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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23장 도망자 다윗

LNCK 2023. 3. 24. 18:25

◈도망자 다윗          삼상23장            130908                 사무엘상 설교모음 

▲도입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 하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기대하고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우리가 성공하고 축복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당근'이죠.

우리의 기대를 넘어서서,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그 성공, 하나님이 이루시는 축복을 보면서 
우리는 믿음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죠. 

두번째는, 정반대로 우리가 생각하고 기대하지 않았던 실패와 고난을 
겪게 하시는 것입니다. '채찍'입니다.

최선을 다하여 노력했지만 실패하게 되고 
또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닌데 고난을 받게 됩니다. 
분명히 의로운 선택이었는데, 불의한 취급을 받게 되는 억울함을 겪게 되죠.

이런 방식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느 한 가지 방법만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언제나 첫번째 방법이죠. '당근'을 원하죠.
항상 성공과 축복을 통해서 우리 믿음이 자라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한 가지 방법만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있어서 성공과 축복만 계속된다면 
처음에는 우리의 믿음이 강해지는 것 같다가도 
쉽게 우리의 믿음은 쓰러지고, 타락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때로 두 번째 방법(채찍)을 병행하셔서 
우리의 믿음을 세워가시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다윗은 지금까지 (22장까지) 성공을 통해서 믿음이 세워졌습니다. 
어린 시절 목동 생활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써 
들짐승들을 때려눕히는 그런 승리를 경험했죠. 

또한 거인 골리앗을 무너뜨림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성공을 경험했습니다. 
마침내 왕의 사위가 되는, 미갈과 결혼하고 군대장관이 되는 출세 길을 달렸죠.

그런 성공을 통해서 그의 믿음이 자라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에서 머무르지 아니하시고 
두 번째 방법을 이제 사용하십니다. 
  
질투와 미움에 사무친 사울의 위협과 협박과 살인 계획을 피해다니는 
도망자의 생활을, 그는 시작해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10년 이상 오랜 시간을,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주 몇 개월도 아닌 
10여 년 이상을 도망자의 신분으로 광야를 헤매며 도망다니게 되었던 거죠.

 

이 도망자의 생활이, 다윗의 인생에서 왜 필요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참된 종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왕으로서 
하나님께 쓰임 받기에 합당한 준비를 시키는 훈련과정으로 
그의 믿음을 세워주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두 번째 방법을 사용하신 것이죠.

우리에게는 없었으면 하는 그러한 기간, 
우리가 볼 때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기간, 
애매히 받는 고난의 과정, 
최선을 다했지만 겪게 되는 그런 실패, 그런 좌절이.. 

우리의 믿음을 세우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가 받아들일 때 
하나님은 우리를 더 멋진 믿음의 사람으로 세우실 줄로 믿습니다. 

다윗이 왕으로 등극하는 과정을 보면 
다른 구약의 왕들과 다른 면이 나타납니다. 

대개 왕이 되는 두 가지 길은 
-혈통적으로 왕의 아들로 태어나는 것이죠. 자동 왕을 승계합니다.  
-또는 혁명이나 반역을 통해서 왕위를 찬탈하는 것이죠. 

혈통을 통해서 왕이 되면, 자신의 노력이 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대개 무책임한 왕이 되기 쉽습니다. 

반대로 혁명이나 강제로 왕위를 차지하게 된 경우는 
폭력적인 그런 왕이 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어느 쪽도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지만 
동시에 백성들에 의해서 추대받는.. 그런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지만 
동시에 사람들이 세우는 과정..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다윗을 진정한 왕으로 세워가시는 과정을 우리가 봅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서 도망다니는 그 기간 동안에 
하나님은 다윗을 세워가셨던 거에요. 

다윗주변에 아무도 없었던 것 같은 그런 시간이었지만 
그 기간을 통해서, 그의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은 절대 혁명을 일으키려고 사람을 모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가 도망다니는 그 과정을 통해서 
어느덧 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움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이 도망의 기간 동안에 이루어졌던 것이죠. 

