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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서 영광에 이르는 일상

LNCK 2023. 4. 5. 11:23

십자가에서 영광에 이르는 일상  고난주간특새 금 | 22.4.15 - YouTube

◈십자가에서 영광에 이르는 일상       롬8:18, 빌3:10~11       22.04.15.녹취

고난주간 특새 한 주간 동안 십자가를 묵상하며 지나고 있는데요. 
특별히 주제 가운데 "일상" 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 말은 십자가가 우리 생활과 유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가운데서 경험 되어지고 또 살아내게 되고, 
내 삶에 실재한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주제를 정했습니다. 

옆에 분과 인사하겠습니다.
'십자가로 살아가는 일상이 됩시다!' 
십자가를 이번 한 주간 묵상하시면서 받은 은혜가 크신 줄 믿습니다. 

◑고난과 영광은 동전의 양면, 늘 같이 갑니다!

이 십자가는 신비이고 비밀입니다. 
그리고 다이아몬드처럼 수십 갈래로 그 빛을 반사하기 때문에 
묵상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 깊이를 알 수가 없고 
그 풍성함을 알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삶의 문제를 만났을 때, 십자가로 가시면 돼요. 
다 치우고 십자가에만 집중하면 
그 십자가는 답을 제시해 줍니다. 어떤 문제도 답을 해 줘요. 

그래서 우리가 고난주간 뿐만 아니고 
일상 속에서 십자가를 붙들면, 가장 안전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놓치는 순간, 우리는 인생의 길을 잃어버리게 돼요. 
힘들고 어려울 때는.. 반드시 특별히 십자가 앞으로 가시길 바라고 

내 신앙이 좀 미지근해 졌다 그러면 
십자가 앞에 나아가십시오. 

그래서 1시간, 2시간.. 계속 십자가를 묵상하며 집중해 보십시오. 
아마 성령께서 뭔가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서 주신 말씀이 있을 겁니다. 
그러면 답을 얻게 될 줄로 믿습니다.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세 가지를 알고 싶어 합니다. 
첫째는 그리스도를 알고싶다. 
둘째는 부활의 영광 
셋째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 싶다.. 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 세 가지를 알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본받아 살아서 
어떻게 해서라도 그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고자 한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신자의 삶에 큰 주제죠. 

첫 번째는 그리스도 
두 번째는 고난 
세 번째는 영광 .. 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트라이앵글과 같아요. 
그리스도 -- 고난 -- 영광 ..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서로 굉장히 유기적인 관계 속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죠.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는, 반드시 고난과 영광이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라 갈 때, 고난 과 영광이라는 이 주제를 피할 수가 없어요. 
'고난 없이는 영광도 없다' no cross no crown 
우리가 많이 들었던 얘기죠. 

우리가 성도가 된 이후로 이 주제는 계속 우리를 따라다닙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이 있을 수가 없고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의미가 없는 것이 되죠. 
그래서 십자가와 부활은 연결되어 있죠. 

똑같이 고난과 영광이 동전의 앞뒷면 처럼 연결되어 있죠.
이것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 고난이 없이는 (부활의) 영광이 없다..는 거죠.

고난이 아무리 극심해도 영광이 있으면 
그 고난은 축복이 될 수 있죠. 

영광은 없고 고난만 있다면, 그것은 불행이고 비극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십자가가 있기에, 부활이 있고, 그 십자가가 더욱 빛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과 영광, 십자가와 부활은 한 짝입니다. 
   
◑고난(십자가)은 성도의 일상입니다. 데일리 루틴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데 왜 고난이 찾아오는가?' 
이렇게 질문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왜 신실하게 살아 가는데 형통함 대신에 고난이 찾아오는가?' 

그러나 여러분, 신자에게 고난은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고난은 그리스도인의 표식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다' 라고 얘기하는 그 속에는 
반드시 고난이 따라오게 되어 있어요.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피할 수가 없어요. 
마치 그리스도인 에게서 십자가를 빼버리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는 것이죠. 

