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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31장 절별 해석 및 주석

LNCK 2023. 3. 26. 20:05

◈삼상31장 절별 해석 및 주석

1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여 길보아 산에서 엎드러져 죽으니라
2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과 그의 아들들을 추격하여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니라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니라' 길보아 전투에서 전사한 사울의 세 아들의 이름은 역대상 10:2과도 일치한다. 따라서 여기의 '아비나답'은 14:49의 '리스위'와 동일 인물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대상 8:33, 9:39에 언급된 사울의 네 아들 중 네번째의 '에스바알'은 사울 사후(死後) 아브넬에 의해 잠정적으로 사울의 후계자로서 옹립되었던 '이스보셋'이다<삼하 2:8>.

한편, 우리는 여기서 특별히 다윗을 생명같이 사랑한(18:1)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실로 요나단은
(1) 사울의 아들이었으나 질투와 시기의 화신이었던 사울과는(18:29) 대조적으로 참 사랑과 우정을 나눌 줄 아는 자였으며(18:1-4:20:17),
(2) 매우 지혜롭고 용감한 군인이었고(14:6-14),
(3) 훌륭한 신앙 인격을 갖춘 의인이었으며(19:1, 20:30-42),
(4) 왕위에 집착하지 않는 겸손의 인물이었다(18:4, 23:17).

그러한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패역한 사울과 운명을 같이한 사실은 다음의 교훈들을 준다.
(1)부친의 사악한 죄 때문에 그 자손들이 고난을 당하게 된다(겔 18:2).
(2) 의인의 소망과 생명은 이 세상에 국한되지 않고 오는 세상의 참되고 영원한 삶에 있다(잠 14:32).
(3) 사악한 부친의 곁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운명을 함께 한 효성이 아름답다.

3 사울이 패전하매 활 쏘는 자가 따라잡으니 사울이 그 활 쏘는 자에게 중상을 입은지라

'사울이 패전하매' 이것은 문자적으로 '그 전쟁이 사울에게 무겁게 되었다'란 뜻이다(왕상 12:10, 대하 10:14, 애 3:7). 이것은 결국 (1) 전황(戰況)이 지극히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 (2) 불리한 전화으로 인하여 극도로 낙심하게 되는 것 등을 말한다.

'중상을 입은지라(야헬 메오드)' 이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1) '야헬'을 '고통하다' 혹은 '근심하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 '훌'에서 온 것으로 보고, '매우 떨었다'로 해석하는 견해
(2) '야헬'을 '다치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 '할랄'에서 온 것으로 보고, 개역 성경의 번역처럼 '매우 많이 다쳤다'로 해석하는 견해 등이다.

그런데 본 단어 '야헬'은 신명기 2:25에서는 '근심하니라'로 번역되었으며, 또 그렇게 번역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위의 두 견해 중 (1)의 견해가 타당하다.

그러나 위의 견해 중 (2)의 것이 맞다고 보는 학자들은,
사울의 죽음을 다윗에게 알린 아말렉 소년의 증언 때문에 그같은 판단을 하는 듯하다.
즉 그 아말렉 소년은, 사울이 '엎드러진 후에는 살 수 없는 줄을 알고'
사울을 죽였다고 말했던 것이다(삼하 1:10).

그러나 그 아말렉 소년의 증언은 본장의 언급 및 대상10:1-6의 언급과는 전반적으로 상층되는 위증(僞證)임이 분명하다(삼하 1:1-10).
한편 여기와 병행 구절인 대상 10:3에서는 그 단어가 위의 (1)의 견해와 유사하게 '다급하여'로 번역되어 있다.

4 그가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무기를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감히 행하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의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러지매

'할례 없는 자들' 이 말은 할례의 징표를 받은 아브라함의 후손(창 17:9-14)이라는 선민 사상에 근거한 말로, 곧 이방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과는 달리 여호와 하나님과 계약 관계하에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조롱하는 말이다(14:6, 17:26,36).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이 말은 사울을 죽인 후에 그 시체를 욕되게 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이 말은 남에게 가혹한 잔악 행위를 가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곧 블레셋이 이전에 삼손을 사로잡아 그를 욕보였던 것처럼(삿 16:21-27), 블레셋 군대가 사울을 사로잡아 학대하고 욕보이는 행위를 가리킨다(삿 19:25). 그러므로 사울은 그들이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하는 것을 기피하여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다.

