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삼상26장 두 번째로 사울을 살려주는 다윗

LNCK 2023. 3. 27. 11:28

◈두 번째로 사울을 살려주는 다윗     삼상26장     여러설교정리

◑십 광야로 다윗을 추격해 온 사울

본문 삼상26장은, 앞의 24장과 쌍둥이 스토리 라고 할만큼 내용이 비슷해요.
24장은, 다윗이 엔게디 굴에서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으나, 보내준 사건이고
26장은, 다윗이 밤 중에 사울이 자는 진지 속으로 들어가서,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으나, 그의 창과 물병만 가지고 나오는 스토리죠.

사해 서쪽 지역인 ‘십’에 거주하는 사람이 사울이 머물고 있었던 
당시 이스라엘의 정치적 수도였던 기브아까지 찾아가 
사울에게 다윗이 하길라 산에 숨어있다고 밀고를 했습니다. (맨아래 지도)

이 소식을 들은 사울은 군사 3천명을 거느리고 다윗을 죽이려 

기브아에서 십 광야로 갔죠. 
사울과 3천명의 군사들은 십 광야에 도착하여 하길라 산 가에서 진을 쳤습니다. 

▲삼상24장 엔게디 동굴에서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정작 주객이 도치된 것은, 
다윗을 추격하는 사울은, 다윗의 움직임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데,
사울의 추격을 받는 다윗은, 사울의 움직임을 거의 파악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하길라 산 꼭대기에서, 산 아래에 진친 사울의 진영을 내려다보고 있죠.
24장에서도 (마치 극장처럼) 굴에 들어간 즉시 사울은 아무 것도 보지 못했지만,
다윗은 사울의 모든 움직임을 훤히 다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24장과 본문 26장에서, 사울은 다윗을 죽이러 찾아갔으나, 
오히려 자기가 죽을 위기에 처합니다. 이것이 성도가 가지는 권세이지요.  주객 도치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무리들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의와 궤계를 다 가르쳐 주시고,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시의적절하게, 성경적인 방식으로 거기에 대응하게 하시죠.

구약의 엘리사 선지자가 그랬습니다.
왕하6:13 '그 신복 중의 한 사람이 이르되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을 이스라엘의 왕에게 고하나이다'

하나님이 엘리사에게 아람 왕의 모든 말을 100% 다 들려주시진 않지만
꼭 필요한 말, 꼭 들어야 될 말은.. 신기하게 다 들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아람의 침공에 시의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 본문을 상식적으로 읽는다면 자연히 질문이 생깁니다. 
'이 십 광야에 사람들은, 왜 사울에게 다윗의 처소를 고발했을까요?' 

사실 <사무엘상>의 전체 이야기는.. 이런 대목은 좀 큰 그림으로 봐야 됩니다. 
사울을 추종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윗을 추종하는 사람이 있어요. 

다윗과 사울은 지금 아주 분명하고 극명하게 대립각의 구도를 갖고 있습니다. 
사울의 왕국이 무너져야, 다윗의 왕국이 시작되고 건설 됩니다. 
이제 거의 그 시간이 임박했어요. 임박했는데도 불구하고 
십 사람들은 계속 사울 왕국 편에 서고 있는 거예요. 어쩔 수가 없어요. 

이 사람들은 계속 몰락해 가고 있는 사울 (기득권) 쪽에 줄을 서고 있어요.   
그런데 반대로 다윗은 줄(기득권)이 없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줄을 잘 서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의 나라 편에 서야 되고, 예수님을 닮은 사람 다윗 편에 서야 됩니다.

지금 십 사람들은, 사울 편에 줄을 서려고.. 사울에게 아부하려고
사울이 미워하는 다윗을 고발한 거죠. 

