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믿는 복음의 중심에는 십자가가 우뚝 서 있습니다. 십자가는 단순한 상징물이 아닙니다.
그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그분의 죽음으로써 우리는 용서함 받았고 그분의 부활하심으로써 우리는 의롭다 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는 어리석어 보이는 그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지극히 연약한 모습으로 죽임 당하신 그 십자가의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십자가가 사람들에게 어리석어 보이는 까닭은, 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는
더 높아지려 하고, 더 많이 가지려 하고, 더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게 여김 받으려 하며, 조금도 손해 보려고 하지 않으려기에... 한없이 어리석게 보이죠.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며 자신의 영광을 내려놓는..
그리고 죽기까지 희생당하는 그 예수님은 완전 어리석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지각으로는 어리석어 보이는 그 모습 속에 하나님의 지혜가 감취어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조금도 방어하지 않는 그 연약한 모습 속에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인내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수치와 죽음의 상징이었던 십자가가 사람들에게 소망과 구원과 영광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역설이요, 아이러니 입니다.
이 "십자가 역설"을 깨닫지 못하고, 믿음으로 체험 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아이러니"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 속에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조롱했고, 모욕했습니다.
-지나가는 군중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처형을 감당했던 로마 군병들.. -사형을 언도했던 본디오 빌라도 -본디오 빌라도를 압박했던 유대 지도자들 모두가 다 예수님께 조롱과 모욕의 말들을 쏟아냈습니다. 본문 마27장에는 그러한 내용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쏟아부어졌던 그 조롱의 말들 속에 십자가에 아이러니 (또는 역설) 들이 나타납니다.
오늘 말씀에는 3가지 아이러니 들만 정리해서 말씀드리지만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고난의 여정속에 예수님을 조롱하며 내뱉은 말들이 예수님을 모욕하려고 내뱉은 말들 속에 십자가의 의미가 설명되어 있는.. 아이러니가 나타난다는 겁니다.
진리는.. 사람들에게 때로 오해받고, 때로 멸시받고 짓밟혀도, 결국 진리는 오해받고 짓밟힐수록 더 밝히 드러나고,
사람들이 무심코.. 때로는 알면서도 모욕하기 위해서 주었던 모든 말들이 다 아이러니로, 오히려 복음을 증거하는 말들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마27장 본문 속에서는 세 가지 아이러니가 나타납니다.
▲1 첫째 군병들에 의해서 왕으로 조롱 받으셨던 예수님은 실제 왕이셨습니다.
마27:27~30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이 군병들의 행동은 평소 십자가 처형을 하는 군병들의 모습과 전혀 다른 행동들입니다. 보통 로마 군병들이 십자가 처형은 할 때는 이러한 행동들을 할 이유도 없고, 또 그랬던 적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총독 관저 안으로 끌려 가시자, 모든 군병들이 다 예수님을 둘러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자주색 옷을 입힌 것은, 왕의 옷을 상징하는 옷을 입힌 것이었고 왕의 면류관을 상징하는 면류관을 가시로 만들어 머리에 씌우고 또 왕권을 상징하는 홀, 그 왕의 지팡이 모양으로 갈대를 그 손에 쥐어주고 나서는 모두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겁니다.
이 모습은 마치 왕이 나타났을 때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 앞에 경배하는 모습을 연출한 것이죠.
그들이 진정 예수님을 왕으로 여겼기에 이런 행동을 한 것입니까? 아니죠. 조롱하기 위해서.. 이 모든 상황을 연출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실제로 왕이셨습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해 이렇게 (왕대접하는) 모욕적 행동을 했지만 실제로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셨습니다. 아이러니 하게 그걸 증거한 거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머리 위 죄패에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어요.
십자가 형으로 죽임당하는 죄수의 머리 위에는 그 사람의 죄목, 왜 이 사람이 십자가 처형을 당해야만 했는가를 설명하는 죄패를 기록했습니다. 그의 죄목을 결정하는 사람은, 빌라도였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빌라도에게 요청했습니다. '자칭 유대인이라 왕' 그렇게 써 달라고 했죠.