사울은 끝까지 다윗을 추적했습니다. 
이스라엘 영토 구석구석, 끝까지 추적했고 
자신의 인생이 다 하는 그날까지 다윗을 추적했어요. 

그의 인생의 목표는 다윗을 제거하는 것이었어요. 
그 집요하고 무서운 사울의 추적앞에, 다윗의 믿음이 연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다윗의 입장에 있었다면 
충분히 믿음이 연약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조금도 잘못이 없고 완전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연약함과 실패 속에서 
하나님 앞에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되는 올바른 태도를 보였다는 의미로서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다'는 것입니다. 

삼상21~23장 까지를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보게 되는데 
이 기간 동안에 그는 연약한 사람의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실패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그는 사울의 위협을 피해,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 
자기가 의지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들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그 가운데서 그는 연약한 믿음의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1) 그가 제일 먼저 찾아간 사람은 사무엘입니다. 
자신에게 기름을 부었던, 그리고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였던 사무엘, 
라마 나욧에 있던 그를 찾아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죠. 

'왜 나에게 이런 일들이 있습니까, 왜 왕이 나를 죽이려고 합니까?' 
그는 상담이 필요했을 겁니다. 조언이 필요했을 겁니다. 

그러나 기대했던 사무엘에게서도, 명확한 해답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사무엘도 왜 다윗에게 이런 기간이 있는지, 명쾌한 대답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조차도 다윗을 보호해 줄 수 없었습니다. 

2) 사무엘을 떠나 그는 아히멜렉 제사장에게 찾아갑니다. 
제사장에게 찾아가서 그는 먹을 것을 구합니다. 

그는 지금 아무 먹을 것도 없이 굶주린 상태에 있었습니다. 
먹을 것은 성소에서 물려낸 떡밖에 없었지만, 다윗이 거짓말을 합니다. 

자신이 왕의 특별한 임무를 띠고 왔기 때문에 
자기가 왜 왔는지 이유를 말할 수 없다며 속인 거죠. 거짓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윗의 거짓말로 인해서, 나중에 사울이 놉의 제사장들을 다 죽이는 
그런 비참한 학살이 일어나게 되는 결과가 빚어지게 되는 거죠. 

그리고 아히멜렉에게 무기를 좀 달라고 구합니다. 
내가 급히 왕의 명령을 받아 오느라고 무기를 챙겨오지 못했기 때문에 
무기가 있으면 좀 달라고 요청하죠.

그래서 아히멜렉은, 성소에 보관 중이던 골리앗의 칼을 내어 줍니다. 
당시 성소는, 오늘날로 치면 박물관 역할도 겸했던 것이죠.

(그건 블레셋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법궤를 빼앗은 후에
그것을 다곤의 신당에 두었습니다. 그 신전도 역시 전시관 역할을 겸하고 있었죠.

여러분 얼마나 아이러니칼한 장면입니까. 
다윗이 골리앗 앞에 나갈 때 '너는 창과 칼로 내게 나오지만 
나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간다' 하면서

칼과 창을 의지하지 않았던 그 다윗이
이제 칼을 필요로 하는 보통 사람이 된 거에요. 
칼을 의지하고 싶은 믿음이 된 거에요. 

그것도 골리앗이 의지했던 그 칼을, 이제 다윗이 의지하게 된 거죠. 

물론 창과 칼이 전혀 필요없다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다윗의 믿음이 그만큼 연약해졌다는 거에요. 

골리앗을 무너뜨렸던 그 믿음의 사람이 
골리앗의 의지했던 그 칼을 의지하게 됐다는 겁니다. 
이렇게 다윗은 믿음이 식어지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게 됩니다. 

3) 다윗은 골리앗의 칼을 들고 블레셋으로 넘어갑니다. 
블레셋 가드 왕 아기스를 찾아갑니다. 왜 블레셋으로 넘어갈까요?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숙적 입니다. 
그리고 그 블레셋의 가드 왕의 신하가 바로 골리앗 이었습니다. 

다윗이 자신이 대적해서 싸웠던 그 대적의 나라에 왜 넘어갔습니까? 
사울의 대적에게 넘어가야, 자신의 보호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겠죠. 