그리스도 에게서 십자가를 뗀다.. 불가능한 얘기죠. 
그리스도인 에게도 똑같아요. 고난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리 주님은 
'할 만 하시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십자가를 목전에 둔 치열한 기도입니다.

사실 우리에게도 이 기도가 있는 것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이 고난을 좀 옮겨 주십시오. 피해가게 해 주십시오. 
고난과 상관없이 좀 살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주님은 피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기도하셨죠.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고난을 받아들이신 것이죠. 고난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시절에는 이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겠다'라고 하는 순간, 고난은 함께 따라왔습니다. 
그냥 필수였어요. 그냥 당연히 따라 온 겁니다. 
요즘 우리의 상황과는 많이 다르죠. 

물론 요즘도 무슬림권에서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 자체가 심각한 고난입니다. 
요즘은 (특별히 2001년 911이후로) 무슬림 선교가 어려운 이유는 
믿는 순간 어떻게 될 지 알 수가 없어요. 

바울 역시 당한 고난이 상당했습니다. 
감옥에 들락거리고, 고후 10장을 보시면 바울이 당했던 고난을 열거하는데,
어찌 그 한 문장으로 그가 당한 고난을 다 얘기할 수가 있겠습니까? 

초대교회 시대에는 예수를 믿는 순간 
고난은 너무도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소수였던 그리스도인들이 다수가 되고 
기독교가 힘(세력)을 가진 종교로 발전되면서 변질이 많이 일어났죠. 

언제나 숫자가 많아지면 변질이 오기가 쉽습니다. 
기독교가 종교화 될 때, 이게 변질이 일어난 것이죠. 

여러분, 신앙의 정체성은 언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받을 때.. 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내가 고난을 받을 때... 내 신앙은 확인될 수가 있는 거에요. 
'내가 정말 그리스도 인이구나!'

여러분, 내가 예수 믿음으로 찾아온 고난이 있어야.. 그게 진짜입니다. 
고난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돼요. 고난을 이상하게 이기면 안 된다는 거죠. 벧전4:12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를 미워하기 전에 먼저 나를 미워한 것이다.' 

딤후3:12 '무릇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예수를 믿기 때문에 손해를 보고, 억울한 일이 생기고 
괜히 미움을 당하고, 왕따를 당하고... 
이런 고난을 당해봐야. 내가 예수를 진짜 믿는 사람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귀는 "고난 없는 영광"을 약속합니다. 

마귀가 예수님에게 했던 그 유혹을 보십시오. 
'고난 없이 아들의 권세를 누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난 없는 영광' 그게 얼마나 매력적인 것입니까? 
'내가 땀을 흘리지 않았는데, 피를 흘리지 않았는데,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는데 영광을 받으면' .. 그건 대단히 매력적이죠. 

그런 마귀의 유혹은 우리에게도 매일 찾아오는 것입니다. 
웬만하면 다 넘어갑니다. 

'고난 없는 영광!' 그 유혹은 굉장히 매력적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고난이 없으면 영광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대가를 지불해야 된다는 거죠. 아니, 마땅히 지불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고난에서 영광으로 이어집니다.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셨다면, 우리에게도 고난은 당연한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의 필수적인 삶의 몫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십자가에 고난만 있는 게 아니에요. 
고난과 함께 영광이 따라온다는 거죠. 

롬8:17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상속자 라는 겁니다.
여기서 '상속'의 개념이 나오는데 
그냥 상속이 아니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 (공동)상속자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상속을 받을 때,
우리도 함께 상속받는데, 
 영광만 받은 게 아니라, 고난도 받으셨다는 거죠.

그래서 그리스도가 고난을 상속 받으신 것처럼 
우리도 고난을 상속 받게 되는 거죠.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 고난과 영광을 같이 상속받게 되는 거죠.

그래서 영광을 받기 위해서, 고난은 피할 수 없다는 겁니다. 
'나는 영광만 받겠다!' 그런 건 없어요. 

마귀가 늘 부추기는 유혹이 여기에 있습니다. 달콤한 유혹입니다. 
고난 없는 영광을 받으라는 유혹이죠!

