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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27장 절별 해석 및 주석

LNCK 2023. 3. 26. 15:40

◈삼상27장 절별 해석 및 주석
 
1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영토 내에서 다시 나를 찾다가 단념하리니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망하리니' 
본절과 같은 다윗의 생각과 판단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사실 사울은 다윗을 해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굳게 맹세하고서도(24:16-22) 그 약속을 스스로 뒤엎는 등, 다윗으로서는 도저히 사울을 믿을 수 없는 짓을 저질렀었다. 
따라서 다시는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했던 십(Ziph) 진(陳) 사건(26:6-12) 직후의 사울의 약속(26, 21, 25) 또한 다윗으로서는 믿을 수 없었다. 더구나 사울의 주변에는 사우로 하여금 다윗을 죽이도록 부추기는 인물들이 있었으며(24:9,  26:19),

특히 다윗의 은신처 주변에는 다윗의 행동을 밀고하는 '십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23:19,  24:1,  26:1). 따라서 600명의 군사와 그에 딸린 남녀 가족들을 거느린 다윗으로서는 언제까지나 불안정한 도피 생활을 할 수가 없었기에, 당시 사울의 추격권으로부터 가장 안전한 '블레셋으로의 도피'를 결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것은 가드 왕 아기스 앞으로 도피한 것에 이어, 블레셋으로 두 번째 도피이다)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 당시 다윗이 자신에게 우호적인 모압(22, 3, 4) 보다 블레셋으로의 도피를 상책으로 생각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자신과 600명의 군사 및 그에 딸린 가족들의 보다 안전한 도피 생활을 위해서는 당시 이스라엘보다 약소국인 모압 보다는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블레셋이 더좋다고 판단되었으며, 
(2) 또한 블레셋이 모압보다 이스라엘과 더 인접한 곳에 블레셋이 모압보다 이스라엘과 더 인접한 곳에 있는 관계로, 유사시의 사건에 대비하는데 더 좋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이방의 땅인 '블레셋 족속의 땅으로 들어 가는 것'은 다윗이 최악의 경우 취하려고 했던 선택이었다(26:19, 20).

'사울이...수색하다가 절망하리니' 바로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다윗은 블레셋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려고 했다. 따라서 그때 다윗은 블레셋 땅에서 오래 머물 생각은 전혀 없었음이 분명하다.

2 다윗이 일어나 함께 있는 사람 육백 명과 더불어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일어나(야캄)' 성경 용례상 이 표현은 종종 결정적인 그리고 중대한 의지적 결단이 이루어지는 문맥에서 사용되는 단어이다.

'함께 있는 육백 인' 다윗의 휘하 추종 병력으로, 여기의 이 숫자는 앞에서와 동일할(23, 13,  25:13). 한편, 600명이란 숫자는 분명 20세 이상으로 싸움에 출전할 만한 성인 남자들만을 계수한 수효일 것이다(민 1:3). 따라서 600명의 병력에 딸린 가족들의 수효까지 모두 계산하면, 다윗이 거느린 일행의 총수효는 대략 2,500~3,000명 가량 되었을 것이다.

'가드 왕...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비록 블레셋은 이스라엘과는 적대국이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에게 막대한 타격을 가했던 사울 왕에 대해서 특별히 강한 증오심을 가졌던 관계로, 당시 사울의 강력한 경쟁 상대이자 증오의 대상인 다윗에 대해서는 오히려 호감을 가졌던 것이다. 바로 이같은 사실을 기대하고 다윗은 블레셋 땅으로 도피해 들어간 것이다. 

