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한 백성들과, 바리새인, 유대의 지도자들의 악랄한 연대로 인해 예수님을 잡아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할 때,
그들은 "유월절 만큼은 피해서 하자"라고 모의했지만
이건 인간의 궤계로 인해 일어난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 안에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작정하시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유월절 날에 예수님이 죽으신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대속적 죽음을 예표하시는 죽음이었죠.
▲따라서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벌어진 향유옥합사건은 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준비하는 한 여인의 헌신이었죠.
다른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보다 '말씀을 다 마치시고' 결국 남은 건 십자가 하나, 그 십자가를 대하는 자세를..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는 것이죠.
지금 예수님은 베다니 시몬의 집에 계십니다. 과거에 나병 환자였다기 지금은 치료를 받은 시몬의 집에 방문하신 것 같아요.
그 상황에서 한 여인이 옥합을 가지고 예수님앞으로 나왔습니다. 그걸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 위에 부었죠. :7
막14:5절에는, 이 물건은 3백 데나리온이나 된다고 이야기하죠. 노동자 1년치 연봉과 맞먹을 만한 엄청난 값어치라고 소개합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이 행동을 제자들이 봤습니다. 어느 하나 할 것 없이 제자들은 똑같은 반응을 했죠.
26:8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네 번이나 죽음을 앞두고 있는 예수님의 예고를 들은 제자들이에요.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경험했고, 기적도 눈앞에서 보았고 그 십자가 수난을 준비해야만 했던 그 제자들에게
이 여인이 3백 데나리온 정도 되는 값어치를 희생한 모습을 보며 어떤 가치도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에 이스라엘에는 그 정서속에 환대(명절 손님 접대)문화가 있었죠. 여러분 근데 이 환대문화를 우리가 정확히 해석해야 됩니다.
이 환대문화는 자발적인 사람도 많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환대했습니다. 관습, 풍습이니까요.
그도 그럴 것이 율법에서 그렇게 하라고 지정했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을 담아 고아와 과부와 객에게 자기 소유를 흘려보내는 걸 법으로 지정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환대문화를 (특히 명절에는 접대를 많이 했죠) 책임과 의무로 해석했다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지금 여인의 행동을 '명절 환대 문화' 정도로만 이해한 것입니다. 그 환대 문화치고는 너무 돈을 많이 허비했다는 거죠. 값비싼 물건이 눈앞에서 사라지는데 제가 만약 그 자리에 있었다면 여인의 이 행동을 더 무가치하게 평가절하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지금 중요한 것 하나를 놓치고 있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구속사건의 중대성을 놓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관심을 놓치고 있었죠. 사실 그들이 관심가지고 있었던 것은, 주님의 나라가 임했을 때 좌우에 누가 앉게 될 것이냐? 정도였죠. 정말 의리도 없고, 사랑도 없는... 철없는 어린아이들이었습니다.
▲26:10~11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여기 보십시오. 10절에 '예수님이 (그들의 분개함을) 아시고' 라고 합니다. 우리는 흔히 '아시고' (기노스코)는.. 깊이 꿰뚫어 안다는 뜻입니다. 피상적인 앎이 아니죠.
마12:14~15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 곁에 있다가 밖으로 나가서 '저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의논했습니다. 예수님이 그걸 기노스코 하셨어요. '아셨어요'.
귀로 그들의 말을 들어서 그랬을까요? 아니요.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신 것이죠. 오늘날에도 주님은 우리 마음을 꿰뚤어 보시고 '아십니다.' 고난주간을 대하는, 즉 골고다 십자가를 대하는 제자들의 자세, 즉 우리들의 마음 자세를요!
▲그런데 십자가에 달리기 전, 이틀이 남은 이 시점에, 정작 제자들은 그걸 몰랐습니다.
이제 남은 게 십자가 지시는 일 하나 뿐이어서 그 십자가에만 집착하고, 그 예수님의 죽음에만 모든 심혈을 다 쏟아부어야 해도 부족할 판에
그 십자가 복음에 온 신경을 몰두해야 하는 제자들의 마땅한 심경은 온데간데없고 이 여인의 행위, 오히려 정당한 십자가 복음만 생각하고 헌신했던 이 여인의 행동을 정죄하고 비난했던 것이죠.
여러분 우리는 고난주간을 앞두고 있죠. 지금 이 시점에, 아니 우리의 일평생에 단 하나 기억하고 집착해야 할 십자가 복음의 능력을.. 여러분, 옥합을 드린 여인처럼 깊이 묵상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제자들처럼, 뭔가를 허비하는 것쯤으로 격하시키고 계십니까? 사실 우리가 고난주간을 의미있게 보내려면, 시간을 내야 됩니다. 고통에 동참해야 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묵상하며 '그냥 고난주간이 눈앞에 있어서 내가 이때 지금은 십자가가 필요해'
'고난주간이 왔으니까 하나님의 은혜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 좀 묵상해야 되겠어..' 내가 할 수 있으면 금식도 하고, 미디어도 절제하고.. 이렇게 결단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진정 믿고 사랑하는 제자는, 그 마음을 '행동언어'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진정 사랑한다면!
◑자기도 모르게 복음전파 사역에 동참한 여인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렇게 3백 데나리온 데는 값어치 있는 물건인 향유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행위를 예수님이 어떻게 평가하셨나요?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선포되는 곳마다 이 여인이 행한 일이 회자될 것이다'
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이 여인의 행위도 복음의 한복판에 끼어넣어져서 복음의 소식에 함께 전달될 것이다!'
여러분, 이 칭찬이 가슴에 와 닿으십니까?' 성경은 이 여인이 예수님의 장례 때문에 옥합을 깨뜨렸다고 먼저 설명한 적이 없습니다.
이 여인이 옥합을 가져오기까지 어떤 심경을 담았는지도 증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옥합을 깨뜨린 여인을 향해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이 여자는 내 십자가 장례를 기념하고 준비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우리 마음속에 동기와 목적을 단단하게 붙잡지 않고도 예배드릴 수 있고 헌신할 수 있죠.
'내가 그리스도의 군사여서, 내가 하는 일이 십자가 복음에 혁혁한 공을 세울 거야!' 라고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심정 하지 않아도.. 주님이 우리에게 칭찬하실 수 있는 거예요. '이 여인이 내 십자가 복음과 장례에 참여했다!'
어쩌면 이 칭찬이 여러분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겠습니다. 동기와 목적이 흐릿할지라도, 내가 하는 이 일이 내 사역과 헌신과 선교와 교제가 주님의 복음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 할지라도
그 마음의 중심을 가지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예배에 자리로 나오시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이게 바로 복음과 십자가를 묵상하는 성도가 얻는 영광입니다.
'복음이 전하는 소식에 아무개의 헌신도 기억될 것이다. 복음이 온 세상에 선포되는 일에 그 헌신자의 노고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