말씀의 기준을 따라 살면, 세상에서 어려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왜요?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편리하게 만들어 놓은 구조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말씀대로 살면 딱 눈에 띄게 돼 있어요. 
진짜 신자처럼 살면 딱 눈에 띕니다. 안 띌 수가 없습니다.
눈에 안 띈다는 것은, 비슷하게 산다는 거죠. 
딱 눈에 띈다는 것은 왕따 되기가 쉽죠. 

그렇다보니, 세상에 휩쓸려서 살고 싶은 유혹이 찾아오는 거죠.
다르게 행동해야 된다는 것은 시비 거리를 만드는 거잖아요. 

하나님의 아들로 살려고 하면 고난이 있습니다. 고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고난이 오면 '올 것이 왔구나!' 해야 됩니다. 
이상하게 얘기하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는 고난에 단련이 돼야 됩니다. 힘든 게 정상입니다. 어려운 게 정상이에요.
불편한 게 정상입니다. 내 생각과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그게 정상입니다. 
언제까지요? 죽을 때까지 입니다. 

'어느 정도 믿으면 고난이 사라지겠지?' 
아니에요. 믿음의 강도를 높이면, 고난의 강도도 비례해서 높아집니다.
내가 쉽게 살려고 믿음의 강도를 낮추니까, 고난이 적당하게 오는 거죠. 

여러분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당하는 고난보다 훨씬 더 큰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

여러분 고난이 올 때, 십자가 앞으로 나가는 겁니다. 
내가 당하기 전에, 그리스도가 당하신 고난을 묵상 해봐야 하죠. 

히5:8~9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의 아들 이신데도 고난을 받으셨어요. 
예수님은 고난에서 고난으로 점철된 생애 였습니다. 
거절을 받으셨습니다. 핍박을 당하셨습니다. 멸시를 당했습니다.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그 고난을 통하여 순종함을 배웠고, 그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되셨습니다. 
여러분, 고난은 우리의 신앙의 길에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너무 편하게 예수를 믿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움츠려 들고 도망을 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데 고난이 없다면 무엇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그게 바로 형통의 신학 이고,

번영의 복음에 내가 물들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번영신학, 형통의 복음은.. 고난을 소화해내지 못하는 약점이 있어요. 
고난이 오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해요. 

'하나님이 나를 저주하셨나?'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고 아우성을 치는 거예요. 
죽겠다는 거죠. 

여러분 초대교회는 전부 고난이었습니다. 
고난은 저주가 아니라 신자의 표준이라는 거죠. 

▲고난을 부정적으로 보면 안 됩니다. 고난을 비극이나 불행으로 보지 마십시오. 
신자는 고난을 통과하면서, 신앙을 점검받게 하고 
고난을 통과하면서, 그 신앙이 정결해지는 것입니다. 

고난의 강도에 따라, 신앙의 질이 결정됩니다. 
고난을 통과하지 않으면, 신앙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도자기를 몇 도에 굽느냐에 따라.. 질이 달라지잖아요. 
고난을 피하지 마십시오. 그 안에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깊이 참여할 때, 신앙은 더 깊고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현재 고난이 오면, 장래 영광과 비교해 보시라

바울이 늘 경험했던 것은, 고난만을 본 게 아니에요. 고난이 전부가 아니었어요.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고난은 반드시 약속된 게 있는데.. 영광으로 들어갑니다.

고난은 영광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라는 거죠.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고 아이를 키우는 기쁨도 있지만 
그 아이를 통해 아픔도 함께 겪는 것이죠. 

우리가 사는 세상은 낙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고통하고 있고, 모든 피조물들이 신음하고 있다는 거죠. 
코로나19와 지진의 증가, 전쟁의 참상들이.. 그 일례죠.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고난으로만 끝난다면 우리는 비극이고 저주죠.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장래에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고난의 끝에 주어질 상속!
그것이 바로 하늘의 영광, 그것이 바로 아들이 받으신 영광이요. 
그 영광을 바울은 꿈꾸고 있는 것이죠. 

