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삼상26장 절별 해석 및 주석

LNCK 2023. 3. 26. 15:31

한글 주석 - HANGL NOCR

◈삼상26장 절별 해석 및 주석

1 십 사람이 기브아에 와서 사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광야 앞 하길라 산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매 

'십 사람이...사울에게 이르러 가로되' 
본절 이하에서는, '십 사람'의 밀고 행위가 23:19이하에 이어 두번째 언급된다. 

'십' '십'(Ziph)은 헤브론 남동쪽 약 8km, 마온 북쪽 약 10km 지점에 있는 유다의 성읍이다. 

'다윗이 광야 앞 하길라 산에' 
'십 사람'들의 첫번째 밀고 때의 장소는 '광야 남편'이었다(23:19). 
그러나 여기서 언급된 '광야 앞'은 문자적으로는 '광야의 얼굴'이란 의미로서, 
'광야의 남편'과는 전혀 다른 '광야의 인접 지역'을 가리킨다. 

따라서 아비가일과 결혼한 다윗은(25:42) 갈멜을 떠나서 
십 사람들의 첫번째 밀고 때에 거주했던 곳보다 약간 북쪽으로 올라간 듯하다.

2 사울이 일어나 십 광야에서 다윗을 찾으려고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과 함께 십 광야로 내려가서 

'사울이...다윗을 찾으려고' '십 사람'들의 1차 밀고 때에 자신에 대한 다윗의 선대(24:4, 10, 11)에 따라 다윗을 축복까지 했던 사울이(24:16-22), 여기서 다시 다윗을 죽이러 찾아나서고 있다. 
이러한 사울의 행동은 악신의 영향하에 있는(16:14,  18:10) 그의 지극히 불안정하고 변덕스런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사울의 그같은 성격이 결국 잠정적으로 억제됐던 다윗에 대한 증오심을 다시 폭발시키게 한 것이다.

3 사울이 광야 앞 하길라 산 길가에 진 치니라 다윗이 광야에 있더니 사울이 자기를 따라 광야로 들어옴을 알고 

'길가에' 
여기에 '길' 은 예루살렘 방향에서 네게브 지방의 '아랏'(민 21:1)으로 통하는 대로(大路)를 가리킨다. 이같은 사실에서 볼 때, 본절의 '하길라 산'은 십 황무지의 동쪽임이 분명하다. 아하로니(Aharoni)도 그의 '성경지도'(Bible Atlas)에서 이 사실을 지지하고 있다.

'다윗이 황무지에 있더니' 당시 다윗은 사울의 진 서쪽 지점 고지대에 위치했을 것이다. 이는 6절의 '진에 내려가서'란 말에 의해 입증된다. 따라서 다윗은 사울의 동태를 잘 관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4 이에 다윗이 정탐꾼을 보내어 사울이 과연 이른 줄 알고 

'탐정을 보내어...알고' 여기서 '알다'(야다)란 말은 체험적이리만큼 확실히 깨달아 아는 것을 가리키는 동사이다(2:12,  22:22,  창 4:1,  48:19). 즉 척후병의 보고를 통하여 다윗은 사울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지금까지 쫓겨 도망하기에만 급급했던 상황과는 전혀 다른 상황으로, 오히려 이제 다윗은 사울의 생명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입장에 선 것이다. 이처럼 다윗은, 비록 전력에 있어서는 약자의 처지에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연고로 강자인 사울의 생명을 좌우할 수 있었다. 실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자는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

5 다윗이 일어나 사울이 진 친 곳에 이르러 사울과 넬의 아들 군사령관 아브넬이 머무는 곳을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에 누웠고 백성은 그를 둘러 진 쳤더라 

'넬의 아들...아브넬' '넬'은 사울의 숙부이다(10:14,  14:50, 51). 따라서 '아브넬'과 '사울'은 사촌 관계이다. '아브넬'은 골리앗과 싸워 이긴 다윗을 사울에게 데려갔었다(17:55-58). 그후 아브넬은 사울의 편에 서서 다윗을 죽이려 쫓아 다니는 위치가 되었다. 
그러다가 사울이 죽은 후에는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앉힌 다음, 자신은 실세(實勢)로서 위치하였다(삼하 2:8-11). 