'유대인의 왕을 자칭 하다가, 로마법에 저촉을 받아 십자가 형을 당한 사람이다' 라고 사람들이 인식하도록, 그렇게 써달라는 것이죠.
사실 예수님은 로마제국에 반역 운동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씌운 거짓된 혐의였습니다. 실제로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님께 붙인 죄목은 '신성모독죄' 였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그게 신성모독죄로 본 것이죠.
예수님이 '성전을 헐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일으키리라' 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라고 하는 그런 발언들, 이런 것들이 신성모독죄에 해당되어서, 유대 법정에서는 신성모독죄로 고발 되었던 것이죠.
그러나 그러한 유대 법정의 제목으로는 사형이 언도 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피지배 민족의 종교나 문화를 존중하는 그러한 정책을 폈기 때문이죠.
여러 나라들을 지배하려면, 그 나라가 존중하는 종교 문화를 로마정권이 존중하는 것이 통치의 가장 중요한 기본이요,
그래야만 백성들의 지지를 얻기 때문이었죠.
오히려 헤롯 대왕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솔로몬의 성전보다 더 멋진 성전을 지어줌으로써 유대인의 마음을 얻으려고 했던 것이죠. 이것이 다 로마의 정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지도자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고소할 때는 거짓 혐의로 '로마제국에 반역을 일으키는 선동가'라는 그런 거짓 혐의를 씌우고, 그에 따른 거짓 증인들을 내세워서 예수님이 한 번도 하시지 않은 '국가 반란죄' 라는 죄목을 덮어씌운 거죠.
그래서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자칭 유대인의 왕'으로 씀으로써 예수가 자신을 드러내고 사람들 선동했다는 거죠.
그래서 '자칭'이란 말을 붙여달라고 했는데 빌라도가 거절했죠. '내가 쓸 것을 썼다' 라고 말했죠. 요19:22
그것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진짜 왕으로 인정해서가 아닙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더 큰 모욕을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칭'이라고 하면 개인의 문제가 되지만 그 말을 떼어 버리면, 유대민족 전체가 조롱을 받는 것이죠. 그래서 '유대인의 왕'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모욕주기 위한 죄패가 곧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증거하는 증거가 되었다는 이것 또한 아이러니 입니다.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해서 행동했던 로마 군병들, 빌라도를 통해서 진짜 왕이신 그분이 사람들로부터 왕의 취급을 받으며 조롱을 받으셨지만 그분이 진짜 왕이셨다는 것... 얼마나 놀라운 아이러니 입니까!
▲2. 두번째 아이러니는 '다른 이들은 구원하고, 자신은 구원할 수 없느냐?'하고 조롱 받았던 예수님은, 실제로 자신을 구원하지 않으심으로써,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메시야 셨어요.
마27:41~42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남은 구원 한다더니, 정작 자기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 군!' 이것이 유대 지도자들의 조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조롱하려고 예수님께 내뱉은 말이지만 그분은 실제로 자신을 구원하지 않으므로써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메시야 이었던 것입니다. *대속적 죽음 때문
사람들이 생각하는 메시야는, 자기 자신을 방어하고, 또 자기를 과시하고 드러내고, 자신의 능력을 만방에 나타내 보임으로써 '나는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사람들의 상식적인 관념이지만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신 십자가는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자기를 구원하지 않는 방법으로, 자기를 모든 이들이 담당해야 될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함으로써, 즉 자기의 대속적 죽음으로써, 남을 구원하는 메시야 이셨다는 거예요.
그러나 이들의 조롱의 말 속에,
복음의 의미, 십자가 의미가 담겨 있었던 겁니다. 이 또한 아이러니죠.
▲비슷한 상황으로 요한복음에 보면 대제사장 가야바가 사람들을 설득, 선동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한 사람이 죽어서 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고 살아나는 것이 더 유익하지 않느냐?' 요11:50 이 말 자체를 보면 완전한 복음의 메시지죠. 초신자들이 성경 읽으면 진짜 오해합니다.
예수님 한 사람의 죽음으로써, 모든 이들이 살아나는 사건이 복음의 메시지 아닙니까! 그러면 가야바가 십자가의 예수님의 죽음에 의미를 알고 이런 말을 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문맥은 전혀 다른 의도에서 한 말입니다.