한편 여기서 '가드'(Gath)는 블레셋의 중요한 도시 중의 하나로서(5:8,  수 11:22,  13:3 주석 참조), 그 위치는 당시 다윗과 그의 일행이 피신하고 있던 '십 황무지'에서 북서쪽으로 약 37km 지점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가드 왕'은 블레셋의 5대 방백 중의 한 사람임이 분명하다(5:8). 
그런데 이때 다윗이, 전에 '아기스'로 부터 도망나온 일이 있었으면서도(21:10-22:1) 다시 그에게로 도피한 이유는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즉 (1)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나갔으며, (2) 다윗이 아기스의 대적인 사울로부터 계속해서 핍박을 받고 있었음이 그에게까지 틀림없이 알려졌을 것이며, (3) 또한 아기스는 다윗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치, 군사적 세력을 확충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옥의 아들' 여기서 '마옥'(Maoch)은 왕상 2:39에 나타나는 '마아가'(Maachah)와 동일한 인물인 듯하다. 그렇다면 아기스가 솔로몬이 즉위한 직후까지 블레셋의 가드왕으로서 계속 살아 있었겠느냐 하는 점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아기스가 다윗의 즉위(B.C. 1010년) 직전부터 솔로몬의 즉위(B.C. 970년)직후까지 약 50여년간 왕위에 있었다면 이 문제는 넉넉히 해결될 수 있다.

3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저마다 가족을 거느리고 가드에서 아기스와 동거하였는데 다윗이 그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자 아히노암과 나발의 아내였던 갈멜 여자 아비가일과 함께 하였더니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각기 가족을 거느리고' 이것은 단지 몇명의 부하만을 데리고 블레셋 땅에 들어갔던 21장의 경우와는 완전히 상이하다.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이 이처럼 가족까지 모두 데리고 블레셋으로 간 것은 가족들의 안전과 정착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아히노암...아비가일' 다윗의 최초 아내는 사울의 딸 '미갈'이었으나, 그녀는 사울에 의해 다른 남자에게 다시 시집보내졌기 때문에 다윗 아내의 명단 중에서 빠져있다(25:44).

4 다윗이 가드에 도망한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매 사울이 다시는 그를 수색하지 아니하니라 

'사울이...수색하지 아니하니라' 본절의 내용은 다윗이 블레셋으로 도망가기 직전에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11절).

<다윗의 도피 생활> 
'엔겐디' 동굴 사건 후 사울과 일시 화해한 다윗은 
사무엘 사후 또다시 위험을 느끼고 '바란 광야'로 내려갔다. 거기서 아비가일을 얻고,

이후 다윗은 다시 '십 황무지'로 돌아왔으나, 
십 사람들의 밀고 행위로 다시금 사울의 추격을 당한다. 
그러나 십 진중 사건으로 다윗은 두 번째 사울의 목숨을 해할 기회가 있었으나 
다윗은 사울을 해하지 않았다. 

이에 사울은 자신의 잘못을 반성했으나, 
다윗은 더이상 사울의 변덕스런 마음을 신뢰할 수 없어, 
결국 블레셋 땅 '가드'의 아기스 왕에게로 도피한다. 

그리고 아기스 왕으로부터 '시글락'을 얻어 
그곳에서 1년 4개월 동안 정착 생활을 하게 된다. 

이후 다윗의 목숨을 채던 사울은 길보아 전투에서 전사하게 되고, 
다윗은 오랜 도피 생활을 마감하고 조국 땅으로 들어오게 된다(24:1-27:12).

5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바라건대 내가 당신께 은혜를 입었다면 지방 성읍 가운데 한 곳을 내게 주어 내가 살게 하소서 당신의 종이 어찌 당신과 함께 왕도에 살리이까 하니 

결국 다윗이 '아기스'와 용병(傭兵) 관계를 형성한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즉 다윗은 아기스와 용병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그에게 적절한 요구를 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아기스는 다윗과 바로 이같은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자신의 정치, 군사적 세력을 확장하려고 했을 것이다.