그러나 아브넬은 사울의 첩 '리스바'와 통간한 사건으로 이스보셋과 관계가 악화되자(삼하 3:7-11), 이스보셋의 나라를 다윗에게 넘겨버리고 말았다(삼하 3:17-21). 그렇지만 아브넬은 전쟁의 와중에서 요압의 동생을 죽였던 연고로 인하여 결국 요압에게 억울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삼하 3, 27).

'사울이 진 가운데 누웠고' 여기의 '진'(마갈)은 '방책'(barricade)을 의미한다(17:20). 그런데 당시 이 '방책'은 병거 및 마차 등으로 이뤄졌을 것이다. 한편 사울이 이같은 위치에서 잠을 잔 가닭은 말할 나위도 없이 자신의 몸을 외부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백성은 그를 둘러 진 쳤더라' 이같은 언급은 앞의 '사울이 진 가운데 누웠고'란 언급과 함께 다윗의 용맹성을 강조, 시사하려는 저자의 의도를 반영해 준다. 즉 저자는 여기서 당시 사울이 소지하던 창과 물병을 바로 위와 같은 삼엄한 방어망을 뚫고 들어가서 가져갔던 다윗의 확신에 찬 영웅적 행동을(11, 12절) 부각시키려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백성'은 사울의 3천 병사를 의미한다(2절,  14:2,  수 8:1).

6 이에 다윗이 헷 사람 아히멜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에게 물어 이르되 누가 나와 더불어 진영에 내려가서 사울에게 이르겠느냐 하니 아비새가 이르되 내가 함께 가겠나이다

'헷 사람 아히멜렉' '헷 사람'(the Hittite)은 가나안 일곱 족속 중의 하나였다(수3:10). 이들은 아브라함 시대 때도 이미 팔레스틴 땅에 거주했었으며(창 15:23), 이스라엘의 출 애굽 후 이스라엘에 의하여 정복되었다(삿 1:6,  왕상 9:20). 바로 이같은 헷 조속으로서 다윗을 좇았던 또 다른 유력한 인물이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였다(23:39,  삼하 11장). 

한편 '아히멜렉'(Ahimelech)은 '왕의 형제'란 의미를 갖는 가나안식의 이름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름을 소유했던 제사장 '아히멜렉'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21:1). 그런데 헷 사람 '아히멜렉'이 다윗의 휘하에 들어오게 된 것은 그당시 이스라엘 임족과 함께 섞여 살던 '헷 족속'에 대하여 사울이 어떤 압박을 가했기 때문일 것이다(22:2).

'스루야의 아들...아비새' '스루야'(Zeruiah)는 그녀의 어머니가 다윗의 아버지 이새에게 시집오기 전 '나하스'라는 남자에게서 낳은 딸이다(삼하 17:25). 따라서 다윗의 이부(異父) 누이이다. 
한편 '아비새'(Abishai)는 '아버지가 계신다'란 의미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후에 비록 다윗의 용사 중 최상급인 '세 용사' 그룹에는 끼지 못했지만, 그 다음인 '삼십 용사' 그룹의 두령으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삼하 23:18, 19, 대상 11:20, 21).

'요압' 요압은 '여호와는 아버지이시다'라는 뜻이다. 이 사람은 다윗의 군대 장관이 되어 명실 공히 다윗의 제 1 무사(武士)로서 많은 공을 세웠다(삼하 5:6 이하,  8:16,  20:23,  대상 11:4 이하,  18:15,  27:34).

'누가...내려가서' 다윗의 일행이 사울의 일행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곳에 있었음을 보여 준다. 즉 그때 사울은 '길 가'(3절)에 있은 반면 다윗은 '산'(1절)에 있었다.

'아비새가 가로되 내가 함께 가겠나이다' 이것은 '아히멜렉'과 '아비새' 중 '아비새'가 더 용기있는 인물이었음을 말해 준다. 아무튼 본서와 사무엘하의 저자는 '아비새'에 대해서는 다윗을 도왔던 훌륭한 인물로서 계속 말하지만, 본절에서처럼 다윗의 요청에 묵묵부답 했던 '아히멜렉'에 대해서는 완전히 침묵한다. 
바로 이같은 사실은 아히멜렉이 성경의 무대에서 사라진 것이 그의 위와 같은 침묵과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시사해 준다. 여기서 우리는 '아히멜렉'이 '아비새'보다 먼저 먼저 언급되는 등 더 우위에 있었으나, 그 자신의 지나친 소심성 때문에 그 위치를 빼앗겼다는 사실을 주목해야만 할 것이다.

