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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28장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 사울

LNCK 2023. 3. 29. 21:20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 사울        삼상28장          설교녹취

전체 주제는,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사람 사울은
결국 신접한 여인을 찾게 되고, 더 영적으로 타락해서 멸망받는다.. 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면, 빈 집에 일곱 귀신이 틈타는 거죠.

그리고 '신접한 여인이 불러올린 사울'에 대한 해석이.. 과거 전통적 해석과 전혀 다른 차원인데.. 이게 맞는 것 같습니다.

▲3절에, 갑자기 쌩뚱맞게 사무엘의 죽음 내용이 나옵니다. 

3 '사무엘이 죽었으므로 온 이스라엘이 그를 두고 슬피 울며 그의 고향 라마에 
장사하였고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더라'

이 사실은 이미 25:1에서 언급되었죠. 그런데 본서 저자는 이같은 사실을 
여기서 다시 언급함으로써, 사울이 이미 죽은 사무엘의 혼(魂)을 불러내려는 
노력을 한 사실과 연결시킵니다.(8절)

앞에 이미 있었던 일을, 앞으로 벌어질 사건과 연관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시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의 죽음을 지금 28장 시점의 죽음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사무엘은 25:1 시점에서 먼저 돌아가셨습니다.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쫓아내었었더라' :3
이같은 종교적 숙정(肅正) 행위는 분명히 사울의 집권 초기에 이뤄졌을 겁니다.
이같이 볼수 있는 까닭은 
1)사울은 왕위에 오르는 예식이 행해질 때에 선지자 사무엘로부터 
하나님의 계명을 철저히 좇을 것을 명령받았으며(12:14), 

2) 무당과 박수를 쫓아내는 일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에게 강력히 요구되던 
중요.한 하나님의 계명인 바 *출22, 18장,  레19, 31장,  20:27,  신18:10-14
처음에 사울은 율법 준수에 대한 열심으로 
이러한 일을 시행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의 죽음이, 사울에게는 굉장히 충격이었을 겁니다. 
왜냐면 사울의 입장에서는, 사무엘은
자기가 이스라엘의 초대왕이 될 때 직접 기름 부은 자요, 
또 자기에게 수시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말씀해주던 선지자요, 
또 힘들고 외롭고 지칠 때 그래도 찾아가면, 주의 뜻에 관한 설명을 해주던 선지자였어요. 

그런 영적인 멘토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 그 밀려오는 적막감이라는 것은 참 깊습니다.
그렇게 의지했던 정신적 지주나 신앙의 의존대상이 돌아가셨을 때, 그 허탈감은 굉장히 크죠.

4절 '블레셋 사람들이 모여 수넴에 이르러 진 치매 
사울이 온 이스라엘을 모아 길보아에 진 쳤더니'

지금 사울의 통치 말기입니다. 사울이 죽기 얼마 전이에요. 
그런데 지금 블레셋 이 쳐들어왔어요. 

그런데 그들이 진을 치고 있는 지명이 '수넴' 입니다. 
이 위치를 잘 기억해야 됩니다. 
나중에 사울이 수넴을 거쳐 엔돌의 무당을 찾아가거든요.

그리고 그 남쪽 길보아 산에 이스라엘 군대가 진을 치고 있습니다. 

지금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집결한 이유는, 
그만큼 사울과 이스라엘의 통치기반이 지금 상당히 흔들리고 있다는 얘기죠. 
여러분 나라가 내적으로 견고해 있는데, 왜 적이 호시탐탐 노리겠어요?
뭔가 나라가 흔들리고 있다는 판단이 서니까, 블레셋이 공격을 감행하는 거죠.

그 이스라엘의 약화가 무엇으로부터 기인했을까요? 결국 사울 왕의 문제였어요. 

사울(히, 샤울)은, 그 이름 뜻이 히브리 말로 샤알에서 파생 됐는데, 
샤알은 '묻다' 라는 뜻이에요. to ask, enquire, consult
그러니 '하나님께 물어서 잘 듣는 자'라는 뜻이죠.