여기서부터 심각한 문제가 생기는 거죠. 
사무엘을 찾아가거나, 또 제사장을 찾아간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적 지도자들이고, 또 나름대로 조언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블레셋 가드 왕 아기스를 찾아간 것은, 엄청난 판단 착오입니다. 
다윗의 판단력이 흐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영토밖으로 나가서, 다윗이 자기 안전을 도모하려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어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냐 하면 
가드 왕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을 알아보게 합니다. 

다윗은 자기를 못 알아볼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알아보는 거예요. 
'이 자가 바로 골리앗을 무너뜨린 다윗이 아닌가?' 

다윗이 엄청 당항했겠죠. 
숨으려고, 보호받으려고 왔는데, 자신을 알아보니 얼마나 당황했겠어요?

그때 다윗이 순간적으로 어떤 아이디어를 냅니까? 
'내가 여기서 살아나갈 길은 미친 사람이 되는 길 밖에 없다'

다윗이 연기자의 실력이 다분히 있었던 것 같아요. 연기가 통했던 것을 보니까!
앞서 미친 사울 옆에서 수금을 켜면서, 또 얼마간 미친 사람의 행습을 보고 배웠던

것이 연기에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다윗의 연기는 성공해서 도망은 나왔지만, 얼마나 초라해진 모습입니까. 
하나님이 택하신 왕이, 이스라엘의 대적 블레셋에 가서 
침을 흘리며 미친 사람 흉내를 내면서 도망나와야 되는 이 참담한 현실... 

이것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다윗의 연약한 믿음 때문에 생긴 실패의 모습이었다는 거에요. 

4) 그는 다시 유대땅으로 돌아와 아둘람 (지역의) 동굴에 숨습니다. 
'동굴은 조금 안전하겠지?' 라고 해서 동굴에 숨습니다. 

그 때에 다윗의 부모와 형제들까지 다 합류하게 됩니다. 22:1~2
아마 사울 왕이 그의 가족들까지도 다 죽이려고 위협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이미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사울의 폭정, 사울의 불의한 정치에 의해서 
피해 입고, 상처입고, 억울하고, 눌린 사람들이 다윗 주변에 모여들기 시작했죠.

그 사람들이 4백 여명이 됩니다. 
그 4백 여명이 후에 다윗의 왕국이 세워질 때 기초가 되는 
아주 유력한 사람들이 다 그곳에서 나옵니다. 아둘람 공동체죠. 

다윗은 그곳에서 위로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인원이 점점 많아지는거에요. 4백 명에서 6백 명까지 늘어나자 
더 이상 동굴이 안전한 곳이 되지 않게 됐어요. 숨어 피해서 다니기엔 너무 큰 숫자죠.

5) 다윗은 또다시 자신의 안전을 찾아서 여행을 떠납니다. 
그 행선지가 바로 모압 미스베 였습니다.

또 다른 나라로 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압은 사실 블레셋 보다는, 당시에 훨씬 더 우호적인 나라였죠.

그렇지만 역시 이방 땅입니다. 다윗의 조상가운데 모압 여인 룻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외가쪽으로 먼 친척이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일종의 망명을 신청한 거에요. 
'내가 앞으로 이 모압 땅에서 살겠다... 사울은 여기까지는 못 쫓아오겠지...' 

그래서 부모님을 위한 땅도 달라고 요청하고 그랬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절대로 원하시지 않죠. 

하나님은 갓 선지자를 보내서 다윗에게 경고하시고 
다시 다윗을 유다 광야, 헤렛 수풀로 되돌아오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마련하신 훈련 장소인 유대를 떠나서 도망가지 말라는 거죠)

다윗은 꼼짝을 못하는 거에요. 블레셋을 가도, 모압을 가도.. 
그러나 이스라엘 땅은 안전하지 않은 것 같고.. 
사울의 위협 속에서, 그는 계속 시달릴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하여튼 유대 땅을 떠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그 유대 땅 안에 다윗을 가두어 두신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두려웠어요. 연약했어요... 그러면서 담대해지는 훈련을 받았던 거죠. 

