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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11:23~27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나타난 변화

LNCK 2023. 4. 4. 16:25

사도행전 11:19-26 "다소에 가서 만나매" YouTube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나타난 변화       고후11:23~27     09.04.12.

◑1. 비겁한 제자들을 용감한 제자들로 변화시킨 "예수님의 부활"

주님의 12 제자들은 3년 동안 주님을 모시고 살았습니다. 
3년 동안 주님과 함께 먹고, 함께 자고, 
주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이후에 
이 땅을 거쳐간 수없이 많은 인간들 가운데에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던 성자 하나님과 
3년 동안 함께 지냈던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 12명 밖에 없습니다. 
그들이야말로 특별한 은총을 입은 사람들 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까지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빠르게 이해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수차례에 걸쳐 '내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것을 예고' 하셨지만 
제자들은 주님의 그 말씀을 아예 믿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제자들은 오히려 '슈퍼 파워'를 지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불의한 로마제국을 물리치고, 반드시 집권하시리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도상에서, 예수님의 집권시에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지를 놓고 서로 다투었습니다. 

심지어는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시면서 
그 떡과 포도주는 십자가 위에서 찢어질 당신의 몸과 피를 뜻함을 
다시 밝혀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그 만찬석상에서조차 누가 큰지 또다시 서로 다투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베드로의 그 고백은 머리의 고백이었지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고백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자신의 목전에서 주님께서 무기력하게 끌려가시게 되자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면서 
저주하고 맹세하기까지 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은, 주님을 버리고 도망치기까지 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은 삼십 개에 예수님을 배신했던 가룟유다 역시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까지 
예수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부활을 목격하고 다시 달라진 제자들
그런데 참으로 희한한 일이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던 그 비겁한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후에, 예수님에게 자기 생명을 걸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만 생각한다면, 예수님께서 못 박혀 돌아가시는 현장에서 도망간 
제자들이라면.. 그 이후에는 뿔뿔이 흩어져서 
예수님과 무관한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도리어 정반대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후에, 주님의 참된 증인으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참된 증인으로 사는 삶에 대하여 
되돌려 받았던 대가는 
세상 부귀영화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그 대가는, 참수형이거나 화형이거나 맹수의 밥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 
주님을 버리고 도망쳤던 예전의 비겁한 제자들이 더 이상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내려치는 칼날에 목이 떨어져 나가면서도, 불에 타 죽으면서도 
맹수에게 찢겨 죽으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예수 부활!'을 외치면서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정말 부활하셨고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정말 만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항상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180도 변화된 바울

바울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 예수님을 한 번도 직접 뵌 적이 없었습니다. 
유태교 열렬신자였던 바울은, 예수님에 대해서 
예수님을 처형한 유대교 지도자들이 지니고 있던 인식과 
똑같은 인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나사렛 빈민 주제에, 하나님의 존재를 도용한 예수는 
신성모독죄로 죽어 마땅한 대역죄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무자비하게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일에 우두머리리가 
되겠다고 자처했습니다. 

▲그런데 그 바울이 어느 날 갑자기 달라졌습니다. 
그토록 부정하고 대적하던 예수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대면하고 나서부터 나타는 180도 변화였습니다.

예수님을 저주하고 욕하던 자신의 입으로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유대교의 관점에서 본다면, 바울은 유대교를 배신한 배교자 인생이었습니다. 
바울이 그토록 맹신했던 유대교를 버리고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기 위해서 치러야 할 대가 역시 혹독하기만 했습니다. 
유대교로부터 배교자로 지목당했던 바울은 
일평생토록 유대교의 살해 위협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고후11:23~27 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간다는 이유만으로 
바울은 인간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당해야 할 모든 고난과 시련과 
박해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려는 바울의 앞길에 
장애물이 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부활하셨고,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분명히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언제 어디서나 바울과 함께 해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바울의 삶 속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특징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1) 첫째는 <가치관의 변화>였습니다. 
믿음의 조상의 후손인 유대인으로 태어난 바울은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할례는 자기가 하나님의 선민 임을 증명하는 자랑스러운 표식이었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역사상 초대 왕을 배출했던 베냐민 지파였습니다. 
바울의 본래 이름이 사울이지 않습니까. 

그 아버지가 사울왕을 배출한 베냐민 지파 소속임을 얼마나 긍지로 생각했으면 
자기 아들에게 사울왕과 똑같은 이름 사울을 붙여 주었겠습니까. 

바울은 유대교 내에서 가장 엄격한 종파인 바리새파에 속해 있었습니다. 
바울은 유대교 최고의 율법 스승인 가말리엘의 제자였습니다. 

나아가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일에 선봉장이 될 만큼 
젊은 나이에 이미 유대교 내에서 탄탄한 입지를 다지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유대인이었으면서도 로마 시민권자였습니다. 
그 모든 것은 바울이 유대교 내에서 출세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귀중한 자산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바울에게 그 모든 것은 
한낱 배설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들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삶의 수단일 뿐 
그런 것들이 자기 자신을 영원히 구원할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바울은 그 이후에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했습니다. 