롬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생각하건대' .. 우리가 생각을 해야 됩니다.
'현재의 고난은 어떤 고난이 와도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

고난이 아무리 혹독하다 해도,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어요. 
이것은 단순한 꿈이나 희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바울은 그것을 소망하고 있었던 거예요. 

비록 지금은 고통하며 신음 중에 있지만 
반드시 완성될 그 나라, 구속의 날이 올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에, 염두에 두는 것은 무엇입니까? 
고난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점점 더 어려워져요

고난이 따라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고난 이후에 주어질 능력과 영광이 있다는 거에요. 

뿐만 아니라 주님은 우리가 고난을 우리 홀로 당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또한 고난을 이기는 능력을 주십니다. 

고난이 다가와도. 고난을 이기는 능력이 있으면 되는 겁니다. 
관건은, 고난을 피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어요. 

과연 고난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인가? 
있다면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 것인가? 
사람들은 고난이 닥칠 때 고난 너머를 보지 못합니다. 

그냥 고난때문에 그냥 그걸 끌어안고, 막 신음하고 끙끙거리다가 
고난으로 털썩 주저앉아 버립니다.

롬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여기 '비교'라는 단어가 나와요. 바울은 비교를 하는 거죠. 
지금 현재 당하는 고난과,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하니까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에 비교조차 할 수 없다는 거죠. 
게임이 안 된다는 거에요. 

현재 내가 당하는 고난의 무게가 엄청나게 크긴 하지만 
장차 나타날 영광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크다는 거죠. 

여러분 올림픽에 나가는 선수들이, 그렇게 땀을 흘리고 먹을 거 먹지 못하고 
그냥 집에 가지도 못하고, 데이트도 못하고 
젊은 날을 그냥 합숙을 하면서 수도사처럼 살아가는 이유가 뭘까요? 

그 장차 올림픽의 시상대에 서서 금메달을 따고 
그 영광을 받을 그 날을 생각하니까, 그 모든 걸 다 참아내는거죠. 
우리도 비교할 줄 알아야 돼요. 

히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는 비교할 줄 알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죠. 
우리는 항상 비교하고 선택합니다. 특히 물건을 살 때 늘 그렇게 하죠.
그러면서 왜 '현세의 고난'과 '내세에 받을 영광'을 비교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믿음 생활은 선택입니다. 언제나 선택할 때 비교해야 합니다. 
순간적 이익과 영원 사이에, 우리는 비교해야 합니다. 

이 비교검토를 잘해야 합니다. 
순간적 이익에 신앙을 팔면..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막10장에 나오는 한 부자 청년은 
천국과 재물을 비교해서 제물에 무게를 두어 버렸습니다. 
영혼을 돈에 팔아버린 것이죠. 여러분 비교할 줄 아는 것이 지혜고 능력입니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무엇입니까? 
좋은 것 때문에 더 좋은 것을 놓친다는 거죠.  The good is the enemy of the best
잠시의 쾌락과 영원한 즐거움의 차이를 비교할 수 없다면.. 그것은 비극입니다. 

여러분 바둑에서 9단을 '입신'이라 그럽니다. 
9단이 되면,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말입니다. 멀리 보는 것이죠. 

하수는 그 수를 왜 두는지 알 수가 없죠. 
수가 안 보이는 거죠. 
그런데 9단은 멀리 본다는 겁니다. 

지혜가 뭡니까? 멀리 본다는 거죠. 멀리 보는 사람이 이깁니다. 
눈앞의 현실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지금 어렵다고 결론 내리지 않습니다. 
지금 처한 상황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이나 자기계발서를 보면 공통적으로 '네가 네 스스로 극복할 수 있다'
라고 말하죠. 그러나 인간의 심리,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허약하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거죠.

여러분 신자는 그냥 버티는 사람은 아닙니다. 
용기가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용기가 언제 꺾여질지 모릅니다. 