가야바가 어떤 배경에서 이런 말을 하게 됐냐면, 거짓선동을 일으켜서 예수님을 제거해야 되는데 사람들이 그 선동에 따라줘야 될 것 아닙니까. 가야바 혼자로선 역부족이죠.
가야바가 거짓과 불법으로 함께 예수님을 제거하려 하는데 사람들이 동조를 해야 될 거 아니에요. 산헤드린 공회원들이나 군중들이.
공회원 중에는 니고데모 같은 양심 있는 사람도 일부 있지만 그 외 대다수 공회원들을 선동해서
가야바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따르게 해야 되는데 거짓 증인들도 세워야 되는데, 그 거짓증인에 동조할 무리들도 모아야 되는데,
그래서 빌라도를 압박할 사람들을 규합해야 되는데 어떤 말로 선동할까요? 바로 이 말로 한 거예요. 요11:50
'이제 예수님이 점점점 커지면,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믿게 될 것이고 그 이후에 찾아올 일은, 로마 정권이 우리를 완전히 진멸시켜 버릴 것이다.' 이게 다 거짓 선동인 거죠.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교훈을 하고, 기적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면 로마제국이 그로 인하여 유대민족을 멸절시킬 것이다.. 라는 것은 전혀 근거 없는 거젓 선동 이었죠.
왜냐면 예수님은 한 번도 로마에 저항한 적이 없기 때문이죠. 그러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라고 말씀 하신 적은 있었죠. 그러나 이 말은, 가이사를 부정하고 반대한 것은 당연히 아니죠. 그러나 사람들은 뭔가 꼬투리를 잡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없는 것도 만들어내는 거죠.
어쨌거나 기승전결에서, 기승전-예수죽임 인 거죠. '예수 한 사람만 제거되면, 우리 모두가 평안하고 그리고 우리가 잘 살텐데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더 좋지 않느냐?'
아이러니하게도 가야바의 말대로 예수님 한 분이 희생하셔서 세상 모든 이들을 구원하는 메시아가 되신 것입니다.
이처럼 가야바의 말도, 아이러니가 돼 버린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있으실 때도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모욕해서 가로되 '네가 만일 메시야거든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자신을 구원해 보라!' 막15:32
만약 이때 예수님이 화를 못 참고 폭발하셔서 '이것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내가 못 내려갈 줄 알고?'
그러고 갑자기 손과 발에 못이 튀어나오게 하시면서 거기서 내려오셔서 십자가를 땅에서 뽑아서 빼들고 휘두르시며 천사들을 동원해 가지고, 그 조롱하는 자들을 완전히 제압을 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능력이 충분히 있으셨죠.
그런데 그 능력을, 자신을 구원하는 일에 쓰지 않으셨어요. 파도를 잠잠케 하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릴 수 있는 그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이 자신을 구원 하셨다면, 모든 이들을 구원하시는 메시아가 되실 수 없었기에
철저히 자신을 십자가에, 하나님의 어린양, 대속 제물로 내어 주셔야만 되는 사명으로 오셨기 때문에, 자신을 구원하지 않으심으로 모든 인류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주님을 거짓으로 혐의를 씌우고 제거하기 위하여, 선동하는 말로 '한 사람이 죽어 모든 백성이 사는 것이 유익하지 않느냐?'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아이러니 입니까! 아니, 십자가의 도를 이렇게 잘 설명하다니요!
복음서는 온통 아이러니입니다. 예수님께 쏟아부은 조롱들과 거짓 선동들을 뒤집어보면, 모두가 맞는 말이었어요.
십자가에 진리가 진정 살아 있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인 거죠. 사람들은 교회와 성도들을 무시하고 모욕해도 그게 다 아이러니 하게 오히려 복음의 진리를 드러내며, 하나님의 사람의 속성을 드러내는.. 그런 일에 쓰임받는다는 거죠. 그러니 참고 결과를 내다보며 기다리면 됩니다.
▲3. 세 번째 아이러니는, 하나님의 버리심에 대하여 절규하셨던 예수님은 진정 하나님을 신뢰하셨다는 겁니다.