이런 연약한 다윗의 모습가운데서 지어진 수많은 시편들이 있습니다. 
그가 블레셋 가드 왕 아기스 앞에서 미친 척 하다가 
되돌아와서 정신은 차리고 지은 시가 시편 34편입니다. 

그가 아둘람 동굴에 숨어서 하나님을 노래했던 시가 시142편에 있습니다.
(시57편도 아둘람 동굴에서 지은 시라고 알려져 있으나,
어떤 진영에서는 그가 엔게디 광야에서 지은 시라고 합니다. 
거기 굴에서 사울을 놓아준 일이 있는데, 그때 지었다고 보는 거죠. 24:1~7)

그가 모압 땅에서 돌아와서 
그가 다시 유대 광야에 돌아와서 지은 시가 시편에 있습니다. 

우리가 시편이 이해되지 않는 까닭은 
다윗이 경험했던 수많은 광야의 시련들,
자기가 잘못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애매히 받는 그 고난,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자기 앞에 돌아오는 것은 실패밖에 없을 때 그 절망 

모든 사람들이 나를 대적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위협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시편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다윗의 시편은, 편안하고 안락한 환경에서, 
즉 궁정에서 지어진 노래들이 아닌 것이죠. 

다윗은 이러한 모든 상황 속에서 
한편으로는 깊은 절망과 위험과 두려움에 사로잡혔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가운데서도 자기와 함께 하시고 계신 
그 가운데서도 섭리하시고 자기를 지켜 주고 계신
그 하나님을 경험해 왔던 것입니다. 이게 훈련이었죠.

어떤 두려운 환경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평안을 유지하는 훈련!


◑그일라를 돕기로 결심한 다윗

 

다윗의 침체에서 회복으로의 터닝포인트가 되는 장면이 본문 23장이에요. 
이제 모압 땅에서 다시 유대땅으로 되돌아 왔을 때 
바로 그때, 블레셋 과의 접경지역에 그일라 라는 성읍이 있었는데 
거기로 블레셋이 침공해왔다는 거에요. 

마침 추수 때가 되니, 블레셋이 수확물을 약탈하러 몰려온 것입니다.
자 그 소식을 다윗이 들었어요. 

이때 놀랍게도 다윗의 마음속에 불이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그 전까지만 해도 피해다니고, 영적으로 침체해 있었던 다윗에게 
거룩한 분노가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내가 그일라를 구원해야 되겠다'라는 사명감이 
그 마음속에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여러분, 이 다윗이 지금 어떤 상황입니까? 도망다니는 그런 상황입니다. 
사울이 모든 군대와, 자기 모든 에너지를 다 동원해서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데 

다윗이 지금 그일라를 돕겠다고 출정하면, 
소문이 나고, 자기 위치와 동선이 노출될 것이고, 
그러면 금방 사울의 군대가 들이닥칠.. 그런 위험성을 내포한 상황이었죠.

그러니까 그 따르던 부하들이 뭐라고 그럽니까? 
'다윗이여, 정신이 있으십니까?' 그런 식으로 말한 거죠.
아주 현실적인 얘기죠. 말이 안 되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께 재차 묻습니다. 
그 말씀이 본문 23:1~4까지 나옵니다. (각자 찾아서 읽어보세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의 특징이 여기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형편과 상황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늘 양떼들, 다른 사람들의 형편을 먼저 염려하고 걱정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분명하다면, 자신이 어떤 상황에 있든지 
또 어떤 어려움을 겪게 되든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포기할 수 없는 강렬한 소원, 
자기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런 강렬한 헌신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거에요. 

다윗도 왜 자기가 왜 이런 마음이 드는지를 몰랐을 거예요. 
자기는 지금 어떻게 하면 사울을 피해 다닐까? 