인간의 죄값을 대신 치러주시기 위해 사망의 형벌을 대신받으시고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자기 자신을 영원한 구원으로 인도해 줄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2)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바울에게 나타난 두번째 특징은 <순종>이었습니다. 
바울의 순종은, 주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만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순종은, 주어진 상황에 대한 순종을 포함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은 예수님의 증인으로 산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에서 당할 수 있는 모든 고난과 시련과 박해를 다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모든 상황을 피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 모든 상황을 순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기 자신과 함께 하고 계시기에 
자기에게 주어지는 모든 상황속에는 주님의 뜻이 있고 
주님께서 반드시 그 결과를 책임져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8:18절과 28절을 통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생각 하건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

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런 믿음으로 바울은 모든 상황에 순종했기에 
바로 주어진 그 상황 속에서, 주님에 의해 날로 새로운 바울로 빚어져 갈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젊디 젊은 바울이, 무려 13년 동안이나 고향 다소에서 칩거하는 
상황에도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바울은 
그 즉각 다메섹에서, 그 이후에는 예루살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시지 않고 
그 대신에 바울로 하여금 고향 다소에서 13동안 칩거하게 하셨습니다. 

온 고향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안고, 유대교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향했던 바울이 
어느 날 느닷없이 젊은 나이에 고향으로 낙향해서 
딱히 할 일도 없는 상태로, 무려 13년을 칩거한다는 것은 
그에게는 엄청난 고통일 수 있었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그와 같은 바울을 
영락없는 실패자 인생으로 낙인찍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에 대해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을 실패자 인생으로 여기고 낙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13년의 칩거기간 동안에, 만약에 바울이 스스로 절망하거나 
자기를 실패자 인생으로 간주했더라면 
바울은 폐인이 되었거나, 아니면 그 13 년이 지나기 전에 
스스로 생을 포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주님께서 자기 영혼의 불순물을 제거하시어 정금처럼 정제해주시고 
그 모든 상황 속에서도 매일매일 주님의 신실한 뜻이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주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으로 귀결됨을 믿었던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감히 비교될 수 없음을 굳게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 한결같은 믿음속에서 13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은 
바울로 하여금 자기 성숙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시간들로 승화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바울은, 성경이 전해주는 바대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바대로 
위대한 사도 바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울에게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바울의 가치관이 새로워지고  
주님께 대한 순종의 삶이, 바울에게 체질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주님께서 작정하신 때가 되었을 때 
주님께서는 고향 다소에서 칩거 중인 바울을 불러 내셨습니다. 

행11:25~26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
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주님께서는 바나바를 통해서 바울을 (그 당시 이름으로 사울을) 
안디옥 교회 공동 목회자로 불러내셨습니다. 

바울은 '왜 예루살렘 모교회가 아니고, 신생 안디옥교회냐고? 
왜 내 소신껏 목회할 수 있는 담임목회가 아니라, 공동목회냐고?' 이런
단 한마디의 이의나 반론도 주님께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주님께서 주신 새로운 상황에 전적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로 인해 다소의 이름 없는 유대인의 불과했던 바울에 의해 
거대한 로마제국의 역사가, 인류의 역사가.. 
새로워지는 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바울 개인이 위대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부활하셨고, 바울이 분명히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바울과 함께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성도의 간증

지난 수요일에 세례식이 있었습니다. 
그날 세례를 받은 장OO 성도님의 신앙고백문을 본인의 허락하에 읽어드리겠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시절에, 한동안 주일학교에 다닌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교회에서 늘 먹을 것을 주는데 관심이 더 많았습니다. 

선교사님이 세운 역사깊은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3년 내내 예배드릴 때에도 성경은 여전히 따분하고 지겨운 것이었습니다. 

일본에서 2년간 생활하는 동안, 교회 목사님의 소개로 집을 얻고 
그 인연으로 몇 개월 교회에 다닌 것도 
순전히 집을 소개해준 데 대한 마음의 빚을 갚기 위함이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교회를 다니면 다닐수록, 이성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황당한 이야기로 가득 찬 성경이 더더욱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완악한 마음으로 37년을 살았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하여 아이의 엄마가 되었지만 
제 삶은 살아갈수록 허무하고 욕구불만 투성이였습니다. 

그렇게 살던 제게, 처절하고 절망스러운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이혼! 그것도 남편의 외도로 인한 이혼이라는 
드라마에서나 본 남의 이야기가 제게 현실로 다가온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중국 사람이었습니다. 일본 유학 시절에 만나 결혼했지만 
중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저는, 남편과 떨어져서 
아이들과 한국에서 살 때가 많았습니다. 

