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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26:69~75 낮은 곳으로 올라가라

LNCK 2023. 4. 4. 20:30

◈낮은 곳으로 올라가라      마26:69~75        2023.04.03.

밤새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이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정에서 재판을 받으십니다.

불법의 무리들에 의해서 불법한 시간에!  
(그 시간은 유대법에 절대 재판이 이루어지는 시간이 아닙니다)

근데 이들은 그 종교적 광기에 붙잡혀서 그 모든 것들을 무시합니다. 
그리고 오직 공공의 적이 된 예수님 한 사람을 잡기 위해서 
한밤 중에 이 불법한 과정을 쭈욱 진행하고 있습니다. 

소집된 시간, 소집된 현장.. 모두가 불법입니다. 유대법의 기준으로 볼 때는. 
이들이 누굽니까? 종교 권력자들인데, 이들의 모든 삶의 기초는 법이에요. 

항상 모든 것이 (유대 율)법의 논리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 스스로 어떤 특정 인을 죽이기 위해서 
이 불법한 시간에, 불법한 과정을 거쳐, 불법한 재판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는 우리가 여러 번 들어와서 익숙하게 알기 때문에 
굳이 설명을 더 이상 안 들어도 압니다. 

◑침묵하시는 예수님

근데 아주 특이한 예수님의 태도를 발견하는 거죠. 
예수님은 이 모든 과정에 수동적으로 이끌려 다니시면서 
한 마디도 사실은 입을 열지 않으십니다. 침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요.  

이사야서 53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양으로 비유를 하죠. 
마치 '도수(도축)장으로 끌려 가는 양 같다' 그랬어요. 
그처럼 '그 양이 입을 열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아주 미세한 몸짓, 표정, 태도 하나도 
다 철저히 하나님의 예언된 선지자들의 말씀을 좇아 사셨어요.

그 침묵 마저도, 사실은 성경에 이미 예고되었던 침묵이에요. 
사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자 우리는 이 "예수님의 침묵"을 놓고, 좀 더 깊게 생각을 해야 됩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처지 같았으면.. 
체포나 재판 등 사법절차에 대해서 논박을 했을 것이고 

자기의 마지막 시간 일텐데, 자기의 존재에 대해서 
이런 저런 설명을 했을 거예요. 

예수님은 그 설명을 할 수 없었을까요? 
예수님이 설명 할 줄 몰랐을까요? 그렇지 않죠! 

어쩌면 예수님은 이 침묵으로 
적극적인 자기 변호를, 변증을 하셨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사람의 언어라는 게 뭐죠? 
우리는 입만 열면 타인을 위한다고 얘기하고 
정의를 위한다고 얘기하고, 하나님을 위한다고 얘기하지만 

입만 열면 우리는 
우리의 해석과, 우리의 주관적인 그 경험치와 
잘못된 편향적, 확증적, 편집 증세를 통해서 
자기 얘기를 쏟아낼 때가 많아요. 

근데 예수님이 만약에, 이때 입을 여셔서
이런저런 설명을.. 마지막 재판의 자리에서 하셨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 것 같습니까? 

예수님의 발언에, 온갖 인간들의 해석과 추측이 뒤엉켜져서 
오히려 예수님의 존엄한 존재 자체가 
옳게 해석되거나 설명되지 않았을 거예요. 

그래서 로완 윌리엄스 는, 이 대목에서 이런 말로 설명합니다. 

「이 세계는 온갖 악한 것들로 가득하다. 
어둠의 권세로 세상은 이렇게 뒤틀려져 있고, 왜곡되어 있고, 
고통이 끊이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의 그 자질구레한 권력이 무수히 남용되고 있다. 

왜곡되고 비틀어진 세계에서는, 그에 관한 어떤 말을 하던지 간에 
입 밖에 나오는 순간, (왜곡하려고) 이 세상이 진한 광기의 옷을 입게 된다.」 

이 말은 사실이죠. 
예수님이 만약 '그게 아니고..'  하고 말하는 순간 
편견과 자기 의에 매달린 인간들은 
이 세상의 종교적 광기의 옷을 입히고,  
그 예수님의 말씀에다 덧씌우기 바빴을 것입니다. 

「그리고 '해석'이라는 미명으로, 아마 그 말씀은 난도질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이 세상의 말들로 예수님을 묘사하는 순간 
그는 이 세계 안에서, 자기 자리를 차지하려는 여러 경쟁자 중의 한 사람으로 
취급 당할 수도 있다. 