27: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6 '제구시(오후 세 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저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니,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하나님께서 버리시지 않아야 되지 않느냐?'
근데 지금 모순은, 하나님이 버리신 건데 저가 메시야가 될 수 있느냐? 라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이 말씀만 보면, 하나님의 버리심에 대하여 원망하고, 상처받고, 불평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는데 갑자기 하나님, 나를 버릴 수 있습니까?' 나는 말처럼 오해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이 말은
'하나님이 나를 버리심으로 구원을 이루셔야 하기에 저는 이 버리심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이 버리심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저는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라는 고백이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말은,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항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지혜와 능력과 사랑에 대한 감탄입니다. '나를 버리셔야 할 만큼 이 세상을 사랑하사 나를 버리셔서라도 이 세상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는군요!'
'나를 버리셔야 할 만큼,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그 긍휼하심은 끝이 없군요.' 예수님은 이 하나님의 버리심을 받아야만 했고
그 버려지심의 한복판에서도 하나님의 버리심을 불평하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버려진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입니까? 때로 세상에서 버림받고, 때로 가족에게서 버림받고 이렇게 버림 받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예수님이 가장 깊이 체험하신 분이시죠.
우리는 사회로부터, 때로 가족으로부터, 누군가로부터 버림받아도 하나님으로부터는 버림받아 본 적이 없어요.
하나님은 그 누구도 버리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고 내가 생각했을 뿐이에요.
나에게 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내가 원치 않는 일이 일어나고 나에게 몸과 마음이 아픈 일이 일어날 때 '하나님, 나를 버리셨나이까?' 스스로 생각할 뿐이지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버리신 유일한 한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었다는 것! 얼마나 이것은 아이러니한 일입니까!
▲그런데 왜 유일하신 아들을 하나님이 왜 유일하게 버리셔야만 했습니까?
그것은 우리 모두를 버리시지 않기 위하여 아들을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버림받은 그 아들은, 버림받은 상처를 고백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나를 버리신 그 하나님은, 여전히 나의 하나님이시고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세상을 구원하시기까지 나를 버리실 만큼, 그들을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이심을.. 여전히 신뢰하십니다.
유일하신 아들이, 유일하게 버림받으심으로 우리 모두를 다시 살리셨다는 것! 이 진리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에 들어있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고난 속에 부어진 모든 조롱과 모욕들은 아이러니하게 십자가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설명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만왕의 왕인 내가 너를 위하여 죽었다. 하나님의 아들인 내가 나를 구원하지 않고 너를 위해 죽었다. 유일하신 아들인 내가 아버지의 버림을 받음으로 내가 너희를 다시 살렸다. 너는 그처럼 보배롭고 존귀한 자다. 아버지의 사랑이 나를 통해 너희에게 흘러가기를 원하신다.'
▲마치는 말/ 예수님이 길과 진리와 생명이심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예수님께 대하여 조롱하며, 오해하며, 공격하며 때로 예수님을 믿는 이들도 공격하며 조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진리는, 공격을 받을수록 더 아이러니를 만들어 냅니다. 진리의 대하여 퍼부었던 수많은 조롱들이, 다 아이러니가 되어 나타날 것입니다.
역사상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없애야 된다고 주장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독한 무신론자죠. *볼테르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의 집을 성경을 찍어내는 인쇄소로 만들어 버리셨어요. 얼마나 아이러니 합니까!
우리가, 또한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받는 수많은 오해와 조롱... 그것이 다 아이러니가 되어 오히려 복음을 증거하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십자가에 퍼부어졌던 모든 말들이, 당사자들은 다 모르고 한 말인데 실제 사실이 되어버린 아이러니가 되었듯이 말입니다.
역사 속에서도 교회를 없애려고 핍박했던 수많은 국가들, 정부들이 도리어 교회를 더 확장시키는 결과를 빚었습니다. 아이러니죠.
그것은 십자가의 진리가 살아있는 진리이며 그리고 천지를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붙들고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을 향한 모든 공격이 아이러니가 될 겁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붙들고 나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수많은 아이러니를 만드는 그러한 역사의 주인공이 될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