그의 이름 자체가 참 너무 아이러니하죠. 
그래서 그는 평생 하나님께 잘 묻고, 그분의 음성에 잘 듣는 태도와 귀를 
가지라고 그런 이름을 부모가 지어줬을 거예요. 처음에 젊어서는 잘 했죠. 
그런데 그의 집권 후기에는 별로 그러지는 못했습니다. 

5절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의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
6절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

하나님이 지금 사울과의 교제를 완전히 끊었어요.
그러니까 사울은 지금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메시지를 전혀 듣지 못하고 있어요. 

이스라엘 국가의 위기는, 사울의 위기는 여기서부터 시작이 된 겁니다. 
그 시대를 우리는 '흑암과 혼돈의 시대'라고 얘기를 해요. 
하나님의 음성이 안 들리는 시대!

사사시대의 대표적인 증상 아닙니까! 
그리고 기독교 2천년 역사를 공부해 보면 
영적으로 어두운 밤이 올 때 대표적인 현상이... "말씀이 끊어져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말씀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말씀에 무지하기 시작해요. 
그리고 말씀을 전하는 자들도, 자기들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그냥 형식적이거나, 오리무중에 빠진 이야기를 전하고 맙니다. 

이게 말씀이 희귀하고, 말씀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던 시대죠. 
대표적인 시대가 중세시대요, 사사시대입니다. 

지금 사울 왕국은, 위기 위기라 해도, 
그 위기의 출발은 사울로부터 시작되었고, 
사울의 위기는 하나님과의 소통이 단절됨으로부터 시작된 겁니다. 

여러분들은 그래서 매일 민감하게 귀를 열고, 오감을 열어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 허기와 열망을 가져야 됩니다. 믿습니까? 
(원래 사울의 이름의 뜻,  to ask, enquire, consult)

결국 이스라엘의 위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고 
그 결과는 외적 블레셋의 침공을 지금 불러온 겁니다. 

그래서 지금 수넴지역에 블레셋 군대가 딱 진을 치고 있어요. 

그리고 그 공격 태세 앞에 
사울과 이스라엘은 벌벌 떨며 두려움과 공포에 붙들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나주시지 않으니까, 사울의 마음을 지배할 것은 두려움밖에 없죠.
근데 주께서는 우리에게 늘 뭐라 그러시죠? 빌4:6~7을 보세요!
  
지금 사울은, 말씀이 없으니까 자꾸 인간적인 두려움과 염려가 밀려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해요. 
이것이 큰 파도가 되어서 출렁거립니다. 

혹 지금 여러분 중에, 하나님과 소통이 끊어지고 기도가 끊어진 채 
찬양이 사라진 채, 세상의 온갖 염려, 근심, 걱정에 매몰되어서 흔들거리는 
청춘들 없어요? 정신 차리고 깨어서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들려야 돼요! 

이런 사울의 행보가 어디로 발걸음이 틀어지는가 한번 보세요. 

6절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

7절 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하니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답답해진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찾고 있어요. 

여러분, 엡6:12절에 '정사, 권세'가 나오는데,
세상 정권에 역사하는 마귀의 세력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계통에 종사하는 사람들 사이에 귀신의 역사가 많이 있어요. 
왜냐면, 마귀가 그 영역에 들어가야,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 영향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그 영역에 잘 침투합니다. (*극단적 예로 히틀러, 스탈린, 그 외)

물론 귀신이 우리 하나님의 자녀와 상관은 없지만 
귀신이라는 존재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래서 귀신의 존재를 부인해서도 안 돼요. 

또 반대로 너무 모든 것을 다 귀신 귀신 하는 신자들이 있어요. 
심지어 연필깎다가 손 베인 것까지 귀신의 장난이라고 보는 극단적 태도가 있어요.
우리는 양극단을 피해야 합니다.