'병기 든 자가 두려워하여 행치 아니하는지라' 병기 든 자의 이같은 처신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즉 (1) 자신은 왕의 생명을 끝까지 보호하는 책임을 맡은 자로서, 기회를 봐서 어떻게 해서는지 그 긴박한 상황(3절)에서 벗어나야만 한다고 생각했으며, (2)사울에 대하여 다윗이 가졌던 생각처럼(24:6) 기름 부은 바된 왕에게 감히 칼을 댈 수 없다고 판단한 결과였을 것이다.

'이에 사울이 자기 칼을 취하고 그 위에 엎드러지매' 칼 끝을 위로 하여 칼을 세운 후 그 위에 자신의 몸을 덮친 행위를 말한다. 한편 생명에 대한 주권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고 믿는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자살은 결코 흔치 않았으나, 여기 사울의 자살 행위는 그의 비극적인 종말을 더욱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

5 무기를 든 자가 사울이 죽음을 보고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

'무기 든 자...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함께 죽으니라' 병기든 자의 이같은 행동은 (1) 자신이 모시던 상전의 뒤를 따라야 한다는 소박한 충성심, (2) 자신의 주인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고 자살토록 방치한 혐의로 인하여 비록 자신이 살아난다고 하더라도 처형을 변치 못할 것이라는 염려(삼하 1:14, 15), (3) 사울의 생각처럼 '할례 없는 자'에 의해서는 죽음을 당하지 않겠다는 히브리적 종교심등의 이유로 이뤄졌을 것이다. 후일 유대 전승은, 여기서 사울의 병기 든 자는 에돔사람 도엑이며, 그가 자살한 칼은 놉 제사장들은 쳐죽인 바로 그 칼이라고 하나(22:18), 그러한 전승의 신빙성은 없다.

6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무기를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날에 함께 죽었더라

'그의 모든 사람' 역대상 10:6에서는 '그 온 집'으로 말한다. 그러나 여기의 '그의 모든 사람'은 이 어구 앞에 '역시' 혹은 '또한'이란 의미를 갖는 '감'이라는 접속사가 있다는 점에서, 본 어구 앞에 언급된 사울의 병기 든 자와는 다른 무리들 즉 사울의 모든 근위(近衛) 병사들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여기의 '모든'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 그 전투에서 사울의 군대가 완전 섬멸됐다고 볼 수는 없다.
아울러 길보아 전투에서 사울의 가문이 완전 멸절된 것 또한 아니다. 사울의 사촌이자 군대 장관인 '아브넬'(14:50)이 살아 남았고, 아마도 전투에 참여치 않았을 사울의 넷째 아들 '이스보셋'(에스바알, 삼하 2:8, 대상 8:33, 9:39)도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울 사후에도 왕가의 명맥을 잠시 유지해 갔다.

7 골짜기 저쪽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과 요단 건너쪽에 있는 자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도망한 것과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죽었음을 보고 성읍들을 버리고 도망하매 블레셋 사람들이 이르러 거기에서 사니라

1) '골짜기 저편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이란,
길보아 산의 북동쪽에 있는 '이스르엘 골짜기'(29:1)를 가리킵니다. 

이들은 잇사갈, 스불론, 납달리 지파 등의 주민들이 사는 
갈릴리 지역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들이 사울의 군대와 합류치 못한 까닭은, 
바로 이같은 연합을 방지하기 위하여 
블레셋의 군대가 이곳 북쪽 사람들과 남쪽 사울의 군대 사이인 
'수넴'(28:4)에 진을 쳤기 때문이었죠.

2) '요단 건너편에 있는 자들'은, 
므낫세 반 지파의 거주 지역만을 가리킵니다. 

한편 길보아 산의 패배 소식은 이곳까지 급속히 퍼져나간 것 같고, 
따라서 이들은 보다 안전한 지역으로 남하해서, 갓과 베냐민 지파의 땅으로
피난 갔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길보아 전투에 참여했던 사울의 군사들로서, 이들은 주로 유다 지파, 베냐민 지파, 에브라임 지파 등에 속한 백성들일 것이다.

'성읍들을 버리고 도망하매' 이는 길보아 전투의 패배와 사울의 죽음이 이스라엘 온 땅에 큰 공포의 분위기를 몰고왔음을 말해 준다.