예수님의 이 침묵이야 말로, 오히려 온 세상을 향한 가장 적극적인 대답이었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참 공감이 가는 이야기죠. 

▲사형을 집행했던 로마 군병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면 못을 뽑고 밧줄을 풀어서 내려와 봐라' 조롱했죠.

이제껏 우리 기독교가 혼선을 일으켜서 가르쳤거나 
이해해 왔던 복음은 '능력 종교' 였습니다. 

'네가 성공해야 되고, 
교회도 성도도 세상속에서 크기를 확보하고, 능력을 확보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초월과 기독교가 갖는 힘을 보여 줘야 돼!' 

굉장히 위험한 생각이죠!  

「우리는 초월, 기적.. 하면 
거대하고, 엄청나고, 능력과 위대한 것으로만 
초월적, 기적적일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초월은 오히려 하향적 초월이다.

사실은 예수님이 심판대 위의 
세상에 가장 약하고 저주받은 모습으로 올려져서 

즉 십자가에 달림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을 이루고, 
우리를 구원하신 그 구원의 방식은 완성이 되었다.」  *하향적 초월

이거야말로 초월(기적)이라는 거죠. 
우리는 도저히 견딜 수 없고,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어떤 사안에 떠밀려서도 

스스로 물러서지 않고, 스스로 무너지지 않는 모습을 통해서 
역설적인 초월의 기독교를 설명할 수 있어야 됩니다. 내가 약할 때 곧 강함을 보여주는 거죠!

이런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또 그 뒤를 좇았던 수많은 역사 속의 하나님의 신실한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는 뭘 보고 여기까지 왔습니까? 

그들에게만 나타난 어떤 신비한 자유
이걸 보통 다른 표현으로는 '낯선 자유' 라고 해요.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우리에게 뭘 느껴야 될까요? 

'낯선 자유'를 느껴야 돼요. 

'저 사람은 뭐지?' 
그렇다고 저 사람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거머쥐고 
떵떵거리고 잘사는 분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출한 능력이 있는 사람도 아닌데... 그의 삶이 자유로워요. 그들 눈에 '낯선 자유'인 거죠.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만이 알 수 있고 
서로만 눈치 챌 수 있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어색한 '낯선 자유'인 것입니다. 

똑같이 싸워서 쟁취 안 하고, 똑같이 경쟁 안 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뚝 세워지는 그 '낯선 자유!' 

이것이 이 고난주간 속에서 
왜 예수님은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셨는가? 그 '낮은 데로 올라가시는' 삶속에서
거기에서 우리는 이 '낯선 자유'를 만나야 됩니다. 

◑이제 예수님이 재판받는 현장까지 따라온 한 제자(베드로)의 
무너지는 모습을 통해서 교훈을 받게 됩니다.

마26:69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여기서 가장 폐부를 찌르는 표현이 '함께' 라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마지막 밤에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들어가셨어요. 

'함께' 깨어 기도 하지 못하는.. 
그래서 육신이 약해서 졸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가슴 아프게 제자들에게 건넸던 아주 중요한 표현 하나가 있었어요. 
'너희가 잠시라도 나와 함께 있을 수 없더냐?'

우리가 물리적으로 '함께 있다'고 함께 하는 건 아니죠. 
동상이몽을 꿈꿀 수도 있잖아요. 

여기서 말하는 '함께'는 보통 중요한 얘기가 아닙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해 봐요. 

'아니, 나같이 무능하고 지푸라기 같은 인생을.. 
뭐 사실 예수님께 큰 도움도 안 되는데.. 
내가 꼭 있어야 뭐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실 수 있고..' 그런 것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뭐 굳이 예수님은 그렇게 제자들과 '함께 있기'를 청하시고, 원하시고, 바라셨을까? 

여러분, 아이들을 키울 때 어떤 마음이세요? 
키우면서 매일매일 아이들 눈을 쳐다보면서 
'요거 키워 가지고 뭐에 써먹을까?' 항상 용도를 생각하세요? 그런 거 아니죠. 
'이 아이를 위해서라면, 이 아이만 나와 함께 있다면 
내가 세상에 무슨 짓을 해서라도 얘를 내가 책임진다!'

근데 지금은 얘가 무슨 돈을 벌어다 주는 것도 아니에요. 
그리고 데리고 키우다 보면 
사방에 어질러 놓기나 하고.. 손이 많이 가요. 애들 키우려면. 

근데 엄마 아빠는, 그 아이를 위해서 자기 목숨도 버려요. 
'얘만 내 곁에 함께 있어 준다면!' 