무조건 버티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중요한 것은, 기대하는 것.. 그 기대하는 소망이 있는가? 하는 거죠. 
그 소망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여러분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기대는 다른 게 아닙니다. 
다가올 영광, 확실한 소망,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의 덩어리가 크지만 
다가올 영광의 무게가 훨씬 더 크기 때문에 

현실 속에서 고난에 짓눌리지 않고, 소망을 바라보며 
오늘 주어진 고난을 이겨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거예요. 

고후4:17절에 바울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란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바울을 보면, 그는 자신의 그 고난의 삶을 살아내게 만드는 
이 분명한 신학적인, 성경적인 원리를.. 확신하고 있었다는 거죠. 

지금 우리가 당하는 고난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가 알고 있습니다. 
고난에 대한 확실한 보상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고난이 고난으로만 끝난다면, 인생은 허무한 것입니다. 
결국 현재의 고난이 아니라, 미래에 일어날 일에.. 모든 게 달려 있습니다. 

현재 당하는 고난의 무게에 눌려 살 것인가? 
아니면 미래에 다가올 것에 더 무게를 두고 살 것인가? 
여기에 삶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현재의 고난보다, 미래의 영광에 무게를 두고 살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비교할 줄 알았던 사람입니다. 

장차 다가올 영광은 어떤 것인가요? 
C S 루이스는 그의 책 <영광의 무게>에서  The weight of glory
'우리는 너무 쉽게 만족하려고 한다'는 거예요. 

'우리의 욕망이 강한 것이 아니라, 너무 약한 것이 문제다' 
역설적인 얘기죠. 

훨씬 더 좋은 것이 있는데, 한심한 것에 집착하여 살아가는 
안타까운 인간의 모습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죠. 
훨씬 더 좋은 게 있는데, 하찮은 것들에 너무 쉽게 만족해 버린다는 거예요. 
 
우리가 지금 누리는 것 중에 아무리 좋은 것이 있다 해도 
그것은 하나의 모조품에 불과하며, 진짜는 따로 있다고 얘기합니다. 

'그 진짜는 우리의 미래에 주어지는 것이다. 
아침에 태양의 떠오르면, 모든 다른 빛들은 초라해지는 것처럼.. 
거대한 폭포수 앞에 주전자로 붙는 물줄기는.. 비교조차 할 수가 없죠. 

아무리 여행 중에 호텔이 좋아도 
잠시 휴식을 할 수는 있어도, 그것은 집이 아니에요. 
여행이 즐거운 것은, 돌아갈 집이 있기 때문이죠.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당하는 고난에 대해 주어질 합당한 보상에 대해서
<영광의 무게>라는 책에서 그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자기를 부인해야 하는 것입니까? 합당한 보상이 있기 때문에! 
왜 에고가 죽어야 합니까? 합당한 보장이 있기 때문에 

왜 나를 끊임없이 비우고, 끊임없이 낮아져야 하고, 종의 형태를 가져야 합니까? 
마침내 하나님이 그 자녀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높여주시는 
그날이 오기 때문에!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난에 대한 보상은 
올림픽에서 받는 보상과 비교가 안 됩니다. 

'아들이 받는 영광에 우리가 동참하게 된다'는 거죠. 
진짜 영광을 소망하는 사람이라면, 가짜 영광에 속지 않습니다. 
잠깐 지나가는 영광에 현혹당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주를 위해 살아갈 때 찾아오는 고난 당하는 것을 
즐거워하시기를 바랍니다. 

고난이 현재에 주는 유익이 있어요. 
이 땅에서 받는 고난이, 현재에 주어지는 유익도 있어요. 
고난이 올 때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그 집착에서 벗어나게 해 줍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자꾸 미련이 많아져요. 
남의 것도 계속 쓰면, 내 것처럼 여겨지는 것처럼...
 
빚도 오래 쓰다가 갚아주려면 아깝다고 합니다. 
당연히 갚아야 되는데, 오랫동안 내가 내 돈처럼 썼으니까요. 
붙잡고 있으면 미련이 생기는 거예요. 