'블레셋 사람들이 거기 거하니라' 여기서 '거기'는 갈릴리 주변 지역을 가리킨다. 이는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요단 강 동쪽 길르앗 땅에 있는 '마하나임'에서 왕위에 올랐던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삼하 2:8,9). 또한 다윗이 사울의 사망 직후 유다 지역에서 왕위에 오른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유다 지역도 당시 블레셋의 공략으로부터 점령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삼하 2:1-4).

8 그 이튿날 블레셋 사람들이 죽은 자를 벗기러 왔다가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이 길보아 산에서 죽은 것을 보고

'그 이튿날' 사울이 길보아 산에서 죽임을 당한 그 다음날을 말한다.

'블레셋 사람들이 죽은 자를 벗기러' 여기서 '벗기러'(파솨트)는 일반적의미의 약탈 행위를 가리킨다(27:10, 30:1, 삿 9:33, 대하 28:18). 그런데 이 단어는 주로 의복을 벗기는 행위를 가리킬 때 많이 사용된다(욥 22:6, 미 2:8). 아마도 이것은 그 당시 옷이 모든 약탈물 중 가장 귀한 것이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수 7:24).

'사울과 그 세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 의복, 무기, 식량 등 전리품을 획득하러 왔다가, 시체들 중에서 발견된 이스라엘 왕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의 주검은 블레셋에게 있어 가장 가치있는 노획물이었을 것이다.

9 사울의 머리를 베고 그의 갑옷을 벗기고 자기들의 신당과 백성에게 알리기 위하여 그것을 블레셋 사람들의 땅 사방에 보내고

'사울의 머리를 베고' 이는 이스라엘에 대한 블레셋의 큰 승리를 증명키 위한 증거물로 삼기 위한 행동이었다(17:57). 이같은 행위는 고대의 전쟁에서는 일종의 관습이었다.

'신당과 백성에게 전파하기 위하여' 이는 사울의 머리를 벤 중요한 목적이었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울이라는 인물은 자신들에게 너무도 뼈아픈 패배를 안겨준 장본인이라는 점에서(14:47, 17:52, 18:6), 엄청난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사울의 죽음은 그들에게 대단한 기쁨을 안겨줄만한 큰소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신당 에게 전파한다'는 것은, 사울의 '머리'와 '갑옷'을 자신들의 신에게 봉헌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10절, 대상 10:10). 이같이 적으로부터 빼앗은 대단히 중요한 전리품을 자신의 신에게 봉헌하는 행위는
(1)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은 언약궤를 다곤(Dagon) 신당에 바친 경우<5:2>,
(2) 다윗이 골리앗의 칼을 여호와의 성소에 보관한 경우(17:54, 21:8,9)등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한편, 여기서 '신당'(베트 아차베헴)은 문자적으로 '우상들의 집'이란 뜻이다.

10 그의 갑옷은 아스다롯의 집에 두고 그의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 박으매

'그 갑옷은 아스다롯의 집에 두고' 이같은 블레셋 사람들의 행위는, 자신들의 신(神)에 대한 숭배와 봉헌의 성격을 띤다(9절, 5:2). 즉 블레셋 족속은 자신의 신들이 자신들에게 금번 길보아 전투에서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고 생각함으로써, 바로 이같은 봉헌 행위를 한 것이다.

한편 '아스다롯'은 '아세라'(신 7:5), '아낫'(Anath) 등과 더불어 가나안 3개 여신 중 하나로서, 전쟁과 풍요의 여신(女神)이다(삿 2:13주석 참조).
그리고 '아스다롯'이란 복수(plural)형태인데, 성경 용례상 이 '아스다롯'이 복수로 사용되는 것은 이것이 항상 '바알'과 함께 여호와의 신적 저주의 대상으로 선포되어지는 문맥에서이다(7:3, 4, 12:10, 삿2:13, 10:6).
이 사실은 곧 블레셋 족속들이 가나안의 종교와 문화에 깊이 동화되었음을 강력히 시사해 준다. 그리고 여기 '아스다롯의 집'은 '아스글론'에 있었던 고대의 유명한 신전(神殿)으로 추정된다.