7 다윗과 아비새가 밤에 그 백성에게 나아가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 누워 자고 창은 머리 곁 땅에 꽂혀 있고 아브넬과 백성들은 그를 둘러 누웠는지라 

'창은 머리 곁 땅에 꽂혔고' 여기서 '창'은 '홀'(笏)과 같이, 사울의 왕권(王權)을 상징한다. 이같이 사울이 자신의 왕권을 상징하는 '창'을 자신의 머리맡에 꽂아 놓은 것은 (1) 왕으로서의 자신의 위엄을 높이며, (2) 또한 왕으로서의 자신이 잠자는 위치를 표시하기 위함이었다.
 
8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하니 

'하나님이...원수를...붙이셨나이다' 아비새의 이같은 판단은 다윗의 각오 여하에 따라서는 사울이 얼마든지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결과였다(24:4). 즉 그는 이같은 상황 전개를, 다윗으로 하여금 사울을 죽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절대적 섭리에 따른 것으로 본 것이다.

'단 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무방비 상태로 누워 자고 있는 사울에 대해서 이같이 하기는 매우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또한 사울의 부하들을 깨우지 않고 달아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단 번'에 죽여야 했을 것이다.

'그를 두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아비새의 이 말은 당시 사울이 완전 무방비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아마 사울을 비롯한 모든 군사들이 긴 출정으로 인하여 매우 피곤했던 관계로 모두 곯아떨어진 것 같다.

9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10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여기서 다윗은 사울을 친히 죽여 복수해서는 안될 이유를 제시한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그 첫째 이유이다. 즉 여호와께서 택하사 기름 부은 자는 여하한 경우일지라도 그 생명은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다. 그런고로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사람이 침해하면, 곧 그것은 여호와의 주권을 침해하고 모독한 결과가 된다. 
따라서 다윗은 이러한 원칙에 철저히 입각하여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인 사울의 생명을 하나님의 뜻에 맡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아니한 것은 단순히 다윗의 관대한 성품이다. 혹은 정치적 의도 때문이 아님은 분명하다.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아니한 두번째 이유이다(24:12). 즉 이 두번째 이유 역시 첫번재 이유와 마찬가지로 기름 부은 자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 주권 사상에 입각한 것이다. 곧 사람을 택하사 왕으로 기름부어 세운 분이 하나님이시듯, 또한 왕을 폐하고 죽이는 일 역시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역하에 속한 것이라는 사상이다. 다윗은 시종 일관 이러한 사상에 입각하여 사울을 대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사울을 전쟁터에서 블레셋 족속의 손에 붙이심으로써(31:3, 4), 다윗과 사울간에 당신의 주권적인 심판을 행사하셨다.

11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손을 들어...치는 것을...금하시나니' 사람이 그 원수에 대하여 친히 복수하는 일을 금하고, 그 모든 선악간의 판결을 공의의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것이 성경의 복수관(復讐觀)이다(신 32:35,  롬 12:19,  히 10:30). 그러므로 여기 무방비 상태의 사울을 단번에 처치하자는 아비새(8절)와, 하나님의 기름부은 자임을 들어 그것을 만류하는 다윗(9-11절) 사이에서 우리는 신앙의 차원을 느낀다. 즉 전자는 이성에 근거한 인간적 사고의 발로요, 후자는 신앙에 근거한 신본주의적 사고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만일 다윗이 아비새의 말대로 했다면, 나중에 그가 경험한 '선으로 악을 이기는 참된 승리'(21, 25절,  롬 12:21)를 거두지는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해소하는 조그마한 일로부터 원수 갚은 일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인도와 선한 판결을 바라는 자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참된 지혜와 판단력을 허락하신다(롬 12:19, 20).

'그의...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이것은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증할 증거를 삼기 위함이었다(24:4).

'머리 곁에 있는' 이것은 아비새의 말대로 다윗이 사울을 단칼에 죽일 수 있었던 사실을 강력히 시사하기 위한 언급이다. 왜냐하면 '머리'는 몸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서, 이 부분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곧 사울을 단번에 죽일 수 있었음을 가리키기 때문이다(8절).

