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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27장 다윗의 블레셋 망명

LNCK 2023. 3. 28. 17:24

◈다윗의 블레셋 망명        삼상27장         *사무엘상 설교모음 

다윗은 두 번씩이나 (24장, 26장)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죽이지 않고 놓아주지요. 그랬던 다윗인데 
오늘 본문 27장에서 만나는 다윗의 모습은.. 전혀 뜻밖의 모습입니다. 

그는 결국 고민하다가 블레셋 가드로 망명을 결심합니다. 

다윗도 광야의 방황생활이 길어지면서 영적으로 침체가 또 찾아왔어요. (아래에 다른 해석 있음)
이거는 다윗이 특별히 잘못한 게 아니라고 봐요. 누구나 이런 경우들에 부딪칩니다. 

사람의 신앙이 일관되게 상승곡선을 타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나락에 떨어졌다가 또 비상을 했다가, 이러면서 이제 올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가드 땅에 다시 내려간 이유  (1~4절)
 
1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영토 내에서 다시 나를 찾다가 단념하리니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

▲다윗이 블레셋 가드로 내려간 현실적 이유
자기를 죽이지 않겠다고 했던 사울의 약속은, 신빙성이 없는 것이고, *26장
사울의 주변에는 다윗을 죽이도록 부추기는 신하들이 있었으며, 26:19

지금 자기 은신처 주변에는 다윗의 행동을 밀고하는 '십 사람'들이 
또 다시 자기를 밀고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었죠. 26:1 

따라서 군사 600명과 그에 딸린 가족들을 거느린 다윗으로서는 
언제까지나 불안정한 도피 생활을 계속 할 수 없었기에, 
당시 사울의 추격권으로부터 가장 안전한 '블레셋으로의 도피'를 결정한 거죠.
이것은 가드 왕 아기스 앞으로 도피(21:10)한 것에 이어, 두 번째 도피죠.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첫 번째 도피와 다른 점은, 
그때는 자기 단신과 부하 몇 명만 데리고 넘어간 것이고,

본문 27장의 두 번째 도피(망명)는, 군사 6백명과 그에 따른 식솔들을 데리고
대규모로 가드 왕에게로 넘어간 것입니다.
블레셋에 5성읍이 있는데, 가드로 넘어간 것은.. 거기가 제일 가깝기 때문이죠.

그리고 사울 사망 등 유사시에 이스라엘로 다시 넘어오기에는
5도시 중에서 가장 가까운 가드가 적격이었죠.
'가드'는 다윗이 피신하고 있던 '십 황무지'에서 북서쪽 37km 에 있었죠. 
이스라엘 국경과는 불과 10km 밖에 안 되므로, 하루 만에도 넘어올 수 있죠.

'사울이... 나를 찾다가 단념하리니'  :1  
바로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다윗은 블레셋 땅으로 들어가려고 했던 거죠. 
따라서 그때 다윗은 블레셋 땅에서 오래 머물러 귀화해서 살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4 ‘다윗이 가드에 도망한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매 
사울이 다시는 그를 수색하지 아니하니라’ 

 

다윗이 가드로 망명한 결정은, 일단 성공한 듯 보입니다. 
그리고 아기스 왕으로부터 '시글락'을 얻어 
그곳에서 1년 4개월 동안 정착 생활을 하게 된다. 

▲다윗이 블레셋 가드로 내려간 영적인 이유
다윗이 영적인 상태가 좋았을 때는, 항상 하나님께 기도로 물었습니다.

23:2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가서..’
23:4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그리고 에봇을 가져오라 해서, 우림과 둠밈으로 물었던 적도 있었죠. 23:9

그런데 지금 다윗은 여호와께 묻지 않고 있습니다.
대신에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망하리니’   :1
자기 마음으로 골똘히 생각한 결과, 블레셋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이 결정은 잘못된 결정이었죠. 나중에 시글락에서 큰 낭패를 당하게 되죠.

그리고 다윗답지 않게, 가드 왕 아래서 용병대장으로 살려고 하다 보니, 
하나님의 사람 다윗답지 않게 거짓말을 해야되는 상황에 처하게도 되는 거죠.

◑지방 성읍을 요구한 다윗   (5~7절)

5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바라건대 내가 당신께 은혜를 입었다면 
지방 성읍 가운데 한 곳을 내게 주어 내가 살게 하소서 
당신의 종이 어찌 당신과 함께 왕도에 살리이까 하니 

결국 다윗이 '아기스'와 용병(傭兵) 관계를 형성한 것입니다. *고용된 군인
즉 다윗은 아기스와 용병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그에게 적절한 요구를 할 수가 있었죠. 