동굴에도 들어가보고, 모압에도 가보고, 블레셋에도 가보고... 
정말 자기 인생의 가장 치욕스러운 일, 즉 미친 사람 행세까지 하면서 도망다니는 그 상황에서 

위험에 빠진 그일라를 구하러 가겠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거죠. 
그러나 이것이 부르심을 받은 사람의 마음이요, 증거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블레셋이 그일라를 치러온 것을 
하나님이 어떤 중요한 사건으로 섭리적으로 사용하셨다고 생각해요. 
우연이 아니라!

다윗의 마음속에 꺼질 것 같았던 그 하나님이 주신 소명.
골리앗 앞에 나갔을 때 있었던 그 믿음의 불씨를 
하나님이 다시 되살려주시는 거에요. 사역의 기회를 주시는 거죠

사울을 두려워했던 그 다윗의 식어진 믿음을 
하나님이 다시 세워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블레셋으로 하여금 그일라를 치도록 해서,
그 사건을 사용하셨다는 거에요. 

하나님의 부르심가운데 있는 믿음의 사람은 
믿음이 계속 추락하는 것 같다가도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이 다시 그 믿음을 붙잡아 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거에요. 

블레셋과 싸울 수 있는, 그의 믿음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지금 주시는 거에요. 

다윗의 마음속에 포기할 수 없는, 그런 열정과 헌신이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주변이 다 반대했어요. 

다윗이 재차 하나님께 기도로 묻습니다. 
여러분 다윗의 기도가 오랜만에 여기 등장하죠. 23:1~4

21~22장에서 그가 블레셋에 도망다니고 
그가 모압에 가고 그럴 때 
'그가 기도했다'는 단어가 나오지 않아요. 

기도가 없을 때는 반드시 우리가 
연약한 믿음가운데 두려움 속에서 도망다닐 수밖에 없는 거예요

'나는 도망자다' 사울을 두려워하는 그 두려움 속에 사로잡혀 있었죠. 
그런데 그가 이 사건을 계기로 해서, 기도를 회복하게 되었어요.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그일라를 약탈하는 블레셋을 쳐도 되겠습니까?' 

'칠까요/말까요?' 가 아닙니다. 
'쳐도 되겠습니까?' 이것은 자기 마음에 치고 싶다는 거에요. 

하나님은 '그래 가라, 내가 너에게 그들을 붙여 주겠다' 
다윗은 확신을 받았어요.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반대하는 부하들을 설득해서, 그는 그일라로 가서 그들을 구원합니다. 
놀라운 일이죠. 

여러분 여기에 참 재미있는 대조가 나타나죠. 
지금 그일라를 구원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사울왕 아닙니까? 

그런데 왕의 위치에서 그 책임을 가진 사울왕은 
모든 에너지를, 모든 군사력을 다윗을 제거하려는데 쓰고 있는데 

그에게 쫓기고 있는 다윗은, 
아무 힘도 없고,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지도 못하고 
요청 받은 것도 아닌데, 
도망자의 신분인 다윗이, 오히려 그 일을 한 거에요. 

다윗이 실질적인 이스라엘 왕 역할을 한 거죠. 
이 도망자의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이 택하신 다윗은 
왕이 해야 할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거에요. 
여기 얼마나 놀라운 대조가 나타납니까. 

그런데 다윗이 또다시 위기에 빠집니다. 
사울이, 그일라에 다윗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출동한 거에요. 

다윗이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 사울이 진짜 그일라로 올까요?'
'온다'  (*아마 제사장 아도니야가 갖고 있는 우림과 둠밈으로 물었을 것임)

가슴이 철렁했을 거예요. 
'하나님, 제가 구원해준 그일라 사람들이, 저를 사울에게 넘겨줄까요?'
'넘겨줄 것이다'

얼마나 상처되는 말씀이에요?
그일라 사람들은 정말 의리도 없는 자들입니다. 

다윗이 자기들을 위기에서 구해주었으면, 
다윗의 편에 서야 되는데 
그들은 사울 왕이 무서웠던 거에요. 

심정적으로는 다윗을 도와주고 싶었겠죠. 
그러나 사울왕이 다윗이 숨어있는 곳을 말하라고 하면 
말할 수밖에 없었을 거에요. 

여러분이 만약 다윗의 생애를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면 
삼국지 보다 훨씬 더 재밌을 겁니다. 

