ 못났던 지 그들을 섬길 때 
부모의 마음을 느끼는 것.. 그것이 봉사자의 기쁨이고 보람이 아니겠는가!' 

'의무나 신앙 때문에 섬기거나 
그들이 변할 것을 기대하고 봉사하거나
그저 주님께 보상받을 어떤 것 때문에 섬긴다면 
이곳은 정말 힘든 사역이 되는구나...' 

갑자기 뻔뻔스럽게 손을 내미는 그 모습들이 사랑스러웠다. 
여학생들은 문득 '나를 보게 하는 거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 모습이 아닌가? 
우리가 무슨 공로가 있고, 무슨 의로움이 있다고 
맨날 하나님 앞에 나가서 손을 내미는가? 

그래도 하나님은 어미가 자식을 받아 주는 그 마음으로 
우리의 기도를 일일이 다 들어주고, 응답해 주고 계시지 않는가? 

우리가 그렇게 온갖 죄를 다 짓고도, 
뻔뻔스럽게 하나님께 돌아와서 손을 내밀때 
하나님도 이런 심정이겠구나... 

자식이니까 징계를 하다가도, 
또 대견하다고 져 주고 
필요한 은혜들을 채워 주고 있지 않으신가?'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바라보는 것처럼 
그들도 우리가 자신들에게, 목사나 전도사가 아니라 
부모가 되어 주기를 원하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내가 변하고, 우리가 변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