그리고 아기스는 다윗과 바로 이같은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자신의 정치, 군사적 세력을 확장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당신의 종이 어찌...왕도에 살리이까'  :5
당시 다윗의 군사가 약 6백 명이었다면. 
그의 가족까지 숫자를 합치면 거의 2천 명은 더 되었을 겁니다. 

이 많은 숫자는 '왕도'(王都) 가드의 시민들과 갈등을 일으킬 소지가 있었죠. 
바로 이같은 점을 내세워서 다윗은 왕도 '가드'를 떠나려고 했죠.
 
그러나 이것은 다윗이 가드가 아니라 지방을 요구한 근본적 이유는, 
1) 우상 숭배가 성행하던 가드에서 거주할 경우 백성들이 
이교적 혼합주의에 빠져들 우려가 충분히 있었고, 

2) 다윗이 아기스의 궁전에 자주 출입할 경우 
아기스의 신하들에게 시기의 대상이 될 우려가 또한 있었으며,

3) 그리고 다윗이 지방에 있어야,아기스의 정치적 영향권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었죠.

6 아기스가 그 날에 시글락을 그에게 주었으므로 
시글락이 오늘까지 유다 왕에게 속하니라 

한편 '시글락'은 가나안 정복 후 원래 유다 지파에게 할당되었다가(수15:31),
그후 다시 시므온 지파에게로 넘어간 성읍이었죠(수19:5, 대상4:30). 

그러나 시므온 지파는 사사시대에 그 땅을 블레셋에게 다시 빼앗겼던 것 같고, 
그 이후 그 성읍에는 사람이 거주치 않은 것 같습니다. 

그 위치는 가사(Gaza) 동남쪽 약 24km 지점으로, 
그때 다윗이 머물고 있었던 가드(Gath) 남서쪽 약 40km 지점으로 추정되죠. 

따라서 가드로부터의 가급적 먼 거리로 떠나려고 했던 
다윗의 목적이 이루어지죠.

아기스는 나름대로 계산을 헀던 게, 다윗이 블레셋의 남쪽 지방을 막아주면
자기들 영토 수호에도 도움이 되는 거였죠. 


◑본문에 대한 두 갈래의 해석

다윗이 블레셋 가드에 망명한 것을 두고,
신학자들, 주석가들 간에 해석이 두 갈래로 나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약속된 땅을 떠났으므로 잘못됐다는 .. 부정적인 해석
-하나님은 합력해서 선을 이루셔서, 결국은 잘 됐다는.. 긍정적 해석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다윗이 블레셋으로 망명 간 사실과 내용만 기록해 놓고 있지,
거기에 대한 어떤 도덕적, 영적인 판단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판단을 내려야하는 것일까요?
일단 두 갈래 해석을 살펴보겠습니다.

▲1. 다윗의 블레셋 망명이 잘못 되었다는 주장

7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산 날 수는 일 년 사 개월이었더라’

다윗이 블레셋 땅에서 1년 4개월 동안 사울을 피해서 망명생활을 한 것이 
몸은 편했을지 몰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영적인 교제는 완전히 끊어진 상태였습니다. 

1년 4개월 동안 다윗은 신앙적으로 보자면 가장 바닥으로 떨어진 때였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보낸 그 시절의 삶이 어떤 모습입니까? 

8~9절을 보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올라가서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침노하였으니 그들은 옛적부터 술과 애굽 땅으로 지나가는 
지방의 주민이라 다윗이 그 땅을 쳐서 남녀를 살려두지 아니하고 양과 소와 
나귀와 낙타와 의복을 빼앗아 가지고 돌아와 아기스에게 이르매”

1년 4개월 동안 다윗이 블레셋 땅에서 보낸 시간은 신앙적으로 가장 바닥을 
친 때이지만 한편으로는 물질적으로는 제법 수확을 거두었던 시간이었습니다. 
다윗과 그 부하들은 유대 광야와 동굴에서 춥고 배고픈 생활에서 지칠 대로 
지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마치 한풀이라도 하듯 재물을 모았습니다. (잘못 모았다는 뜻)

다윗이 부하들과 함께 습격한 그술 사람, 기르스 사람, 아말렉 사람들은 
힘이 없는 약한 사람들을 약탈하며 살아갔던 자들입니다.

사실 다윗이 지난 날 유대 광야에서 힘들게 살면서 누구를 죽이고 물건을 
빼앗은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땅으로 가서는 이유야 어찌되었던 
노략질을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뿐 만이 아닙니다. 