과거에 제가 결혼식 주례할 때, 귀신 들린 여자가 발작을 해서
난장판이 된 때가 있었는데, 남자 세 명이 붙들고 그 여인을 데리고 나가는데도
남자들이 쩔쩔 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귀신의 존재는 실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귀신은 우리가 두려워할 존재가 아니에요.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승리를 확보해 놓으셨기 때문에 
이제 마지막 남은 기간 동안 발악하는 수준이지 
결정적인 승리의 권세가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귀신이 혹시 여러분들을 보고 고발하고 고소해도 절대 밀리지 마세요. 
우리가 왜 자꾸 움찔하고 밀리냐 하면 지은 죄가 많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해서 귀신아 물러가라!' 
그러면 일단 귀신은 힘을 잃습니다. 당장 치료되지는 않더라도 힘은 잃습니다.

본문에 귀신을 부리는 여자가 등장을 해요. '엔돌의 무당'으로 통하죠.

7절 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하니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아까 블레셋이 진 친 지역이 수넴이었어요.
엔돌은 수넴보다 더 북쪽이에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진친 길보아는 남쪽인데 
사울이 엔돌로 무당을 만나러 가려면, 수넴을 우회하든지 지나야 하는 거예요.

엔돌은 적진 뒤에 있으므로 위험한 길이죠. 
그래서 사울이 변장을 합니다. 

8절 '사울이 다른 옷을 입어 변장하고 두 사람과 함께 갈새 
그들이 밤에 그 여인에게 이르러서는 사울이 이르되 청하노니 
나를 위하여 신접한 술법으로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 올리라 하니'

사울이 변장을 하죠. 그런데 여기에는 영적인 의미와, 실용적 이유가 있습니다. 
실용적 측면에서의 이유입니다. 
1) 수넴에 블레셋이 진을 치고 있어요. 그런데 엔돌은 더 북쪽입니다. 
그래서 수넴을 지나가려면 상당히 위험을 감수해야하기 때문에 
실질적인 이유 때문에 변장할 수밖에 없었어요. 

가다가 블레셋에 사울이 체포되거나 죽임을 당하면 
이 전쟁은 패하기 십상이기 때문이죠.

2) 거기 인근 백성들의 눈에 띌 위험 때문입니다. 
박수무당, 점치는 사람들을, 과거에 사울이 다 처치했어요. 

그런데 자기가 지금 그 신접한 여인을 만나러 가는 걸 
인근 백성들이나, 인근 무당들이 알면 안 되겠죠. 그건 모순이죠. 
그래서 일단 변장을 합니다. 

3) 마지막 이유가 뭐냐하면, 사울이 엔돌에 도착을 했어요. 
그래서 신접한 여인을 만났다고 합시다. 

그녀가 왕인 걸 알아보면, 찾아간 목적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에요.
신접한 여인이, 왕의 기세에 눌려서 잘못 예언하거나,
혹은 왕을 자신의 구미대로 이용해서 잘못 예언하거나,
혹은 과거에 무당들을 다 죽인 역사를 알고서, 도망칠 수도 있기 때문이죠.

그러면 신접한 여인을 찾아온 사울의 목적이 그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죠. 
이런저런 실용적인 3가지 이유 때문에 사울은 최소 인원 부하 둘을 대동해서 
변장을 하고 이 블레셋 진영을 지나서 엔돌로 갑니다. 

사울이 얼마나 다급했으면, 자기 목숨을 걸고
적진을 뚫고 신접한 여인을 만나려고 하는 거에요. 

△사울이 변장을 한 결정적인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 변장을 하려면 자기 왕복을 벗어야 합니다. 
왕복을 벗고 평민복을 갈아입든지 해야 합니다. 

그래서 8절에, '다른 옷을 입었다'고 했어요.
사울은 왕복을 벗었어요. 이게 뭘 영적으로 암시하는가 하면 
이제 그야말로 사울은 왕복을 벗을 때가 된 겁니다. 그걸 미리 예고하는 거죠.