12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아무도 보거나 눈치 채지 못하고 깨어 있는 사람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더라 

본절은 사울을 죽이지는 아니하고, 다만 그를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았다는 증거만을 남기려고 한 다윗의 계획을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돕고 계셨음을 보여 준다.

'여호와께서...깊이 잠들에 하셨으므로' 여기서 '깊은 잠'에 해당하는 '타르데마'란 단어는 아담의 몸에서 하와를 만들기 위한 갈비뼈를 빼어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은 잠에 빠뜨리시는 광경을 묘사하는 문맥에서 사용되었다(창 2:21). 
또한 이 단어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동물을 쪼개게 하신 후, 그와의 언약이 비준되었음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그를 깊이 잠들도록 하시는 장면을 다루고 있는 문맥에서도 나타난다(창 15:32). 바로 이같은 사실에서 볼 때, 사울과 그의 일행이 다윗의 접근을 전혀 인식치 못할 정도로 깊이 잠이 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임이 분명하다.

'그들이 다 잠이었더라' 사실 이때 다윗은 아비새의 말대로 여호와께서 사울을 자신의 손에 붙이신 것으로 해석하여 사울을 죽임으로써, 자신의 생명도 보존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좌에 오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러한 자신의 유익을 구하기에 앞서 기름 부음 받은 자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 주권 사상을 더욱 존중함으로써, 끝까지 모든 일의 판단을 하나님께 맡겼다. 하나님은 이처럼 당신의 주건을 인정하는 다윗을 기뻐하셨고, 결국 당신의 선하신 계획을 다윗을 위해 베푸셨다. 즉 다윗은'선으로 악을'이긴 것이다(롬 12:1).

13 이에 다윗이 건너편으로 가서 멀리 산꼭대기에 서니 거리가 멀더라 

'건너편...산꼭대기에 서니' 다윗과 아비새는 이때 계곡 하나를 건너 맞은편 언덕, 즉 하길라 산 정상으로 올라간 듯하다. 그리고 여기의 이 '산 꼭대기'는 사울의 동정을 살필 목적으로 '정탐꾼'(4절)이 정탐하던 곳이었을 것이다.

'거리가 멀더라' 다윗이 이처럼 사울로부터 먼 거리에서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을 깨우고, 또한 사울과 대화를 하려고(14-25절) 한 까닭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사울에게서 도망갈 안전 거리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다윗이 사울의 변덕스런 감정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4 다윗이 백성과 넬의 아들 아브넬을 대하여 외쳐 이르되 아브넬아 너는 대답하지 아니하느냐 하니 아브넬이 대답하여 이르되 왕을 부르는 너는 누구냐 하더라 

15 다윗이 아브넬에게 이르되 네가 용사가 아니냐 이스라엘 가운데에 너 같은 자가 누구냐 그러한데 네가 어찌하여 네 주 왕을 보호하지 아니하느냐 백성 가운데 한 사람이 네 주 왕을 죽이려고 들어갔었느니라 
16 네가 행한 이 일이 옳지 못하도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너희 주를 보호하지 아니하였으니 너희는 마땅히 죽을 자이니라 이제 왕의 창과 왕의 머리 곁에 있던 물병이 어디 있나 보라 하니 

여기서 다윗은 사울의 경호 책임을 맡고 있던 군대 장관 아브넬(14, 50)의 직무유기를 비난함으로써 (1) 사울로 하여금 그가 죽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처해 있었음을 절감케 하며, (2) 그리고 다윗 자기 자신은 사울을 죽일 의사가 전혀 없었고 또한 없을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

'아브넬아' '아브넬'(Abner)은 골리앗과 싸워 이긴 다윗을 사울에게 데려가는 등 이미 다윗과 친교가 있었다(17:55-58,  20:25). 더구나 '아브넬'은 사울과 사촌간이며(14:50, 51) 다윗은 사울의 사위였다는(18:27,  25:44) 점에서 본다면, 다윗과 아브넬이 상호 친분 관계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은 더욱 확실해 질 것이다.

'왕을 부르는 너는 누구냐' 
이 말은 여자적(如字的) 의미로 이해되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다윗은 사울이 아닌 아브넬을 불렀기 때문이다(14절). 따라서 우리는 이 말을, 다윗이 아브넬을 큰 소리로 불러 소란케 함으로써 잠자던 사울을 깨웠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네가 용사가 아니냐' 이것은 아브넬이 왕을 경호하는 그 자신의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조롱하는 말이다. 