다윗은 이방 사람들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은 후에 10절을 보면 
“아기스가 이르되 너희가 오늘은 누구를 침노하였느냐 하니 
다윗이 이르되 유다 네겝과 여라무엘 사람의 네겝과 겐 사람의 네겝이니이다”
 
아기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다윗입니다. 이방 사람들을 죽이고도 
같은 동족인 유다 사람들을 죽이고 빼앗았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블레셋에서 사는 동안 재산도 늘어갔지만 
오히려 반대로 다윗의 신앙과 그 속사람은 날이 갈수록 
점점 야위어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몸이 편해졌지만, 온 마음을 다해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섬기는 다윗의 신앙은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잃어버린 다윗의 입술에서는 
그토록 영감있는 시와 찬양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시편을 한 편도 짓지 않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눈앞에 재물은 쌓여가지만 신앙의 삶은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골리앗을 때려 눕혔던 용기와 하나님을 의지하던 다윗의 모습은 
어디로 간 것입니까?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자기 생각을 따라 
행동한 결과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다윗처럼 젊었을 때는 하나님을 뜨겁게 믿다가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현실과 타협을 하며 신앙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습니까? 

현실과 타협하면서 물질을 얻었지만 
신앙은 그 물질에 짓눌려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인 다윗도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가 멀어져서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했을 때, 
그의 삶 역시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아닌 
약탈과 거짓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다윗이 블레셋 땅에 넘어가서 정착한 사건이, 결국 잘못된 것은
다음 30장에서, 아말렉이 시글락을 침략해서, 온 가족이 다 포로로 붙잡혀간
사건을 봐도.. 잘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잘못 내려가서 징계를 받았다는 거죠...

△일찍이 하나님이 그에게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삼상22:5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 

수년 전에 그가 국경을 넘어 모압에 피신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갓 선지자를 통해 국경 안으로 들어갈 것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얼른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국경을 넘고 말았습니다. 

국경을 넘은 것은 단순히 지리적으로 이동한 게 아닙니다. 
그것은 곧 말씀의 선을 넘어간 겁니다. 
삶이 지치고 힘들다고 말씀을 어겼는데, 이게 탈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말씀의 선 안에서 머물러야 합니다. 
고전4:6 “ ...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 ” 
말씀의 선을 넘어가면 곤란합니다. 

내 생각에는 잘 될 것 같은데, 나중에 보면 망하게 됩니다. 
잠16:25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마치 이런 겁니다. 운동 경기를 할 때 선 밖으로 나가면 어떻게 됩니까? 
한 마디로 아웃(out)입니다. 
우리가 말씀이 선 밖으로 나가면 우리 인생에서 아웃이 되는 겁니다.

△어느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오래 전 신학교에 다니다가 군대에 갔답니다. 
훈련 받는 것도 힘들지만 내무 검사 받을 때 참 힘듭니다. 
당시엔 지급된 물품이 없어지면 옆의 중대에 가서 훔쳐서라도 채워놓고 
내무검사를 받는 일이 비일비재했는데, 본인의 물품이 없어진 겁니다. 

채워놓으려면 남의 것을 훔쳐 와야 하는데, 도저히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계속 지적당하고 나중에는 욕설과 발길질까지 당했죠. 

그래도 계속 그런 일이 반복되니까 중대장이 호출합니다. 
그때 그 분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는 전도사를 하다 군대에 왔는데 
제대 후 학업을 마치면 목사가 될 사람으로, 
자기 것을 도난당했더라도 남의 것을 훔치면 그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데, 
그런 짓은 도저히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감동을 받은 중대장은 그 후로부터 전적으로 인정해 주었고, 
남은 기간 내내 편하게 지냈다는 이야기입니다. 
비록 고난을 당했지만 결국 승리한 겁니다. 
그리고 그런 고난은 의로운 고난이요 크리스천으로서 마땅히 당해야 할 고난입니다.

▲2. 다윗의 블레셋 망명이 결국은 합력해서 선을 이루었다는 (우호적) 해석

이스라엘 왕이 실질적으로 해야 할 본업이 뭐에요. 영토 회복이에요. 
그런데 그걸 지금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아기스로부터 되돌려 받고 있어요. 
다윗이 망명객 주제에! 
유다-시므온 지파에게 기업으로 주어졌던 시글락 성읍을 회복하고 있어요.