뒤에 31장에 보면, 그는 아들과 함께 죽음을 당합니다. 길보아 전투에서요.
이것의 영적인 암시에요. 

그래서 우리는 행동 하나도, 말 한 마디도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평소에 하는 행동 하나, 말 한 마디가
우리의 미래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밤에 그 여인에게 이르러서는' :8
왜 밤에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을까요?
상식적으로 낮에 가면, 적군의 눈에 띄니까 밤에 몰래 찾아갔겠죠.

그 외에도, 이런 무당들은 즈로 밤에 이런 주술행위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밤에 도착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이게 무슨 장면인가 하면 
'밤을 만난 인생들의 모임'이에요. 

여러분 밤은 하나님께서 '안식과 쉼과 잠을 위해서 주신 시간'이에요. 
그런데 그 밤에 눈 부릅뜨고 돈 번다고 돌아다니면 안 돼요. 
그리고 부어라 마셔라 막 홍대거리, 명동거리로 돌아다니면 안 돼요. 
밤은 자라고 주신 시간인 거예요. 

밤에 잠 안 자고 잘되는 사람은, 철야기도 하는 사람 외에는 없어요. 
철야기도에 나와 보세요. 정말 즐겁습니다. 
밤이 맞도록 늦은 밤 한시까지 
젊은 청년들이 우리 아버님 어머님들과 함께 어우러져서 

기도의 더운 입김을 내뿜으며, 개인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시대와 역사를 위해서 기도할 때 보면 
하늘이 사뿐히 내려앉는 것 같아요. 
그 경험을 맛보지 않으면 '알 사람이 없더라' 맛본 사람만 알아요. 

신앙은 맛을 봐야 알아요. 
과거에 '맛을 보고 맛을 아는 샘표 간장'이란 광고가 있었는데,
신앙은 맛을 봐야 알아요!

맨날 귀에다가 얘기 해줘야 몰라요. 
기도 해봐야 기도의 맛을 알고 
말씀을 읽어야 말씀의 맛을 알고 
이웃사랑을 해야 사랑의 깊은 의미를 알아요. 

신접한 여인과 사울의 대화를 여러분들이 잘 들어야 됩니다. 

9절 '여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사울이 행한 일 곧 그가 신접한 자와 박수를 
이 땅에서 멸절시켰음을 아나니 네가 어찌하여 내 생명에 올무를 놓아 
나를 죽게 하려느냐 하는지라'

이 말을 볼 때, 지금 이 여인은 사울의 정체를 왕으로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연덕스럽게 사울 앞에서, 사울 얘기를 하고 있어요. 

왜냐면 사울이 부탁을 했기 때문입니다. 
'청하노니 나를 위하여 신접한 술법으로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 올리라 하니' :8

지금 사울은 죽은 사무엘을 좀 만나고 싶어서, 이 초혼자를 찾아온 겁니다. 
그런데 아직 '사무엘' 이름을 얘기 안 했어요. 
그러니까 여인이 누구를 불러 올리라고 말할 줄을 아직 몰라요. 

-누구를 불러 올려야 되는지도 모르고 
-자기 앞에서 부탁하는 고객이 누군지도 아직 몰라요. 

그저 여인은, 고객의 요청을 거절한 거예요. :9
'나는 이제 죽은 영을 불러올리는 그런 일을 못합니다. 
예전에 사울 왕이, 우리 업종 사람들을 다 죽이고, 다 내쫓고, 처단했는데 
내가 또 그 짓을 했다가는 내 목숨이 위태롭지 못합니다.' 라고 거절하죠 

10절 '사울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이 일로는 벌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지금 사울이,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행위를 
그 여인에게 시켜요. 
얼마나 사울이 지금 막다른 골목으로 가고 있는지가 잘 드러나죠. 

사람이 영적으로 이렇게 딱 어둠에 눌려있고 잡혀 있으면 
모든 영적인 신경 감각이 다 죽습니다. 
자기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몰라요. 