'네 주...네 주' 여기서 '네 주'라는 말이 반복 기술된 것은 아브넬이 자신의 상전인 사울에 대한 경호 책임을 게을리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즉 아브넬은 자신의 '주' 사울을 보호해야 했어야만 했다.

'기름 부음 받은 너희 주를 보호하지 아니하였으니' 
다윗의 이 말은 진정 사울을 지키고 보호해 줄 자로서 아브넬보다 자신이 더욱 적격자라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따라서 자신은 사울을 해하고자 하는 의도는 추호도 없으며, 오해려 사울을 주(主)로 모시고 충성된 신하로서 지키고 보호해 줄 자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17 사울이 다윗의 음성을 알아 듣고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음성이냐 하는지라 다윗이 이르되 내 주 왕이여 내 음성이니이다 하고 

'사울이 다윗의 음성을 알아듣고' 이때는 캄캄한 밤 또는 동트기 전의 새벽녘이었을 것이므로, 사울은 음성을 통해서만 다윗이 자신과 가까운 곳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내 아들 다윗아' 사울의 이같은 반응은, 다윗이 자신을 충분히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았던 사실을 인식한 결과였다(24:16). 아마도 이때 변덕스런 사울은 다윗을 아브넬보다 더 나은 호위병으로(16:21) 생각했을 것이다.

18 또 이르되 내 주는 어찌하여 주의 종을 쫓으시나이까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손에 무슨 악이 있나이까 

'어찌하여...쫓으시나이까' 사울은 엔게디 동굴에서의 사건(24:2-7)으로 다윗과 화해를 했었다(24, 16-22). 바로 이같은 이유 때문에 사울이 자신을 또다시 추격하는 것은 다윗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19 원하건대 내 주 왕은 이제 종의 말을 들으소서 만일 왕을 충동시켜 나를 해하려 하는 이가 여호와시면 여호와께서는 제물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마는 만일 사람들이면 그들이 여호와 앞에 저주를 받으리니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너는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라 하고 오늘 나를 쫓아내어 여호와의 기업에 참여하지 못하게 함이니이다 하니라 

'이제 종의 말을 들으소서' 이같은 표현은 주로 악행을 선행으로 전환할 또 한번의 기회를 줄 때 사용되었다(15:1). 즉 사무엘은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치 않았던 사울에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할 기회를 주면서 이와 같은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언급된 다윗의 이 말은 최후 통첩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다윗의 이 최후통첩을 무시하고 또다시 다윗을 죽이려 했던 사울에게(27:1-4) 하나님께서 결국 엄중한 심판을 내리셨다는 사실이다(10절,  31:4-6).

'만일 왕을 격동시켜 나를 해하려 하는 이가 여호와시면'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만유(萬有)의 근원이 되신다는 사상(대상 29:11,  시 103:19)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선 뿐만 아니라 악도 주관하시는 분으로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징계하시기 위하여 사울을 격동시킬 수도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사울이 비록 다윗을 징계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됐다고 하더라도, 사울의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악이 나왔다고 함은 하나님께서 그 악을 교사했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악인이 그 소욕대로 저지르는 악을 묵허(黙許)했음을 의미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한 방편이며, 따라서 악한 행동 자체에 대한 책임은 항상 본인이 져야하는 것이다. 아무튼 다윗은 하나님께서 악한 자까지도 친히 주관하신다는 사상을 깊이 인식했기 때문에, 압살롬의 난을 피하여 도망을 가는 자신을 향하여 온갖 모욕적 언사를 아끼지 않았던 시므이도, 자신을 징계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으로 보고 그를 해하지 아니하였다(삼하 16, 10, 11).

'여호와께서는 제물을 받으시기를' 
다윗의 이 말에 대해서 학자들 간에 다양한 해석이 제시되었다. 
(1) 다윗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달게 죽겠다는 뜻, 
(2) 사울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제물을 바쳐주기를 원한다는 뜻 등이 있다. 