시중에 이런 말이 있잖아요. 
‘아무리 똑똑해도 부지런한 사람 못 당하고 
아무리 부지런해도 운 좋은 사람 못 당하고 
아무리 운 좋아도 은혜받은 사람 못 당한다!’ 

그게 무슨 얘기냐면 “하나님이 밀어주기로 한 사람은 못 당해요.” 
지금 다윗을, 하나님이 밀어주고 계십니다.
저는 여기서 그 결론밖에는 나올 대답이 없어요. 

지금 다윗이 영적으로 건강한 상태에서 블레셋에 들어온 것도 아니고 
망명객으로 흘러들어와 있어요. 

근데 하나님은 이 찌질한 다윗의 도피길, 망명 길임에도
그의 불순종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당신의 뜻을 펼쳐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왕국과 그분의 뜻을 
꿋꿋하게 밀고 나가고 계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다윗이) 못났냐, 잘랐냐?’ 그게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내 스펙과, 내 경력..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런 허물투성이 다윗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메시아의 왕국을, 다윗을 통해 준비하고 계시더라고요. 

다윗이 결국은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도망자(망명객)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 미래 왕국의 그림을 슬쩍 스케치로 보여주시는 거에요. *영토 회복  

그러니까 다윗은 사실 영적으로 철이 들었다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죠. 
이렇게 미완의 가나안에 정복을 
망명객 신세에 빠진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이 계속 회복해 나가시는 겁니다. 

그의 불순종과 그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 약점을 무릅쓰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꿋꿋이 해 나가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는 신앙의 태도는 딱 하나예요.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자녀로 서서 버텨주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다윗을 밀어주기로 한 이상은 
그 누구도, 이방 나라까지 세상 모든 역사가 달려들어도... 다윗을 못 당해요.
역사는.. 다윗 왕국이 세워지는 길로.. 도도히 흘러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성도로 산다면 그 정도의 담력이 있어야죠. 용기가 있어야죠. 
‘나를 통해서 하나님은, 주님의 나라를 도도히 세워가고 계신다!’

그러니까 우리 청년들은 특별히 도전하는데 주저하지 마세요. 
‘이거 내가 자칫 잘못 하면 실패할까, 성공할까?’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실패해도 하나님의 나라는 실패하지 않아!' 믿습니까? 

나는 실패할 수 있죠. 그러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 실패마저도 하나님 쪽에서는 
실패를 또 이렇게 건져가지고, 또 겉절이 김치처럼 해서 맛있게 드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플랜 B를 동원하신다는 거죠.

만약 실패하면, 내가 실패하는 것이지 
절대 우리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은 실패하는 법이 없어요. 
우리는 그분을 믿습니다. 

너무 신앙이 공식대로 딱 떨어지는 그런 스타일은,, 그건 옳은 신앙이 아니에요. 
얼마나 신앙의 영역에는 신비한 영역이 많은데요... 그렇잖아요. 

그래서 신앙은 알아 갈수록 어떤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는가 하면 
'이상하다, 이상한데?' 이런 신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원래 신앙이 저는 신앙이 '이상한 거'라고 믿습니다. 공식으로 설명할 수 없어요.

(지금 다윗이 모압에 망명해 들어갔으면, 공식에 의하면 풍비박산 나야되는데
다윗은 거기서 이스라엘 왕이 될 준비를 하고 있어요. 
시글락 땅도 회복하고, 아말렉, 그술, 수르 등 이방족속도 진멸하고...)

여러분 딴 생각할 것 없이, 자기 스스로를 보면 이상하잖아요. 
나 자신을 보면 알아요. 날 보면 이상하지 않아요?
벌써 망해야 되는데.. 나는 아직도 안 망하고 있고,
나의 부족함과 허물투성이 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계속 사용해 주십니다!

△다윗이 시글락에 내려가서.. 재물도 얻어서 좋게 되었다는 해석

‘ 양과 소와 나귀와 낙타와 의복을 빼앗아 가지고 돌아와..’ :9
사실 이처럼 노획물을 획득하는 것이, 
다윗이 이스라엘 남방의 세 민족을 공격했던 주된 목적이었죠. 

즉 다윗은 이러한 노획물로써 
자신에게 딸린 많은 식솔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했기 때문이죠.
당시에 이런 약탈은 시대적 문화였습니다. 
농사나 목축 외에 다른 산업이 없었으니까요.

혹자는 다윗이 아기스 앞에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해서도
(그술, 기르스, 아말렉을 치고도 8절, 유다남방을 쳤다고 거짓말 함, 10절)
예수님도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말씀하셨듯이
다윗이 나름 현명하게 대처한 것으로 봅니다.