여러분, 우리 사회의 문제는, 너무 일찍부터 ‘라인을 잘 타는’ 데에 있습니다. 
거기에서 인재를 등용하려고 합니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에요. 
진짜 필요로 한 인재는 그 줄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실력을 가진 사람은, 기득권의 줄 서는 데에 관심이 없습니다. 
기득권의 줄 서는 데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점점 더 강해지는 다윗, 사울의 진지 속으로 침투하다

이때 다윗이 정탐꾼을 보냅니다. 24장과 다른 것은
다윗의 대응이 점점 더 적극적입니다. 
연단을 통해서, 다윗이 점점 더 담대해지고, 강력해져 가는 것입니다.

사울을 두려워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다윗 쪽에서 정탐꾼을 보내어서, 사울의 동정을 살핍니다.
그저 도망만 다니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병력 면에서도, 3천 대 6백이면, 차이는 나지만, 완전 수세는 아닙니다.

심적으로도 다윗은 점점 더 강건해 져 있어요.
사울의 왕국은 저무는 해이고, 다윗의 나라는 떠오르는 해였거든요.

그래서 다윗이 정말 놀라운 일을 행하는데,
다윗의 진영 속으로 자기 부하 아비새를 데리고, 직접 침투해 들어간 것입니다.

지금 사울이 다윗을 계속 추격하는 이것도 
사울이 자기 힘으로 되는 게 아니에요. 
뭔가 어둠의 권세가 계속, 새롭게 세워지는 다윗의 나라가 세워지지 못하도록 
핍박을 가하고 있는 것이죠. 이것은 생태적으로 두 나라는 충돌하게 되어 있죠.
마귀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

마치 그 갈라디아서에서 보는 것처럼
이삭과 이스마엘은 한 집에서 있을 수가 없어요. 
이스마엘이 이삭을 계속 핍박합니다. 똑같은 그림이에요. 

그러나 다윗/이삭이 점점 신앙과 믿음이 강해져가서
사울/이스마엘을 이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신약에서 바울은 '내가 약할 때 곧 강함이라'고 말씀하죠.
다윗이 지금 점점 더 약해지면서, 동시에 점점 더 강해지고 있습니다.
그의 외적 환경이 더욱 어려워질 수록, 그의 내면이 더욱 강해지고 있고,
더욱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더욱 강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다윗이 무모하게 사울 진영으로 침투해 들어간 것일까요? 사울을 죽이기 위해서도 아니죠. 그럼 왜요? 목적이 무엇이었을까요? 다윗은 이미 전쟁 달인이 되었습니다. 많은 전투 경험을 통해서, 전혀 전투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사 중의 용사가 되었어요. 그것을 자랑은 아니지만, 자기를 따르는 6백 명의 용사들에게 보여주는 거죠. 아마 6백 명의 용사들은, 마치 (약 10년 전에)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을 때처럼, 용기 충천했을 것입니다. 사울의 창과 물병을 가지고 나온 다윗의 용맹스런 '승리'를 보고요.

그리고 사울에게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가 쫓겨만 다니는 다윗이 아닙니다. 나는 얼마든지 당신을 해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다윗이 선제공격을 한 셈입니다. 

사울이, 다윗이 치켜세워 보여주는 자기 물병과 창을 (어듬 속에서라도) 보고서 얼마나 간담이 서늘했을까요? 이제 무작정 도망만 다니는 어린 다윗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렇게 다윗이 성령충만 할 때는, 용맹해지고, 두려움이 없게 되는 거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영적 컨디션이 늘 이렇게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다음 27장에서, 다윗은 또 영적 침체를 한 번 겪었다가, 다시 회복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데요...)

▲사울을 죽이려는 시험을 이긴 다윗

5 '다윗이 일어나 사울이 진 친 곳에 이르러 사울과 넬의 아들 군사령관 
아브넬이 머무는 곳을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에 누웠고 백성은 그를 둘러 진 쳤더라'

근데 그 깊은 밤에, 모두가 잠든 사울의 진영에 들어가서  
사울이 깊이 잠들어 있는 걸 목격하게 됩니다. 
본문에 '하나님께서 잠들게 하셨다' 라는 표현을 해요. :12 하나님이 계속 다윗의 편을 들어주시는 거죠.