그런데 첫째, 여기의 '제물'(민하)은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기 위하여(창 8:21) 
그분 앞에서 태워지는 소제 제물의 향기를 가리키며 

둘째, 사울이 격동된 것이 하나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만일 '인자(人子)들'에 의한 것이라면 
다윗이 아닌 그들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본절의 언급에서 볼 때,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기 위하여 다윗 자신이 달게 죽겠다는 뜻의 (1)의 해석이 타당성이 있다.

'만일 인자들이면 그들이...저주를 받으리니' 
다윗은 엔게디 동굴 사건(24장) 직후에도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간신들의 중상 모략 때문이라고 말한바 있었다. 물론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가장 큰 동기는 악신(惡神)의 영향하에 있는 사울의 증오심과 적개심 때문이지만, 이와 더불어 사울 주변에는 베냐민 사람 구시(시 7편)와 같은 중상모리배들이 있어 그러한 사울의 증오심을 더욱 부추긴 것 같다. 24:9 주석 참조.

'이는(키)' 앞 부분의 이유를 설명해 주는 절(節)을 이끄는 접속사이다. 따라서 이 접속사 이하는 사울을 격동시킨 사람들이 저주를 받아야 될 이유를 말해준다.

'너는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라'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막이 있는 땅,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땅인 이스라엘 땅을 떠나서 이방신을 섬기는 이방인들과 함께 사는 것을 뜻한다. 물론 사울을 격동시킨 자들이 이같은 말을 직접, 구체적으로 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사울을 격동시켜 그로 하여금 다윗을 추격케 함은 곧 다윗에게 이스라엘 땅을 떠나서 살라고 하는 말과 동일한 것이다. 
그런데 다윗의 이같은 염려는 실제로 현실화되고 말았다. 즉 다윗은 사울로부터 다가오는 생명의 위협을 피하여 결국 이스라엘 땅을 떠나 블레셋 땅으로 들어가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만 것이다(27:1, 2).

20 그런즉 청하건대 여호와 앞에서 먼 이 곳에서 이제 나의 피가 땅에 흐르지 말게 하옵소서 이는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자와 같이 이스라엘 왕이 한 벼룩을 수색하러 나오셨음이니이다 

본절에서 다윗은 자신이 타국 땅으로 쫓겨 도망가 결국 이방 땅에서 객사하게 되는 그러한 비극이 없게 해달라고 사울에게 간청한다. 그러면서 다윗은 만일 자신이 타국땅으로 도망간다면 그것은 사울이 자신을 죽이고자 쫓기 때문이라고 진술한다.

'여호와 앞' 이 말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막이 있으며, 따라서 그분께 제사와 경배를 드릴 수 있는 장소 곧 '이스라엘 땅'을 뜻한다. 물론 하나님이 온 세상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것이 사실이지만, 특별히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땅만을 특별한 약속의 땅으로 지정하셨음도 사실이었다(신 12, 5). 그래서 모압 출신의 룻은 자신의 고향 모압 땅을 떠나 유다의 베들레헴으로 들어가면서 '여호와의 날개' 아래로 들어간다고 말하였다(룻 2:12).

'나의 피로...흐르지 말게 하옵소서' 다윗은 이 말을 자신이 타국 땅으로 쫓겨가게될 경우 나타날 결과로서 말한다. 따라서 다윗은 그러한 비극적인 결과가 나타나지 않도록 사울로 하여금 자신을 추격하는 일을 중지해 줄 것을 호소한다. 아울러 다윗은 여기의 이 언급을 통하여 만일 자신이 사울에게 쫓겨 이방 땅에서 죽게 될 경우 사울은 다윗 자신의 그 피에 대하여 결코 무관치 않으며, 그러므로 사울은 하나님께로부터 그에 합당한 보수를 받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즉, 만일 다윗 자신이 이방 땅으로 도망가 그곳 우상의 땅에서 죽게 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사울의 추격으로 말미암은 것이므로 사울은 다윗 자신의 피를 흘리게 한 장본인이 되며, 그럴 경우 아벧로 하여금 피를 흘리게 했던 가인처럼(창 4:10) 사울 역시 하나님의 징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자와 같이' 이것은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추격하는 사울의 행동이 매우 어리석은 일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메추라기'는 '산'이 아닌 광야에 많기 때문이다(출 16:13, 14,  민 11:31). 따라서 메추라기를 사냥하기 위해서는 메추라기가 떼지어 다니는 광야의 들로 나가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그러나 사울은 어쩌다 산에 한 마리있는 메추라기를 잡으려고 설치는 사냥꾼 같이 무가치하고 어리석은 일을 지금 하고 있다는 의미이다(Winer). 아무튼 우리는 이 비유의 초점이 다윗을 추격하는 사울의 행위가 매우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일임을 지적하는 데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 왕이 한 벼룩을 수색하려' 여기서 다윗은 '이스라엘 왕'과 '벼룩'을 대조시키고 있다. 이같은 대조를 통하여 다윗은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 하는 일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얼마나 어리석으며, 또한 얼마나 무가치한 일인지를 역설한다. 24, 14주석 참조.