△또한 다윗이 아기스와 우호적 관계를 가진 것에 대해서도,
일부 성경해석학자들은 그것을 좋게 봅니다. 

사실 본문 27장 내내, 다윗과 아기스는 정말 우호적으로 서로 잘 지내죠.
다윗은 아기스에게 은혜를 입어서, 시글락을 하사 받습니다. :5
그리고 다윗도 아기스에게 약탈한 전리품을 선물로 줍니다. :9

오늘날에도 이렇게 기독교인들이, 정권과 마찰 없이
좋은 관계를 가지고 지내는 것이 좋다.. 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으며
그런 것은 틀리지 않습니다. 
정권이 우상숭배와 비진리를 강요하지 않는 이상!

그래서 다윗이 블레셋 가드에 내려가서, 1년 4개월을 지낸 일이
오히려 사울의 박해를 피해서 ‘지혜로운 후퇴’였다는 것입니다.
사실 다윗 일행은 1년 4개월 동안, 사울의 추격을 피할 수 있었죠.
오랜만에 두 다리 뻗고 잤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다윗이 나중에 왕이 된 이후에도
다윗 역시 이방인들을 용병으로 많이 고용했습니다. 
그 중에는 충성된 이방인들도 많았습니다. 
헷 사람 우리아, 가드 사람 잇대(삼하5:18), 그 외에도 여럿 있죠.

그리고 다니엘, 에스더, 느헤미야 등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서 무조건 바벨론 제국과 적대적 관계를 맺지 않았지요. 오히려 우호적 관계를 맺고, 그 속에서 자기 사명을 감당해 나갔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다윗이 블레셋 땅 가드에게로 내려간 것은 분명 잘못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신기하게도, 그곳에서 다윗은
이스라엘 왕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이스라엘의 대적이었던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침노하고 있습니다. :8
그 땅의 거민들이 항상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혀왔기 때문입니다.

지금 아기스의 용병으로 일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스라엘 왕으로서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피는 못 속인다고.. 다윗은
아기스에게는 ‘남유다를 공격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아말렉, 그술, 기르스’ 등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치고 있는 거죠.

마치 롬8:28절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말씀처럼
지금 다윗은 잘못된 길로 내려갔지만,
거기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자기 자신에 대해, 또한 다른 크리스천 형제자매들에 대해
섣부른 판단과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나는/저 사람은 지금 엉뚱한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데...’
그렇지만 모릅니다. 
하나님은 나/그 사람을 통해서, 또는 그 엉뚱한 일을 통해서
무슨 선한 역사로 마무리 지으실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내/그 사람이 명확하게 실패하고 넘어졌어도.. 하나님은 내/그 사람을 통해
주님의 새로운 역사를 또한 이루어가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진정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과 언약이 맺어졌는데,
그 사랑의, 구원의 언약은 결코 파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는 말
다윗의 블레셋 망명 사건을 두고서,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성경에 나오는 롯이 소돔 사람들과 함께 살기 위해 
갔을 때와 비슷한 도덕적 타협의 예로 보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사울과의 더 이상의 갈등을 피하기 위한 현명한 책략으로 봅니다.

본문은 다윗의 결정을 찬성하지도, 반대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다윗이 한 일이었음을, 뉴스처럼 사실만 알려줄 뿐입니다. 

그런데 한 편으로 보면, 다윗의 결정이 옳았든 틀렸든 결과는 같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이스라엘 안이든지, 밖이든지) 대적과 함께 살 수밖에 없다는 거죠.

따라서 우리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처한 상황과 유사점을 발견합니다. 
세상에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있는 다윗처럼, 우리도 적대 세력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성도의 대적은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영적 흑암의 세력에 대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엡6:12

우리는 불신자들을 미워해야 할 원수로 여기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잠재적인 형제자매로 보아야 합니다. 

그 사람들 중 일부는 실제로 적일 수 있지만 
그때에도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당신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요17:14-16

△다윗은 남방 족속들을 치면서, 무자비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 죽인 거죠. ‘다윗이 그 땅을 쳐서 남녀를 살려두지 아니하고’ :9
이것이 나중에 그일라가 아말렉에게 노략당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죠.

이러한 다윗에게 하나님은 역대상 22:8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여기서 우리는 성경에서 때때로 거짓말, 살인 등이 허용된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로 덕스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종합하면, 다윗이 잘못된 결정으로 연약해서 블레셋으로 내려갔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셔서 합력해서 선을 이루어주신다.. 입니다. 우리 각자 자신도 마찬가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