'당신의 종이 어찌...왕도에 거하리이까' 
당시 다윗의 군사가 약 육백 명이었다면(2절). 그의 가족까지의 숫자를 모두 합칠 경우 거의 삼천 명은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많은 숫자는 '왕도'(王都) 가드의 시민들과 갈등을 일으킬 소지가 항상 있었다. 바로 이같은 점을 내세워서 다윗은 왕도 '가드'를 떠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윗이 가드를 떠나려고 했던 표면적 이유에 불과하였다. 즉 다윗이 지방 성읍의 독립된 거주지를 요구한 진정한 이유는 (1) 우상 숭배가 성행하던 가드에서 가주할 경우 자신의 백성들이 이교적(異敎的) 혼합주의에 빠져들 우려가 충분히 있었고(5:8, 9,  26:19), (2) 다윗이 아기스의 궁전에 자주 출입할 경우 아기스의 신하들에게 시기의 대상이 될 우려가 또한 있었으며(21:11,  29:4, 5), (3) 그리고 다윗이 가드를 떠날 경우 아기스의 정치적 영향권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이점 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6 아기스가 그 날에 시글락을 그에게 주었으므로 시글락이 오늘까지 유다 왕에게 속하니라 

'아기스가 그 날에 시글락을...주었으므로' 아기스 왕에 대한 다윗의 간청이 즉각적으로 받아들여졌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곧 아기스가 다윗과 자신을 호혜적(互惠的) 관계로 인식하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가드 왕 아기스가 망명객 다윗을 영접하고 그에게 식읍(食邑)으로서 '시글락'을 수여하는 등 다윗을 환대한 것은, 사울과 분명한 적대 관계에 있는 다윗과 그의 무리들을 자신의 신복(臣僕) 내지는 용병(傭兵)으로 포섭하여 자신의 군사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12절). 

한편 여기 '시글락'은 가나안 정복 후 원래 유다 지파에게 할당되었다가(수 15:31), 그후 다시 시므온 지파에게로 넘어간 성읍이었다(수 19:5,  대상 4:30). 그러나 시므온 지파는 사사시대에 그 땅을 블레셋에게 다시 빼앗겼던 것 같고, 그 이후 그 성읍에는 사람이 거주치 않은 것 같다. 
그 위치는 가사(Gaza) 동남쪽 약 24km 지점으로, 그때 다윗이 머물고 있었던 가드(Gath) 남서쪽 약 40km 지점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같은 가드로부터의 먼 거리는 가드를 떠나려고 했던 다윗의 진정한 목적(5절 주석 참조)을 넉넉히 충족시켜 줄만 했을 것이다. 
더욱이 이같은 다윗의 목적과는 달리 아기스는 아기스대로 다윗을 그곳에 주둔시킴으로써, 자신의 영토의 남쪽 변경을 다른 민족들이 공격해 들어오지 못하게 방어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시글락이...유다 왕에게 속하니라' 
여기의 '왕'(말키)은 복수(plural)이다. 따라서 '유다 왕'은, 정확히 하자면 '유다 왕들'이란 의미이다. 그런데 이 '유다 왕들'이란 표현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들'에 대한 상대적 개념이다. 
그렇다면 이 사실은 본서가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할된 후(B.C. 930년)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강력히 시사한다. 
아울러 본서 전체를 면밀히 고찰할 때 본서에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B.C. 722년)에 대한 암시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러 보수주의 학자들은 본서(사무엘서)의 저작 시기를 분열 왕국 직후(B.C. 930년)로 부터 북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B.C. 722년)사이의 어간으로 본다.

'오늘까지' 즉 본서가 기록된 때까지를 가리킨다.

7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산 날 수는 일 년 사 개월이었더라 

'블레셋 사람의 지방' 여기서 '지방'(사데)은 사람이 별로 살지 않는 '빈들'을 언급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6:1,  창 2, 5,  왕상 11:29). 따라서 이것은 다윗의 독립된 거주지 시글락이 변방에 위치했음을 시사해 준다.