21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하게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 하는지라 

본절에서 사울은 다윗의 호소(18-20절)에 전적 수긍한다. 그리고 자신의 행위를 반성한다. 즉 다윗을 죽이기 위해 추격한 자신의 행위를 (1) '범죄'로 (2) '어리석은 일'로 (3) '대단히 잘못된 일'로 고백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단순히 다윗을 자신보다 의롭다고 여긴 엔게디 동굴에서의 사건 직후 때(24:17) 보다 훨씬 고무적이라 할수 있다. 
그러나 사울의 이같은 태도 역시 진정한 회개라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사울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다시 다윗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다(27:1). 실로 참된 회개란 단순한 후회 또는 반성의 차원을 넘어 마음 중심으로부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지한 죄의 고백과 더불어 더이상 과거의 범죄나 실수를 범하지 않는, 새로운 삶의 전인격적 변화요 결단이어야 한다.

'돌아오라' 옛 직책으로의 복귀를 가리킨다(18:13, 30). 또한 이것은 이방 땅으로 도망갈 필요도 없음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다(19, 20절).

22 다윗이 대답하여 이르되 왕은 창을 보소서 한 소년을 보내어 가져가게 하소서 

'왕은 창을 보소서...가져 가게 하소서' 본절에서 다윗은 사울로부터 자신이 가져온 '창'과 '물병'중(12절) 다만 '창'만을 언급하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왕권을 상징하는 창에 비하면 '물병'은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덜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여기서 '물병'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그때 다윗이 창과 아울러 물병까지 사울에게 넘겨주었을 것은 당연하다.

23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그의 공의와 신실을 따라 갚으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내 손에 넘기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24 오늘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 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하니라 

'여호와께서...갚으시리니' 엔게디 동굴 사건(24장) 직후 모든 일에 대해 여호와께서 심판해 주실 것을 다윗이 간구한 것처럼(24:15), 여기서도 다윗은 사울에 대하여 공의로운 처신을 한 자신에게는 상급이 있고, 다윗 자신에게 불의를 행한 사울에게는 상급이 있고, 다윗 자신에게 불의를 행한 사울에게는 징벌이 있을 것이라는 뜻의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다윗의 이 말은 혹자들의 주장처럼 결코 자화자찬(自畵自讚)의 말은 아니다. 다윗의 이 말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순수하고 선한 양심의 선언이요, 또한 공의와 진리의 하나님을 전적 의뢰하는 믿음의 고백인 것이다(Keil).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이 말은 사울의 반성과 태도 전환에도 불구하고(21절), 다윗이 사울로 인하여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음을 암시해 준다. 왜냐하면 여기의 '환난'은 말할 나위없이 사울의 살의에 따른 다윗 자신의 정처없는 위험한 방랑 생활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25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대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하니라 다윗은 자기 길로 가고 사울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사울의 이말은 구체적으로는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가리킨다(24:20). 물론 이것은 다윗이 왕이 된 후에 훌륭한 업적을 남길 것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사울의 이 말 역시 엔게디 동굴 사건(24장) 직후의 말(24:20)과 연관시켜 생각해 볼 때, 다윗이 사울 자신을 포함한 모든 대적들을 꺾고 이스라엘의 왕위를 오를 것을 가리킨다(20, 15, 16).

'다윗은...사울은...돌아가니라' 이 표현은 성경에서 이별의 장면을 묘사할 대 사용되는 전형적 방식이다(24:23,  민 24:25). 그러나 특별히 여기서의 이 표현은 사울과 다윗이 아직껏 화해하지 못한 사실을 암시해 준다. 즉 "사울과 다윗의 마음은 하나되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은 각기 자기 길을 따라 따로 가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