그리고 또 하나 뭘 목격하냐면, 사울의 머리맡에 창을 보게 됩니다. 
다윗이 그 창을 보는 순간 어땠을까요? 
과거에 무시무시했던 기억이 떠올라서, 잠시 몸을 떨었을 거예요. 

다윗이 과거에 궁궐에서 악기를 탈 때 
사울이 귀신에 들려 가지고, 자기 옆에 있는 창을 무방비상태인 
어린 소년 다윗에게 집어 던집니다. 이런 일이 적어도 성경에 2번 나오죠.
(지금은 그 때로부터 약 10년 후)

6 '이에 다윗이 헷 사람 아히멜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에게 
물어 이르되 누가 나와 더불어 진영에 내려가서 사울에게 이르겠느냐 하니 
아비새가 이르되 내가 함께 가겠나이다'

아비새는 다윗의 조카인데, 굉장한 야심가입니다.
여러분, 지도자 옆에 이런 야심가가 있으면 위험해요. 
이 야심가는 지도자의 판단을 흐리게 할 엉뚱한 조언을 할 위험이 많습니다. 

어쨌든 아비새는 다윗이 권좌에 올라야, 자기 에게도 많은 유익이 따릅니다. 
게다가 이 사람은 굉장히 급진적인 성격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나섭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그래서 아비새가 따라 나섰습니다. 
그래서 단촐하게 다윗과 아비새가 사울의 진영으로 들어갑니다. (아히멜렉은 떼 놓고)

7 '다윗과 아비새가 밤에 그 백성에게 나아가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 누워 
자고 창은 머리 곁 땅에 꽂혀 있고 아브넬과 백성들은 그를 둘러 누웠는지라'

여러분,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있을까요? 
지금이야말로 평생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니던 
그 가슴 한복판에 먹구름장 같은 근심덩어리를 
끝장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살다보면 사람은 역경을 만났을 때 실수하는 것보다는 
순경(순탄한 환경)을 만났을 때 더 많은 실수를 합니다.  

모든 상황이 완벽하게 잘 진행이 될 때 
착각을 하고 하나님의 뜻을 오도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모든 상황이 easy going 쉽게 쉽게 갈 때 조심해야 돼요. 
그런데 오히려 자꾸 장애물에 부딪치고, 역경을 만나면 
사람은 더 정확해집니다. 
더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고, 하나님께로부터 시선을 계속 고정할 수 있어요. 

그런데 손대는 것마다 만사형통 쉽게 쉽게 잘나가면 
크게 혼란을 일으킬 수 있고, 착각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이것(순경)을 '시험속의 시험'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사실은 사울이 다윗 자기를 추격한 것도 위기와 시험이지만 
그 속에 더 무서운 시험이 웅크리고 있었어요. 
여러분, 이것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어디 있겠어요? 

근데 거기에 아비새가 불을 지릅니다. 
8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
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하니'
아비새는 창을 쓰는데 전문가입니다. 그래서 '두 번 찌를 것이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대상11:20

다윗은 지금 시험에 처해 있습니다. '사람(아비새)의 말을 들을 것인가,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음성(기름부음 받은 자를 해하지 말라)을 들을 것인가?'
사울은 지금 '생명의 위기'를 겪고 있지만,
다윗은 지금 '믿음의 위기, 영적 생명의 위기'를 겪고 있는 중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내 손으로 처단한다면 
좀 마음에 거리낌이 있기 때문에 주저할 수도 있지만 
아비새가 하겠다니까.. 모르는 척 눈감을 수 있겠죠. 
여러분 모르는 척 눈감는 것도 죄입니다. 다수의 침묵자들도 죄입니다. 