'거한 날 수는 일 년 넉달' 
여기서 '일 년'(야밈)은 문자적으로는 '날들'(days)이란 의미이다. 이같은 사실로 인하여 요세푸스와 칠십인 역은 다만 '넉 달'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여기의 '야밈'은 (1) 성경에서 '매년'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며(1:3,  2:19), (2) 또한 '일 년'을 뜻하는 관용적 표현이라는 점에서(삿17:10, 삼하14:26), 개역 성경의 번역대로 '일 년'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한편 다윗은 바로 이 기간이 지난 후 헤브론으로 돌아가 유다의 왕으로 기름 부음 받았다(삼하 2:1-4).

8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올라가서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침노하였으니 그들은 옛적부터 술과 애굽 땅으로 지나가는 지방의 주민이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올라가서' 여기서 '올라가서'(알라)는 보통 저지대에서 고지대로 오르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이는 당시 다윗이 침노한 족속들이 시글락보다 고지대인 바란 광야의 북동쪽 산악 지대에 거주했음을 시사한다. 
또한 이 표현은 성전(聖戰)에 있어서 이스라엘 군대가 이방의 군대를 공격하는 것을 가리킬 때에도 사용되는 단어이다(수 4:19,  6:5,  8:11). 따라서 본서 저자는 여기서 이같은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다윗이 비록 타국 땅에 도망나가 있기는 했지만, 그는 거기서도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온갖 애를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강력히 시사한다.

'아말렉 사람' 이 종족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15:2 주석을 참조하라. 이 아말렉 족속은 일찍이 사울의 군대에 의하여 심각한 타격을 받았지만(15:7,8), 오랜 세월의 지난 그 당시 아말렉 족속은 다시 자신들의 세력을 규합한 듯하다. 그래서 이들은 다시 이스라엘과 블레셋 모두에게 심각한 골칫거리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옛적부터...지방의 거민이라' 원문에는 본 구절의 앞 부분에 '왜냐하면'이란 의미를 갖는 접속사 '키'가 있다. 그러므로 본 구절은, 다윗이 앞에 언급된 세 민족을 침한 까닭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바로 이같은 측면에서 본 구절을 해석해야 하는데, 우선 본 구절을 히브리 원문에 따라 '왜냐하면 그들은 옛날로부터 그 땅의 거민이었기 때문이다'로 바로 번역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이 말은 곧 그 땅의 거민들이 항상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혀왔다는 사실과 연관시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즉 다윗은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혀왔고 또한 괴롭히고 있는 민족이기 때문에 그들을 공격했던 것이다.

'술과 애굽땅으로 지나가는' 이것은 다윗이 공격했던 그 땅이 과연 어떤 땅인가를 설명해 주는 구절로 볼 수 있다. 우선 본 구절은 히브리 본문에 보다 가깝게 '너희가 애굽과 술로 들어갔을 때의'로 번역할 수 있다. 즉 본서의 저자는, 15:7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아말렉 족속을 쳤던 영역에 대하여 '애굽 앞 술에 이르기까지'라고 언급한것을 염두에 두고 본 구절을 쓴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본 저자는 '그 땅'을 하나님의 군대로부터 엄중한 징벌을 받아야 하는 땅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15:1-3) 결국 본 구절은 앞에 언급된 세 민족에 대한 다윗의 침공이 하나님의 뜻과 합치되는 정당한 것이었음을 입증해 주는 언급이라 할 수 있다.

9 다윗이 그 땅을 쳐서 남녀를 살려두지 아니하고 양과 소와 나귀와 낙타와 의복을 빼앗아 가지고 돌아와 아기스에게 이르매 

'다윗이...남녀를 살려두지 아니하고' 다윗의 이같은 행위는 결코 종교적 목적에 따른 행동이 아니었다. 이같이 볼 수 있는 근거는 (1)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그들을 '진멸하라'(아헤라메템)는 명령을 내리지 아니하셨다는 사실, (2) 본문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혹시 '진멸하라'는 명령이 있었다면, 그 거민들에게 속했던 모든 가축 등의 재산도 동시에 진멸해야 했으나 다윗은 그것들을 진멸치 않았다는 사실, (3) 본서의 저자는 다윗의 이같은 행위를 비밀 유지의 목적상 그렇게 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11절) 등이다.