11절 '여인이 이르되 내가 누구를 네게로 불러 올리랴 하니 
사울이 이르되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 하는지라'

12절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큰 소리로 외치며 사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나를 속이셨나이까 당신이 사울이시니이다'

신접한 여인이, 나타난 사무엘을 보고서
그제야 이거를 부탁한 사람이 사울 왕임을 알았어요. 

왜냐면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고 요청할 만한 사람은
사울 왕이기 때문인거죠.

△여인이 불러올린 사무엘의 존재에 대해서, 신학적 논쟁이 뜨겁습니다.

1) 마르틴 루터나 칼빈은 여기서 나타난 사무엘을 사탄의 장난으로 봤어요. 
왜냐면 이 여인이 그런 강신술 이나 초혼의 방법을 통해서 
가짜 사무엘의 형상을 불러 올렸기 때문에 
사무엘이 그런 하나님이 싫어하는 방식, 즉 초혼술에 의해서 
사무엘이 등장할 수는 없는 문제다.. 라고 보죠. 그 말이 맞습니다.

근데 문제는, 나타난 사무엘이 사울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해 주는데, 그 메시지가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다 맞는 거예요.

만약 사무엘이 초혼술에 의해 불려나왔다면,
사무엘이 말한 예언이 하나도 맞지 않고, 다 틀려야죠. 이런 맹점이 있습니다.

2)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하나님의 역사는 이런 초혼술을 통해서도 
사무엘을 불러 올릴 수 있다' 이렇게 해석하죠. 이건 대단히 위험하고 틀린 해석이죠.

3)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보십시오. 이 해석이 맞습니다.

11절 '여인이 이르되 내가 누구를 네게로 불러 올리랴 하니 
사울이 이르되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 하는지라'

12절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큰 소리로 외치며 사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나를 속이셨나이까 당신이 사울이시니이다'

드디어 이 여인을 찾아온 어떤 남자(사울)의 입에서 
'사무엘'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을 해요. :11

그 이름이 등장하자, 바로 곧장 '여인이 사무엘을 봤다' 이렇게 나옵니다. :12

그렇다면 여인이 사무엘을 불러올리는 대목이 
성경에 일언 반구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무엘이, 여인이 불러 올려서 지금 나타난 게 아니죠!
그러니까 여인의 주술행위와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이 보내서) 사무엘의 영이 등장한 겁니다.

사무엘이 나타난 게, 여인이 불러 올리기 전에 일어났습니다. 
여인은 여기에서 무슨 주술을 부렸거나, 요술적 액션을 전혀 취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사무엘의 영이 스스로 나타난 것입니다. 

자 그래서 여인이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왜 놀랐냐면, 자기가 어떤 주술적 행위를 하기도 전에 
사무엘같은 사람 하나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인이 놀랐던 거죠.

14절에 '그가 이르되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하더라'
여기서 겉옷은 그냥 외투가 아니라, 사무엘 같은 선지자가 입는
옷자락이 발목까지 내려오는 어떤 복장을 말합니다. 
그러니 여인은, 본 사람이 노인이고, '겉옷'을 입었음을 보고, 사무엘인줄 알았던 거죠.

여인은 '그 사무엘을 보고, 고객이 사울 왕인 줄도 알았어요.' :12
적어도 사무엘 같은 인물을 요청할 사람은, 사울 왕 밖에 없는 거죠.

13절 '왕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하니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영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하는지라'

여기 보면, 아직 사울은 사무엘을 못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여인과 사울의 거리가 좀 떨어져 있었을 것이다...
여인은 장막의 내실에 있었고, 사울은 그 밖에 있었을 것이다.. 라고 추측하죠.

14절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그의 모양이 어떠하냐 하니 그가 이르되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하더라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그의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

'그 노인이 겉옷을 입었다'는 말에, 사울은 그가 사무엘인줄 깨닫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자리에서 엎드려 버립니다. 사울에게 경배하는 거죠.

사무엘이 평소 옷자락이 발목까지 내려오는 망토같은 겉옷을 입고 다녔거니와
그의 겉옷은 사울에게 잊을 수 없는 아픈 메시지가 담긴 겉옷입니다. 