눈감아 버리면 나는 그 죄악의 영향력에서 유체이탈 식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9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10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11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12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아무도 보거나 
눈치 채지 못하고 깨어 있는 사람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더라'
 
다윗이 (사울을 죽이려는) 큰 위기를 지금 벗어납니다. 
여러분,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문제를 해결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우리는 이런 경우 야말로 문제를 해결(능동)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여기겠죠. 
그런데 항상 다윗의 왕국은, 장차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를 품는 
왕국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문제는 해결 받아야 (수동) 합니다.

사람의 인위적인 노력으로나 인간적인 방식으로 탈취되어서는 안 되는 나라예요. 
하나님이 끝까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방식으로 주실 때까지 
그때 받도록 되어 있는 나라가 다윗의 왕국이고 하나님의 나라이에요. 

그 나라를 통해서 구원하실 그리스도가 오셔야 하기 때문이죠. 
다윗이 어쩌면 사울이 자기 목숨을 노리는 것보다
이 아비새의 유혹은 더 큰 유혹이었을지 몰라요. 

그런데 다윗은 여기서 스톱합니다. '하나님이 하실 때까지 기다리자. 
그가 어느 날 죽든지, 어떤 방식으로 죽든지 
하나님은 그를 반드시 심판할 것이다. 
그러니까 그 때와 방법을 하나님께 맡겨야 된다. 
그의 머리맡에 창과 물병만 가지고 나가자' 

▲그런데 지금 다윗의 이런 판단이 어디에서 가능했을까요?

그는 방금 전 25장에서 (나발의 남자를 다 죽이려는) 큰 실수를 할 뻔 했어요. 
그때 그 다윗에 혈기를 막고 나섰던 여인이 아비가일 입니다. 
지혜로운 여인 아비가일 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뽑았던 칼을 거두죠.

그러고 나서 나발은 하나님에 의해서 심판을 당합니다. 
일주일쯤 앓다가 그는 죽습니다. 

가만 놔둬도 나발은 죽었을 터인데
만약에 다윗이 그 사소한 복수심을 절제하지 못하고 처단했다면 
다윗은 무서운 죄를 범할 뻔 했어요. 자신의 인생에 큰 오점을 남길 뻔 했죠.

그러니까 다윗은 앞에 25장의 스토리를 통해서 
체득한 영적인 원리를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사울을 처단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길 수 있었던 겁니다.  주1)

다윗은 여기서 사울의 문제도 하나님 앞에 던집니다. 
자기가 손 대지 않습니다. 

얼마 후에 사울은 죽잖아요. 
31장에서 길보아 전투에서 죽잖아요. 

하나님이 그 나라를 멸하시기까지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 방식에 맡기는 거예요.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인간의 인위적인 방식으로, 노력으로  
세워지는 나라가 아니에요. 

그래서 교회라는 공동체도 어떻게 만들어지냐 하면 
자꾸 그런 인간적인 영향력과 힘을 빼야 돼요. 

'우리 교회 목사님은 카리스마가 없어!' 그런 말들을 하잖아요. 
어떤 의미에서 카리스마가 지금보다 더 없어져야 돼요. 
교회는 누가 담임인지도 몰라야 돼요. 


◑깊이 잠들게 하시는 하나님

12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아무도 보거나 눈치 채지 못하고 깨어 있는 사람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더라'
'잠들어 있었다'라는 표현을 굉장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깊이 잠들게 하셨다'는 표현이 몇 번 나오는데요. 
창2장에, 하와를 만드실 때, 하나님은 아담을 깊게 잠들게 하시죠. 

사울의 인간이 세운 나라가 죽어야 
그 속에서 다윗의 왕국, 하나님이 세우시는 나라가 싹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깊이 잠들었다'는 이야기를 강조해서 성경은 기록하죠.

*일화/ 잠 자지 않고 깨어 기도해서, 가족을 지킨 여인   주2)

▲아브넬의 직무유기를 꾸짖는 다윗

13 '이에 다윗이 건너편으로 가서 멀리 산 꼭대기에 서니 거리가 멀더라
14 다윗이 백성과 넬의 아들 아브넬을 대하여 외쳐 이르되 아브넬아 너는 
대답하지 아니하느냐 하니 아브넬이 대답하여 이르되 왕을 부르는 너는 누구냐 하더라'

때는 깊은 밤입니다. 다 잠든 새벽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어요.