'양...소...나귀...약대...의복을 취하고' 사실 이처럼 노획물을 획득하는 것이, 다윗이 이스라엘 남방의 세 민족을 공격했던 주된 목적이었다. 즉 다윗은 이러한 노획물로써 (1) 자신에게 딸린 많은 식솔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했으며, (2) 또한 생활이 어려운 유대 사람들도 도와야 했던 것이다(30:26-30).

'돌아와서 아기스에게 이르매' 다윗이 자신의 본거지 시글락(6절)이 아닌 왕도(王都) 가드로 향한 것을 가리킨다. 다윗이 이같이 한 까닭은 아기스에게 약탈물의 일부를 바침으로써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함인 듯하다.

10 아기스가 이르되 너희가 오늘은 누구를 침노하였느냐 하니 다윗이 이르되 유다 네겝과 여라무엘 사람의 네겝과 겐 사람의 네겝이니이다 하였더라 

'오늘은 누구를 침노하였느냐' 아기스는 자신에게 바쳐진 전리품을 보고 이같은 질문을 하였을 것이다. 한편 여기서 '오늘'은 그 당일에 이스라엘이 남방에 거주하는 민족들에 대한 침공이 행해졌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이번에'란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또한 '침노하였느냐'(파솨트)는 '벗기다', '강탈하다'란 의미로서, 주로 전리품의 탈취를 목적으로 한 노략과 공격 행위를 가리킨다(8절,  30:1,  31:8,  겔 16:39).

'유다 남방...여라무엘 사람의 남방...겐 사람의 남방' 이같은 다윗의 대답은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기서 지극히 애매한 답변을 함으로써, 자신이 아말렉 등을 약탈한 사실을 감추려고 한다. 한편 여기서 '유다 남방'은 브엘세바의 인근 지역을 가리킨다(8:2,  삼하 24:7). 그리고 '여라무엘 사람의 남방'은 유다의 남쪽 변방 지역을 가리킨다(30:29). 
여기서 '여라므엘'(Jerahmeel)은 '하나님이시여 자비를 베푸소서'란 의미인데, 이 사람은 유다의 손자이자 베레스의 아들인 헤스론의 장자이다(대상 2:3, 5, 9). 다라서 '여라므엘 사람'(Jerahmeel)은 이 '여라므엘'의 후손들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또한 '겐 사람의 남방'은 '아말렉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지역과 인접한 곳을 가리킨다. 이전에 사울은 아말렉 족속을 치려고 하면서 겐 사람들도 피해를 입을까 염려하여, '겐 사람'(Kenites)들을 대피시켰던 일이 있었다(15:6주석 참조). 
아무튼 여기서 다윗이 아기스의 질문에 실제로 그가 침노한 그술, 기르스, 아말렉 족속(8절) 대신 유다, 여라무엘, 겐 족속이라고 답변한 이유는 다윗이 유다와 그 동맹을 맺고 있던 성읍들을 공격한 것처럼 아기스에게 믿도록 함으로써 아기스의 신임을 더욱 얻고자 했기 때문이다. 

 

한편 당시 다윗이 유다를 약탈하던 이방 종족들을 공격한 것은 잘한 일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사실에 대하여 쉽사리 은폐. 거짓말을 한 것은 당시 이방 땅에 머물러 있었던 다윗의 신앙이 연약한 상태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이다. 즉 다윗의 답변은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려는 인간적 기지(機智)에서 나온 말로,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서는 선(善)이 되지 못한다. 이처럼 시글락 정착 시절에는 다윗의 신앙 상태가 연약해졌는데, 
이는 블레셋의 시글락 정착 1년 4개월 동안(7절) 다윗이 지은 시편이 하나도 없다는 데에서도 입증된다. 즉 당시는 다윗에게 기도와 찬양이 메마른 때였다.