삼상15:27 '사무엘이 가려고 돌아설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이때 그 찢어진 옷자락을 사무엘이 보고, 사울에게 이런 메시지를 주입니다. 
'이와 같이 당신의 나라를 찢어서 당신보다 나은 이웃에게 하나님이 주셨나이다.' :28

이 말은, 다윗왕국의 등장과, 이제 몰락할 사울왕국을 
찢긴 겉옷자락을 통해서 은유적으로 예언한 것입니다. 

즉 사무엘의 겉옷자락은 
사울에게는 이런 무서운 심판의 메시지가 얽혀있는 과거 스토리가 있었어요. 

이제부터 나타난 사무엘과 사울의 본격적인 대화가 이루어져요. 
'불러 올려진 사무엘이 아닙니다.

15절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를 성가시게 하느냐 하니 사울이 대답하되 나는 심히 다급하니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하지 아니하시기로 
내가 행할 일을 알아보려고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 하더라'

누가 사무엘을 '불러 올렸다'는 말이 아니라, 신접한 여인이 사무엘(귀신의 영)을 불러 올릴 그 찰나에
사무엘이 우당퉁탕 하는 그 상황을 보고서, 안쓰러워서 스스로 등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셨죠.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심히 다급하니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하지 아니
하시기로 내가 행할 일을 알아보려고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 하더라' (사울의 말)

여기서 사울이 '불러올렸다'는 말은 call (히. 카라) 입니다.
사울은 초혼자를 만나러 왔고, 그래서 초혼자가 불러내서 
사무엘이 나타난 것으로 그렇게 잘못 알고 있었던 거죠. 

△지금 사울의 궁극적인 위기가 뭐에요? 
하나님이 그와 대화를 끊어버린 겁니다. 

사울이 오죽답답했으면, 신접한 여인을 통해서라도 
자기에게 늘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주던 
사무엘 선지자를 사울은 만나고 싶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 고백을 정확히 하는 거에요. :15

그러자 사무엘이 다시 사울에게 
앞서 주었던 메시지를 정확하게 똑같이 얘기합니다. 

16절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를 떠나 네 대적이 되셨거늘 
네가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17 여호와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네게 행하사 
나라를 네 손에서 떼어 네 이웃 다윗에게 주셨느니라

18 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19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라 하는지라'

이 말은 이미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앞서 주셨던 메시지였어요. 15:28 
그런데 그것을 정확하게 다시 짚어줍니다. 

이 사무엘의 말대로, 31장에 가서 
한날 한시에 한 전장에서, 사울은 세 아들과 함께 죽음을 맞습니다. 

만약에 루터나 칼빈의 이야기처럼 
이것이 사탄의 장난이라고 했다면 
이 사무엘 선지자의 거듭 확인해주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설명할 길이 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신접한 여인의 주술행위와 상관없이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이 사울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사무엘을 보내셔서 
예언을, 사울의 운명을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사울의 왕국은 몰락을 해가요. 
이때 이 메시지를 재차 거듭 확인한 사울의 행동을 한번 보십시다. 

20절 '사울이 갑자기 땅에 완전히 엎드러지니 
이는 사무엘의 말로 말미암아 심히 두려워함이요 또 그의 기력이 다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루 밤낮을 음식을 먹지 못하였음이니라'

여기 그냥 '땅에 완전히 엎드려 지니' 이렇게 되어있지만 
원문을 보면, 리얼한 표현대로 하자면 '쭉 뻗었다' 라는 말이에요. 
완전히 기운이 빠져버린 거예요. 이 재앙의 메시지를 통해서! 


▶마지막으로 결론을 맺어야 되겠습니다. 
사울의 출발은 성경에 어느 누구보다도 좋았어요. 

집안도 좋고, 인물도 좋고... 그런데 그의 말로는 너무 비참했어요. 
완전히 시궁창으로 빠지는 인생이 되고 말았어요. 