얼굴은 서로 알아볼 수 없지만, 목소리만 서로 들을 수 있어요. 
다윗이 큰 소리로 부릅니다. '아브넬아!'

아브넬이 '왕을 부르는 너는 누구냐?'  :14

다윗이 아브넬을 불렀지만, 
아브넬은 '다윗이 사울 왕을 부르고 있다'고 응답하고 있죠.

아브넬의 말 뜻은, 다윗이 아브넬을 큰 소리로 불러 소란케 함으로써 
잠자던 사울 왕을 깨웠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혹은 다윗이 실제 대화하고 싶은 대상은 아브넬 자기 자신이 아니라, 바로 사울인 것을 아브넬은 아는 거죠. 그래서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왕을 부르는 너는 누구냐?'

15 '다윗이 아브넬에게 이르되 네가 용사가 아니냐 이스라엘 가운데에 너 같은 
자가 누구냐 그러한데 네가 어찌하여 네 주 왕을 보호하지 아니하느냐 
백성 가운데 한 사람이 네 주 왕을 죽이려고 들어갔었느니라'

16 '네가 행한 이 일이 옳지 못하도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너희 주를 보호하지 아니하였으니 너희는 마땅히 죽
을 자이니라 이제 왕의 창과 왕의 머리 곁에 있던 물병이 어디 있나 보라 하니'

다윗이 아브넬의 직무 유기를 지적하는 거죠.
아브넬이 경호대장인데, 사울 왕이 죽을 뻔한 것은 네 직무유기이고,
너는 죽어 마땅하다는 거죠. 그러나 역시 다윗은, 아브넬을 책망함과 동시에 사울 왕에게 어떤 메시지를 (아브넬을 통해)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가 사울 왕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져온 사울의 창과 물병이 그 증거라는 것이죠. 

골짜기를 하나 두고 큰 목소리의 대화가 오고가다 보니까 
사울이 이를 듣고 깼어요. '다윗의 목소리가 아니냐?'  :17

◑자기의 목숨을 내려놓는 다윗

18 '또 이르되 내 주는 어찌하여 주의 종을 쫓으시나이까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손에 무슨 악이 있나이까?'

위 말은, 학자들간에 논란이 있는데, 
이건 사실상 사울에게 한 말이 아니라, 다윗이 하나님께 한 하소연입니다. 
다윗이 이해할 수 없는.. 끝나지 않은 추격을, 하나님 앞에 묻고 있는 거예요. 

사울에게 묻는 것처럼 보이지만, 형식은 그렇게 취했지만 
내용적으로는 하나님 앞에 묻고 있는 거죠. 

'나보고 어쩌라고요?' 우리도 사람에게 이렇게 하소연할 수 있지만 
그 아우성속에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지금 자기의 처지와 상황을 하소연 할 수 있단 말이에요. 19절을 보세요.

19 '원하건대 내 주 왕은 이제 종의 말을 들으소서 만일 왕을 충동시켜 나를 
해하려 하는 이가 여호와시면 여호와께서는 제물을 (나를 제물로)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18절이 왜 하나님께 드리는 하소연인가 하면,
지금 다윗이 사울에게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사울이 지난 번 맹세에도 불구하고 나를 또 쫓아왔다면 
다윗의 생각 속에 어쩌면 
'저 사울도 자기 힘으로 하는 게 아니다. 
저게 하나님이 시켜서 하는 일이라면, 제가 기꺼이 제물되어 드리겠습니다!'

(제 목숨을 제물로 바치겠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온전하게 내려놓는 겁니다. 