23:7~8 '다윗이 그일라에 온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알리매 사울이 이르되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넘기셨도다 
그가 문과 문 빗장이 있는 성읍에 들어갔으니 갇혔도다
사울이 모든 백성을 군사로 불러모으고 그일라로 내려가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려 하더니'

이 사울의 어처구니없는 말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다윗을 내 손에 넘겨주셨구나' 

'하나님'이란 단어를 쓰면서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이 사울,

이렇게 말로는 '하나님'을 언급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인생이 얼마나 많습니까! 

말로 하나님을 얼마나 들먹거리느냐가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이름대로 삶에서 사느냐가 중요하죠. 

다윗은 또다시 위기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올 것이고, 그일라는 너를 배반할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서둘러 또 그일라를 떠날 수밖에 없었어요.

식솔들이 많고, 자녀들까지 다 있는데 (이들은 6백인 숫자에서 제외)

그 많은 무리들과, 재산들을 이끌고 정처없이 이주하는 것이 꽤 고달팠을 것입니다.

13~14절에서 다윗이 또 떠나는 모습을 우리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 육백 명 가량이 일어나 그일라를 떠나서 
갈 수 있는 곳으로 (=정처없이) 갔더니 다윗이 그일라에서 피한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말하매 사울이 가기를 그치니라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호하시고, 사울의 손에 절대 넘겨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직 믿음이 부족했던 거죠. 

하나님이 결코 자신을, 사울의 손에 넘겨주지 않을 것이라는 굳센 믿음이 
부족했던 거에요. 

우리가 '다윗은 왜 이렇게 믿음이 없어?' 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왜냐면 우리는 다윗이 받은 위협과 고난의 1/10만 받아도 
우리는 뭐 하나님을 부인하고 막 난리칠 거에요... 

그러나 다윗은, 그 도망자의 생활을 통해서도 
절망속에서 희망을 보고 
실패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때로는 넘어지지만 아주 넘어지지 않고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계속 세워져 갔던 거에요. 


◑이 도망자의 생활을 통해서 다윗이 무엇을 배웠을까요? 
세 가지를 배웠습니다. 

▲1. 첫째로, 그는 이 도망자의 생활을 통해 
인간 속에 있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봤어요. 

당연히 사울의 모습을 통해서는, 인간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봤겠죠. 
그러나 이 도망자의 생활을 통해서, 그는 또 한 사람의 죄를 봅니다. 

그것은 사울의 죄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죄였어요. 
자기 자신 안에 있는 그 놀라운 불신, 그 놀라운 의심!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 이 엄청난 불신의 죄를 
그는 발견하게 됐던 것입니다. 

골리앗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가 
블레셋 가드 왕 아기스를 두려워하게 됐죠. 
사울이 두려워 그는 도망다녔습니다. 

도망다니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이방 땅으로 그는 도망다니면서 도움을 요청하고, 피할 곳을 찾았죠. 

그런 가운데 쓴 시편들을 보면, 그가 하나씩 깨닫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께만 피해야 되는구나! 
내가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이 지켜 주시면, 내가 보호받는 것이고 
내가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이 지켜주지 않으면, 나는 망하는 것이구나!' 
라는 그 깊은 체험을, 다윗을 해 나가는 거에요. 

<세 왕 이야기>라는 유명한 책을 쓴 진 에드워드는 
'다윗의 도망자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은 
바로 다윗 안에 있었던 제2의 사울을 죽이시는 것이다.' 

자신을 위협하고 죽이려는 사울이, 
다윗의 마음속에도 그 사울의 모습이 있을 수 있다는 거에요. 

하나님은 그 도망자의 생활을 통해, 사울의 위협을 통해 
다윗 안에 숨어있던, 잠재되어 있던 '제2의 사울'을 
하나님은 죽이시고 계신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 안에 숨어있던 제2의 사울의 모습을 보고 놀랐을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그는 '사람은 결코 의지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거에요. 
그는 사무엘에게 찾아 갔고, 심지어 가드 왕에게 찾아갔고,
모압 왕에게도 찾아 갔고...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나씩 다 끊으셨어요. 