살다보면 애착이 생기는데.. 고난이 그걸 다 떼 내어주는 거예요. 

여러분  말기 암이나 6개월 최종 선고를 받으시는 분들은,
다른 것에 이제 다 이제 집착이 없어져요. 
이제 뭐 얼마 안 사는데 뭘 붙들겠어요? 

여러분, 고난은 삶을 진지하게 만듭니다. 고난은 인격이 깊어지게 합니다. 
인간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지게 해요. 

고난 당하지 않은 사람은, 사람을 이해하는 폭이 너무 좁아요. 
고난을 모르면, 인격이 깊어지질 수가 없습니다. 기고만장하고요. 
고난을 모르는 사람은, 늘 우쭐대고, 남을 함부로 대하고, 진지하지가 않아요. 
편안하기만 하면, 여러분 사람은 금방 경박해집니다. 
기도도 건성으로 하고요. 

고난은 영혼의 성장에 필수 영양소와 같습니다. 
고난의 용광로에서 단련된 삶의 인격은 다른 것입니다. 

고난은 본질에 충실하게 만듭니다. 
불순물이 제거되고 나면, 삶의 핵심이, 본질이 눈에 보이잖아요. 

인생에 초점이 정확히 맞춰집니다. 불필요한 욕심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신자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됩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고난을 통해 기도가 깊어지고 
고난을 통하여 믿음이 자라게 되고, 고난을 통하여 말씀이 말씀으로 
깨달아지게 되는 은혜가 있어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119:71

고난은 우리의 시선을, 현재에서 미래로 데리고 가는 거예요. 
잠깐 뿐인 이 세상이 아니라, 여기에 집착하는 인생이 아니라 
우리의 시선을 영원에 두게 하시는 고난... 

그러므로 고난에 너무 절망하지 마십시오. 
어떤 때는 의문스러운 고난도 있습니다. 
고난이 깊어질 때, 우리는 질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답을 모두 얻을 수 없어요. 
우리가 할 일은, 하늘의 영광에 시선을 두는 것입니다. 

어떤 신자에게는, 너무너무 착하고 
너무너무 신실하고, 너무너무 믿음 생활을 잘 하는데도 
찾아오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있을 때, 우리는 설명할 길이 없어요. 

그러나 현재는 설명이 안 되지만, 미래에서는 반드시 설명이 될 거에요. 
왜? 하늘의 영광이 있기 때문에! 

고난이 깊어질수록 우리의 영혼은 더 성결해지며 
우리의 시선이 더 하늘을 향하게 됩니다. 

고후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십자가를 아는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

바울은 그의 삶의 목표가,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했습니다. 

빌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바울은 최상급을 사용합니다.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이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보다 더 높은 것은 없습니다. 최고의 지식이에요. 
그 안에 모든 게 감춰져 있기 때문에! 

골2: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춰져 있느니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질 때, 다른 지식도 비로소 유용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누구나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비치는 영광의 광체는, 다이아몬드처럼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빛을 뿜어냅니다.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아는 만큼,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그만큼 믿음이 깊어집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은혜를 받고 대단한 은사를 체험했다 할지도 
그게 십자가가 아니라면, 그것은 일부 중의 일부에 불과한 거예요. 

성경안에서 아무리 심오한 것을 깨달았다 해도 
그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라면, 지극히 한 부분에 불과한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말하는 것이 그거에요. 
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지식을 알아가고자 하는 열망이 
그 속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강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깁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머리로 안다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의 삶으로 안다는 거죠. 우리의 삶으로, 우리의 인격으로 '아는' 거죠. 

우리의 신앙이 진부해지고, 우리의 신앙이 맴돌고, 활기가 없고 
생동감이 없고, 기쁨이 없고, 그런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가 뭘까요? 
우리가 그리스도를, 그 십자가를 전인격적으로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리가 전인격적으로 아는 이 길은 
그냥 성경공부를 한다고 알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결돼 있어요. 그리스도의 고난과 연결돼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십자가를 경험할 때,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때,
2천 년전 사건이, 오늘 현재적 사건으로 경험되어지는 것입니다. 