'사울의 손에 내가 죽는 것이 내 인생의 하나님이 정하신 그림이라면 
내가 기꺼이 당하겠습니다!'  그 말이에요.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이다' 라고 고백을 했죠. 
정확하게 똑같은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이, 사울의 손에 죽는 그림으로 
내 인생을 종결지으시는 걸 원하신다면 
제가 기꺼이 그렇게 제물되어 드려지겠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엄청나게 깊어지고 달라진 겁니다. 
자기 마음으로 하나님의 제단에 
자기 목숨과 인생 전체를 내던질 수 있을 정도로 
다 내려놓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인생의 풍상(바람과 서리)을 겪었을까요? 

지금 사울에게 쫓기는 이유가.. 살겠다고 발버둥 치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제 다윗은, 자기 목숨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제가 죽으면 죽으리이다!'

그게 한번에 열 받아가지고 하는 고백이 아니거든요. 
어쩌다가 불받아가지고 한 번 나오는 고백이 아니거든요. 

사실은 사도 바울도 처음에는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섭리에 대해서 
많이 항명했어요. 그런데 사도행전이 흘러가면서 그의 서신곳곳에서 
에스더의 고백과 같은 고백이 툭툭 터져 나와요. 
'제가 약할 그 때가 강함 인줄 알겠습니다.' 

이걸 우리는 순명이라 그러죠. 
그러니까 신앙의 긴긴 싸움은, 종점이 어딘가 하면 순종입니다. 

제게도 제일 힘든 신앙의 영역이 뭐냐고 묻는다면 
저는 순종하는 게 제일 어렵다고, 백번 질문하면 백 번 다 그 대답을 하겠어요. 
순종하는 게 제일 어려워요. 

'사울의 손에 내 인생이 끝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제가 제 목숨을 내려놓겠습니다'

'만일 왕을 충동시켜 나를 해하려 하는 이가 여호와시면 
여호와께서는 제물(내 목숨)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19절이 바로 그 뜻이에요.

▲사울 곁에 간신들이 이간질 함을 지적하는 다윗

19b '원하나이다마는 만일 사람들이면 그들이 여호와 앞에 저주를 받으리니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너는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라 하고 오늘 나를 쫓아내어 
여호와의 기업에 참여하지 못하게 함이니이다'

이어서 다윗은, 사울의 신하들을 성토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아비새의 충정어린 건의(사울을 단번에 죽이자)를 단호히 거절했지만,
사울은 간신 모리배들의 조언을, 여과없이 받아들여서 자신을 추격하고 있다는 거죠.

'만일 인자(간신)들이면 그들이...저주를 받으리니' 
다윗은 엔게디 동굴 사건 직후에도,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간신들의 중상 모략 때문이라고 말한바 있었죠.  *24:9

물론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가장 큰 동기는 악신의 영향이지만, 
그와 더불어 사울 주변에는 베냐민 사람 구시(시 7편)와 같은 중상모리배들이 
사울 주위에서 늘 사울의 증오심을 더욱 부추겼을 것입니다. 

다윗은 '그들이 여호와 앞에 저주 받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사람들이면 그들이 여호와 앞에 저주를 받으리니' :19

위 말에 이어서 '이는(키)' 접속사인데, '왜냐하면'이란 뜻이죠. 
그 간신들이 저주를 받아야 될 이유를 다윗은 말하는데, 

간신들이 다윗에게 '너는 이방에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라' 라고 말했다는 거죠.
그 간신들이 '나(다윗)를 쫓아내어 여호와의 기업에 참여하지 못하게 함이니이다'

이게 무슨 얘기냐면, 
이 당시에는 다른 나라로 망명보내는 게 가장 무서운 형벌이에요. 

왜냐하면 다른 나라로 망명을 보낸다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버리고, 그 나라의 종교를 받아들여서 
그 나라가 섬기는 신을 모시고 살아야 되는 거에요. 아주 무서운 형벌이에요. 

그런데 다윗의 이같은 염려는 실제로 현실화되고 말았죠. 
즉 다윗은 사울로부터 다가오는 생명의 위협을 피하여 
결국 이스라엘 땅을 떠나 블레셋 땅(시글락)으로 들어가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마는 것입니다(27:1). 두 번째 블레셋 땅으로 피신하죠.