'그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 박으매' 여기서 사울의 '시체'는 '그 머리를 다곤의 묘(廟)에 단지라'라는 역대상 10:10의 언급을 통해서 볼 때, 머리가 없는 몸뚱이 뿐의 시체였던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12절의 언급을 통해서 볼 때, 이때 사울의 세 아들들의 시체들도 함께 성벽에 못 박혔음도 분명하다.
그럼에고 불구하고 여기서 본 저자가 오직 사울의 시체에 대해서만 언급한 것은, 오직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음으로 인해 죽어서까지 수치를 당하는 처참한 자리에 떨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중점적으로 보여주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벧산'은 요단 골짜기 근처 즉 이스르엘 골짜기의 동쪽 끝부분으로, 요단 강으로부터 서쪽으로약 6.5km 지점, 그리고 갈릴리(긴네렛, 디베랴) 바다로부터 남쪽으로 약 19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으로, 당시 블레셋에 의해 점령된 성읍이다. 한편, 그런데 여기서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의 시체를 성벽에 못박은 행위와, 이전에 골리앗이 다윗의 시체를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줄 것이라고 그를 위협했던 일(17:44)과는 어떤 상통점이 있음을 발견한다.

또한 고대 문헌에 따르면, 앗수르 왕 산헤립은 블레셋 정복 후 블레셋의 에그론 관리들의 시체를 그 성읍 주위의 기둥 위에 매달아 놓기도 했었다고 한다. 바로 이같은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자신들에 의하여 패배된 적장(敵將)의 시체를 성벽에 못박는 등 모욕하고 또한 공개적으로 노출시키는 행위는 (1) 상대국 백성들에게 엄청난 수치심을 안겨주며 (2) 자신들의 승리를 공개적으로 확증하려는 당시의 전쟁 관습이었음이 분명하다.
아무튼 이러한 비참한 사건은 개인 사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께 행한 그의 끈질긴 반역 행위에 대한 심판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또한 선민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을 자신들의 왕으로 모시기를 거부하고 세속적인 왕을 원했던 그 반역 행위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수모요 치욕이라 할 수 있다(8:4-8,19,20).

11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에게 행한 일을 듣고

'길르앗 야베스 거민' '길르앗 야베스'는 갈릴리 바다 남쪽 약30km 지점에 위치한 요단 동편의 므낫세 반 지파의 성읍이다(수 17:5,6). 이곳은 사울의 즉위 초기에 '암몬 사람'들로부터 침공을 받았었다(11:1). 그때 사울이 '베섹'에서 군사를 모집하여 암몬 사람을 공격함으로써, 길르앗 야베스 거민을 구원했었다(11:8-11). 그러므로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은 과거 사울이 자신들에게 베풀어준 이 은혜를 기억한 것이다.

12 모든 장사들이 일어나 밤새도록 달려가서 사울의 시체와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서 내려 가지고 야베스에 돌아가서 거기서 불사르고

'일어나(쿰)' 이는 문자적 의미의 일어남을 의미치 않는다. 보다 함축적인 의미로서, 특별한 행위를 실천하기에 앞서 거기에 대한 강한 결단의 태도를 보여주는 관용적인 단어이다.

한편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의 이같은 결단은, 과거에 자신들이 암몬 족속들로부터 침공당하여 극히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11:1-3), 사울의 군사적 행동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암몬 족속의 위협으로부터 구원받았던 사실을 기억한 연고이다(11:11). 즉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은 사울에게 신의(信義)를 지키고 보은(報恩)하기 위하여 블레셋 족속들에게 능욕당하고 있는 사울의 시체를 취하여 오기로 결단을 한 것이었다.

'밤새도록 가서' '길르앗 야베스'에서 사울의 시체가 못박혀있던 '벧산'까지는 약21km 정도의 거리이다. 그러나 요단 강 계곡 등 길르앗 야베스로부터 벧산까지의 험한 지형적 요인을 감안한다면, 그때 그 거리를 최소한 약 5시간 정도 이상 행군했을 것이다. 특별히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밤을 택하여 그같은 일을 결행한 까닭은, 말할 나위없이 블레셋 사람들의 수비망을 뚫기 위함이었다(28:8).