이 '함께' 라는 강렬한 의미를 이해하시겠어요?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하는 그 예수님의 열망이 
그런 느낌이라고요. 

우리가 꼭 무슨 용도에 필요 적절해서 '함께 있겠다'는 말씀이 아니에요. 

▲그런데 바로 그 "함께 기도"하던 기도의 자리의 실패는 
"십자가로 함께 가는" 길목에서 무너집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인 거죠. 기도의 '함께' 자리에서 무너지면, 결국 베드로처럼 실패합니다!

어디서 무너진 거예요? 
"함께 기도"의 자리에서 무너진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엉뚱한 자리에 함께 있었어요.

여기 또 하나 아주 중요한 표현이 뭐냐면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69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26:57 '예수를 잡은 자들이 그를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 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58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베드로가 여기까지 왜 따라 간 겁니까? 
'이 결말이 어떻게 될까?' 

그는 마지막 어떤 기대의 끈을 붙잡고 있었던 거 같아요. 
'이렇게 무기력하게.. 이렇게 무능하게 끌려 갈 분이 절대 아닌데... 
이게 뭔가 저 끝에 반전이 있을 거야!' 
어떤 그런 결말을 기대하고 거기까지 갔던 거 같아요. 

그런데 성경을 잘 보시면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   :58
이렇게 돼 있어요. 

지금 베드로는, 기도의 자리에는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았고, *동상이몽

마치 시1편처럼, 
'죄인들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함께 앉아 있었다' 라는 거죠.  

 

거기 가야바 법정의 '하인들' 틈에 베드로가 끼어 있었는데, 
아마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왔던 대제사장의 성전 경비병이나, 
그들과 한 패인 무리들 틈에 섞여 있었을 거예요. 
왜냐면 거기가 대제사장 관정이고, 거기 하인들이었으니까요.  
그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었어요.  

69절 다시보세요.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70절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예수님에게는 참 가슴 아픈 소리로 들렸을 겁니다. 

74절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그가 저주했다' 그랬어요.
전통적인 해석으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저주했다'고 보죠. 
아무리 그래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저주까지 했다'는 것은 석연치 않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많이 대두되는 새 해석이 뭐냐면 
'이런 사람을 내가 지금까지 인생을 투자해서 따라다닌 내가 멍청한 놈이지.. 
내가 멍청한 놈이지..' 이렇게 자기 자신을 향해 '저주'한 거다... 
이렇게 설명하는 해석이 있어요.


*'저주'의 어근인 '아나세마'는 행23:12, 14, 21절에 '맹세했다'로 나와 있습니다.
본절에서도 베드로가 '맹세했다'고 볼 수도 있죠. 진짜 저주가 아니라요!


근데 최근에 어느 신약신학자의 논문을 보니까 
이 부분을 아주 자세히 설명해 놨는데 
제가 그 논문을 읽다가 깊이 동의가 되더라고요. 

뭐냐면 '당시 유대인들의 수사법 차원에서 이해를 해야 된다'는 거죠. 
그 차원에서 이 본문을 해석하면, 베드로의 '저주'의 진의가 뭐냐면,

예를 들면, 우리가 서로 이제 어떤 이슈를 가지고 논쟁을 해요. 
양자가 말을 주고 받다가 
자기 말에 진심을 더 강조하기 위해서 이런 표현을 쓰잖아요. 

'야, 내가 정말 그랬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그런 수사법의 일환으로 보는 것이 
'베드로 저주'의 해석에 가장 순조로운 이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지금 뭐를 강조하기 위해서 
그런 수사법을 인용 했을까요?

'나는 절대 이 도당이 아니다'
'내가 이 도당이라면 내 손에 장을 지질게!' 
이렇게 표현을 했다고 보는 것이 
전체 문맥에 순조로운 해석이라고.. 저도 동조가 되더라고요. 

베드로가 진짜 악의적으로 예수님을 저주한 게 아니라는 거죠.
'저주했다'는 말은, 유대인의 수사법인데
'내가 그 도당이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는 식의 의미가, 그 진의라는 거죠.

근데 예수님이 고개를 돌려서 그 베드로의 눈을 쳐다보세요. 
자, 어떤 시선으로 베드로를 쳐다보셨을까요?

째려보셨을까요?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을 것 같아요. 

저는, 끊임없는 자애로운 눈빛으로 
예수님이 무너져가는 베드로를 바라보시면서 
'얘, 내가 그래서 너를 위해 십자가에 오른다' 
그 얘기를 눈으로 말씀하셨을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 마태복음의 기자는 뭐가 생각나서? 
'그 시간에 하셨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통곡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