◑적도 나를 좋아하는 매력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적이 여러분을 좋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비록 나의 적이라도, 
“정말로 저 사람은 훌륭한 적수다.” 라는 존경을 받아야 됩니다. 

비록 가는 길은 다르고, 추구하는 것이 서로 부딪힐 수 있지만, 
“저 사람은 그래도 좋은 사람이다, 훌륭한 적수다.”라고 
인정을 받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사울의 마음이 다윗을 향해 긍정적으로 돌아섰기 때문에, 
“내 아들 다윗아.”하고 그를 좋아한다는 말이에요. :21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살면 

하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를 좋아하고 신뢰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적수마저도 우리를 좋아하게 하십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Gladiator)”에 나오는 명 대사가 있죠. 
‘프락시모’라는 검투사들을 거느리는 주인 노예상이 

주인공 스페냐드에게, 
“네가 명 검투사가 되려면 싸움을 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사람들이 너를 좋아해야 된다."고 그랬어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지도자들은 일을 얼마나 잘하는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이 별로 지도자를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특별히 우리나라의 기업인들, 
외국에는 인기 있는 기업인들이 꽤 많은 것 같은데, 
백탤(Bechtel), 건축회사를 시작한 백텔을, 직원들은 “파더 백탤”이라 불러요. 
아버지라고 존경하며 부른다는 얘기에요. 

얼마나 존경을 하면 피아트(Fiat) 회사를 설립했던 G. 아넬리도 
국민들이 존경하고 좋아했어요. 

외국에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기업인들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기업인들이 돈도 벌어주고, 직업도 창출해주는데도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아요. 인심을 잃었어요. 
우리는 다윗처럼, 적들도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겸손이 다윗을 매력적인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20 '그런즉 청하건대 여호와 앞에서 먼 이 곳에서 이제 나의 피가 땅에 흐르지 
말게 하옵소서 이는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자와 같이 이스라엘 왕이 
한 벼룩을 수색하러 나오셨음이니이다'

겸손하게 자기의 처지를 낮추죠. 
비록 도래할 자기의 왕국이 코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나님의 시간을 이 겸손함 속에서 낮추고 기다리는 다윗의 모습을 
만날 수 있습니다. 

'왕께서 지금 벼룩한 마리를 수색하러 나온 겁니다'
자기를 낮추는 동시에 상대방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리는 놀라운 신앙인의 겸손! 

21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하게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 하는지라'

▲적이라도 사울을 존중한 다윗.. 그를 매력적인 사람으로 만들었죠

22 '다윗이 대답하여 이르되 왕은 창을 보소서 한 소년을 보내어 가져가게 하소서
23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그의 공의와 신실을 따라 갚으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내 손에 넘기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24 오늘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 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하니라

그러자 당장은 사울도 다윗을 존중합니다.

25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하니라 
다윗은 자기 길로 가고 사울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다윗은 자기 길로 가고 사울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결국 두 사람이 다른 길로 갑니다. 
이들은 함께 머물 수가 없는 영적인 상징성 때문입니다. 

사울은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하지만 
다윗은 사울의 왕국으로 들어가질 않아요. 
아직은 계속 그가 광야에서 망명자로 유리방황하는 그 세월을 
기꺼이 하나님 앞에 순명처럼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길로 갑니다. 

그리고 사울은 자기의 곳으로 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다윗의 왕국은 이렇게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어 끝이 나죠. 
사울은 아들과 함께 한 날 한 전장에서 죽습니다.


▲마치는 말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야 됩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그게 마음대로 됩니까? 
저인들 사람들이 좋아하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다윗이 사무엘 선지자가 집에 찾아왔을 때도 줄을 서지 않은 것처럼, 

여러분, 앞서 그일라 사람들이나, 지금 십 사람들이나
더 앞서 도엑, 그리고 사울 주변의 신하들 모두는
사울의 마음에 들기 위하여, 사울 앞에 줄을 서려고 안간 힘을 쓰고 있어요.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믿음과 소신과 인격을 따라 행하는 것 뿐입니다. 
그렇게 했더니 많은 사람들이 다윗을 좋아하더라는 겁니다. 