독일 속담에 이런 말이 있어요. '끝이 좋아야 모든 것이 좋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처음에는 저주와 사망의 자리에서 출발했어요. 
그런데 나중에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희망찬 아침을 맞는 것으로 우리 인생이 끝나요. 

그래서 히브리식 시간은, 하루의 시작이 저녁부터 시작되어
그리고 아침으로 가요. 
마치 우리 영혼의 상태처럼 점점 밝아지죠.

우리는 처음 그렇게 시작을 했던 인생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인생은 '돋는 햇볕' 같음을 믿습니까? 

오늘 특별히 이 말씀은, 
사울의 길을 갈 것인가, 다윗의 길을 갈 것인가? 
여러분들은 어느 길목에 서 있습니까? 

누구나 다윗의 길을 걷기를 원하겠죠. 
다윗도 우리처럼 연약해서 실수도 했고 죄도 지었어요. 

그러나 다윗과 사울의 삶에는, 큰 차이 하나가 있어요. 
늘 하나님을 붙드는 싸움을 
다윗은 단 한 번도 놓아 본 적이 없어요. 
그걸 우리 은혜라고 하죠. 

지난 주일 밤에 박종호 형제가 삼일교회에 와서 
두 시간 가까이 찬양하고 콘서트를 했어요. 

중간중간에 조수O 씨하고 같이 공부했던 얘기를 섞어서 하더군요. 
저는 그 형제의 얘기를 들으면서 굉장히 마음이 짠했어요. 
진짜 은혜를 받았어요. 

박종호 씨는 정말 하늘이 내려준 목소리에요. 
사십 대 때는, 그 목소리를 혼자 듣기가 아까울 정도로 
목소리의 성량과 높이와 폭과 깊이가 어마어마했어요. 

정말 세계적인 파바로티 같은 수준의 실력과 천부적 소질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님이 그의 인생을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에 관한 노래만 하도록 계속 몰아가는 거예요. 

그는 이런 말을 하죠. '자기는 수없이 하나님을 놓았다. 
좀 다른 세상음악가 들과 같이 그런 길에서 
한번 부르는데 십만불씩 게런트도 받고,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수없이 하나님의 손을 놓았다. 
근데 우이씨, 하나님은 나를 한번도 놔 버리질 않더라'는 거에요. 

차라리 그런 노래의 은사나 없었으면 
얼마나 그런 갈등도 덜했을까... 

근데 하나님이 주신 천부적인 은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기 나름 세상의 계산 속에서 
이 외롭고 배고픈 길에서만 써야 한다는 그것이 (찬양만 불러야 한다는 그것이)
자기는 견딜 수가 없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는 수없이 하나님을 놓았대요. 
근데 그 때마다 하나님이 질기게 자기 손을 붙들고 있더라는 거예요. 

그 내용을 두 시간 동안 간증을 하는데 
계속 제일 많이 했던 말이 '우이 씨, 우이 씨'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제 가슴이 쿵쾅거렸어요. 

그런데 이 박종호 형제는 자기의 천부적인 은사를 눌러가면서 
이쪽으로만 쓰임 받고, 이제 오십 줄이 넘은 인생이 되었으니 
그 '우이 씨'라는 말을 내뱉으면서도 
그렇게 붙들려 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는 자기가 알았대요. 그게 얼마나 은혜였는지! 
그가 사석에서 말하기를 
'형님, 하나님 나를 놔 버렸다면, 나는 세상에서 잘 먹고 퍼마시고 
별 짓 다 했을 사람이라고... 우이 씨 하고 살았지만 
한 켠에 그 하나님이 나를 놓지 않았던 그 사랑, 그 감격을 이제야 느낍니다. 
이제 철이 드는가 봐요...' 

여러분, 하나님께 붙들려 있음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행복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그렇게 붙들린 거예요. 오늘도 여러분 다윗의 길에 서서 
처음보다는 끝이 아름다운 인생으로 일어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