11 다윗이 그 남녀를 살려서 가드로 데려가지 아니한 것은 그의 생각에 그들이 우리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다윗이 행한 일이 이러하니라 하여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거주하는 동안에 이같이 행하는 습관이 있었다 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본절은 다윗이 그술, 기르스, 아말렉 족속 등을 공격하면서 그곳 거민들을 남녀 불문하고 몰살시킨 분명한 이유를 제시해 준다.

'그 남녀를 살려 가드로 데려가지' 이것은 패전국의 주민을 노예로 붙잡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같은 일은 고대 전쟁에 있어서는 보편적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이같은 관습을 따르지 아니하고 모두 죽여버린 것이다.

'이같이 행하는 습관이 있다 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당시 다윗은 그술, 기르스, 아말렉 등의 남방 족속들에게 자신이 행한 침노 행위가 가드 왕 아기스에게 보고될 것을 두려워 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족속들은 주로 이스라엘을 괴롭힌 민족들로서 블레셋으로서는 하등 공격할 이유가 없는 족속들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윗의 행위는 블레셋의 입장에서는 이적(利敵)행위가 되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다윗을 시기하던 아기스의 신하들은 다윗에 의하여 끌려왔을 노예들로부터 전해들은 다윗의 행적을 과장하고 악평하여 보고할 가능성이 많았으며, 또한 끌려왔을 노예들도 다윗에 대하여 앙심을 품은 나머지 다윗의 행적을 과장해서 떠들 것이 분명했다. 
아무튼 다윗의 행적이 사실 그대로 아기스에게 알려지면 그 사실이 과장됐든지 안됐든지 간에, 아기스는 다윗의 그같은 이적적(利敵的)인 공격 행위로 인하여 다윗을 의심하고 또한 경계하기 시작할 것이 뻔하였기 때문에, 다윗은 바로 이 점을 사전에 방지코자 한 것이다.

12 아기스가 다윗을 믿고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심히 미움을 받게 되었으니 그는 영원히 내 부하가 되리라고 생각하니라 

'아기스가 다윗을 믿고' 이것은 유다 남방 족속들을 공격했다는 다윗의 답변에 '아기스'가 완전히 속아 넘어갔음을 뜻한다(10절). 따라서 아기스는 이제 다윗에 대해 가졌던 일말의 의구심과 경계심까지 풀기 시작한 것이다.

'다윗이...이스라엘에게...미움을 받게 하였으니' 다윗이 자신의 조국 이스라엘 및 그 동맹. 우호, 종속 성읍들을 침공 몰살시킴으로써, 스스로 그들로부터 증오의 대상이되었다는 뜻이다. 
이같은 아기스의 착각은 그가 다윗의 답변(10절)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였음을 반영해 준다.

'영영히 내 사역자가 되리라' 아기스는 동족을 무자비하게 친 다윗의 행위는 반드시 동족 유대의 증오의 대상이 될 것이고, 따라서 다윗은 더이상 조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몸이 되어, 이제 평생토록 자신의 심복 노릇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한편 여기서 '사역자'(에베드)는 '종', '신하'란 의미인데, 전에 '아기스'가 다윗을 이스라엘의 한 '왕'으로(21:11, 12) 본 것과는 많이 대조된다. 즉 이같은 다윗에 대한 아기스의 인식의 전환은, 아기스가 다윗에 대해 품었던 경계심을 이제 더이상 갖고 있지 않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아무튼 이때 '아기스'는 다윗이 그 자신의 동족을 침노하여 몰살시킨 일로, 다시는 조국 유대 땅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으로 오판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