다윗의 방법은, 처세술이 없고, 줄도 대려하는 그런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울에게 줄을 댄 모든 사람들은, 사울의 몰락과 함께 다 몰락했죠.

유대 전승에 의하면, ‘사울의 무기 든 자’가 도엑이었다고 합니다.
성경에 안 나와 있어서 확실치는 않습니다만, 
사울 앞에서 항상 사울을 위해 앞장 서서 칼을 휘둘렀던 도엑, 
그래서 놉의 제사장 80여 명을 죽인 그도...
결국은 사울이 죽을 때, 함께 칼에 엎드러져 자결하고 말았다는 거죠. 유대 전승에 의하면..

△여러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은, 받은 고난을 통하여 드러납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는 
수감 생활을 통해 자신의 지도력을 검증받았습니다. 

만델라는 정치인이 아니고 지도자였습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필요로 하는 것은 정치인이 아니고 지도자에요. 
우리나라에 정치인들은 많아요. 그러나 지도자는 별로 없습니다. 

교계에도 지금 필요한 것은 정치인이 아니라, 지도자입니다.
다윗처럼 받은 고난을 통해, 그 능력이 검증된 지도자!
자기는 고난을 받고 있지만, 그의 대적(사울)까지 그를 존경하고 좋아하는 사람!

 

......................................

주1)
결국 하나님이 우리를 연단하시고 우리를 훈련하시는 영역은 이거에요. 
'네 힘으로 살래, 내 힘으로 살래?' 
하나님은 순간순간마다 우리에게 그 질문을 하세요. 

목회자에게도 마찬가지죠.
'네 힘으로 목회할래, 내 힘으로 목회할래?' 이걸 계속 물으시는 거예요. 

여기에 어머니들 많이 앉아계신데 
'애들을 네가 키울래, 내가 키울까?' 

근데 머리로는 다 알지요. 머리로는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께 맡기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흐르는 물에 던져야 돼요. 하나님께 문제를 던져야 돼요. 
그런데 던져놓고.. 거기에다 끈을 달아놓고서 또 자꾸 끌어당기는 거죠. 
낚시하듯이 자꾸 끌어당기는 거죠. 

그 끈도 끊어버려야 해요. 말 그대로 던지는 거예요. 

다윗이 보좌에 앉기까지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존하는 법을 가장 깊숙이 배우는 겁니다. 

우리 인생도, 가만히 하나님이 묻는 결국 그 질문 앞에 서게 돼요. 
'너 어떻게 할래, 네 힘으로 계속 할래, 내 힘으로 살래?' 

 

주2)
린다라는 여인은 1912년 4월 어느 날 몹시 피곤에 지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고 
고국으로 향한 타이타닉호를 탄 채 대서양을 항해하고 있을 
사랑하는 자신의 남편을 위해 혼신을 다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몇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런 확신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고통스러워하며 기도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새벽 5시가 되어서야 
그녀의 마음에 거룩한 평안이 찾아들었고 비로소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타이타닉호는 4만6천톤의 거대한 여객선으로, 
1912년 당시 최고의 속도를 자랑하는, 영국의 호화 대형여객선이었습니다. 
그러나 1912년 4월 14일 밤 북대서양에서 빙산에 충돌, 침몰하여 
1,517명의 사망자를 냈습니다.

한편 이 여인의 남편은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구명선에 태우는 일을 돕고 
있었습니다. 배는 침몰되었고,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허덕일 때, 
뒤집어진 구명선에 의해 구조되는 바로 그 시각이 
기도하던 그의 아내에게 평안이 찾아든 시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여러분! 가족이 천리만리 멀리 떨어져 있을지라도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살아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