갈2:20절 오늘 우리에게 경험되는 거예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2천 년 전의 사건이, 오늘의 나의 사건으로 그대로 재현되는 경험! 

마치 내가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내가 마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처럼 
나의 온 영혼을 휩싸고 감도는, 나의 모든 삶을 흔들어 놓는 충격적인 경험!

갈2:20절이 경험되어진 사람은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고 
그 그리스도의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발견하게 되는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이죠.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저는 이 대목이 너무 좋은 표현이라 봅니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어떤 세상에서도 들을 수 없는.. 경험할 수 없는.. 
환난은 환난이죠. 환난은 지옥이죠. 그러나 미래를 바라보니 즐거워하는 겁니다.

결국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알기 때문이다. 
구원의 완성의 소망,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아는 소망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경험할 수 있는 언어입니다. 

'환난은 인내를'
고난에 대한 맹목적인 인내가 아닙니다. 명확한 목표가 있어요. 
우리는 고난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더 깊이 그리스도를 알아가게 되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험의 강도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탁월하신 분입니다. 
고난의 강도가 크다면, 내가 그만큼 컸다는 얘기에요. 
하나님은 감당할 능력을 주십니다. 

신앙생활의 묘미 중에 하나가 무엇입니까? 
고난을 다룰 줄 알게 됐다는 거예요. 

이전에는 고난이 닥치면 정신이 없었어요. 그냥 고스란히 당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생활이 깊어지면서, 
고난의 무게에 이제 그대로 짓눌리지 않아요. 
그 무게를 가볍게 다룰 힘이 내 안에 생겨 있어요. 

고난이 닥쳐올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그게 은혜이에요. 
고난을 나 혼자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와 함께 지고 가시기 때문에 
고난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은혜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감당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는 말 / 바울은 그리스도를 따라 살고 싶어졌습니다. 
바울은. 부활의 권능을 알기 위해  
그때 그리스도의 고난에도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바라보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고난이 올 때 약해지지 마십시오. 때로는 흔들릴 수 있습니다. 
'(고난을 피해) 쉽게 가고 싶다'는 유혹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믿음으로 버텨내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끝까지 버텨내면, 반드시 소망(내 구원의 완성)이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어려움이 온다고 약해지면 안돼요. 여러분, 버텨내셔야 돼요. 

결혼 적령기에 있거나, 혹은 결혼시기가 지난 자매들이 있다면 
결혼상대를 고르는 일이 중요한 일이죠. 마음이 조급해질 수 있습니다. 

신앙을 빼버리면 쉽게 고를 기회가 찾아올 수도 있어요. 
그러나 약해지지 마십시오. 신앙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재정적으로 돈을 좀 더 모을 수 있습니다. 그런 기회는 언제나 찾아오죠. 

믿음을 따라 살다 보니, 주일은 문을 못 열고, 
세금은 낼 것 다 내고, 종업원들에게도 제대로 챙겨주다보니 
나에게 들어오는 게 적어요. 
아이들 키우고 생활하는데 여유가 없어요. 힘들어요. 현실적인 문제죠. 

예수만 안 믿으면, 조금 적당하게 이렇게 저렇게 편리하게 융통성있게 하면 
조금 더 돈을 벌 수 있고,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물론 그냥 고난을 참는 게 아닙니다. 소망가운데 인내해야 돼요. 
우리는 기쁨을 유보하는 사람들입니다. 즐거움을 유보하는 사람들이에요. 
만족을 (미래로) 유보하는 사람들입니다. 

장차 다가올 영광이 있기 때문에,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하는 날이 반드시 옵니다. 

다가올 영광에 눈 뜬 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지금 우리가 겪는 시험과 고난은 지나갈 것입니다. 곧 지나갈 것입니다. 

조금의 편안함, 조금의 행복을 추구하다가 
진짜 행복, 진짜 만족, 진짜 기쁨을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에 눈뜬 자로 살아가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찬송을 부르겠습니다.