자신을 사랑했던 사울의 딸 미갈도 끊었고, 
요나단도 하나님이 끊으셨고, 
다윗이 의지할 수 있는 건 다 하나님이 끊으셨어요. 

심지어는 자기가 구원해준 그일라 사람들에게서도 배신을 당하잖아요. 
자기가 의지하려고 찾아갔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끊으셨지만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이 붙여준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가 도망다닐 때 만났던, 아둘람 공동체에서 만났던, 동굴 속에서 만났던 사람들! 

자기가 불러 모으고, 자기가 찾아간 사람이 아닌데 
우연처럼 보이는 만남 속에서 
이 도망자의 생활을 통해서 만나게 된 이 6백여 명의 사람들, 
이 사람들은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한 가족 같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우리 인간적인 생각으로, 나에게 유리할 것 같아서 찾아다니는 사람들은.. 

반드시 우리를 절망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붙여주신 사람들은 
우리를 믿음 안에서 바로 세우는, 그런 귀한 동력자가 될 줄로 믿습니다. 

내가 찾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붙여주신 사람! 
'하나님이 붙여준 사람과 내가 함께 해야 되는구나!' 라는 것을 
다윗이 이 과정을 통해서 깨달았죠. 

▲3. 마지막으로 다윗은, 이 극한 고난속에서 
오히려 더 깊은 기도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도망다니는 그 생활 속에서, 이 위기 속에서 
그는 그일라를 구원해야 되겠다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해요. 

어쩌면 그일라에서 블레셋과 전투를 할 때, 
그게 다윗에게 휴식이었는지도 몰라요. 

다윗이게, 사울의 위협을 잊어버릴 수 있는 시간,
사울의 두려움을 잊을 수 있는 기간이었는지몰라요.

부르심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자기 앞에 당한 환경의 두려움과 모든 시련을 잊어버릴 수 있게 되는 거예요. 
그게 우리의 인생의 비결이라고 믿습니다. 

그의 기도가 더욱 더 깊어졌어요. 
순간순간 걸음걸음마다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그런 기도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기도는 어디서 배웁니까? 
편안한 환경에서 안락한 의자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광야를 도망다니는 위협적인 환경 속에서,
애매히 받는 고난속에서, 우리는 더 깊은 기도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고난이야말로 기도의 학교입니다. 
다윗이 이런 고난을 겪고 난 뒤에, 시편119편에서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시119: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여러분, 이 고백을 할 수 있을 때에, 광야학교를 졸업한 거에요. 
이 고백은, 광야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다윗의 이 도피 생활을 보면, 예수님이 생각나요.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여러분, 머리 둘 곳이 없는 생활을 한 번 경험해 보셨습니까? 
다윗은 경험해봤어요. 

내 머리 둘 곳이 하나도 없는 그곳, 
그 곳을 경험한 다윗이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미리 보여주는 모형이 된거에요. 

다윗은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는 고난의 생활을 통해 메시아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높이지 않습니다. 
그냥 높이시면, 우리는 반드시 사고가 나기 때문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다윗으로 하여금
도망자 생활을 통한 광야를 겪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높이셔도 망가지지 않을 수 있도록 미리 준비시키고 난 뒤에 
다윗 안에 있는 '제2의 사울'을 죽이시기 위해,
사울 왕처럼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다윗안에 있는 '제2의 사울'을 먼저 죽이시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고 

그의 기도를 깊게 하시고 난 이후에 
다윗으로부터 '내게 고난받는 것이 유익이라' 라는 고백을 받으신 이후에 
그는 왕으로서 사역을 시작하게 된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다윗왕국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그런 왕국의 모습을 이 땅 위에서, 그나마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여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는 말
하나님은 우리를 성공만으로 믿음을 세워 가시지 않습니다. 
때로 실패와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세우십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잘 마친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세워주십니다. 
일으켜주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신뢰함으로써 

현재 여러분이 당하는 고난과 광야의 세월을 
어떤 면으로서 도망자의 세월을 
승리하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