'불사르고(사라프)' 왜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사울과 그의 세 아들들의 시체를 화장(火葬)하는 장사 방식을 택하였는지에 대하여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1) 목이 잘리는 등 매우 손상된 시체였기 때문에, 매장(埋葬)과 같은 일반 장사법을 사용할 수 없어서 이같이 화장했다는 견해,
(2) 매장과 같은 일반적인 장사법을 사용할 경우, 블레셋 사람들이 재침공하여 그 시체를 파내고 다시 모욕할까 염려하여 이같이 했다는 견해,
(3) 죽은 지가 오래되어 시체가 심하게 부패되어서 이같이 했다는 견해,
(4) 모압 암몬 등의 이방 국가와 인접하여 살던 까닭에, 그들의 영향을 받은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훌륭한 용사들을 화장하는 이교적 장사법에 따라 이같이 했다는 견해,
(5)'불사르고'(사라프)라는 단어를 '송진을 바르다'라는 의미로 이해하여,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여부스 사람들의 장사 방식에 따라 사울의 시체를 방부 처리했다고 보는 견해 등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견해들 중 (2)의 견해는, 사울의 매장지가 블레셋 사람들의 영향권 밖인 요단 동쪽이라는 점에서 적절치 못하다. 그리고 (4)의 견해는, 모압 암몬 등의 민족들은 화장(火葬)하는 방식의 장례에 별로 익숙치 않다는 점에서 또한 타당치 않다.
오히려 그 민족들은 적의 시체를 불살라서 뼈를 가루로 만드는 등의 형벌적 성격으로 시체를 불살랐다(암 2:1).

따라서 존경심의 발로로 화장(火葬)을 했던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의 생각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5)의 견해는 시체를 불사름으로써 뼈가 남았다는 명백한 언급이 있다는 점에서 그 타당성이 적다. 그렇다면 (1)이나 (3)의 견해를 적절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의 사건을 병행적으로 다루고 있는 역대상 10장은 사울의 시체를 불사르는 내용은 언급치 않는다. 다만 뼈를 묻은 일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대상 10:12). 이는 산 사람 혹은 시체를 불사르는 행위를 악행에 대한 형벌의 관점에서 보는 모세 오경의 가르침에 따라서(레 20:14, 21:9),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의 행위를 바르지 못한 것으로 이해하여 화장은 생략하였기 때문인 듯하다. 혹은 화장과 매장 사이의 조화에 어려움을 느껴 시체 처리에 대한 결과만을 언급했기 때문일 것이다.

13 그의 뼈를 가져다가 야베스 에셀나무 아래에 장사하고 칠 일 동안 금식하였더라

'에셀 나무 아래 장사하고' 여기서 '에셀 나무'(the tamarisk tree, NIV) (대상10:12에는 '상수리 나무'(the oak tree, Living Bible)로 표기되어 있다. 히브리 원문은 위성류 나무를 가리킨다)는 길르앗 야베스에 많았던 유명한 나무였다. 그런데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사울의 뼈를 그 나무 아래 장사한 까닭은, 그들은 사울이 그 나무 아래 앉기를 즐기는 등 생전에 그 나무를 특별히 좋아했었던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22:6). 한편 그곳에 묻혔던 사울의 유골은 후에 다윗에 의하여 발굴되어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 있는 자신의 아비 기스의 묘에 안장되었다(삼하 21:11-14).

'칠일을 금식하였더라' 아론이나 모세가 죽었을 때,이스라엘 백성들은 30일씩 애곡을 했었다(민 20:29, 신 34:8). 이같은 애곡은 고인(故人)의 죽음을 아쉬워하며, 그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키 위함이었다. 여기의 '금식'도 애곡의 일종으로서 같은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삼하 1:12). 이처럼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은 사울의 시체를 벧산 성벽으로부터 걷어다가 장사를 지내고 7일을 금식하였다. 즉 이들은 과거에 사울이 베풀어준 은혜를 기억하고(11:1-11) 그 보답으로 이러한 선행을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은혜를 받는 일도 필요하지만 은혜를 기억하고 보답하는 일은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은혜레 대한 감사 행위는 더욱 큰 은혜를 가져오는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성도들도 하나님께 은혜와 축복만을 맹목적으로 간구하지 말고, 이미 받은 은혜를 잘 간직하고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아무튼 본서를 마무리짓는 사울의 비극적 죽음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열방과 같은 왕을 요구한(8:5, 20)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를 보여 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실패를 구속 역사의 섭리 속에 승화시키사, 당신의 뜻에 합당한 한 인물을 이스라엘의 차기 왕으로 삼으셨으니(13:14, 15:28, 16:13), 그가 곧 다윗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