10년간의 결혼생활 중에, 부부가 함께 산 기간은 절반정도밖에 되지 않았죠. 
그러다보니 늘 혼자였던 남편의 마음이, 다른 여자에게 끌린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남편으로부터 나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는 말을 직접 들으니 
이루말할 수 없는 배신감과 분노에 치가 떨렸습니다.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중국에서 혼자 매일 울면서 
남편을 저주하며 저 제 삶을 비관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교회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처음으로 제 발로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제가 살던 곳에는 한국인이 없었기 때문에, 한인교회도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중국인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중국어 설교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찬송도 따라 부를 수 없었지만 
그날 이후로 주일이 기다려지면서, 또 교회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다음 주일 다시 교회에 갔을 때, 그 날도 설교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어 
목사님의 설교시간에 강대상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우연히 벽에 붙어 있는 사도신경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중국으로 쓰여 있었지만, 어릴 때 교회에서 배웠던 우리말 사도신경의 내용을 
기억해가면서 더듬더듬 한 줄씩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러다가 중간쯤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를 잃는 순간 
저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 직전까지만 해도 '죽은 사람이 살아나다니.. 말도 안 된다'며 비웃기만 했던 
그 말씀이, 갑자기 믿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가운데 제 입에서는 
'주님 믿습니다. 모두 다 믿습니다' 라는 말이 계속 반복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믿어지면서 
그렇게도 믿어지지 않던 성경 말씀이, 온 마음으로 믿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이후 제 인생이 주님 안에서 새로워졌습니다. 
그토록 저주하던 남편을 이해하고 용서하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제 눈의 들보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남편을 실족하게 만든 장본인이, 제 자신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돕는 배필'이 아니라, 너무나도 이기적이고 일방적인 이었던 
제 죄악을 깨닫게 된 것이었습니다. 

제 인생 최악이라고 여겨겼던 날들이 
실은 저의 죄악마저도 선으로 바꾸시는 주님의 계획이셨음도 깨달았습니다. 

저의 죄악을 깨닫게 되면서, 남편의 마음이 돌아서도록 간절히 기도드렸지만 
남편은 새로 만난 여자를 위해 끝까지 이혼을 요구했고 
저는 아이들과 함께 올해 1 월 한국으로 되어 돌아왔습니다. 

앞으로 혼자 두 아이를 키워야 하는 제가 
다른 사람 눈에는 그저 팔자 사나운 여자로 보이겠지만 
지금 제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평안과 소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번도 소망이란 걸 가져본 적이 없는 제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참으로 많은 소망을 주셨습니다.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달려가 많은 열매를 맺는 소망, 
-제 아이들이 믿음의 자녀들로 자라, 신실한 주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소망, 
-저로부터 시작된 믿음의 계보가, 주님 오실 때까지 자자 손손 이어지는 소망,
-주님께서 제게 주신 달란트를 두 개로, 네 개로, 여덟 개로 키워나가는 소망,
-제 주위에 수많은 불신자를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소망 등 
주님께서 얼마나 많은 소망을 주셨는지 모릅니다. 

37 년간 십자가에 도를 미련한 것으로 여기며 살던 저를 
부활의 주님께서 은혜로 불러주셨습니다. 
그 주님께 무한히 감사드리면서 
이제 제 남은 생활아낌없이 주님께 드리기를 결단합니다.」 

그날 그 중국인 교회에서 이 분은 
마치 도상에 바울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죽은 사람의 살아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고 비웃던 분이 
어떻게 한순간 주님의 부활하신 것과 
주님의 모든 말씀을 믿을 수 있게 되었겠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에, 이 분의 가치관이 새로워졌습니다. 

자신을 배신하던 남편을 저주하고 증오하던 옛 삶을 버리고 
남편을 그렇게 만든 것은 자신의 허물임을 깨달아 회개하면서 
남편을 진심으로 용서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끝내 새 여자와 살기 원하는 남편과 결별해야 하는 상황을 
순종으로 받아들이고, 두 자녀를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지금 그분은 자기 자신을 인생 실패자로 여기지 않습니다. 
자신의 상황에 대해 절망하거나 낙심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 태어나 단 한번도 소망이라는 것을 가져본 적이 없는 
그 분의 심령속에는, 수많은 소망들로 충만합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부활하셨고 
그분이 부활하신 주님을 분명히 만났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 분과 함께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분이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한 
어찌 자기 모든 아픔이, 합력해서 선으로 귀결되지 않겠습니까. 

어찌 현재의 고난이, 장차 나타날 영광과 감히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그 분의 삶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의 뜻이 아름답게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마치는 말
여러분,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러주시기 위해 십자가위에서 못 박혀돌아가셨던 
예수님께서는 사흘째 되는 날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완악한 바울을 불러내시듯이 
중국 땅, 중국인 교회에서 가련한 한 명의 한국 여성을 불러내시듯이 
이 시간 우리에게 임하시어,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부활하신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가지십시다. 
부활하신 주님을 우리 인생의 주인으로 모셔들이십시다. 

오직 부활하신 주님안에서만 
공동묘지에서 물거품처럼 사라질 허망한 가치관이 아니라 
나를 영원히 세워줄 영원한 가치관을 지닐 수 있습니다. 

오직 부활하신 주님을 힘입어서만 
우리는 주어진 모든 상황에 순종할 수 있고 
그 모든 상황 속에서 주님에 의해 새로운 존재로 빚어져 갈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안에서만 우리의 모든 절망은 소망을 향한 관문이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우리의 모든 아픔은 참된 생명을 향한 발판이 됩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